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 특별전’이 막바지에 이른 일요일 오후,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왕우의 장렬한 마지막을 보여주는 영화 <대자객>을 보러 모였다. 영화 상영 후에는 장철 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표했던 오승욱 감독과 김영진 평론가와의 대담이 이어졌다. 직접 왕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담부터, 장철 영화가 아시아적으로 영향을 준 폭력의 표출 방식에 대해서까지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장철 특별전을 맞아서 특별히 두 분의 대담을 준비했다. 시네마테크의 소식지에 오승욱 감독이 쓴 글을 보시면 영화를 보던 관객이 싸우는 장면이 나오면 깨워달라고 하소연했을 정도로 <대자객>은 장철 영화 중 가장 지리한 영화중의 한 편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느릿함이 장철 영화의 핵심을 오히려 많이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자리에 모신 두 분의 장철 영화, 특히 왕우에 대한 기억부터 들어보며 대담을 시작하겠다.
오승욱(영화감독): 요새 청소년들 중에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배운 것도 없고, 중학교 때 퇴학당하고, 할 수 있는 건 싸움밖에 없을 때 <대자객>의 왕우처럼 이러지 않을까 싶다. 자객에 대한 수많은 영화가 있지만 <대자객>은 남다른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금연자(심야의 결투)> 촬영할 때 장철 감독이 왕우에게 “넌 거기서 죽은 거야! 그런데 넌 부활한 거야!”라고 했다고 하던데. 장철은 뭔가 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안 되는 것에 대한 원망의 마음, 불만-원념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의 원념에 대해 그리고자 했던 감독이라 생각한다.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교수): 나는 왕우와 잠깐 인사만 하고 자세한 얘기는 못했는데, 오승욱 감독은 오래 인터뷰를 했다. 동석을 했던 기자의 말에 따르면 오승욱 감독의 디테일에 대해서 왕우 선생이 질릴 정도였다고 하더라.
오승욱: 적룡도 만나고 강대위도 만나보고 한 시간 씩 인터뷰를 했는데 강대위는 전혀 기억을 못하더라. 물어보면 겸손인지 아닌지 “감독이 시켜서 하는 거지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더라. 적룡도 좀 그런 스타일로 얘기했다. 홍콩 배우들이 그렇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왕우도 그럴까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전혀 안 그러고 거의 다 얘기를 해줬다. 심지어 맞을까봐 무서워하면서 “총가지고 다녔다면서요”라고도 물어봤었다. 총을 항상 가방에 놔뒀는데 어딜 가든 가방을 열어두고 한 번에 총을 잡을 수 있게 해놓고, 입구서부터 탈출구를 다 보고 그랬다더라. (웃음) 삼합회 등 적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 하나를 물으면 3~4개 대답을 해줘서 즐거웠다. 그런데 작년 금마장 영화제 사진을 보니 그 몇 년 새에 너무 늙었더라. 말술을 해서 그런지 신장이 안 좋은 거 같다. 강대위만 자기 관리가 잘 된 것 같다. 적룡은 그 잘생기고 멋있는 얼굴이 거의 무턱이 된 걸 보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김성욱: <대자객>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장철의 무협영화에 대한 기대감과는 많이 다르다. 왜 많은 자객들 중에서 섭정인가, 왜 이 인물을 다뤘고, 왜 이 인물의 라스트의 암살 시도까지 가기 위한 느릿한 시간들이 필요했는가, 이런 점이 궁금하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어지는 자객의 설정이 독특하다. 충의나 대의나 국가적인 신의나 이런 것과는 상관없는 폭력을 자행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폭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라스트 씬에서 섭정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이름을 남기지 않고 얼굴까지 훼손해버린다. 그럼으로 해서 그의 이름이 결코 바깥에 알려질 수가 없는 거다. 왜 죽였는지, 무엇 때문인지도 알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된다. 의미가 보태어지는 건 섭정의 누이의 자결 때문에 이루어지는 거지, 그가 수행한 폭력, 테러에 의해서는 아니다. 다른 장철 영화에서도 표면적으로 보면 영웅들의 싸움은 불의에 대항하는 건데, 하지만 죽음이 불의라고 하는 상황을 드러내줄 뿐이지 사실은 불의에 대항하는 대의적인 폭력이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대자객>에서 섭정이 죽은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비슷하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에 그 혼자 있는 상태에서 거의 절대적인 고독함 안에서 발생한다. 국가적인 폭력이나 대의적인 폭력이라는 것은 사실 사회성을 띄게 되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죽이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혀지는가가 묘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건 완벽한 의미에서 절대적인 고독을 안고 죽어가는 것이기에 단순하게 무정부적 폭력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런 점을 강렬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렇게 느리고 상당히 긴 정리의 시간들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게 장철영화의 핵심적인 폭력의 특정한 면을 이영화가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오승욱 : 우리는 대개 오래 살고 싶어 하지 않나.