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중계] 김성욱 프로그래머 '마스무라 야스조의 미학' 강연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이 한창인 21일 오후 <아내는 고백한다> 상영 후,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특별강연이 있었다. <아내는 고백한다>를 중심으로 마스무라 야스조가 일본영화사에서 갖는 의미와 그의 영화세계의 전반적인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 자리였던 그 시간을 일부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전반적인 마스무라 야스조의 이야기와 방금 보신 영화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드리겠다. 오시마 나기사는 마스무라의 영화가 나왔을 때, “이것은 돌파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지금 시점에서 마스무라의 영화를 보는 것은 전혀 몰랐던 작가와 배우를 만난다는 의미와 함께, 이것이 일본영화사에서 어떤 돌파구로 작용했으며 현 시점에도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내포한다.

 

일본영화계의 하나의 전통은 욕망의 표출을 억제했던 경향이다. 마스무라는 이와 같은 상황

에서 개인을 그려내면서 일본 누벨바그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 이때의 개인이란,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온 한 개체가 아니라, 조직과 집단과 사회와 구조와 틀, 어떤 관계 안에 있는 개인이었다.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도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가령 로프와 매달린 사람의 수직적 구조가 그것이다. 중간에 매달린 여자를 중심으로, 위에는 기어 올라가서 만나야 할 젊은 남자가 있고, 아래는 남편이 있는 수직적인 선이 되는 로프는 동시에 여자에게는 하나의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로프에 매달린 것은 생명과 연관됨과 동시에 자신을 옭죄는 올가미인 셈이다. 마스무라가 주목한 것은 그 수직의 안에서 무언가를 끊어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마스무라는 인간의 외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가령 이 영화의 비에 젖은 머리, 조금 까매진 양말, 진흙을 밟고 걸어온 듯한 여주인공의 모습, 손끝 연기나 얼굴 표정, “내 몸이 얼마나 야위었느냐”라고 말할 때의 반지와 시계의 헐거움. 그런 점에서 <눈먼 짐승>이란 작품은 마스무라의 세계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영화라 하겠다. 촉각적이고 표피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예술가의 눈은 멀게 되고, 이는 맹목적인 여성의 형상과 닮아있다. 눈 멈과 맹목성. 표피적이고 표면적이고 촉각적임, 그것과 눈이 멈의 상태. 눈이 먼 상태에 빠진 인물들의 사랑에의 맹목성.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이야기의 구조 내에서 형성되는 것만이 아니라 보다 물리적이고 촉각적으로 진행된다.

 

마스무라의 영화는 심플한 점이 매력적이다. 가령 <아내는 고백한다>에서는 “사랑 한다면 죽일 수도 있다. 죽일 수 없다면, 죽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단순한 테마가 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인가?” 이 테마 하나에 몰두해 영화 전체가 흘러가는 구조다. 핵심이 무언인지 정확하게 느낄 수가 있고, 이 하나를 맹렬한 속도로 파고 들어간다.

 

사랑과 죽음이 분리 불가능한 상태가 펼쳐진다. 이는 일종의 질문인데, 이 질문이 제기되는 지점이 어디인가에 그 중요성이 있다. 이 영화에서 자일을 끊게 되는 지점에서 이 여자가 느낀 것은 진정으로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죽이는 것과 사랑을 깨닫는 것이 같은 순간에 벌어진다. 뭉개지고 절단 난 남편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 그것과 함께 삶과 생으로 충만한 젊은 남자에의 열망이 대조된다. 시체, 죽음과 마주한 이후에 남아있는 여자의 삶에의 데카당스적 열망. 이는 전후의 영화라는 환경에서, 시체들과 마주한 인간의 에너지에 대한 탐구이다. 그 에너지는 곧 사랑, 욕망과 열망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가장 에로틱한 것이다. 에로틱한 것은 작은 죽음이다. 일종의 오르가즘. 작은 죽음의 경험을 얻는 것은 영화를 볼 때의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영화와 에로티시즘은 떼어낼 수 없다. 그것을 영화적 형식과 본성과 연결시켜나가는 마스무라 영화의 매혹성이 있다. 즉 단순한 센세이션을 넘어선 영화의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다.

