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정지영 감독의 곧은 화법 

정지영의 '남부군'


정지영 감독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돌려서 하지 않고 우직하게, 직설적으로 말해왔다. 김경호 교수는 감히 판사에게 석궁을 쐈기 때문에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했으며(<부러진 화살>), 김종태는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안기부에서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남영동 1985>). 정지영 감독은 이 ‘간단한’ 사건에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고 그 과정을 최대한 적나라하게 보여준 후 판단은 관객에게 맡긴다. 이렇게 해도 관객은 자신의 연출 의도와 진심을 알아주리라 믿는 것일까. 그렇기에 정지영 감독은 스타일에 있어서도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에 필요한 숏들만을 딱 맞는 사이즈와 길이로 찍어 순서대로 이어 붙인다. 롱 숏은 풍경을 보여주고 미디엄 숏은 이야기에 주력하고 클로즈업은 감정을 고조시킨다. 가벼워진 카메라의 무게만큼 더 어지럽게 흔들리는 최근 영화의 스타일과 비교하면 정지영 감독의 이런 연출은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1990년에 개봉한 <남부군>을 보자. 주위 사람들을 따뜻한 웃음으로 돌보고 전투 중에도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는 빨치산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2시간 40분 동안 이들이 흉악한 ‘빨갱이’가 아닌 나약한 인간이자 역사의 희생자임을 이야기한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이야기나 묘사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자칫 방향이 흔들릴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는 이들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는지에만 꿋꿋하게 집중한다. 당시의 복잡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이태(안성기)의 내레이션에만 잠깐씩 등장할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정지영 감독의 이러한 곧은 화법이 영화를 해석할 때 오히려 더 풍부한 맥락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단적으로 말해 산과 마을을 옮겨 다니며 빨치산이 토벌대와 전투를 벌이는 것이 내용의 거의 전부인 이 영화에서 어떤 관객은 저들이 끝까지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힘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도 있을 테고, 또 어떤 관객은 이들의 뒷이야기를 궁금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는 여기에 대해 어떤 답도 주지 않은 채 단지 굶주린 채 진달래꽃을 따먹는 사람들의 모습과 동상에 발을 잘라내면서도 산을 내려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계속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가 이렇게 인물들의 행동에 집중할수록 영화는 단순해지는 동시에 복잡해진다. 이것이 지금도 변하지 않은 정지영 감독의 곧은 화법이 갖는 영화적 힘일 것이다.


김보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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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리뷰


지옥인간 


스튜어트 고든의 '지옥인간'





<지옥인간>은 재능있는 창작자들의 결합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결과물 가운데 하나다. 스튜어트 고든은 인간 본연의 정수를 들여다보는 도구로써 호러 장르를 선택했다. 브라이언 유즈나는 끊임없이 새롭고 진귀한 것을 시각화해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아이디어 뱅크였다. 고든은 작가였고 유즈나는 퍼포머에 가까웠다. 두 사람의 만남은 경제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스튜어트 고든은 연출을 했다. 브라이언 유즈나는 제작을 했다. 각본은 함께 썼다. 첫번째 결과물은 러브 크래프트의 원작을 각색한 <좀비오>(리 애니메이터)였다. 그들은 전설이 되었다.

1986년에 발표된 <지옥인간>은 그들의 두번째 작품이다. 역시 러브 크래프트의 원작을 각색했다. <리 애니메이터>도 거의 새로 쓴 이야기에 가까웠지만 <지옥인간>은 더욱 그랬다. 고작 5장 안팍의 단편 소설을 원안으로 만들어낸 <지옥인간>의 이야기는, 원작에서 잠시 등장하는 ‘송과선’ 연구를 바탕에 두고 더욱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배치했다.

