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이 살고 있는, 내 주변의 누군가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 <우리 손자 베스트> 김수현 감독 시네토크




김수현(감독) 여러분들이 잘 보았는지 모르겠다. 나도 이 영화에서 다룬 소재나 내용에 대해 얼마나 파악을 했는지 확신이 없다. 나뿐 아니라 다른 감독들도 영화를 만들면서 성찰도 하고 성장을 한다. 시간이 지나야 좀 되새김을 하고 이 영화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지연(영화평론가)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원색적인 영화였다.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들이 나온다. ‘너나나나베스트’, ‘할아버지별동대’ 들이 나오고 팩트TV의 자료 화면들이 실제로 나온다. 처음에는 ‘우와 이거 뭐지?’란 느낌을 받았는데, 쭉 보다 보니 패기가 느껴졌다. 요즘 한국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직설 화법을 통해 우리 사회의 논쟁적인 부분과 타협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힘에 쾌감을 느꼈다. 그런데 또한 일베나 어버이연합의 일면적인 성격들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들 삶의 다양한 모습을 여러 시선으로 보여준다. 극악한 사람으로 묘사되던 사람들 이면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을 보여주고 연민도 갖게 한다.

 


김수현 처음 전주영화제에서 제작 지원을 받기로 결정됐을 때는 시나리오도 없었다. 막연하게나마 이십 대들의 방황을 다루고 싶었는데 그에 대해 내가 잘 몰랐다. 누구나 청년들의 어려운 현실을 사회 현상으로 다루면서 큰 걱정을 한다. 하지만 해결 방안도 없이 그냥 방치하다시피 한다. 이런 현실을 거창하지 않게 다루고 싶었다. 청년들의 문제를 다룬 원작들도 잔뜩 봤는데 좀 어려웠다. 그러다가 이 친구들, 소위 일베를 좀 늦게 알게 됐다. 사이버 공간에 있는 그들의 커뮤니티를 알게 됐고, 그들의 표현 방식도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분노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한국 사회’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런데 그 사이트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좀 심각했다. 일단 이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지 궁금했다. 안타까움 이상으로, 이해되지 않고 인정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친구들의 모습과 소위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고 논쟁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내가 알게 된 내용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담기만 해도 엄청났다. 사실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다.

나도 그렇고 모든 세대는 십대 때 기성 세대와 갈등을 겪는다. 동시에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폭에 늘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나도 내 세대의 기준과 가치로 이들을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이 고민을 했다. 결국 그 친구들을 나와 같이 살고 있는, 내 주변의 누군가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재도 그렇고 감독에 대한 평판도 좋지 않아서(웃음) 계획했던 예산이 쉽게 모이지 않기는 했다.

 

정지연 시나리오를 쓰면서 취재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김수현 감독이 조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나쁜 영화>(장선우, 1997)에서 느껴지던 생생한 느낌도 있다.

 


김수현 첫 영화인 <귀여워>를 만들 때 취재를 하면서 즐거움을 많이 느꼈다. 그런데 두 번째 영화부터는 취재를 잘 안 하게 됐다. 왜냐하면 취재를 하면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를 가둬두는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내 상상으로 채울 수 있는 부분에서 더 이상 못 나아가게 제한하는 경우도 있어 이번 영화에서는 취재는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가공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주연 배우인 구교환이 영화 속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친구들을 실제로 두고 있더라. 영화 속 교환의 대사를 고치는 것도 직접 했고,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내기도 했다.

<나쁜 영화>와는 비슷한 맥락이 있다고 본다. <나쁜 영화>에서는 십대의 몸부림을 그렸는데, 그게 지금 이십 대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보여주는 부글부글한 에너지와 비슷하다고 본다. 꽉 막힌 것에 대한 항거 같은 것 말이다.

 

정지연 팩트TV의 실제 영상이나 사제 폭탄 사건 등 뉴스를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알 법한 사건들이 나온다. 사실 일베와 어버이연합의 폭력적인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기 힘든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낼 수도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런 행위를 그릴 때 윤리적 문제도 있을 것 같다.