마스무라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 안에서 충돌되는 힘의 역학관계를 대중영화가 갖고 있는 이항대립의 요소로서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충돌의 에너지는 유동적인 면이 있다. 원래 설정된 캐릭터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캐릭터들이 변이되는 모습에서 발생하는 충돌이기 때문이다. 인물의 변이라고 하는 것. 어떤 지점에서 만들어지고, 변이를 만드는 추동력이 무엇인가? 인물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지점까지 영화가 끌고 가, 어느 순간 내부의 에너지가 분출되어 나갈 때, 개인성이 탄생한다. 그러한 변이 지점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섹스 체크>이다. 힘과 에너지를 갖게 되는 몸, 성차의 문제, 그 변이의 과정들이 하나의 주제나 테마, 혹은 소재처럼 작동하는 영화이다. 마스무라는 그것을 가정 내의 공간까지 끌어온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다. 이런 에너지, 힘들의 격돌을 무엇보다도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마스무라의 역량이다.

 

마스무라의 영화가 현재 어떤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마스무라의 영화가 갖고 있는 현대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성을 잃어가는 영화들, 어떤 관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터무니없는 개인을 다루는 영화들과는 달리, 마스무라의 영화는 사회적 밧줄에 얽혀 있는 자에게서 개인성이 출현하는 지점, 사랑의 탄생이자 열망의 탄생, 그것이 죽음과 쇠락을 경유하는 것을 보여준다. (정리: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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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1967)에는 의학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할 마취약을 개발하는 과정을 다룬 점 외에도, 어머니가 아들의 아내에 대해 질투한다는 점, 그리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이라는 보다 마스무라적인 테마가 있다.

 

하나오카 집안의 흥망성쇠를 함께하는 며느리 카에의 삶의 여정을 따르는 이 영화에는 그녀의 삶의 분기점이 되는 만다라게 꽃밭의 장면이 세 번 나온다. 그 처음은 카에가 8살 때로 그녀는 장차 시어머니가 될 여인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어린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우아한 여성성의 절정. 만다라게꽃보다 더 아름다우며, 어린 소녀에게 있어서 만다라게의 독성만큼이나 치명적이었던 매력. 그녀의 삶은 그 이상향을 향한 여정이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결심한다. 그야말로 하나오카 가문에 입적하는 것으로서의 결혼인 셈이다. 하나오카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장남 운폐가 의학적 성취를 이뤄내 집안을 부흥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즉 운폐는 집안의 주인이다. 모든 여성들은 그를 위해 봉사하며, 이 때 집안의 안주인은 그 내조를 지휘하는 중심적 역할을 한다. 안주인은 어머니 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며느리 카에를 견딜 수가 없다.

 

어머니와 카에는 운폐에게(즉 집안의 부흥에) 더 가치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경쟁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집안의 안주인으로서의 경쟁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으로서의 경쟁이다. 여성으로서의 욕망에는 그 선을 확정짓기 어려운 미묘한 성적 욕망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아들의 여자를 질투한다는 테마는 <눈먼 짐승>에서도 존재하는데,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에서 그것은 더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평화로워 보였던 두 여자 사이에 운폐가 끼어들면서, 이제 둘의 관계는 전면적으로 변한다. 가령 운폐가 처음 집에 돌아온 날, 어머니는 아들 부부의 첫날밤의 동침을 막으며, 그동안 카에를 마주 보고 잠들던 그녀는 이제 등을 돌려 돌아눕는다. 이 행동은 분명 어머니로서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성적 욕망에 의한 질투에 가깝다. 운폐와의 사랑을 나눈 후, 그녀가 스스로의 여성성을 자각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이상화 했던 어머니가 내면에 품고 있는 악질적인 면을 느끼고 말았을 때, 카에는 두 번째로 만다라게 꽃밭에 서게 된다. 이제 어머니를 향한 카에의 동경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에 남편에게 가치 있는 부인이 되기 위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다.

