[데일리 에필로그]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남긴 것들

2010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대망의 막을 내렸다. 폐막 하루 전날인 지난 27일 아직 냉기가 감돌고 먼지가 흩뿌려진 극장 카페테리아에 8명의 데일리, 에디터팀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번 영화제와 그간의 활동을 돌아보는 마지막 모임인 셈이다. 웹데일리팀과 관객에디터들은 예년보다 길게 이뤄진 한 달 반 시간 동안 갖가지 영화제 소식을 알리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관객후원 모금운동까지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이들 모두는 이번 영화제가 영화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고민하고 생각해볼 수 있었던 자리였으며 시네마테크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장이었다는 한 목소리다. 유난히 길고 여전히 끝이 아닌 친구들 영화제를 마치면서도 극장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했던 데일리/에디터 친구들의 이야기를 여기에 옮긴다.



신선자(웹데일리 편집/관객에디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때마다 웹데일리를 통해 소식을 전한 지는 3년 정도 되었다. 이번은 특히 좀 남다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 같다. 영화제를 마감하면서 각자 개인적으로 느끼는 바들이 많았을 것 같다. 데일리팀은 준비기간부터 치면 두 달여의 기간이 흐른 셈이다. 각자 이번 영화제 기간 동안 관객모금운동 자원도 하고 영화도 보고 글도 쓰고 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 인상 깊게 생각했던 부분들이나 이번 영화제 기간 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에 대해 느끼는 바를 한마디씩 자유롭게 이야기 봤음 좋겠다. 나부터 간단히 말해 보자면 사실 우리가 운영하던 웹데일리가 친구들 영화제의 소식지인지 시네마테크 사태에 관한 논의의 장인지 모호하다는 느낌도 약간 있었다. 장단점은 있었던 것 같다. 해야 하고 필요하다 느껴 일을 했지만 개인적으로 좀 피곤하기도 했다. 영화는 그래도 꽤 봤긴 한데 영화 보면서 영화에 집중하기보다는 다른 부분들을 신경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후회하진 않지만 이런 상황에 봉착한 현실이 짜증나긴 했다. 결과적으로 처음에 후원모금 활동 시작하면서 모금액자체가 목표했던 금액의 1/10수준이지만, 그 전에 후원모금으로 모아지는 금액을 비교해보면 한 달 여간 짧은 기간 동안 성과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눈앞에 보여지는 돈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네마테크라는 공간의 성격이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성과가 아닌가 싶다.
홍성원(관객에디터): 예전에 CMS로 시네마테크를 후원해주신 분들 이름을 오프라인 소식지를 통해 보았는데 짧은 기간에 많이 모였으니 이젠 너무 많아 세어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웃음)
선자: 시네마테크 문제가 작년 친구들 영화제가 불거져 나왔고 CMS 제도를 그때부터 시작해서 1년 동안 대략 100명 정도 모였다고 하는데, 보다 긴박한 상황이 되어 우리 관객들 스스로 모금운동을 펼치면서는 그 수가 거의 배가 되었다. 후원금도 두 배정도 모인 거다. 기존 CMS 후원회원의 모금액까지 합치면 이제 안정적으로 대략 한달에 4, 5백만원 정도가 시네마테크를 위해 쓰여지게 된다. 완벽한 독립은 어렵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호응을 얻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성원: 액수로 따지면 적을지 모르지만, 모두가 같이 도와주시는 분들이었으니까 여기까지 가능했던 것 같다.

박영석(웹데일리/관객에디터): 이번 영화제는 길고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상황이 급변했었고 처음에는 데일리에 영화에 관한 글만 쓰면 한가해지겠지 싶었는데, 그 다음에는 소식지를 준비해야했고, 소식지 준비가 끝나자마자 영진위 일이 터지고 전용관 문제 등이 다가왔다. 동시에 독립영화전용관이랑 미디액트일도 생겼다. 기분이 내내 이상했다.
강민영(웹데일리/관객에디터): 사실 나는 작년부터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너무 극장에서 보고 싶었다. 작년 무성영화들을 챙겨보면서 내가 도대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날이 과연 올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영화제 상영작 목록에 있는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뻤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번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들을 보면서 소중한 것을 손 안에 꼭 쥐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최혁규(관객에디터): 개별 영화에 대한 느낌이라는 것보다 영화 자체에 대해 소중하게 느껴졌던 게 너무 좋았고 영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 것 같다.
영석: 나도 비슷한데 주로 어떤 영화가 어떤 뜻을 담고 있냐에 대해 생각했다기보다 극장일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모금운동하면서 만난 사람들도 있고 하니까 영화가 도대체 무엇인가, 시네마테크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면서 두 달을 보낸 것 같다.
성원: <뱀파이어> 시네토크 때 정성일 평론가는 <뱀파이어>를 ‘내 생애의 영화’라고 표현했고, 크리스 후지와라도 프리츠 랑의 영화를 보며 영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었다. 관객들뿐 아니라 영화를 추천한 감독이나 평론가들도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선자: 그런데 영화는 다들 볼 만큼 봤는지 궁금하다. (일동 고개 끄덕 끄덕, 웃음)
혁규: 틈나는 대로 보긴 했는데 사실 영화를 봤단 느낌이 안 든다. (웃음)
영석: 그나마 영화제 후반부에 몰린 존 포드 영화를 보면서 ‘아 내가 영화를 보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긴 했었던 것같다.
성원: 나는 이번 영화제에서 존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카르멜로 베네의 <카프리치>빼고는 다 챙겨봤다.
장지혜(웹데일리): 난 사실 이번 영화제는 완전정복을 꿈꾸었는데, 여러 일들이 생기면서 완전정복은 물 건너 갔구나 했다. 언론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관객발언 때도 그렇고 나는 항상 서울아트시네마가 소중한 공간이고 가치 있는 공간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근데 그 이야기를 한번 내뱉고 마는 게 아닌지 고민스러웠다. 그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치가 어떤 것이고, 또 이야기를 해놓고도 질문이 다시 돌아오고 다시 생각하게 되고. 영화제 시작하며 영화 리뷰 등을 열심히 쓰고 작품 분석해야지라는 생각만 했다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영화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보게 된다.

