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 작가를 만나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두 사람이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한다”

-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확장판)




이경미(감독) <아가씨> 확장판은 나도 오늘 처음 봤다. 역시 개봉판과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특히 1부에서 숙희의 나레이션이 없어져서 처음부터 숙희와 히데코의 관계에 더 집중하게 되더라. 그래서 두 사람의 첫 베드신도 개봉판의 귀여운 느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놀라는 건 여배우들이 자신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내가 전에 박찬욱 감독의 현장에서 스크립터를 해봐서 아는데, 다른 감독들에 비해 연기 디렉션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주는 편은 아니다. 김태리 배우가 느끼기에 박찬욱 감독의 연기 연출은 어땠나.

박찬욱(감독) 다른 감독이랑 해봤어야 비교를 할 텐데...(웃음)

김태리(배우) 이게 나의 최고의 모습이면 큰일인 것 같다(웃음). 나는 확장판을 집에서 봤는데, 내 얼굴을 내 집에서 보니 못 보겠더라. 그래도 꾸역꾸역 열심히 봤다.

이경미 박찬욱 감독과 작업할 때 힘들었던 점은 없었나.

김태리 눈물 콧물 흘린 순간들이 물론 있지만... 우리 둘의 비밀로 남겨두면 좋을 것 같다(웃음).

이경미 침대에서 우당탕탕 굴러떨어지는 장면이나 유화 물감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비탈길을 뛰어내려가는 장면 등, 김태리 배우의 대사뿐 아니라 손과 발을 쓰는 장면의 느낌도 좋았다. 박찬욱 감독은 오디션을 볼 때 김태리 배우에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박찬욱 자기 할 말을 다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몸놀림까지 볼 겨를은 없었다. 대사 위주로 봤는데, 캐릭터와 상황에 대한 자기의 해석이 있고 무엇보다 틀에 박혀있지 않았다. 대본 리딩이 끝난 다음 대화를 나눌 때도 자기 할 말을 했다. 그런 건 배우에게 굉장히 중요한 자질이다. 이를테면 ‘네...’라든지, ‘몰라요...’라고만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할 말을 한다는 건 해석을 할 줄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고, 다시 말해 독창적인 연기를 할 줄 안다는 이야기다.

이경미 오디션을 보면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다. 그런데 ‘후킹’당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런 보석 같은 순간이 참 신기하다.


관객 1 ‘골무 신’에서 카메라가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무빙을 보여준다.

박찬욱 거기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다른 관객들은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연출함으로써 의도한 효과는 시간이 오래 걸린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골무가 이를 가는 사각거리는 소리, 숨소리 등을 10분 동안 계속해서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햇빛을 받으면서, 서로의 향기를 맡으면서, 숨소리를 들으면서 오감이 최고조로 흥분된 상태를 오래 누리고 싶은 마음은 있을 거라고 봤다. 그래서 카메라가 엉뚱한 곳을 봤다가 쓱 빠지면서 두 사람이 느낀 심리적 시간을 보여주려 했다.

이 장면에서 방의 벽지나 가구, 소품, 광선이 만드는 그림자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서 묘하게 베르메르의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안락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멎은 것 같은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이다.

관객 2 1부에서 코우즈키가 잠시 저택을 떠날 때 히데코에게 ‘지하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1부의 숙희 시점에서는 그 대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박찬욱 정말 못 당하겠다(웃음). 사실 원래 시나리오에서 그 대사는 1부에 있는 대사가 아니었다. 엄격히 따지면 그 위치에 들어가면 안 되는 대사다. 편집 과정에서 편집 감독이 낸 아이디어였다. 관객이 영화를 보다가 ‘저게 무슨 소리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길 바랐다. 관객이 어리둥절하게 되는 순간을 맞았다가 나중에야 ‘아, 저게 지하실이구나’하며 궁금증이 풀리면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영화에 있어 좀 고지식한 편이라서, 그 대사를 숙희가 들을 수 없는 거리인 점이 좀 걱정스럽기는 했다.

