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3일 <미남 세르쥬> 상영 후에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영화사 강좌가 열렸다. ‘클로드 샤브롤의 누벨바그’란 제목으로 표면과 심층사이의 관계, 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한 경도와 장르 영화에 대한 애호가 깊었던 누벨바그리언 샤블로의 세계에 대하여살펴보았던 그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샤브롤은 굉장히 전략적인 위장전술을 구사했던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의 영화와 관련해서 몇 명의 다른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는데, 역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히치콕이다. 두 번째로는 프리츠 랑이 있다. 랑의 미국시절 영화는 위장영화였다. 그는 독일에서 대단한 예술가로 인정받으며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히치콕의 3분의 1도 안 되는 급료를 받으며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위장을 해야만 했다. 위장된 영화에는 언제나 표면과 심층이 있다. 미국시절의 랑은 표면적인 위장과 심층적인 동력이 같이 작동하는 독특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사실은 5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 전체가 그것을 겪어야만 했다. 사회적 환경의 문제나, 자본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작가들이 고안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전술이었다. 마찬가지로 표면과 심층사이의 관계는 샤브롤의 영화를 대단히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동시에 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한 지나친 경도와 장르 영화에 대한 애호라는 맥락으로 그의 영화를 평가절하 당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는 표층 가운데 심층적인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샤브롤 영화에서 핵심적인 부분인 것 같다.


샤브롤의 영화에서는 지표나 물리적인 흔적들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표면에 드러난 지표나 흔적들과, 그것에 의해서 추론되는 입장들 혹은 거짓들이 있고, 그런 외면 아래 은폐되어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어가는 과정이 샤브롤 영화의 전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샤브롤 영화의 기본적인 특징들이 등장하게 된다. 샤브롤은 앞서 열거한 요소들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는 지리적 공간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닷가나 시골, 지방이다. 샤브롤 영화에서는 도시보다도 지방이나 외곽지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훨씬 더 흥미롭다.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그 지역의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이 수수께끼처럼 펼쳐지며 숨겨져 있던 것들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 두 번째로, 거기에서 파생되는 공간성이 있다. 그것은 주로 미장센의 영역에서 드러난다. 그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 중에 하나는 집인데, 그것이 갖는 폐쇄적이고 한계적인 성격들이 있다. 세 번째로, 샤브롤은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부분들에 대한 선험적인 판단을 피하는 작가다. 내러티브적인 영화를 만듦에도 불구하고 누가 악인이고 누가 범죄자냐 하는 문제의 해결 뿐만 아니라, 누가 어떤 일을 왜 하게 되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조차 완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네 번째로, 샤브롤의 인물들은 사회적인 관계망 안에서 구축되어간다. 다시 말해서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이 인물들을 악이나 범죄나 위험으로 몰아가고, 동시에 그 인물들 스스로가 범죄적 관계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상호교환성이 샤브롤 영화의 특징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사실 샤브롤 영화 안에서 악인이나 범죄자는 모두이거나 혹은 아무도 아닌 인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샤브롤에 대해 했던 말은 굉장히 흥미롭다. “샤브롤은 영화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그것은 모두가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평등성이다.” 차별이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그 범죄에 대한 책임성을 갖고 있을 수도 있으며 죄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악을 체현하고 있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관계 안에서 공생과 타협의 지점들을 잡아나가야 한다. <미남 세르쥬>에서도 세르쥬와 프랑수아는 공생하고 있는 것이지, 세르쥬가 프랑수아에 의해서 구제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인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미셸 셰르가 말했던 ‘기식자’라는 표현이 샤브롤의 영화에 아주 적절하게 연결될 수 있는 것 같다.


