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극장에서 보고 싶어서 추천을 했다. 나도 극장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이번 기회에 같이 보면 참 좋지 않을까. 영화사에 좋은 영화가 많지만 최고의 작품 열 편을 꼽으라면 이 작품을 넣을 것 같다. 벨라 타르는 하나의 영화에 대해 한 명의 예술가가 어디까지 장악할 수 있는지 그 극대치를 보여주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 <사탄탱고>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추천사



[리뷰] 황폐한 세계와 그곳의 인간들 모두의 존엄을 위한 춤




안개가 자욱이 낀 황량한 평원을 담아내는 흑백의 이미지. 비바람을 맞으며 진흙탕이 되어버린 대지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인물.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느릿느릿한 카메라 움직임과 롱테이크. 거기에 덧입혀지는 생생한 자연의 소리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인간의 비참과 우울의 정서를 한껏 머금은 벨라 타르적인 세계가 탄생한다. 그의 경력의 후반부, <파멸>(1987)로부터 시작하여 <토리노의 말>(2011)까지 하나의 순환적 원을 그리는 타르적 우주의 중심에는 <사탄탱고>(1994)가 자리한다.


타르의 영화들, 특히 <사탄탱고>는 극장에 가서 필름으로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최후의 보루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것은 그의 영화가 필름이라는 매체의 물성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름 표면의 질감과 그레인은 물론이고 필름의 노화와 스크래치조차도 이미지의 중요한 요소이며, 이러한 필름의 물성은 영화 속 세계의 물리적 감각을 담아내고 리얼리티를 보증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타르의 영화에 담긴 모든 자연적인 요소들이 사실은 정교한 연출의 산물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가령 <사탄탱고>의 공간은 하나의 마을이 아니라 헝가리의 시골 곳곳에서 촬영된 것을 모아 구성되었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은 모두 기계를 통해 연출된 효과이며, 영화에 담긴 사운드는 모두 후시녹음된 것이다. 타르에게 물리적 현실이란 발견하고 기록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또한 필름에 담기는 물리적 현실의 핵심은 시간 그 자체이다. 우리는 그 어떤 영화보다 느린 타르의 영화를 통해 시간의 무게와 시간 그 자체의 물성을 감각하게 된다.



<사탄탱고>가 7시간 10분이라는 엄청난 러닝타임을 갖게 된 이유는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엄격한 영화적 스타일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치밀하며 실험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영화가 갖는 엄청난 흡인력의 비밀이기도 하다. 황폐한 시골 마을의 공동농장에 그동안 다 같이 땀 흘려 일한 대가가 들어온다. 일부에서는 이 돈을 몰래 빼돌리려는 음모가 꾸며지는 가운데, 그동안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이리미아스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마치 메시아처럼 마을에 도착한 이리미아스는 사람들을 장악하고 그들을 새로운 여정으로 이끈다. 탱고는 서로를 믿음으로써 가능한 춤인데, 이 영화의 탱고는 믿음이 아니라 협잡과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곧 공동체의 실패를 뜻한다. 탱고의 12스텝에 상응하여 12개의 파트로 구성된 이 영화의 전반부는 마을 사람들의 동요를 윌리엄 포크너적인 다중시점으로 담아낸다. 이 다중시점의 효과 중 중요한 측면은 하나의 사건에 반응하고 하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그들 각자의 삶을 모두 긴밀히 다루는 것이다. 심지어 전반부에 가장 긴 시간이 할애되어 있는 부분이 이 영화의 주된 서사에서조차 소외되어 있는 인물들을 다룬 부분, 즉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며 끊임없이 술을 마셔대는 알코올중독자 의사(파트3)와 고양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 백치 소녀(파트5)를 다루는 부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의사는 술을 구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소녀는 죽은 고양이를 한 손에 들고 영혼이 나간 것처럼 정처 없이 걷는다. 지속되는 시간의 무게는 곧 파멸 혹은 죽음으로 향하는 발걸음의 무게이다.


타르의 우주에는 유물론과 형이상학이 공존한다. 물리적 현실을 포착하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형이상학적 부재를 환기하는 것. 부서진 종탑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혹은 이리미아스가 안개 낀 숲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꿇는 것처럼, 무언가 초월적인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세계의 붕괴와 인간성의 파멸을 늦추거나 붙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신 타르의 카메라는 비참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이 파멸의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를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봐 준다. 타르는 영화가 유토피아적 희망과 위로를 안겨주는 것이 거짓과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영화는 현실의 비참을 직시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니체적인 의미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타르의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탄탱고’는 황폐한 세계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모두의 존엄을 위한 춤이다.