이경미 고지식한 편이라고 말하니까 생각이 났다. <아가씨> 영화가 시작하면 코우즈키의 저택에 대해 길게 설명을 한다. 이 집은 왜 이렇게 생겼고 건축 양식은 어떤지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또는 3부 마지막에 백작이 피우는 담배에 대해서도 친절하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준다. 나는 이런 태도가 박찬욱 감독의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안의 세계를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건 때로 결벽증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관객 3 히데코와 숙희의 첫 만남 장면에서 히데코도 숙희를 못 쳐다보고 숙희도 마찬가지다. 둘 다 첫 만남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숙희는 언제 히데코에게 처음 사랑을 느꼈을까.

김태리 내 생각에는, 첫 만남 자리에서 숙희가 히데코보다 더 큰 ‘강타’를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상위 계층의 사람을 처음 만났는데, 그 상대가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고, 멀리서도 향기가 날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시간이 흐르며 점차적으로 서로를 향한 마음이 더 커져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박찬욱 이건 감독의 유권해석이라 생각하지 말고 관객의 한 사람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나는, 아침에 두 사람이 처음 공식적으로 인사할 때 서로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한다. 대본 리딩을 할 때는 골무 신이 두 사람에게 결정적인 장면이 아닌가 이야기했지만, 관객으로서 보기에는 그냥 첫눈에 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경미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인사를 부탁한다.

박찬욱 언제나 그렇듯 여러분을 ‘실물’로 만나는 게 감동적이다. 얼굴을 맞대고 함께 웃으며 대화를 한다는 건 정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이제 <아가씨>는 극장에서 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잠깐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었다면 무한한 영광일 것이다. 이제 블루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시기를 바란다(웃음).


김태리 듣기로는 이 자리까지 오는 길이 험난했다고 들었다. 너무 고생 많으셨다(웃음). 가끔 개봉 당시 무대 인사를 돌며 관객들과 만났던 기억을 떠올린다. 오랜만에 이렇게 또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이렇게 <아가씨>란 영화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많은데 내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아서... 마음에 걸리고 죄송하다. 그래도 이렇게 사랑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일시 8월 27일(토) <아가씨>(확장판)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장혜진 포토그래퍼, 주민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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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의 어른들은 다들 어른 같지 않다”

- 조성희 감독의 <탐정 홍길동>



주성철(『씨네21』 편집장) <탐정 홍길동>을 처음 봤을 때 조성희 감독이 모든 전형성으로부터 탈주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작인 <남매의 집>, <짐승의 끝>, <늑대 소년> 등을 보며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지점들을 이 작품에서 악착같이 돌파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맥락에서 <탐정 홍길동>을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조성희(감독) 이 작품을 시작할 때는 전형적이지 않은, 특이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야심은 없었다. 그냥 흥행이 잘 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잘 안됐다(웃음). 신기한 캐릭터, 내가 본 재밌는 드라마나 만화책들을 흉내 내고 싶었다.

주성철 동료들과 조성희 감독 영화의 매력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예전 작품들은 SF 같기도 하고, <전설의 고향> 같은 설화적인 느낌도 난다. 물론 이 영화에는 ‘홍길동’이라는 원전이 있지만 스토리를 어디서 출발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조성희 내가 글을 잘 쓰거나 스토리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서 나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지는 않다. 나는 내가 재밌게 본 것들을 많이 따라하고 싶어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책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내’가 재밌게 느끼는 것들을 쓰려고 한다. <탐정 홍길동>도 마찬가지다. 목표를 향해 가려다가 눈앞에서 놓치는 과정들이 이어지면서 음모들이 밝혀지는, 그런 전개를 재밌어한다. 그런데 지금 시나리오를 두 편 쓰고 있는데 이게 <탐정 홍길동>과 비슷해지고 있다. 다음에는 내가 시나리오를 안 쓰려고 다짐 중이다(웃음).

