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영화감독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slowski,1941~1996)의 ‘데칼로그’가 공개된 지 30년이 되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영화를 만든 1980년대는 변화와 격동의 시대였다.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 운동에서 시작해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변혁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 폴란드에서 도덕적 의미를 담은 <데칼로그>의 제작으로 절망의 시대를 극복할 새로운 희망과 비전의 길을 찾고자 했다. 키에슬로프스키에 따르면 <데칼로그>는 크지쉬토프 피에세비츠(Krzysztof Piesiewicz)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에세비츠는 전작 <노 엔드 No End>(1985)의 공동 각본을 썼고, 가톨릭 교회를 믿는 신앙인이자, 폴란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재판에서 활동했던 변호사이다. 비가 내리는 어느 추운 날 피에세비츠는 그에게 “누군가 십계명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당신이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처음에는 염두에 두지 않다가, 바르샤바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왜 살고 있는지 모른다"라는 강한 인상을 받고 피에세비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피에세비츠와 함께 3년 동안 십계명에 대한 신학 및 철학적 연구를 하며 공동 시나리오를 썼다. 두 사람은 20세기 후반 서구 세계에서 고대 계명의 보편적, 도덕적, 법적 타당성과 오늘날의 세속적인 개인 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14개월에 걸쳐 10부작을 연출했다. 1989년에 이 작품이 폴란드 텔레비전을 통해 공개됐을 때, 폴란드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즐겼다고 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1980년대라는 변화의 시기에 공산 국가냐 자본주의 국가냐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라 여겼다. 배급 카드와 같은 공산주의 치하의 폴란드 현실이 그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일부 비판이 있긴 했지만, 키에슬로프스키는 <데칼로그>에서 사회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현대 세계를 살고 있는 인물들의 사적 감정과 그들이 처한 윤리적 딜레마의 문제를 다뤘다. 그는 단순한 계명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찾아간다. 외면적으로 단순 명료해 보이는 ‘십계명’의 “하지 말라”라는 금지 명령에 담긴 이면과 복잡성, 역설적 측면이 그렇게 드러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작품의 의도를 밝힌 인터뷰에서 “조심하라. 너희 곁에 다른 사람들도 산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영화와 계명의 정확한 상관관계를 밝히기보다는 계명에 담긴 전체 윤리체계 안에서 영화를 이해하도록 제안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폴란드인의 삶을 바꿀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삶의 가치와 방향을 상실한 도덕적 불안에 대한 영화는 이렇게 탄생한다. 

영화의 중심 배경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평범한 아파트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를 카메라가 쫓아가 그들의 삶을 잠시 엿보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다른 시리즈에 잠깐 다시 등장하기도 하고, 매번 등장하는 ‘미지의 청년’도 있다. 2편의 주인공 도로타와 그녀의 남편은 5편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부부로 등장하고, 5편의 주인공 토멕은 10편에서 마찬가지로 우체국 직원으로 나온다. 또 3편과 4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촬영감독을 기용해 총 9명의 촬영감독이 영화에 참여했고, 시리즈 전체에 걸쳐 즈비그뉴 프라이즈너(Zbigniew Preisner)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데칼로그 1. 운명

바르샤바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 크지쉬토프와 어린 아들 파벨, 그리고 고모 이레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학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크지쉬토프는 과학적 지식과 합리적 이성에 따라 살지만 가시적인 세계 외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고모 이레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파벨을 따뜻하게 돌봐주며 신앙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한다. 파벨은 아버지와 함께 컴퓨터와 체스를 즐기면서도, 고모가 말하는 신앙과 영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영리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다.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하는 파벨을 위해 아버지는 컴퓨터로 얼음 두께를 계산해서 안전을 확인한 후 스케이트 타는 것을 허락한다. 다음 날 책상 위에 있던 잉크가 깨져 파란 얼룩이 번지고 이를 발견한 아버지는 불안감을 느낀다. 

1편은 가톨릭에서는 1계명이며, 개신교로는 1, 2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20:3-6)’에 해당한다. 영화는 계명이 가지는 ‘금지’와 ‘명령’의 성격을 뒤집어 ‘질문’으로 풀어낸다. 계명이 가지는 도덕적 교훈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과 딜레마를 보여준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인터뷰에서 “내 영화들은 도덕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중립적인 카메라는 해답을 추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시작으로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어떤 실존적 운명의 의미를 찾아간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난생 처음으로 죽음을 마주한 어린아이의 순진한 질문에 계명의 숨은 의미가 담겨 있다.



