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시네바캉스 서울/Review'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1.08.19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
  2. 2011.08.19 알랭 레네의 '뮤리엘'
  3. 2011.08.19 로베르 브레송의 '돈'
  4. 2011.08.02 브라이언 드 팔마의 '드레스트 투 킬'
  5. 2011.08.02 마이클 치미노의 '대도적'

어떤 영화는 작품으로서의 완결이나 가치를 논하기도 전에 그들이 야기한 스캔들로 인해 영화사에 오명을 남기기도 한다. <천국의 문>은 이런 범주에 해당하는 불운의 전범으로 곧잘 거론된다. 720만 달러 정도의 규모로 제작되기로 한 영화가 4400만 달러를 쏟아 부어 가까스로 완성된 뒤, 고작 2백만 달러의 박스오피스 스코어를 기록함으로써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치명적 손실을 끼쳤다는 것이 이 영화에 쏟아진 저주에 가까운 혹평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장장 세 시간 삼십 분에 달하는, 미국의 탄생과 역사에 대한 이 기념비적인 메타포는 미국영화사의 문제적 감독 중 하나인 마이클 치미노의 웅혼이 하나하나의 쇼트 마다 서려 있는 역작이다.

장대한 규모와 서사시적 작풍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1976)이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1985)에 견줄만하며, 하늘과 산, 대평원을 훑어가는 장쾌한 파노라마 쇼트는 조금 먼저 나온 테렌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에 필적한다. 맬릭이나 코폴라, 베르톨루치를 의식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치미노의 야망만큼은 저들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이야기는 19세기 말 와이오밍 주 존슨 카운티를 물들인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존슨 카운티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법원 수사관 제임스(크리스 크리스토퍼슨)는 패악의 온상이 된 그곳의 사정을 조금씩 알게 된다. 부유한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의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 청소 작업이 모의되면서 프랭크 칸톤(샘 워터스톤)이 이끄는 지주들은 강도 혐의를 씌워 존슨 카운티의 이주민들에 대한 합법적인 살생부를 만든다. 살생부에는 제임스와 그의 친구 네이트(크리스토퍼 월큰) 사이에서 삼각관계에 놓인 창녀 엘라(이자벨 위페르)도 끼어 있다. 20년 전 대학 졸업식에서 자유와 이상을 꿈꾸었던 동무들은 찌들은 모습이 되어 재회한다. 희망과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온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돈만 밝히고, 뿔뿔이 패거리로 나뉘어 서로 으르렁거린다. 한때 평화와 생기가 넘쳤던 이 공동체는 점점 위험해지더니 천국의 향기가 사라진 학살과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 버렸다.


<디어 헌터>와 같이 <천국의 문>은 미국의 다원주의가 어떻게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알레고리를 보여준다. 몇몇 평자들은 영화 안에서 서사시적 엄숙주의와 웅장한 세계관이 정교한 서사로 응결되지 못했음을 지적했지만 치미노는 그 자체로 미국의 뿌리와 동일시되는 서부의 역사를 탈신화화하여 그 본질을 들추어낸다. 특별히 여러 번 등장하는 춤 시퀀스와 풍경의 시각화 방식이 눈길을 끈다. 도입부 대학 졸업식 장면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청년들의 집단 군무, 이민자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롤러스케이트 댄스와 이어지는 제임스와 엘라의 아름다운 춤 장면은 영화적 음율과 미감이 한 경지를 보여준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춤은 공동체적인 가치가 충만하게 넘치고, 변질되고, 마침내 파괴되어 버리는 과정을 은유하는 장치로 쓰인다.

