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 무라토바(감독)

[키라 무라토바 회고전]

비타협적인 작가, 키라 무라토바

 

소비에트 영화사에서, 그리고 소련 붕괴 후에도 키라 무라토바는 ‘부조리한 영화’, ‘역설의 영화’의 작가감독으로 규정되곤 했다. 과거 루마니아(현재의 몰도바)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영화활동을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했고, 스스로도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여긴 무라토바의 경력 역시 복잡하고 다중적인 창작 배경으로 거론되곤 했다. 언제나 가장 첨예한 사회적 문제들을 영화적 소재로 삼고, 잔인하고도 비도덕적인 주제들에 대해 과감하게 다루어 온 무라토바 영화의 주제를 한 비평가는 ‘지상의 지옥’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까지 했다. 일단의 비평가들은 키라 무라토바의 영화가 소련 붕괴 전후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가장 전위적이었던 ‘체루누하’ 영화 미학에 집착하고 있다고 치부하지만, 무라토바 영화의 지속적이고 일관된 스타일은 단순히 작가영화라고 규정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함축하고 있다. 

1934년 당시 루마니아 영토였던 베사라비아 지방 소로카 시에서 루마니아 공산당 지하 지역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아버지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코로트코프와 유태인 어머니 나탈리야 이사코브나 사이에서 태어난 키라의 본래 성은 코로트코바(Korotkova)였으나, 영화학교 동창이자 첫 남편인 알렉산드르 무라토프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라 무라토바가 되었고 이혼 후에도 무라토바라는 성을 유지했다.

키라 무라토바가 처음 영화를 접한 것은 루마니아(현 몰도바)에서였다. 독소전쟁 직전 수립되어 소련연방의 구성원이 된 몰도바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의 문화성 관료였던 어머니 사무실에 자주 가있던 소녀 키라는 문화성 내 외국영화들만 상영하는 별도의 상영관에서 외국영화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문화성이 제공한 특별통행증이 있으면 부카레스트의 모든 영화관에 출입할 수 있었고, 소녀 시절 키라 무라토바는 방과 후 늘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다고 회상한다.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한 키라는 영화에 대한 열망으로 다시 국립영화학교에 입학하여 영화감독 세르게이 게라시모프와 타마라 마카로바의 지도로 1959년 감독과를 졸업했다. 

1961년부터 오데사 영화사에서 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한 키라는 첫 남편 알렉산드르 무라토프와 영화 <깊은 계곡에서>(1962)와 <우리의 정직한 빵>(1964)을 공동 감독하며 영화계에 데뷔했고, 1967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은 첫 단독 감독작 <짧은 만남>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짧은 만남>은 침체기 소비에트 사회 지성인의 양심으로 추앙받던 음유시인 블라디미르 브이소츠키가 주연을 맡아 더욱 주목받았으나, 섹스나 간통 장면을 그대로 노출하고 부도덕한 남녀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등 소비에트 사회의 민감한 도덕적 문제를 첨예하게 대두시키면서 대중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20년 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가 되어서야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이 작품 이후 키라 무라토바는 줄곧 러시아 사회의 억압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는 문제의식과 특유의 파편화된 미학적 구성을 일관되게 고집했다. 다음 감독작 <기나긴 이별>(1971) 역시 점프 컷, 동시 녹음, 현장 로케 등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인해 ‘부르주아 엘리트 미학’으로 낙인찍혀 페레스트로카 시기까지 대중들에게 상영되지 못했다. 연이은 문제작으로 인해 오데사 영화사 감독진에서 제외된 무라토바는 오데사를 떠나 7년의 공백을 깨고 영화사 ‘렌필름’에서 만든 유일한 영화 <드넓은 세상을 알아가며>(1978)를 발표했다. 하지만 무라토바 영화에 대한 검열은 더욱 강화되었고, 오데사 영화사로 돌아가 제작한 다음 영화 <흰 돌더미 가운데>(1983)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된 장면들이 가차없이 삭제된 채 상영되어 키라 무라토바는 영화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련연방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라토바에게 어느 정도 자유로운 창작의 자유가 주어졌고, 무라토바의 원안대로 <뒤바뀐 운명>(1987)과 <무기력 증후군>(1989)과 같은 문제작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1990년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무기력 증후군>은 내용은 물론 형식미학 모두에서 무라토바 영화 중 가장 무라토바적이라고 평가받으며, 비평계와 관객 모두에게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부로 구성된 이 영화의 1부는 흑백으로, 2부는 컬러로 촬영되었으며, 2부의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영화가 결국 이 영화의 1부라는 것이 드러나는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다. 무라토바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 러시아가 결국 정신적으로 파멸한 광인들의 거대한 집합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덕분에 소련 내 개봉이 허용된 이 영화는 소비에트 영화에서 삭제되지 않고 욕설이 그대로 나온 첫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취미>(1994)는 키라 무라토바의 뮤즈라 평가받는 배우 레나타 리트비노바와의 첫 영화 작업이었다. 애초 <취미>의 시나리오에는 리트비노바의 배역이 없었는데, 리가 영화제에서 리트비노바를 처음 만난 무라토바는 리트비노바의 밝은 금발과 개성 있는 외모, 독특한 화법 그 자체가 표현력이 풍부한 영화 오브제라고 판단하여 즉시 영화 출연을 제안한 후 리트비노바 배역을 추가했다. 이때부터 레나타 리트비노바는 <세 가지 이야기>(1997), <피아노 조율사>(2004), <하나 안의 둘>(2006), <따뜻한 멜로디>(2009), 그리고 무라토바의 유작 <영원 회귀>(2012)에 이르기까지 배우로 출연하는 동시에, 공동 시나리오 작가로도 참여하며 무라토바 영화의 가장 절친한 영화 파트너가 되었다. 말에 몰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나열한 영화 <취미>는 배우 레나타 리트비노바를 러시아 영화계가 주목하도록 했으며, 이때부터 레나타 리트비노바는 <세 가지 이야기>에서 오펠리아의 이미지를 역설적으로 구현한 ‘오파’로 등장하는 등 무라토바 영화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남성 지배적 권력 담론과 영화 관습을 무력화시키는 적극적, 공격적 여성성의 표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 영화학자 미하일 얌폴스키는 사회의 금기와 자동화된 관습을 전복하기 위해 무라토바가 ‘공격적 여성성 vs 무력한 남성성’이라는 역전의 메커니즘을 사용한 것으로 평가한다. 

무라토바 영화 미학의 가장 핵심적인 파편화된 서사 역시 시간을 압축하여 제시함으로써 관객을 현실적, 실존적 시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관습적 영화전통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미학적 구조는 무라토바의 이후 영화들, <세 가지 이야기>(1997), <이류 인간들>(2001), <체홉의 모티프>(2002), <피아노 조율사>(2004),<하나 안의 둘>(2006), <따뜻한 멜로디>(2009), <영원 회귀>(2012)까지 일관되게 이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라토바의 영화를 단순히 부조리의 영화, 사회의 추함과 잔인함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규정하는 것은 무라토바 영화가 함축하는 바를 지극히 한정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무라토바의 영화는 언제나 가장 외면하고 싶은 불가해한 시간의 현장 한복판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의미없이 반복되는 단말마적인 대사와 알아들을 수 없이 웅얼거리는 장황한 독백만이 아니라, 충동적이고 불가해한 행동과 폭력, 영화 서사와 무관하게 돌출되고 파편화되어 ‘낯설게하는’ 기이한 이미지들, 급작스러운 점프컷 등, 그 모두는 매끄럽게 압축된 ‘시간의 엑기스’ 대신 ‘날 것 그대로의 시간’을 관객에게 정면으로 응시하도록 한다. 그 부도덕함과 추함의 현장 한복판에 던져진 관객들은 결코 객관적 관람자의 위치에 머물 수 없고, 자신의 실존적 삶에서 경험한 소통 불가능, 사회구조의 부조리함, 추함과 부도덕한 순간들이 침잠된 내면의 기억을 응시하는 또다른 시선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아주 침착하고 온화했지만 촬영 현장에서나 영화 제작에서는 자신의 원칙을 고집 있게 추구하며 비타협적이던 무라토바는 레나타 리트비노바와 함께 올렉 타바코프, 알라 데미도바, 세르게이 마코베츠키 등 러시아 명배우들이 대거 참여한 영화 <영원 회귀>를 마지막으로 영화 활동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그 후 인터뷰에도 거의 응하지 않고 회고록 집필도 거절하며 자신의 영화적 고향인 오데사에서 은둔하던 무라토바는 2018년 6월 6일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희원 교수(상명대학교 글로벌지역학부)

<무기력 증후군>(1989)

키라 무라토바의 <무기력 증후군>과 전환기 소련 사회의 이상한 현실 - 이반 코즐렌코 평론가, 이희원 교수 강의

이반 코즐렌코(알렉산더 도브젠코 센터 원장, 영화평론가) <무기력 증후군>은 어려운 영화인데 많은 관객들이 찾아주어 기쁘다. 오늘은 이 작품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 관해 짧게 이야기하겠다. <무기력 증후군>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소련 영화사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1989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새로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파괴적 현상들에 대한 직접적 반응을 보여준다. ‘정말 당시 사회가 저랬을까?’란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80년대 말 소련은 정말 비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회였다.