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언제 죽느냐는 이 친구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죽느냐만 중요한 주인공이더라. 선과 악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자기가 생각한 명예, 약속 이것 하나만 중요할 뿐인 주인공이 장철 초기영화들, <금연자(심야의 결투>, <대자객>, <복수>에서 보인다. 재밌는 건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사무라이>(Le samourai : 한밤의 암살자)라는 영화가 나왔고 고독한 킬러로 알랭 들롱이 나왔는데 섭정과 그 둘이 좀 비슷하다. 2년 후, 따지고 보면 겁쟁이라는 말 때문에 무의미하게 자살적 행동을 하는 네 명의 주인공이 나온 <와일드 번치>도 있었고, 그 당시에 이런 주인공들이 많이 나왔다. 장철이 이 영화를 촬영하러 쇼브라더스 스튜디오를 갈 때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최루탄 연기를 맡으면서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러더라. ‘이 구닥다리 같은 이런 영화를 누가 볼 것인가. 학생들의 생각과 관심사는 내가 만든 영화와는 다른 건데 누가 좋아할 것인가.’ 그런데 의외로 당시 60년대 말의 젊은이들은 이 영화에 열광했다. 프랑스에서도 <사무라이>같은 영화를 누가 볼 것인가 했는데 많이들 봤고. 이것도 연결시키면 우스울지 모르지만 일본에서는 <내일의 죠>가 학생들한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이 주인공들이 다 비슷하게 결말을 향해 가는데 그런 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영진: 홍콩에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학생들 운동이 있었는데 홍콩이라는 여건이 특수하다. 데모를 한다고 해도 식민지에서 정권을 바꾸자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장철이 대륙출신인데 문화혁명 광풍이 불 때고, 장철 감독 세대는 그런 것에 대한 체험이 많기 때문에 하여튼 좀 양가적인 입장이 있는 거다. 중국 공산당 피해서 왔던 입장에서 보면 뭔가 동의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 같다. 원래 무협 전문 감독이 아니고 멜로감독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뭘 할까 이런 입장도 반영되어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반영된 게 과잉의 폭력이라는 것이다. 꾹 눌려 있다가 폭력으로 분절되는 방식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들이 불구의 형상이나 지나치게 과잉된 폭력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동아시아 영화에서 특이한 점 같다. 동아시아의 히어로들은 뭔가 불구의 형상이고 서부 웨스턴의 매끈한 형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서양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대의가 분명하지 않고 사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고 그런 특징이 있다. 그래서 대중들이 굉장히 좋아한다. 이쪽의 정서는 장철이 핵심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방향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출되는 폭력으로서 레토릭이 나온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장철 같은 영화의 폭력의 레토릭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오승욱: 또 오늘 큰 화면으로 적룡-강대위 주연의 <쌍협>과 왕우 주연의 <대자객>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적룡, 강대위는 감독이 하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하는 느낌이 있다. 왕우는 잔 디테일들을 2~3개 정도를 만들어서 가져온다. 자기를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강대위에게 기억나는 게 있냐고 물어봤을 때, ‘시나리오에서 서라면 서고 앉으면 앉는 거였다’ 이런 얘기를 했었다. 왕우는 감독이 무슨 말을 해도 일단 자기가 이해가 안 되면, 왜 그래야 하냐고 물어본다고 했다. 인상적이었던 게 <대자객>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아무리 내가 철검을 갖고 있고 이게 보검이고 저쪽은 동검이라도,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하고 싸워서 이겨요” 그랬다고 하더라. 그랬더니 감독이 “넌 슈퍼맨이니까 이겨. 널 슈퍼맨이라고 생각해”라고 해서, 촬영 전날부터 자기는 슈퍼맨, 슈퍼맨, 슈퍼맨 그러면서 촬영장에 갔고, 걸음걸이도 슈퍼맨처럼 걸으라고 해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사실 마지막 액션장면에서 왕우의 걸음걸이나 칼 쓰는 것들이 주눅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장철 감독은 적룡하고 강대위한테 롱테이크를 많이 안 쓰는 반면, 왕우한테는 굉장히 많이 썼다. 왕우를 좀 믿었던 것도 있을 거다. 얼마 만에 찍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왕우가 첫 테이크를 시작해서 다음 씬으로 넘어가면서 계속 지치고, 지치고, 지치고 육체가 소모되는 것이 촬영시간하고 같이 가는 듯한 느낌이 있고, 왕우는 그걸 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대자객>의 롱테이크는 그러니까 영화의 실시간(판타지의 시간)과 주인공이 감정이입과 육체적 소모를 같이 가져가게 한다. 자결 할 때는 왕우가 거의 섭정이 되어있더라. 장철 감독과 왕우는 서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에너지, 이런 것들의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다.

