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신인감독들은 장르 컨벤션의 변용을 통해 흥미로운 데뷔작을 발표하고는 했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는 서부극이 SF적 감수성과 만나면 얼마만큼의 파괴력을 갖는지 보여주는 유례없는 사례다.

영웅이 사라진 가까운 미래. 순찰대원 맥스는 고속도로에서 활개치는 폭주족들을 단속하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경찰력이 악화된 무정부주의 상태에서 일개 순찰대원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동료 순찰대원의 죽음이후 오히려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휴가를 떠나는 맥스는 급기야 오토바이 폭주족들에게 가족을 잃고 만다. 법과 질서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맥스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지에서의 추격, 가족을 위협하는 악당, 선의 가치를 지키려는 영웅과 마지막 퇴장. <매드 맥스>는 어느 모로 보나 서부극의 장르 진행을 따른다. 다만 서부개척시대가 암울한 미래로, 모뉴먼트 밸리가 고속도로로, 말과 마차가 각각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도상을 달리했을 뿐. 무엇보다 조지 밀러는 미국의 이념적 거울 역할을 해왔던 서부극에 유아적인 남성의 판타지, 즉 자동차 애호와 속도광의 집착과 같은 원초적인 마초의 에너지를 불어넣음으로써 세기말의 오라를 더한다. 이와 같은 암울한 정서는 한편으로 영웅 탄생 신화를 위한 완벽한 서막 역할에 다름 아니다. 이제는 복수의 화신, 아니 '미친 맥스'가 된 우리의 주인공은 반쯤 넋 나간 사람처럼 폭주족들을 뒤쫓아 하나하나 잔인하게 처단한다. 지극히 본능적이고 야수적인 맥스의 복수에서 일체의 자비나 관용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고독한 영웅의 지위를 획득하기 전 반영웅으로서 벌이는 개인적 원한에 대한 분풀이는 거침없는 스피드와 무자비한 폭력 묘사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매드 맥스>가 영화광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작품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영화자체도 물론이거나와 제작을 둘러싼 거짓말 같은 일화 때문이다. 조지 밀러는 감독이기 이전 수련의로 근무하며 틈틈이 단편영화를 만들어왔고 병원 근무 당시 모은 돈으로 데뷔작 <매드 맥스>를 완성하며 할리우드에 무혈(?)입성한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매드 맥스>가 할리우드에 던진 충격파가 얼마나 컸던지 이후 여러 감독들에 의해 패러디되고 오마주되며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선, 한국 팬들에게도 낯익은 <전격Z작전>(1982)은 <매드 맥스>에 등장하는 악당의 이름 '밤의 기사'를 드라마의 원제로 차용했는가 하면 맥스가 모는 '옐로우 인터셉터'를 모델로 '키트'를 창조했다. 그 외에 코엔 형제가 <아리조나 유괴사건>(1987)에서 아기를 사이에 두고 자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인용한 것은 이미 유명하다. 무엇보다 압권은 멜 깁슨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리셀 웨폰>(1987)이다. 리처드 도너 감독은 맥스의 캐릭터 배경을 그대로 가져와 멜 깁슨이 연기한 마틴 릭스 형사를 창조했다. 사고로 아내와 자식을 읽고 해변의 트레일러에서 홀로 산다는 설정이 맥스와 그대로 겹치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매드 맥스>의 예고편이 소개될 당시 무명의 멜 깁슨 등장 부분이 모두 잘려나간 것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그렇게 <매드 맥스>와 멜 깁슨은 할리우드는 물론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허남웅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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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티브’의 미셸 시망은 2008년의 영화를 꼽는 자리에서 마테오 가로네의 <고모라>를 수위에 놓으며 이렇게 얘기했다. “<고모라>는 이탈리아 정치영화의 뛰어난 귀환을 의미한다. 사회 곳곳에 파고든 범죄의 심각성을 모자이크 스타일의 구성을 통해 폭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미셸 시망의 극찬은 동명의 원작 소설가 로베르토 사비아노가 극중 범죄조직 ‘카모라’로부터 위협을 받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영화화를 밀어붙인 마테오 가로네의 용감함에 기초한다.

