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전/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10.14 ‘오즈 영화에서의 감정에 관하여’
  2. 2011.10.14 ‘오즈의 이면’
  3. 2011.09.22 오즈의 컬러 영화를 보셨는가
  4. 2011.09.19 가을날의 오즈 -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영화사 강좌] 오즈 야스지로를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간 중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세 차례의 영화사 강좌가 마련되었다. 그 마지막 강좌로 지난 9월 30일 저녁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상영 후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오즈 영화에서의 감정에 관하여’란 주제 때문인지 흥미로운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 강연 현장을 여기에 싣는다.


김영진(명지대학교 교수, 영화평론가): <고하야와가의 가을>이라는 영화는 잘 아시듯이 오즈 야스지로의 후기작 중 하나로, 이후에 <꽁치의 맛>을 찍고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 오즈의 후기작들도 좋아한다. 보통의 나이 든 감독의 영화 같지가 않다. 주인공인 만베이라는 캐릭터는 이전까지의 오즈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노인의 캐릭터와는 다르다. 철없는 노인의 모습인데, 나이가 들면 보통 지혜와 성숙함을 가진다는 생각에 반해, 노인이 된 오즈 본인이 늚음에 대해 그런 관점을 보인다는 것이 특이하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느낌도 있다.
오즈는 당대의 거장이었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었지만, 이 영화를 찍을 당시는 이런저런 공격도 많이 받고 있었을 무렵이기도 했다. 60년대에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고, 영화 지형도 급격히 바뀌게 된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지고, 희미하게나마 자주영화의 시대가 열리고, 오시마 나기사 같은 감독들이 주류로 떠오를 때이다. 마치 미국에서 60년대의 존 포드가 그랬던 것처럼 오즈 역시 낡은 세대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즈는 그를 비판했던 어느 젊은 감독을 나중에 만나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다리 밑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창녀 같은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임종 무렵에는 ‘영화는 사건이 아니라 드라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를 굉장히 크게 생각하고, 영화는 중요한 것을 찍어야한다는 경향에 맞서 오즈는 늘 홈드라마만 찍었던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혼담이 오가고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그런데도 그의 영화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왜일까.
오즈는 배우가 연기를 못하게 한다.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으면 나중에는 배우가 지칠 정도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찍었다고 한다. 오즈의 영화를 보면 연기가 굉장히 양식화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감정이 쌓인다. 비결이 뭘까. 일단 내러티브에서 보면 일반적인 영화에서 계속 끌고 가는 부분을 잘라내고, 내러티브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되는 부분을 길게 찍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영화에서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들을 묘사하지 않고, 반대로 일반적으로 누락되는 것들을 굉장히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 느낌이 굉장히 묘한데, 그 가운데서 우리는 공간에 대한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공간이다. 이는 오즈 영화의 특징적인 면이다. 이를테면 만약 아버지와 딸의 얘기라면, 딸을 시집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늘 딸이 있던 2층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비어있는 2층의 거실이나 침실을 보여주고 나면 그제야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이 밀려들면서 끝난다. 상실감이나 부재의 느낌이라는 것은 우리가 늘 함께 있던 공간에 누군가가 없을 때 절실하게 느껴진다. <고하야와가의 가을>에서는 굉장히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부재의 느낌이 있다. 만베이의 집에선 매미 소리가 계속 들린다. 굉장히 중요한 사운드 장치처럼 되어있다. 얼마 안 있어 그 매미들도 완연한 가을이 되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즈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런 방식으로 삶의 순환, 운명을 받아들이는 느낌을 보여준다. 그것이 대개는 따스하게 그려지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을 보면 조금 냉정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까마귀들이 엄청 강조 되고, 마치 조종을 울리듯 오즈 영화답지 않은 음악이 흐른다. 거기에 아키코와 노리코가 대화를 하면서 ‘나는 내 길을 가겠다’고 말한다. 일말의 미련이나 감상도 없이 탁 끊어버린다. 종래의 오즈의 영화들에 깃들어 있던 정조들, 따뜻한 느낌들과 조금은 다른 느낌을 준다.