성원: 영진위의 처사는 분명 잘못된 것인데 오히려 그게 소중한 공간이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기회를 제공해준 것 같다.
영석: 연대감이 생성된 거지.
민영: 처음 모금부스를 운영할 때는 우리 데일리, 에디터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였지만 자원봉사하겠다는 친구들이 하나씩 늘지 않았나. 그 친구들 중에 가은이나 예하, 재욱 같은 경우는 다들 고등학생이고 한데 추운 날에도 나와서 도와드릴 것 없냐고 물어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마음이 참 짠했다.
지혜: 고등학교 친구들뿐만 아니라 카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닉네임으로만 알았던 분들과 이야기하는 것들도 좋았던 것 같다.
영석: 시네마테크가 친구들을 만나는 공간이라는 걸 절실히 깨닫게 된다.
성원: 얼굴만 보고 간단히 인사만 건네던 사람들이 함께 극장을 걱정하고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김보년(웹데일리): 나는 이번 일이 터지면서 사람들을 본다는 것 자체가 되게 중요한 경험이란 생각을 했다. 서울아트시네마 관객들이 유난히 많이 웃지 않나. <사냥꾼의 밤> 같은 경우도 영화를 보면서 엄청 웃었다. 사실 한 번 웃을 거 괜히 두 번 웃고 하는 것 같아 싫기도 했고 그런 게 때때로 감상에 방해를 주고 그랬는데 되돌아보면 참 좋은 경험인 것 같다. 사람들과 같이 영화 본다는 게 특별한 경험이구나, 영화 이상의 특별한 경험이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성원: 예전에는 그런 것 싫다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심각하게 영화를 보고 있는데 남들이 큰 소리로 웃으면 흐름이 깨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지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보면 마음에 약간 여유가 생기고 한 번 웃을 것도 두 번 웃고 그러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좋다.
보년: 때때로 과시적으로 웃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 때도 있다. (웃음)
영석: 특히 <뱀파이어>는 완전무성이었는데 모두가 낄낄거리며 웃지 않았나. 그런 경험을 할 곳은 여기밖에 없다.
성원: 영화를 그냥 심심풀이가 아니라 좋은 걸 보러가는구나 할 때 느끼는 기대감이나 이런 게 서울아트시네마에는 있는 것 같다.
보년: 서울아트시네마의 관객들은 질문도 터프하게 하는 것 같다. (웃음) 친구들 영화제 기간이어서 사람이 많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당장 다음 주 되면 또 바뀌겠지.