데칼로그 2. 선택

바이올리니스트 도로타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병원의 진료부장을 찾아간다. 도로타는 병원에 입원 중인 남편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묻는다.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그녀는 남편이 죽게 되면 아이를 살리고, 남편이 살게 되면 아이를 낙태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남편의 생사 여부에 따라 낙태를 결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의 생사 여부는 자신도 알 수 없다는 대답을 할 뿐이다. 하지만 도로타의 집요한 요청과 그녀가 처한 상황의 고백을 들은 의사는 고민한다. 의사는 남편이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녀에게 남편이 죽어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영화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한 여자와 그 선택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의사의 관계를 다룬다. 신의 이름이나 맹세라는 계명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아닌 두 인물의 실존적 상황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문제에 집중한다. 도로타는 뱃속의 아이와 남편 사이의 양자 간 선택의 기로에 있다. 진료부장 역시 도로타에게 남편이 죽음 여부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십계명의 의미를 ‘선택’에 대한 질문으로 풀어낸다. 영화는 처음부터 인물들이 생명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관객에게 윤리적 딜레마로서의 삶의 문제와 선택의 의미를 질문하게 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선택을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데칼로그 3. 안식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술 취한 사람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비틀거리며 지나간다. 바로 근처에서 택시 운전사 야누스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택시에 앉아 있다. 같은 시간, 붉은색 차를 탄 여주인공 에바는 양로원에 있는 이모를 찾아간다. 영화 초반부는 주요하게 크리스마스의 전통과 가정의 긴밀한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술주정꾼은 “우리 집이 어디야? 집이 없어.”라며 트리를 끌고 거리를 헤맨다. 에바는 환자복을 입은 아이가 “집에 가고 싶어.”라며 크리스마스 트리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바라본다. 

키에슬로프스키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전통적 서구 가정의 모습을 십계명의 안식일에 대한 계명과 연결해 그려낸다. 야누스의 행복한 가정의 집안 풍경을 밖에서 홀로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 1편의 주인공 교수 크지쉬토프와 야누스의 과거 애인 에바이다. 교수는 아이가 없는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다. 두 사람은 창문 너머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된 아늑한 거실과 어린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야누스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는 가정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감독은 크리스마스를 과거 죄의 짐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밤인 동시에, 절망하고 외로운 영혼과 함께 보내는 위로의 밤으로 묘사한다. 에바의 대사처럼 크리스마스에 사람들은 커튼을 닫고 가족끼리 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전히 밖에는 홀로 쓸쓸하고 가난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이웃들이 있다. 영화는 이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감독은 가족의 거룩한 시간뿐 아니라 사랑의 나눔과 해방의 거룩한 시간성을 강조한다. 안식이라는 시간의 신성함과 진정한 의미를 질문한다.

 

데칼로그 4. 부모

부활절 월요일 아침, 앙카는 물병을 들고 몰래 아버지 미할의 방에 들어간다. 물병에 든 물을 미할의 머리에 쏟아붇는다. 짓궂은 장난처럼 보이지만 서구 기독교 문화에서 부활절 월요일(Easter Monday)에 서로 물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대중적 풍습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읜 스무 살 앙카는 예술학교에서 연기를 배우는 대학생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멀리 출장 가는 아버지를 배웅한 후 앙카는 아버지의 책상 위에서 의문의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 겉면에는 ‘내가 죽은 후에 열어볼 것’이라고 쓰여 있다. 이 비밀스러운 편지는 전체 사건과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장치이다. 부녀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메시지가 담겨 있다. 관계의 경계 앞에서 앙카는 감정의 혼란을 느낀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영화에서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출발해 근친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인간관계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남, 즉 갱생(更生)의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스스로 관계를 선택하고 재정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내면적 절망과 죽음을 통해 과거 부녀 관계를 새롭게 하는 부활의 아침을 맞이한다. 부활절 월요일 에피소드와 더불어 영화가 전하려는 주제를 보여주는 몇 가지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앙카가 시력검사를 받는 장면과 연기 수업 장면이다. 시력검사 장면에서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검사표에 있는 글자를 읽는데 그 글자의 조합이 ‘아버지(father)’이다. 앙카는 안경을 쓰면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한다. 공항으로 아버지를 마중 나갈 때 앙카는 안경을 쓰고 나간다. 또 다른 장면은 앙카가 예술학교에서 연기 수업을 받는 장면이다. 앙카는 사랑하는 관계를 연기하려 하지만 어색하기만 하다. 지도 교수는 역할에 몰두하라 조언한다. 영화는 인간관계의 질서와 역할에 대해, 그리고 관계를 바르게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말한다. 