오즈의 영화에서 내러티브가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인위적으로 누락시키고, 어떤 부분은 보통 영화에서보다 훨씬 늘여놓는 가운데 공간의 느낌이 강조된다는 것과 함께 수평의 대화 장면들 역시 특징적이다. 통상적인 쇼트/리버스 쇼트가 아니라 스트레이트하게 붙어있는, 그것도 구도를 똑같이 해서 붙어 있는 쇼트들을 보여준다. 그런 식으로 굉장히 양식화된 화면이 주는 느낌에 우리는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게 오즈 스타일의 힘인 것 같다. 오즈의 영화에는 화면사이즈의 양식화와 함께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쇼트들, 흔히 말하는 빈 쇼트들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통속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득 특정한 사물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식이다. 70년대에 폴 슈레이더는 이러한 오즈의 스타일을 ‘초월적 스타일’로 명명하면서 선의 결정체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하스미 시게히코 같은 평론가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만춘>에서의 항아리 쇼트에는 항아리만 있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떨어지는 그림자와 빛이 있고, 무드가 있다고 얘기한다. 그 공간에서만의 무드가 아닌, 두 부녀가 살아왔던 삶의 무드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고하야와가의 가을>에도 그런 쇼트들이 있다. 만베이가 속한 공간은 교토의 오래된 가옥들이 있는 공간이다. 거기에 노리코가 근무하고 있는 현대식 빌딩들을 보여준다. 그런 식의 인서트 커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후반부에서 까마귀나 무덤, 화장터 굴뚝에서 나는 연기 같은 것을 보여주는 쇼트들에는 기존의 오즈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근본적으로 그런 쇼트들은 누구의 시점이 아닌데, 사람에 대해서 뭔가 거리를 두는 오즈만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영화에서의 화면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시선으로 어떤 층들을 가지고 있다. 거리감를 충분히 두고 있으면서, 애정을 갖고 있는, 그러면서 상투적이지 않을 수 있는 힘이 그런 쇼트들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날드 리치라는 미국 평론가가 서구에 일본 영화를 소개하는 어떤 프레임이 있다. ‘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오즈도 그런 틀 안에서 시켰다. 그런가 하면 80년대에 노엘 버치나 데이비드 보드웰 같은 평론가는 서구적 맥락 안에서 오즈의 영화를 해석한다. 인과관계에 따라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방식의 고전적인 영화와 다르다는 점에서 오즈의 영화를 굉장히 모던한 영화로 보았다. 오즈의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받쳐주는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구의 평단에서 오즈의 영화가 재해석되었던 맥락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스미 시게히코 같은 평론가는 표층 비평이라고 해서 심층을 전제하지 않고 텍스트의 표면을 가지고 얘기한다. 영화에서의 표현만을 집요하게 관찰하며 비평하는 것이다. 심층을 전제하고서 설명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오즈의 영화에서 먹는다는 것, 계단을 오른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다.
오즈에 대한 해석이 어떤 식으로 향하든 특이한 것은, 지금도 오즈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앞서 있는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의 페드로 코스타 같은 감독은 자신이 오즈의 영화에서 받은 영향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영화가 오즈의 영화와 닮아 있다고 말한다. 본질적인 문제인 것 같다. 오즈는 진짜와 가짜와 같은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초월해 거기서 나온 감정이 진실하냐 아니냐를 가지고 승부를 걸려고 했던 감독이었다고 생각된다. 페드로 코스타 같은 감독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핵심이라는 면에서 오즈의 영화가 굉장히 위대하다고 얘기한다. 오즈는 익숙하건 익숙하지 않건, 일종의 관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려고 했던 감독 같다. 가장 뛰어난 배우는 연기하지 않는 배우다. 훌륭한 감독이 배우에게 디렉션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연기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즈도 결국 그런 것을 시도 했던 게 아닐까. 자신이 만든 양식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가짜 같다는 느낌을 결국 역설로 돌파했던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객1: 하라 세츠코는 늘 딸이나 며느리로 등장하는데, 그래도 다음에 볼 영화에는 또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진다. 오즈의 영화에는 늘 익숙한 배우들이 역할을 바꿔가며 등장하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김영진: 말씀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웃음) 일본영화는 이미 30년대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었다. 당시 오즈 사단이라고 해서 작업하는 스탭들과 배우들이가 항상 같았다. 관객들이 일정한 기대를 갖고 극장을 찾게 되니까,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그러한 것이 굉장한 자산이 된다. 오즈의 홈드라마, 카프라의 코메디, 존 포드의 서부극 하는 식이다. 익숙하다는 것은 영화 산업 안에서 티켓 파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반복 된다. 그러한 반복과 차이는 장르나 스타시스템에서 굉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아주 절묘하게, 계속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들이 중요하게 된다.


