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리브스의 <렛미인>(2010)을 보면서 ‘해머영화’의 팬들은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경험을 했다. 비록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동명영화를 리메이크했지만 맷 리브스의 작품에는 해머영화를 특징짓는 요소들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물의 전통적인 공포요소, 하얀 눈밭 위에 박힌 붉은 핏방울과 같은 강렬한 색감, 소년소녀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난무하는 사지절단의 잔혹 묘사 등은 1960~70년대 세계 공포영화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었던 해머영화의 현대적인 재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1980년대 중반 이후 문을 닫다시피 한 해머영화사(Hammer Film Production)는 2000년대 들어 재기를 꿈꿨고 제작사 중 한곳으로 참여한 <렛미인>은 해머영화의 부활을 알린 화려한 축포와 같았다.

해머의 시작

1948년 익스클루시브 필름스(Exclusive Films)의 회장인 윌 해머가 설립한 해머영화사는 처음부터 공포영화를 만들어 인기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TV나 라디오에서 인기를 끌었던 소재와 캐릭터를 빌려와 저예산으로 빠르게 만들어 배급하는 마이너한 회사에 가까웠다. 워낙 파이가 작은 시장을 공략한 결과로 흥행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해머영화사라는 독특한 브랜드를 영국 내에 알리는 데는 적지 않은 효과를 거뒀다. 신통치 않은 흥행 수익에도 불구하고 해머영화사가 꾸준히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 내 지점을 둔 할리우드영화사들의 지원사격 덕분이었다. 이는 해머영화사의 미래에 대한 투자개념이라기보다는 1년에 1천7백만 달러 이상 해외로 반출할 수 없는 영국의 법조항으로 인한 우회의 성격이 짙었다. 영국 내 할리우드영화사들은 영국영화사와의 공동제작을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영국 밖으로 가져갈 수 있었고 그들로서는 저예산으로 인지도를 높이고 있는 해머영화사야 말로 투자하기에 가장 적합한 회사였다.

해머영화사의 입장에서도 안정된 자금이 확보되는 할리우드영화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문제는 영국영화계에 있었다. 관객들이 가볍게 즐길만한 오락영화 제작에 관심을 쏟지 못하다보니 할리우드영화사들은 더 이상 영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195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의 할리우드영화사들이 영국에서 철수하게 됐고 자금줄을 잃게 된 해머영화사는 덩달아 시련을 맞기에 이른다. 그것은 위기이면서 또 다른 전환점이기도 했는데 <쿼터매스 익스페리먼트>(1955)는 그런 점에서 해머영화사의 운명을 바꾼 영화이었다. 1953년 BBC에서 제작된 6부작 TV시리즈를 영화로 옮긴 <쿼터맥스 익스페리먼트>는 필름느와르풍의 과학자 쿼터매리 박사가 겪는 불가사의한 모험을 다뤄 자국 박스오피스 기록을 연일 갱신했다.

<쿼터맥스 익스페리먼트>의 흥행 대폭발 이면에는 당시 영화팬들의 기대심리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 영국영화계의 경직성이 한몫했다. 영국영화는 1950년대 중반까지 세계대전을 소재삼아 허구의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연출한 다큐멘터리와 이 같은 추세 속에 사회성을 확장한 사실주의 영화들이 강세를 보였다. 영국민들을 단합시키고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무거운 주제의 영화들이 극장가를 장악하다보니 영국영화계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오락영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때, 침체에 빠진 영국영화의 뒤통수를 해머로 후려치듯 등장한 것이 바로 해머영화사의 공포물이다. 이를 일러 ‘해머공포영화’라고 부르는데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해머영화사가 제작한 일련의 공포영화를 일컫다.