영석: 데일리하면서는 사실 우리가 쓴 영화리뷰보다 기사들을 더 열심히 읽었다. 영화보다 워낙 기사들이 드라마틱하다보니까.
보년: 프리뷰를 드라마틱하게 쓸 수는 없잖나. (웃음) 트위터를 통해 사람이 엄청 많이 들어온 날도 있었는데, 여하튼 이번 사태들 때문에 데일리를 찾아보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
선자: 이번 데일리에는 카테고리에 변화가 심하게 있진 않았지만 추가된 건 관객 후원릴레이 정도였는데, 정말 사건사고가 많았으니 그 뉴스들을 읽는 재미 또한 쏠쏠했던 것 같다. 가장 많이 언론에 노출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혁규: 데일리 뿐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대해서 궁금했다. 아침에도 그렇고 뭘 하든 간에 계속 변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극장 밖에 있으면서도 극장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 같이 기사보고 같이 화도 내고 그런 게 참 재밌었는데 말이지.
선자: 영석이 말대로 정말 드라마틱한 날들이었다. 영화보다 TV보다 임시국회가 더 재밌지 않았나? 그런데 여러모로 시네마테크에 대한 인식은 넓어졌으나 명증하게 설명되지는 못했던 부분들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는 관객이고 자원봉사 차원에서 활동을 한 것인데,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 수위 조절을 잘 못했던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다. 인터뷰를 받을 때도 어떤 친구는 사무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꼭 우리가 운영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것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서 그런 면도 있다. 그때마다 우리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생각을 했다. 원하고 스스로 필요하다 생각했으니까 이 일들을 진행하고 다들 수고하면서 고생했는데, 운영적인 측면에서도 원활하게 쉽게 할 수 는 방법을 우리가 찾지 못한 것도 있다면 추후에는 그런 지점들을 제고해봐야 할 듯 하다. 어쨌든 오프라인 모금부스는 이번 영화제를 끝으로 정리한다. 보년 씨 이야기처럼 다음 주면 또 다른 일이 시작되겠지. 시끌벅적했던 극장이 조용해질지도 모를 일이이고. 영화제를 끝맺으면서 이걸 어떤 식으로 마무리 시켜야 또 다른 시작을 잘 맞이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연계하는 게 좋을까라는 생각. 그런 부분의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데.
성원: 예전에 할아버지 한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서울아트시네마의 관객회원제도는 기간이 끝나면 언제 끝나는가에 대해 안내를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시더라. 메일로도 안내를 안 해주고 소식도 알려주지 않고, 이건 고쳐야 하지 않나.
혁규: 후원회원은 기간 여부에 상관없이 메일로 안내되지 않나?
선자: 확인하지 않으면 사전에 알지 못하는 게 있긴 하다.
영석: 그런 경험 나도 있었다.
지혜: 관객회원에 가입하면 온라인으로 로그인해서 기록들을 볼 수 있고 마이페이지가 뜨는 게 가능하면 좋을 텐데. 그리고 우리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모호한 위치였던 것 같다. 모금활동을 진행한 사람들이 분명 필요한 부분이긴 한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같은 관객이지만 모든 사람이 여기의 친구들 같지 않으니 거리감이 생겨서 관객들조차도 관계자에게 정보를 묻듯이 우리에게 질문하곤 한다. 그런걸 보면서 우리가 만든 거리감은 아닌데 의문이 들었다. 모두 같이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영석: 관객으로서는 어디든지 말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주체이기 때문에 다른 데서 빌미를 잡힐 만한 위험성 있는 행동들은 자제를 해줘야 한다. 책임감도 동시에 있는 것 같다.
성원: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건 맞는데 한쪽으로 쏠려있으니까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정치적성향이 강하다보니까 정치적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으로 빠질 수도 있고.
영석: 각종 상관없는 매체들에서 우리 얘길 기사화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한 얘기가 아니고 의견이 모아진 것이 아닌데도 같은 부류로 모아서 비판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를 전제한 후에 고민해야 한다. 모금부스는 끝났지만 이후에도 홍보활동을 어떻게 할 건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선자: 우리의 활동이 훨씬 더 긍정적인 성과를 내왔다는 것은 분명한 듯 하다.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이지만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가능성이 많고 오히려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일단 지혜도 얘기했듯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아 그리고 우리는 이번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런 모임들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혁규: 예를 들면 바자회 같은 거.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우리가 지속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진행할 수 있다면 좋은 것 같다. 자연스레 관객 만남도 이뤄지고. 관객차원에서의 행사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니까.
민영: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광주극장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끼리 모여서 간식도 먹고 베이킹 파티도 하고 했었다. 같이 뭔가를 만들고 나누기도 하는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참 좋아보였다.
성원: 지금까지는 관객들이 선택한 영화가 친구들이나 시네바캉스때 상영했는데, 관객들이 원하는 영화를 DVD로라도 한 번씩 편히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상영이 없을 때 날을 잡아서 말이다.
혁규: DVD로 틀면 영사실에서 장비를 빌려와야하는 문제가 있다.
영석: 자막이 없을 경우에 우리가 자막을 만들어야하긴 한다.
신윤하(웹데일리): 관객들이 자체적으로 시네클럽을 결성하는 건 어떨까. 적정한 강의비만 내서 극장이나 카페 등 장소를 잡아서 모여서 지식을 공유하거나 강사를 초빙하는 행사. 그런 행사들이 별로 없었다.
성원: 학교강의실이나 이런 곳을 빌려서 해도 좋을 것 같다.
선자: 시네클럽이든 바자회든 뭐든 좋을 것 같다. 이제 다시 시작이니까 관객들이 지금처럼의 결속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웹데일리는 이제 시네마테크의 이후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는 웹블로그로 전환 계획에 있다. 우리의 만남이 여기서 끝이 아니고 앞으로도 더 많은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지난 한 달 반간의 영화제를 통해 모두 조금 성숙해진 느낌이다. 고생해서 그런가. (웃음) 이후에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났음 한다. 모두 고생 많았다. (정리: 강민영)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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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위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본 비평가 크리스 후지와라의 존 포드 강연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대미는 미국의 비평가인 크리스 후지와라가 장식했다. 지난 26일에 이어 27일 저녁에는 그의 두 번째 선택 작인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람> 상영 후 후지와라와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포드의 작품 중 가장 기이하다는 평가를 받은 <말 위의 두 사람>을 좋아한다는 크리스 후지와라의 강연은 <말 위의 두 사람> 팬들에게는 영화만큼 흥미로운 자리였으며, 존 포드 영화로는 이상하다고 여긴 관객들에게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말 위의 두 사람>이 갖고 있는 매력과 존 포드란 인물에 대해 꼼꼼하게 짚어준 크리스 후지와라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람>을 이번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에서 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 씨께서 선택해주셨다. 이 영화는 몇 분의 열렬한 지지층이 있는 반면 존 포드 영화중에서 가장 심심한 영화 또는 <수색자>라는 뛰어난 영화를 만든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이상한 컬트영화에 속한다. 포드 영화 같지 않다는 평도 들은 바 있고 작품에 대한 애호가 유독 나뉘는 작품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흥미로운 자리가 될 것 같다. 이 영화를 선택하신 크리스 후지와라 씨를 모시고 존 포드와 <말 위의 두 사람>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크리스 후지와라(美 영화평론가): 이 영화는 좀 특이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포드 영화로는 마이너 영화로 간주되었고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의 내용을 가지고 비슷하게 반복한 영화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영화라고도 하였고, 상반되는 요소들이 많은 영화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포드는 이 영화를 통해서 이전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영화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포드는 이 영화를 통해서 미국과 개척사회, 백인들의 사회, 코만치 인디언들의 사회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포드가 만든 이상적인 서부영화에서 등장하는 군대도 등장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의 많은 요소들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거기에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61년에 만들어졌는데 1956년에 만든 <수색자>와 굉장히 비슷하다. 두 영화 다 코만치 인디언들에 의해 잡혀간 백인 여성 또는 소녀들을 다시 찾아오려는 노력에 관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굉장히 다르다. <수색자>의 경우는 나탈리 우드가 열연했던 데비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고 굉장히 감동적으로 환영을 받게 돼서 나중에 적응을 하고 사회에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이 영화에서 엘레나는 거부당한다. 