관객2: 오즈 의 영화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오즈의 영화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김영진: 홍상수 감독이 좋아하는 감독 중의 한명이 오즈 야스지로다. 일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오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한 얘기 중 하나가 비판이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하나로 제한시켜 놓고, 공간이나 시간, 아이덴티티를 확장시켜가면서 이를 변주해 가는데, 오즈의 영화에서도 그런 점들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굉장히 일상적인 사물인데 오즈의 영화에서 보면 굉장히 특권화된 순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삶에 대해 생각할 때, 늘 같은 일상 가운데 갑자기 무언가 감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마 그런 점에서 유사성을 느낄 수 있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관객3: 오즈의 영화 같이 늘 비슷하고 평범한 홈드라마가 당대에도 흥행 했는지 궁금하다.
김영진: 오즈는 흥행 감독이었다. 그가 쇼치쿠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항상 최고의 스탭들, 배우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영화가 흥행이 잘 됐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영화는 역설이다. 고다르는 40,50년대가 사람들이 르누아르나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를 부담 없이 보러가던 좋은 시대였다고 말했다. 당시의 서민적인 오락이었으면서도, 지금 보면 굉장히 에센스가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던 시대였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조유성(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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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강좌] 오즈 야스지로를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간 중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세 차례의 영화사 강좌가 마련되었다. 그 첫 번째로 지난 9월 18일 오후 <동경의 황혼> 상영 후 시네마테크부산 관장을 맡고 있는 허문영 영화평론가의 강연이 이어졌다. ‘오즈의 이면’이란 주제로 펼쳐진 열띤 강연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허문영(영화평론가, 시네마테크부산 관장): <동경의 황혼>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유성영화 중에는 유일하게 겨울이 배경이고, 눈이 내린다. 오즈는 포커스 잡는 게 어려워지거나 하는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들 때문에, 영화에서 비나 눈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오즈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봄, 여름, 가을에 찍혀졌고 굉장히 밝다. 분위기나 주제에 있어서 밝다는 것이 아니라, 조명을 쓰는 데에 있어서 인물의 표정은 그늘이 없도록 가능한 밝게 처리한다. 그래서 일본의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의 촬영 방식의 특징을 가리켜서 ‘백주의 작가’, ‘한낮의 작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무성 영화시절에 겨울 장면이 나오는 영화들이 간혹 있었다. 예를 들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에서 눈이 나오는 장면은 의도하지 않은 장면이긴 했지만, 비애감을 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동경의 황혼>과는 다르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밤 장면이 유난히 많다는 것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이렇게 밤 장면이 많은 것은 이례적이다. 전후의 오즈의 영화에서 화면이 이만큼 어두운 느낌을 주는 영화도 없는데, 밤 장면이 많을 뿐 아니라 실내 장면에서도 얼굴에 약간의 그늘이 드리우도록 광원의 개수를 제한하고 있다. 마지막에 하라 세츠코와 류 치슈가 얘기를 나눌 때는 얼굴에 반쯤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동경의 황혼>은 1957년에 만들어진, 오즈의 마지막 흑백영화이다. 오즈는 이 영화를 끝으로 1958년의 <피안화>부터 그의 유작 <꽁치의 맛>에 이르기까지 여섯 편의 영화를 모두 칼라로 찍었다. 이 영화가 오즈의 마지막 흑백영화라는 점과 밤을 찍었고, 겨울이 무대고, 눈이 내린다는 사실들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오즈의 필모그래피에서 뿐 아니라 일본영화사에서 이 영화가 놓인 시점이라는 것은 약간 미묘한 점이 있다. 아시다시피 50년대는 일본영화의 황금기였다. 미조구치 겐지나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같은 감독들이 자신들의 최고의 작품들을 이 시기에 쏟아낸다. 거의 매주 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들이 극장에 걸리던 시기였다. 일본영화계의 가장 화려한 시기라고 할 수 있지만 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영화사에서 보자면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물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시작되며 일본 역시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쇼치쿠는 오즈를 중심으로 한 서민극, 코미디, 현대극들 중심의 영화들을 채워왔지만, 닛카츠는 좀 더 도전적인 시도를 한다. 50년대 후반부터 쇼치쿠와 닛카츠의 시장 우위는 바뀌게 된다. 56년에 <태양의 계절>과 <미친 과실>같은 영화들이 나오면서 일본 영화계를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한다. ‘태양족 영화’라고 이름 붙여진 이 새로운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방종하고, 문란하며, 거침없는 젊은 세대인데 이들은 사회적 규범을 넘나들면서 범죄에 가까운 향락을 즐긴다. 