해머가 공포에 전념한 것은 <쿼터맥스 익스페리먼트>의 흥행도 컸지만 영국영화 시장 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장르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당시 해머영화사의 수장으로 있던 제임스 카레라는 단순히 TV인기프로그램을 가져와 영화화하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다. 때마침 공포소설의 고전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의 판권이 소멸된 상태라는 소식을 접했고 이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 채 다양한 B영화를 만들던 테렌스 피셔를 감독으로 고용, 표현의 제약 없이, 다만 많은 관객들을 자극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완성된 <프랑켄슈타인의 저주)(1957)는 제임스 카레라의 바램대로 해머영화사를 영국영화사(史)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로 자신감을 얻은 해머영화사는 <드라큘라>(1958), <미이라의 복수>(1959), <늑대인간의 저주>(1961) 등 해머공포영화로 묶이는 일련의 작품들을 줄줄이 발표하기에 이른다.

해머의 특징



해머공포영화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은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다. 이 영화는 출발부터 할리우드 유니버설의 1930년대 호러 클래식의 대표작인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1931)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해머는 유니버설의 작품들과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차별을 둬야하는지에 고심을 거듭했다. 인간의 오만함이 빚어낸 과학의 위험성에 더 중점을 둔 <프랑켄슈타인>과 달리 테렌스 피셔는 메리 셸리의 원작에 더 충실한 쪽으로 연출의 가닥을 잡았다. 괴물보다는 창조자 빅터 프랑켄슈타인(피터 쿠싱)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악마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와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적 관점은 단지 상대적인 수준의 차이점일 뿐이다. 오히려 유니버설의 호러클래식과 해머영화사의 공포물 사이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차이는 흑백필름과 컬러영화 간의 다름만큼이나 명백하다. 흑백필름인 <프랑켄슈타인>은 명암의 차이를 이용한 촬영으로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에 더 가깝다고 할만하다. 반면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는 컬러영화로 촬영된 덕에 첨탑의 건축양식과 과장된 장식성이 돋보이는 고딕스타일이 소설 그대로 묘사됐다는 평을 받았다. 실제로 해머의 공포영화는 세트촬영이 돋보이는데 퇴폐적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원색 이미지가 강렬해 관객의 시각에 깊은 인상을 ‘새겨 넣은’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 이전 컬러로 촬영된 ‘프랑켄슈타인 영화’가 없었다는 것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의 성공에 고무된 해머영화사는 테렌스 피셔 감독과 피터 쿠싱, 그리고 괴물 역의 크리스토퍼 리 트리오를 다시 기용하여 고딕 이미지와 핏빛 색채가 강렬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영화화하였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와 달리 <드라큘라>의 경우, 테렌스 피셔는 원작을 대폭 수정, 무대를 드라큘라 성으로 한정해 반 헬싱 박사와 드라큘라가 맞붙는 일대일의 대결 구도로 영화를 구성했다. 원작 자체가 고딕적인 색채가 강했고 드라큘라 성이 이런 특징을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해석이었다. 하지만 <드라큘라>는 영국 개봉 당시 잔인하다는 이유로 많은 장면이 잘려 나간 비운의 작품이었다. 한정된 세트 안에서 증폭된 고딕이미지의 향연이 잔인함을 더 배가시키는 효과로 작용한 결과였다.

지금까지도 해머영화사를 말할 때면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와 <드라큘라>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두 편이 선사한 강렬한 이미지는 ‘해머고딕영화’라는 또 다른 브랜드 네임을 선사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미국 시장에서만큼은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통했다. 유니버설의 작품과 제목이 같다는 이유로 <드라큘라>가 <The Horror of Dracula>로 개봉되는 등 유니버설의 호러클래식과 해머공포영화는 구별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니버설과는 차별된 해머의 영화는 미국 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다. 그 같은 결과에 힘입어 유니버설로부터 호러클래식 리메이크 권한을 넘겨받으며 <미이라> <늑대인간의 저주> <오페라의 유령>(1963) 등과 같은 라인업을 통해 해머영화사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해머의 스타