박영석 / 중앙대학교 영화과 박사과정



사탄탱고 Sátántangó / Satantango

1994450min헝가리, 독일, 스위스B&W35mm│15세 관람가

연출벨라 타르 Bela Tarr

출연│미할릭 빅, 푸티 호바스, 라슬로 루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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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미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존 터투로, 조디 포스터, 팀 로빈스가 아주 유명해지기 전에 출연한 작품인데, 개성 있는 배우들이 개성 있는 영화에서 독특하고 재미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대단한 의미가 있다거나 무게가 있기보다는 컬트, 또는 괴작에 가까운 영화다. 이런 독특한 재미를 관객들과 함께 느끼고 싶다.”


- <5번가의 비명> 장준환 감독의 추천사 



[리뷰] 1960년대에 대한 쓸쓸한 초상 - <5번가의 비명>





토니 빌 감독의 <5번가의 비명>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 만큼 국내 관객에게 조금은 생소할 작품이다. 영화는 뉴욕 브롱크스 지역의 평온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훑으며 시작된다. 그러나 곧이어 드러나는 인물들의 상황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어느 수학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날, 강간죄로 감옥에 갔던 하인즈(존 터투로)가 마을에 돌아온다. 하인즈의 광기어린 집착이 다시 시작될 것이 두려운 린다(조디 포스터)는 그를 감옥에 보낸 장본인인 해리(팀 로빈스)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해리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틴 루터 킹의 가르침에 심취해 비폭력주의자가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시 그녀를 구하려다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된 린다의 남자친구 제임스(토드 그래프)는 그녀와 해리의 사이를 오해해 히스테리를 부린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게 된 린다는 안간힘을 써보지만 결국 하인즈에게 납치당한다. 그들의 소동 사이로 뜻밖의 휴일을 얻은 두 남학생과 두 여인의 일탈기가 끼어드는 가운데, 경찰과 해리와 제임스에게 쫓기던 하인즈는 서글픈 최후를 맞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가족, 연인 관계에서 비롯된 상처 혹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상처 혹은 트라우마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정상적인 삶에서 조금씩 비켜나 있는 인물들의 삶은 말 그대로 카오스 그 자체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가 그저 자의적으로 구성된 무질서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질서에는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가 반영돼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64년, 존 F. 케네디가 죽은 직후이며, 아직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시기이다.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텔레비전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반전 연설이 울려 퍼지는 한편, 거리에서는 공화당 상원의원 선전 차량이 활보 중이다. 또 1960년대라면 미국 곳곳에서 반전운동, 흑인인권운동, 여성해방운동, 동성애운동이 활발히 일어남과 동시에 미국 밖에서는 아프리카 독립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이기도 하다. 이 혼란과 분열의 시기의 한가운데에 놓인 인물들이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기 어려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존 패트릭 샌리가 유년기를 보낸 동네를 배경으로 해서 각본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와 개인적 삶이 맞닿아 있는 지점을 예민하게 포착해냈다. 비록 이 영화의 개봉 당시 평단은 이 브로드웨이 출신 각본가에게 야박한 점수를 줬지만 말이다. 또 다른 빼어난 극작가 토니 쿠쉬너(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과 <링컨>의 각본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 극작가)는 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 대해 굉장한 연민을 갖고서 왜 인간이 그렇게 나쁘게 행동하는지를 탐구한다. 그건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로운 조합이다.” 이 점은 하인즈라는 인물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한편으로는 거의 미치광이 악인에 가깝게 묘사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 이상 증세를 갖고 있는 어머니와의 불완전한 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영혼으로 묘사되기도 해, 끝내 관객으로부터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그가 린다에게 펭귄을 선물하다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하는 서정적이고도 기괴한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기도 한다.

한편 아직 유명해지기 전인 배우들의 연기도 눈여겨 볼 만하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존 터투로다. 그는 오프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이미 존 패트릭 샌리와 협업하여 오비상을 받은 바 있으며, 영화계에서는 마틴 스콜세지 영화에서 비열한 캐릭터로 서서히 이름을 알려가던 중이었다. 특히 그의 얼굴이 이 영화의 중요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관자놀이에 난 긴 칼자국 흉터와 부리부리한 눈매는 그 자체로 관객을 시선을 잡아끈다. 배우 출신 제작자 겸 감독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이끌어내는 데 능숙했던 토니 빌은 그의 그런 얼굴 속에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는 분노와 광기와 절망을 같이 뒤섞어냈다. 이후로도 주로 예민하고 폭력적이며 미친 인물을 자주 연기한 터투로의 연기 경력에 초석이 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배우와 작가와 감독과 시대의 만남이 1960년대에 대한 괴상하고도 쓸쓸한 초상화를 만들어낸 것 같다.