 

데칼로그 5. 살인

5편과 6편은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란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장편으로 개봉한 작품이다. 영화는 이제 막 변호사가 된 이상주의자 피오트르, 속물적인 택시 운전사 발데마르, 그리고 무심하게 세상을 표류하는 청년 야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무관한 세 사람의 일상의 단편이 어떤 친밀한 관계도 맺지 못한 채 우연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교차하고 서로 연결된다.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는 살인이 행해지고, 이윽고 법원에서 형이 선고되고 사형이 집행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담은 5편은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 현대인의 상황을 묘사하지만, 훨씬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키에슬로프스키가 <데칼로그> 전편에서 일관되게 묘사하는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와 고독, 소통 불가능성의 문제가 5편에서는 극단적으로 제시된다. 규격화된 회색빛 아파트 우울한 풍경은 바르샤바 거리로 확장되고, 도시 전체가 방황과 소외의 공간이 되고 위협적인 곳이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야첵의 감정 없이 이루어지는 살인 행위가 후반부 사행 집행 과정의 형식적 절차와 유사하게 묘사된다는 점이다. 마치 두 번째 살인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살인 행위와 사형 집행 사이의 유비 관계의 실마리는 5편의 전체 주제이며, 변호사 피오트르의 독백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법은 자연을 모방하지 않고 개선해야 합니다. 인간은 대인관계를 규제하기 위해 법을 창조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요. 형벌은 보복입니다. 범죄 예방이 아닌 범죄자 처벌에 집중한다면요. 그런데 법은 무슨 명분으로 보복을 집행합니까? 결백을 위해서입니까? 그럼 법을 만든 이는 결백합니까?” 

 

데칼로그 6. 사랑

6편의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달리 극장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사랑’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이다. 5편과 6편은 <데칼로그> 시리즈의 중심을 차지하며 ‘살인’과 ‘사랑’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구성에서는 유사성이 감지된다. 이야기는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단순하다. 우체국에서 일하는 고아 출신의 19살 청년 토멕은 훔친 망원경으로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30대 연상의 여인 마그다를 1년 넘게 매일 훔쳐본다. 영화 전반부는 토멕이 마그다를 훔쳐보는 과정을, 후반부는 토멕이 훔쳐보기 행위를 고백한 후 마그다와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5편이 개인의 충동적 살인과 국가의 체계화된 처형의 과정을 전후반부로 나눠 배치해서 두 살인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과 비슷하게, 6편은 청년이 훔쳐보는 행위와 여성이 바라보는 과정을 배치해서 둘 간의 행위를 비교하도록 한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소통하는 데 실패한 현대인의 소외된 사랑을 통해 사랑의 신성함과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극장용으로 재편집되면서 결말도 조금 달라졌다는 것이다. 마그다 역을 맡았던 여배우의 요청에 의해 결말이 더 긍정적이고 따뜻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6편은 자살 시도 후 우체국으로 다시 출근한 토멕과 마그다가 만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희미하게 웃는 마그다와 달리 토멕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극장판에서 마그다는 토멕의 아파트를 찾아가 망원경으로 자신의 아파트를 바라본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데칼로그 7. 고백

영화가 시작하면 바르샤바 아파트 단지의 외경이 보이고, 한 아이의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그 비명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 누구의 것이며, 왜 그러는지 당장은 알 수 없다. 관객은 위아래로 움직이는 카메라를 따라 아파트의 수많은 창문 중 그 비명의 출원지를 찾게 된다. 비명소리는 인간의 본질적 두려움과 불안의 표현인 양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격자형 회색빛 아파트의 단순하고 차가운 외관은 죽음과 감옥을 떠올리게 하며 불안을 가중시킨다. 화면이 바뀌고 한 젊은 여대생이 학교를 그만두려 하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다시 영화는 아파트 내부 한 가정의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비로소 비명이 한 어린아이가 악몽을 꾸며 내는 소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의 악몽이 어디서 기원하고 어떤 내용인지는 마지막까지 미스터리로 남는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는 질문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해결책이 아닌 긴장감을 보여준다. 관계의 혼란에서 오는 불안은 아이의 악몽을 통해 표현된다. 소유에 대한 집착과 억압은 또한 어린 안야가 잠자는 동안 꼭 잡고 놓지 않는 손으로 표현된다. 이렇듯 안야는 7편의 도덕적 불안의 정서를 반영하며 끝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는 마이카의 뒤를 쫓는 안야의 눈빛은 오프닝 시퀀스의 악몽으로 내지르는 비명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소유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마주할 수 있을까?