해머의 공포영화가 서구권에서 맹위를 떨치는 동안 이 장르는 두 명의 중요한 스타를 배출했다. 피터 쿠싱과 크리스토퍼 리가 그 장본인으로 이들을 언급하지 않고서 해머의 역사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중 피터 쿠싱은 해머가 공포의 하위 장르로 정착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광인’ 연기에 특출한 재능을 과시했는데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의 연기가 대표적이었다. 피터 쿠싱의 매력을 간파한 해머 측은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의 속편을 마구잡이(<프랑켄슈타인의 복수>(1958) <프랑켄슈타인 여자를 만들다>(1967) <프랑켄슈타인 죽이기>(1970) <지옥에서 온 프랑켄슈타인과 괴물>(1974) 등)로 제작하는 것은 물론 미친놈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원작의 이야기를 변형하는 등 그에게 추파를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피터 쿠싱은 놀라울 정도의 ‘미친놈스러운’ 연기를 펼쳐 미치광이 박사 역은 해머공포영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기능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를 필두로 <지옥에서 온 프랑켄슈타인과 괴물>까지, 피터 쿠싱은 해머영화사의 전속 호러배우로 인식되었고 이는 갈수록 그 자신에게 큰 불만이었다. 후에도 해머 특유의 캐릭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열렬한 추종자를 거느렸고 컬트배우의 지위까지 얻었으니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사루만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리는 연극무대에서 배우생활을 시작했던 피터 쿠싱과 달리 해머공포영화에 출연하기 전부터 B영화에 단골로 출연한 배우였다. 190cm가 넘는 큰 키에 웃음기가 전혀 숨을 구석이 없는 차가운 면상은 그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 다만 위압감을 준다는 점에서 괴물이나 악당은 크리스토퍼 리의 적역 같은 것이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이미지를 맡기에는 다소 동떨어진 마스크였다.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이 발표된 이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이미지는 위압적이라기보다는 동정을 불러일으켰고 사악하기보다는 순진해 보이는 인상으로 굳어졌다. 더군다나 유니버설은 오리지널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모방 못 하도록 조치를 취한 상태였고 그런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의 프랑켄슈타인은 크리스토퍼 리의 인상을 한껏 활용한 흉악한 괴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를 시작으로 그는 해머영화사에서만 12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피터 쿠싱은 해머에서 총 14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크리스토퍼 리 본인의 온전한 인상으로 등장한 영화는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역을 필두로 드라큘라, 미라 등이 그의 캐릭터였다. 특히 보리스 카를로프, 벨라 루고시와 함께 드라큘라 3대 전문배우로 악명(?)을 떨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지만 크리스토퍼 리는 자신의 얼굴이 괴물 분장에 가려지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해머는 <드라큘라>의 성공 이후 후속편을 기획했지만 크리스토퍼 리의 고사로 제작이 연기됐고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드라큘라의 신부>(1960)는 이례적으로 드라큘라가 출연하지 않는 드라큘라영화가 되었다. 해머의 드라큘라 시리즈 출연을 포기한 크리스토퍼 리는 괴물전문 배우에서 악역전문 배우로 돌아갔다.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4)의 매력적인 나쁜 놈 ‘스카라망가’에서부터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사루만까지, 크리스토퍼 리는 후대에 길이 남을 악역의 진수를 보여줬다.

해머의 영향


해머영화사가 공동제작으로 참여한 <렛미인>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해머의 공포물이라고 부르기에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원작영화가 가진 영향력이 너무 짙다. 굳이 <렛미인>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해머영화사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에 현대영화의 성격은 물론 제작시스템 역시 예전과는 완전히 변모했다. 불온한 상상력은 갈수록 표준화 가까운 것으로 뭉툭해졌고 제작과 촬영 역시 고도화된 제작 시스템 하에서 장기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됐다. 다만 해머라는 브랜드가 여전히 현대에서도 의미를 갖는 것은 수많은 영화에서 감지할 수 있는 해머의 ‘공포분자’ 때문이다.