주성철 이 영화를 본 분들은 누구나 김하나 양(말순 역)의 매력에 빠졌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김하나의 연기는 절반이 애드리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전작에서도 그렇고 아역 배우와의 호흡이 정말 뛰어나다. 성인 남자 감독으로서는 굉장히 드문 경우라고 생각한다.

조성희 말순을 연기한 김하나 양은 촬영을 시작할 당시 여섯 살이었고 촬영을 할 때는 일곱 살이었다. 처음에는 의사소통이 거의 안 됐다. 지금도 잘 안 된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많이 어려웠고 그 어려움이 끝까지 해결되지도 않았다(웃음).

나는 아역 연기의 특징이 여백이 많은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표정을 지어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성인 연기자의 연기는 상대적으로 명징하기 때문에 여백이 없는데 아역의 연기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하나 양이 펼친 연기 중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갖고 한 것은 없다. 일단 후시 녹음으로 50번 정도 녹음을 한다. 그 다음 적절한 것을 골랐고, 어떤 대사는 거의 음절 단위로 잘라서 붙인 것도 있다(웃음). 대사의 내용을 이해 못 하고 연기한 장면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김하나 양을 캐스팅한 이유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기를 할 때 말투나 행동 같은 것들이 정말 그 나이 또래 그 자체였다. 작업 과정에서는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주성철 아이들과 홍길동이 나중에 화해할 것이란 건 당연히 예상 가능하다. 다만 그 과정이 작위적이고 느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탐정 홍길동>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일단 느끼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성인 남성이 어린 아이들과 최선을 다해 관계 개선을 하려고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한국 영화에서 조금 부족한 정서가 아닐까 한다.

조성희 나는 반대로, 진한 남자만의 세계를 그리는 걸 하나도 쓸 수 없다. 왜냐하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른들도 다 어른 같지가 않고 ‘남자’ 같지도 않다. 반성하고 있는 부분이며 앞으로는 정말 남자 같고 어른 같은 인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주성철 지금 한국 영화계의 젊은 감독 지망생이나 갓 데뷔한 감독들에게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다. 뭔가 남자들의 진한 세계를 그리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함께 상영한 <4등>의 정지우 감독이나 조성희 감독은 그런 욕심이 안 느껴져서 좋다. 지금 충무로에서 매우 소중한 감각이 아닐까.

조성희 그런데 남자 관객들이 별로 안 좋아한다(웃음). 그런 ‘남자’ 캐릭터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 지금 조금씩 한계를 느낀다. 내가 만든 캐릭터 중에 어른 캐릭터가 없는 것 같다. 전부 약간 피터팬 같고 철이 없고 유아적이다. 계속 이렇게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관객 1 <탐정 홍길동>은 특히 인물들의 눈 부분에 빛을 많이 사용했다.

조성희 옛날 영화에 그런 게 많다. 얼굴에서도 눈 부위만 유난히 밝은 그런 조명. 그런 게 근사해 보여서 따라해 봤다. 요즘 영화에는 잘 없는 것이다.

주성철 나는 이 영화의 표현주의적인 면이 좋았다. 한국 영화 얘기를 다시 하자면, 요즘은 이야기나 스타일 측면에서 리얼리즘에 대한 강박이 너무 과하다. 하지만 <탐정 홍길동>의 안개 속 총격전 같은 표현주의적 연출이 좋게 느껴졌다.

관객 2 영화를 보기 전 이 영화를 두고 ‘한국형 히어로물’이라 평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조성희 영화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국형 히어로라는 말은 마케팅을 위해서 만들어낸 말이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형’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히어로’라기 보다는 그냥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반-영웅 캐릭터 말이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은 캐릭터를 그려보고 싶었다. 그게 출발 지점이었다.