 

데칼로그 8. 과거

8편은 오래 전 과거에 대한 회상 장면(플래시백)으로 시작한다. 어둡고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다 발자국 울림소리가 들리고 한 성인과 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카메라가 그들 뒤를 한참을 따라가다 뒤돌아보는 아이의 얼굴이 언뜻 스치고는 곧 깜깜한 어둠 속에 잠긴다. 암울한 과거를 비추는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영화는 현재 시점으로 돌아온다. 싱그러운 아침햇살과 새소리가 들리는 초록의 공원이 보이고, 조피아는 바르샤바 대학으로 출근해 윤리학 수업을 진행한다. 이 날은 미국에서 온 폴란드 출신 연구자 엘즈비에타가 수업에 참여한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유대인 생존자들의 운명을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조피아는 학생들에게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 윤리적 선택의 극한 상황을 다루는, 이른바 ‘윤리적 지옥’이라는 주제를 제시한다. 엘즈비에타는 1943년 여섯 살 유대인 소녀에게 일어난 일을 사례로 제시한다. 

8편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비교적 분명하지만 단순하지 않게 표현한다. 영화에서 ‘윤리적 지옥’으로 제시되는 선택의 고뇌는 선택하는 순간이 아니라 선택 이후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그날 밤의 선택은 조피아의 삶을 지배한다. 과거에 대한 자세는 엘즈비에타에게도 적용된다. 두 사람은 모두 과거 ‘쇼아’의 기억에 근거한 삶을 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분명한 대비로 쌍을 이루며, 첫 장면의 어두운 불안감이 비로소 떨쳐진다.



데칼로그 9. 고독 

9편은 위기에 처한 부부 관계를 다룬다. 성공한 외과 의사 남편 로만과 항공사 직원 아내 항카는 아이 없이 결혼 10년째 접어든 부부이다. 바르샤바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비뇨기과 의사 친구를 만난 로만은 의학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성 무능력 상태를 확진받는다. 의사 친구는 가혹하게도 아내와 이혼하라고 충고한다. 이후 로만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자살 충동과 아내에 대한 강한 소유욕을 느끼면서 절망적 감정의 갈등상태에 빠진다. 아내에 대한 육체적 소유를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다는 심리적 위협과 자괴감은 로만에게 보다 총체적이고 형이상학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일으킨다. 로만은 항카의 은밀한 삶을 추적하고 감시하기 시작한다.

<데칼로그>를 계획하면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신의 시선’에 대한 생각을 구약의 신과 연관시켰다고 한다. 그에게 구약의 신은 “인간에게 많은 자유와 책임을 맡기고 인간이 그것을 잘 사용하는지 지켜본 다음 보상하거나 벌하는” 신이다. 하지만 그는 <데칼로그>에서 신의 시선과 판단에 근원적 질문을 제기하고 그 도덕적 명령의 깊은 의미를 탐사해 나간다.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을 남자 주인공 로만이 추구하는 감시와 통제의 힘으로 대체하고, 그런 시선과 시도의 부도덕을 보여줌으로써 인류 내면을 지켜보는 신적 공의에 질문을 제기한다. ‘전능한 감시’의 진실한 의미를 찾기 위해 신의 시선(God’s eye view)이라고도 하는 부감 숏의 능력을 자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로만의 시청각적 엿보기에 내재된 모든 잔인함과 사악함, 이기심이 관음증적 욕망이나 시각적 쾌락이 아닌 대상을 통제하고 소유하려는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존재론적 필요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한다. 영화는 사람을 탐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한 신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간다. 

 

데칼로그 10. 희망

10편은 <데칼로그>의 마지막 영화이자 시리즈를 완성하는 영화이다. 탐심에 대한 계명의 의미는 사실 보편적이고 흔하게 발견되며 여러 편에 걸쳐 다양하게 묘사된다. 7편은 사람을 소유하려는 탐심, 9편은 정신적인 소유에 대한 탐심을 다뤘고, 10편에서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물질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진지하고 우울한 톤으로 진행되는 다른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톤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희극적 요소, 웃음과 관련한 것이다. 10편의 마지막 장면은 두 형제가 이마를 서로 맞대고 아이러니한 큰 웃음을 쏟아내며 끝난다. 그리고 이 희극적 요소는 영화 전반에 걸쳐 작동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랜만에 만난 형제 예르지와 아르투르는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 각종 자물쇠로 채워진 철문 안에는 좁고 낡은 한 칸 방만 있고 창문에는 쇠창살이 달려 있고 철통 보안이 되어 있다. 형제는 아버지의 삶에 대한 어떤 이해도 없이 그 삶의 모습을 비웃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엄청난 고가의 우표 수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세계에 빠져들면서 형제도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간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소유하려는 욕구가 발생하는 지속적이고 다양한 효과를 구체적으로 추적하면서 탐심의 본성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탐구한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아버지의 유산에 탐심이 발동한 형제의 모습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탐심을 객관화하는 과정과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 그 안에서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동시에 그려져 있다. 형제가 아버지의 유산과 관련한 여러 사건들을 통과하며 겪게 되는 일은 자기 내면의 탐심을 깨닫는 과정이며 가족 관계에 대한 재발견이다. 