 

김수현 어려운 문제다. 정치적, 윤리적 균형이나 기준을 나 스스로도 객관화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 어떤 뚜렷한 확신을 갖기에는 나에게도 버거운 소재였다. 단 누구를 두둔하고 누구를 비방할 문제가 아니라 어쨌든 우리 모두가 같이 생각을 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극우인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이 엄청나게 예외적이고 특수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 내에서, 함께 고민을 하는 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정지연 영화를 보면서 도시의 뒷골목 같은 소외된 공간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공간에 대한 특별한 시선이 느껴진다. 파고다 공원이나 노량진의 학원가도 그렇고, 서울의 어두운 뒷골목을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김수현 종로는 다들 알겠지만 좀 웃기고 재미있는 공간이다. 종로라는 공간의 역사성을 만들어간 분들의 문화라는 게 약간 특이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수도의 한복판인데 변화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어떨 때는 흐뭇하고 뿌듯하고, 동시에 유치하고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노량진도 마찬가지다. 워낙 오래된 공간이고 학원가가 많다 보니 노량진만의 특유한 문화가 있다. 내가 어릴 때 본 노량진과 지금 노량진이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고유한 느낌이 있다. 같은 장소에 가서 또 다른 영화를 한 편 더 찍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공간을 찾아낸 건 당연히 아니고, 이미 수십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공간에 내가 도움을 받았다.


일시 10월 15일(토) 오후 6시 30분 <우리 손자 베스트>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주민규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최근 한국 영화의 풍경]



교환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 김수현 감독의 <우리 손자 베스트>



김수현 감독의 신작 <우리 손자 베스트>를 보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교환은 하드코어 ‘일베’ 유저다(영화 속에서는 ‘일간베스트’ 대신 ‘너나나나 베스트’를 줄인 ‘너나베스트’로 등장한다). 교환은 단순히 게시글을 읽거나 댓글만 다는 정도가 아니라 ‘베스트’에 오르기 위해 직접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월호 유가족 단식 농성장 앞에서 폭식 시위를 벌이며, 노동자들의 집회 영상(고 백남기 씨가 쓰러졌던 바로 그 현장의 영상이다)을 우스꽝스럽게 편집해 낄낄거린다. 또한 여동생의 속옷 노출 사진을 찍어 게시판에 올리고, 자신에게 약점이 잡힌 여성에게 사건을 무마해주는 대가로 섹스를 제안한다. 교환의 나쁜 행동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종북 세력’들의 모임 현장을 찾아가 사제 폭탄을 던지려고 하며, 자신을 경찰에 신고했던 여성을 몰래 쫓아가 납치하고, 한 노인을 산 채로 땅에 파묻어 죽게 만든다. 또한 길에서 본 여성을 몰래 스토킹하는 것이나 자해 공갈 사기를 도와주는 것도 포함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교환은 관객에게 불쾌감을 주는 캐릭터이며 우리가 단호하게 비판해야 하는 인물이다.



<우리 손자 베스트>를 볼 때 느끼는 첫 번째 당혹감은 여기서 찾아온다. 교환이 하는 행동들은 그 자체로 너무 혐오스럽기 때문에 관객은 그에게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악당(연쇄살인범, 테러리스트, 인신매매범, 포주 등)이 주인공인 영화들을 많이 보아 왔다. 하지만 이 영화들의 대다수는 픽션이나 장르라는 방패를 내세우는 반면 <우리 손자 베스트>의 교환은 우리 사회의 실제 현실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감독은 이를 숨길 생각이 없다. 교환이 정수에게 보여주는 ‘인증 사진’을 보자. 감독은 광화문 앞 세월호 농성장의 실제 사진을 조잡한 합성 기술로 약간 변형한 뒤 보여준다. 교환이 자랑스럽게 꺼내드는 이 사진에서 우리는 세월호 참사와 당시 있었던 일베의 시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영화 후반부의 사제 폭탄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은 지난 2014년 한 고등학생이 ‘종북 세력’에게 사제 폭탄을 던졌던 실제 사건을 노골적으로 인용한다. 이런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교환의 행동을 보는 순간 즉시 현실의 일베를 떠올릴 수밖에 없고, 저절로 그에게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즉 교환은 <우리 손자 베스트>라는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인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교환의 캐릭터에게 동일시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며, 영화를 보던 나는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자주 혼란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영화가 단순히 교환의 추악한 행동과 말을 보여주는 데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교환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진지하게 교환이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를 찾아보려 한다. 이때 영화가 제시하는 첫 번째 이유는 교환의 가족 환경이다. 교환은 소위 ‘콩가루 가족’의 구성원이다. 자세한 맥락은 알 수 없지만 어머니는 딸과 서로 기절할 때까지 목을 조르고,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 같고, 아버지는 집에 들어가는 대신 그냥 회사에서 자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서 교환이 무슨 행동을 하든 방관하며, 교환의 여동생 역시 부모를 용돈 주는 사람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를 “븅신”과 “씨발년”이라고 부르는 교환과 여동생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삭막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교환이 일베라는 커뮤니티에서 나름의 정서적 유대와 소속감을 느끼는 건 꽤 그럴 듯한 설정으로 보인다.