<고모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폴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미항의 면모를 품은 곳도, 피자 맛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드는 낭만적인 여행지도 절대 아니다. 죄악과 탐욕으로 몰락한 성경의 ‘고모라’처럼 나폴리 역시 도시 곳곳에 스며든 악의 세포로 빠르게 쇠락해가는 중이다. 특히 마약과 매춘은 물론이고 패션 산업과 심지어 쓰레기 처리까지, 나폴리를 근거지 삼아 이탈리아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카모라의 악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러다보니 카모라의 범죄에 개입된 인물은 특별히 너나 할 것 없다. 위로는 카모라의 수장부터 아래로는 빈민가의 어린아이까지 나폴리는 도시 전체가 카모라가 뿌려놓은 범죄의 거미줄로 카르텔 되어있을 정도다. 그래서 마테오 가로네는 10여 명이 넘는 인물을 통해 이탈리아 범죄 특유의 피라미드 구조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가로축으로는 카모라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두 소년을, 세로축으로는 조직을 위해 의상실을 운영하는 중년남자를 위치시키고 그 주변으로 가난하고 평범한 이웃들을 점점이 박아놓아 일상이 범죄인 나폴리의 충격적인 실상을 그려나간다.


이들의 행위는 결국 지독한 가난을 벗고 어떻게 해서든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싶다는 이탈리아의 집단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평범한 이들의 검은 욕망은 카모라와 같은, 시칠리아 마피아의 세력을 훨씬 뛰어넘는 범죄조직이 암약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토양으로 기능한다. 극중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낼 수 있을지언정 결코 성취할 수는 없다. 철저히 카모라의 이득을 위해서만 그 욕망이 존재 가치를 가질 뿐 쓰임새가 없어지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폭력을 동반한 검은 욕망은 가난으로 대물림되고 그 와중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서로를 살상하는 현대판 고모라의 신화가 완성하는 것이다.

<고모라>가 소설의 영역에, 영화의 영향력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카모라의 폭력 카르텔이 만 천하에 폭로된 까닭이다. 원작자 로베르토 사비아노는 수년간의 잠입 취재를 통해 카모라의 조직체계와 핵심인물, 범죄 수법을 폭로하는 탐사저널리즘의 개가를 일궜고 (소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열 살도 안 넘은 꼬마 아이가 카모라에 들어가겠다며 방탄복을 입고 총알을 막아내는 충격적인 신고식의 실상을 알 수 있었을까?) 감독 마테오 가로네는 뛰어난 영화화로 전 세계가 나폴리의 실상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원작자와 감독은 여전히 카모라의 협박으로부터 생명을 위협받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영화가 현실을 뒤바꿀 수는 없겠지만 현실에 관심 갖도록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고모라>는 증명한다. 2008년의 영화일 뿐 아니라 2000년대를 대표하는 범죄영화의 걸작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허남웅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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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의의(意義)는 그것에 내재된 의미들의 무덤 위에 피어난다. 의의를 얻을 때라야 비로소 작품은 잊혀 지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남아 보존 된다. 즉 디테일들이 무시되고 몇 개의 특징만이 간명하게 정리될 때 우리는 그 정리된 문장을 기억하고 인용한다.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1965)의 모든 장면들은 이 의의에 맞서는 의미들의 투쟁 같다. 영화는 미이라로써 살아남길 거부한다. 장면들 간에 도무지 개연성이 없다. 한 가지 맥락으로 정리될 수도 없다. 내레이션을 통해 작품 스스로 고백하듯 '사랑, 액션, 범죄 영화'의 범주에 놓인 '복잡한 영화'이지만 그렇기에 결국 어떤 영화도 아니며 동시에, 어떤 영화로도 불릴 수 있다.