 

임세은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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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누아르 특별전]

필름 누아르의 불온성을 지우다

- <길다>(찰스 비더)

 

<길다>는 두 개의 인상적인 만남으로 시작한다. 먼저 도박사 조니와 카지노 주인 밸린, 이 두 남자 사이의 만남이다. 조니는 뉴욕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굴러들어간 과거가 모호한 도박사다. 길거리에서 주사위 사기로 막 한몫을 잡았는데, 현지의 불량배에게 모두 뺏길 판이다. 그때 밸린이 나타나서 조니를 구한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강인한 인상의 밸린은 끝에 칼이 숨겨진 지팡이로 악당을 물리쳤다. 밤 항구에서 만난 두 미국인 남자는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고,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운다. 이들의 만남은 강한 스포트라이트 조명과 투 숏 덕분에 마치 연인들의 설레는 만남처럼 묘사돼 있다.

두 번째 만남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길다의 등장 장면이다. 길다는 밸린이 여행지에서 만나 바로 다음날 결혼한 미국인 여성이다. 밸린의 소개로 조니와 길다가 서로를 처음 봤을 때 두 사람의 시선으로 묘사되는 클로즈업의 빈번한 교환은 이들의 강렬한 욕망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는다. <길다>는 이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필름 누아르다. 필름 누아르의 공식에 따르면 젊은 여성 길다는 팜므 파탈, 조니는 추락하는 순진한 남자, 그리고 돈과 권력을 가진 밸린은 희생되는 악당이 될 것이다.

그런데 <길다>는 필름 누아르의 관습을 비튼다. 먼저 길다의 캐릭터가 남성들의 미움을 받는 악녀 팜므 파탈에 머물지 않는다. 길다는 다른 팜므 파탈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작전을 짜는 ‘영리한’ 인물이 아니라 오직 조니의 사랑에만 헌신하는 ‘착한’ 여성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길다가 처음 등장할 때, 누아르 특유의 범죄적 열정보다는 조니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더욱 강조된 데서 길다의 멜로드라마적 캐릭터는 이미 드러나 있었던 셈이다. 길다는 누아르 특유의 불온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리고 두 남자의 관계도 전형성과 다르다. 이 점은 개봉 때부터 일부에 의해 꾸준히 지적돼 왔는데, 두 남자는 우정을 넘어 동성애적 관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첫 만남에서 두 남자가 보인 상대에 대한 특별한 호감, 그리고 조니가 남성성을 상징하는 밸린의 지팡이에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순간들이 주요한 이유로 제시됐다. 돈과 권력을 가진 밸린은 조니가 제거해야 하는 사랑의 라이벌이 아니다. 더 나아가 조니는 밸린과 길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랑의 포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밸린이 사라진 뒤 길다를 학대에 가깝게 대하는 조니의 태도는 밸린에 대한 배반의 죄책감을 길다에게 덧씌우는 것 같다. 이쯤 되면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이 길다인지 조니인지 혼란이 생길 정도다.

<길다>는 필름 누아르 계보에서 늘 빠지지 않는 대표작으로 소개된다. 아마도 리타 헤이워드의 압도적인 매력, 그리고 명암의 강렬한 대조를 마법처럼 잡아낸 촬영(루돌프 마테)의 솜씨 덕이 클 것이다. 그러나 사실 <길다>는 누아르의 불온성은 교묘하게 피해가고 결국 윤리를 강조하는 멜로드라마처럼 종결된다. 아마 스타였던 리타 헤이워드를 악녀 팜므 파탈로 만들거나 비극적 결말의 장본인으로 내세우는 데 큰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길다>는 불온성보다는 대중성을 선택했는데, 그럼에도 필름 누아르의 전설로 남은 특이한 위치에 있다.