<천국의 문>은 백인 신교도들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되어 온 미국의 탄생을 타자에 대한 정복과 학살의 역사로 규정한다. 반골 감독 치미노는 여러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생각대로 영화를 찍었고, 결국 사상 최악의 재앙이자 할리우드에서 가장 체제 전복적인 문제작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세계의 상징과 알레고리로 점철된 다분히 문학적인 각본을 보완하는 것은 <서바이벌 게임>(1972), <옵세션>(1976), <디어 헌터>를 찍은 명 촬영감독 빌모스 지그몬트의 유려한 카메라워킹이다. 회화적인 구도와 색감,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이동 촬영 쇼트는 장면마다의 품격을 한 뼘쯤 높여 놓는다. 풍부한 정서와 뉘앙스를 전하는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으로도 <천국의 문>을 필름으로 확인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글/장병원(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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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레네의 영화를 진정한 현대영화의 출발점이라 말하면서 종종 간과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그가 프랑스 역사의 어두운 지대를 통과하며 세계 기억(홀로코스트, 히로시마, 알제리 전쟁)의 문제를 다뤘다는 점이다. 레네에게 중요했던 것은 기억의 지리정치학이다. 그는 전후 20년의 침울한 시기동안 프랑스인들이 기억상실증에 빠졌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기억의 계속적인 변경이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레네적 인물들의 무기력은 그들이 과거의 기억과 망각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예외적인 인물들, 즉 수용소의 시간에서 되돌아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와 관련한 거짓 기억들과의 다툼에서도 발생한다. <히로시마 내 사랑>(1959)에서 레네는 글로벌한 기억과 개인적 기억의 충돌을 그렸다. 글로벌한 공포의 기억은 히로시마라는 장소에 구현되어 있고, 개인적인 기억은 느베르에서 프랑스 여인이 겪은 외상에 있다.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기억 저편에는 기억상실과 망각을 강요한 억압된 기억이 또한 있다. <지난해 마리앵바드>(1961)에서 기억은 미로와도 같은 거울들에 왜상을 만든다. 남자는 여인에게 둘이 지난해에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눴고 그녀가 정한 약속을 위해 지금 왔으며 이제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말하지만, 여인은 남자의 주장을 부인한다. 둘은 기억을 공유하지만 한 명이 확언할 때 다른 이는 부인한다. <뮤리엘>(1963)에 이르면 두 개의 글로벌한 기억(2차 대전의 폭격과 알제리 전쟁)이 개인적인 사랑의 기억과 연결된다. 불론느에서 중고가구점을 운영하는 엘렌은 알제리에서 돌아온 옛 애인 알퐁스와 재회하면서 기억의 혼란에 빠진다. 한편 알제리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엘렌의 아들 베르나르는 고문으로 사망한 알제리 소녀 뮤리엘에 대한 기억 때문에 강박증에 시달린다. 레네는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의 재건축 과정과 전쟁의 기억을 병치시키면서 조심스럽게 알제리 전쟁이 초래한 정치적인 문제를 끄집어낸다.

<뮤리엘>의 첫 장면은 유례없는 몽타주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층위에서 보자면 엘렌이 자신의 중고가구점에 온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단순한 장면이다. 하지만, 마치 깨어진 유리조각들처럼 엘렌과 여인, 가구들, 그리고 누군가 커피 잔을 매만지는 손의 파편적인 쇼트들이 불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가 세계와 맺는 관계의 방식이 이러하다. 전쟁의 파괴에서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세계에 거주하는 이들이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기억에 의해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레네의 몽타주는 이런 파괴된 세계, 뿔뿔이 흩어진 세계, 중심을 잃어버린 세계의 감각을 파편적인 몽타주로 구축한다. 기억과 의식 그 자체가 무질서를 조건으로 하기에 불연속적 쇼트가 구축한 세계 또한 무질서가 허용된다. 시간의 혼동, 공간의 혼동 속에 속박되어 있는 인물들, 그들의 정신적 상태는 사고와 언어의 위기뿐만 아니라 표상의 절대 위기를 반영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뒤라스의 문학에 대해 지적하면서 ‘극악무도하고 고통스런 그런 광경들이 (결국) 해를 입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각장치와 표상장치다’라고 말했던 것이 이와 같다.

글/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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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죄인이다. 그들은 자의건 타의건 간에 매우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죄인이 된다. 그러나 브레송의 마지막 작품인 <돈>에서 희생과 그에 따른 구원의 메타포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브레송의 엄격한 얀세니즘은 신의 이름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된 운명이 일으키는 끊임없는 모순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 영화로 갈수록 그는 촘촘한 사회의 계약 관계와 그 사이의 그물망으로 인해 물질화되어 버린 세계에서 인간과 신을 소통시키는 단 하나의 끈인 구원과 은총의 부재에 대해 침묵을 지키면서 다분히 묵시록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을 구원하는 신은 망설이고 있으며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갖가지 종류의 물신에 도전하고 저항해야만 한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금욕적인 정신 상태를 통해 신에게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들과 싸워가는 동안 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금욕주의는 점점 확장되어 마침내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이본이 처음 감옥에 가기까지의 과정에서 그 자신의 의지나 욕망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철저하게 다른 사람의 욕망의 희생자이자 마치 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듯한 일종의 속죄양의 위치에 서게 된다. 실제로 그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채 죄인의 몸이 되어 감옥에 갇힌다. 아이는 죽고 아내는 떠나버린 채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진정한(?) 죄인이 된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한 소년이 만든 위조지폐에서 비롯되지만 정작 그 소년들은 부모들이 소유한 돈의 힘 덕택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결국 모든 상황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돈의 힘이며 돈은 이 영화에서 마치 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 보인다.