엘레나라는 캐릭터가 코만치와의 육체적인 관계에 의해 정의 내려졌고 변절된 사람 더 이상 순결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수색자>에서 존 웨인의 캐릭터는 인종차별주의자로 인디언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끝에서는 그마저도 ‘데비를 죽이지 않겠다’라며 인종차별주의자적인 생각을 초월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방금 본 영화에서 러닝울프라는 10대 소년은 사형을 당하는데, 이것이 마치 심판과 변호인이 있었다는 정의로운 재판의 결과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백인들 깊은 내면에 있는 폭력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백인들의 타고난 폭력성이 발산된 장면에서 마치 공포 영화 같은 분위기가 된다. <수색자> 물론 무서운 영화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수색자>의 경우 최소한 같이 화합해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반면에, 이 영화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부 비평가들의 말처럼 포드의 이전 영화와 다른 더 어두워진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 인종들이 화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포드 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요소는 아니다. 거스리 맥케이브 역을 한 제임스 스튜어트와 엘레나가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끝 장면은 1939년에 만들어진 <역마차>와 비슷하다. <역마차>는 이전에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사회가 버린 여자와 무법자 존 웨인이 마을을 떠나서 서부로 가는 모습이 나온다. 굉장히 유명해진 마지막 대사가 있는데 ‘그래도 최소한 이 사람들은 문명의 축복으로부터 구제를 받은 것이다’라는 말이다. 1939년에 만들어진 <역마차>에서조차도 백인들이 서부에 와서 보여준 사회의 모습이 이미 부패된 사회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위선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또 반복되는 요소가 있는데, 초반에 보면 제임스 스튜어트가 다리를 난간에 올려서 꼬고 앉아 있는 거다. 이것은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로 나왔던 헨리 폰다의 모습과 비슷하다. 여기서 왜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64년에 만든 <샤이안>에서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황야의 결투>에서 헨리 폰다가 했던 와이어트 어프 역을 맡은 바 있는데, 폰다와 굉장히 다른 것이, 폰다가 맡았던 와이어트 어프는 OK목장에 가서 적을 상대하고 서부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영웅이 되는 반면에, <샤이안>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은 와이어트 어프는 행동을 거부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냥 카드만 치고, 위기의 순간에는 떠나버려서 개입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이상 예전에 알려졌던 영웅이 아니고 이제는 안티-히어로 역할인 셈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결과다. 그래서 난간에 다리를 올리고 뒤로 기대고 있는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받아드려야 되느냐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맥케이브를 <황야의 결투>에 나온 와이어트 어프와 비교해서 그보다 못한 사람으로 봐야 되는지, 포드가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지라는 의문이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영화 끝에 다시 나오는데 이번에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아니라 좀 더 어리고 우스꽝스러운 엉뚱하고 코믹한 캐릭터로 나온 워드다. 워드가 이제 보안관이 된 상황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는데, 워드가 이 자세를 취한 것은 포드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사람들에게 던진 대답이라 볼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이 포드가 자기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하는데, 포드는 이미지 그 자체로는 순수함이나 가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단지 이미지일 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언제든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보고 마음에 들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애착이 가는 캐릭터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그래서 행복하거나 만족한 상황에 머물길 원하는데, 포드는 이것을 거부하고 이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며 그런 것에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이런 이미지들이 꼭 필요한 이유는 다른 단계, 차원의 진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손짓이나 몸짓, 행동, 언어, 언어의 실패 또는 문제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보면 내러티브 측면에서 몸짓이나 손짓, 행동 또는 언어에 있어서의 자유가 나타난다. 포드는 이전부터 추구하던 것들로 그의 초기 무성영화들에서도 특정 제스처가 나오는데 이 제스처들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반복 되서 나타난다. 마치 의식과도 같아 보인다. 갈수록 그의 영화에서 이런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말 위에 두 사람>에서는 마치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과 캐릭터들을 보는 관점이 굉장히 포드답고 순수한 영화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리처드 위드마크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타사코사 마을을 떠나기 전 강가에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3분정도 컷 없이 진행되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이 장면을 거론한다. 여기서 두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지만 중요한 것은 위드마크가 스튜어트에게 결국은 왜 가기로 결정하기로 했냐는 질문이다. 스튜어트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긴 하지만 그 장면 길이의 3분이 거의 다 지나서야 대답을 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간접적인 접근 방식이 굉장히 포드다운 방식이다. 직설적으로 문제를 다루지 않고 오랜 시간을 걸쳐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끊기고 끊기면서 대화가 진행된다. 결국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간에 끊기게 하는 것들에 집중을 하게 만든다. 시가를 피운다든가 벨이 다리에 차고 다니는 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든가 등 손짓, 몸동작, 겉으로 보기에는 즉흥적인 행동에 의해 계속 대화는 끊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결국은 대화 내용의 앞에 나서게 되면서, 스튜어트의 대답은 뒤로 밀려 끝에 나오게 된다. 이 장면이 대단한 것이 두 배우간의 리듬감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훌륭한 재즈 대가들이 같이 연주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즈 뮤지션들처럼 각자의 스타일로 연주를 하면서도 화합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위드마크의 경우 굉장히 단절되어 짧게 말을 하고 스튜어트는 광범위하게 편하게 얘기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느낌을 주는데 그 둘의 앙상블이 돋보인다. 이 장면은 제목과 관련된 것도 표현해 주고 있다. 위드마크의 ‘왜 가기로 했냐’는 질문을 바꿔서 얘기하자면 ‘왜 우리 두 사람이 타고 가야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 보면 말을 타고 어디로 간다는 것보다 둘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여정이 중심이 되는 내러티브를 가진 서부영화들, 특히 포드가 만든 영화들은 풍경의 아름다움이 중요시되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상징이 기본적으로 들어있다. 그러나 <말 위의 두 사람>에서 여정은 굉장히 단순하고 풍경에 대한 강조도 없으면 오히려 영화 안에서 여정은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아까 말한 것처럼 여기서는 말을 타고 어디 간다는 것보다는 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리차드 위드마크를 커플로 봤을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왜 둘이 친구인가’라는 점이다. 영화 초반을 보면 서로 이미 알고 있던 사이고 어느 정도 서로 애착도 있는 사이로 나타나지만 둘에 과거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그리고 영화 후반에 가서는 굉장히 적대적으로 변해서 우정이 계속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편에서 스튜어트가 겉치레식으로 경례를 하니까 위드마크가 그만하라고 하면서 우린 너무 오랫동안 친구였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아니 도대체 우리가 친구라는 생각을 했냐고 반박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구나, 원래는 친구였지만 일어난 일 때문에 관계가 틀어졌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후반부 무도회 장면에서는 적대적인 둘이 다시 친구가 되는데, 전에 싸웠던 것을 대화로 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시 친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다시 친구가 되는 것이 포드다운 방식이다. 문제가 있었을 때 얘기하거나 해결하지는 않지만 이 두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같기 때문에 다시 합칠 수밖에 없다. 둘의 우정은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전에 강가에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에서 강은 둘의 우정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포드가 갖고 있는 우정의 개념은 하워드 혹스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다르다. 혹스 같은 경우는 두 남자 사이의 우정에 관해서 직설적인 발언을 꼭 하게 된다. 그런 발언이 없을 경우에는 <스카페이스>처럼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죽이는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게 된다. 반면에 포드는 우정이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둘이 스크린에 모습이 나타나는 것만으로 우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어떤 대화나 의식이 전혀 없다. 그의 후기작인 <독수리의 날개>에서 존 웨인과 댄 데일리의 모습을 보면 진정한 우정 관계라고 볼 수 있지만, 둘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나 친밀감은 직설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둘이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만 묘사된다.