한창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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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름 누아르 특별전]


밤과 도시의 이중적 성격

- <고독한 영혼>(니콜라스 레이)


<고독한 영혼>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살인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던 딕슨이 형사 부부를 배우로 삼아 자신이 재구성한 살인현장을 연출하는 장면이다. 딕슨은 살인마 역할을 맡은 형사에게 아내의 목을 더 강하게 조일 것을 요구하면서 광기 어린 눈빛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포착한 그의 얼굴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빛이 드리워져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그러나 지금 딕슨의 얼굴을 강렬하게 뒤덮는 이 빛은 외부의 광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그의 내부로부터 분출된 가학적 쾌감의 시각화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딕슨의 광기를 추동하는 빛은 자연광이 아니라 도시의 인공조명이다. ‘황혼의 시인’이라 불린 니콜라스 레이가 선택한 주인공답게 딕슨은 백주의 시간대와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태양빛이 내리쬐는 동안 그는 졸음을 호소하거나,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은 몇 년 만이라며 무기력하게 중얼거린다. 그의 폭력성과 가학성은 밤의 기운 속에 침잠해 있다. 한밤의 도시가 내뿜는 야경의 빛이 그의 파괴적인 면모를 격렬하게 충전시키는 것이다(한편으론 딕슨이 지닌 밤의 정서는 대단히 매혹적이기도 한 것이어서, 그와 로렐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사건도 밤에 발발한다). 도시 한복판의 도로 위에서 발생한 사소한 시비를 담아낸 도입부의 광경은 과잉된 분노와 민감한 반응들로 가득한 도시의 구동원리를 지목한다. 도시는 개인의 고립을 과도한 폭력성으로 표출한다. 바로 이 세계를 딕슨이 떠돌고 있다. 원제에 명시된 ‘고독한 곳(lonely place)’은 딕슨의 폐쇄적인 내면을 가리키는 은유인 동시에 그의 서식지인 할리우드라는, 이 차가운 소외의 세계에 할당된 표지인 셈이다.

<고독한 영혼>이 그려낸 밤의 풍경은 아름다우면서도 불안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음험하다. 이곳엔 모순된 비이성적 충동이 도처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밤에는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시나리오 작가는 폭행과 스캔들을 일삼으며, 상대를 향한 무시와 다툼은 일상적으로 만연해 있고, 차들은 위협적으로 달려들며, 인물들은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에 휩싸이는 곳. 연인의 사랑과 동료들의 격려를 주변에 두고 있음에도 광기와 분노에 휩싸이며 파국을 맞이하는 딕슨의 운명은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엔딩에 이르러 딕슨은 집을 나서 거리를 향해 걸어간다. 그의 발걸음은 오직 신경질이 난무하는 도시의 무방비한 거리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장소라는 것을 깨달은 체념 섞인 선택처럼 느껴진다.

도시의 야경과 딕슨의 얼굴에 드리워진 빛이 그토록 강렬하게 각인된 까닭도 여기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도시라는 고독의 세계와 딕슨의 얼굴이 공명하고 있음을 예견하는, 또한 딕슨의 자기파괴를 탐미적으로 수긍하는 도취의 빛이다. 딕슨은 할리우드의 밤거리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마지막 장면의 딕슨은 첫 장면의 도로 위로 되돌아올 것이다). 니콜라스 레이 특유의 냉엄한 관측과 묘사가 이 사내와 그가 몸담은 도시 전경에 독특한 비애감을 부여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고독한 영혼>의 미감에는 밤의 관능적인 분위기와 한 남자가 마주한 파국의 기운이 연결되어 있다. 불길하지만 유혹적인 아름다움이다.

 

김병규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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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신부님은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내 친구 정일우>의 김동원 감독과의 대화


김성욱(프로그램디렉터) <내 친구 정일우>를 어떻게 처음 기획했는지 궁금하다.

김동원(감독) 개봉할 생각 없이 만든 작품이다. 요즘 개봉 이야기가 나와서 좀 혼란스럽긴 하다(웃음). 처음에는 예수회나 제정구기념사업회도 이 영화를 만들 계획이 없었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나중에 예수회와 일반 후원회원들에게 지원을 받아서 만들었다.