브레송이 그려내는 얀세니즘적 세계에서 죄는 실제 죄를 짓는 행위보다는 거꾸로 결과적인 처벌에서부터 비롯된다. 늙은 여인은 운명적으로 이미 죄인이며 그녀 앞에 놓인 모든 고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어버린 후 완전히 변해버린 이본의 모습은 마치 사드(sade)적인 영웅과도 같다. 사드적인 의미에서 영웅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신보다 앞질러 스스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앞당겨 실행한다. 이는 신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이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주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본은 부조리한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그 신에 대항해 스스로 죄를 짓고 경찰에 자수함으로써 신의 뜻을 앞질러 이행한다. 이는 신의 부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정면 도전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브레송은 이본의 선택에 어떤 가치 부여도 하지 않는다. 이본은 반드시 사형당할 것이지만 또한 브레송은 그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돈>에서 브레송은 더 이상 <잔다르크의 재판>(1962)과 <무셰트>(1967)에서와 같은 성스러운 죽음을 통한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돈>에서 브레송은 진실로 인간 세계의 깊숙한 내면으로 침투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신을 긍정한다. 이 영화에서 인간을 배반하는 물신의 이름, 그것은 바로 ‘돈’이다. 그것은 브레송의 가장 참혹한 결론이기도 하다.

글/최은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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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릴없이 미술관에 앉아 있었다. 무슨 전시였는지는 가기 전에도 몰랐지만 보면서도 잘 몰랐다. 사람이 크게 붐비지 않은 걸 보니 인기 있는 작가는 아니었지 싶다. 그림체가 일관되지 않았던 걸 보면 개인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나는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미술관에 앉아 있었던 거니까. 매일 집에서 집밥 같은 섹스가 있기는 있어 왔다. 허나, 엄밀히 말하면 그건 성행위를 모사한 집안일에 불과했다. 성감도 뭣도 없이 마냥 고단한 노동일 뿐. 어쩌면 내 팔자의 섹스는 고작 이런 식으로 끝나버릴지 모르겠다는 상실감에 명상삼아 머리도 씻을 겸 세 시간쯤 벽을 보고 있고 싶었는데, 벽만 마냥 봐도 미쳤다 소리 안 들을 공간이 미술관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에 마냥 앉아 있었다. 한참 그렇게 있으니 현실 감각도 좀 되돌아왔다. 집에 가는 길에 칠면조를 사가야 한다는 사실도 떠올랐던 걸 보면. 그런데 그 순간, 정말이지 기적처럼. 나는 ‘세상이 두 쪽 날지라도 지금 당장 섹스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낯선 이를 만났다. 미술관에서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다니 도무지 말이 되지를 않지만, 그보다 더욱 비현실적이었던 건 그 다음이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서로 몇 차례 더 시선을 교환하게 됐고, 합승을 가장한 택시 뒷좌석에서 마른하늘의 날벼락보다 더 기막힌 섬광처럼, 섹스를 하게 됐다. 택시 기사의 노골적인 염탐질도 아랑곳 않고 계속 되던 행위는 그 사람의 집까지 이어졌고, 밤새 우리는 맺힌 욕망을 짐승처럼 풀고 털고 뱉었다. 그건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근사하고 우렁찬 섹스였다. 자, 여기까지만 보면 이건 꽤 완벽한 엔딩이다. 허나 그 후의 에필로그는 말하자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쪽이었다. 제정신이 돌아온 후 황급히 그 사람의 아파트에서 빠져나오던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면도칼로 난자되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격자들이 있었던 와중에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 한 채 말이다.”