염세적이고, 화려하고, 반항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렇게 태양족 영화들이 나오면서 일본영화계를 동요시키고 있을 때, 오즈는 이 <동경의 황혼>을 만든 것이다. <이른 봄>과 <동경의 황혼>은 당시에는 오즈의 실패작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이 영화들이 태양족 영화에 대한 지극히 보수적 반응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영화의 공통적으로 젊은 세대의 성적인 문란이 사건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직접적으로 서사 내에서 징벌이 가해진다. 그런 점들이 아마 젊은 세대의 등장에 흥분하고, 환호를 보내고 있던 당시의 풍토 안에서 보자면, 어딘가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자세로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오즈의 영화에서 <동경의 황혼>이 갖는 이상한 특징들이기도 한 밤, 겨울, 눈이 등장하는 순간 어딘가 오즈의 영화세계 전체를 흔들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흔들리는가. 사실 이 영화는 오즈의 영화 중 가장 이야기가 많은 영화이다. 대체로 오즈의 영화의 이야기를 특징짓는 점들은 가족 문제들, 딸을 시집보내는 일, 홀로 된 아버지를 재혼시키는 것, 노부모를 누가 모시는가하는 문제처럼 일상적인 일들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진폭이 굉장히 좁은 편이고, 에피소드 중심적으로 구성한다. 그런 것에 비해 <동경의 황혼>은 굉장히 끔찍한 이야기들이 계속 나온다. 류 치슈의 아내는 오래 전 다른 남자와 도망갔고, 아들은 이미 죽었으며, 큰 딸은 결혼을 했지만 고약한 남편을 만나 집에 들어와 있고, 작은 딸은 낙태를 하고 결국 죽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이 안에 담겨져 있다. 왜 오즈는 자신의 마지막 흑백영화를 만들면서 이렇게 끔찍한 사건들을 이야기하는가. 게다가 오즈의 영화에서 종종 노부모가 죽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태아와 젊은 딸이 죽는다. 굉장히 끔찍한 선택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들을 끌어들이고 나서도 오즈는 자신의 내러티브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즉, 오즈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오즈의 모든 영화가 어떻게 보면 이야기라는 기준에서는 굉장히 불친절하며, 각 쇼트들이 구조적으로 연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동경의 황혼>은 끔찍한 이야기를 복수로 가져오면서도 그러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제시된 이야기나 갈등 중에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이들은 갈등을 해결할 의지조차 없다. 인물의 노력 뿐 아니라 서사적 진행이 갈등의 해결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마치 자신은 사건의 해결에는 관심이 없다는 오즈의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오즈는 그 갈등들을 무심히 쳐다만 보는 듯하다. 아키코의 죽음을 얼마나 간결하게 처리하는지는 정말 놀랍다. 딸이 죽는 그 중대한 장면을 담아내는데, 심지어 관객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다. 병상 장면 직후, 하라 세츠코가 걸어가는 장면은 음악조차도 명랑해 보인다. 그래서 그녀가 엄마 앞에서 아키코가 죽었다고 말할 때, 이러한 흐름 자체가 굉장히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마치 오즈의 이야기하는 방식, 무심히 바라볼 뿐 사건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듯한 오즈의 이러한 방식을 과연 견딜 수 있을지, 관객을 시험하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동경의 황혼>에서 오즈는 사건을 던져놓고도 자신의 고유한 내러티브 구조로 완강하게 버텨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맹렬한 요구와 자신의 완강함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은 긴장을 준다. 이 긴장이 오즈 영화의 많은 부분들을 변화시킨다. 그 많은 것들이 아마도 눈, 겨울, 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오즈의 영화에서 날씨에 관한 말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추운 겨울에는 너무 춥기 때문에 그러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의 영화에서 날씨에 관한 말들은 의미 전달을 위한 대화가 아닌, 교화적 기능의 대화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겨울에는 이러한 교화적 대화를 할 수 없다. 이 모든 끔찍한 사태를 초래한 이유는 이 영화를 겨울에 찍었기 때문이다. 대화를 할 수 없음이 오즈의 영화에서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먼저 공간의 기능을 변화시킨다. 오즈의 영화에서 중요한 공간은 술집과 집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술집은 남자어른들이 친구들 동창들 동료들과 만나서 남자들의 일종의 유사 공동체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집은 두 종류의 공간이 있다. 1층은 남자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공간이다.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을 불러내 인사를 하거나 밥을 먹는다. 딸들은 대부분 2층에서 잔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버지는 2층에 가지 않는다. 2층은 딸들의 공간이다. 그래서 남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가족들은 1층에 다 소집이 되어야 한다. <동경의 황혼>에서는 이러한 공간의 기능 분담이 완전히 깨져버린다. 오즈의 모든 영화 중, 술집이라는 공간이 이 영화만큼 범죄의 분위기로 가득 찬 것을 본적이 없다. 이 영화에서 술집은 비공식적·공식적 매춘이 일어나는 공간이며, 따라서 두 남녀의 은밀한 성적 거래가 잠복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오즈의 다른 영화들에서라면 술집이란 공간은 류 치슈와 친구들이 뭔가 얘기를 나누는 공간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전혀 다르게 등장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만큼 류 치슈가 일관되게 불행한 영화가 없다. 그는 완전히 고립된 존재로 그려진다. 어떠한 자신의 공간을 가지지 못한다.