김성욱: 왜 왕우가 장철의 영화들에서 신속하게 빠졌을까?
오승욱: 싸움 장면이 나오면 이건 거의 실제와 똑같은 거다. 순간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건데 아무리 나무로 만들었다 해도 저렇게 많은 창을 가지고 한다는 건 배우에게 무식하게 많은 걸 요구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왕우는 당시에 톱스타가 되면서 너무너무 커져버리면서 장철이 제어하기 힘든 사람이 돼버렸다. 마음에 안 드는 배우를 빨리 죽이는 방법은 돈 많이 주고 신인 감독 붙여서 영화를 찍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게 1년에 7~8편 찍게 하는 면 그 배우는 완전히 죽는다. 그런데 왕우는 장철의 배려인지, 누구의 배려인지 감독데뷔를 해버렸다. 그러면서 자기 이야기도 만들게 되고. 또 재밌는 건 이 사람이 살인 교사(敎唆)도 하고, 폭력도 하고, 탈세도 했었나 보더라. 70년대 후반인가 71년에 대만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자기 왕국을 만들고 영화를 굉장히 많이 만들었다. 왕우가 똑똑한 사람인 게 신인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과는 안하려고 하고, 그냥 자기가 해버렸다. 그럼 평균은 나왔다. 자기도 연출에 대한 게 있으니까. 쇼 브라더스에 계속 있었으면 신인감독들하고 붙으면서, 감독 놓고 자기가 여기 찍고 저기 찍고 이러다가 영화도 망하고 자기도 망하는 길을 갔을 텐데 대만으로 가서 운이 참 좋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너무너무 커 버렸었다고 한다. 누구도 제어가 안 되는 배우였다. 그러니 자기가 감독을 할 수밖에. 첫 영화 <용호투>도 잘 나왔다.
김영진: 쇼 브라더스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굉장히 큰 회사이긴 한데, 구성원들이 인간적인 회사는 아니었고, 계속 있으면 망한다,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 같다. 장철 감독에 대해서 스티븐 테오가 쓴 ‘추락한 우상’인가 그런 제목의 글이 있다. 계속 뽑기 하듯 뽑아내는 무지막지한 시스템인데 장철은 쇼브라더스의 요구에 한번도 ‘No’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호금전은 굉장히 까다롭게 ‘No’를 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가 쫓겨났다. 그 구조에서 보면 왕우도 5~6년 만에 동남아를 좌지우지하는 스타가 됐는데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거다.