두 번째 원인은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찾을 수 있다. 교환은 자존감이 굉장히 낮은 동시에 인정 욕구가 몹시 강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는 남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럴 만한 재주가 마땅히 없다. 이를 위해 성실하게 노력할 마음도 없어 보인다. 그런 교환이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남들이 차마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강력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단식 투쟁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피자를 먹는 것, 잠든 여동생의 사진을 몰래 찍어 게시판에 올리는 것, 사람들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것이 전부 그런 수단이다. 이런 행동은 교환으로 하여금 (일베라는 공동체 안에서) 가장 손쉽게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교환은 남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생기는 결핍을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로 손쉽게 바꾸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우 김상현, 가수 강산에 등이 참여하는 공연에 폭탄을 던지기로 결심한 교환이 공연장에 찾아가기 전 ‘소셜테이너’를 비난하는 대사를 보자. “사회적 가치의 재생산에 힘써야 하는 연예인들이 소셜테이너니 뭐니, 그런 이상한 말 붙여가지고 정치판 똥구멍이나 빨고 앉아가지고, 그런 놈들이 또 돈은 어마어마하게 벌어요.” 이 대사의 방점은 마지막 문장이다. 교환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다른 사람이 누리는 걸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들이 “부모님 사랑을 받”는 것까지 질투를 할 정도이다. 영화는 교환의 이런 뒤틀린 심리 상태를 아주 꼼꼼하게 묘사하며 교환의 캐릭터를 설명한다. 그러다 보니 교환이 스스로를 “쪼다”라 부르며 자기 비하하는 장면이나 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장면들을 볼 때는 순간 그에게 동정심을 느낄 정도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이런 접근을 통해 교환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문제는 영화가 아무리 공들여 교환을 설명해도, 또는 변명을 대신 해주어도 교환의 혐오스러운 행동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환의 인간적인 약점이나 행복하지 못한 가정 환경이 교환이 저지르는 파렴치한 행동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콩가루 집안’에서 자랐고 인정 욕구가 남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모두 세월호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사제 폭탄을 던지는 사람으로 자라는 건 아니다. 여기엔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 영화는 130분 동안 다양한 관점을 통해 교환이 저렇게 추하게 살아가는 이유를 찾으려 노력하고 때로는  변명도 대신 해주지만 교환의 머릿속 깊은 생각은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남는다.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교환이 왜 저렇게 비윤리적이고 반인간적인 행동을 계속하는지 이해하는 데 결국 실패한다.



<우리 손자 베스트>가 끝나는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이 영화는 반복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교환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준 다음(즉 교환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까지 보여준 다음) 교환이 이렇게까지 망가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또는 설명하지 못한다. 나아가 그 후로 교환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나에게는 영화가 선택한 이 ‘열린 결말’이 매우 아쉽게 느껴진다.

마지막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지금 교환은 ‘어버이별동대’ 소속인 정수의 삶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참이다. 정수는 교환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를 남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인물이며 그런 그의 마지막 소원은 국가유공자 훈장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정수는 심사에서 탈락하고 지금까지의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할 위기에 처한다. 결국 정수는 스스로 현충원에 묻히기를 선택하고 교환의 도움을 받아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킨다(이 과정에서 교환은 살인자가 된다). 정수는 죽고 이제 남은 건 교환이다. 교환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또는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행동을 실천에 옮겨 왔고 그 과정에서 살인까지 저질렀다. 더 이상 강력한 프로젝트가 있을까 싶지만 교환은 여전히 “저 이제 뭐하죠?”라는 질문을 던진다. 믿기 어렵지만 그는 계속해서 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어한다.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폭탄 투척에 납치, 살인까지 저지른 교환에게 과연 어떤 프로젝트가 남았을까. 어쩌면 이 다음 이야기야 말로 교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는 교환의 현재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는 걸 멈추고 그냥 엔딩크레딧을 올리는 쪽을 택한다. 머리를 깎은 채 광화문 광장에 등장한 교환은 밝은 미소와 함께 “내가 찾은 팩트는 바로 나다”라고 말하며 혼자 춤을 춘다.

