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라>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비장하고 장엄한 일대기를 그려온 갱스터 무비의 전통을 거스른다.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고모라>는 안티 갱 영화에 가깝다. 소수의 갱스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나폴리 범죄조직 카모라의 강력하고 광범위한 사슬아래 놓인 인물들의 선택을 교차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독립되어 보이는 플롯이 결국 하나로 모이는 타란티노식 서사마저 거부한 나열의 내러티브는 상당히 불친절해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비전문 배우의 기용과 일상적인 세팅 같은 네오리얼리즘의 전통, 확고한 문제의식을 갖고 집필된 르포르타주 원작에 힘입어 손쓸 새 없이 부식되어가는 나폴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전 방위적으로 조명한다. 나아가 평범한 나폴리 주민과 세계 곳곳의 사람들까지 범죄에 연루시키는 카모라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고발한다. 이 영화는 칸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영화는 조직원 일부가 태닝을 하는 사이 배신한 조직원들이 그들을 총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죄악의 도시'라는 의미가 함축된 '고모라'라는 성서적인 제목이 올라간다. 이제 살인이 일상인 나폴리의 풍경이 그려질 차례다. 대부분의 러닝타임을 차지하는 것은 카모라 조직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생존법이다. 살육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는 돈 배달부와 약간 얼떨떨해 보이지만 카모라에 편입되길 갈망하는 소년은 박탈된 나폴리의 과거와 미래를 암시한다. 반면 카모라를 배후에 둔 영세한 공장의 재단사 파스콰레(살바토레 칸탈루포)와 유독성 폐기물 처리업자의 비서 로베르토(카민 파테노스테)는 죄악의 늪에서 기어코 빠져나온다. 그렇다고 '나폴리의 현재'인 이들의 앞날이 희망적일지는 의문이다. 할리우드 스타의 드레스를 재단하던 (본인은 몰랐던) 파스콰레는 무급 잔업과 박봉에 못 이겨 트럭 기사를 하게 됐고 로베르토는 보스의 말대로 피자나 만들게 될지 모른다.


인물을 클로즈업하면서 배경의 초점을 흐리는 단도직입적인 카메라는 때로 익스트림 롱숏의 활용으로 잊히지 않는 명장면들을 빚어낸다. 선택을 강요받고 사람 죽이는 일에 동참한 소년의 일그러진 표정 뒤로 그를 보러 나온 여자를 향해 총구가 겨눠지고 이후 슬럼가 전체로 총성이 울려 퍼진다. 배신을 망설이던 돈 배달부는 겁에 질리고 관객은 절망한다. 한편, <스카페이스>의 토니 몬타나를 흉내 내며 객기를 부리던 마르코(마르코 마코르)와 치로(치로 페트로네)는 예상보다 오래 생을 부지하기는 하지만 끝내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시체가 실린 채 지평선을 향해 가는 포클레인이 오랫동안 비춰진다. 희극은 롱숏이고 비극은 클로즈업이라고 하지만 엔딩 장면에서 관객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고모라>가 안티 갱 영화인 것은 카모라가 비애를 불러일으킨다거나 멋있기보다 범죄 집단임을 명백히 보여줘서이다. 동시에 토니 몬타나를 흉내 내는 얼치기 갱스터들의 최후를 냉담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카모라의 비극은 나폴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절멸시키는 가운데 평범한 주민들과 나라 전체를 범죄에 연루시키는 데 있다. 가난 때문에 다수의 주민들이 자신의 토지에 독극물을 폐기하는 것을 자처한다. 로베르토의 말대로 이는 북부의 공장 노동자가 사는 대신 남부의 농민들을 죽이는 사태를 초래한다. 신기한 것은 이러한 각성을 유발하는 <고모라>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라는 점이다. 극영화에서 사실적 연출이 갖는 힘을 <고모라>는 증명하고 있다.(최용혁: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1월 26일(수) 16:00 마테오 가로네의 <고모라>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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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파스칼의 내기’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논증을 제시한다. 신을 믿을 경우, 신이 없으면 아무런 이득도 없지만 신이 있으면 천국에 간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을 경우 신이 없으면 아무런 이득도 없고 신이 있으면 지옥에 간다. 그러므로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면 신을 믿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에릭 로메르는 이를 사랑에 적용한다. 파스칼의 내기에 대한 로메르식의 해석인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1992)는 믿음과 대한 작고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펠리시(샤를로트 베리)는 휴양지에서 샤를르(프레데릭 반 덴 드리에슈)를 만나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 이상적인 나날을 보낸다. 휴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샤를르에게 주소를 건넸지만, 5년이 흐른 뒤에 그녀는 그때 생긴 딸을 키우며 여전히 샤를르를 기다리고 있다. 미용사 일을 하며 애인인 로익(에르베 퓌릭)의 집에서 지내던 펠리시는 또 다른 애인인 맥상스(미셸 볼레티)를 따라 느베르로 이사하게 되지만, 보채는 딸에게 마지못해 이끌려 들어간 성당에서 묘한 깨달음을 얻고 파리로 돌아온다.