 

이제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많고 사랑받는 배우였다. 그렇지만 포드처럼 그의 연기를 지휘한 감독은 없었다. 그가 평상시에 말을 더듬고 주저하는 것처럼 반복하는 것을 극에 달하게 해서 일종의 비주얼 패턴처럼 보이도록 한다. 포드는 그의 말에서 보이는 언어의 매너리즘 조차도 제스처로 보이게 한다. 언어도 제스처처럼 개인적인 언어를 이용해서 말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서부영화하면 떠오르는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에서 탈피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일부 비평가들이 냉소적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일 텐데 오히려 저는 심오한 사실주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포드가 이전의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세계의 발달 과정에서 당연한 결과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 영화가 실제 만들어진 60년대 초, 그 때 당시 미국의 역사와 인종문제, 그리고 사람들 간의 분단을 다루고 있다. 또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사실주의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마을로 돌아온 다음에 존 맥킨타이어가 분한 프레이저가 말하기를 ‘내가 가르쳐주지 못한 것을 자네가 가르쳐주기를 바랐다’라고 했다. 이 말은 ‘신만이 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대사를 듣고 떠오른 것이 <아파치 요새>에서 헨리 폰다가 말하길 ‘군대를 지휘하려면 제대로 지휘를 해라’라는 말인데, 말하자면 ‘신이 되려면, 신이 되어라’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할리우드라는 영화의 중심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인 존 포드가 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존 포드인 나도 신의 역할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거와 같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 초반 맥케이브가 의자에 앉아있는 장면에서 맥케이브를 포드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포드는 30년 대부터 시력이 굉장히 나빴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60년대 가서는 거의 장님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자기가 못 봤다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봤다고 얘기해서 사람들이 무서워하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장님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봤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다면 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했다. 초반부 장면에 마을을 차지하러 온 두 도박사는 맥케이브를 무시하면서 ‘눈이 있지 않냐’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자면 ‘장님이냐 이 병신아’라는 심한 말을 하는거다. 맥케이브는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다 알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맥케이브가 하는 행동은 마치 감독이 하는 행동과 비슷하다. 맥케이브도 감독처럼 미션을 가지고 떠나는데 이것은 위험도가 높고 성공할 가능성이 낮으며,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예측불허의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서 관객에게 제시하듯이 이 영화 속에서 맥케이브는 두 명의 포로를 데리고 온다. 영화 속의 맥켄들러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이 부인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거짓말을 통한 위안이라고.” 부인에게 주는 것이 영화가 주는 거짓말과 같다. 특히 서부영화에서는. 그래서 관객이 받는 것 또한 거짓말 속의 위안이다. 현실감각이 뛰어난 포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중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거짓으로 재현한 것으로 위안을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존 포드는 말하자면 의식의 대가이다. 왜냐하면 엔터테인먼트 역시 또한 의식이어서다. 이 의식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영화에서 재현되어서 잊을 수 있게끔 해주는 거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들 때 포드는 사람들이 과거의 일을 잘 잊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말 위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본 존 포드 강연을 들어줘서 감사하다. (정리: 신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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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크리스 후지와라의 선택, <이유 없는 의심> 비평 강연