김성욱 감독님의 작품 중 <한사람>(2001)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작품과 <내 친구 정일우>가 연속 선상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사람>에 대해 감독님이 “한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에 대한 작품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친분이 있는 사람에 대한 영화를 찍는다는 건 감독과 그 사람이 너무 가깝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을 전혀 모르는 관객들도 영화를 볼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를 만들 때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김동원 <내 친구 정일우>를 만들 때는 <한사람>의 방법론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두 영화 모두 한 인물에 대한 연대기를 다루기 때문에 영화의 형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두 영화를 다르게 만들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일우 신부님이 너무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다큐에 담았을 때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신부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취합해서라도 신부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려고 했다.

김성욱 60~70년대의 청계천, 80년대의 상계동, 그 이후 농촌 생활로 이어지는 신부님의 삶의 궤적을 볼 수 있다. 이때 서로 다른 네 사람의 나레이션이 들린다. 각 시대와 관련된 분들이 나레이션을 한 것 같은데, 이 구성은 어떻게 생각한 건가.

김동원 <송환>에서 과도한 나레이션을 쓰긴 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나레이션을 어려워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신부님의 모습은 실제 그분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신부님의 모습을 가장 잘 이해하고 묘사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 신부님께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예수회 시절에서 한 분, 청계천 시절에서 한 분, 괴산 시절 한 분. 가장 가까웠던 분들에게 편지를 받았고, 화면이랑 대조해 나갔다.



김성욱 영화에서 느껴지는 시대적인 변화 중 하나는 공동체의 붕괴다. 상계동에서 같이 계셨던 분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걸 거부하기도 한다. 점점 공동체가 붕괴되고 작아지는 것에 대해 감독님이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동원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에 대한 나의 확신이 엷어져 가는 것에 대한 성찰. 괴산의 할머니가 옛날에는 대보름 잔치가 신났는데 이제는 잔치 같지도 않다는 말씀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요즘엔 집들이 같은 것도 없어졌다.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가 변한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고 공동체의 미덕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상계동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김성욱 영화 첫 장면도 인상적이다. 신부님이 무슨 생각으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건너오셨을까. 어떤 생각과 믿음으로 이런 일들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누가 신부님에게 고민을 얘기했을 때 어떤 조언을 하기 보다는 그냥 듣고 있었다는 증언들도 인상적이다.

김동원 내가 신부님을 미화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신부님은 눈에 띄지 않게 일을 했다. 상계동에서 철거가 시작되면 계속 녹음기를 가지고 당시의 정황을 녹음했다. 그 기록들을 통해 상계동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는 일을 많이 하셨다. ‘복음자리’와 ‘목화마을’을 만든 것도 신부님이었다. 그런데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게 신부님의 신념이었다. 훗날 상계동 사람들에게 배반당했을 때, 복음자리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 신부님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는 관객들의 반응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픈 경험은 신부님뿐 아니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거기서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이겨내는 사람이 있는데, 신부님은 후자였다. 버티는 게 목회자나 활동가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관객 1 신부님이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영화 제작을 언제 결심했는지 궁금하다. 또 2007년에 상계동 주민들과 술자리를 갖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빈 테이블을 보여준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김동원 신부님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고는 했었는데 구체적인 준비는 못 한 상태에서 신부님이 돌아가셨다. 따로 인터뷰도 한 번 못 했기 때문에 후회를 많이 했다. <상계동 올림픽>을 만들 때는 투쟁의 주체는 주민들이어야지, 신부님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괴산에도 몇 번 가지 못했다. 병원에 계실 때의 모습은 간병인들이 찍은 거고, 괴산 장면은 거의 평화방송이 찍은 것이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든 건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부터다.

사실 20년 전부터 상계동 주민들의 지금 삶에 대한 영화를 기획했다. 그런데 자꾸만 기획 의도가 달라지더라. 주민들의 지금 삶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뚜렷한 관점을 제시하기 어려웠다. 포기의 순간까지 갔었지만 신부님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다시 상계동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관객 2 영화 중간에 세월호 선체를 부감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김동원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사람들이 앞서서 싸우는, 피해자들이 오히려 가장 선봉에 서는 모습을 상계동에서도, 세월호 참사 때도 보았다. 그분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가난뱅이가 세상을 바꾼다”는 신부님의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그렇게 될까 싶은 회의도 있다.

김성욱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 계획을 듣고 싶다.

김동원 내 나이는 이제 하나씩 정리만 해도 좋을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일단 <송환>의 다음 이야기를 해야 하고, 이 작품을 ‘상계동 올림픽 2’라고 우기고도 싶다(웃음). 또 봉천동 이야기도 정리해야 하고, <상계동 올림픽>의 나레이션을 하셨던 손인숙 수녀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싶다. 아직은 모호한 생각만 있다.