이후경 / 《씨네21》 기자



5번가의 비명 Five Corners

198790min미국, 영국Color35mm│15세 관람가

연출토니 빌 Tony Bill

출연존 터투로, 조디 포스터, 팀 로빈스

상영일시ㅣ 2/7(금) 17:30, 2/13(목) 17:00, 2/23(일)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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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의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 모니터로 이 영화를 접한 이후로

제게 이 영화의 잔상이 계속 남아 있어요.

어두운 극장에서 필름으로 꼭 보고 싶었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리안의 허상> 가수 한받(야마가타 트윅스터)의 추천사



[리뷰] ‘화란 영화’를 보고 찡해지다- <마리안의 허상>





90년 봄에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s Society>(1989)를 뒤늦게 재개봉관에서 보고 슬슬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고1이었고 사춘기였습니다. 가요톱텐에 강수지가 나와서 ‘보라빛 향기’를 불렀고, 방송반에서 단체로 미팅을 했고, 걸어서 간 호숫가 벤치에 앉아 파트너와 함께 배를 타던 친구들을 바라봤습니다.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막연하게 길에서 기다렸고 우연히 만나서 ‘폴리스(The Police)’의 《싱크로니시티 Synchronicity》(1983) 앨범을 녹음한 카세트 테잎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들이 수포로 돌아갈 무렵이었습니다. 그저 방송실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1,000번 정도 들으려고 했고 실제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표지만으론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몇 년 후 박찬욱 감독이 연재하던 《스크린》이나 《로드쇼》에서의 B급영화 계보들이 레퍼런스로 찾아보는 영화들이 되었습니다만 아직은 무리였습니다. 그 와중에 티비에서 주말 밤에 방영하는 영화들 중에 운 좋게 좋은 느낌으로 남게 되는 영화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잘 못 알아듣는 게 흠이었지만 AFKN에서도 좋은 영화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티비로 본 영화 중 이렇게 화란 영화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화란, 곧, 네덜란드 영화입니다. 91년 여름에 이 영화를 소개할 때 화란 영화라고 했습니다. 화란 영화 중에 제가 좋아하는 영화로 폴 버호벤 감독, 얀 드봉 촬영, 룻거 하우어 주연의 풋풋한 영화 <사랑을 위한 죽음 Turkish Delight>(1973)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위한 죽음>은 아벨 페라라의 <스네이크 아이 Dangerous Game>(1993)의 엔딩 크레딧에서 들려오던 ‘블루 문(Blue Moon)’ 노래를 듣고 받은 어마어마한 충격 뒤, 또는 소위 말해서 소마이 신지 감독의 카메라가 그림자로 거칠게 출연하는 중2發(발) 롱-테이크(Long Take) 영화 <태풍클럽>(1985)을 영접하고 나서의 20대 중반에 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시네마테크 키드’가 된 후에 봤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 화란 영화는 시네마테크 이전의 ‘주말의 영화 키드’ 시절의 영화입니다. 훨씬 더 깊은 영화의 묵은 때로 범벅이 되기 전에 보았던 영화입니다. 보고 좋았기 때문에 저는 책상 옆 캘린더에 이름을 적어 놓았습니다. 91년 8월 24일 <마리안의 허상>. 저는 2000년대 초 제 홈페이지에 이 영화에 대한 추억을 짤막하게 제목만으로 적어 놓았습니다(“<마리안의 허상>이라는 화란 - 네덜란드 - 영화를 보고 찡해지다”라고 웹 페이지에다가 썼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누군가에게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자기도 그 영화를 추억한다며 우연히 검색하다가 보게 되었고 같은 기억을 가진 이가 반가워서 메일을 보냈다고. 저도 포털 사이트에서 이 영화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기억 속에서 복기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이들 중에 하나인 것 같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주말의 영화 키드’들이 존재했던 것 같고 저도 그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네덜란드에 가본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스피노자도 네덜란드로 피신했다고 했나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자유로운 공기가 살아 숨쉬는 곳이 아닐까 하는 느낌은 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색감이 남다르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나 유럽 영화, 홍콩 영화 또는 방화(한국 영화)의 색감과 확연히 차이가 났습니다. 한편으론 낯선 유럽 도시의 도시괴담 같은 이야기가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저처럼 뿔테 안경을 끼고 있고 상의를 추리닝 바지 안으로 집어넣는 훌륭한 패션의 소유자이며 여자 주인공은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이 굵은 느낌은 아닙니다. 선이 굵거나 색이 또렷한 느낌이 아니라 조금은 그 경계가 번져 있는 느낌입니다. 영화는 그래서 조금 조잡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느낌이 조금은 모던하면서도 인간적이어서 좋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대만 영화도 조금 이런 느낌이던가요?