지난 2월 26일, 시네필의 선택 섹션에 마련된 프리츠 랑의 <이유 없는 의심> 상영 후 이 영화를 선택한 미국의 영화평론가인 크리스 후지와라의 비평강연이 있었다. 크리스 후지와라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프리츠 랑의 팬이며, 특히 <이유 없는 의심>을 그의 생애 베스트 10 편의 영화 중 한 편으로 꼽기도 했던 인물이다. 두 시간 가깝게 진행된 이날 강연은 프리츠 랑의 영화가 왜 위대한지, <이유 없는 의심>은 어떤 의미를 가진 영화인지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날의 강연 일부분을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시네필의 선택이라는 섹션을 마련, 두 분의 평론가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전에 국내 평론가로 정성일 씨를 모시고 두 차례 강연을 들은 바 있고 거의 마지막 행사로 이번에는 미국의 영화평론가이며, 자크 투르뇌르, 오토 프레민저, 제리 루이스 등에 대한 책을 쓴 크리스 후지와라씨를 모셨다. 방금 보신 랑의 <이유 없는 의심>이란 작품에 대한 후지와라 씨의 강연을 먼저 듣고 관객 여러분과도 다채로운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크리스 후지와라(영화평론가): <이유없는 의심>은 궁극적으로 프리츠 랑 감독다운 영화다. 영화의 정의를 내리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논리적이며 공포감을 조성한다. 특히 이 영화는 완벽한 스토리를 보여준다. 영화는 증거를 조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랑이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먼저 내러티브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작가에 관한 질문을 저절로 던지게 한다. 이 작품은 랑이 할리우드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이다. 저예산 영화이지만 여전히 상업영화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랑이 고른 것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만들라고 한 상업적인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랑에 대해 알고 있는 것, 랑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적합하게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놀랄 수밖에 없다. 랑은 미국에 건너가기 전 영화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랑은 독일에서 영광을 누리던 시절에는 UFA(독일의 영화사)에서 폭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배우도 그렇고 영화의 세부 사항을 완전히 통제했었다. 유명한 대작을 만들기도 했었고. 그런데 미국에서는 독재자 감독을 인정하지 않아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리듬과 연기 등을 조절했다.

<이유 없는 의심>을 랑의 전제 작품 맥락 속에서 얘기하자면, 랑이 미국으로 건너와 처음 만든 영화인 1936년 작 <퓨리(fury)>와 비슷하다. 두 영화 모두 살인을 다루고 있고, 외모로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살인자로 등장한다. 관객은 이 살인자가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곧 잊어버린다. 그래서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더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살인을 했다니!’라고 말이다. <퓨리>에 등장하는 스물 두 명의 용의자들을 묶어서 모두 ‘존 도우(John Doe)’라고 부르는 것이 이런 점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 다나 앤드류스가 맡은 캐럿의 외모는 지극히 평범하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이란 상징성까지 갖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우리가 ‘평범’이란 것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에 비판을 가한다. 역시 랑이 1956년에 만든 <도시가 잠든 사이에(While the city sleeps)>에서 다나 앤드류스는 언론인으로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평범하고 특징 없는 외모에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랑은 이런 이미지를 역이용해서 우리가 너무나 끔찍하게 여기는 것을 못 알아차리게 한다. 당시 미국관객들이 다나 앤드류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걸 모르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를 생각해보자. 스펜서가 결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자고 하자 캐럿은 누구에게 씌우냐고 묻는다. 그러자 스펜서는 ‘바로 자네’라고 답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캐스팅 단계와 같다. ‘살인자 역을 누구에게 맡기지?’ ‘바로 자네’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캐럿을 선택한 이유를 나열하는데 그 이유들이란 것이 용의자와 비슷한 차를 탄다거나 회색 코트를 입는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특징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범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나 앤드류스가 실제 살인자임에도 그가 범인에 적임자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분명한 형체를 가진 사람이 살인자가 된다. 또한 이 영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이 된다. 첫 번째는 스펜서와 캐럿의 내러티브다. 이 영화의 재판 장면은 가장 지루한 장면이지만 이는 단점이 아니라 영화에 꼭 필요한 장면이다. 기계적으로 스펜서와 캐럿의 작전이 진행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뒤집어 완전히 반대로 보여주는 것이 스펜서와 캐럿이 뒤에서 증거를 만들어내는 장면이다. 랑은 증거를 조작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작업에 관객을 참여시켜 관객이 스릴과 힘을 느끼도록 했다. 그래서 지루한 재판 장면과 이 장면이 대조를 만든다.