샤브롤은 기본적으로 고전적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는데, 이때 두 가지의 충돌적 요소들을 같이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내러티브적 요소다. 말하자면 법과 질서 같은 것인데, 플롯을 따라가는 선들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본적 욕망과 장르적인 부분들을 잘 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미지, 카메라 움직임, 미장센 같은 다른 부분들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내러티브적 요소를 중단시키거나, 사건의 의미를 변화시켜간다. 샤브롤은 이 두 가지를 충돌시키고 동시에 결합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나갔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듯 5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부분이며, 샤브롤은 프랑스적인 맥락 내에서 그것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샤브롤은 <사촌들>을 데뷔작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제작비 문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환경적 문제들 때문에 자신의 고향에서 무명 배우들을 기용해 <미남 세르쥬>를 먼저 만들게 되었다. 사실 당시의 프랑스 영화계에는 도제 시스템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영화를 만드는 데 많은 제약이 있었다. 이를테면 길드에 소속되어있는 배우들을 써야 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샤브롤이 무명 배우를 쓴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세르쥬는 알콜중독자로 묘사되는데, 원래의 설정도 있었겠지만 그 부분이 좀 더 많이 극화가 되었던 것은 알콜퇴치위원회에서 제작비를 받기로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샤브롤은 굉장히 영리하게 영화를 찍은 작가이며, 영화의 절약성을 구현한 작가기도 하다. 누벨바그 작가들 가운데서 저평가 받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경제적이고 산업적인 근거들이나 새로운 제작방식을 구현했던 가장 선구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미남 세르쥬>의 경우 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바로 <사촌들>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노하우를 고다르나 트뤼포, 리베트 등에게 전수해주며, 그들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미남 세르쥬>는 지방이라는 공간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화이다. 지방을 배경으로 선택했던 데는 앞서 언급했던 환경적 문제도 있었지만, 지리적 공간 설정에 대한 샤브롤의 영화적 태도 역시 작용했으며, 동시에 개인사적인 연관성도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프랑수아라는 인물에는 샤브롤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촌들>로 넘어가게 되면 샤를르라는 인물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쌍생아 같은 작품으로, 세 명의 중심인물들이 배치된 방식 역시 동일하다. 이 두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라스트에는 몇 가지의 기묘한 지점들이 숨어있는데, 거기에서 모호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샤브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남 세르쥬>에서는 빛과 어둠이라는 기본적인 충돌점이 있고, 눈이 내리는 밤, 어둠, 길,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인물들은 굉장히 물리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뛰어다니는 프랑수아, 세르쥬를 끌고 가는 모습. 그리고 눈 내리는 시골집의 내부 공간에서 미장센을 구축하는 방식들이 있다. 그런 요소들로 구성된 이 영화의 모호한 라스트를 설명하는 몇 가지의 패턴이 있다. 가장 많은 평자들은 프랑수아가 결국 세르쥬를 구제했다고 해석한다. 그는 예수처럼 고행을 거친다. 일단 세르쥬의 아이의 탄생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정상적으로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서 의사를 데려온다. 일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아이의 탄생에 입회해야한다는 식으로 세르쥬를 찾아 질질 끌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 과정을 거쳐 세르쥬가 마지막에 밝게 웃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물리적인 여정을 통과해 갱생과 구제에 도달하게 된다는 해석이다. 또 다른 일군의 해석은 그것이 위장된, 정해진 엔딩이라는 것이다. 제작비를 위한 위장이기도 하고, 그런 교훈적 결말을 만들어 가는 것이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의 완결점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질질 끌려갔던 세르쥬가 돌연 그런 미소를 보인다거나, 의사를 보내주는 글로모의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는 여전히 애매한 부분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 해석은, 그 라스트 전체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라스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몇 가지 장치들이 있다. 예를 들어 라스트가 진행되기 바로 전 단계의 장면에서, 프랑수아의 클로즈업 숏 안에 갑자기 눈이 내린다. 그리고 이 시퀀스의 마지막에 세르쥬를 보여줄 때도 포커스 아웃이 된다. 이 두 가지의 기술적인 장치는 라스트 전체를 프랑수아의 상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영화에서 진행된 구제라는 것은 프랑수아의 공상과, 망상과, 유토피아적 상상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 장면 전체가 꿈의 시퀀스인 것이다. 세르쥬에게 두들겨 맞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프랑수아가 자신의 방에서 마치 갇힌 존재처럼 망상에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다. <지옥>이 그렇듯이, 이 영화의 라스트 역시 미결정과 부유의 상태로 끝나버리는 느낌이 있다. 앞서 말씀드렸던 고전적 스토리텔링과 스타일이 충돌하는 지점이 이런 것이다. 이런 부분이 샤브롤의 영화를 모호하게 만들어 가는데, 그 모호함 가운데 숨겨져 있는 것을 파헤치는 데 다각적인 시각이 필요하지 않나 한다. 그래서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샤브롤 영화의 표면과 심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지점이 샤브롤 영화를 독특하게 만들어가는 것 같다. 그의 영화들이 범작과 태작과 걸작을 넘나드는 가운데에서도 그런 경향은 꾸준히 지속되어왔다.


누벨바그 작가들 중에서 현 시점에 탐구의 대상으로 놓아야 할 작가가 바로 샤브롤이 아닐까 한다.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 상당 수가 결국은 위장전술을 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고다르 같은 작가처럼 표면까지도 모던하고 래디컬하게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이전의 것을 답습하듯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유지해나가면서 그 안의 관계들에서 충돌적인 요소들을 만들어가는, 그를 통해 동시적인 만족들을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샤브롤이 평생에 걸쳐 했던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의 현실성과 실용성, 생산성이나 또 다른 영역에서의 창조성 같은 면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놓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에 개최하게 될 2차 샤브롤전에서 좀 더 많은 작품들을 보시면서 다시 그에 대한 진단을 해본다면, 그나마 이 미지의 작가를 조망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리: 박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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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스무 네 살의 나는 기혼 남성에다가 아들까지 둔 가장이며 샐러리맨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나의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건 선이고 저건 악이라고 명명하면서 교회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악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왜 항상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가? 삶에 있어서 죄책감은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고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보라. 나는 그것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물론, ‘세상의 불행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외치며 이기적으로 구는 것보다 죄책감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20대의 나는 이렇게 모든 것에 시비를 걸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도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신부님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고해성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나의 방종한 사생활, 교회에 대한 분노 등을 부끄러움 없이 늘어놓았다. 이런 짓은 몇 년 동안 이어졌지만 나의 아내도 부모님도 모르는, 나의 또 다른 이중생활이었다.