 

글라스노스트와 전환기의 영화

<무기력 증후군>을 포함해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이를 ‘전환기의 영화’라고 부른다. 알다시피 소련에서는 영화 미학으로 ‘리얼리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기 시작하며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흐름 중 하나가 리얼리즘에서 벗어나기였다. <무기력 증후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줄거리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내러티브를 구성했다. 이게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전환기의 영화는 보통 1986년부터 1995년 사이에 나온 영화들을 일컫는다. 1986년에는 소련의 정치적 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선언한 글라스노스트 정책이다. 이를 통해 일반인뿐 아니라 예술가들도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기회를 얻었다. 이 기회 자체가 소련의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람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주어지자 기존에 숨겨져 있던, 알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소련의 절대주의적 공산주의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발표된 뒤 2년 동안 소련 사회는 급속한 변화를 맞았다. 80년대 초반, 글라스노스트 이전 사람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이 있든 없든 체제의 규칙을 따라야 했다. 공산당 회의 참석, 노동절 행진 참석 등 필수적으로 부과되는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글라스노스트 이후 이런 형식적 규칙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결국 사람들은 공산주의 체제는 더 이상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텅 빈 형식에 불과한 체제란 걸 파악하게 됐다. 굳이 이런 체제를 따를 의무가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86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건이 일어나며 공산주의 체제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글라스노스트 정책에 의하면 공산주의 정부는 국민에게 어떤 것도 숨겨서는 안 됐다. 하지만 정부는 체르노빌 사건 이후 최소 2주 동안 정보를 숨겼다. 나는 체르노빌 사건이 소련 체제의 종말을 알렸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글라스노스트 역시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눈치 챘고, 겉으로는 나라가 발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됐다. 노동절 행진도 언급하고 싶다. 체르노빌 사건은 4월 26일에 일어났는데, 정부는 5월 1일의 노동절 행사에 국민들의 참여를 강요했다. 자신들의 핵 기술을 홍보하기 위해 국민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결국 시민 운동, 환경 운동 등 여러 영역에서 정치적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련 정부의 가장 큰 무기는 공포였는데 시민들이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소련 체제 내 검열이 많이 약해졌고, 그러면서 <무기력 증후군> 같은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무기력 증후군>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거부했고, 단적으로 성인들의 나체도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 안에 소련 체제의 여러 상징이 많이 보이지만 이 상징은 이미 죽은 것으로 그려진다. 인물들의 모자에 고르바초프의 사진이 있다거나, ‘피오네르’(소년 공산당원의 모임)의 뱃지를 던지는 것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소련 정부에서 실제로 검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또한 당시는 소련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영화를 제작할 예산도 아직 나오고 있었다.

이후 1991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 1992년에는 시장경제 체제로 변환했다. 그러면서 중앙화되어 있던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영화 제작과 배급 시스템도 무너졌다. 1995년부터는 더 이상 정부에서 영화 제작을 지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1995~6년 이후에는 거의 15년간 우크라이나에서 영화가 제작되지 않는 암흑기가 찾아왔다.

 

분노하거나 잠들어버린 사람들

이런 배경 속에서 <무기력 증후군>이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는 흑백으로 나오는 영화 속 영화이고 2부는 컬러로 만들어진 현실 부분이다. 하지만 1부는 허구이면서도 리얼리즘적 톤으로 찍혔고 2부는 현실이지만 비현실적으로 찍혔다. 주인공도 갑자기 사라지고, 줄거리가 끊어졌다가 다른 줄거리가 등장한다. 시청각적으로 불편한 화면, 사운드도 많이 등장한다. 나는 이런 부분이 당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소련 사람들은 이제 자유를 얻었는데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기존의 가치관도 무너져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 속에는 대화 같은 대화가 나오지 않는다. 인물들은 각자 할 말만 하고 상대는 그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1부의 나탈랴가 선택한 잔인한 공격성이고, 또 하나는 2부의 니콜라이가 보여주는 ‘얼어붙어버리기’이다. 영화의 주인공 니콜라이는 교사이자 작가로서 책을 쓰고 싶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힘들어하고 주위 사람들을 혐오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잠에 들어버린다. 그게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영화에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장면도 나온다. 때로는 이 공격성이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믿고 있던 모든 게 무너지는 상황에서 이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할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공격성이다. 그런 상황을 해결하려면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이들은 소리 지르며 내뱉기만 한다. 하지만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주장에는 이상만 있고 핵심이 없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지만, 이들은 부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하는 중이다. 유일하게 내용이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니콜라이지만 그는 많은 시간 잠들어있다.

이희원(교수) 키라 무라토바는 2000년대 초반에 처음 접했다. 감독이 소련 시절 만든 영화들은 <짧은 만남>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들 페테스트로이카 시기에 뒤늦게 공개됐다. 당시에도 이 병리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는 어디서 만들어진 것일까 많이 고민했었다. 물론 시대적 징후도 있을 것이고, 무라토바의 독특한 이력(루마니아, 몰도바, 소련,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오갔던 복잡한 전기적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등 동시대 우크라이나 감독들과의 교류도 중요하다. 하지만 키라 무라토바의 영화는 결국 소련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제도의 정체성에서 해석할 때 특히 흥미로운 것 같다.

<무기력 증후군>은 페테스트로이카 이후 소련 사람들이 겪었던 분노, 삶의 정체성, 세계관이 무너지는 중 대중들이 느낀 심리적 경향을 총체적으로 압축시킨 작품이라 생각한다. 무기력을 개인만 겪었다면 ‘신드롬’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나도 오늘 이 영화를 보며 많이 고통스럽고 미칠 것 같았는데, ‘무기력’이란 말을 요즘 언어로는 ‘분노’와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반 코즐렌코 무라토바가 왜 기존의 리얼리즘을 거부했는지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소련 시절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배적 미학이었고,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질 때 쯤에는 리얼리즘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무라토바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찾았고,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벗어나려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라우다』(진실)라는 신문에 가장 많은 거짓이 실렸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통 방법을 찾아야 했다.

관객 영화 전반적으로 베토벤이나 바그너를 연상시키는 클래식 음악이 많이 쓰인 것 같다.

이반 코즐렌코 좋은 지적이다. 이 영화에서는 슈베르트의 음악이 많이 쓰인 걸로 알고 있다. 사실 키라 무라토바는 자신의 영화에서 클래식을 쓰지 않았고, 이 영화가 예외에 속한다. 이는 현실과 영화를 대비시키기 위해서다. 고전주의 클래식 음악에는 어떤 규칙이 존재하는데 현실에는 어떤 규칙도 없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클래식 음악이 이런 현실을 더 역설적으로 잘 보여준다.

또한 무라토바는 좀 더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따르는 영화에서는 반대로 아방가르드 음악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기나긴 이별>이나 2000년대 이후 작품에서는 굉장히 독특한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들과 작업했다. 이렇게 실험적 음악을 많이 사용한 건 영화의 고전적인 흐름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으로써 무라토바는 현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일시 2019년 11월 3일(일) <무기력 증후군>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래머

사진 김서연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촬영감독 다무라 마사키 회고전]

촬영감독이 모습을 드러낼 때…: 다무라 마사키, 그리고 n개의 영화

 

 <산리즈카-이와야마에 철탑이 세워지다(三里塚: 岩山に鐵塔が出來た)>(1972)의 전반부, 활주로 남단에 800m 철탑을 세우는 문제를 둘러싸고 공항 반대동맹 주민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찍은 롱테이크가 계속된다. 간간히 팬 이동하며 회의실 안의 면면을 비추긴 하나, 카메라는 한 청년이 홀로 일어선 채로 눈물과 욕설을 섞어 철탑 건설과 투쟁을 호소하고 있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다.[i] 비교적 움직임이 없는 카메라로 찍은 이 장면은 다소 의아한데, 초점이 말 그대로 깜박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8월, 『영화예술』의 ‘다무라 마사키 추모 특집’에 실린 카메라맨 가와카미 고우이치의 회고는 당시 카메라 뒤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준다.[ii] 당시 촬영 조수였던 그는 핸드헬드 촬영을 하던 다무라 마사키 뒤쪽에서 슬쩍 손을 내밀어 몰래 무거운 카메라를 받쳐주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촬영감독은 수동으로 초점을 계속 맞춰주며 찍어야만 했는데, 가와카미는 그날 눈물 때문에 핀트 확인을 자꾸 놓치는 다무라 몰래 뒤쪽에서 초점을 맞추던 기억을 떠올린다. 카메라가 느릿하게 회의실을 비추는 가운데 초점이 맞았다가 흐릿해졌다가 하며 휙휙 변하던 그 장면은 그렇게 찍혔다. 청년은 아예 엉엉 울기 시작하고, 주민들 몇몇은 담배를 연거푸 피우거나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 현장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는 카메라맨의 존재가 자신의 모습을 보임 없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이런 순간인지도 모른다.

 

두 개의 산리즈카, n개의 영화

 1992년 오가와 신스케 추모 상영회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가와의 영화들에서 보이는 어떤 불안정함 혹은 불균형감을 지적한다. ‘분석하는 뇌’와 ‘뇌를 거스르는 듯한 손’, 이 둘 사이의 불안정이 그것으로, 하스미에 따르면 ‘손’은 또 다시 ‘보는 손’으로서 ‘눈’과 ‘손’ 사이의 기묘한 싸움을 벌인다. 지켜보고 거리를 두는 눈과 닿고 접촉하는 손 사이의 경합에서 오가와가 선택한 것은 16mm 카메라, 적은 수의 작업 인원, 자막이나 담고 있는 의미 자체를 넘어 귀에 부딪치는 소리로서의 방언, 스크린을 앞에 한 관객들의 그때그때의 체험 등등 모두이다. 오가와의 영화는 이 모든 걸 포함하는 미디어 자체를 필름에 거는 것이라고 하스미는 설명한다.[iii]

하스미의 지적에서 언급된 ‘불안정함 혹은 불균형감’은 어쩌면 ‘오가와의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품고 있는 한 속성이 아닐까. 아오야마 신지와의 오랜 대화를 엮은 책 『취한 눈의 거리-골든가 1968~98』에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iv] <산리즈카-헤타 마을(三里塚: 辺田部落)>(1973)에서 다무라가 찍은 화면 위에 굵은 고딕체 수퍼 임포즈 자막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글귀가 겹쳐진다. “쓰지 않아도 (화면에) 비치고 있지 않냐”며, “게다가 그 글자 때문에 화면 대부분이 가려진다”고 슬쩍 불만을 표하는 다무라의 회고를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모종의 경합들 중 하나라고 한다면, 이어지는 그의 다음 회고는 이런 경합들을 품고 있는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같은 회고에서 다무라는 산리즈카의 현장 바깥에서 그 영화를 보고 달려온 사람들은 어쩌면 두 종류가 있지 않을까 이야기한다. 즉 당시의 산리즈카 투쟁에 대한 모종의 공감을 품고 지지자로서 그것을 본 사람과, 촬영의 생생함으로서 그것을 보고 길을 나서는 사람이다.[v] 다무라는 이어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카메라맨으로 보느냐 하는 것 또한 기록 영상과 액션 영상 두 가지로 나뉘는 듯하다는 회고를 덧붙이기도 한다. 화면에 덮이는 자막/내레이션과 화면, 혹은 ‘눈과 손’의 불안정함, 경합. 미디어 그것 자체로서 체험되는 ‘총화(總和)’로서의 영화는 어쩌면 하나가 아니라 n개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vi]    

 

변화하는 제작 환경

 80년대 전반의 작업에 대한 회고에서 다무라는 스튜디오가 아닌 독립계 사람들(이타미 주조), 촬영소 조감독에서 시작해 필드에 나온 사람(소마이 신지), 자주영화•독립영화를 계속 만들어온 사람(이시이 소고)들과 함께했다고 말한다.[vii] 다무라가 ‘함께했던’ 사람들, 영화 제작 현장은 스튜디오 시스템 붕괴 이후 일본 영화 제작에서의 변모 및 ‘선택’의 문제와 ‘함께한다’.