오즈의 영화에는 원인이란 없다. 인과관계 대신 다만 어떤 계열이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자각성의 계열을 구성하는 최초의 자리에 눈이 있다. 눈이 내리고 추위가 닥치자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다. 친구는 사라지고, 공간의 기능은 무너지고, 아버지는 완전히 무기력해지고, 대화 상대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실패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중간에 사라져버린다. 마지막에 남겨진 두 인물, 류 치슈의 전 아내와 그녀의 새 남자, 이 두 사람은 홋카이도로 떠난다. 오즈의 영화에서 홋카이도로 떠난다는 것은 마치 유배를 가는 듯한, 멀리 떠나서 이제 도쿄의 사람들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것이다. 이들이 떠나는 장면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는 스키를 들고 기차에 오르는 젊은이들이다. 나이든 세대들은 마치 영원히 떠나기라도 하듯 비장함을 보여주는데, 젊은 세대는 놀러가듯 스키를 들고 떠난다. 여기에 오즈의 영화적 공간 안에서 생기는 이상한 이질성의 충돌이 존재한다. 이 익명의 젊은이들이 기차에 타는 순간, 두 남녀이 보여주는 비장함이라는 것은 굉장히 우스워진다. 딸이 죽었는데 류 치슈는 눈물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뿐이다. 어떠한 해결 없이, 모든 것들이 인과관계 없이, 무언가 정해진 길을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에서 가장 잔혹한 것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아주 강하게 상기시킨다. 이 영화를 체험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눈이 내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공간은 어떻게 변해 가는가, 사건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운명을 맞이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구조는 어떤 것인가, 하는 측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정은정(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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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결혼이라는 주제를 끊임없이 탐구해온 오즈 야스지로 감독 자신은 평생 독신이었다. 일본 소시민 가정의 소소한 일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는 맞는 말이지만 이것만으로 오즈 영화의 세계를 설명하기는 무리다. ‘무리’(無理)라는 단어는 오즈의 대사에 자주 등장하는데 어쩌면 오즈가 ‘이치’(理致)란 무엇인지 항상 고민했던 증거인지도 모른다. 평범한 삶에서 그가 발견한 이치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주어진 시간을 보내는 인간 조건이다. 단지 일본적인 삶의 풍경만을 잘 그려냈다면 오즈가 이토록 오래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즈는 인간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조건을 존중하고 예의 바르게 그 표면과 이면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도 결코 그 조건에 매몰된 적이 없다.