오승욱: 전에 김영진 평론가께서 점액질이라는 얘기를 되게 재밌게 해주셨는데 말 좀 해 달라.
김영진: 그 이야기를 처음 제기 된 게, 예전에 관금붕 감독이 게이인데 영화 백주년 홍콩 다큐멘터리 할 때, 장철 영화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 보려고 필름을 요청했었다. 결국 쇼 브라더스가 한 편도 안내줘서 나중에 독립프로덕션에서 찍은 거 몇 개로 코멘트를 했다. ‘전 세계 게이들에게 황홀한 엑스타시를 제공해준 게 장철 영화였다’라고. 찌르면 뭐가 줄줄 흐르고 끄집어내고 이 과정 자체를 진짜 섹슈얼적으로 볼 수 있겠더라. 이에 과도하게 집착한 게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장철 감독이 게이이지 않았을까)라고 관금붕 감독이 말을 하는데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폭력이 일종의 소통이지 않나. 관계 맺기에 굉장히 서툴고, 결국 온전하게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유일하게 분출되는 통로가 폭력인데 이걸 어떻게 묘사할까, 했을 때 장철의 영화방식이나 레토릭이 상당히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관금붕 감독도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한 거고.

오승욱: 맞는 말씀인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봤다. 장철감독이 60년대 중반 쯤 영화 일 안할 때, 외국영화가 오면 그것을 소개하는 글을 많이 썼는데, 제일 많이 쓴 것이 구로사와 아키라, 세르지오 레오네 영화였다. 기존의 서부극에서는 폭력묘사나 폭력이 행해진 후의 결과물을 그냥 넘어가버렸는데,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최초로 이마에 총을 쏘고, 이마에서 피가 나오고, 총을 쏘면 피가 앞으로든 뒤로든 터져 나오고, 이런 것들이 관객들한테는 상업적으로 굉장히 어필을 하는 요소였다는 생각이 든다. 장철영화도 역시 그것과 무관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호금전 영화가 가는 길과 장철의 길은 달랐다. 가령, <외팔이>에서 왕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데, 주막에서 탁자를 치고 칼을 뺐다가 다시 넣는 두 컷인가 세 컷으로 연결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경우에도 가만히 있다가 탁 하고 턱 하면 피가 줄줄 나오는 식으로 두 세 컷을 연결해버리면서 액션의 역동감을 준다. 장철은 이런 걸 가져왔고 좋아했던 것 같다.
김영진: 말씀하신 거 들어보니까 진짜 <츠바키 산주로>의 마지막 장면이 영화 역사를 갈랐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번 <붉은 수염> 볼 때도 말씀드렸는데, 일본에서도 처음이었다. 스태프들도 아키라 감독이 그런 것을 할 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열심히 계획을 짠 다음에 시키는 대로 했는데, 미후네 도시로와 나카다이 다스야하고 하다가 자기들도 놀랐다. 놀란 티 안내려고 다시 찍었다는데, 그 장면 이후로 일본영화도 판도가 바뀌었다. 레오네도 보면 대결장면에서 굉장히 시간을 아키라랑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아키라는 그 한 장면을 통해서 자기의 천재성을 보여줬지만 그 이후의 감독들은 그 그림자를 느끼고, ‘아키라가 1분 했으면, 나는 3분, 5분’ 이런 식으로.
오승욱: 장철 감독도 초기영화에서 그런 부분에 경쟁 심리가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김성욱: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아시아권 안에서 장철의 영화가 한때 엄청난 성공을 거뒀던 것에 문화적 현상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한때 있었던 사건으로 지나가 버렸다는 생각이다. 지금에 있어서 장철영화의 어떤 점들을 되새겨볼 수 있을까, 아니면 액션영화에 어떤  영향력이 남아 있을까 이것도 궁금하다.
오승욱: 외국 평론가들은 우리나라 감독들, 우리 세대가 만든 영화를 보면 왜 이렇게 폭력적인지 거의 질린다고 한다. 피가 많이 나와서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적인 상황까지 끌어갈 때의 폭력성이나 분위기 이런 것들이 그렇다. 임권택 감독 영화나 그 당시 깡패영화를 보면 <외팔이> 때문에 나온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신체훼손이 굉장히 많더라. 폭력도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과도하게, 아무리 검열이 심했어도 그 눈을 피해서 나온다. 이런 폭력들은 어떻게 보면 일본과 홍콩영화에서 나온 것과는 다른 한국만의 폭력인데, 이게 유교 때문에 그런 건지, 일제강점기 때문에 그런 건지, 우리민족이 폭력적인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폭력성에 대해서 좋은 글을 쓰셔서 깨닫게 좀 해 달라. (웃음)
김영진: 토니 레인즈가 그런 글을 썼는데, 처음엔 호금전이 소개가 됐고 깐느에서 뒤늦게 상 받고 이러면서 런던에서 엄청나게 홍콩영화 붐이 불어서 자신도 미친 듯이 봤다고 한다. 그리고 80년대 홍콩에 관심을 갖고 드나들면서 ‘아 내가 본 홍콩영화 속의 것과 홍콩의 리얼리티하고 전혀 상관이 없구나’라고 느꼈단다. ‘그건 쇼 브라더스의 인공정원에서 찍은 판타지일 뿐이었구나’하고 급 실망을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적어도 장철 정도의 영화는 판타지긴 한데 그것들이 굉장히 현실하고 긴밀하게 종합한 판타지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씀드린 것의 연장이긴 한데 실제로 정치적 개혁의 가능성이 완전히 막혀버린 사회였지 않나. 남한도 그랬고. 홍콩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서구 민주주의 제도를 가져오긴 했지만 막부랑 똑같았다. 실제로 굉장히 폭력적인데 겉은 평온하고 그런 사회였다. 어떻게 보면 여전히 봉건적인 것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게 있다. 그런 데에서 오는 반작용이 아닐까. 장철이 급진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걸 민감하게 느끼고 잘 반영해서 그런 식으로 나타났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홍위병 같은 것도 보면 동시대에 진짜 가공할 풍경이 일어났던 거 아닌가. 그런 사회에서 무협영화를 찍을 때 저런 것들이 반영되어서 나온 게 아닌가 희미하게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김성욱: 잔혹한 폭력이라는 양상 그 끝까지 가서 더 이상의 폭력을 종결짓겠다는 의지가 장철 영화의 폭력적인 것의 핵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장철 영화를 보면서 그런 점이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60년 대 말까지 이어졌던 장철 영화들이 그런 성격이 컸던 것 같다. 오늘 이 자리는 그런 면에서 과도하게 묘사된 폭력에 대한 하나의 생각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장철 감독이 거의 10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번에 소개한 영화는 기껏해야 15편밖에 안 된다. 소개되지 않았던 장철의 다른 영화들도 흥미로운 것이 많더라. DVD로는 볼 수 있는데, 다른 기회가 된다면 다른 목록들로 또 한 번 보여 졌으면 좋겠다. 오늘 자리해주셔서 감사하다.



정리: 김휴리(관객 에디터) | 사진: 최용혁(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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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작인 <자마>는 청나라 때 양강총독 마신이(馬新貽)가 암살당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한 남자가 법정에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발목에 채워진 수갑과 법정의 사뭇 무거운 분위기로 그가 저지른 범죄의 중대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당당하다. 그는 종이와 붓을 요구하고 사건의 진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9년 전 산 중턱에서 길을 지나가는 상인들을 상대로 도적질을 해서 살아가는 두 남자가 있었다. 의형인 황종(진관태)과 의동생 장문상(강대위)이다. 이들은 어느 날 신기에 가까운 무술 실력을 보이는 마신이(적룡)를 만나고 셋은 다시 의형제를 맺어 산채에서 무리를 지어 함께 살게 된다. 둘째와 셋째와는 달리 마신이는 입신양명의 야망이 있었다. 그는 홀로 산에서 내려와 과거에 급제하고 몇 년이 지나 마침내 큰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산채의 형제들을 불러 함께 대업을 도모하려 한다. 그러나 마신이는 둘째 황종의 부인인 미란과 품은 연정이 점점 커지는 것을 걷잡을 수 없게 된다.


1870년 8월 22일 남경에서 양강총독 마신이가 의형제였던 장문상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청조 때 가장 논쟁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역사적 연구에 의하면 장문상과 마신이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장문상이 사형을 당한 이후에도 치정과 배신 등 여러 가지 소문과 추측들이 사람들 사이에 난무했다. 이러한 자극적인 소재들이 가미되어 마신이 사건, 자마안(刺馬案)은 후대 사람들에게까지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장철 감독은 1973년에 <자마>를 통해 이 사건을 재구성했고, 2007년에는 진가신 감독이 <명장>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다.