이제 직접 영상 클립을 보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보시는 장면은 스펜서와 캐럿이 시체가 발견된 곳으로 가서 캐럿의 라이터를 놓고 오는 장면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시점의 상대적인 높이를 이용한다는 거다.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는 앵글을 낮게 해서 스펜서가 수상해 보이도록 한다. 랑이 후에 직접 언급했듯이, 관객들로 하여금 혹시 스펜서가 범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반면 스펜서가 사진을 찍는 순간에는 오히려 높은 각도에서 롱숏으로 두 사람을 보여준다. 이는 관객이 스펜서에게 공감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스펜서의 뒤에서, 위에서 찍은 것이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 신문의 날짜를 잡히게 할 수 있느냐란 대화를 하지만 카메라는 오히려 더 멀어진다. 랑은 여기서 ‘가깝다, 멀다’에 대한 유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야외에서 촬영한 유일한 씬이다. 이 영화는 랑에게도 후기 영화이지만 고전 할리우드 시스템의 후기에 찍은 작품이기도 하다. RKO 부도 직전에 찍은 영화인데, 이 영화는 한 시대가 죽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할리우드의 한 장르가, 또 그 장르의 스타들이 끝났고 이미 구시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장면을 야외에서 촬영했다는 것은 랑 자신도 할리우드의 폐쇄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이제는 실제 사회가 이미 할리우드로 침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야외에서 촬영한 장면이라는 것은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 다른 요소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서 사용한 하이앵글은 이 장면에 캐릭터 외의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신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증거를 조작하는 스펜서와 캐럿의 행동이 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기준에서뿐만이 아니라 신의 기준에서도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란 걸 암시한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가 비극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신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과 신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 비극에서는 마스크를 사용했었다. 즉, 결백의 가면과 유죄의 가면이 있는 것이다. 결백이나 유죄냐 라는 것의 외적인 모습이 바뀔 수 있고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 영화의 핵심은 결백과 유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정말 캐럿이 유죄인지 질문을 던진 후 여기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이 영화의 드라마를 조성한다.



김성욱: 프리츠 랑의 영화에 대해 스콜세지가 2000년에 했던 말이 기억에 난다. ‘랑의 후기작들을 보면 실험실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시시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랑이 위대한 이유는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크리스 후지와라 씨가 얘기한 것도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이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이 있다면 부탁한다.

크리스 후지와라: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건 고전적인 것도 현대적인 것도 아닌 그 경계에 선 제 3의 영화들이다. <이유 없는 의심>도 경계에 선 영화의 훌륭한 예이다. 이런 영화를 통해서 다른 영화들이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자크 리베트의 영화도 랑의 영향을 받았다. 그 누구도 제 2의 랑이 될 수는 없겠지만 많은 감독들이 그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리: 김보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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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존 포드는 웨스턴 장르의 진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포드의 경력은 곧 웨스턴 발달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여겨지곤 한다. <역마차>(1939)가 고전적 웨스턴을 완성한 작품이라면, 2차 대전 후에 나온 <수색자>(1956)는 서부와 서부 영웅에 대한 수정을 통해 다시 한 번 웨스턴을 완성시킨 걸작으로 평가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수색자>로부터 6년 뒤인 1962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작가적 성찰이 돋보인다. 그가 도달한 성찰의 깊이는 서부극과 영웅주의를 탈신화화하기에 이른다. 포드의 후기작 중에서 단연 손꼽히는 작품이며, 미국에서 웨스턴이 쇠퇴하고 있던 시기에 만들어진 기념비적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동부에서 법대를 갓 졸업한 변호사 청년 랜섬 스토다드는 서부로 향하던 중 악당 리버티 밸런스의 습격을 받아 우연히 신본이라는 마을에 들어가게 된다. 스토다드는 존 웨인이 연기하는 서부 사나이 톰 도니폰과 핼리라는 여인의 도움으로 밸런스에 대한 복수를 준비한다. 또 한편으로 그는 마을을 연방정부에 가입시키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신의를 쌓아나간다. 결국 스토다드는 밸런스와의 결투에서 이겨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로 불리게 되지만, 나중에는 밸런스를 쏜 사람이 도니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설이 사실이 될 때는 전설을 기록한다"는 신본 스타 편집장의 대사처럼,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전설이나 신화가 역사와 문명과 맺는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화는 스토다드라는 동부 출신 변호사를 통해 서부의 황야가 문명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플래시백 속의 플래시백으로 보여 지는 스토다드와 밸런스의 이전 결투에서 숨어있던 도니폰의 존재가 드러날 때, 영화는 역사 과정에서 신화가 갖고 있는 역할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토다드가 대표하게 될 새로운 시대를 위해, 과거의 서부 영웅인 도니폰은 자신의 커뮤니티와 사랑한 여인을 모두 넘겨준 뒤, 자신의 집을 불태워 버린다. 스토다드는 역마차보다는 기차와 어울리는 인물로, 서부의 미래를 제시한다. 이에 반해 도니폰은 자신이 써온 서부의 역사를 스스로 지워버리고, 이방인 혹은 무법자가 되어 사라지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스타 편집장에게처럼 철도가 건설된 이후로는 잊혀져버린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서부극과 서부영웅에 대한 송가로 생각되는 영화다. 또한 웨스턴을 대표하는 두 사람, 존 포드와 존 웨인이 함께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해서 더욱 웨스턴 장르에 대한 반영적 영화로 비춰진다. 특히 존 웨인이 연기하는 톰 도니폰이 핼리와 함께 살기 위해 짓던 집을 자신의 손으로 불태우는 장면은 <수색자>에서 이튼이 집을 떠나가는 장면과 비교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된 도니폰의 집을 다시 찾아온 핼리는 여전히 그 시절의 선인장 장미가 피어있는 것을 보고 추억에 빠진다. 돌아갈 집조차 사라진 도니폰에게 남은 것은 초라한 관과 오랜 친구들뿐이지만, 그의 관 위에 놓인 선인장은 여전히 아름답다.