 

운폐에게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생명을 건 왜곡된 경쟁. 그 경쟁에서 패배했음을 깨닫자마자 무너져 내리는 어머니를 보면, 그 경쟁과 안주인으로서의 위치가 그녀의 삶의 유일한 동력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그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고생하던 카에는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자마자 곧바로 입덧을 한다. 그리고 곧이어 두 아들을 낳게 된다. 가문의 대를 잇는다 함은 곧 아들을 낳는 것이고, 이것은 가문의 안주인의 몫이다. 그렇게 카에는 마침내 안주인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가문의 대를 잇는 아들을 낳는 것이다. 이제야 그녀 자신이 바로 8살 때 보았던 이상화된 여성상으로서의 어머니와 완전히 같은 위치에 섰다. 그러나 이상화했던 그 우아한 어머니의 위치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러기 위해 자기 자신의 주체적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그녀는 안다. 카에는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녀의 삶과 교감한다. 카에가 운폐의 여동생에게 자신과 어머니는 경쟁을 펼쳤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성공과 집안의 부흥에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녀는 눈이 먼 것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맛을 잃은 것 같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그토록 동경하던 위치에 그녀 자신이 오르고 나서 겪게 되는 허망함과 부질없음의 감정일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만다라게 꽃밭에서 힘없이 털썩 주저앉는다. 그 시절의 여성의 삶은 그런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거둔 나름대로의 성공은 부질없고 더 없이 허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가? 마스무라는 운폐의 여동생의 입을 빌린다. 그녀는 ‘자기는 엄마와 새언니의 경쟁과 질투에 가득한 증오의 시선들을 바라봐 왔고, 그러고 사느니 차라리 혼자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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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는 단순하게 말해 가부장제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다. 아들(하나오카 세이슈)과 며느리(카에), 그리고 시어머니(오츠기)의 관계를 통해 그러한 삶을 보여준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시네마스코프를 최대한 활용한 독특한 화면구성을 통해 세 사람의 관계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적 심리를 묘사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매개가 되는 만다라게꽃은 여성의 삶의 고통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영화는 모범적인 여성상을 보여 주는 오츠기에 대해 카에가 품었던 존경심이 애증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나오카 세이슈가 외과수술에 필요한 마취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녀들이 마취제의 실험대상이 되려고 경쟁하는 모습은 가부장제에서 아들과 시어머니, 그리고 며느리의 삼각관계가 첨예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아내인 카에가 시어머니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녀는 처음부터 오츠기의 삶을 흠모하고 존경하여 그녀의 삶을 따라 배우려 했던 것이고, 남편에 대한 사랑을 얻기 위해 남편의 성공에 집착하는 모습은 표면에 불과했다. 오츠기가 만다라꽃밭에서 물을 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와 같은 삶을 꿈꿨던 카에는 결국 눈이 먼 가운데 남편의 성공을 확인하고는 만다라꽃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여자의 일생’은 만다라게꽃이 만발한 모습에서 시작해서 가부장제의 숨막히는 밀실을 거쳐 다시 만다라꽃밭에서 마감된다.

가부장제의 숨막히는 밀실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 마스무라 야스조는 그의 다른 영화에 달리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과감한 편집을 통해 속도감 있게 영화를 전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내공간을 보여줄 때는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의 화면과 같은 절제나 담담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시네마스코프와 카메라의 특이한 앵글의 결합으로 인해 공간은 미스테리하고 꽉 찬 밀실처럼 변모한다. 인물들의 감정은 다소 자제된 채로 표현되어 화면 전체는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이 옥죄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간결한 디테일 속에서 인물들이 시네마스코프화면에 배치되는 방식 및 카메라의 독특한 시선과 위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심도가 시간적인 느낌을 준다면, 카메라의 연출법은 시스템의 숨막히는 억압감을 강조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 그리고 그것을 모른 채 이용하는 아들의 이야기라는 단순한 구조에서 긴장감이 발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붉은 천사>에서와 비슷한 내적 깊이감을 만들어내는 꽉 찬 화면의 특이한 공간감은 타르코프스키의 <이반의 어린시절>에서처럼 광각렌즈가 만들어내는 원근법적인 깊이감과도 다르다. 그 깊이감과 인물들의 특이한 배치는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하면서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마치 폐쇄된 밀실에서 역적모의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한 인물들의 역적모의를 숨어서 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은 인물들의 관계나 심리를 모호하게 만든다.