굳이 해외로 갈 필요 없이,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은 해머의 영향력이 얼마나 너른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김지운 감독은 제작자가 고딕풍의 공포영화를 만들어 볼 의향이 없느냐고 의견을 타진하기에 그 자리에서 단박에 수락했단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벽지 공포’, ‘가옥 공포’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무수한 아류작을 양산한 <장화, 홍련>이었다. 정말이지 이 영화가 보여준 무대세트라든지 미술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김지운 감독이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해머의 공포영화에서 받은 영향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해머의 공포영화가 영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색깔 있는 시각적 이미지가 동서양을 막론한 후배 영화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해머라는 제작사 자체는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해머의 핏방울은 여전히 전 세계 영화계를 강렬하게 적시고 있는 것이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1932년 할리우드는 동시 상영용 B급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대공황기 동안 사람들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영화관에 오는 관객도 줄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는 클라크 게이블, 캐서린 헵번 등이 주연한 버젓한 A급 영화에 내용이 조잡한 서부영화나 공상과학영화를 덤으로 끼워 동시 상영했다. 회사의 사운을 걸고 제작되는 대작이 아니라 소시지처럼 줄줄이 엮어 파는 이 영화들은 내용도 소시지처럼 비슷했다. 당시 배우를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과 전속제 계약을 맺고 있던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영화사 간부들은 회사 직원들을 놀리지 않기 위해 스태프들을 B급 영화 제작에 투입해 악착같이 부려먹었다. 모든 메이저 스튜디오에는 B영화 제작 전담반이 생겼다. 방금 촬영을 마친 영화의 세트를 빌려다 재능 있는 작가와 배우들을 동원해 뚝딱 영화를 찍는 것이 B영화 제작 시스템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가능성 있는 신인배우와 감독들이 테스트를 받았다. 훗날 스타가 된 라나 터너와 주디 갈런드가 바로 이 코스를 거쳐 살아남았다.


B영화의 작업량은 엄청났다. 보통 5일 만에 영화 한 편을 찍어내는 방식이었다. NG를 두 번 이상 내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배우와 스태프들은 늘 준비돼 있어야 했다. B영화의 거장으로 불렸던 조셉 루이스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샌드위치 먹을 시간도 없었던’ 환경에서 B영화가 만들어졌다. 이미 흥행한 영화의 내용과 주인공 성격을 조금씩 고쳐서 다시 만들어내는 이 동시 상영용 영화들은 신인 배우와 감독들의 등용문이자 한물간 스타들의 은퇴 무대이기도 했다. 대작영화의 흥행 여부가 한 해 스튜디오 농사의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척도였다면 B영화는 고정 수입을 벌어주는 수단이었다.

이윤도 적지만 위험도 적은 B영화 제작에 메이저 이외의 군소 스튜디오도 뛰어들기 시작했다. ‘포버티 로우’나 ‘B-하이브’와 같은 소규모 영화사들이 나타났다. 대작은 만들지 않았지만 이윤을 남기는 영화사로 유명했던 B영화 제작 전문 스튜디오로 ‘리퍼블릭’과 ‘모노그램’ 등은 꽤 만만치 않은 사세를 기록했다. 범죄 멜로드라마, 서부영화, 저질 코미디, 경쾌한 코미디, 호러, 공포, 판타지영화 등 다양한 B영화는 평론가들의 경멸을 샀다. 대부분은 형편없는 시나리오에 조잡한 촬영술을 감추지 못한 영화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보석 같은 작품도 나왔으며 발 류튼, 에드거 울머, 앙드레 드 토드 등 훗날 비평적으로 재평가 받은 감독들도 이 유형의 영화들을 통해 먹고살았다. 1948년 연방 법원에서 메이저 스튜디오가 자사의 극장 체인망을 갖고 있는 건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스튜디오 체제가 무너진 후에 텔레비전의 등장과 더불어 대도시 극장의 동시 상영 체제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B영화의 시대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로저 코먼, 쇠퇴한 B영화에 불을 지피다