고해실과 폭스 영화사 사무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카이에’지에 영화평을 썼다. 히치콕에 관한 글 덕분에 나는 ‘카이에’지 군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고수하게 되었다. 우리는 -누벨바그 세대를 뜻함- 서로서로에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뜻을 같이 하면서도 서로를 견제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유감스러운 사람은 –지금 떠올려 보면 조금 우습지만 – 자크 리베트였다. 마치 작심이나 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구체적이고 치밀한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다. 알랭 레네가 가장 먼저 영화를 찍고 자크 리베트는 거기서 조감독을 맡으며 다음 차례는 리베트가 감독을, 그리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조감독을 하는 등등. 그런데 무슨 일이든 예상을 뒤엎는 현상이 발생하는 법, 돈을 쥐는 자가 첫 메가폰을 잡게 되었고, 그건 바로 나였다. 






아내의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내에게 유산이 분배되었고, 갑작스럽게 떨어진 돈 보따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알랭 레네의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어떨까?’ 아내의 뜻밖의 대답인즉 ‘흠, 당신이 먼저 영화를 만드는 건 어때?’. 그리하여 <미남 세르쥬>를 찍을 수 있었다. 첫 편집 필름은 2시간 35분의 러닝타임이었는데, 리베트의 눈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건 너무 길잖아! 한 시간 내로 끊어야지!’ 그런데 트뤼포의 장인 모르겐스타인이 운영하는 제작사에서 배급받는 기회를 그만 놓치고야 말았다. 모르겐스타인은 테뉴지Tenoudji 에게 자신의 제작사를 넘기면서 <미남 세르쥬>’의 배급을 추천했다. <미남 세르쥬>는 흑자를 거두었고, 이윤이 생기자 나는 즉각 <사촌들>의 촬영에 착수했다. 하지만 자본이 넉넉하지 않아 <사촌들>은 난관에 부딪쳤다. <사촌들>은 위험도 많았고, 상징적인 영화가 되었다: 리베트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동안 나는 두 편을 찍은 것이다.


나는 비평을 그만두었다. 남의 고기를 팔아주기 위한 글은 더 이상 쓰지 않았고, 친구들의 영화들에 관해 아첨하는 글을 가끔 써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치켜세워 주었고, 그건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룰이었다: 영화 두 편을 찍는 동안 아무도 배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신의 은총이었다. 삶의 다양한 굴곡을 거치면서도 나는 언제가는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결코 안달하지 않았다. 잠이 들 때면 호주에서 메가폰을 쥐고 있는 나를 꿈꾸었고, 때문에 이루어질 꿈이라고 –자주 말하여지는 것처럼- 알고 있었다.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장담한 적도 없었다.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두고 보자구’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더욱 곤란한 꿈이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나의 꿈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태연했다. 태연한(serein)그리고 숙맥(serin), 나를 보호한 것은 바로 이런 순진함이었다: 내가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그건 곧 성공을 의미하리라.


나 역시 영화계에 일찍 발을 들여 조감독 역할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감독들은 첫 메가폰을 잡기위해서 15년 동안 맥주를 날라야 했다. 나는 나를 왕으로 여기며 자랐는데 맥주를 나르라고? 차라리 영화관에서 살겠다! 나라고 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여러 가지 계산을 해보았지만 구체적으로 실행한 일은 없었다.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에두른 방식으로 보이겠지만, ‘카이에’지 동료들과 나는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파리를 세포 조직화 한 것이다. 우리는 정말 약아 빠졌었다! 무엇보다 장 콕토를 우리의 손아귀에 넣었던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데뷔시절은 장 콕토의 데뷔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카이에’지 사무실에 직접 거동을 하거나 그의 영화 첫 시사회에 우리를 꼭 초대하여 프랑스 영화계 인맥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닫힌 문을 열어주는 열쇠나 같았으며 큰 보증이 되는 존재였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인식했고, 그러한 상황에 어느 정도 편승하였다.






나는 영화에 대한 열광으로 인해 눈이 멀지는 않았다. 뭐든 활용하는 것은 나의 타고난 성질이어서 내가 어떤 계획을 실현할 경우,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만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한일이 엉망진창이면 나는 금새 사태를 깨달았고 결과를 지켜보았다. 강조하자면 나는 내 영화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이나 의견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점 또한 나의 절대에 가까운 회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으며 교육과 훈육에 대한 반발심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내 첫 영화들에 대하여 ‘카이에’지는 분명 허풍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책략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시대가 확실히 틀리다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남 세르주>가 개봉했을 때, 그리고 <사촌들>이 연이어 소개되자 어떤 이들은 나를 두고 발자크에다가 베토벤이 약간 섞여 윤회 했다는 둥, 그것도 모자라 드가나 툴루즈 로트렉의 화법을 연상시킨다고 하였다.