60년대 초반, 주로 대기업의 PR 영화를 찍던 이와나미 영화제작소를 그만둔 일군의 사람들이 연구 그룹 ‘파랑의 모임(靑の会)’을 결성한다. 구로키 가즈오(<료마 암살>(1974) 감독), 츠치모토 노리아키, 히가시 요우이치(<일본요괴전 사토리>(1973) 감독), 스즈키 다쓰오, 오가와 신스케, 이와사 히사야, 오오츠 고시로(<산리즈카의 여름>(1968) 촬영), 다무라 마사키가 멤버였다. 60년대 후반 이후,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팀이 짜여지고, 한 영화사에 고정되지 않고 ATG, 오가와 프로덕션, 도에이, 디렉터스 컴퍼니, 세이부-세존 그룹과 파르코 그룹 같은 유통 기업, 비터스 엔드(센토 타케노리 프로듀서) 등을 통해 제작된 다무라의 영화들에서 이전과는 다른 한 가지를 지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고정된 한 회사(도호)에서 쭉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을 찍어온 미술의 추코 사토시, 촬영의 다마이 마사오, 조명의 이시이 쵸시로, 녹음기사 시모나가 히사시가 <고지라>도 찍게 되는 상황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안정된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로 인해 지극히 불안정해진 영화 제작의 곤경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선택을 당함으로써’ 영화를 제작하는 것과는 다른 식의 영화 제작 환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무라의 다음과 같은 어떤 태도와도 이어진다. “감독의 생각이나 무언가를 영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거기서 그리고 싶은 것이 있잖아요. 당연한 소리지만, 저는 그걸 영상으로 찍는 겁니다.”[viii]

 

“대위법적 푸가”

 “작가주의가 아니라, ‘감독’은 그 조화를 수용하며 ‘연주’를 지휘한다. 이 상호작용으로부터 흥미로운 ‘또 하나’가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필시 ‘다성적(多聲的)’이고 풍요로운 ‘흐름’이 (될 것이다)…. ‘어긋남’의 ‘몽타주 효과’. 촬영에서든, 각 파트에서든, 특히 ‘작가’가 시키는 대로 ‘네’라고 대답하며 ‘타자의 표현’을 하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각자의 생각도, 시간도, 조금씩 ‘어긋난’ 변주가 ‘겨루기’를 해가는 것이다. ‘대위법적 푸가’랄까?”[ix]

다무라의 작업 노트에 적힌 위와 같은 글귀와 함께, 다무라의 인터뷰들과 주변 사람들의 회고에서는 영화 제작 현장에 관한 그의 말버릇으로서 ‘겨루기’란 단어와 “(화면에)비치는 겁니다/찍으면 영화가 되는 겁니다”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전자를 한 편의 영화에서의 ‘복수의 작가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콘셉트, 콘티 등을 떠나 다무라가 말하는 바의 ‘다무라의 영화’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영상, 숏을 찍는 게 겹쳐지고 하나의 신이 되고, 더 나아가 신이 겹쳐져서 영화가 되는 겁니다. 그 숏을 찍는 게 저죠. (중략) 어떤 숏이 태어납니다. 그 숏에서 다음의 무언가가 부풀어오기 시작합니다. 전부 정해진 숏에선 부풀어올 수가 없지요.”[x]

<자아와 타자>(2001)의 부재하는 사진가의 사진 위로, 사진가는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리세요?”라며 말을 건다. 존재/부재를 확인하는 이 물음을 묻는 사진가의 존재와 같이, 화면에 자신의 모습을 보임 없이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홍지영(북경대 박사과정, 영화사 전공) 

 

 


[i] <산리즈카-이와야마에 철탑이 세워지다>(1972)는 반대동맹 주민들이 지하에 만든 요새가 철거되고, 1971년 9월 16일 제2차 강제집행이 실시된 데서 화면을 시작하고 곧이어 반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1972년 3월 8일 주민들의 철탑 건설 실행 회의로 이어진다. 사이에 놓인 반년 간의 공백은 이 다큐멘터리의 이듬해에 상영된 <산리즈카-헤타 마을>(1973)에 담겨 있다. 제2차 강제집행에서 철탑 회의 사이의 기간 동안, 파견 경찰기동대 3명이 사망했고, 주민 234명이 체포되었으며, 한 명의 주민은 자살했다. 지하 요새가 철거되고, 위법행위라는 말과 체포가 심리적 위협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때다.

[ii] 川上皓市, 「田村さんの撮影にはNGはないのです」,『映畵藝術』2018年8月號, p.85.

[iii] 蓮實重彦, 「小川紳介の映畵を語る」,『シネアストは語る 5: 小川紳介』, 名古屋シネマテ-ク, 1993, pp. 155~183.

[iv] たむら まさき, 靑山眞治, 「三里塚を撮る」,『醉眼のまち:ゴ-ルデン街 1968~98』, 朝日新聞社, 2007, p. 72.

[v] たむら まさき, 靑山眞治, 「三里塚を撮る」,『醉眼のまち:ゴ-ルデン街 1968~98』, 朝日新聞社, 2007, p. 73.

[vi] 이와 관련해, 유운성이 자크 투르뇌르의 영화와 프로듀서 발 뉴튼의 영화란 말로 한 편의 영화가 복수 작가의 계열로 짜여진 것임을 가정하는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운성, 「4강: 작가주의를 말하는 거간꾼들」, 『영화비평강좌: 동시대 영화의 쟁점들』, 대전아트시네마, 2018, pp. 38~58.

[vii] たむら まさき, 靑山眞治, 「時流に乘る監督たちと」,『醉眼のまち:ゴ-ルデン街 1968~98』, 朝日新聞社, 2007, p. 113.

[viii] たむら まさき, 筒井武文, 越川道夫, 「たむら まさき: 撮影論」, 『nobody』, 2008(https://www.nobodymag.com/sunanokage3/index.html).

[ix] たむら まさき, 「遊びをせんとや生まれけむ…抄」, 『映畵藝術』2018年8月號, p. 98.(괄호 안은 필자 추가)

[x] たむら まさき, 筒井武文, 越川道夫, 「たむら まさき: 撮影論」, 『nobody』, 2008(https://www.nobodymag.com/sunanokage3/index.html).

 

아오야마 신지(감독)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없다 - <유레카> 상영 후 아오야마 신지, 정재은 감독 대담

 

김성욱(프로그램디렉터) 태풍 ‘링링’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감독님이 방금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호텔에도 못 들르고 바로 극장으로 온 걸로 알고 있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님께 큰 박수 부탁드린다.

아오야마 신지(감독) 오늘 “다무라 마사키 회고전”에 와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다무라 마사키 감독 본인이 왔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지금 저세상에 계셔서 못 왔다. 정말 유감이다.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는 반 이상이 농담일 텐데, 여러분들도 같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김성욱 개인적으로 2001년에 다무라 마사키 감독을 전주영화제에서 만난 적 있다. 인터뷰 일정으로 만났는데, 자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맥주를 많이 드신 상태였다(웃음). 결국 인터뷰는 포기하고 다른 분들과 함께 술을 먹으며 왜 젊은 감독들과 주로 작업했는지 물어봤다. ‘나이 든 사람들과 작업하면 심심하다. 자유롭게 촬영하고 싶었다.’ 이런 답을 들려주었던 기억이 있다.

2004년에는 전주영화제에서 “다무라 마사키 마스터 클래스”가 열렸다. 그런데 다무라 마사키 감독은 몸이 안 좋아 결국 오지 못했고, 대신 스와 노부히로 감독이 게스트로 참석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스와 노부히로는 <듀오>의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었다고 한다. 결국 시나리오를 다 못 쓴 채 다무라 마사키와 만났는데, 다무라 마사키의 첫 말이 ‘각본이 없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스와 노부히로도 자신감을 갖고 완성된 각본 없이 촬영을 시작했고, 촬영 도중에도 다무라 마사키는 ‘그래도 괜찮아’란 말을 계속했다고 한다. ‘찍으면 찍히기 마련이야’란 말이 당시 스와 노부히로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일화를 전해주었다. 

먼저 아오야마 신지 감독에게 다무라 마사키는 어떤 존재였는지 듣고 싶다. 두 사람은 <헬프리스>를 포함해 열 편의 작품을 같이 만들었다. 두 사람의 협력은 단순히 개인적 작업이 아니라 일본 영화사에 상징적이고 특별한 흔적을 남겼다.

아오야마 신지 다무라 마사키를 처음 만난 계기는 <헬프리스>였다. 내가 쓴 시나리오를 다무라 마사키에게 주자 폭력적인 묘사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을 했다. 그래서 프로듀서인 센토 다케노리 등과 함께 <헬프리스>는 그런 폭력적인 영화가 아니고 ‘좋은 영화’가 될 거라고 설득했다.