이 결말이 어떤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첫 번째 가정 - 그렇게 남들의 인정을 받으려 했던 교환은 더 이상 남의 판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팩트”로 삼기로 한다. 그는 이제 과도한 인정 투쟁을 벌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두 번째 가정 - 교환은 이미 미쳐버렸다고 볼 수도 있다(배우 구교환이 탁월하게 연기해낸 그 기묘한 표정과 춤을 떠올려 보자). 정수의 비참한 마지막을 지켜본 교환은 타인이나 국가의 인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함을 깨닫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지도 못한다. 만약 ‘나’라는 팩트가 이미 구제불능으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더 손을 쓸 수 있겠는가. 더 이상 교환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손자 베스트>는 이 두 가지 가정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며 끝나는 영화다. “내가 찾은 팩트는 바로 나”라고 말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춤을 추는 교환의 모습에서 관객은 그가 ‘제대로’ 된 삶을 살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그만 미쳐버리고 만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교환이 지금까지 벌인 행동을 꼼꼼하게 설명하고 교환의 환경을 정성스럽게 묘사하던 영화가 정작 교환의 현재 삶을 보여줄 순간이 왔을 때는 말끝을 흐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교환과 같은 청년이 등장한 이유는 누구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 손자 베스트>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선택한 그 애매한 결말은 다른 문제이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최근 한국 극영화 중 우리 사회의 가장 문제적인 현실을 포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동시에 그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남긴다. 정답을 바란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교환의 삶을 통해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 다음 가장 결정적인 순간 그 문제에 답을 내놓기를 피하거나 미룬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교환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한바탕 춤을 춘 교환은 지금은 사회 안에서 과연 어떤 역할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김보년 프로그램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서울역>, 입술에서 미끄러지는 음성

- 연상호 <서울역 (2016)>





연상호 애니메이션들은 모순적이다. 사회비판적인, 현실적인 고민들을 중심축으로 하면서 막상 그 속의 인물들은 실제 인간을 모사하는데 사력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형상은 갖췄다. 말도 하고, 잠도 자고, 밥도 먹는다. 서로 죽이고 싶어 안달 난 것까지 똑 닮았다. 그런데 이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형식적인 정밀 묘사에선 부자연스러운 점들이 있다. 진작 진단된 일례로는 허문영 평론가나 곽영빈 평론가가 짚어낸 가면으로서의 얼굴이 있다(<씨네21> 933신전영객잔’, <만화애니메이션연구>, "연대는 ()가능하다!"). 연상호 애니메이션 속 얼굴은 인간의 세밀한 안면 근육을 굳이 흉내 내지 않으며 비현실적으로 급격한표정 변화를 보인다. 살아 숨 쉬는 인간과 2D 애니메이션 인물 사이의 가시적인 간극이다. 이와 같은 괴리는 여태 조명되지 않았지만 무시해선 안 되는 특성들이다. 연상호의 말마따나 실사영화에서는 숨소리와 떨림만으로도 평가받는 가치들이 애니메이션에 부재하는”, “일반 사람도 구분할 수 있는데 평단이나 저널에서 하나로 퉁치는지점들이기 때문이다. (<씨네 21> 1068호 이성강, 연상호 감독 대담)

 

입술에서 미끄러지는 음성


                                             (<돼지의 왕트레일러)

 

이 지점들 중 주목받지 못한 한 부분이 인물들이 내뱉는 음성과 입술 움직임의 어긋남이다. 초기작부터 <사이비>, <서울역>에 이르기까지 인물들의 말소리와 입술은 계속해 미묘하게 불일치하며 입술과 음성의 주인이 다름을 가리켰다. 인간이 창조한, 인간을 닮았지만 결코 인간은 아닌 평면적 피조물에 실제 인간의 육성을 덧입힌 혼종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이처럼 전면화된 혼종성은 애니메이션 속 인물의 실체 없음을 상기시킨다. 여느 실사영화보다도 현실 반영적인 연상호 애니메이션에서 정작 인물들은 피와 살로 이뤄진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청각과 시각 사이의 불일치는 그다지 타개되려 하지도 않는 듯하다. 단순히 애니메이션의 태생적 난점이라고 하기엔 <인랑>이나 <바쉬르와 왈츠를>와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에선 보이지 않는 특성이기도 하다.