아, 내가 그런 비평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나는 오줌 누는 법도 잊어버린 식물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분명 영화감독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코타파비Cottafavi라고, 고전시대 영화 전문가로서 재미있는 감독이었다.  그는 고전에 관한 지식에 통달했으며 그에 관한 디테일한 요소까지 상세하게 기억하는 대단한 마니아였다. 그러자 곧 사람들은 그를 세익스피어와 시세론에 비교하였고 ‘카이에’지도 그런 글을 썼다. 문제는 코타파비가 그걸 그대로 믿은 것이다. 그 이후 그는 더 이상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파스칼의 ‘팡세’의 수준에 도달하는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물론 장 피에르 멜빌의 경우처럼 허풍스런 비평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칸 영화제 기간, 누군가가 장 피에르 멜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  감독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세요?’멜빌은 심각하게 대답하길, ‘참 지키기 힘든 자리이다’. 나는 그의 대답이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 자신이 하는 말을 믿고 있었고, 자신의 머리가 너무 커지자 거기에 맞는 모자를 찾을 수 없는 지경이 오고야 말았다. 아무튼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는 부류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삼킬 만큼 겸손하지 않다. 나 자신과 사랑에 빠질 만큼 어리석지도 않으며 나르시시즘에 관한한, 나는 항상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과 유쾌하게 살고 있으며 나 자신이 조소거리가 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끝)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특별연재]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보러가기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해당 회차를 클릭하시면 연재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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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고등학교시절 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한 덕분인지 바까롤레아(프랑스 대학입학 시험)을 턱걸이로 겨우 통과했다. 나처럼 똑똑하고 명석한 학생에게는 불명예스러운 결과였는데, 나는 원래부터 시험이라는 제도에 관심이 없었다. 시험은 지루하고 따분한 과정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항상 시험 성적이 좋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력은 없으면서 시험은 잘 치는 학생들이 있다. 나는 그 반대의 경우였다.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굳히게 된 이후에도 나를 평가하는 제도나 사람에 관해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세자르 상이니, 황금종려상이니 하는 것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영화제를 나는 경멸한다.  

대학에 가서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일단 문학부에 입학했다. 특히 영문학에 통달한 나는 오히려 교수님을 가르칠 수준이었다. 나중에는 미국 문학과 문명에 관한 학위도 수료하였다. 문학뿐 아니라 나는 대학에서 법학을 따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건 1년 반 만에 때려치우고 말았다. 너무 지루한 학문이었다. 시앙스 포(Scienc-Po: 프랑스 그랑제꼴계의 정치학교)에도 입학했지만 보름 만에 그만두었다. 정말이지 내 체질에는 맞지 않는 과정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아버지의 약국 운영에 2년 동안 동참했던 나는 그것 또한 중단했다. 아버지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를 다음과 같은 궤변으로 설득시켰다. ‘아버지는 이제 겨우 48세에 불과해요. 내가 계속 학교를 다닌다면 앞으로 5년은 더 공부해야 하고, 그럼 아버지는 몇 살이죠? 53살!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약국을 물려받는다고 하면, 아버지의 나이가 너무 아깝단 말이에요. 그리고 저와 약국의 수입을 나눠가져야 하니 지금보다 수입이 두 배나 줄어들잖아요? 저도 아버지와 늘 나눠가져야 하고, 이렇듯 우리에게 모두 불리한 사업을 왜 계속해야 합니까?’ 결국 아버지는 약국 운영을 다시 혼자 맡았고, 내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년 반 동안 법학부의 학생노조를 들락거리며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중 르펜(나중에 프랑스 극우단체를 이끈 우두머리가 된다) 과도미나티가 있었다. 3년 동안 우리는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며 놀았다. 몽마르트를 비롯하여 파리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생 미셀의 주점 ‘라볼레 La Bolée’는 우리의 술통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심심할 때마다 ‘라 볼레에 가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난장판을 벌이자!’라고 외치며 라 볼레로 향했고, 우리가 외친 그대로 밤새 내내 주점에서 난동을 부리고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몰래 들어왔다. 엄마는 21살이 넘은 내가 숫총각이라고 여겼고, 야밤에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낮에는 성실하고 착한 학생의 얼굴로 공부에 전념하는 척하였고, 밤에는 술독에 빠져 이중생활을 즐겼던 나는 아침 8시가 넘으면 어김없이 집 근처에 있는 법학과 사무실로 뚜벅 뚜벅 걸어가서 사무실 안에 있는 피아노를 신나게 쳤다. 이윽고 친구들이 오면 그들과 함께 포커를 치며 놀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사무실에 와서 친구들과 포커를 친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 되면 노는데 지쳐서 집으로 쉬러 갔다. 그리고 모두 잠든 시간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고, 새벽이 되서 다시 고양이처럼 집으로 들어왔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양심에 찔리긴 했으나, 내가 하는 짓이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놀 수 있을 때 마음껏 놀고 탈선적인 행동을 하거나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정직함을 버리지 않을 경우에나 가능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씀을 신조로 삼았다. 아버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다고 하셨다. 거짓말 자체는 좋은 의도에 따라 충분히 존재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이러한 가치관은 나중에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도 적용되었는데, 나 스스로 판단하길 형편없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면서 명작을 만든다고 착각한 적이 없다. 내가 왜 졸작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에게는 정직했다고 믿는다. 