의의를 거부한 대신 영화가 더욱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이를테면 “영화언어의 새로운 알파벳”같은 것. 영화는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에 대한 책을 낭독하며 시작한다. 화가는 말년에 더 이상 구체적인 사물을 그리지 않고 공기와 빛, 시간과 색, 형태와 색조를 포착해 '고요한 교향곡의 보이지 않는 중심'을 그려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구체적인 사물’은 이미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고정관념으로써 굳어진 형태의 사물이다. 이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는 것. 구상에서 벗어나 추상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명확히 감각할 수 없으나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본질을 더 정확히 묘사해내려는 시도. 이 영화는 이와 같은 실재의 도상화, 더 나아가 기호화를 형식적으로 시도하는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내러티브상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페르디낭(장 폴 벨몽도)에게 환멸감을 줘서 결국 그가 마리안느(안나 카리나)와 달아나게 만드는 공간인 파리는 사람들이 상품들과 광고문구로 대화하는 단색의 세계, 실체는 없고 자본의 기호들만 부유하는 세계이다.


사실 영화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청춘 범죄영화다. 알제리에서 온 정체불명 무리의 추적과 비밀스런 여인, 의문의 거금이 관련 된 도피 그리고 배신. 허나 이는 플롯에 불과할 뿐 스크린에서 재현되는 작품 자체는 전혀 딴판이다. 영화는 때로 뮤지컬이며, 가장 느와르적인 사건들은 모두 환한 대낮에 벌어진다. 무엇보다도 페르디낭과 마리안느 사이의 긴장감은 범죄물의 그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말하는 남자’와 ‘느낌으로 말하는 여자’간의 소통의 결핍에서 온다. 이를테면 마리안느가 “다 지겨워. 난 살고 싶어”라고 외칠 때, 페르디낭은 “누군가의 삶이 아닌 그냥 삶 전체”가 담긴 소설쓰기를 시도한다. 즉 여자에게 삶은 ‘살다’라는 동사이고 남자에게 ‘삶’이란 명사다. 살아있음을 느끼면 그만인 여자의 삶은 늘 현재 변화 중이어야 하고, 노트에 적혀야만 하는 남자의 삶은 언어로써 과거에 고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누벨바그의 이론가라 불리는 고다르는 1970년의 한 인터뷰에서 “과학자와 에세이스트는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론가와 시인 역시 등치가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미치광이 피에로>는 이론가가 쓴 시다. 작품의 형식적 실험은 내용 및 아름다움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증거로 이 영화의 배우들은 마네킹이 아니며 주어진 공간과 역할 속에서 제 몫의 존재감을 쏟아낸다. 현실적 상황의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 영화언어의 고정된 의미로부터 자꾸 탈주한다는 점에서, 시청각적으로 아름답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의의를 부여받고 설명되기를 거부한 시는, 그 대신 질문들로 남는다. 답 없는 질문은 늘 현재진행형이므로 영화는 과거에 편입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다. 한층 채도 높은 지중해의 빛 아래,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기본색들이 선명히 생생하다. (백희원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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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나 <사운드 오브 뮤직>(1965) 등 로버트 와이즈를 뮤지컬 영화감독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산 파블로>는 꽤 낯선 영화일 것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상 처음으로 1년 반 동안 대만과 홍콩에서 촬영을 감행한 대작이라는 점 외에 사소한 공통점을 찾기도 힘들다. 제작 여건은 다르지만 차라리 그의 SF영화 <지구가 멈춘 날>(1951)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로버트 와이즈는 <지구가 멈춘 날>에서 현란한 시각효과보다는 탄탄한 스토리에 더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의 라스트가 인상적인데, 지구를 찾은 로봇 고트의 장엄한 연설은 인류가 공격성을 버리지 않는 한 지구가 잿더미로 변할 것이며, 절멸에 처할 것임을 경고한다. 이는 단순한 경고성 발언이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과 힘의 행사가 불가피하다는 당시의 시대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시대극이긴 하지만 <산 파블로> 또한 베트남 전쟁에 직면한 1960년대라는 시대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다.
 


1926년의 중국 양자강에 떠 있는 미국의 포함 산 파블로가 영화의 주 무대다. 중국의 국민당이 세력을 확대하던 이 시기는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한 침탈과 폭력으로 역사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던 때이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내전을 벌이면서 외국인 배척을 펼쳐가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의 변화 가운데 엔지니어인 홀맨은 산 파블로호의 승무원이 되기 위해, 외국인 선교사의 일원인 셜리는 교사의 자격으로 중국을 찾는다. 둘은 내전의 소용돌이가 거세지면서 위험에 처하고 낯선 땅에서 사랑을 나눈다.