한편, 이 영화는 한 화면 내에서 인물들의 각기 다른 행동과 그것을 엿보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카에의 집에서 조부와 장차 시아버지가 될 세이슈의 대화가 한 켠에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것을 엿보는 카에의 모습이 그러하고,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 장면에서도 이런 장면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여자들은 엿보면서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 배우거나 각자의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만든다. 여기서의 엿봄은 연극에서의 ‘방백’과도 같다. 중요한 것은 엿보고 있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그녀들이 엿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켜보고 관찰하던 사람은 시스템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오카의 제자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속상해 하면서 오츠기가 울 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은 화면의 중심에 주로 배치되지만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을 모른 채한다. 지켜보고 관찰한 자들만이 결국 시스템의 비밀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엿보고 있는 그녀들은 시스템 속에 있는 또 다른 관객과 같은 위치다.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몇 마디의 말들을 내뱉는 순간들이며,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녀들의 표정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관객과 화면 속 인물에 동시에 향한 카메라의 시선은 화면에서 교차되면서 공간에 입체감을 부여하며 밀실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관계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만다라게꽃 역시 여성상을 보여주는 주요한 매개체이다. 이야기를 이끄는 만다라게꽃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삶의 고통을 슬프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장치다. 영화에서 여성의 삶은 표면적으로는 말에 의해 드러난다. 카에와 오츠기의 삶을 지켜봤던 시누이는 종양으로 죽어가는 순간에 당대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그녀들의 삶에 대해 말한다. 고통을 감추고 경쟁하듯 하나오카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 그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들의 삶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며느리로도 시어머니로도 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이 카에의 삶(과 시어머니의 삶)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녀의 삶은 만다라게꽃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그 꽃의 기능은 적절한 양으로 환부를 치유하는 데 있고, 그 꽃을 사용할 때는 정신을 잃게 되며 과다한 사용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녀는 결혼해서 하나오카 세이슈의 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러한 자신의 삶을 감지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만다라게는 집 밖의 약초밭에 활짝 피어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답고 모범적인 여성상을 대변한다. 또한 오츠기와 카에의 삶을 이어지게 하는 매개체다. 고통없이 수술하기 위해 쓰이는 만다라게꽃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마취제로 쓰여서 정신을 잃게 만들듯이 그녀들은 남자의 사랑과 성공의 매개물이 되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카에는 마취제의 과다사용으로 결국 눈이 멀게 된다. 만다라게꽃의 독이 그녀의 삶 속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시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애증의 감정으로 인해 시어머니의 삶을 반복하는 카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눈이 멀고 나서야 그녀는 시어머니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시어머니를 닮은 아들을 낳는다. 영화에서 하나오카 세이슈는 화면의 중심에 놓여 있다. 마취약을 개발하고 실제로 성공했던 당대 시스템의 핵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주변적인 여성의 보이지 않는 고통과 그녀들의 삶을 내밀하게 드러내는 데 더 초점을 맞춘다. 그녀들의 고통스런 삶은 당대의 사회구조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 가운데, 다른 여성의 삶을 모방하려는 데서 기인한다. 마치 만다라게꽃처럼. 세 번 정도 등장하는 활짝 핀 만다라게의 아름다움과 그 만다라게가 집안의 성공을 위해 마취약이 되는 모습이 밀실같은 집안을 표현한 미장센과 대비된다. 마지막에 카에가 만다라게 꽃밭에서 죽는 장면은 오츠기의 삶을 반복한 후에 밀실같은 공간에서 빠져나왔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카에의 운명을 아프게 보여준다.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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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닌 2010.04.22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05.asp?lessonidx=off_snHong03 여기서 평론가 홍성남 선생님이 미조구치 겐지 강의를 하시네요