20대시절의 방탕한 생활에 대가를 치르게 됐다. 나는 병에 걸리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 첫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관찰하였다. 술기운에 절은 나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에도 행인들은 나의 얼굴을 훑어보고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잠그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온통 붉은 점으로 가득 찬 얼굴! 옷을 벗어보니 몸 전체에도 붉은 점이 퍼져있었다. ‘흠, 음식을 잘 못 먹은 모양이겠지. 한 숨자고 나면 괜찮아 질거야’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침대에 픽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붉은 점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엄마 몰래 살짝 약국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 내 몸의 이상한 증세를 드러내었다. 아버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관찰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 두 가지 중 하나야. 넌 성병에 노출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뒤늦게 수두를 앓는 거라고. 그런데 두 번째 가정은 네 나이를 고려해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지니…이 몹쓸 녀석, 넌 성병에 걸린거야! ’

아버지는 나를 기분 나쁘게 째려본 뒤 마치 내가 길가의 오물이나 되는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가증스러울 정도로 추악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순간이었으니! 나중에야 밝혀졌지만-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는 오진을 했고, 그것은 수두였다. 어찌되었건 나는 정력을 낭비했음을 깨달았다. 그건 무시무시한 진실로 다가왔다.  수두사건은 내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그 병에서 완쾌되자마자 방탕한 생활에 결별을 고했고, 더욱이 결혼이라는 관습을 받아들인 것이다.

부모님의 친구 분이 수두 후유증으로 버둥대는 나를 스위스 니옹 근처의 공기 좋은 산간 지방으로 요양을 보내라고 귀띔했다. 나는 미련 없이 떠났고, 거기서 나의 첫 아내를 만났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에 쏙 들었지만, 나는 당시 파리의 어떤 카페 직원과 연애중이어서 평범한 만남으로 그쳐야만 했다. 게다가 성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시기를 통과한 후 나는 외출을 극도로 삼가하고 있었다. 헌데 그녀를 두 번째 보았을 때는 평범한 만남으로 방점을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니옹 지방의 갑부 딸이었고, 집안사람들의 대부분이 그곳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저택에 자주 초대되었다. 대가족이 우글대고 있는 그 집에서 그녀의 어린 동생들의 가정교사도 해주고 그녀의 부모님과 친인척이 모일 때면 분위기를 휘어잡는 재치와 말솜씨를 발휘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집안의 공공연한 사위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나는 아무개의 남편이 된, 자연스럽게 성사된 결혼이었다. 결혼은 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더 이상 대학에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아내 집안의 풍족한 경제적인 배경덕분에 돈 문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고 생각한다면 유감이다. 그러나 결혼한 뒤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영화와 연극관람, 독서,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누릴 수 있던 사실은 확실하게 인정한다.

우리는 파리의 부르조아 상류층이 모여 사는 네이유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주 즐겁고도 기상천외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는데, 그건 마누라 등에 업혀 산다는 현실이었다. 그걸 오랫동안 좋아할 사내는 드물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고 때가되면 하리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져 마음이 무거웠다. 군입대시기가 닥쳐오자, 회의로 덮인 그 시간으로 부터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입대 후에는 병역을 채우지 않는 술수를 부려 3개월 만에 나는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상황 파악에 능란한 나의 감각은 군대에서도 발휘되었다. 군대 행정에 구멍이 난 것을 알아챈 나는 입대한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도 나의 입대가 공식적으로 발효되지 않았음을 항의 했고, 그걸 빌미로 나는 병역 의무일수를 줄이는 빌미를 얻어냈다. 더군다나 나는 군대에서 실적을 올리며 병역 의무일수를 또 줄여나갔다. 당시에는 헌혈이 국방 의무화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내무반 군인들에게 ‘지금 자청해서 헌혈을 하는 것이 나중 의무화 될 때 하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며 부추겼다. 결국 다른 내무반보다 더 많은 헌혈지원자가 생겨나 지휘관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틀이나 더 받아 챙길 수 있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뒤로 다시 아내 덕에 먹고 사는 남편 역할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폭스 영화사에서 홍보담당을 맡는 기회가 생겼다. 영화계에 첫발을 대딛는 셈이었다. 폭스 영화사에서는 영어권 영화의 프랑스어 제목을 찾는 일이나 -그건 너무나 재미 있었다- 혹은 폭스에서 배급하는 영화들에 관한 홍보용 기사를 올리는 일을 주로 맡았다. 예를 들어 프랭크 타쉴린의 1956년작 <The girl can’t help it> 의제작사에서 보낸 홍보 문구는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하여 여주인공을 맡은 제인 맨스필드의 프로필을 나는 이렇게 조작하였다: 제인 맨스필드, 그녀는 방년 11세에 이미 자신의 가슴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예지하였으니..!’ 천박하기 짝이 없는 문구였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는 적절했었다. 이렇게 폭스사에서 나는 1년 반을 꼬박 채워 일하다가 곧 시간제로 업무를 줄였다. 첫 영화를 준비하기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시나리오를 작성하면서 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의 꿈은 현실로 실현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연재 목록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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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전쟁도 끝났고, 사르당 지방에서의 왕 노릇도 끝났다. 4년 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아들을 보자마자 부모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여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줄께’라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얼싸안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명문 고등학교 루이 르 그랑에 나는 무난히 입학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전히 권력에 취한 청소년이었던 나는, 이 학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나는 반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하고만 어울렸다. 나는 그들처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괴짜 시골뜨기로서 별의별것을 후두룩 꿰어 잘 알고 있는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결코 겪어보지 못했을 모험담과 삶의 생생한 지식을 펼쳐놓았고, 소중한 동무가 되었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추켜세웠으며, 좀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문학에 푹 빠져 지냈는데, 원문으로 된 그 책자들을 사들여 달달 외울 정도로 읽은 뒤 모조리 비싼 값으로 되팔기도 했다. 나는 상술에 재주가 있었다. 어쨌거나 나의 용돈은 나의 욕망에 비해 늘 빈약했고, 궁여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헤밍웨이나 도스 파소스와 같은 문호들의 친필 사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 나는 감히 그들의 사인을 흉내 내어 내 책 머리에다 갈겨썼고, 웃돈을 얹어다 팔았다. 사람들은 나의 사기를 의심하지 않고 책을 챙겨 갔다. 나는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다시 책을 구입하기를 되풀이 하였다. 나는 이렇게 사기꾼에다 강탈꾼인데다가 황당한 책들을 읽어댔다.  20세기 초 유행했던 대중 소설 중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키치스런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이었는데, 나는 그러한 점이 너무나 좋았다! 학교와 집에서는 늘 내게 엄격함을 요구하였고 나는 그러한 환경을 잘 견디는 성향이 아니어서, 이와 같은 소설은 내게 정신적인 돌파구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 소설 속 인물들에 영향을 받은 나는 학교에서 엉뚱하고 대담한 행동을 하여 학교 괴짜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대표적으로 라틴어 선생님과의 대결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정말 구질구질했을 뿐 아니라 라틴어의 문법을 엉망으로 가르치는 형편없는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와 대결하기 위해 이중적인 얼굴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평소 나는 샤브롤이었지만, 그에게 대들고 맞설 때는 마냐드라고 자칭하였다. 그에게 빈정거리며 반항할 때면 약이 잔뜩 오른 그가 나를 붙잡고 ‘마냐드, 거기서지 못해!’라고 하면서 뒤돌아서 싱긋 웃으며 ‘선생님, 저는 마냐드가 아니라 샤브롤입니다’라고 해서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마냐드와 샤브롤은 이렇게  2년 동안 교내에서 존재해왔다. 교내 벽보에 ‘마냐드는 미친 녀석’, ‘샤브롤은 희롱을 즐기는 녀석’등이 게시되기 시작했다. 우리(마냐드와 샤브롤)에 대해 너무 많은 소문이 나돌았고, 나는 교원회의에 소출되었다. 이틀간의 정학처분이 내려지면서 교장선생님은 내게 마치 공범자처럼 윙크를 했다. 