그때 다무라 마사키와 신주쿠의 어떤 찻집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사회자도 이야기했듯이 다무라 마사키는 맥주를 안 마시면 이야기를 못 하는 사람이다(웃음). 결국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해서 자리를 옮겼는데, 내게 어떤 맥주를 좋아하는지 물어보더라. 그래서 특정 상표를 얘기했더니 ‘그럼 하자’고 흔쾌히 말해서 작업을 시작했다(웃음). 그때 “기린”과 “삿포로”를 얘기했는데 그게 다무라 마사키의 취향과 일치했던 거다. 그 후 계속 기린과 삿포로 맥주를 함께 마시며 10년 이상 작업을 계속했다.

김성욱 스와 노부히로는 다무라 마사키의 작업 방식을 ‘찍히면 된다’로 설명했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다무라 마사키와 작업할 때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스와 노부히로는 <유레카>를 두고 ‘<듀오>와 비교하면 너무 아름다운 영화다’라고 말한 적 있다.

아오야마 신지 다무라 마사키의 말버릇 중 하나가 ‘(화면에)비친다’, ‘찍으면 찍힌다’이다. 장난감 카메라나 인스턴트 카메라처럼 영화도 찍으면 찍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자주 했던 말이 ‘무엇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없다’이다. 즉 ‘이렇게 영화를 찍지 않으면 영화가 아니다’ 같은 어떤 정해진 원칙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무라 마사키가 나이 든 감독들과 작업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건, 나이 든 감독들은 영화를 찍을 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와 같은 규칙에 얽매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배가 있는 감독들은 계속 ‘무엇무엇 해야 한다’, ‘영화는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이론적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나, 스와 노부히로, 구로사와 기요시 등 젊은 감독들은 그런 옛 이론을 무시하며 작업했다. 이런 식으로 이전과는 다른 이론을 만드는 작업을 했던 게 90년대 후반의 일본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90년대 후반부터 영화를 시작한 감독들은 카메라를 돌리면 카메라에 찍힌 게 그대로 영화가 된다, 는 생각을 갖고 영화를 만든 세대이다.

또한 나와 다무라 마사키는 같은 작업을 반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16mm 칼라에 유러피안비스타 사이즈로 <헬프리스>를 찍었다. 다음에 찍은 <쉐이디 그로브(Shady Grove)>(1999)는 비디오카메라와 35mm 필름 카메라를 번갈아가며 찍었고, <달의 사막(Desert Moon)>(2001)은 35mm 스탠다드 칼라로 찍었다. 매번 새로운 모험을 했던 것이다. 이후 <호숫가 살인사건(Lakeside Murder Case)>(200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エリ エリ レマ サバクタニ)>(2005)를 찍을 때도 16mm 카메라나 특수 장비를 동원하고 스탠다드, 아메리칸비스타 등 다양한 사이즈를 시도하며 모험을 했다. 

왜 이렇게 했냐고 물으면, 다무라 마사키가 싫증을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답하겠다. 다무라 마사키는 같은 것만 반복하면 싫증을 잘 냈다. 그는 다음에는 이걸로 하자, 다음에는 저걸로 하자, 이런 제안을 계속했다. 나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그런 시도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다 <새드 배케이션>을 찍은 뒤 내 아이디어가 바닥이 났고, 결국 그 후로는 함께 작업을 더 할 수 없었다. 

정재은 어떻게 보면 다무라 마사키가 하고 싶은 게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유연한 젊은 감독들과의 작업을 선호한 게 아닐까? <유레카>나 <헬프리스>를 보고 있으면 이 숏은 왠지 현장에서 촬영감독이 바로 구상한 숏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아오야마 신지 <헬프리스>를 찍을 때 내 의견과 다무라 마사키의 의견이 달랐던 적이 있다. 당시 프로듀서는 우리가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까지 했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비전을 정해놓은 게 아니라, 다무라 마사키와 내가 각자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는 느낌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를 어디에서 어떻게 찍느냐, 하는 문제를 아슬아슬한 상황이 올 때까지 정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런 상황은 <새드 배케이션>까지 쭉 이어졌다.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현장에 도착한 다음 그때 뭘 할지 매번 새롭게 정하는 식이었다.

내가 다른 촬영감독과 일했다면 이런 식으로 못 했을 것이다. 사전에 세운 계획대로 찍는 촬영감독과 함께 했다면 나 역시 작업 방식을 바꿔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촬영감독 중에는 본인이 직접 콘티를 그리는 사람도 있지만 다무라 마사키는 콘티를 미리 만들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 역시 이런 작업 방식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재은 그러면 준비 과정이나 현장에서 굉장히 많은 대화를 나눴을 것 같다. 촬영 시간이 길어진다거나 스탭이 대기해야 하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을 것 같은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아오야마 신지 우리들은 굉장히 빠르다(웃음). 항상 정시에 끝낸다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낮 장면을 반드시 끝내고, 해가 뜨기 전에는 밤 장면을 반드시 끝냈다.

정재은 <유레카>는 긴 영화인데, 총 몇 회차로 찍었나?

아오야마 신지 42일 걸렸다.

정재은 대단하다(웃음).

아오야마 신지 빨리 촬영을 끝내고 다무라 씨와 맥주를 마셔야 했기 때문에 빨리 끝낼 수밖에 없었다.

정재은 일본 영화 현장에는 그림 콘티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걸 고려해도 이렇게 빨리 찍은 거면 현장에서 모든 판단을 굉장히 빨리 했을 것 같다. 

아오야마 신지 우리들의 사이가 좋아서 그렇게 빨리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식으로 바로 실행이 됐다. 다만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미팅’이란 이름의 술자리가 굉장히 많았다. 그때 얘기를 미리 많이 해두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이심전심이었다. ‘그때 술 먹을 때 이렇게 얘기했었잖아요’라고 하면 ‘아 그랬지’라며 작업을 했다. 촬영 전에 아이디어가 거의 전부 나왔었다. 콘티는 없었지만 머리 속에는 계획이 모두 잡혀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재은 구체적인 장면에 관한 질문을 하고 싶다. 코즈에와 나오키가 가출할 때, 집 안에 카메라가 있고 집 밖으로 떠나는 엄마를 보여준다. 코즈에와 나오키가 대화를 나누지만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고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로 나온다. 당시 어떤 논의를 했는지 듣고 싶다.

아오야마 신지 사실 잊어버렸다(웃음). 하지만 분명한 건 시나리오 단계에서 그런 연출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수정하기 시작하면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 다만 편집 과정에서 찍었던 장면을 없애는 경우는 있다. <유레카>는 시나리오에 있는 걸 모두 찍었더니 1차 편집본이 5시간이 나왔다. 그 후 1시간 30분 정도를 잘라서 지금의 러닝타임이 나왔다. 

다만 보이스 오버는 녹음한 걸 거꾸로 돌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과정을 거쳐 조금 매만졌다. 아마 조금 기묘하게 들렸을 것이다.

정재은 <유레카>에서 오프닝의 버스 납치 시퀀스는 거의 황홀한 느낌을 준다. 한 숏으로 버스 승객과 경찰까지 찍는데, 이때 카메라가 꽤 심하게 흔들린다.

아오야마 신지 그렇게 긴 크레인을 움직이면 당연히 카메라가 흔들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괜찮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다무라 마사키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래도 괜찮지 않겠어?’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전력질주하는 배우들을 따라가면 당연히 카메라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당시 안 흔들리게 찍는 건 어떨까 고려도 했지만, 결국 이렇게 찍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돌아보면 ‘집착하지 않는다,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의 느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오히려 <헬프리스>는 완벽을 추구했었는데, 이건 젊은 혈기에서 오는 고지식함이었던 것 같다. <유레카> 이후에는 그런 완벽에 대한 이상한 집착을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찍기 시작했다. 다무라 마사키가 말했던 ‘무엇무엇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없다’는 사상(사상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줬던 것 같다.

내가 ‘다무라 주의’라고 이름을 붙이면 다무라 씨는 그런 이름 붙이지 말라고 화를 내겠지만, 우리는 결국 ‘다무라 주의’의 계승자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관객 1 감독님의 초기작을 보면 미국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풍경이 많이 보인다. 이를테면 <헬프리스>는 필름누아르, <유레카>는 서부극의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런데 최근의 영화인 <동경 공원>(2011), <도모구이(共喰い)>(2013) 등을 보면 ‘일본 영화’ 같은 풍경이 보인다.

아오야마 신지 나는 미국 영화, 특히 서부극을 정말 좋아한다. 다무라 마사키와 영화 얘기를 할 때도 마지막에는 서부극 이야기로 샐 때가 많았다. 최근 내 영화에서 ‘일본 영화’의 풍경이 많이 등장한다는 말은 다른 자리에서도 많이 듣는다. 촬영감독과 미국 영화 이야기를 거의 안 하게 된 것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친구들과는 여전히 미국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현장에서는 거의 그러지 못한다(이런 게 일본 영화의 마이너함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순하게 연출하는 스타일이라서 현장에서 ‘카메라를 확 당깁시다’, ‘카메라를 팍 놓읍시다’ 식의 말을 많이 한다. 이때 다무라 마사키는 바로 호응을 해준다. 하지만 최근 작업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달라고 한다. 그렇게 설명을 하다 보면 왠지 결과물이 ‘일본 영화’처럼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관객 1 <유레카>의 마지막에는 바다 장면이 나온다. 일본 영화에서 바다는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유레카>에서 바다를 찍은 숏은 앞에서 나온 장면들보다 길이가 짧게 느껴진다. 그리고 코즈에가 백사장에서 걷는 장면은 바다가 마치 빛에 잠식된 것처럼 보인다. 이때 물을 어떻게 찍을지 촬영감독과 어떤 논의를 했는지 궁금하다.

아오야마 신지 그렇게 찍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장면이 정서적으로 보이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바다를 찍을 때 제일 피하고 싶은 게 수평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평선이 찍힌 장면을 보기만 해도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코즈에가 해변을 걸을 때도 최대한 짧게 찍고 싶었다. 