주성철 <탐정 홍길동>의 최종 관객수가 150만 명 정도였다. 좀 애매한 숫자지만 나는 150만  명이 그렇게 적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비소 주인으로 나왔던 유승목 배우가 <늑대 소년>에도 출연했었다. 영화를 정말 많이 찍은 배우인데 조성희 감독과 작업할 때 제일 재밌다고 말했었다. 리얼리즘이 아닌, 감독의 어떤 터치가 들어간 작품을 해서 재미있고 배우로서도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맥락에서 조성희 감독을 응원하고 싶다. 남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고, 현실의 무언가를 다루어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나는 그런 정서를 정말 좋아한다. 지금 늦게까지 남아 있는 관객들도 그런 감독님에 대한 지지를 보내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일시 ㅣ8월 14일(일) <탐정 홍길동> 상영 후

정리김창섭 관객에디터

사진 ㅣ장혜진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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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진실을 찾는 과정이 곧 자기를 또 알아가는 과정”

-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




손희정(문화평론가) 오늘은 주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해 보려 한다. <비밀은 없다>를 보고 이 영화는 시대가 요청하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경미(감독) 페미니즘과 관련한 맥락에서 호응을 얻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물론 의도한 것도 있기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부분이 많다. 어른 여자가 어린 여자와 화해를 하고 다시 만난다는 내용은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부터 계속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 때 이런 점을 전부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만든 모든 영화가 그런 지점을 갖고 있다. 나의 첫 번째 단편 영화는 여고 동창생 두 명이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나는 약간 에로틱한 분위기의 영화였다. 그리고 학교 입학 시험을 칠 때는 <처녀들의 저녁식사>(임상수) 이후의 이야기를 동성애로 풀기도 했다. 왜 이런 테마를 자꾸 선택하는 걸까 생각해 봤다. ‘연대’라고 해야 할까, 두 여성이 서로 만나서 어떤 이상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에 대한 판타지가 내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될 때 어떤 희망을 보는 것 같다.

손희정 그렇다면 감독님이 생각했을 때 스스로 자신의 ‘서명’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이경미 내가 이야기하는 인물들은 조금 결핍이 있다. 사실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도 결핍이 있지만 나는 그 결핍을 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편이다. 그리고 다른 영화들은 결핍의 원인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결핍을 가진 이유를 초반에 미리 설명해 줘서 관객의 동정심을 사게 하고 싶지 않다. 이를테면 해당 인물이 어떤 결핍을 갖게 된 전사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게 내가 좋아하는 내 인물의 소개 방식이다.

손희정 이 영화를 ‘모성 복수극’으로 바라봤는데 심혜경 프로그래머는 ‘자기탐구 복수극’, 즉 자기 탐구의 과정으로 해석했다. 그만큼 주인공 연홍은 굉장히 풍부한 해석의 결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다.

이경미 ‘자기탐구 복수극’이라는 표현이 재밌다. 모성애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모성보다는 자기 탐구에 좀 더 가깝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라진 딸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과 겹치는 순간이 중간중간 있다. 같은 맥락에서 딸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을 부수는 일 역시 자기 파괴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손희정 감독님의 여주인공들은 분명 매혹적이지만 ‘비호감’인 부분도 있다.

이경미 <비밀은 없다>의 주인공이 여자라서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글로리아>(존 카사베츠, 1980)의 주인공은 정말 멋지다. 그걸 보면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그런데 왜 <비밀은 없다>를 보면서는 기분이 나빠질까 생각해 봤다. 단지 여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글로리아>도 있고, <친절한 금자씨>도 있다. 이 영화들에서는 여자주인공이 굉장히 멋있게 나온다. 그리고 그 캐릭터들도 자신이 멋지다는 걸 알고 있고 이를 과시하기도 한다. 그때 관객이 보기에도 멋진 순간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비밀은 없다>나 <미쓰 홍당무>에서는 여자들이 멋있게 보이는 순간들이 별로 없다. 내 영화는 무너지고 붕괴되는 것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캐릭터에게 매혹당하기가 조금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나도 내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 좀 멋있으면 좋겠다. 나도 <글로리아>를 좋아하고, 관객으로서 영화를 볼 때는 그런 멋진 인물들에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이야기를 만들 때 주로 감정 이입을 하는 부분은, 그리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감정은 아무래도 연민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하게 하는 어떤 것’이랄까. 이런 것들에 에너지를 느끼는 편이다.