부모님 또한 교내에서의 나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영화관에 가느라 학교 수업을 빼먹는 것만은 쉽게 용납을 하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부모님은 우리 집 하숙생에게 내 뒤를 밟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날 아침만은 학교를 빼먹지 않을 작정으로 집을 나서던 참이었다.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로 가는 길은 팡데옹 극장을 지나가야 한다. 나는 잠시 팡데옹 극장 앞에 멈춰 서서 전날 보았던 영화의 스틸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뒤를 밟던 하숙생이 내 목덜미를 쥐고는 ‘요 녀석! 너 또 학교 빼먹고 영화관 가는거지!’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나의 목덜미를 끌고 집으로 직행했다.  그날 저녁, 나는 부모님께 하숙생의 착각을 주장하며 그의 착각으로 인해 진실과 정의가 얼마나 처참하게 무시당하고 있는지를 역설하였다. 아버지는 나의 과장된 언변술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먹혀들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짓 안할 거라고 맹세해!’라며 큰 소리를 치셨다.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 몰래 무수히 학교수업을 빼먹고 영화관으로 향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파리로 돌아온 뒤로는 풀리는 일이 없었다. 사르당에서는 여자애들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었는데, 파리에서는 여자애들이 나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했다. 결국 나는 심통이 나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여자애들의 엉덩이를 집적거렸다. 그렇지만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날씬하고도 근육질의 몸집에 사제 같은 얼굴로 순수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이럴 경우 으레 엉큼해 보이는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들이 의심을 받고는 모두가 ‘몹쓸 인간이네!’라고 한마디씩 던졌다. 그래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나는 몇 번 뺨을 얻어맞기도 했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참 실험적인 시절이 아니었던가.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짓을 무려 2년 동안 하고 다녔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까. 나는 항상 행복과 더 인연이 많은 사람이고, 내가 원한 것은 꼭 얻어내고야 말았다. 헌데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으니 나는 초조해졌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무슨 일을 저질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하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파리지엔느들을 꼬시는 방법을 심사숙고하게 되었고, 그것은 ‘부끄러움 타는 방법’으로 결론지어졌다. 여자애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시선을 끈 다음 나는 더없이 부끄러운 남학생으로 돌변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여자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 시절 여자 친구 사귀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 더 중요했던 것은 할머니와 영화관에 가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나의 탈선행위에 유일한 공범자였다. 할머니는 내가 영화관에 가기 위해 수업을 빼먹는 것도 괘념치 않았고,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슬쩍해도 모른척했다. 영화관에 가기 위해 가장 이상적인 동반자는 여자 친구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우리는 영사기에 영화 필름이 끼워 맞추기 시작할 아침나절부터 이 극장 저 극장으로 돌아다니며 영화를 보았다.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는 늘 내 책임이었고, 하루 종일 서너 편씩 뛰어다니며 본 영화들을 할머니는 헷갈려하며 내용을 뒤섞기도 하였다. 영화를 뒤섞여 재구성하는 할머니는 매력적이었고, 아름다웠다.