캐스팅을 보면 <지옥인간>은 <좀비오>의 후속편 같은 느낌이다. 우리들의 영원한 ‘허버트 웨스트’ 제프리 콤즈가 주인공 크로포드를 연기한다. 역시 <좀비오>에서 주연을 맡았던 바바라 크램톤이 등장한다. 잠시 언급하자면 호러영화를 사랑한 어린 소년들에게 바바라 크램톤은 마릴린 먼로였다.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켄 포리가 주인공 삼인방 가운데 마지막을 맡아 알몸에 빨간색 팬티만 걸치고 열연을 펼친다. 그는 최근 <시체들의 새벽>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에서 전도사 역으로 깜짝 출연해 여전히 건재함을 드러낸 바 있다.

<지옥인간>은 송과선을 자극하는 기계장치로 인해 벌어지는 참극을 다룬다. 송과선은 척추동물의 간뇌에 돌출해있는 내분비선이다. 생체리듬에 관여하는 호르몬을 형성한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송과선을 제 3의 눈이라고 불렀다. 이후 많은 텍스트들에서 송과선을 신비주의 이론과 결합하여 이야기의 소재로 활용했다. <지옥인간>에서 송과선은 인간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도구로 등장한다. 프레토리우스 박사(잠시 프로메테우스-프랑켄슈타인-프레토리우스로 이어지는 컨텍스트를 환기해보자)의 송과선 해방 장치는 어떤 이에게는 성욕의 과잉을, 어떤 이에게는 식욕의 폭발을 가져온다.

과학이 초래한 비극을 주인공들이 해결한다는 점은 5,60년대 고전 SF영화의 개성과 닿아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려 애쓰는 이들 또한 과학자라는 점은 7, 80년대 SF영화와 궤를 함께한다. 비록 스플래터 호러 장르의 물고를 텄던 <좀비오>의 참신함이나 결말의 파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옥인간>의 이야기에는 흡사 고전 활극을 연상하게 만드는 다양한 매력과 재미가 있다. <지옥인간>은 한국의 극장에서 상영된 적이 없다. 스튜어트 고든과 브라이언 유즈나 콤비의 영화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처럼, 이 영화를 극장 스크린에서 필름상영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특권이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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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리뷰

.......가이 매딘, 자궁의 빙하기

가이 매딘의 '겁쟁이는 무릎을 꿇는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영화감독들 뿐만 아니라 영화팬들을 몇 십 년째 사로잡고 있는 현대의 저주가 있다. 그것은, 영화 문법의 개발은 멈춰 버렸고, 더 이상 형식과 스타일의 새로움은 없으며, 모든 새로움은 이제 내러티브의 몫이 되어버렸다는 자포자기다. 누구 말대로, 더 이상 영화는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을 취하는 것이라는 저주. 가이 매딘은 이 공공연한 저주를 깜박 잊었던 작가 중에 한 명이다.

매딘은 무의식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를 통해 비춰보는 인간의 무의식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비춰보는 영화의 무의식이다. 매딘이 원시적인 옵티칼 효과, 조악한 아이리스나 이중노출, 소프트 필터, 어설픈 자막 삽입, 저감도 필름 혹은 8mm 필름에서 얻어지는 거친 그레인과 같은 초기 무성영화의 이미지로 물러선다면, 그것은 영화 자체를 그 자신의 오래된 시간, 즉 영화사조차 버려졌던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주워오기 위해서다. 그 쓰레기통이야말로 영화의 무의식이다. 이것은 마치 삶에서 잊혀졌던 사람들이 꿈을 타고 튀어나오는 것, 도시에서 사라졌던 쓰레기들이 홍수를 타고 쏟아져 나오는 것, 또한 이사하려고 가구를 옮기다가 오래전 잃었던 물건을 되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매딘의 영화는 신화의 영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너무나 오래되어 잊혀졌던, 그래서 그에 선행하는 어떠한 시간도 불가능한 최초의 시간에 속하는 영화다. 매딘 영화는 영화의 선사시대에 존재한다. 자궁의 빙하기. 8mm 그레인들이 눈보라치는.