[영화읽기] 마스무라 야스조의 <훔친 욕정>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들에는 상호작용과 교환을 위한 탐닉과 섹스가 난무한다. 그의 영화들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이 마음을 빼앗기고 욕망에 젖어드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 혹은 인물 주변의 상황이 만들어낸 아이러니 때문인데, 이는 곧 타인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광기로 이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설정할 수 있게 만드는 지점인 섹스장면들은 절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스조 영화의 주인공들은 전쟁, 사회, 혹은 자본 등을 통해 본능이 도태된 집단의 단면을 보여준다.

 

평범했던 주인공이 특정 사건이나 또 다른 특정 인물의 이야기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주인공이 가지고 있었던 자의식은 온전히 동물적인 감정으로 탈바꿈한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탐닉은 곧 인간의 신체에 대한 지독한 페티시로 이어지며, 영화 속의 인물들은 서로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결여되고 금지된 감정과 애증을 불러일으킨다. 야스조의 영화에서 표출되는 인물들의 욕망은 단순한 개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섹스를 통해 봉인하고 금기되었던 본능을 무의식적으로 꺼내 보여주며, 이러한 섹스 행위는 소외된 인간들이 마치 물물교환을 하듯 자신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방어기제의 한 부분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야스조의 많은 영화들이 쾌락과 억압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여있다고 가정할 때 외도와 불륜을 소재로 하는 <훔친 욕정>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훔친 욕정>은 유부남인 아사이의 동거녀로 지내다가 부인을 쫓아내고 아사이의 사랑을 독차지한 마스코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마스코의 조카 시게코의 출연으로 인해 마스코와 재혼한 아사이는 시게코를 탐하기 시작하고 마스코는 아사이와 시게코의 중간에 놓인 채 아사이의 전처로부터 빼앗아 온 자신의 ‘욕정’을 탓하기 시작한다. 아사이의 전처는 배신과 증오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는데, 마스코는 전처의 죽음 때문에 시게코와 아사이의 외도를 직접 목격하고도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마스코는 사랑하는 사람과 조카와의 관계를 부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결코 그 이상의 집착을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훔친 욕정>의 주인공인 마스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꺼이 손에 넣고야마는 욕망의 결정체인 셈이지만 조카에게 빼앗겨버린 아사이에 대한 집착이 결국 마스코 스스로 벌하고 치유하게 만드는 묘한 이중성을 띄고 있다. 마스코는 완벽한 배신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 더 농밀하고 파격적으로 배신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제어해버린 것이다.

 

마스코라는 여성이 보여주는 이러한 의외의 소극적 태도는 마스코의 몸과 행동을 대신해 각개 장면들로 분출되고 조립되는데, 영화 속에서 그녀의 광기어린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는 바로 물이다. 영화는 특정 계절을 확고히 명시하지 않으나 마스코가 살고 있는 집, 그리고 마스코의 주변인들이 계속해서 들이키는 물로 인해 마스코를 중심으로 알 수 없는 갈증의 정서가 녹아있다는 것을 은밀하게 비춰준다. 잔이 흘러넘치도록 담아내는 물과 커피를 마시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타인에게 지독히도 숨기고 싶은 욕정과 욕망들을 단숨에 들이켜 봉인시키려 노력하는 인간의 은밀한 추태가 연상된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을 억제하고 스스로를 벌하려는 마스코의 애증이 결국 그녀의 내면에서 돌이킬 수 없게 찢겨져버린다는 결말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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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중계] 홍성남 영화평론가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 강연

지난 11일 저녁 서울아트시네마에서 3월 첫 프로그램으로 열리고 있는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작품 중 <붉은 천사> 상영 후 일본영화 전문가인 홍성남 영화평론가의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계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일본 뉴웨이브에 전조가 되었다고 뒤늦게 재평가된 마스무라 야스조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강연 일부를 옮긴다.