펠리시의 여러 얼굴을 자주, 그리고 진중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에는 그녀의 시점숏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 번, 샤를르와 비슷한 사람을 쫓아 시장으로 들어갔을 때 쓰이는 시점숏은 어느 특정한 인물도 주목하지 않고 수많은 익명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때의 프레임은 텅 빈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샤를르와 펠리시가 휴양지에서 사랑에 빠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나서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펠리시의 얼굴뿐이다. 숏의 빈도나 지속시간, 앵글까지 모두 온전히 펠리시에게 집중되어있다. 이는 <겨울 이야기>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펠리시는 영화 내내 한결같이 샤를르를 기다리며, 주변의 모든 인물들과 샤를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샤를르가 돌아오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 되었든 펠리시는 샤를르가 돌아올 것을 믿으며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겨울 이야기>가 응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펠리시의 그 믿음이다.



그러나 “나는 도식화를 원치 않는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Ma nuit chez Maud>(1969)에서 나는 한 명의 맑시스트와 한 명의 카톨릭주의자를 보여주는 것이지, 맑시스트와 카톨릭주의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로메르의 말처럼, 영화의 라스트에 펠리시에게 찾아오는 기적이 믿음에 대한 강요나 약속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가지고 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을 가지고 살면 기적이 찾아올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파스칼의 내기는 여전히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믿어보기로 하는 것이다. 펠리시에게 찾아오는 기적은 파스칼의 내기에 응할 용기를 준다. 로메르와 눈을 맞추고 그것을 건네받을 수 있는 이들에게, <겨울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소박한 기적이, 희미하지만 분명히 빛나는 녹색광선이 된다.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1월. 25일. 14:00 에릭 로메르의 <겨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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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 브라보 Rio Bravo>(1959)는 전작의 참담한 흥행 실패로 미국을 떠나 유럽에서 생활하던 하워드 혹스가 4년여 만에 할리우드로 돌아와 만든 영화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미국 사회에서 TV 드라마가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것에 큰 인상을 받았고, 그 가장 큰 요인을 스타들이 만들어내는 매혹적인 캐릭터에서 찾았다고 한다. 그는 <리오 브라보>에 이러한 요소를 도입한다. 영화의 스토리와 공간을 매우 단순하게 구성하고, 그 속에서 다채로운 특징을 지닌 캐릭터들이 개성을 자유롭게 발휘하며 활보하도록 한 것. 마을을 거의 홀로 지키는 보안관 챈스(존 웨인), 전직 부보안관이었으나 사랑의 실패로 받은 상처로 인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지금은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듀드(딘 마틴), 젊은이의 활기와 냉정함을 동시에 갖춘 총잡이 콜로라도(리키 넬슨), 이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개성의 충돌과 조화는 이 영화의 매우 큰 매력임에 틀림없다. 또한, 챈스를 돕는 부보안관 할아버지 스탬피(월터 브레넌)와 강인하면서도 섹스어필의 매력이 넘치는 여성 패더스(앤지 디킨슨)의 존재는 영화에 다채로움을 더한다. 이러한 주요 캐릭터에 대한 두드러진 강조는 혹스 식의 '전문가 웨스턴'의 성향과 매우 잘 맞아 떨어진다.