이 장면은 바다에 뗏목을 띄워서 바다에서 해변을 바라보는 식으로 찍었다. 꽤 큰 뗏목을 직접 만들어 촬영을 했는데, 떠내려갈까 봐 그렇게 먼 거리를 확보할 수는 없었던 기억이 있다. 

정재은 마지막으로 간단한 질문인데 <유레카>를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궁금하다.

아오야마 신지 좀 아픈 데를 찌르셨다(웃음). 정재은 감독도 잘 알겠지만 영화를 편집할 때 몇십 번씩 보기 때문에 ‘더 안 봐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유레카>는 프린트에 따라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프린트에 따라 모노크롬에 세피아 빛이 도드라지는 경우가 있고, 보라색 빛이 도드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당시 만들었던 8벌의 프린트를 다 일일이 봤었고, 그 후로는 별로 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본 건 10년 전쯤 포르투갈의 리스본이었다.

정재은 <유레카>는 젊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고, 지금 한국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영화란 생각이 든다. 하나의 숏에 대한 열정이 모여 만들어진 영화인 것 같다. 좋은 영화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아오야마 신지 감사합니다(한국어로).

 

일시 2019년 9월 7일(토) <유레카>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래머

사진 목충헌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에릭 로메르 회고전]

 


“편집자의 역할은 감독의 눈이 되어주는 것이다”

- 마리 스테판 감독과의 대화


 




에릭 로메르 영화의 편집자이자 그의 가까운 친구였던 마리 스테판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지금도 로메르와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녀는 따뜻한 미소와 차분한 어조로 로메르와 로메르의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4월 26일(수)부터 29일(토)까지 진행한 네 번의 시네토크 행사 중 두 번의 대화를 정리해 보았다.



◆ 4월 26일(수) <여름 이야기> 상영 후 ◆




김성욱(프로그램 디렉터) “에릭 로메르 회고전”을 맞아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다. 로메르의 후기 영화인 <겨울 이야기>에서 유작 <로맨스>까지 모든 작품을 편집한 분이다. <비행사의 아내>를 보면 중간에 잠깐 등장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 여성이 기억날 것이다. 바로 그분이 마리 스테판 감독이다.

스테판 감독은 3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다른 얘기를 나누다가 로메르의 영화를 편집한 분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때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고, 이번 기회에 이렇게 서울아트시네마에 초대했다. 한국을 방문한 적은 몇 번 있지만 로메르와 관련된 행사에 오신 건 처음으로 알고 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소감을 먼저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영화감독) 이 자리가 너무 좋고 행복하다. 몇 년 전에도 에릭 로메르의 회고전을 했다고 들었다. 그때 로메르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에 직접 보낸 편지를 봤다. 그건 정말 드문 일이다. 로메르 감독은 극도로 비밀스러운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어떤 ‘마케팅’적 요소를 쓸모없다고 생각했었다. 본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는 건 서울아트시네마를 정말 특별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성욱 그 편지를 2001년에 받았었다. 나도 정말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웃음).

로메르 감독과 스테판 감독의 공식적인 첫 작업은 <겨울 이야기>이지만 그전부터 친한 관계를 맺었던 걸로 알고 있다. 처음 어떻게 로메르와 만났는지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 나는 이 만남을 운명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시네클럽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글을 쓰면서 누벨바그 감독들의 영화를 좋아했다. <쥴 앤 짐>, <히로시마 내 사랑> 같은 영화를 좋아했다. 당연히 프랑수아 트뤼포와 알랭 레네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30년 정도 사는 동안 트뤼포와 레네는 만날 수 없었지만 로메르와는 같이 영화도 만들고 친해졌다.

이후 우리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나는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서 다시 파리로 혼자 떠났다. 그곳에서 에릭 로메르의 영화 강의를 들었다. 그때 내가 들을 수 있는 수업은 거의 이론 수업이었다.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금방 학교를 나왔고 친구들과 함께 무작정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는 로메르의 영화사인 로장주에 가서 예산서와 관련해 우리가 참고할 만한 자료들을 좀 보여달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갔었고, 당연히 비서가 나를 막았다(웃음). 그렇게 번호만 남긴 채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왔다. 바로 로메르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오라고 했다. 그 즉시 로장주 사무실로 다시 갔다.

사무실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어린 학생이었다. 그때 로메르는 <갈루아인 페르스발>을 준비하면서 배우들과 대본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우 캐스팅 때문에 어떤 연극을 보러 갈 거라며 거기에 나와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당시 프랑스어를 거의 할 수 없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 로메르와 함께 공연을 보는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당시 로메르의 영화를 편집하던 세실 데쿠지(Cécile Decugis)의 보조 편집자로 들어갔다. 세실 데쿠지는 로메르는 물론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의 감독과 작업을 한 편집감독이다. <네 멋대로 해라>를 편집한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당시 두 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지만 그런 분과 같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고민 없이 편집 보조 일을 시작했다. 또한 프랑스에 계속 살기 위해 고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던 나에게 정말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서 <갈루아인 페르스발>(1978)의 펀딩을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었다. TV 방송국의 투자를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좀 특이한 영화였고(웃음),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그후 로메르는 규모가 큰 영화를 잘 만들지 못했다. 다음 작품으로는 적은 예산으로 <비행사의 아내>(1981)를 찍었다. 현장에는 조명도 거의 없고 사운드 감독 한 명과 촬영감독 한 명이 있었다. 거리에서 영화를 찍던 초기 누벨바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로메르는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출연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겨울 이야기>의 도서관 장면에 나오는 엑스트라는 대부분 로메르의 학생들이다. <비행사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우연히 내 친구와 함께 그 장면에 잠깐 출연할 수 있었다.

김성욱 스테판 감독은 <여름 이야기>의 편집은 물론 세바스티앙 에름(Sebasiten Erms-에릭 로메르의 E와 R, 마리 스테판의 M과 S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편집자 주)이란 이름으로 음악에 참여하기도 했다. <여름 이야기>의 작업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마리 스테판 로메르 감독은 <여름 이야기>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영화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자전적인 영화로 보아도 될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20대 당시 모습과 정확히 같다고 말했다. 갈팡질팡하면서 결정을 못 내리는, 그리고 여성과의 관계에서 부끄러움을 타는 모습들 말이다. 이 작품은 로메르 감독이 40년 동안 갖고 있던 시나리오를 거의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찍은 영화이기도 하다.

로메르 감독과 꾸준히 같이 작업하는 사람은 4~5명 정도다. 나는 편집을 맡았지만 작곡도 하고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불렀다. 또 물론 차도 같이 마셨다. 우리는 가족 같은 팀이었다. 팀원들은 그의 영화 작업을 위해 시간을 비워두었고, 로메르는 시나리오를 미리 써서 긴 시간 동안 준비하는 스타일이었다. 캐스팅을 할 때는 1년 정도의 시간을 여유 있게 쓸 수 있는 배우와 작업을 하려고 했다. 그렇게 거의 매일 만나서 차를 마시며 시나리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리허설을 했다. 시나리오 완고는 배우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뒤, 그들의 말투에 충분히 적응한 뒤 나왔다. 그리고 이 완고는 촬영 버전과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일치했다.

관객 1 영화 초반부에 해수욕장과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 장면은 마치 다큐멘터리 같았다. 배우와 엑스트라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어떻게 그런 장면을 찍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마리 스테판 배우들이 아니라 진짜 그곳에서 놀고 있던 사람들을 촬영했다. 로메르는 영화 현장의 스탭 수를 철저히 제한했다. 우리가 보는 흔한 현장과는 다르다. <여름 이야기>의 경우에는 촬영감독 한 명, 필름 로딩하는 스탭 한 명, 사운드 감독 한 명, 붐 마이크 담당 스탭 한 명, 그외 모든 일을 담당했던 스크립터 한 명이 있었다. 그리고 로장주 소속의 PD도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달리(dolly)도 밀어야 했다(웃음). 햇빛을 싫어했던 로메르는 그늘에서 리허설을 했고, 리허설이 끝나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채 배우와 촬영감독과 현장에 가서 동선을 짰다.

처음 카메라를 설치하면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하지만 거기 카메라를 계속 놔두면 사람들이 관심을 끄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촬영을 시작한다. 그리고 로메르는 카메라 옆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채 손으로 신호를 주며 연출을 했다. 사람들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채는 경우도 많았다. 행인이 물어보면 ‘나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영화과 교수고, 학생들과 실습 중이다.’라고 말했다(웃음). 한 번은 우리 스탭이 캐나다에서 온 다큐멘터리 촬영팀이라고 둘러대려고 나보고 명함을 준비해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관객 2 편집감독으로서 편집에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홍콩에서 태어나고 캐나다에서 자란 스테판 감독님은 로메르와는 세대 차이도 있고 문화적 차이도 있었을 것 같다.

마리 스테판 우리는 워낙 가족 같은 팀이라서 어떤 작업을 할 때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지 않는다. 동시에 감정을 많이 쓰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내 딸, 내 사위와 함께 7년째 함께 영화일을 하고 있다. 이런 특별한 관계에서는 오히려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건 나의 작업이기 때문에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나의 개인적 배경에 대해 질문을 하셨는데... 본인이 자신을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남성들의 세계에 속한 여성, 캐나다에 사는 중국인. 이런 식으로 자기를 프레이밍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라온 배경이 어떻든 꼭 싸워야 하는 각자의 전투를 갖고 있다. 외국인으로서 내가 얻는 도움은 없었고 거의 악영향만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다양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라 힘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정말 내가 ‘다양성’을 가진 얼굴이라면 거기서 이득을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건 자신의 의지이고 모든 건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누군가 내 말을 듣게 하는 건 나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메르는 항상 젊은 사람들과 일했다. 영화계에서 일을 오래 한 사람들은 안 좋은 습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본인보다 젊은 사람들, 영화를 처음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로메르와 작업하며 세대 차이를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로메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작업할 때 그들이 나를 ‘로메르 밑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로 보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관객 3 최근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녹색 광선>과 관련해 강연을 했다. 한 관객이 편집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그는 로메르의 영화에서 편집이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리 스테판 링클레이터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웃음). 로메르를 비롯한 누벨바그 감독들이 훌륭한 건 오늘날까지 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링클레이터, 노아 바움백 등 많은 동시대 감독들이 로메르의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에는 자신을 ‘로메르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감독들도 있다.