이 영화의 압권은 역시나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의 갈 길을 가던 두 남녀가 다시 뒤를 돌아 서로를 바라보는 상황에서 멈추어 버린 그 장면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열린 결말이라고 할까요? 확실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결말이었거든요. 그래서 더욱 아련하고 가슴 찡하게 남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이 누군가의 손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편집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한여름의 신기루 같았던 저의 유치한 스토킹 이야기로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시내의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저는 같이 수업 듣던 어느 여학생을 쫓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 여학생은 시내를 걷다가 어느 서예용품 가게에 들렀습니다. 저는 밖에서 그녀를 몰래 훔쳐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버스정류장으로 갔고 저도 따라갔습니다. 저는 버스정류장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볼 심산이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몇 번 버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버스가 막 출발하려 했고 그 안에는 사람이 한가득 실려 있었고 급하게 출발하려는 그 버스에 그 여학생은 황급히 올라탔고 곧이어 버스의 출입문은 닫혔고 버스는 달려가 버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여학생을 그 뒤로는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 그 여학생의 이미지만이 흐릿하게 남았는데 그 당시 현실에서 못 찾은 그녀를 다음 해 여름밤 화란 영화 속에서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사우스 코리아, 남쪽 대도시 변두리, 남자 고등학생의 마음입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어느 날 이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옆에 아내가 자리하였고 영화를 둘이서 같이 보았습니다. 두 아이들은 저 방에 재웠습니다. 결말은 역시 달랐습니다. 22년 전의 그 느낌은 더 이상 이 공간에 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이런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게 되면 어떨지 궁금한 밤입니다.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그 여름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받(야마가타 트윅스터) / 가수


마리안의 허상 Zoeken Naar Eileen / Looking For Eileen

1987│98min│네덜란드│Color│DigiBeta│청소년 관람불가

연출│루돌프 반 덴 버그 Rudolf Van Den Berg

출연│톰 호프만, 라이셋 안토니, 마리케 뵈겔레르스

상영일시ㅣ 2/7(금) 19:40, 2/15(토) 19:00(상영 후 가수 한받 시네토크), 2/20(목)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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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ileen 2015.02.09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와 비슷한 사람이 많은거 보고 놀랐습니다.
    정말 감명깊은 영화지요..
    마치... 몽환적인 느낌..

  2. 허현영 2015.10.15 17: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정말 이영화보고싶은데..
    저도 이거보고 사춘기를 보냇던 기억이...중년이되어서도~이영화잊지못하고 기억하고잇엇네요~꼭ㅇ다시 봣으면합니다..방법이 없을까요?

    • seoul art cinema Hulot 2015.10.21 14: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서울아트시네마 상영작에 보여주신 관심 감사드립니다.

      <마리안의 허상>은 2014년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작품입니다. 뮤지션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선택하신 작품이었죠.

      이 작품은 작년에 상영을 해서 당분간은 저희 극장에서는 상영계획이 없습니다. 하지만 향후 프로그램 기획시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뷰] <당시> - 장률 영화의 원형




<당시 唐詩>(2004)는 장률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이 영화는 장률의 가장 자기 반영적인 영화이자, 장률식 미니멀리즘의 원형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공간은 인물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실내(방, 복도, 엘리베이터)로 한정되어 있고, 카메라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또는 영화 형식에 대한 엄격한 자기 제한은, 단순한 미학적 형식주의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삶과 영화에 대한 장률의 윤리적 태도의 표현이다. 장률에게 미학과 윤리는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문제를 이루고 있다.