그의 유작 <꽁치의 맛>(1962)에서 딸을 시집 보낸 아버지는 빈집에 홀로 앉아 “외톨이가 되었군”이라고 읊조린다. 본래 오즈 영화에는 계단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 계단 입구에 있는 인물들에 이어지는 숏은 보통 마지막 계단을 올라온 모습이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꽁치의 맛>에서는 텅 빈 계단을 화면 가득 담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낯선 이 이미지는 오즈 영화세계의 마침표처럼 느껴진다. 존재하되 보이지 않았던 계단은 생각보다 넓고 공허하다. 겉으로 보기에 오즈의 영화는 결혼에 필사적이다. 그러나 결혼에 뒤따르는 결말은 가족의 이별이다.

역시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가 등장하는 <만춘>(1949)에서 아버지는 결혼 자체가 행복이 아니라 행복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삶을 엮어가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 말에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것은 딸의 결혼으로 아버지의 가정이 해체되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딸의 결혼이라는 경사가 “젊은이는 떠나고 늙은이만 남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쓸쓸함을 바탕으로 성사된다는 것을 오즈는 꿰뚫고 있다. 그래서 오즈는 지독한 허무주의자이자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다. 홀아비인 아버지가 딸을 시집 보내는 이야기에는 몇 가지 공식이 있다. 아버지를 혼자 두고 떠나기 가슴 아픈 딸은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아버지는 딸을 시집 보내야 하는 줄 알지만 역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주위의 권유로 뒤늦게 혼처를 찾아보지만 처음 낙점한 사람에게는 이미 정혼한 상대가 있고 아버지는 모든 일에 때가 있음을 각성하고 혼사를 서두른다. 딸은 결혼하고 아버지는 홀로 남는다.