손희정 상대적으로 배제된 여성 캐릭터들이 있다. 이 영화의 손소라 선생이나 <미쓰 홍당무>의 황우슬혜가 연기했던 얄미운 캐릭터들이 있다. 심지어 둘 다 직업이 교사다. 그러고 보니 <비밀은 없다>의 처음 시작이 ‘여교사’라는 제목의 시나리오인 걸로 알고 있다.

이경미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이 진짜 기분 나빠한다고 들었다(웃음). <미쓰 홍당무> 때도 정말 속상해한 현직 교사분이 있었다. ‘여교사’라는 제목은, 나도 왜 ‘여교사’냐고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냥 그 제목이 너무 하고 싶었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인데, 우리나라의 고질적이고 이상한 시스템 문화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데 반복되고, 고치기 힘들 거라고 여기는 그 수많은 비상식적인 일들. 나는 이런 것들의 대부분은 교육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교육이 너무너무 문제인데, 잘 안 고쳐지다 보니 그 답답함이 내게 계속 있다. 내 영화 속에 학교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교사가 내 이야기 속에서 희생이 되고 있다.

관객 1 기존의 다른 영화들에서 소녀의 이미지가 신비롭고 순수한 이미지로만 그려져서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착하고 순수한 존재가 아닌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독립적이고 복잡다양한 캐릭터로 나왔다.

이경미 그런 ‘소녀’의 이미지가 원래 내게 있지 않았나 싶다. 엄마는 이래야 된다, 애들은 이래야 된다, 나는 이런 걸 깨고 싶다. 소녀가 다 그렇게 ‘소녀소녀’하지 않다고 반발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미옥이 연홍을 만날 때 드럼을 치는 장면이 있는데, 콘티에는 ‘미옥이 다리를 벌리고 앉아 드럼을 친다’라고 써놨었다. 어릴 때 여자들은 다리 오므리고 앉으라는 말을 많이 듣지 않나. 그래서 나는 좀 ‘쩍벌’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배우한테도 못할 짓이고 배우 어머니도 현장에 계속 계셔서(웃음), 그 부분은 뺐다.

관객 2 영화 안에 지역 정서를 굉장히 노골적으로 대비시킨 장면이 있다.

이경미 살아오면서 이 사회에서 부조리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편견이나 현상을 이 영화 안에 다 넣었다. 여자가 그걸 넘어서서 뭔가에 도달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리고 정치를 다루는 영화로서, 지역감정은 뺄 수 없는 한국적인 특징이었다. 이걸 두고 지역감정 조장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조금 있던데, 그건 강력하게 항변하고 싶다. 연홍이가 미옥을 안으면서, 전라도가 경상도를 부둥켜안고 우는데, 이런 화합의 이야기가 어디 있나? (웃음).


일시ㅣ 8월 7일(일) <비밀은 없다> 상영 후

정리ㅣ권세미 관객에디터

사진ㅣ장혜진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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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시네바캉스 서울]



낯선 만큼 신선하다. 야쿠티아 영화에 주목!

- <신의 말> 잔나 스크랴비나 PD와의 시네토크


이번 “시네바캉스 서울”의 주요 섹션 중 하나는 “야쿠티아에서 온 영화들”이었다. 최근 만들어진 야쿠티아 공화국의 영화 다섯 편을 상영하는 섹션이었는데, 특별히 야쿠티아에서 온 네 명의 손님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 세 번의 시네토크를 진행하였다. 그중 야쿠티아 영화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던 잔나 스크랴비나 PD와의 대화를 일부 옮긴다.