그리고 로저 코먼이 나타났다. ‘얼라이드 아티스츠’와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 등의 중소 배급사를 통해 개봉했던 코먼의 영화들은 할리우드 외곽에서 경이적인 B영화의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잘난 체하지 않으며 인상적인 장면들을 곧잘 만들어냈던 코먼의 B영화들은 현대 미국영화의 또 다른 영역을 개척했다. 코먼은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어 어떻게 해서든 이익을 많이 남기는 구두쇠 제작자였으며 젊은 영화감독들을 발굴해 마구 부려먹었던 악덕 기업주이자 후원자로 이름을 남겼다. 코먼의 영화사를 거쳐 간 영화인들의 목록은 헤아릴 수가 없다. 스타가 되기 전에 코먼 밑에서 일했던 잭 니콜슨은 “코먼이 우리에게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코먼도 우리를 그렇게 싸게 부려먹은 것에 대해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적재적소에 인재들을 싸게 기용하면서 코먼은 할리우드 역사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감독이자 제작자가 됐다. 그는 5할에 가까운 흥행 성공률을 보였으며 손해를 본 영화는 거의 없었다. 대단한 영화 도박사였다.

1947년에 스탠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산업에 뛰어든 코먼은 스토리 분석가,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으며 첫 번째 시나리오인 <하이웨이 드라그넷>(1954)을 영화사 측에서 수정하자 자기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1954년에 연출 활동을 시작한 코먼의 영화들은 괴상한 등장인물과 사회적 논평을 담은 틀에 박히지 않는 플롯과 특수 효과를 영악하게 이용하는 세트와 비인습적인 촬영의 매력이 돋보였다. 코먼의 영화는 고전기 할리우드의 B영화 제작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10만 달러가 제작비의 상한선인 저예산영화를 고집했고 촬영 기간은 5일에서 10일을 넘어서는 법이 없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로저 코먼이 제작자나 연출자로 크레딧에 등장한 <머신 건 켈리>(1958), <와일드 엔젤스>(1966) 등의 영화는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테러 이야기>(1962), <라벤>(1963), <붉은 죽음의 마스크>(1964) 등의 초저예산 공포영화는 심지어 오늘날 이 장르의 고전으로 대접받는다.

로저 코먼은 영화 제작 규칙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빠른 리듬으로 구성된 서부영화와 공상과학영화와 소프트 포르노와 10대를 위한 장르 재탕 영화를 '드라이브 인 극장용'으로 재빨리 제작해 팔아 치웠다. 그의 연출은 거침이 없었고 부끄러운 줄 몰랐다. 형체만 갖춘 엉터리 세트, 가슴을 드러낸 여성, 대담한 폭력과 조잡한 특수 효과는 젊은이들에게 낄낄거리며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주었다. 코먼식 영화 제작의 규칙은 ‘무엇이든 가능하며 예산 초과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코먼 밑에서 일했던 마틴 스콜세지는 대공황기의 폭력을 묘사한 영화 <벅스카 버사>(1972)를 찍을 때 코먼에게 이런 충고를 들었다. “기억하게 마티. 뭘 찍어도 좋아. 그러나 10만 달러의 예산을 초과하면 안 돼. 그리고 시나리오 15쪽마다 나체가 나와야 돼. 그 두 가지 조건만 지키면 얼마든지 자네 마음대로 찍어도 좋아”

코먼은 제작비 지출에 인색했지만 감독의 창조성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작진의 독창적인 생각을 장려했다. 코먼 영화 학교의 교훈은 ‘원하는 대로 찍어라’는 것이었다. 코먼은 다른 영화에서 아이디어를 훔치고 바꾸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코먼의 영화사에서 일했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코먼의 요구로 옛 소련 공상과학영화 필름을 가져다가 영어 더빙을 넣고 다시 편집하는 일을 했다. 그는 원작의 시나리오도 없이 순전히 화면만 보고 다시 시나리오를 써서 영어 더빙을 마쳤다. 역시 코먼이 운영하는 영화사에서 연출 데뷔작을 찍은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코먼의 예전 영화에서 편집으로 잘려 나간 보리스 카를로프가 나오는 40여 분 분량의 필름을 기초로 3일 동안 카를로프를 출연시켜 보충 촬영을 한 다음 <표적>(1968)이란 제목을 붙여 새 영화로 개봉시키는 희한한 일을 경험했다. 보리스 카를로프의 과거 이미지와 현재 이미지가 교차하는 이 영화를 두고 평론가들은 실험적인 시도라며 절찬했다. 정작 보그다노비치 감독 자신의 소감은 ‘그렇게 하고 나니 영화 박사가 된 기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었다.