일시 6월 21일(수) 오후 7시 30분 <내 친구 정일우> 상영 후

사진 이한슬 자원활동가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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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배우의 표정에 대한 짧은 생각

-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 배우의 연기를 보고



1.

영화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배우의 얼굴이다. 물론 손의 작은 움직임이나 어깨의 떨림으로도 감정을 보여줄 수 있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건 결국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은 이마의 주름, 눈썹의 각도, 눈가의 주름, 코의 찡긋거림, 굳게 다문 입술 등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다.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에 적절한 표정을 만들어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고, 관객은 배우가 만들어낸 이목구비의 기표들을 해석하여 캐릭터의 감정을 짐작한다. 이를테면 어떤 배우가 눈을 크게 뜨고 미간을 찌푸린 채 양 눈썹을 위로 올리고 입을 크게 벌리면 우리는 그 캐릭터가 화가 났다고 판단할 수 있다. 즉 배우의 얼굴은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특권적인 신체 기관이다.

이때 연기는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일차 목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표준적인’ 방식을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고, 기쁨을 연기하는 배우는 ‘기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독자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는 ‘실험적인 연기’를 한다고 평가받거나, ‘연기를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맥락에서 연기의 의미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기본적인 합의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합의’는 자칫 상투적인 연기를 끌어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만약 슬픔을 연기하는 백 명의 배우들이 모두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존의 익숙한 방식으로만 슬픔을 연기한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의 감정은 느끼지 못한 채 단지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기표만 보게 될 것이다(요즘 한국영화에서 거의 모든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선보이는 ‘감정 폭발’의 연기를 떠올려보자). 결국 배우는 기본적인 연기 양식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진다.

또 다른 문제는 배우가 캐릭터의 감정을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캐릭터의 감정을 꼼꼼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어떤 인물의 마음 상태는 여러 가지 감정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정확한 구성 요소와 비율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각자 자신만의 개입과 해석을 통해 그 캐릭터의 심리를 상상해야 한다. 같은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 보기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며 영화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백을 거의 남겨두지 않은 채 캐릭터의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관객이 캐릭터의 내면에 개입할 여지를 차단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뛰어난 연기의 대부분이 어떤 모호한 감정의 영역을 끌어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그래서 때로는 얼굴, 또는 표정을 지우는 연기가 상투적으로 친절한 연기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를테면 어떤 영화의 배우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동경 이야기>에서 하라 세츠코가 이렇게 운다). 이때 관객은 배우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지만 그(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어떤 감독은 짙은 그림자로 배우의 얼굴을 덮기도 한다(필름 누아르가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스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은 관객이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밖에도 배우가 카메라를 등진 채 연기하거나 가면이나 붕대로 얼굴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방법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두 배우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지 못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배우의 표정을 가리는 연출이 항상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런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의 표정과 그 감정의 관계, 나아가 ‘좋은 연기’에 대해 더 다양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3.

최근 이런 고민을 다시 하게 만든 건 <꿈의 제인> 속 이민지 배우가 보여준 연기였다. 이 영화에서 이민지가 연기한 소현은 매우 끔찍한 상황에 처해있다. 현실과 환상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이야기하자면 소현은 최소 두 명의 친구를 떠나보냈으며 자신 역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었다. 게다가 미래에도 별 희망은 없어 보여 당분간은 계속 괴로운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이처럼 누가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소현은, 또는 이민지는 관객에게 (오열이 아닌) 무표정을 보여준다.

이 무표정은 일단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 정도의 힘도 없는 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관객은 무표정을 통해 소현이 극도로 지쳐버린, 일종의 감정의 진공 상태에 처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무표정의 두 번째 효과는 관객의 불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배우의 표정은 그 캐릭터의 감정을 알려주는 특권적인 지표이다. 하지만 이민지의 무표정은 관객이 소현의 감정을 정확히 짐작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소현이 어떻게, 얼마나 슬퍼하고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 즉 소현의 심리 상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이때 우리는 캐릭터의 감정을 쫓아갈 표지를 잃어버리고, 이는 결국 어떤 불안함으로 이어진다. 스크린 속에서 따라가고 있던 캐릭터가 갑자기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은 백지와 같은 이민지의 얼굴을 보며 단지 이런저런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얼굴의 의미는 마지막까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민지의 무표정의 얼굴이 <꿈의 제인>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 순간의 정서가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나 역시 구체적으로 답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현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가 이민지의 무표정을 매개 삼아 그 자체로 굉장히 생생하게 전해진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이민지의 연기는 관객에게 불안을 설명하지 않고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하고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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