그러나 그 신화엔 거주하는 자들은, 고상한 그리스 신들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것. 가이 매딘의 신화에는 아이스하키 선수들, 프로레슬러들, 점성술사나 미치광이 과학자, 음흉한 간호사들이나 가죽의상을 입은 변태들, 무엇보다도 조악한 옵티칼 효과를 입은 유령들이 산다. 꿈의 홍수를 타고 튀어나오는 것들은 짝퉁 프라이팬, 날짜가 지워진 새마을호 티켓, 코묻은 불량식품 포장지, 퇴폐이발소 언니들과 같은 쓰레기 혹은 싸구려들이지, 결코 단군, 이순신, 유관순, 대통령 혹은 영부인과 같은 거룩한 문화재 혹은 위인들이 아니다. 여기에 여타의 다른 꿈 혹은 신화 작가들과 매딘이 견지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고급신화로 꾸며지는 인간의 무의식이 아니라, 저급신화 즉 대중신화로 꾸며지는 영화의 무의식. 이것은 표현주의 카메라에 찍힌 멜로드라마, 혹은 방화가 되어버린 선데이 서울이다. 괴테 혹은 삼국유사는 그만큼 키치하지 않다. 싸구려만이 거룩해야 한다. 아마도 매딘이 정립한 가장 위대한 정식은 다음일 것이다: <영화의 무의식=대중의 신화>. 빙판을 미끄러지는 정충들은 아이스하키 선수들이다(<Coward Bends the Knees>).

만약 매딘이 언제나 키치로 신화를 꾸민다면, 그것은 기억을 잃어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싸구려만이 죽은 것이고, 잃어버릴 수 있고, 또 반복해서 잃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신화국(神話國)에 이주할 수 있는 유일한 여권이란 기억상실증이다. 신화는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기억의 끄트머리이고, 그보다 오래된 어떠한 기억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령들은 자신들이 죽은 것조차 잊어버렸기 때문에 돌아온다. 매딘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주요한 모티브는 그래서 기억의 오작동이다. 과대기억과 과소기억의 대결이 매딘의 유치뽕짝 결빙 멜로드라마를 사로잡는다. 한 여자만을 기억하는 강박적 신랑과 결혼한 것을 매번 잊어버리고 매일 결혼준비만 반복하는 바보 신랑의 쌍(<Archangel>), 복수심에 사로잡힌 메타와 바람둥이 어머니(<Coward...>)이 그러하고, 예수연기자와 장의사라는 두 형제(<Heart of the World>)도 그러하다. <Careful>은 그 중 가장 흥미로운 쌍일 것이다: 서로에게 기억상실을 요구하는 두 연인은, 사실 어머니의 자궁과 아버지의 정충에 이끌리는 과대기억 망상증자들이었다. 어떠한 경우든, 그 가능성과도 같을 “총체적 기억상실”에 이르는 것, 모든 얄팍한 기억을 휩쓸어 가는 중인 8mm 눈보라를 타고 기억의 빵구에 이르는 것, 나아가 스스로 그만큼 결빙되어 투명한 입자가 되는 것이 관건이다. 빙하기란 비기억immemory의 시대다. 하지만 바로 그 얼어붙은 것의 투명함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크리스탈만이 자체발광한다(<The Saddest Music in the World>, <My Winnipeg>). 빵꾸를 통하지 않고서 우린 삶으로 돌아올 수 없다. 기억의 바닥을 치지 않고서, 우린 어느 하나 기억할 수 없다. 죽어보지 않은 자가 어찌 환생할 수 있단 말인가. 후굴되지 않은 자궁이 어찌 배태할 수 있을 것이며.