<녹색 광선>은 매우 즉흥적인 영화다. 하지만 이런 영화일수록 편집실에서 할 일이 정말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시나리오가 이렇게 완벽한데 편집을 할 게 있냐고 묻기도 한다. 시나리오대로 찍어서 순서대로 붙이면 끝나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연출과 편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의 첫 번째 대사부터 여섯 번째 대사를 이런 방식으로 찍고, 그 다음 대사들은 저런 방식으로 찍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 사이에 나올 수 있는 편집의 조합은 무수히 많다. 숏과 숏을 붙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알면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로메르의 영화에는 편집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편집으로 만들어내는 리듬과 편집만이 줄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 로메르는 편집을 정말 좋아했고, 항상 편집에 대해 고민하는 감독이었다.




◆ 4월 27일(목) <가을 이야기> 상영 후 ◆





김성욱 로메르의 영화를 볼 때마다 대화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대화 장면을 어떻게 촬영하고 편집하는지 궁금하다. 편집자로서 로메르와 공유하는 가장 일반적인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마리 스테판 로메르의 영화는 상당 부분 대화에 집중한다. 로메르는 스토리를 쓴 후 대사까지 다 써야 시나리오가 끝난다. 그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대략의 스토리를 쓴 다음 배우를 먼저 만난다. 이건 엄밀히 말해 ‘캐스팅’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전에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을 다시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배우들이 시간이 맞으면 그 배우들과 함께 스토리에 대해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자세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배우들이 말을 하는 방식에 감독이 익숙해지면 이걸 캐릭터에 적용시켜 시나리오를 다시 쓴다. 결국 배우와 캐릭터가 실제로 할 법한 말투로 대사가 만들어진다. 그 이후에는 대사를 전혀 바꾸지 않는다.

로메르는 대화를 나눌 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을 찍는 걸 좋아한다. 로메르의 테마 중 하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이다. 말을 하지만 진실은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반응이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로메르는 절대 카메라를 두 대 쓰지 않는다. B 카메라가 없다. 한 대의 카메라로 모든 대화 장면을 찍는다. 일단 말하는 사람을 쭉 찍고, 다시 처음부터 듣는 사람을 쭉 찍는다. 듣는 사람의 표정도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김성욱 이 영화는 마리 리비에르의 얼굴로 영화가 끝난다. 다른 영화들과는 끝내는 방식이 좀 다르다.

마리 스테판 감독들은 영화를 만드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기 검열을 한다. 나는 편집자의 역할은 감독의 눈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로메르가 마지막 장면의 소스를 나에게 전달하면서 ‘분위기 좋은 예쁜 장면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편집실에 혼자 남아 촬영본을 보다 보니 마리 리비에르의 어떤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를 바라보는데, 멀리 있는 뭔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그 표정이 명확히 ‘후회’의 감정으로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내린 선택을 후회하는 표정처럼 보였다. 그래서 여러분이 방금 보신 것처럼 마지막 장면을 편집했고, 쉬다가 돌아온 로메르는 그 장면을 보고 매우 좋아했다. <가을 이야기> 개봉 때는 로메르가 특별히 모든 극장에 공지를 하기도 했다. 마리 리비에르의 얼굴이 담긴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상영관에 불을 켜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렇게 캐릭터에게 의미를 만들어 주는 것이 편집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관객 1 개인적으로 <내 남자 친구의 여자 친구>부터 영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전에는 호흡이 느렸는데 이 영화부터 호흡이 빨라지고 공간을 사뿐사뿐 옮겨다니는 경쾌한 느낌이 난다. 그리고 <영국 여인과 공작>과 같은 에릭 로메르의 역사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  역사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은 로메르를 젊은 남녀의 연애물을 만든 감독으로 많이 기억한다. 하지만 로메르는 역사물을 꾸준히 만들었다. 로메르가 원래 하던 작업의 방향을 바꿔 역사물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방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욕망이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계속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로맨스>도 역사물이고 <삼중 스파이>도 역사물이다. <로맨스>에는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요소들이 있으며 <삼중 스파이>에는 진실에 대한 테마,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테마가 들어있다. 이건 로메르가 계속해서 다루어온 테마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역사물을 만든 게 아니라, 항상 그런 인물, 그런 테마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질문을 받고 로메르의 영화가 정말 느린지 고민을 해보았다. 나는 로메르의 모든 영화가 같은 리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사가 많은 편이라서 사람들은 로메르의 영화가 느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장면들이 밸런스 있게 일정한 속도를 갖고 있다. 물론 요즘 나오는 상업 영화의 속도와 비교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로메르의 영화를 볼 때마다 놀라는 건 영화 속 모든 숏이 그 자리에서 스토리를 진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지점에서 컷을 잘라야 하는지를 로메르에게 배웠다. 그의 숏은 정확한 지점에서 끝난다. 절대 길게 끌지 않는다. 요즘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감정적 클라이맥스가 끝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이미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숏을 몇 초 더 지속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 몇 초가 나에게는 매우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로메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로메르는 어떤 인물이 움직이는 행위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거의 집착 수준이었다. 한 인물이 여기에서 저기까지 여섯 걸음으로 간다면 그 여섯 걸음을 다 보여주는 게 규칙이었다. 사실 편집자의 입장에서는 지키기 힘든 규칙이다. 그래서 <로맨스> 때는 몇 걸음을 속이기도 했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로메르는 내가 속인 걸 알면서도 그 편집을 그냥 넘어가 주었다.

이동 장면의 리듬에 대해서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로메르는 사람들이 이동하며 방문하는 장소들을 짧은 두세 개의 연속된 컷으로 보여주는 걸 좋아했다. 많은 영화에서 이런 편집을 볼 수 있다. 이런 편집의 리듬은 현대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관객 2 계절 연작은 봄-여름-가을-겨울의 순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마리 스테판 실리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일단 <봄 이야기>(1990)로 계절 연작을 시작했다. 그런데 로메르는 영화 한 편을 준비하는 데 보통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봄 이야기> 다음에는 <겨울 이야기>(1992)를 찍었고, 다시 1년 반 정도 걸려서 <여름 이야기>(1996)를 찍었다. 순서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정해졌다. 그리고 <가을 이야기>는 그 시기의 포도밭을 찍어야 해서 시간이 더 걸린 것도 있었다.

관객 3 로메르의 인물들은 항상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로메르의 영화는 ‘버퍼링’이 없는 경제적인 영화란 생각도 든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비교해볼 수도 있고,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에 나오는 침묵의 순간과도 비교해볼 수 있다.

마리 스테판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대화들은 매우 잘 쓰여져 있다. 실제로 그는 대화를 매우 좋아했고, 영화에서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반대도 있다. 그는 좋은 영화란 모든 대사를 제거해도 화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 영화라고 자주 말했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표정만으로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캐릭터의 감정은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로메르의 영화는 소리를 끄고 봐도 그들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로메르는 무성 영화를 좋아했다.

한국이나 대만의 독립영화 중에는 가만히 있는 카메라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로메르는 절대 그런 경우를 허용하지 않았다. 항상 프레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 로메르의 영화는 느리지 않다. 모든 숏이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관객 4 로메르 감독이 편집의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게 무엇인지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 풍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풍경과 배경. 이를테면 <가을 이야기>의 망가진 마을, 시골길을 달리는 차들의 숏 같은 것들이다. 로메르는 그런 장면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몸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걸 보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이동 숏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대화의 경우에는, 로메르는 대화 장면을 탁구 시합처럼 편집하지 않는다. 소위 ‘토킹 헤드’ 방식이 아니다. 많은 영화들이 말하는 사람을 먼저 보여준 다음 듣는 사람을 보여준다. 하지만 로메르는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한 사람의 표정에 머무르는 순간이 많다. 카메라가 이 사람 저 사람을 왔다갔다하며 혼란을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관객 5 로메르 감독님의 영화 속 인물들은 왠지 화를 안 낼 것 같다(웃음). 로메르의 캐릭터와 실제 로메르 감독님이 얼마나 닮았는지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 보통 화를 낸다고 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는 걸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로메르는 조용한 목소리로 ‘아 그래? 네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걸 모르겠니?’ 이런 식으로 말한다(웃음). 하지만 나는 그가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기만 해도 충격을 받고는 했었다. 평소의 로메르는 매우 젠틀하다. 나는 무화과 과자를 좋아했는데 편집실에 올 때 일부러 그 과자를 사오기도 했다. 사람에게 불편한 내색을 비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스탭들이 로메르에게 익숙해져서 다른 감독과 작업을 할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다른 감독들 중에는 자신이 감독이란 사실을 너무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진정한 감독이 되는 길은 모든 일에 화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럴 때마다 당황한다. 이게 전부 로메르와 오랜 시간 일했기 때문이다.


정리 l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l 주민규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타노 다케시 회고전]

 

 

기타노 다케시, 웃음과 폭력으로 빚은 삶의 이중주

 

 

1990년대 중반, 한국 대학가에서는 국내 개봉이 금지(?)된 영화를 비디오에 복제하여 돌려보는 게 유행이었다. 일본 문화가 전면 금지되었던 시기라 일본 영화가 특히 인기였다. <감각의 제국>의 오시마 나기사, <쉘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철남>의 츠카모토 신야, <링>의 나카타 히데오 등이 전설 같은 감독으로 회자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바로 ‘기타노 다케시’가 있었다.