                                                     <인랑>



                                                (<바쉬르와 왈츠를>)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입술과 목소리 사이의 싱크가 아주 미묘하게 안 맞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들의 목소리가 본체로부터 온전히 독립적인 <인디아 송 (마르그리뜨 뒤라스, 1975)>처럼 청각과 시각 간의 괴리 자체에 매달리도록 하지도 않는다. 분명히 저 인물의 목소리임은 분별할 수 있지만 완전히 단정 지어버리긴 찜찜할 정도의 싱크인 것이다. 결국 모른 척 적응해버릴 수 있는, 그러나 문득 눈에 띄면 섬뜩섬뜩한 지점이다.


그래서인지 연상호의 인물들은 분명 인간을 본떴지만 최종 단계에서 진짜 인간으로 거듭나기를 거부하는 것도 같다. 왜일까. 사회비판적인 주제를 전달하기에는 이런 디테일의 교정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지옥>에서 <사이비>까지, 갈수록 스토리상의 환상적인 요소를 제거해온 연상호인데 어째서 인물들은 더 진짜(인간)처럼 바꿔나가지 않는 걸까.

 

 

<서울역><부산행>


이 질문은 무엇보다도 <부산행><서울역> 연작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부산행>은 실사로, <서울역>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와중에 <부산행>은 무던하게, <서울역>은 날카롭게 연상호 특유의 메시지를 담은 적절한 비교 대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고정관념에 따르면 사회고발적 영화는 실재하는 세계를 그대로찍는 것이 적합하다. 그리고 이런 편견에 따라 연상호는 애니메이션 대신 실사영화를 찍길 수없이 권유받았다. 그런데 막상 연상호는 자신의 첫 번째 실사영화를 한없이 가볍게 풀어나갔다. 세간에서 말하듯 <부산행>통쾌한 좀비스릴러, 연상호의 독기가 순화된 영화다. 도대체 왜, 드디어 진짜 인간 배우를 고용하게 되었을 때 연상호는 되려 피상적으로 변했을까. 여기서 연상호가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대하는 태도를 짚어볼 수 있다.


입술과 음성, 얼굴로 돌아가 보자. <서울역>의 결말 즈음, 석규(류승룡)는 대답 없는 혜선에게 소리친다 야 이년아. 뭐야, 혜선아, !”. 류승룡의 목소리는 묘하게 석규의 입술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석규의 가면으로서의 얼굴은 다소 평면적으로 목소리뿐인 절규를 전달한다. 아무리 봐도 이 애니메이션은 처음부터 실사영화의 연기를 쫓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되려 각 인물을 어느 구체적인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로 환원시키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리고 이를 통해 확보한 거리감 속에 온갖 추악함과 뒤틀림을 채워 넣었다. 반면에 <부산행>에서는 처음부터 이런 거리두기를 포기하고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상화(마동석)는 외친다 기차 빼 이 새끼야”. 과연 이것은 온전한 상화의 목소리일까? <베테랑>의 아트박스 사장 5, 마요미(마동석 + 귀요미) 2, 상화 3할쯤 될 것 같다. 실제 인간은 배역에 고유의 자신을 덧입힌다. 그런데도 진짜 자기 목소리인 것처럼 자연스레 말한다. 명백한 가짜 상화다. 차라리 제대로 가짜임을 보여주려는 듯이 <부산행> 속 공유는 카누 광고모델로, 소희는 만두소희로, 마동석은 마요미로 반쯤 등장한다. 따라서 괜찮다, 거리 같은 것 안 둬도. 어차피 이대로는 기존 연상호의 주제를 기존 연상호의 방식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이런데 <부산행>에 여태껏의 주제를 고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차별 속에 놓인 애니메이션, 연상호라는 투사


실사와 CG 사이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는 와중에, 그리고 영화가 디지털 포맷으로 전환되면서 타 매체와의 물질적인 구분이 어려워진 와중에,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차별 속에 놓여 있다. 애니메이션은 모름지기 환상성과 감각성을 자극해야 한다는 믿음이 팽배한 것이다. 나아가 애니메이션에 관한 비평적 논의의 다양성마저 부재한 실정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연상호의 작품들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무수한 글들이 주제적인 측면만을 부각하며 작품들을 단순화시키고 있다.


물론 연상호 애니메이션들은 이런 편견들이 범람하는 현실 속에 존재함으로써 유의미할지도 모른다. 차별 없는 곳에서 투사는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차별을 철폐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의 작품속에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기에 연상호 작품은 더욱 동시대에, 이런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평가받아야 한다. 저항할 차별이 소멸된 이후의 투쟁은 차가운 유물로 남아버리기에. 부디 하루빨리 연상호 작품들을 읽을 새로운 시각들이 나타나길 바란다.

 

이호정 |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