결국 워싱턴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핼리와 스토다드는 신본으로 돌아오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스토다드는 처음 그가 신본에 도착했을 때처럼 변호사 사무실을 차릴까 생각한다. 영화는 스토다드가 원경에서 기차와 함께 신본에 도착했던 것처럼, 마지막에는 다시 서부라는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안고 떠나가는 기차를 비춘 채 끝난다. (이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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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테렌스 피셔의 <프랑켄슈타인 죽이기>



호러영화의 재 창조자라고 불리며 컬트영화 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테렌스 피셔는 저예산 호러영화의 명문인 영국의 해머프로덕션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피셔는 이미지, 주제, 소재의 측면에서 언제나 충격적이고 기괴한 것에 관심을 가졌다.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드라큘라 등을 소재로 하여 초자연적인 괴담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의 주인공들은 단순히 기괴하거나 공포스러운 것만이 아니라, 주로 운명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힘 앞에 쓰러져 가면서, 이 운명 때문에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마는 비운의 희생자들이기도 했다. 피셔의 이러한 독특한 시선은 많은 영화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현대 호러영화의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피터 커싱이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할을 맡은 <프랑켄슈타인 죽이기>(1970)는 뇌에 대한 괴기한 집착을 다루는 영화다. 프랑켄슈타인이 죽인 자의 머리를 담아 들고 다니는 통과 연구실에 있는 인체와 해골은 이를 잘 보여주는 이미지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옛 연구 파트너이자 연구의 중대한 결과물을 가지고 있는 브렌트 박사가 미쳐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병원에서 빼돌려 정신병을 치료하여 숨겨진 연구결과를 찾기 위해, 살인과 폭력을 마구 자행한다. 여기서 정신병이라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뇌 이식 연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프랑켄슈타인, 뇌 이식을 연구하다가 정신병에 걸린 브렌트, 정신병원 의사인 칼은 미묘한 삼각구도를 형성한다.

특히 칼은 가장 불가해한 느낌을 주는 인물로서 프랑켄슈타인과 묘한 친연성을 갖고 있는데, 인상조차도 그처럼 무감각하고 냉철해 보인다. 칼은 별다른 저항 없이 프랑켄슈타인의 공모자가 된다. 그가 프랑켄슈타인의 수술을 도울 때면 자신이 치료하지 못한 정신병을 프랑켄슈타인이 뇌 이식 수술을 통해 고치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의학적 경이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칼은 이미 모든 수술이 끝난 후에, 무의미한 저항을 시도할 뿐이다.

이 작품은 심리적으로 큰 공포를 조장하는 호러영화는 아니지만, 서스펜스의 적절한 조절을 통해 극적 긴장을 유지한다. 영화의 긴장감은 대부분 시청각적 요소들의 강렬함과 거침없이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서사의 극적 쾌감을 잘 드러내는 편집효과를 통해 발생한다. 고딕풍의 공간, 의상과 괴기한 요소들의 충돌로써 구축되는 미장센, 그리고 음악과 사운드는 호러영화들의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면서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인간의 훼손된 신체의 언캐니한 이미지나 신체를 훼손하는 소리의 섬뜩함은 영화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이를테면 시체를 유기했던 정원의 화단에서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면서 시체가 땅속에서 튀어나오고 피분수가 되어 흩날려지는 장면은 강렬하고, 뇌 이식 수술을 할 때 두개골을 가르는 톱질 소리는 매우 섬뜩하다. 제한된 공간과 요소만으로 큰 과장 없이 연출되었음에도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피셔의 빼어난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박영석)


 >>>상영일정
1월 28일 19:00
2월 7일 13:00
2월 28일 13:00 상영 후 비평좌담_시네필의 윤리_크리스 후지와라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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