<자마>는 장철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가장 덜 폭력적인 영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후반 베놈스 필름(venoms film)으로 불리며 팔다리가 잘리고 피가 흐르는 장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던 것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자마>에서 칼싸움과 날아다니는 창은 존재하지만 최소한의 피만을 허용하겠다는 듯 창과 칼에 묻은 피로 적의 죽음과 승리를 암시한다. 오히려 <자마>의 초점은 화려한 무술 장면이 아니라 주인공들 간의 섬세한 감정 연기에 향해 있다. 금지된 감정을 품은 마신이와 미란 사이의 팽팽한 긴장, 장문상이 그들에게 갖는 의심은 나날이 커진다. 일반적인 삼각관계의 구도와 다르게 미란의 남편인 둘째 황종은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그 대신 장문상과 마신이, 미란이라는 삼각 구도의 긴장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영화의 마지막, 홀로 남은 미란은 장문상이 사형당하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지켜본다. 실제로 장문상은 아주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산 채로 살점을 잘라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통을 받게 하는 사형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신체 일부가 마신이의 제단에 바쳐졌다고도 한다. 영화 속에서 장문상을 죽이는 것은 마신이의 수하들이다. 그들은 축제의 한 장면처럼 웃고 떠들며 장문상을 처형한다.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고 또 죽임을 당하는 모든 파국을 지켜본 그녀만이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손소담: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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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俠少女 張徹映畫 愛情告白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누군가 취미를 물어보면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라고 답했던 나, 중학교 때 무협드라마에 심취하고는 한국 드라마와 가요에 관심을 잃었다고 말하던 나, 장철 감독님을 이제야 영접하고는 첫눈에 반했습니다. 뒤늦게 시름시름 장철 앓이를 하며 이번 특별전에서 꼭 전작을 보리라 다짐했지요. 극장에서 웃옷을 벗어재낀 건강한 남성들을 보며 허허 웃고 있는 젊은 여자가 있다면 아마 저일 겁니다. 덕분에 일상생활에서도 내내 조금 흥분상태입니다. 100편이 넘는 그의 영화들 중에서 고작 7편밖에 보지 않은 장철 입문자일 뿐이지만 이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 설익은 애정고백을 해볼까 합니다.



사실 잔인한 걸 싫어합니다. 특히 전쟁 영화에서 툭하면 나오는 대규모 전투 장면은 싫어하는 클리셰 중 하나이지요. 의미 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단역들이 불쌍해서 중요한 장면에 집중이 안 되더군요. 그것은 단지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과시적인 액션에 그치고 맙니다. 그런데 ‘피바람이 부는’ 장철 영화를 볼 때엔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져라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뭘까, 저기엔 다른 뭔가가 있다. 이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는 급이 다른 무술 때문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스크린으로 봐야만 진가를 알 수 있는 수려한 액션 씬! 각자의 위치에서 합을 맞추는 수십 명의 정확한 호흡! 일 대 다 액션 씬 중에서는 가히 최고라 할 만하니, 당연히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에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요. 그러나 ‘다른 뭔가’는 아마도 무술 혹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장철 영화에서의 무술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인 것입니다.


또 강호라는 곳이 기본적으로 그러하지만, 장철의 세계에는 차원이 다른 비장함이 있습니다. 누구나 정의의 편에 선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한 후 영웅으로 추대 받는 모습을 기대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주인공일수록 가차 없습니다. 물론 주인공은 적들을 모두 쓰러트리지만 자신 역시 못지않게 비참히 죽어버립니다.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받아들인 죽음임과 동시에 승리했으나 승리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인 죽음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거의 죽음에 이른 상태에서 한번 씨익 웃고는 “난 여전히 천하제일의 검객이다”라고 말하는 <심야의 결투>의 은붕(왕우).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적을 마주하고 “모든 사람이 죽지요” 라며 동료를 보내는 <쌍협>의 소비(강대위). 이번 특별전에서는 상영하지 않지만 <복수>의 관소루(강대위) 역시 형을 죽인 사람들에게 모두 복수한 후, 애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습니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시체는 너무나 처참하고 쓸쓸하여 장렬함이 감돌고, 그들의 신념에선 숭고함까지 느껴지곤 합니다.