이지연(교수) 많은 분들이 이름도 모르는 야쿠티아 공화국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라 얼마나 많은 분이 올지 걱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다. 오늘 자리는 홍상우 교수가 야쿠티아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으며 시작됐다.

홍상우(교수) 지금 사하 공화국, 또는 야쿠티아의 영화는 ‘붐’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아트시네마와 함께 도브젠코나 소쿠로프 감독의 영화제도 했지만 매번 잘 알려진 영화들만 상영할 수는 없다. ‘발견’에 의미를 둔 영화제도 필요하다. 특별히 오늘은 야쿠티아에서 많은 손님들이 직접 자비를 들여서 오셨다. 야쿠티아영화제의 사르다나 프로그래머와 알렉세이 암브로시에프 감독, 스테판 부르나세프 감독이 이 자리에 함께 있다. 먼저 영화의 제작 과정과 연출 의도를 들으면서 시작하고 싶다.

잔나 스크랴비나(프로듀서) <신의 말>에 나온 축제 풍경은 실제 축제 현장에서 찍은 것이다. 그런데 영화 스탭들이 다 꾸려진 건 축제가 시작되기 이틀 전이었다. 그리고 촬영 하루 전에 남자 주인공을 캐스팅했다(웃음). 남자 주인공이 이 영화에서 유일한 전문 배우이고, 나머지는 실제 축제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즉석에서 섭외하여 찍었다.

<신의 말>의 연출 의도는 감독의 말을 인용하겠다. 사람들이 지상 세계에 살면서 누구든 자신의 신을 찾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신을 찾는 순간부터 신을 죽이게 된다. 감독은 우리 삶의 이러한 과정을 영화로 찍고 싶어했다.

관객 1 영화를 흑백으로 찍은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 자연의 소리와 같은 배경음에 신경을 쓴 걸 느낄 수 있다.

잔나 스크랴비나 흑백으로 찍은 이유는 시간을 넘어선 느낌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촬영은 사실 이틀밖에 안 걸렸다. 그런데 나중에 사운드를 포함해 편집하는 과정에서 3년이 걸렸다(웃음). 음향 감독이 후반 작업에서 굉장히 많은 고생을 했다. 야쿠티아의 신화에  따르면 세상은 세 개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 맨 위의 세계는 신이 사는 천상의 세계다. 그리고 중간 세계는 우리 사람들이 살고 있고, 지하는 악의 세계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지하의 힘에 의해 죽게 된다. 이 세 가지 세계가 영화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데 그 영향을 직,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음악에 맡기려 했다. 음악은 각 세계를 매개하고 있다.

배창호(감독) 촬영 일화가 놀랍다. 전문 배우가 없다고 했지만 할머니들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잔나 스크랴비나 지금 이야기한 부분은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장면이다. 할머니들이 그냥 길에서 쉬고 계시길래 촬영 제안을 드렸다. 비전문배우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이유는, 저 축제에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촬영팀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에 사람들도 별 신경을 안 쓴 것 같다.




관객 2 관련 주제를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 속에 등장한 축제에 실제로 두 번 가보기도 했었다. 야쿠티아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야쿠트어로 영화를 만드는 데 러시아 정부의 통제는 없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야쿠티아 자치 정부와 야쿠티아 영화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르디나(야쿠티아영화제 프로그래머) 야쿠티아 영화는 최근 급속히 발전 중이다. 소비에트 시기 이후 중앙 정부로부터 일정한 주권을 보장받은 자치공화국들이 있다. 그리고 사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정부 차원에서 ‘사하 필름’이라는 영화사를 만들어 자국 영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해 왔다. 야쿠티아만의 언어와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키는 수단 중 하나로 영화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시절에는 러시아어가 표준이었지만, 약 1990년대부터 자치 공화국의 지역 언어와 문화를 부흥시키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됐다. 그래서 야쿠트어를 사용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중앙 지역에서 영화 공부를 한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이때쯤 디지털 기술도 크게 발전하면서 영화 제작 편수가 많이 늘어났다. 현재는 야쿠트어로 만들어진 영화가 매년 1년에 10~15편 정도 만들어진다. 이는 러시아 전체에서도 드문 현상이다. 게다가 이 영화들이 전부 흥행이 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현상이다. 물론 다른 측면에서는 야쿠트어 영화가 언어적인 한계를 동시에 갖기도 한다. 하지만 야쿠티아의 영화들이 최근에는 외국의 영화제에서도 많이 소개되고 상을 받고 있다.

