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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 최호적시광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자객 섭은낭> 리뷰 - 은은하고 애틋하게 흔들리는 은은하고 애틋하게 흔들리는- 자객은 별 말이 없다. 주로 말을 하는 건 그녀의 스승으로 보이는 옆의 다른 여자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유려하고도 절도 넘치며 예사롭지 않은 숏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다. 여객이 스승의 명에 따라 말에 탄 어느 사내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무협영화에 흔히 있을 만한 순간이지만, 그 리듬과 무드와 절제미에 순간 놀라게 된다. 대사는 없고, 간결한 동작만이 있으며, 인과관계는 없고,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정서만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이 첫 장면을 되돌아보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감상의 자세가 이미 여기에 드러나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침묵하는 주인공 캐릭터를 서사가 아닌 (캐릭터의 사소한 동작부터 카메라 이동이나 프레임 변경을 모두 .. 더보기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빨간 풍선> 리뷰 - 풍선의 시선 풍선의 시선- 송과 시몬이 거리에서 처음 만난다. 둘은 열쇠를 맞추고 빵을 사면서 잠시 길을 거닌다. 송은 자신이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소개하며 “이라는 영화를 봤느냐”고 시몬에게 묻는다. 여기에서 은 알베르 라모리스가 1956년에 만든 단편 영화이다. 시몬은 “못 봤다”라고 대답하며 걸음을 옮긴다. 송은 시몬이 지나간 자리에 놓인 건물 벽에 그려진 빨간 풍선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찍는다. 라모리스의 영화에서 빨간 풍선은 가시적인 것임이 분명했다. 소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풍선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풍선은 별 관심 없는 성가신 물건이거나 눈에 띄기에 빼앗아 없애고 싶은 것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영화 내내 빨간 풍선이 아른거렸던 1956년작과는 달리 허우 샤오시엔의 에서 풍선.. 더보기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카페 뤼미에르> 리뷰 - 오즈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헌사 오즈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헌사 -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는 오즈에 대한 헌정을 내세우는 대신 현대 도쿄의 일상을 담담하게 관찰한다. 오즈에게 가능했던 부녀관계의 감정적 밀도, 일본인의 집 내부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바꾸기 위해 허우 샤오시엔은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을 충실하게 따른다. 카메라는 쉽게 인물들 사이로 들어서거나 서로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요코의 방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내밀한 딸의 공간에 선뜻 들어서지 못한 오즈의 영화 속 아버지의 시선을 체득한 허우 샤오시엔의 태도처럼 느껴질 만큼 멀찍이 떨어져서 빨래를 널고 커튼을 치고 피곤에 지쳐 잠이 든 요코를 바라볼 뿐 그녀의 지척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일본의 상점가.. 더보기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쓰리 타임즈> 리뷰 - 되돌릴 수 없는 세 개의 시간 되돌릴 수 없는 세 개의 시간- 의 원제는 ‘最好的時光’이다. 왕가위의 2000년 작품 의 원제는 ‘花樣年華’다. 두 영화의 제목이 비슷한 의미를 띤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곰곰이 따져봤다. 전자는 ‘최고의 순간’ 정도의 뜻이 되겠고, 후자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쯤으로 해석된다. 어쩌면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에는 시간을 달리해 세 커플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보내는 시간을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은 부질없고 힘겹고 아슬아슬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허우 샤오시엔은 거기에다 ‘최고의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다. 그건 역설적인 표현이거나 말장난이 아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보내는 시간이 ‘최고의 시간’인 이유는 그것.. 더보기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호남호녀> 리뷰 - 현재와 과거,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감정을 겹쳐서 만든 영화 현재와 과거,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감정을 겹쳐서 만든 영화- 를 두고 혹자는 허우 샤오시엔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가장 실험적인 작품이라 평한다. 실험적이라 평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영화가 여러 겹의 시간대를 비슷하게 겹쳐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시간대를 겹쳐 놓는 것이 아니라 실제와 그것의 재연이 겹쳐지며, 인물(리앙 칭)의 과거와 현재가 겹쳐든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재연이요, 이것은 실제요.’ 혹은 ‘이것은 과거요, 저것은 현재’라는 식의 구분점을 영화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처음에 영화는 그저 서로 다른 시공간과 인물을 나열하는 것처럼 보인다. 리앙 칭을 제외하고 인물들의 얼굴도 잘 구분되지 않는다. 롱숏으로 잡히거나 어두운 배경에 놓인 인물들을 분간하기란 쉽지 않다. 인.. 더보기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연연풍진> 리뷰 - 소년은 어른이 되고 노인은 늙어갈 것이다 소년은 어른이 되고 노인은 늙어갈 것이다- 은 밝은 점처럼 보이는 빛을 향해 다가가는 터널의 어두움에서 시작한다. 네 번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굽이치고 곧게 뻗은 철길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철길을 둘러싼 산등성이가 보이고 기차 안에 서서 책을 읽는 소년에게 “수학 시험을 망쳤다.”고 소녀가 투정 부리듯이 말한다. 이어지는 기차 차단기의 붉은 등과 기차의 도착, 철길을 따라 걸어오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사람들이 오가고 아이들이 뛰어논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하얀 천이 바람에 나부끼고 마을이 어둠에 잠길 때쯤 집에 도착한 소년은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다. 영화의 도입부인 이 장면들은 여러 번의 변주된 형태로 등장해서 그가 소년기를 통과하고 청년이 되어가는 과정.. 더보기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동동의 여름방학> 리뷰 - 동동의 사적인 기억들로 구성된 영화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 상영작 리뷰 네 명의 필자들에게 이번 허우 샤오시엔 전작전의 상영작 7편에 대한 짧은 리뷰를 부탁했다. 이 글들이 각 작품에 대한 기억들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아 주길 바란다. 동동의 사적인 기억들로 구성된 영화 - 허우 샤오시엔이 1984년에 발표한 은 - (1983), (1984), (1985), (1986)으로 이루어진 - ‘성장기 4부작’의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대만 뉴웨이브의 초기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주는 게 한 특징이다. 그 시기의 대만 뉴웨이브 작가들은 함께 옴니버스 작업을 진행하고 서로의 작품에 긴밀하게 협조하거나 출연까지 했다(허우 샤오시엔이 금마장영화상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던 시절이다). 에도 에드워드 양이 주인공 소년의 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