<리오 브라보>는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 High Noon>(1952)에 대한 혹스의 대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혹스는 <하이 눈>의 보안관 캐릭터(게리 쿠퍼)를 매우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혹스적 세계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혹스의 캐릭터는 전문가적 스킬을 지닌 영웅들이다. <리오 브라보>의 영웅인 챈스는 매우 큰 곤경에 처해있다. 많은 총잡이들을 거느린 거대 목장주의 동생을 살인죄로 체포함으로써, 그 패거리들의 집중적 공격을 받게 된 것. 그러나 챈스는 자신을 돕겠다고 나선 친구의 제의를 거절하는데, 이는 그가 "야심찬 아마추어 보다는, 결함 있는 프로가 낫다"고 여기며, 무고한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사건에 휘말려들어 희생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책임 의식을 가진 까닭이다. 그리하여 챈스는 결코 공동체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실력을 인정하는 자만을 옆에 두어 자신들의 전문가적 스킬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영화는 사실상 이 영웅들의 모습에만 관심을 두는데, 이들의 존재성은 어쩐지 현실감이 적다. 즉 이 캐릭터들은 어떠한 역사적 차원이나 시대의 운명에도 놓이지 않으며, 영화 속 공간인 마을 또한 하나의 독립적인 세상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이 영화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영위하는 일상적 삶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혹스의 웨스턴은 확실히 남성 지향적이다. 힘에 의해 서열화 된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들 간의 단결과 의리, 그리고 우정이다. 소수로 등장하는 여성들조차 매우 개성 있고 강인하며, 남성세계에 잘 융화되면서 그들의 우정을 해치지 않는다. <리오 브라보>를 작동시키는 가장 큰 축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아보려는 듀드의 치열한 노력이다. 영화는 그의 비참한 처지와 고통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가 거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을 돕는 것이 챈스의 사려 깊은 배려이며, 챈스를 중심으로 뭉친 남성들의 연대와 우정인 것이다. 마을에 고립된 채 공격을 받고 있다는 상황, 그리고 점점 더 격렬해져 가는 싸움은 이들의 우정을 한층 공고하게 만든다. 콜로라도가 기타를 치며, 스탬피가 하모니카를 불고, 듀드가 누워서 노래를 부르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은 이들의 우정이 싹트는 순간을 보여주면서, 그 어떤 대결 장면보다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박영석: 시네마테크 관객 에디터)

Cine-Talk
1월 22일(토) 14:30 <리오 브라보> 상영 후 최동훈 감독 시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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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혹은 남성 집단에 대한 치열하고 묵직한 탐구를 이어가며 ‘폭력의 피카소’라고 불리던 샘 페킨파의 필모그래피에서 70년대 중반 무렵은 가장 저평가되는 시기이다. 초기 페킨파 영화들에 비해 다소 평범하거나 실망스러운 대중영화의 외양을 지닌 영화들이 줄지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페킨파의 하락세의 시작점으로 지목되는 작품이 <겟어웨이 The Getaway>(1972)다.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1967)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도주극들과 일견 큰 차이가 없는 평범한 내러티브를 가진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겟어웨이>는 페킨파의 영화적 스타일과 세계관이 대단히 과감하고 첨예한 방식으로 드러나 있는 영화이다. 


무장 강도혐의로 10년형을 살고 있는 닥 맥코이(스티브 맥퀸)는 가석방이 좌절되자 아내 캐롤(앨리 맥그로우)을 통해 유력한 지인 배넌(벤 존슨)에게 석방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배넌은 그 조건으로 맥코이에게 은행털이를 제안하며 어딘지 미심쩍은 동업자들을 붙여준다. 맥코이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은행을 터는 데는 성공하지만, 경찰과, 동업자와, 배넌의 패거리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페킨파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고속촬영과 교차편집, 그리고 프리즈 프레임을 거침없이 활용한다. 수감 중인 맥코이가 노역으로 조작하는 기계의 소음을 기반으로 10분 남짓 이어지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교차편집과 프리즈 프레임만을 이용해 시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거나 지연시키며, 내러티브적 상황과 인물의 강박적이고 불안한 정신 상태를 완벽하게 드러낸다. 또한 출소 직후 맥코이 부부가 공원으로 산책을 가는 장면에서는 고속촬영과 교차편집을 통해 아예 시간의 순서를 뒤섞어버리며 영리하게 관객을 교란한다. 애초에 이 모든 기법들이 시간을 변형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겟어웨이>에서는 이런 장치들을 통한 시간의 변형을 훨씬 과감하게 탐구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는 페킨파의 세계관 역시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평원 Ride the High Country>(1962)이나 <와일드 번치 The Wild Bunch>(1969)에서 확인할 수 있듯 페킨파는 스러져가는 서부의 기억을 끝내 잡아보려 애쓰는 작가였다. ‘페킨파는 전원을 옥죄어가는 돈과 기계들을 찍었다’는 캐서린 머피의 표현처럼, 그것은 서부에 대한 애착이기도 했지만 전원이나 자연 자체에 대한 애정이기도 했다. 언뜻 드넓은 목초지를 뛰어노는 것처럼 보이는 사슴들이 사실은 교도소의 뒷마당에 갇혀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의 첫 장면과, 오프닝 시퀀스 내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카로운 기계의 소음은 페킨파의 전원주의를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영화 후반의 쓰레기차 시퀀스에서 훨씬 더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이 장면에서는 쓰레기를 퍼올리고, 쏟아 담고, 압축하는 기관들의 움직임을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상세하고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이 기관들은 내러티브적으로도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며, 기계에 대한 페킨파의 적개심을 다분히 드러낸다.
사실 <겟어웨이>는 대중영화로서의 본분 역시 완벽하게 수행하는 영화이다. 피와 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적절하게 유지되는 유머러스함과, 의심의 여지없이 멋지게 연출된 액션 시퀀스들은 관객들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멀끔한 대중영화의 모양새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목도하게 되는 페킨파의 날카로운 시선과 장인적 손놀림이야말로 <겟어웨이>를 만나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다.(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Cine-Talk
1월 21일(금) 19:00 <겟어웨이> 상영후 이명세 감독 시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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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에 관해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한 개인의 경험과 그 센세이션 중심에 있는 감흥을 있는 그대로 아무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영화의 중심인물인 커츠 대령이 한말이기도 하고 <지옥의 묵시록>을 본 사람들의 대부분의 반응이다. 