이처럼 지역 영화가 발전하다 보니 영화제를 만들어야겠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명실상부 국제영화제의 모습을 갖춰서 올해로 4회째를 맞았고, 영화제가 조금 알려지다 보니 참여하려는 분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영화 감독들뿐 아니라 영화평론가, 프로그래머들이 먼저 참가하고 싶다고 연락을 준다.

관객 3화 전반에 걸쳐 금속성의 독특한 소리가 계속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불편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리고 오늘 상영한 <하얀 날>과 <신의 말> 두 영화가 모두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최신 야쿠티아 영화의 경향이 궁금하다.

잔나 스크랴비냐 그 소리는 야쿠티아의 민속 악기 ‘코무스’ 소리다(웃음). 다른 나라의 분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겠다. 참고로 두 영화 모두 음향 감독이 같다.

많은 야쿠티아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건 인간과 자연 간의 조화이다. 그 두 존재가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관심을 두고 있다. 질문하신 분이 이 영화들에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보셨다면 그런 측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시 l 8월 5일(금) <신의 말> 상영 후

정리 l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l 최재협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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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넘어서는 목적을 염두에 둔 싸움이 있다면, 그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화성의 유령들>에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화성으로 이주를 택하고 과학과 경찰을 통해 새로운 식민지를 장악하지만 그 과정에서 쾌락, 활기, 재미 등 목적 이외의 요소들은 잃어버린 듯하다. ‘샤이닝 캐년광산으로 파견된 경찰대 역시 정체불명의 에너지에 감염된 무리로부터 벗어나 살기 위해 다시 열차를 타고자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경찰과 광기어린 무리 간의 대립은 생존 의지를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이는 광산의 교도소에서 죄수를 이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멜라니경위의 변화에서 두드러진다. 멜라니는 샤이닝 캐년의 수색 과정에서 살해당하는 지휘관 다음으로 경찰대를 이끄는 지도자로 구심축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죽은 지휘관과 부하 경찰 제리조가 욕망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저마다 조금씩 억눌린 욕망을 지닌 경찰들은 광산에서 이성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참상 앞에 필사적인 방어로 대응하지만 점차 그 노력이 생존 너머의 것을 가리킨다는 인상을 준다.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이미지 가운데 문의 운동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등장하는 이미지가 주는 충격 효과를 언급하고 싶다. 경찰대가 처음 광산에 도착해 인기척 하나 없는 고요한 분위기에 방심하면서 교도소 내부로 진입하는 문을 여는 순간, 날카로운 흉기를 엮은 섬뜩한 조형물과 목이 잘린 채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시체들의 이미지는 건조하기까지 했던 상황을 일순 바꿔놓는다. 무방비 상태의 경찰들은 끔찍한 광경에 치를 떨거나 할 말을 잃는다. 교도소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곳곳의 문을 하나 둘 열 때마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생존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위기를 느낀다. 더구나 자해와 사람의 시체를 절단해 그 일부로 몸을 치장하는 무리를 발견하고 생존의 위협에 동요한다. 언제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손에 들고 괴성을 지르며 광기에 들뜬 이들은 공포를 유발한다. 교도소를 폐쇄하고 이상 행동을 보이는 죄수들을 감옥에 가둬놓고 감염 여부를 분리하지만 감옥의 창살 너머로 죄수를 바라보는 멜라니의 시점에 비참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별개로 다른 관점이 개입한다.