40, 50년대 대표작과 후기 컬러영화 14편 상영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이번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에는 총 14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무성영화부터 흑백영화, 컬러영화에 이르기까지 총 53편의 영화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그의 필모그래피 중 40, 50년대 대표작과 후기 컬러영화들이 상영 목록이다. 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동경이야기>(1953)를 비롯해 그의 대표작인 계절 시리즈 <만춘> <이른 봄> <맥추>가 모두 상영된다. 이번 회고전의 특징이라면 상영작의 절반이 후기 작품이라는 점이다. 흑백영화 마지막 작품 <동경의 황혼>(1957) 이후, <피안화>(1958)부터 이어지는 컬러영화 시대 작품 6편이 모두 상영된다. 오즈의 컬러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던 관객이라면 이번 행사는 전체를 볼 수 있는 기회다. 이 시기 작품은 이전 영화에서 이미 다루었던 것을 반복하되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는 차이를 보여준다. <피안화> <가을햇살>(1960), <꽁치의 맛>은 모두 딸을 시집 보내는 이야기인데 <가을햇살>은 아버지 대신 남편과 사별한 엄마가 등장한다. 오즈 영화의 히로인이자 <만춘>에서 혼기를 놓친 딸 노리코로 나왔던 하라 세쓰코가 엄마로 나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당시 여성의 결혼적령기가 24살이라는 영화 속 묘사도 인상적이다. 이 세 영화는 아버지 동창들이 등장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같은 배우에 극중 인물의 이름도 되풀이될 뿐 아니라 술집 주인도 같은 여배우가 등장한다. 장년이 된 남자 동창들은 단골 술집에 모여 딸들의 혼사문제를 걱정하고 젊은 시절 로맨스를 추억하거나 새 장가든 친구를 골려 먹는다. 술집 여주인에게 던지는 짓궂은 농담까지도 늘 비슷하다. 오즈 영화에서 아버지의 초상은 이들 후기작에 가장 진하게 표현된 것 같다. 아버지의 모습이 좀더 세속적이 된 만큼 아버지의 회한도 깊어진다.

<부초>(1959)와 <고하야가와가의 가을>(1961)은 둘 다 나카무라 간지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데 그가 맡은 배역의 성격도 흡사하다. 초기작 <부초 이야기>(1934)를 다시 만든 <부초>는 유랑극단 배우가 자신의 옛 애인과 아들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오즈 영화에 종종 보였던 가부키 공연은 여기서 더 자세히 묘사된다. <부초>가 부자 상봉과 화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은 훨씬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양조장 주인의 삶 자체가 흥미롭다. 몰락해가는 양조장을 소유한 그는 젊어서부터 난봉꾼으로 유명하다. 죽는 순간에도 “이게 끝인가?”라는 자기 말만 한 그는 옛 애인과 딸을 다시 만나지만 부녀간의 진정한 화합은 없다.

<안녕하세요>(1959)는 이번 상영작 중 가장 초기작 <태어나기는 했지만>(1932)과 같은 계열의 영화로 아이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소시민의 가정을 들여다본다. 동네 아이들은 카바레에서 일하는 젊은 부부 집에 TV를 보기 위해 드나들고 아이들의 부모는 그런 아이들을 야단친다. 일본 최초의 리얼리즘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태어나기는 했지만>에서 소시민 가장의 권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아이들은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가 사회에서는 말단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만 이를 계기로 가족은 서로 이해하고 아이들은 자란다. <이른 봄>(1956)과 <오차즈케의 맛>(1952)은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로 부부관계의 본질을 질문한다. 항상 믿었던 남편의 다른 모습을 발견한 권태기의 아내가 자신에게 정작 중요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깨닫고 중심을 찾는 이야기다. <오차즈케의 맛>의 아내는 처음으로 남편과 부엌에 들어가 소박한 밥상을 차리면서 부부에게 중요한 것은 오차즈케의 맛처럼 특별할 것은 없지만 질리지 않는 편안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오즈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액션이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이 행위를 끝없이 반복해 보여주면서 오즈는 문자 텍스트로 표현할 수 없는 영화적 성취를 이룬다. 가족이나 친구가 모여 음식을 먹고, 퇴근 뒤 목욕을 하고, 때로 산책을 나서는 일상이 모여 인생이 되고 우주가 되는 순환의 원리를 일깨워주기에 그렇다. 

이번 상영작 중 <무네카타 자매들>(1950)과 <동경의 황혼>(1957)은 다소 예외적인 작품이다. 신문연재소설이 원작인 <무네카타 자매들>은 오즈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감정 절제가 덜하다. 동시대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히로인이 총출연하는 이 영화는 자매가 주인공인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언니의 옛 애인이 돌아오면서 갈등이 심화된다. <동경의 황혼>에는 가출한 엄마, 이혼한 큰딸, 혼전 임신한 막내딸 등 오즈 영화의 어떤 여성들보다 파격적인 인물들이 나온다. 흑백영화 시대를 마감하는 이 영화는 이후 펼쳐지는 컬러영화들보다 훨씬 우울한 분위기다.