전직 소매치기였던 (영화를 만들 때의 장률과 비슷한) 42살의 한 남자(왕시앙)가 있다. 그는 세상과 단절한 채 집안일(요리, 설거지, 세탁)을 하거나, TV 보기(‘당시(唐詩)’에 대한 방송), 화초에 물 주기, 뜨개질하기 등으로 소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끔 필요한 물건(가령, 뜨개실)을 사기 위해 밖에 나갔다 오는 것을 제외하면, 가끔 찾아오는 관리실 직원이나 보험 외판원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 벽을 통해 들려오는 이웃 할아버지 집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것, 가끔 아파트 복도를 빗자루로 쓰는 것 등이, 세상의 ‘현재’와 소통하는 그의 유일한 행위이다. 이 남자를 ‘스승’이라 부르며 찾아오는 한 여자(최월매)가 있다. 그녀는 그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다주기도 하고, 씻거나 자고 가기도 한다. 춤을 추는 여자이면서 여전히 소매치기를 하고 있는 그녀는, 남자에게 크게 한탕하는 것을 도와주면 자신도 손을 씻겠다고 한다.

그는 그녀를 밀어내려 애쓰지만(자물쇠 바꾸기), 찾아온 그녀를 강제로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녀의 제안에 응답하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을 한다. 여자가 그의 ‘과거’라면, 옆집에 홀로 살고 있는 할아버지는 그가 상상하고 있는 그의 ‘미래’일 것이다. 그는 ‘과거’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하다(옆집 할아버지와 공유하고 있는 ‘수전증’은 그 불안과 유예의 신체적 징후일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는 과거를 청산하고 싶은 의지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한 남자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그가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는 그 방은 곧 그가 살아내고 있는 한없이 유예된 현재의 다른 이름이다. <당시>는 깊은 영혼의 동요를 오로지 인물의 몸짓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신체의 영화’이고, 느린 리듬 속에 폭발 직전의 에너지를 품고서 끝까지 숨 막히는 긴장을 유지해 가고 있는 영화다.



장률은 <당시>에 대해, “내 그림자가 많이 들어 있는 영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 남자처럼 10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낸 적이 있었고, 영화 속 남자의 모습은 그 10년 동안 자신의 일상생활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당시>는 장률이 자신의 실존적이고 예술적인 인생의 전환기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영화다. 놀라운 것은, 그 자기 반영성에 일말의 나르시시즘도 없다는 것이다. 장률은 자신의 가장 자기 반영적인 이 영화를 가장 엄격한 형식(고정 쇼트와 최소한의 대사)으로 찍었다. 장률의 영화에서 카메라가 움직일 때, 그것은 대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적 응시의 위험을 피하려는 윤리적 태도의 표현이다. <당시>에 그런 카메라의 움직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영화가 철저한 자기 응시(반성)의 영화라는 반증일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적 재현을 피하고자 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자신을 응시하는 완고한 고정 쇼트라는 이 미학적 선택은, 결국 장률이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동일한 윤리적 태도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영화에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당시(唐詩)’ 9편이 인용되고 있지만, 그 시의 내용은 영화의 서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장률이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전향하면서 가져오려 한 것은, ‘당시(唐詩)’의 문학성(또는, 서사성)이 아니라 그것의 엄격한 형식이다. 말하자면, ‘당시(唐詩)’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통상적인 문학성(서사성)과의 철저한 결별 선언이자, 자신이 만들어 갈 영화의 미학적, 윤리적 원칙에 대한 선언문과도 같은 영화다. <당시>의 주인공은 끝내 유보된 현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영화는 그가 총을 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보여주지 않은 채 끝이 난다), 이후의 그의 영화를 보건대, 장률은 이 영화를 통해 과거와 분명하게 단절하고 유예된 현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를 장르적 외피(전직 소매치기라는 다소 누아르적인 설정) 속에 담아 넣은 후 그 장르적 외피를 새로운 형식을 통해 해체시키는 방식, 그 황량한 세계에 살짝 들어와 있는 맹랑한 유머(남자와 여자의 소매치기 대결), 이것 또한 그의 이후의 영화를 예감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변성찬 / 영화평론가


당시 詩 / Tang Poetry

2003│88min│중국,한국│Color│35mm│12세 관람가

연출│장률 Zhang Lu

출연│왕시앙, 최월매

상영일시ㅣ 2/8(토) 19:10 (영화 상영 후 장률 감독 마스터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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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준 감독의 선택 <두 연인>


“1973년, 그러니까 딱 40년 전에 만들어졌고, <사운드 오브 뮤직>의 로버트 와이즈 감독, <이지 라이더>의 피터 폰다, 그리고 '소머즈'로 유명해지기 전의 린지 와그너가 주연. 결코 걸작이거나 명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 때문임. 1970년대 초 우리나라에 개봉되었는데, 무엇에 끌렸는지 여러 번 보았고, 세월이 지나 다시 보려 해도 비디오나 디브디로 출시되지 않아 볼 수 없었던 영화, 그 기억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선택했음.”