손톱으로 피부를 갈라 상처를 내고 피로 흥건한 죄수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하다. 감염된 이들은 단지 그들을 구금하고 감시하는 경찰들에게 전시되는 데 그치지 않고 에너지의 시점으로 경찰을 마주보곤 한다. 혹자는 유령의 공격을 피식민자의 분노로 해석하지만 경찰을 바라보는 에너지의 시점은 무차별적인 욕망으로 가득하다. 멜라니 역시 죽은 숙주의 몸에서 빠져 나온 에너지의 표적이 되지만 제리조가 입에 넣어준 마약의 영향이 그녀로 하여금 에너지를 거부하도록 이끈다. 덕분에 에너지의 성격을 이해하게 된 멜라니가 이전과 비교해 주목하는 대상, 그녀의 변화를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장면은 교도소 밖에서 맞닥뜨린 감염된 광부를 쓰러뜨리고 그의 무기를 집어 드는 순간이다. 그 순간 울려 퍼지는 강렬한 헤비메탈은 이전까지 에너지에 감염된 무리의 광기를 북돋기 위한 것이었으나 경찰과 죄수들의 목과 팔다리를 가르는 무자비한 톱날은 공포가 아닌, 유희를 예고한다. 록스타를 연상시키는 무리의 지도자가 그를 따르는 숙주를 이끌고 멜라니 일행에게 다가오는 장면은 더 이상 공포를 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쾌감에 앞선 흥분을 고조시킨다.




에너지의 확산을 막기 위해 핵발전소를 파괴하고 다시 열차에 올라탄 죄수 윌리엄스가 다이너마이트가 가득한 칸에 무리의 지도자를 몰아내고 열차를 분리하는 장면은 엄청난 화염을 동반한 폭발과 함께 원초적인 쾌감을 안겨준다. 비록 윌리엄스는 멜라니에게 수갑을 채운 채 열차에서 탈출하지만 에너지의 공격이 경찰 당국까지 미치자 다시 멜라니를 찾는다. 그녀에게 총을 건네는 윌리엄스의 얼굴은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표정이 아닌, 다가올 전투에 대한 흥분이 만연하다. 해임된 멜라니는 윌리엄스와 경찰과 죄수가 아닌, 마약이나 에너지의 영향을 빌리지 않고 유령에게 맞서는 순간의 쾌감에 몰두한다. 지구에서의 문명 사회를 모방한 기지의 점령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이미 에너지의 확산으로 인한 아비규환은 범죄자 윌리엄스의 호송 임무와 멜라니의 해임을 묵살함으로써 제도 권력을 조롱하기 때문이다. 남은 건 당장 죽어도 상관없는 전투뿐이다. 이는 <뉴욕 탈출>(1981), <LA 탈출>(1996) 등에서 반()체제적 성격을 드러낸 바 있는 존 카펜터의 계보와 상통하면서 결국 그의 반체제주의가 끝이 없는 쾌락의 추구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도입부에서 멜라니가 착용하던 목걸이는 그녀가 복용하는 마약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 멜라니의 목걸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우려하던 에너지의 파급은 이뤄졌지만 멜라니는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경찰의 시선에서 이성을 넘어선 숙주의 행적은 끔찍하고 섬뜩한 잔해로 보이지만 감염되지 않은 자를 정복하고자 하는 힘에 맞서는 의지 자체는 멜라니에게 결여됐던 동력이 된다. 존 카펜터가 상상한 화성엔 지구의 문명사회 이상 지식 체계를 갖춘 외계인 대신 정의할 수 없는 행성 고유의 에너지가 존재한다. 그것은 위협적이지만 악이라 단정할 수 없다. 에너지에게 지배당한 숙주를 바라보는 멜라니처럼 에너지는 멜라니를 마주 본다. 서로의 존재가 정복을 거부하는 순수한 대립 항이라는 점을 인지했을 때, 죽음과 패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신체 절단과 총격, 폭발로 이뤄진 그들의 전투를 하나의 유희로 바라볼 수 있다.

 

권세미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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