이번 회고전 기간에는 세번의 강좌가 포함되어 있으며 <태어나기는 했지만> <무네카타 자매들> <동경이야기> <이른 봄> <부초>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등 6편의 영화는 무료 상영된다. 

글/이현경_영화평론가

* 영화전문주간지 씨네21에서 발췌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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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Ozu Yasujiro Retrospective


2011년 9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를 개최합니다. 오즈 야스지로는 스스로의 엄격한 스타일을 확립해 인간의 순환적 삶을 영화에 담아내 영화 예술의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 작가입니다. 세계 영화사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 중의 한 명으로 현존하는 많은 작가들, 특히 한국의 영화감독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친 작가입니다.
오즈의 영화는 이야기부터 촬영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일본적인 것의 총합이라고 할 만합니다.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된 ‘다다미숏’은 그런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본의 좌식문화를 가장 적절한 형태로 보여주는 숏이자 일본식 가옥의 좁은 방에서 활용 폭이 가장 크고 일상의 가족 이야기가 바로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 몰입을 높여줍니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설명할 수는 없겠죠. 오즈 영화의 위대함은 평범한 가족의 일상에서 영화적인 순간을 만들어내는 연출에 있습니다. 극중 가족의 갈등 원인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변화는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시선의 차이를 가져왔고 오즈는 여기서 소재를 취해 ‘일본 가족의 초상’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결혼 때문에, 취직 때문에, 가족의 방문 때문에 아버지와 딸은, 어머니와 딸은, 부모와 자식은 갈등을 겪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즈의 가족이 비극을 맞는 것은 아닙니다. 갈등의 상처가 완전히 봉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서로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특히 오즈의 부모들은 자식을 이기는 법이 없죠. 그런 부모의 심정은 그들의 등을 비추는 카메라에서 잘 드러납니다. 오즈의 영화에서는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있는 광경을 카메라가 종종 뒤에서 담고는 합니다. 거기에는 노부부의 지나간 세월이 있고 삶의 애환이 있으며 결국엔 무상함이 다시금 그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자연의 순환처럼 인간의 삶 역시 순환합니다. 삶에서 죽음으로, 부모에서 자식으로, 유에서 무로 말이죠. 오즈는 그런 삶의 진리를 그만의 방식으로 스크린 속에 새겨 넣어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것입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의 초기 무성영화 걸작에서 그의 전성기 시절의 대표작들, 그리고 유작까지 그동안 상영될 기회가 적었던 작품을 포함해 14편의 영화가 상영될 예정입니다. 더불어 이번 14편의 상영작 중 6편 <태어나기는 했지만> <무네카타 자매들> <동경 이야기> <이른 봄> <부초>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은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제공 하에 입장료 없이 무료로 진행됩니다. 아울러 회고전 기간에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세계를 되돌아볼 수 있는 강좌가 세 차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즈 야스지로와 그의 영화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독 | 오즈 야스지로 小津安二郞 (1903~1963)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와 함께 일본 영화의 3대 거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감독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20대 초반 일본의 3대 메이저 중 하나인 쇼치쿠영화사에 들어가 영화를 배웠고 1927년부터 직접 연출을 맡기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동경이야기> 를 비롯해 <만춘> <오차즈케의 맛> <꽁치의 맛> 등이 있다.



★ 영화사 강좌-오즈 야스지로를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간 중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영화사강좌가 마련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 부탁드립니다.

9월 18일(일) 17:30 <동경의 황혼> 상영 후 '오즈의 이면'_ 허문영(영화평론가, 시네마테크부산 관장)

9월 25일(일) 15:10 <맥추> 상영 후 '무인(無人)의 풍경'_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9월 30일(금) 19:00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상영 후 '오즈 영화에서의 감정에 관하여'_ 김영진(명지대학교 교수, 영화평론가)


*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간 동안 상영되는 작품을 보신 관객들에게 참여 우선권을 드리며, 자리가 남을 경우 선착순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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