이때 비장함, 장렬함 이면에 있는 허무함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막연하게 떠오른 느낌이지만, 이 정서야 말로 장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적어도 영화에서는)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철 세계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커다란 악과 싸웠습니다. 악의 수장은 강호에서 명성을 얻은 실력자이지만 진정한 무림 고수는 아닙니다. 무술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다루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은 더 큰 명성을 욕심내며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사익을 위해 수련하고, 다른 사람을 꺾기 위한 초식을 연마 하는 데에 주력합니다. 이때 장철을 대변하는 주인공이 나타나 무술의 뜻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악의 무리를 모두 처단합니다. 설사 먼저 쓰러질지라도, 오승욱 감독이 언급했듯 죽었음에도 원념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산 자, 즉 무술의 경지에 이른 자는 망설임 없이 강호를 떠나버립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그들에게 있어, 속세의 사사로운 모든 것들은 이내 져버릴 한 때의 꽃과 다를 바 없는 셈입니다. 한편, <복수>의 관소루는 복수는 했지만, 애인에겐 가지 못하고 끝내 원념을 남긴 채 죽어야만 합니다. 앞서 쓴 것처럼 승리했지만 승리했다고도 볼 수 없을 죽음에 이른 것이지요. 그렇다면 관소루가 목숨과 바꾼 장엄한 접전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장철의 세계에서는 어떤 승리든 장렬하면 할수록 그 못지않은 허무함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함, 장렬함, 숭고함 속에 뒤섞인, 어쩌면 철학처럼 느껴지는 허무함이야말로 여타 무협영화와의 차별점이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검은 옷을 입은 주인공이 죽는 경우는 없더라는 겁니다.(몇 편 안 봐서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흰 옷을 입고 전투로 향하는 주인공에게는 죽음을 불사한 결연함이 묻어납니다. 주인공은 항상 피바다의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흰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하얀 옷에 붉은 피가 튀었을 때, 이는 주인공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신호입니다. 그때부터 영화는 진짜로 시작합니다. 그동안 마지막 결투를 위해 쌓아온 것처럼 주인공도, 영화도 모든 것을 다 쏟아냅니다. 마지막 10여 분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지막 전투는 장철 영화의 진수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황폐한 전장의 위로 떠오르는 마지막, ‘劇終’. 아. 정말 그 순간 고독의 무게란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장철의 영화는 동성애 코드로 읽힐 정도의 남자들 간의 깊은 교감으로도 유명합니다. 오히려 여자가 등장할 때 남자들이 불행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잔인한 장면과 약한 내러티브로 인해 남자들의 영화라는 편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자를 위한 특별전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남자들만 나오며, 탄탄한 몸을 드러내고, 남성미가 한껏 폭발하는, 게다가 내용 힘들게 따라갈 필요 없이, 마치 춤을 추듯 아름다운 무술 장면을 감상하면 되는 영화를 마다할 수가 있을까요. 게다가 왠지 사연 있어 보였던 배우들의 눈빛이 아른거려 집에 돌아가서도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었습니다. 어두운 이면을 안고 있기에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스타를 사랑하기 때문에 영화를 사랑한다면 그건 아직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부정하고 싶습니다. <심야의 결투>에서 차가운 눈빛을 한 왕우(은붕 역)에 매료 되서 한 편 더 보러 왔다고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정말이지 그에게 무릎 꿇고 구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심야의 결투>의 은붕은 금연자밖에 사랑하지 않으니 포기해야겠네요. 또 격렬한 싸움 후에 머리를 쓰윽 넘기는 여유를 보여주는 강대위느님은 어떻습니까. 특히 강대위는 <복수>에서 다른 배우들과 달리 연인과의 애정 씬을 몇 번이나 소화해내며 여심을 설레게 했지요.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감추지 않고 옷을 걸핏하면 벗어던지는 남자들도 물론 좋습니다!(하지만 사실 적룡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유독 옷 한번 벗지 않고, 싸우기 직전까지 흰 옷으로 멋을 잊지 않는, 양조위와 유희열 그 중간쯤의 강대위에게 솔직히 전 반했습니다. 이번 주는 본격적으로 ‘강대위-적룡’ 콤비가 출연한 작품들을 공략해볼까 합니다. 앞에선 진지하게 장철 영화의 장렬함, 허무함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멋진 배우들을 보며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지요. 정말이지, 특별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휴리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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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세미 2012.04.14 0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사랑스러운 글이예요^^


장철 식 무협은 직구 같다. 배우들은 탄탄한 몸을 망설임 없이 드러낸다. 특히 <오독>에서는 오로지 맨손, 맨발로 간결한 격투를 한다. 기존의 무협과 비교해보면 특색이 확연히 보인다. 더불어 장철의 전작과도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공중에서 옷을 휘날리며 창이나 칼 등의 도구를 이용하거나 화려한 필살기를 구사하는 우아함은 온데간데없다. 말 그대로 남자들이 맨몸으로 정면승부를 하는 <오독>에는 담백하고 직설적인 매력이 있다.

<오독>은 단순 명쾌함이 극대화 된 영화다. 영화는 보물을 둘러싼 다섯 명의 제자들의 신경전에 충실하다. 잔인한 장면도 서슴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자칫하면 죽는다. 단 한 번도 비틀지 않고 화끈하게 치고 박는 장철 식 무협이 당시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만큼의 대리만족을 주었을지 상상이 될만하다.

모름지기 무협에서는 문파 간의 싸움이 주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독>은 친형제보다 가깝다는 같은 문파 사제들끼리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악의 구도에 선 세 제자의 입체적인 성격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선악의 대결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앞장서서 악행을 저질렀던 둘째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와서야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고백할 때는 마음이 짠하기까지 하다. 또 점차 정체를 드러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수수께끼처럼 감춰진 셋째의 존재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다.