기타노 다케시의 <3-4X10월>(1990)은 개인적으로 처음 본 일본 영화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제목, 대사보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캐릭터들의 반응, 우회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폭력 묘사 등 영화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에서도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출현은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비트 다케시’라는 이름으로 매일같이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시시껍적한 농담이나 내뱉던 그가 영화를 만들었다고? 그것도 웃고 떠드는 코미디와는 달리 선혈이 낭자한 형사물을?



그 남자의 영화, 별나다

기타노 다케시가 <그 남자, 흉폭하다>(1989)를 통해 연출자로 데뷔한 일화는 유명하다. 내정됐던 감독(<의리 없는 전쟁>(1973)의 후카사쿠 긴지!)이 연출직을 포기하자 제작진은 급하게 대안이 필요했고 배우로 출연하기로 했던 기타노 다케시가 계획에도 없던 연출까지 맡게 됐다.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를 비롯하여 배우로서 몇 편의 영화 현장을 경험한 적이 있던 기타노 다케시는 자신의 비전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 남자, 흉폭하다>에는 제목에 걸맞게 툭하면 폭력을 행사해 문제를 일으키는 형사 아즈마(기타노 다케시)가 등장한다. 동료의 죽음을 계기로 마약밀매 조직을 쫓던 중 경찰 일부가 연루된 사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은 그리 새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런 편견은 접어두라는 듯 기타노 다케시는 아즈마를 소개하는 첫 장면부터 파격을 선사한다. 나이 든 노숙자를 린치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그러하거니와 그중 주동자의 집을 찾아간 아즈마가 아이라고 봐주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휘둘러 자백을 받아내는 장면은 당혹스러운 데가 있다.

영화감독으로 첫발을 디딘 기타노 다케시의 입장에서 이 장면은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 TV에서는 코미디언으로 웃음과 같은 밝은 면을 부각한다면 영화에서는 폭력으로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을 탐구하겠다는 의지로 비치기 때문이다. 이는 TV와 스크린으로 오가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리한 전략이기에 앞서 그의 삶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기타노 다케시가 본격적인 코미디 활동을 위해 대학교를 그만두고 아사쿠사의 코미디 극장에 들어간 것은 1968년이었다. 일본 현대사에서 1968년은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을 놓고 학생들은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고 이에 대학마다 전공투가 결성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학내 분위기와 달리 기타노 다케시는 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듯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애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이력은 TV와 스크린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현재의 작품 활동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모순(?)으로 점철된 그의 삶처럼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의 리듬은 ‘역설’이다. 이번 기타노 다케시 회고전의 부제가 ‘웃음과 폭력’이듯 그의 작품에는 장면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감정들이 모순의 리듬을 만들어 영화의 결을 쌓아간다. 예컨대, <그 남자, 흉폭하다>의 중반부에는 아즈마가 동료 경찰에 상해를 입히고 도망가는 범죄자를 쫓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할리우드의 형사물과 다르게 썩 볼품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시야에 들어온 먹잇감은 놓치지 않는 아즈마의 면모와 더불어 쓸쓸한 색소폰 음악을 배경에 깔아 악명 높은 이 폭력 경찰의 애잔함을 노출하는 각성 효과를 이뤄낸다.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의 젊은 시절을 토대로 <아사쿠사 키드>(2002)를 만들고 <소나티네>(1993)에 대해 감독과 직접 장시간 인터뷰를 나눈 시노자키 마코토 감독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한다. “인간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갖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형사물과 야쿠자물을 만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인데 그게 굉장히 영화적이다.” <그 남자, 흉폭하다>로 인상적인 데뷔를 마친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품을 꼽자면, <소나티네>와 <하나비>(1997)다.

 

그 남자의 삶과 죽음

<그 남자, 흉폭하다> 이후 <3-4X10월>과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를 만들며 감독으로서 일본 내에 입지를 굳히던 기타노 다케시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작품은 <소나티네>다. 그리고 그의 명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작품은 베니스영화제의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하나비>다.

<소나티네>는 원래 일본판 <다이 하드>를 만들어 보자는 프로듀서의 권유로 시작한 작품이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소나티네>로 삶과 죽음에 대해 탐구하고 싶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 예능 활동을 하며 친하게 지냈던 동료가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함께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삶이 허무하게 다가왔다.

<소나티네>와 <하나비>를 최고 작품으로 치는 건 기타노 다케시가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까닭이다. 그중 하나가 ‘불꽃놀이’의 이미지다. 화려하게 피어났다 곧바로 사그라지는 불꽃놀이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삶과 죽음의 관계를 연상한다. <소나티네>는 조직의 명에 따라 오키나와로 갔다가 음모에 빠지는 내용을 다룬다. 음모를 피하고자 은신하는 동안 주인공 야쿠자들은 해변에서 상대방을 향해 폭죽을 쏘아대며 노닥거리는 등 무료한 시간을 달랜다. 이는 후에 중간보스 무라카와(기타노 다케시)가 음모를 꾸민 조직의 보스를 찾아 총을 난사할 때 불 꺼진 건물 밖으로 비추는 점멸하는 불빛, 즉 유사 불꽃놀이 이미지로 변형된다.

기타노 다케시가 폭력과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은 과장하거나 부러 축소하는 법이 없다. 직접적이되 어떠한 수식도 가미하지 않아 일상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죽음은 보통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은 삶에 허무를 덧씌운다. 기타노 다케시가 <소나티네>에서 야쿠자를 등장시키고도 종이 인형을 만들어 놀고, 스모 시합을 하는 등 사소해 보이는 시간에 많은 장면을 할애하며 웃음을 주는 이유다. 별 의미 없이 흐르는 시간에 역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배경이다.  



‘꽃’(花)과 ‘불’(火)을 합성한 <하나비(花火)>는 제목 자체가 ‘불꽃’이다. 이 영화의 불꽃놀이 이미지는 그림으로 제시된다. 니시(기타노 다케시) 형사와 짝을 이뤄 야쿠자를 소탕하던 호리베(오스기 렌)는 잠복근무 중 총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된다. 이에 가족이 떠나고 자살 시도까지 하는 호리베는 니시가 보내준 화구로 그림을 그리며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호리베가 그리는 그림 중 하나는 불꽃놀이다. 화려하게 피었다 사라지는 실제 불꽃놀이와 다르게 그림에는 불꽃이 터지는 순간이 담겨 있다. 불꽃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호리베에게 있어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시노자키 마코토의 질문에 “나의 역사를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TV에서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솔직한 감정으로 영화에 임한다. 내 영화를 구성하는 건 나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어둠이다.” <하나비>를 만들기 전 기타노 다케시는 오토바이를 타던 중 큰 사고를 당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은 삶과 죽음의 관계를 더욱 깊이 사유하도록 했는데 그 결과로 이어진 작품이 <하나비>다.

이 영화에는 죽음의 입구에서 삶으로 유턴하는 호리베의 대척점에 죽음을 향해 가는 니시 형사가 있다. 생과 사가 그렇게 짝을 이뤄 인간의 삶을 구성하듯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폭력과 웃음, 도시와 자연, 땅과 하늘, 빛과 어둠 등 두 개의 개념이 대립하는 가운데 결국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개별 영화뿐 아니라 기타노 다케시의 필모그래피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 남자의 가장 조용한 영화

기타노 다케시는 확고한 연출 철학을 가지고 있다. 대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설명을 하면 할수록 영화는 더 나빠진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기타노 다케시의 철학을 극명한 형태로 보여주는 작품이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다.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청년 시게루(마키 구로도)가 여자 친구의 응원을 받으며 서핑을 독학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A4 한 장 분량도 안 되는 듯한 대사만 등장하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인물의 감정을 유발하는 건 반응숏이다.  

쓰레기 수거일을 하다 서프보드를 발견한 그가 처음 바다로 나가 서핑을 하는 광경에 관한 주변의 반응이 그렇다. 서핑이 능숙한 이들의 얼굴에는 서핑에 대한 지식도 없이 바다로 뛰어든 시게루를 향한 황당한 반응이 주를 이룬다. 그에 반해 여자 친구의 얼굴에는 도전에 나선 남자 친구를 향한 응원과 사랑하는 마음이 카메라에 한가득 향기롭게 묻어난다. 이처럼 대조적인 반응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시게루의 서핑에 대한 주변의 감정이 변화해 가면서 여운을 남기는 식이다.

기타노 다케시 특유의 편집 방식은 인물을 말이 아니라 행위로 규정한다. 기타노의 서정적인 영화 중 한 편인 <키즈 리턴>은 청춘물이 으레 그렇듯 요란하거나 호들갑스럽지 않다. 영화는 한 명은 권투선수로, 한 명은 야쿠자로 승승장구하다 미끄러지는 과정을 거리를 둔 채 바라본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만이 극 중 청춘을 향한 감독의 애정을 드러낼 뿐이다. 과도한 의미 부여 대신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운에 맡기며 좌충우돌하는 과정 자체를 청춘으로 바라본다.


혼란하다는 면에서 실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 자체가 정신적으로는 청춘이다. <기쿠지로의 여름>(1999)의 기쿠지로(기타노 다케시)는 계획에도 없이 엄마를 찾아나선 아이와 여행길을 떠난다. 과묵한 아이 옆에서 시종일관 장난질을 멈추지 않는 기쿠지로에게 여행의 목적지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 따위 안중에도 없는 그에게 더 중요한 건 그 사이를 잇는 길 위의 시간 그 자체다. 목적지를 향하는 동안은 무료하다. 기쿠지로에게 지루한 시간에 변화를 가져오는 건 장난질이다.

볼품없어 보이는 기쿠지로의 삶이 주는 교훈은 위대한 인물의 그것보다 더 의미 있어 보인다. 성공과 실패로만 규정되는 유한한 삶보다 더 무한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의도다. 기타노 다케시는 기쿠지로와 같은 여전히 청춘인 자신의 영화 속 인물에게서 바다를 느낀다.

바다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이후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관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다. 물에 몸을 담그긴 싫어도 멀리서 바라보는 건 좋아하는 기타노에게 바다는 우리네 삶의 은유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바다 위의 파도는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매번 다른 형태로 찾아온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유한한 것 같아도 무한하다. 바다는 그런 무한의 시간을 품고 있다. 기타노 역시 <소나티네>로 대표되는 야쿠자물과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와 같은 서정적인 작품을 파도처럼 오가며 자신만의 영화의 바다에서 무한으로 나아간다.   