물론 이 모든 것은 매딘이 다른 풋티지 작가들과 공유하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풋티지 작가로서, 매딘의 고유성은 풋티지를 영화의 숙명으로 선언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매딘은 풋티지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반대로 영화를 풋티지로 만들고자 한다(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풋티징은 구스타프 도이치, 피터 체르카스키와 같은 오스트리아 전통에 견주어야 한다). 매딘의 가장 위대한 유머가 여기에 있다: 선사시대에 발견된 최초의 영화, 그것은 풋티지 영화였던 것이다(가장 담대한 시도는 단연 <Heart of the World>일 것이다). 어떤 영화도 원본이었던 적이 없다. 모든 영화는 풋티지 영화이며, 최초의 영화도 풋티지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화는 태생적으로, 선험적으로 신화이며, 바로 그 신화를 통과하는 8mm 그레인들은 눈보라처럼 기억을 결빙시킨다. 신화제국, 그곳은 캐나다의 얼어붙은 두메산골, 위니펙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발명도 아닌 것처럼, 단지 발견은 아니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기억으로부터 분실되었던 8mm 눈보라는, 없던 것도 아닌 것처럼 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없으면서도 있었던 것이기에 무의식의 원소들이다. 매딘의 영화는 “영화를 처음부터 재발명하려는 시도”이고 “우주의 정중앙에 끝내 영화를 위치시키려는 경건한 신화”*다. 


김곡 / 영화감독


*Guy Maddin, "Very Lush and Full of Ostriches" in From the Atelier Tovar: Selected Writings, Coach house Books, 2003,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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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ץ�� �Хå� 2013.05.02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속하지만 각 사회의 발전형태에 따라 경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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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찰진 사랑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우묵배미의 사랑>은 장선우라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던 감독의 이력에서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상징 우화의 형태를 빌었던 데뷔작 <서울황제>(1987)와 후속작 <성공시대>(1988) 이후 발표한 이 영화는 급작한 변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코리안 뉴웨이브의 주요한 성과 중에서도 시선의 폭과 성찰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서울 변두리 쪽방촌의 주민 배일도(박중훈)와 최공례(최명길)이다. 치마 공장 재단사와 미싱사로 호흡을 맞추게 된 두 사람은 첫 대면부터 품게 된 호의로 인해 사적인 애정관계에서도 호흡을 맞추게 된다. 허구한 날 공례를 두들겨 패는 폭력적인 남편, 일도의 일거수일투족을 시비하는 억센 아내는 그들의 사랑을 더욱 찰지게 만든다. 일도의 플래시백에 의해 추억되는 내러티브는 가난한 연인의 관계, 삶의 정황들에 의해 멍들어가는 그들의 상처, 도망가려 하지만 발목을 잡히고 마는 운명, 지지고 복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변두리 동네에서 벌어지는 통속적인 불륜 혹은 사랑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격동의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이행하는 당대적 상황에 대한 논평으로 또는 회고형 성장영화로서 그 진가를 드러낸다. 여기서 장선우는 새로운 시각으로 당대의 한국 사회를 조감하려 한다. 일도 부부의 이삿짐 트럭이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펼쳐지는 풍경은 자본주의의 고도화로 인해 변모해가는 서울의 지정학적 위상을 효과적으로 요약한다. 구성진 뽕짝 가락에 실린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이미지들의 트래킹 쇼트는 막 조성된 단단해 뵈는 아파트촌과 우뚝 솟은 마천루, 현란한 벽 그림이 그려진 백화점, ‘우리의 서울’이라는 도로 간판, 아파트 재개발 공사가 한창인 공사 현장을 차례로 비춘다. 이 파노라마적 이미지의 모음은 서울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궁벽한 서울 달동네에서 경기도 쪽방 촌으로 쫓겨가는 일도의 이동은 도시화, 산업화의 과정에서 주변으로 밀려나는 하층민들의 처지를 암시한다. 몇몇 인상적인 묘사를 통해 장선우는 밑바닥 인생들의 연대와 도시화, 현대화, 자본주의화의 힘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심어놓았다. 

고도 자본주의로 인해 파생된 소외를 다룬 영화로서 <우묵배미의 사랑>의 백미는 빈민 혹은 서민 생활의 실상과 애환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 삶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대사, 일체의 꾸밈을 배제한 정직한 이미지, 은유나 상징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기 넘치는 캐릭터들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인위적으로 연출되지 않았다. 이대근이 연기하는 남편 석희가 공례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신에서의 살기, 세인의 시선을 피해 숨어 든 비닐하우스 거적때기 위에서 나누는 사랑은 당대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빛나는 사실성의 성취이다. 주변화된 개인의 절망에 대한 심금을 울리는 묘사들도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허름한 여인숙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누는 섹스는 가난으로 헐벗은 그들의 내면적 정황을 육체의 제스처를 통해 절감시킨다.