[리뷰]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무기력한 슬픔 - <두 연인>






(*영화의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두 연인>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나 이야기보다는 그 사이에 스며든 정서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영화이다. 모로코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도중 서로 사랑을 느낀다는, 매우 간단한 줄거리를 갖고 있는 이 영화는 그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규정하기 힘든 복잡한 정서를 길어 올린다. 그 지배적인 정서를 뭉뚱그려서 ‘슬픔’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슬픔의 근원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물론 드러난 이유를 찾으려면 몇 가지를 간단히 생각해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불확실한 남자의 미래와 다시 혼자 남겨질 여자의 상황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 남자 주인공 에반은 탈영병으로서 현재 숨어살고 있는 중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자발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지만 사람을 죽인 뒤 그때 받은 충격으로 결국 탈영을 결심한다. 그 후 도망만 다니는 삶에 지쳐 다시 자수를 결심하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는 갈등이 있다. 기차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는 에반의 뒷모습은 그의 여린 감수성과 함께 그가 느끼는 슬픔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여자 주인공 데아드르도 슬픈 사연을 갖고 있다. 그녀는 화려한 모델의 삶을 살지만 남편 없이 혼자 아들을 키우며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잠깐 등장하는 그의 애인은 데아드르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한 번씩 비치는 공허한 눈빛은 그녀가 얼마나 메마른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암시한다. 이처럼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두 남녀가 서로 짧은 사랑을 나누면서 정해진 이별을 맞는 이야기이니, <두 연인>의 지배적 정서가 슬픔인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상황이나 인물들의 대사로 밝혀진 사실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두 연인>의 슬픔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 100분에 가까운 상영 시간 중 인물들의 사연을 직접 설명하는 부분은 다 합쳐도 20분을 넘지 않는다. 나머지는 두 남녀의 일상적인 대화와 행동, 그리고 여행과 함께 바뀌는 이국적인 풍경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다. 이를테면 기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옷을 고른다든가, 뛰다가 부러진 구두굽을 고친다든가, 하염없이 밤거리를 걷는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다 끝난 다음, 다시 말해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채 에반이 자수를 하러 떠나고, 데아드르가 아들과 함께 놀이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에 이르면 이 영화에 깊게 배인 슬픔의 정서가 다름 아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들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두 연인>의 슬픔은 인물들의 행동보다는 행동하지 않음, 즉 무기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에반과 데아드르는 정해진 결말 앞에서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만 본다. 단지 에반이 자수하는 것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데아드르는 인권단체에 연락을 하거나 변호사를 구하면서 에반을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에반은 체념의 표정과 함께 이를 거부하고 홀로 길을 떠난다. 데아드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더 이상 에반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 않는다.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 데아드르는 말한다.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을 거예요.” 이들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이 마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 에반은 자수하는 이유를 “내 삶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나마 자신의 의지로 이끌어오던 삶까지 완전히 포기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때 에반의 축 처진 어깨와 이를 보면서도 쫓아가지 못하는 데아드르의 모습은 자신의 삶 앞에서조차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슬픔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두 인물은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고 단지 이별의 순간만을 기다리지만, 동시에 그 결말을 한없이 유예시키려 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그 이별의 순간을 한없이 늘리려 한다. 영화가 끝나기 5분 전, 에반과 데아드르가 놀이터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의 촬영과 편집은 이들의 행동을 거의 미분하다시피 잘게 나누고, 그 작은 행동들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 보여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이별의 순간을 실제 영화 속 시간보다 훨씬 길게 느끼게 만든다.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이질적이기까지 한 이 마지막 장면의 연출은 주어진 현실 앞에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대신해 영화가 직접 나서 이들의 이별을 지연시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 밀도 높은 슬픔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만약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 슬픔이 계속 마음에 머문다면 이는 느리게 흘렀던 시간의 속도가 아직 제 속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보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


두 연인 Two People

1973100min미국Color│DigiBeta│청소년 관람불가

연출로버트 와이즈 Robert Wise

출연피터 폰다, 린지 와그너

상영일시 ㅣ 2/6(목) 19:30, 2/15(토) 15:30, 2/21(금) 16:30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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