 

기타노 다케시, 만세!

<기쿠지로의 여름> 이후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특유의 독창성을 잃은 듯한 행보를 보인다. 물론 <자토이치>(2003)처럼 일본 영화 역사에서 반복되는 소재를 변형하여 재미를 준 작품도 있다. 하지만 <아웃레이지>(2010)처럼 자극적인 묘사로 일관하거나 ‘도저히 분류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기염(?)을 토한 <다케시즈>(2005)처럼 소재의 참신함에 그친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최신작 <8인의 수상한 신사들>(2014) 역시 전직 야쿠자 할아버지들이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롭지만, 그냥 평이한 코미디물 수준이다. 앞으로의 작품 또한, 그렇지 않을까 예상이 되지만, 그런데도 기대하게 되는 건 그가 기타노 다케시이기 때문이다.



<소나티네>의 원래 제목은 ‘오키나와 피에로’이었다. 극 중 배경 오키나와와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를 변형시킨 제목이었다. <소나티네>로 변경한 건 당시 피아노를 배우던 기타노 다케시가 한창 연습 중이던 곡이 ‘소나티네’인 것과 관련이 있다. 피아노를 배우고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소나티네’를 연주한다고 한다. 다만, 그 이후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아 반복 연습이 필요한 곡이라고 하는데 영화도 계속 만들다 보면 더 나아질 거라는 생각에 ‘소나티네’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어쩌면 기타노 다케시의 최근 작품목록은 다음 단계의 영화로 넘어가기 위한 연습 단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꾸준히 만들다 보면 <하나비>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를 넘어선 또 다른 차원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3-4X10월>은 야구를 함께하는 젊은이들이 탱크로리를 타고 야쿠자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영화다. 제목의 ‘3-4’는 9회말에 날리는 역전 홈런을 의미하는 일본의 야구 용어라고 한다(10월은 그때 영화를 촬영했기 때문에 붙인 거라고!). 2000년 중반 이후의 필모그래프를 두고 한물 갔다고 놀려대는 이들에게 기타노 다케시가 멋지게 복수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실제로 그런 날이 온다면 이렇게 외치겠다. 감독 만세! 기타노 다케시 만세!

 




글 l 허남웅 영화평론가

그림 l 허남준 일러스트레이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에릭 로메르 회고전]


로메르의 산책


에릭 로메르의 25편의 극영화 중 13편의 영화가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다큐멘터리 시리즈(신도시에 관한 다큐멘터리 등)와 6편의 단편 영화의 무대 또한 파리, 혹은 파리 근교이다. 손쉽게 우리는 로메르의 영화를 파리 산책영화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거리를 돌아다니고, 때로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인물들이 이동한다. 카메라가 로케이션을 도입하고 인물들이 공간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사건이라 부를 법한 이야기가 벌어지고, 때론 기적 같은 우연도 발생한다. ‘도덕 이야기’의 첫 작품 <몽소 빵집의 소녀>는 일찌감치 이런 형식을 예시한다. 영화의 중심에 정확하게 몽소 거리라는 장소가 위치하고, 첫 장면부터 주인공이 이를 소개한다. ‘파리 빌리에 가로수 길의 코너 동쪽으로는 바티뇰 대로가 있다. 북쪽으로는 레비 거리와 시장 돔므 드 빌르. 카페 왼쪽으로는 다시 빌리에 가로수 길이 있고, 지하철 서쪽으로는 쿠르셀 대로가 있는데, 쭉 가면 몽소 공원과 학생들의 거주 지대였던 시티클럽을 허문 자리가 나온다. 법대에 있는 동안에는 줄곧 그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몽소 거리의 갤러리에서 일하는 실비는 항상 공원을 지나 집으로 갔다.’ 이토록 상세하게 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전혀 극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결국 이 영화는 몽소 거리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 이 거리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간 한 여인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다. 남자는 그녀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니고, 배가 고파 들린 빵집에서 다른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이제부터 고민이다. 그는 우연히 만났던 그녀와의 재회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소녀와 만남을 시도할 것인가.


산책 형식이 로메르 영화의 특징이긴 해도 그에게만 고유한 것도 아니고(고다르, 리베트, 바르다 혹은 자크 로지에의 예를 들 수 있겠다), 인물이 정작 산책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들은 여유롭지 않고 산책보다는 자기 문제에 빠져 있으며, 주변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몽소 빵집의 소녀>에서 주인공의 여정은 사라진 실비를 찾는 목적에 충실하다. 그는 게다가 배가 고프다. <비행사의 아내>의 주인공은 산책하기에는 이미 심신이 피곤하다. 그는 밤새워 일한 탓에 꾸벅꾸벅 졸고 그 때문에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한 일들로 불가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에서 파리 근교에 사는 주인공들 또한 전형적으로 틀에 박힌 여정을 반복한다. 로메르적 우연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이들이 집에 갇혀 있기보다는 열린 공간을 돌아다니는 움직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카페와 식당, 거리의 공공 공간들에서나 예기치 않은 우연적 만남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산책이 비록 인물의 주 관심이 아니더라도 로메르의 인물들은 거리를, 도시를 돌아다녀야만 한다. 로메르가 기획한 이런 도시적 여정의 건축적 범례는 벤야민이 논했던 파사쥬와 유사해 보인다. 파사쥬란 바깥이지만, 결국 닫힌 공간이다.



그렇다고 로메르 영화 속 인물들이 파리만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시대를 달리해 여정은 두 가지 중요한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 하나는 파리 바깥, 지방으로의 휴가, 이른바 바캉스의 여정이다. 60년대 후반 이래로 이런 여정이 로메르 영화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비아리츠, 칼레, 도빌, 루르, 코트 다 쥐르 등등, 무엇보다 바다, 해변이 영화의 무대로 등장한다. 다른 하나는 대체로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파리 근교의 영화들이다. 이를테면 도시와 근교를 오가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대체로 ‘희극과 격언’ 시리즈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도시를 세밀하게 포착하는 현실주의자 로메르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런 변경의 원인에 거리의 위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60년대 초반까지 그가 주목한 것은 인물들이 숨쉬기 위한, 완전히 살기 위한 도시에서의 움직임이다. 누벨바그 작가들이 도둑 촬영을 무릅쓰고 거리에서 촬영했던 근본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6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파리의 거리는 정치의 열기로 뜨거워진다. 그가 파리를 떠나는 시기가 대략 1965년을 거치면서다. 1967년의 <수집가>의 해변, 1969년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의 클레르몽-페랑, 1970년의 <클레르의 무릎>의 해변 등이 이후에 나온 작품들이다. 그렇다고 로메르의 바캉스가 거리의 정치를 피한 결과라고, 그의 보수적 태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68혁명 직후 겨울의 클레르몽-페랑에서 촬영한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은 보수적인 작품인가? 이에 대한 논란을 다루기보다는 모드가 주인공 남자에게 했던 ‘당신은 어디를 가든 마을 사람들에게 비난받는다’라는 말을 떠올리고 싶다. 그는 말하자면 클레르몽-페랑의 폭설에, 사람들의 구설수에 갇힌 존재다. 파리의 현재 시간에서 벗어나 만든 시대극 <O 후작 부인>이나 <영국 여인과 공작>에서 주목할 만한 것 또한 일상적인 공공 공간의 부재이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공공 공간에서 유폐된 여인들이다. <O 후작 부인>에서 상대를 알 수 없는 이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사람들의 구설수를 피해 집의 구석에 몰린다. 그리고 영국에서 건너온 여인은 프랑스 혁명 시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는 위험한 거리에서 몰려 집에 거주하는데 심지어 그녀의 침실에 혁명군이 난입한다. 여기서 요점은 산책이 불가능한 그들 일상의 파괴이다.


로메르 영화에 새롭게 등장한 신도시는 역사가 깊은 편이다(바캉스의 해변과 관련해서는 ‘바캉스의 영화’라는 예전의 글로 대신하고 싶다). 로메르는 이미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TV프로를 위해 건축과 도시 계획에 관한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도시의 풍경 Paysages urbains>(1963), <풍경의 변모(공업 시대) Les métamorphoses du paysage: l'ère industrielle>(1964), <셀룰로이드와 대리석 Le celluloïd et le marbre>(1966), <도시의 시멘트 La béton dans la ville>(1969), <새로운 도시 1-4 Enfance d'une ville>(1975)에 이르는 다큐멘터리 작업은 이후 <보름달이 뜨는 밤>(1984)과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의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는 파리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신도시 세르지 퐁투아즈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희극이다. 주택만이 아니라 대학, 연구기관, 사무실이 새롭게 지어진 곳이다. 신도시 쇼핑센터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좁은 곳으로, 이곳에서 두 주인공 남녀는 하루에 일곱 번이나 우연적인 만남을 거듭해 결국 친구의 친구와 연인이 되어버린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서는 파리 북부의 신도시 마른 라 발레에 거주하면서 직장은 파리에 두고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녀는 파리를 사랑한다. 밤과 축제들. 동시에 신도시의 평온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집을 갖고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다’라는 격언처럼 이동이 가져오는 곤란함을 보여준다. 공간을 드러내면서 이야기의 부재로 향했던 모던 영화와 달리 로메르는 반대로 공간의 과잉에서 이야기의 풍부함을 끌어온다. 파리 산책을 다룬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인 <파리의 랑데부>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꽤 재밌는 결론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파리지앵이라면 절대 가지 않는다는 퐁피두 근처의 카페를 우연을 핑계 삼아 가는데, 거기서 바람난 애인의 부정을 목격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깨닫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자기 안의 공간에서 보내는 삶의 본성상 어리석음, 혹은 불투명한 삶에 내재한 부조리한 우연 말이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틀에 박힌 경로의 산책에서 벗어나 직면하는 사랑과 우연의 장난이다.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