1950년대가 시작되면서 미국영화가 물밀듯이 흘러들었다. 아침에는 빌리 와일더의 1944년작 <이중배상Double Indemnity>을 보았고, 오후 두시에는 오토 플레밍거의 1944년작 <로라Laura>를 보았으며, 연이어 프레스톤 스터저스의 1941년작 <레이디 이브The Lady Eve>, 프리츠 랑의 1944년작 <창가의 여인The Woman in the Window>의 감상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 그렇게 영화를 하루 종일 보러 다니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영화는 내게 있어서 마치 감정을 맛보기 위해 회화 작품을 보러 다니는 것과 다름이 없는 문화 활동이었다. 물론 영화를 많이 보면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었고, 이 영화는 저 영화에 비해 왜 담백한 느낌이 드는지, 영화 속 인물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상대방은 왜 등을 돌리는 가 등등, 자문을 많이 던지기는 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잘 못 찍은 영화는 금방 식별하게 되기도 했다.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부모님에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살짝 비추었다. 부모님의 대답인즉, ‘그런 직업은 게이들이나 하는 거다’. 전혀 놀랍지 않은 답변이었다.(계속)

 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 연재 목록  

  <제6화> 명성에 속지 않는 영화감독이 되다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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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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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에 걸쳐 연재하는 샤브롤의 회상록은 클로드 샤브롤 감독이 1993년 프랑스 대표 주간지인 ‘텔레라마’에 기고한 것이다. '텔레라마'지는 지난 2010년 9월, 작고한 샤브롤을 기리기 위해 회상록의 여섯 편을 다시 한번 공개했다. 이 회고록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샤브롤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2월 14일부터 열리는 ‘클로드 샤브롤 추모전’ 기간에 맞춰 특별히 파리에서 영화, 사진 등의 예술작업을 하고 있는 김량씨의 번역으로 연재해 소개하기로 한다. (김성욱: 편집장)


제 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시네클럽 활동은 1941년부터 시작했다. 나는 겨우 열두 살 소년에 불과했고, 유일한 동료는 스물다섯 살짜리 청년 조르쥬 메르시에였다.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사르당 시네마’라는 제작사를 차렸다. 조르쥬의 사촌이 소유하고 있는 차고를 빌렸고, 사르당 지역 주민들을 부추겨 주주로 삼은 뒤 지원금을 모았다. 차고에 의자를 배치하고 영사기를 들인 다음 본격적으로 사르당 주민들에게 영화를 상영했다. 처음에는 주로 16미리 영화를 상영했기 때문에 내가 영사기를 맡았지만 시네클럽이 번창하면서 사르당 지역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일주일에 네 번의 상영시간을 가졌는데, 금-토요일 밤과 일요일 오후를 활용하였다. 조르쥬가 주로 시네클럽의 책임을 맡았고, 내가 주로 영화 프로그램을 맡았었다. 나의 미숙함 때문에 때때로 엉뚱한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조르쥬는 나를 신뢰했다.

한번은 1930년대 독일 영화인 ‘베티붐의 미스터리’를 상영했는데, 영화 속에서 두 명의 흑인을 제외하고 백인 배우들 또한 얼굴에 시커먼 숯을 바르고 등장하는 영화다. 이렇듯 흑백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모조리 흑인으로만 구성된 영화는 촌구석 사르당 주민들에게 있어서 좀 무리였다. 식별할 수 있는 그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네 번째 상영한 날, 지역 주민들에게 ‘이런 영화를 다시 한번만 더 상영한다면 시네클럽이 텅텅 비게 될 것이다’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베티붐’은 관객동원에 있어서 최악의 영화가 되었다. 시네클럽에서는  일주일동안 평균 3000명 정도의 관객이 몰렸었는데 이 영화는 1800명 정도를 동원했을 뿐이다.

나는 기회를 만회하기 위해 마르셀 파뇰의 삼부작 영화를 구해 시네클럽에서 돌렸다.  일주일에 5000명의 관객이 몰려들었고, 사르당 시네클럽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당시 마르세이유에는 영화를 배급받기 위한 경로가 원활했었다. 나는 마르세이유에 있는 배급사에서 영화 카탈로그 등을 수급하여 사르당 시네필들에게 공급했고, 당시 독립 영화관들은 대형 영화관과 동일한 수준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치하의 프랑스의 영화관에서는 독일의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하고, 쿼터제에 따른 영화 상영일수를 지켜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제한을 받기도 했다.

나야 물론 속이는 일에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니, 쿼터제를 무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시네클럽 내에서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를 상영할 때는 관객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혼돈스러운 상황을 일부러 연출하기도 했다. 독일치하 프랑스의 비시 Vichy 정부를 나는 줏대 없는 작당들로 취급했고, 정부가 퍼뜨리는 친독 찬가 ‘각하, 우리가  있습니다’ 는 차마 듣지 못할 저급 노래로 치부하였다. 유태인을 ‘인류 최대의 적’ 으로 홍보하는 독일의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가 시네클럽에서 상영될 때는 순박한 사르당 지역 사람들은 곁눈질로만 쳐다보다가 ‘우리 이웃 아무개가 더 못돼 먹었던데 애꿎은 유태인을 가지고 난리람’, 이런 식으로 반응하였다. 