홍성남(영화평론가):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가 한국에서 스크린으로 처음 소개된 것은 2005년이었고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은 <눈 먼 짐승>이다. <눈 먼 짐승>이나 <붉은 천사> 등은 너무 센세이션해서 간혹 그의 영화에 대해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색깔에 대해 ‘과도한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자칫 잘못 이해하면 어떤 엽기를 추구하는 감독이 아닌가 착각할 수 도 있는데, 그 엽기적인 측면은 단순히 욕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야스조만의 상상이 담긴 엽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야스조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시스템 안에서 오랜 시간동안 영화를 만들었다. 총 58편의 영화를 만든 야스조의 영화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미국에서 마스무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평론가 조너던 로젠봄은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영화들은 <거인과 완구>, <검정 테스트카>, 반전영화는 <붉은 천사>와 <세이사쿠의 아내>, <야쿠자 군대>, 변태적인 섹스영화는 <만지>, <붉은 사랑>, <눈 먼 짐승> 등이고 강한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는 <아내는 고백한다>와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문신> 등이 있다고 분류했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였다. 하스미 시게이코는 예전에 마스무라를 높게 평가하며 ‘마스무라 야스조는 대표작이 없는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비평가로도 활동한 야스조는 아키라의 이미지와 구도, 그리고 편집능력을 호평하며 아키라를 지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라의 편집방식이 빠르고 리드미컬하지 않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야스조는 편집리듬이 강렬하고 빠르며 이것에 플러스해서 사회를 분석적으로 볼 수 있는 지성을 가진 감독을 원했고 당시 이런 마스무라의 이야기가 앞으로 그가 영화를 만들며 추구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야스조는 탁월한 시각적 능력을 스크린에 구사할 줄 아는 감독이었고 냉철한 분석과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로 간 야스조는 그곳에서 유명한 영화학교를 다녔고 이탈리아에서 일본영화에 대한 글들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유명 영화잡지 등에 일본영화에 대한 평도 썼는데 항상 마지막에 ‘왜 서구는 일본의 한 측면, 특히 정련되고 오밀조밀하고 서구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미학에만 열광할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이것은 오즈의 영화에 반하는 것으로 굉장히 현실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탈리아 유학 후 일본 다이에이사에 들어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그는 처음 미조구치 겐지의 조감독을 지냈는데 야스조의 영화는 어떤 면으로는 이찌가와 곤과 맞닿아있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 사회 상층에 있는 집단보다 아래, 주변인들에 대해 공감했다는 측면이 그렇다.


마스무라 감독은 시스템에 대한 반대, 특히 인간을 억누르고 질식시키는 시스템에 대한 반대가 자주 보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붉은 천사>에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듯 욕망이 이상 분출된다. 하지만 선정적으로만 흐를 수 있는 것을 비판적시선과 결합시키는 능력을 마스무라는 가지고 있다. 마스무라는 인간의 욕망을 그리되 그것을 현실적 욕망, 일상에서 보는 욕망보다 과도하게 표출하고 그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미친 사람들’을 그리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마스무라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고 자체가 닮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리얼 재팬’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다. 강인하고 늠름하고 그 이전의 일본에서는 찾을 수 없던, 예전에는 일본에 존재했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사라져버린 새로운 일본인상의 모색이 아닐까 싶다.

 

다른 한편으론 마스무라는 일본 뉴웨이브 그룹에게 감화를 주고 호의를 받고 작업할 바탕을 마련해준 뉴웨이브 이전의 뉴웨이브-‘프리 뉴웨이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일본 뉴웨이브와 매우 미묘한 위치에 있었으며 모더니즘적 태도의 미세한 위치에 놓였던 감독이다. 하나로 설명될 수 없는 분류들이 마스무라의 위치를 제대로 잡아주기 어려우면서도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매혹을 주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주는 역할을 했던 그는 계속해서 탐구할 가치를 생성시켜주는 자원이 풍부한 시네아스트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강민영)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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