모든 영화가 그렇겠지만 특히 무협 영화는 기술적으로 아름답고 세련되게 포장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무협은 향수의 영화인지라, 어쩐지 물감이 분명해 보이는 것을 흘려가며 열심히 한 합, 한 합 맞추는, 그리고 단순 명쾌한 쾌남이 나오는 다소 촌스러운 옛날의 것을 찾게 된다. 어설플지라도 그러한 점 때문에 오히려 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게 옛날 무협의 재미이다. 게다가 점점 예뻐지는 남자들에 질린 사람들이라면, <오독>을 보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거다. “그래, 이게 진짜 남자지!”  (김휴리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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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오독, 장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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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 한 사내가 마을을 떠나기 전 이별주를 마시고 있다.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그가 타고 떠날 백마가 한가로이 꼬리로 파리를 쫓는다. 하얀 옷을 입은 사내는 그를 전송하는 노인과 마지막 술잔을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탄다. 사내는 암살자. 누군가를 죽이러 길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드디어 사내가 암살을 할 표적이 있는 도시에 도착한다. 자 이제부터 피가 튀는 혈투가 있으리라 기대를 했는데, 사내는 싸울 생각은 안하고 또다시 악사를 들여 음악을 연주하고,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술타령이다.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는 나의 감언이설에 속았다는 원망의 눈길을 보내면서 “싸우면 깨워라” 하고는 잠을 자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던 아저씨가 “뭔 놈에 무협 영화가 주구장창 술타령만 해?” 분노에 찬 한마디를 하고 극장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하하하. 장철의 영화 <대자객>이 상영되던 9년 전 부천 영화제의 극장 안 풍경이다. 이미 영화를 보았던 나는 폭풍 같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라스트 혈투 시퀀스의 감동을 친구가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느 시점에서 깨워야 할까를 생각하느라 영화 보기는 뒷전이었다.


<대자객>은 사미천의 사기. 자객열전의 수많은 주인공들 중 섭정이란 주인공을 선택하여 만든 영화이다. 자객열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멋진 자객들 중 왜 하필이면 섭정인가? 영화 <영웅>의 주인공 형가는 생선 속에 칼을 숨겨 진시황을 암살 하려다 실패한 비운의 자객으로 자객열전의 등장인물들 중 가장 유명한 자객이다. 장철은 왜 형가가 아니라 섭정을 선택 했을까? 섭정이란 자객은 조말처럼 장군 출신도 아니다. 섭정은 시장 통의 개고기 장사치이니 비천한 신분이다. 형가처럼 폭군 진시황을 처단하려는 대의를 명분으로 삼지도 않고, 예양처럼 지조를 지키기 위해 칼을 잡은 자도 아니다. 그가 칼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 개고기 장사치인 비천한 자신. 장전된 채로 구석에 놓여있는 총이었던(에밀리 디킨스의 시) 자신을 알아보고 불러내 준 이 때문이다. 국가를 위한 충의 때문도, 정의를 위한 대의 때문도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간파한 자를 위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소진하겠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재능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 병졸로 시작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루고 죽지 않았을 때의 경우이니 하늘에 별 따기다. 섭정은 검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재능을 꽃 피울 전장을 찾지 못했다. 결국 개고기 장사치로 늙어 죽어야한다. 그런데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이가 나타나 가난한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보살펴 준다. 의리를 맺은 것이다. 의리는 갚아야한다. 섭정이 의리를 갚을 길은 단 하나 목숨을 내놓는 것뿐이다.



장철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칼을 잡은 주인공을 선택한다. 관객들이 지금 보는 이 영화가 무협영화인가? 의심할 정도로 영화는 암살을 하기 전. 주변을 정리하는 섭정의 모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누이를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절대 일을 할 수 없다며 거사를 미뤄 자신의 암살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남은 것. 사랑하는 연인이다. 섭정은 연인과 이별을 하고, 모든 재산을 다 처분하고서야 암살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장이모우의 <영웅>에서 형가와 진시황이 천하통일의 대업은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한다는 국가와 개인 간의 문제에 대한 파시즘의 혐의가 다분한 긴 대화 신이 있듯이, <대자객>에서는 섭정이 애인과 함께 죽음의 두려움과 빛나는 한순간을 위한 무모한 삶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는 신이 있다. 80년대 고우영은 만화 <초한지>의 한 에피소드에서 섭정을 우매한 캐릭터로 묘사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정도, 대의명분도 없이 개죽음을 한 자객이라 평한다. 사바 료타로는 막말의 암살자들에서 자신은 암살자들을 혐오한다고 한다. 암살자들이란 그들의 대의명분이 무엇이건 거래에 의해 타깃이 정해지고, 뒤에서 소리 없이 표적을 제거해야 하니 사내답지 못한 행동이란 말이다. 장철이 <대자객>을 촬영하기 위해 쇼 브라더스의 스튜디오로 출근을 할 때, 거리에서는 학생들의 데모 대문에 최류탄 연기가 자욱했었다고 한다. 그 때는 1967년이었다. 장철은 이런 시대에 이런 영화를 보러 누가 올 것인가? 한숨을 쉬며 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시즘에 항거하던 플라워 무브먼트의 젊은이들은 장철의 주인공 섭정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대자객>의 라스트. 섭정을 연기한 왕우는 라스트 대혈투 신을 촬영하기에 앞서 장철에게서 “네가 최고다. 너는 슈퍼맨이다. 당당하고 단호하게 걸어라!”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일백여명의 적군들이 도사린 적진에서 왕우는 강철로 만든 보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나는 슈퍼맨이다”를 되뇌며 연기를 했다고 한다. 라스트 혈투 시퀀스가 시작되면 왕우는 단호한 걸음걸이를 너무 과도하게 연기하는 바람에 뒤뚱거려 관객에게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가 싸움을 시작하고, 그의 하얀 옷이 적들의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왕우는 섭정의 원념을 고스란히 빙한 것처럼 관객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드디어 <대자객>의 가장 빛나는 장면. 암살에 성공하고,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해 칼로 자신의 얼굴 껍질을 도려내는 섭정의 시점 쇼트. 이 단호한 한 쇼트를 위해 장철은 90분을 끌어온 것이다.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자취를 지워버리려는 자. 의협이니, 대의명분이니 하는 모든 것을 무화 시키는 행동을 하는 주인공. 장철은 자객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국충정과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주인공들 보다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의 울분과 뜻하지 않게 맺어진 함정과 같은 의리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지극히 사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파시즘과 아나키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니힐리즘적인 자객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동시대 무협 영화를 만든 호금전이 액션 장면을 우아한 수평이동 롱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여 중국 무협의 아취를 보여주었고, 서양의 추리소설 줄거리처럼 치밀한 복선과 주인공들의 암투에 주목하여 신 무협을 만들어 냈다면, 장철은 주인공의 원념을 일직선으로 투박하게 그리는 것에만 전념한 영화들을 만들어 낸다. 수호지의 무송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쾌활림>과 <복수>가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난 영화이다. 무송 에피소드는 반금련과 무대. 그리고 서문경의 불륜과 치정 살인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거두절미. 장철은 서문경과 반금련의 불륜 에피소드는 별 관심이 없다. 아마도 tv의 아침 연속극 팬이라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영화라 분노 할 것이다. <쾌활림>이 시작되자마자 무송은 벌써 반금련의 목을 잘라 서문경이 있는 술집으로 간다. 반금련의 목을 서문경에게 던지며 두 사람의 혈투가 시작되고, 서문경은 무송에게 박살이 난다. 영화가 시작되고 오 분이 넘지 않아 모두 정리해 버리는 것이다. 장철의 관심은 무대의 복수를 한 무송의 유배를 떠나 쾌활림에 이르러 어린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모두를 죽이는 피의 잔치를 벌이고 피에 젖은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벽에 “무송이 살인하다”라 쓰는 무뢰한의 원념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 했던 것이다.