프란시스 F. 코폴라가 3천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들여 만든 이 영화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Heart of Darkness’을 바탕으로 상황을 베트남전으로 각색해 만들어 졌다. 영화는 캄보디아 밀림으로 잠적해 미쳤다는 소문이 도는 미스터리한 인물 커츠 대령(말론 블란도)을 찾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윌라드 대위(마틴 쉰)의 여정과 전쟁의 광기어린 현장을 묘사한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코폴라 감독은 영화가 베트남전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베트남전 그 자체라고 단언했다. 그 만큼 이 영화는 전쟁의 잔혹함, 도덕적 딜레마, 인간 심연의 고통, 극한 상황에서 들어나는 인간 본연의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다룬다.


영화 전체에서 당연히 이러한 점들을 찾을 수 있지만, 영화 속의 작은 에피소드들이 더 충격적인 감흥을 불러오기도 한다. 윌라드 배가 베트남 민간 선박을 검문하는 신에서 배의 선원들이 보여주는 각기 다른 행동은 전쟁의 공포, 공포의 대처법, 전쟁과 도덕적 딜레마의 괴리를 단편적이지만 실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 영화는 서서히 우리를 커츠 대령에게로 인도한다. 코폴라 감독은 350만 달러, 그 당시로는 전무후무한 어마어마한 거액으로 말론 블란도를 설득시켜 커츠 대령에 캐스팅했다. 그렇지 않아도 큰 예산문제로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비난을 받았던 차에 한 배우에게 고작 한 달 작업의 대가로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준다고 질타를 받았다.


커츠 대령은 사진과 목소리로만 등장하다가 영화 중반 이상이 지나야 모습을 보인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면도칼 위를 걷는 달팽이에 관한 얘기를 하는 커츠 대령의 정신이 나간듯하고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극 전반부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커츠 대령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극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무겁고 거친, 그렇지만 신뢰가고 상대를 압도하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뛰어났던 한 군인의 변화된 영혼과 정신을 훌륭하게 전달해준다. 영화의 원작소설 ‘암흑의 핵심’에서도 커츠 대령의 목소리는 중요하다. 영화에선 윌라드이지만 소설에선 말로우로 등장하는 커츠를 쫓는 이 인물은 커츠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와 말을 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커츠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마침내 커츠를 만났을 때도 그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콘래드는 몇 페이지에 걸쳐 커츠 대령의 목소리에 관해 집착적으로 서술했다.


블란도가 영화에서 T.S. 엘리엇의 “텅 빈 사람들 The Hollow Men”을 낭독 할 때, 카메라가 블란도를 비추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블란도의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과 불어난 몸집에 섬세하지만 거친 목소리는 그의 몸속 안팎에서 커츠 대령이 느껴지게 만든다. 너무나 비싸서 다른 배우를 알아보라는 주변사람들을 무시하고 거금을 들여서라도 블란도를 캐스팅한 코폴라 감독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커츠 대령이 영화 속에서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 “공포, 공포 The horror, the horror"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귓가에 맴돈다. 아카데미 촬영상과 음향상을 탄만큼 <지옥의 묵시록>은 시각적으로나 음향적으로 관객의 뇌리에 깊을 인상을 주고,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인물변화는 철학적인 질문들로 큰 잔향을 남긴다. 커츠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다 했던 센세이션의 중심에 가까이 다다르고 싶다면 조샙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T.S. 엘리엇 “텅 빈 사람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배준영: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1월 21일(금) 15:00
Cine-Talk
2월 5일(토) 15:00 <지옥의 묵시록> 상영후 김지운 감독 시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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