3시간에 이르는 대작이긴 하지만 <산 파블로>는 거대한 스펙터클 영화라기보다는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로버트 와그너는 대국에 의한 해외파병의 어리석음과 희생을 겪는 함선 승무원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세세하게 그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미국인을 보호하고 구하기 위해 중국에 머물고 있다며 애국주의를 고무하는 선장, 중국인 여인 메일리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 홀맨의 동료인 프랜치, 중국인을 교화시키기 위해 나선 선교사들의 이야기, 함선의 기관실에서 벌어지는 중국인 노동자와 선원들 간의 갈등, 이런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가 서브플롯으로 전개된다. 이런 이야기들은 스쳐지나가는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켜켜이 쌓여가며 비극의 징조와 파멸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홀맨은 끊임없이 거의 모든 이와 싸움을 벌이면서 매번 ‘적인 누구인가’라고 반문한다. 이런 의문은 최종적으로 홀맨이 죽어가며 내뱉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라는 말에 함축된다. 스티브 맥퀸은 홀맨의 복잡한 심경을 그의 생애 가장 훌륭한 연기로 소화했다. 원래 로버트 와이즈는 홀맨의 캐스팅에 폴 뉴먼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폴 뉴먼이 고사하면서 스티브 맥퀸으로 기회가 넘어갔는데, 당시 메이저의 중역들은 대작영화에 인지도가 적었던 스티브 맥퀸을 주역으로 캐스팅하는 것에 반대했다. <대탈주>(1963)의 성공 덕분에 스티브 맥퀸은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 로버트 와이즈 또한 이 영화로 세상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미국 군대가 2차 대전 이후만이 아니라 그 전부터 전 세계에서 오명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며 “이 영화는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고 있던 바로 그 때에 나왔다. 나는 베트남을 역사적 맥락 안에서 봐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시네토크
2011년 2월 26일 (토) 16:00 <산 파블로> 상영 후 김영진 영화평론가와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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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ike air max 2013.05.03 0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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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은 <이민자들의 땅>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두 명의 알바니아 소년 겔티(줄리안 소타)와 지니(라자 소타)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영화 한 편을 끌고 간다. 삼촌과 함께 조그만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두 형제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혼잡한 로마에서 자리 잡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불만이 있다면, 이제 나이도 좀 먹었겠다 한 방에서 형제가 함께 묵으려니 불편한 게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간의 사정을 파악한 삼촌은 알고 지내던 젊은 사진사의 집에서 두 조카가 지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지만 겔티는 적응하지 못하고 떠난다.

<손님들> 역시 <이민자들의 땅>에서처럼 실제 인물이 등장해 연기를 펼치는 등 리얼리즘의 면모를 과시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극영화적 요소를 드러내며 가로네가 일관되게 유지해왔던 다큐멘터리적 연출에 분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 <손님들>은 두 소년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와중에 성장영화의 형태를 강하게 내비친다. 굳이 <이민자들의 땅>의 한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인물을 다시 전면에 내세워 장편을 시도한 것에는 가로네가 극영화로의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의도가 어렵지 않게 읽히는 것이다.


이는 극중 두 형제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정신적인 성숙을 이루는 것처럼 가로네도 여러 시도를 통해 자신이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듯이 보여 흥미롭다. 그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겔티는 감독의 심정이 간접 투영된 분신처럼 새롭게 느껴진다. 사진사의 집을 나와 얼마간 방황하던 겔티는 30년 전 로마로 상경한 리노라는 노인을 만난다. 리노는 몇 년 전 집을 나간 아내를 그리워하는 중인데 겔티는 그런 노인을 보며 지니를 생각하고 그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그리고 가로네 감독은 또한 겔티(와 지니)에게서 앞으로의 영화적 활동을 모색한다. 그렇게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고 현실은 또한 영화를 모방하는 법이다. 적어도 가로네의 영화는 삶과 현실을 진실을 추구한다. (허남웅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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