<복수>는 무송 에피소드를 현대로 옮겨 만든 것인데, 반푼 짜리 인간 무대를 멋진 외모와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가졌지만, 아내를 만족 시키지 못하는 성급하고, 폭력적인 적룡으로 변모시켜 그를 영화가 시작한지 10분 만에 사기그릇이 깨어진 바닥을 맨몸으로 뒹굴다 죽어 버리게 한다. 장철에게는 적룡을 속여서 살해 한 파렴치한 간부들의 불륜과 음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의 내용을 파악하게끔 아주 최소한의 이삼 분만 그들의 음모 장면에 할애하고, 나머지 80여분은 복수를 하는 적룡의 동생 깡따위(짜장면을 자장면이라 하면 안 되듯 깡따위를 강대위라 하면 왠지 섭섭하다)의 몫으로 만든다. 누가 형을 죽였는지 알아내는 수사와 추리 따위 역시 장철에게는 관심이 없다. 오직 형을 죽인 원수들을 향한 동생 깡 따위의 분노만이 중요하다. 그 분노는 깡 따위가 혈투 끝에 몸은 죽었는데도 정신만이 살아나 좀비처럼 원수를 갚게 만든다. 영화의 라스트에 깡따위가 난간에 기대어 두 눈을 부릅뜨고 서서 죽어 있는 긴 시간을 만나게 된다.
그 몇 초간 깡따위가 죽은 척 했다가 적이 다가오자 기습을 하는 것이라 오해하면 안 된다. 깡따위는 죽은 것이다. 형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그 원념이 너무나 사무쳐 그는 살아나 원수를 갚고서야 죽는 것이다. 왕우가 <금연자>에서 라스트 혈투 장면을 찍을 때 장철은 “너는 죽었다. 그러나 원념 때문에 부활 해야한다”고 주문을 했다고 한다. 왕우는 “이거 정말. 어떻게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 투덜댔었다고 한다. 그러나 적들에게 사지가 묶이고 가슴에 네 개의 말뚝이 박히는 장면을 촬영하며 스스로 광기에 휩싸여 촬영 전까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잊고 다시 살아나 칼을 들었다고 한다. 장철은 그런 감독이다. 투박하고 거친 사내들. 그들은 항상 불만에 차 있다. 결국 그들은 항상 파멸의 길을 선택하고 원념을 내뿜고 죽는다. 말이 되고 안 되고 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사내는 원념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지만 장철이 원하는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1960년대 말. 왜 이런 남성 영화가 만들어 졌을까? 왜 이런 남성 영화가 팬들에게 환호를 받았고, 2012년 한국의 시네마 데끄에서 상영되는 것일까? 어차피 이런 종류의 액션 영화들은 비웃음거리가 되는 남성 판타지들이다. 비웃음은 남성성을 강조한 액션 영화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비웃음도 여러 가지 종류다. 나는 남성성을 강조한 액션 영화들 중 국가에 대한 충성. 명분. 의리. 대의 따위를 맹목적으로 또는 교묘하게 설파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장철이 만든 자기도취 때문에 교만한 주인공들이 기득권자들이 지들 편리한 대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국가에 대한 충성. 명분. 대의. 의리 따위를 무화시키며 파멸하고, 말도 안 되지만 원념 때문에 되살아나 피를 뿌리는 이런 불손한 영화들에게는 반가운 비웃음을 보낸다.

(by
오승욱_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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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는 사람 2012.03.09 0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단을 나눠주시고 글씨 크기를 좀 키워주시다면 가독성이 훨씬 좋아질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