장병원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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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민중들의 투쟁에 대한 애정과 위로의 

긴 호흡의 영화


-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전투>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의 감독인 페르난도 솔라나스와 옥따비오 헤띠노가 1963년에 했던 3영화를 위하여라는 선언에 따르면, 3영화는 할리우드 방식의 영화와 유럽의 작가주의 영화와는 다른 투쟁의 도구로서 행동하는 영화이자 해방영화를 의미한다. 이 선언은 영화를 혁명의 수단으로 여겼던 많은 영화들에 중요한 이론적 지침이 됐다.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전투>도 군사 쿠데타로 인한 사회주의 정권의 전복과 그 과정에서의 민중의 투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제3영화의 영향력하에 있는 작품이다. 


 <칠레전투>는 역사상 유일하게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 시절의 칠레를 보여준다. 1973 2월부터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9월까지를 기록하고 있는 영화는 선형적인 시간 구조로 진행되지 않고, 1부 부르주아의 봉기, 2부 쿠데타, 3부 민중의 힘, 이렇게 총 세 부분으로 나눠진 채 각자의 시간 구조로 진행된다. <칠레전투>는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 거리 집회와 시위, 연설과 토론, 노동 현장, 의회 풍경 등을 기록한 풍부한 영상들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극도로 절제된 설명적 내레이션을 통해 최대한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사건에 접근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무장한 민중들의 투쟁을 과격하고 강압적으로 선동하지 않고 차분하고 고요하게 풀어놓는다.


 사실 <칠레전투>에서 새삼 다시 언급해봐야 할 건 이 영화가 3부작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제작팀은 촬영을 마친 1973 9월에 피노체트 정권의 탄압을 피해 불가피하게 쿠바로 망명했고, 쿠바의 국립영화제작소에서 6년이라는 긴 편집 기간을 가졌다. 영화의 세 부분은 1975년, 1976년, 1978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세상에 공개됐다. 그래서 영화 각각 3부를 전체의 부분으로서 통일되게 다루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칠레전투>를 세 편의 영화로 나눠서 이질적인 부분들을 다뤄봐야 할 필요도 있다.


  1부르주아지의 봉기는 비행기 소리와 폭격 소리로 시작한다. 뒤이어 건물이 폭파되고 붕괴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짧은 장면이 지나가면 내레이션은 군부 쿠데타에 의해 대통령궁이 폭격당한 9월의 사건에 대한 간략한 정황을 설명하며, 6개월 전의 총선 현장으로 돌아가 그 경위를 추적한다. 1부의 시작을 알리는 폭격 씬은 2부까지를 관통하는 모티프다. 2쿠데타의 후반부에 똑같은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2부의 '쿠테타'의 끝에 가서야 그 폭격의 실체를 명확히 직시할 수 있게 된다. 1부가 폭격으로 인한 연기의 주변을 서성인다면, 2부는 그 연기를 헤집고 들어간다. 


 3민중의 힘은 앞의 두 부분과는 조금은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흔히 <칠레전투>의 형식을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시네마 베리테적 스타일에서 어긋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편집의 과정에 감독의 주관이 개입하고 있지만, 서정적인 음악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민중들 스스로 산업벨트를 형성해서 투쟁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통한  제도적인 혁명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를 꾸려가는 자율주의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지를 통해 역사에 접근해가는 방식에서 1,2가 다소 객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면, 3부는 민중의 힘에 대한 구즈만의 연가이자 일종의 진혼가인 것이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비무장한 민중들의 투쟁에 대한 애정과 위로를 담은 긴 호흡의 작품이다


최혁규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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