시네클럽의 프로그램뿐 아니라 홍보 또한 맡았던 나는, 좌석 예약제를 실시하였다. 오페라나 극장의 문화행사를 모르고 살았던 사르당 지역 주민들은 좌석을 미리 예약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시네클럽은 더 번성하게 되었다.  나의 모든 에너지는 이렇게 시네클럽에 쏟아 부어졌고, 덕분에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그중 미미 라로슈는 나의 절친이었다. 미미의 아버지 또한 레지스탕스로서, 클레르몽 페랑에서 활동 중이었다. 우리에게 페탱 (2차대전시 히틀러에 복종한 프랑스의 국방장관)은 절대적인 적이었다. 전쟁이 깊어갈 수록 사르당 주민들 또한 몰래 유태계 아이들을 숨기고 있었고, 우리의 부모님들은 대부분 비밀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시절이었다.

미미와 나는 참 죽이 잘 맞는 친구였지만 우리 둘다 영악하기 짝이없는 청소년이었다. 사르당 촌구석에서 리버만이라는 순진하고 겸손한 유태인 친구가 있었는데, 미미와 나는 그를 천덕꾸러기로 삼아 가지고 놀았다. 우리는 그를 좋아했지만, 그의 나약함과 소심함은 견딜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런 점은 뜯어 고쳐야 한다고 믿었다. 리버만을 골려먹은 일 중 가장 최악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 집에는 몰래 도망가는 사람들을 숨겨주었던 밀실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는 그 방에 시네클럽의 멤버를 한명 숨겨놓고는 리버만에게 극우단체의 우두머리이자 반유태계 주의자인 펠푸와Pellepoix 후작이 숨어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닌게 아니라, 밀실에서는 이런 외침이 들린다. ‘펠푸와 후작, 당신이 정말 유태인을 경멸한다면 한대치세요!’, 그러면 방 속에 숨어있던 우리의 또 다른 친구는 퍽퍽 치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들은 리버만은 거의 기절일보직전에 놓인다. 장난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이내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당신은 유태인들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죽이는 거야? ‘라는 외침이 들리고 퍽퍽 거리는 소리도 동시에 들린다. 리버만은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좀 끔찍한 장난이기는 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리버만은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가 그를 구해주리라고 믿었다. 실제로 독일군이 사르당 촌구석까지 들이닥쳤을 때, 우리는 그를 숨겨주었고, 그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프랑스는 중학교가 4년제이다) 미미와 나는 그렇게 심한 장난질을 해대며 친하게 지냈다. 미미는 아버지가 살던 클레르몽 페랑으로 떠났고, 그러던 중 나는 나의 첫사랑, 위게트를 만나게 되었다. 위게트는 나와 미미를 동시에 좋아했는데, 미미의 부재로 인하여 그녀의 애정은 모조리 나에게로 향했다. 위게트는 나보다 세살이나 많았다. 보통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17-18세 남자 청소년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하는데, 훨씬 어린 내게 연애편지를 수두룩하게 손에 쥐어주자 나는 의기 당당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시네클럽 활동에다가 연애까지 하느라 나는 그만 중학교 졸업장은 땄지만 고등학교 입학 시험은 떨어지고야 말았다(당시 프랑스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존재했다) 결국 나는 재수를 하게 되었고 당연히 자유로운 시간은 더 많았다. 나는 공부를 마치자마자 위게트와 데이트를 즐겼고 이내 사람들 눈에 띄게 되었다. 난 사르당 지역의 유명인사였으므로 그 나이에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도 멋지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때를 맞추어, 사르당 지방에서 처녀가 임신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근친상간인지도 모를 그 사건은 사르당 지방의 카페에서 주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지만, 사건의 내막을 밝히기는커녕 이내 흐지부지해지고야 말았다. 이상한 시절이었다. 전쟁 중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서로에게 약속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모두 동요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불안하게 이동하면서 살고 있었고, 위게트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였다. 위게트와는 그렇게 헤어져 몇 번 연통이 있은 뒤로 소식이 아예 끊기게 되었다. 우울해진 나는 고장난 자전거를 타고 배회하기 시작했고, 타이어가 낡아빠진 자전거를 끌고 7킬로미터를 꾸역꾸역 횡단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자학이었을까. 내 마음 속에 출렁이는 아픔을 그렇게라도 표현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나도 친구들처럼 사르당을 떠나야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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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화> 영화를 향한 꿈과 방탕했던 20대 시절
  <제4화> 괴짜 영화광의 기억
  <제3화> 시네클럽과 첫 사랑
  <제2화> 권력에 취한 소년 클로드
  <제1화> 클로드의 어린시절: 나는 왕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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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샤브롤의 회상록에서 출처>
                                                                                                           김 량 번역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꿈꾸는 아티스트
http://blog.naver.com/imagelu)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