<드레스드 투 킬>의 초반 30분을 대략 정리하자면 이런 식일 것이다. 글로만 읽으면 개연성과 진부함의 경계 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단선적이지도 않고 미묘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의 감정을 어떻게 영화로 풀어낼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를 않는다. 이 감정들을 커트 단위로 썰어 내다보면 얼마나 많은 뉘앙스들이 휘발되겠는가. 자칫하면 그냥저냥 졸속 제작되는 에로물들과 차별점 하나 없이 딱 그 짝이기 십상 아니겠는가. 이런저런 의구심과 의혹이 가짓수 많게 펼쳐지기 마련인데, 구태여 그걸 스스로 누를 필요는 없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기우들은 순식간에 부서져버리기 때문이다. 30분짜리의 거대한 오프닝 시퀀스는 단 한 호흡으로 휘몰아치며 쉼 없이 질주한다. 지독히 처절한 상실감부터 우아하고 짜릿한데다가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성감, 보는 사람의 뇌와 가슴에까지 반드시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살인까지. 그게 전부, 쉼표 하나 없이 덩어리 딱 하나로 그냥이다. 프레임 바이 프레임으로 잘라 뜯어보더라도 연출의 섬세함과 치밀함은 부실한 구석을 찾기 힘들다. 영화 속 여성의 가슴 노출 횟수, 베드신 등장 횟수, 살인 음모 반전의 타이밍 맞춘 플롯 포인트까지, 투자자의 요구에 모범답안을 정확히 제시하는 와중에도 감독 스스로 끝까지 유희하는 밸런스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이건, 깎아지른 완벽이다. ‘모름지기 이런 것이 상업영화’라는, 다음 세기가 되더라도 명증한 레퍼런스의 하나로 남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글/이해영(영화감독 <페스티벌> <천하장사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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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 한 가운데의 교회. 머리를 얌전하게 빗어 넘긴 목사 썬더볼트(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근엄하게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러다 마치 타란티노의 <킬빌2>(2004) 한 장면처럼 중년의 사나이가 교회로 들어와 목사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다. 엉겁결에 달아나던 목사는 라이트풋(제프 브리지스)의 차를 얻어 타게 된다. 썬더볼트는 목사가 아니라 전설의 은행 강도이며, 한국전에서 돌아와 그저 백수로 지내는 말썽장이 라이트풋은 이제 막 그 차를 훔쳐 달아나는 상태였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이상한 여행이 시작되고, 곧 또 다른 두 남자 레드 리어리와 에디 구디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들은 썬더볼트가 돈을 빼돌렸다고 굳게 믿는 남자들이다. 그렇게 사기꾼이 목사로 행세하는 교회는 낯선 사람에 의해 난장판이 되고 훔친 차는 떠돌이 남자들의 발이 된다. 그런 간략한 얼개만으로도 마이클 치미노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황량한 풍경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쓱쓱 써나간다. 영화가 사기꾼이 설치는 교회에서 시작해 돈이 숨겨진 학교에서 끝나는 것도 무척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 에디의 말을 빌자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썬더볼트와 라이트풋’은 ‘멍청한 마을의 이상한 녀석들’이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캐릭터는 물론 직전까지 <더티 해리2: 매그넘 포스>(1973)를 성공시키며 ‘더티 해리’ 캐릭터까지 덧씌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역시 <배드 컴패니>(1972)에서 사기꾼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젊은’ 제프 브리지스는 기존 캐릭터 이미지와 맞물려 매력적인 시너지 효과를 낸다. 총이 있음에도 굳이 맨손 대결을 자청하는 레드, 전혀 도움이 안 돼 늘 구박만 당하는 운전수 에디 등도 이상하긴 매한가지라 <대도적>은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기이한 강탈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얼떨결에 힘을 합치게 된 네 남자는 금고를 털기 위해 머리를 맞대게 된 것. 사실 별다른 이유 없이 제프 브리지스가 여장을 하면서까지 세밀하게 준비하고, 거대한 박격포가 등장하는 금고 파괴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 범행 과정 역시도 여타의 강탈영화와 비교해도 독특하다.

<대도적>은 마이클 치미노가 이후 만든 <디어 헌터>나 <천국의 문>과는 큰 연관관계를 찾아보기 힘든 버디무비다. 어쩌면 영화평론가 로빈 우드의 얘기처럼 “<디어 헌터>나 <천국의 문>을 만들 만한 야심과 대담함을 예상할 수 없었”기에 더 흥미로운 영화가 바로 <대도적>일지도 모른다. 변칙적인 내러티브와 배배 꼬인 장르적 컨벤션,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제프 브리지스가 만들어낸 생생한 캐릭터가 그야말로 톡톡 튄다. 1960년대 말 <이지 라이더>(1969)와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그리고 <내일을 향해 쏴라>(1969)를 통해 결정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남성 버디무비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제리 샤츠버그의 <허수아비>(1973), 로버트 알트먼의 <캘리포니아 스플릿>(1974) 등으로 이어졌는데 로빈 우드는 <대도적>을 위 두 작품과 한데 묶으며 “기존 버디무비들을 통해 확립된 원칙들의 변종으로서 가장 뛰어나고도 특이한 작품 중 하나”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만큼 반가운 얼굴들도 많다.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또 다른 할아버지로 기억되는 조지 케네디를 비롯, 제프 브리지스가 처음으로 유혹하는 여자로는 TV 시리즈 <듀크 오브 해저드>에서 섹시한 데이지 듀크를 연기했던 캐서린 바하, 제프 브리지스와 잠깐 일을 같이 하는 단역으로 게리 부시가 출연한다.

글/주성철(씨네21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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