온갖 신기록에 도전한 구두쇠 제작자

코먼의 구두쇠 제작 방식은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섹스, 폭력, 사회적 문제 등 젊은 세대가 관심을 끌 만한 요소들을 끌어안으면서도, 여하튼 영화를 싸게 찍었다. 자신이 얼마나 영화를 빨리 찍을 수 있는지를 증명하려고 하루 반 만에 영화를 완성한 적도 있었다. 전에 찍어둔 다른 영화의 필름을 얼기설기 섞어 새로 찍은 필름과 합쳐 날림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코먼의 친구는 ‘영화는 육상 경주가 아니다’는 말로 코먼을 질책했다. 코먼은 굴하지 않았다. 싸구려 SF영화를 찍을 때 100만 개의 눈을 가진 괴물이 등장하는 장면을 위해 코먼은 주전자에 100개의 구멍을 뚫어 배우의 머리에 씌우고 작업했다. <공포>(1963)를 찍을 때는 계약 기간에 따라 하루 이틀 시간이 남은 감독과 배우들을 번갈아 데리고 계속 시나리오를 바꿔가며 촬영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며칠 연출하고 떠나면 몬티 헬먼이 와서 연출하고 떠나는 식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주연을 맡은 잭 니콜슨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니콜슨 자신도 연출을 하겠다고 코먼에게 졸랐다. 코먼의 반응은 간단했다. “그럼 자네가 해. 단, 말은 되게 해”

싸게, 융통성 있게 찍는다고 해서 코먼의 영화가 엉터리인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초반의 미국에선 유럽 예술영화가 유행이었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나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코먼이 그 시절에 만든 <어셔가의 몰락>(1960)과 같은 영화는 조명과 촬영이 유럽풍으로 꽤 수준급이었다. 마틴 스콜세지는 <어셔가의 몰락>이 그 시절 희귀한 미국 예술영화 중 한 편이라고 기억했다. 경험이 부족한 신인들을 과감하게 기용했던 코먼은 자신의 영화에 그들의 젊고 실험적인 기운이 스며들기를 원했다.

1966년은 그런 코먼의 영화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었다. <어셔가의 몰락> 이래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짭짤한 재미를 본 코먼은 새로운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는 오토바이 폭주족 ‘헬스 엔젤스’가 주인공인 영화 <와일드 엔젤스>를 구상했다. 주류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 저주받은 시민들의 관점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아이디어였다. <와일드 엔젤스>는 미국 영화 역사에서 전에 없던 영화였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가 뉴할리우드의 도래를 부추겼던 해에 코먼은 비주류 저예산 영화에서 새로운 영화 스타일과 내용을 전시하고 있었다. 느슨한 플롯에 날카로운 점프 커트로 이어지는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선 ‘헬스 엔젤스’ 사람들이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목사를 구타한다. 폭력의 에너지가 과도하게 넘쳐나며 기성세대의 질서를 야유하는 이 장면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코먼은 배우들에게 그저 느끼는 대로 연기하라고 주문했고 배우들은 아무런 통제 없이 자신들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발산했다. 꽉 짜인 장르 영화의 표현 규범에 익숙한 관객에게 그 장면은 근사한 도발로 보였다. 그것은 이후 십 수 년간 할리우드에 몰아쳤던 뉴할리우드 영화의 스타일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코먼의 영화에는 점점 아웃사이더의 정서가 짙게 배어났으며 코먼은 주류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들만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낙오자들에게 공감을 느꼈다. 코먼은 마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트립>(1967)을 찍으면서 그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체험‘을 했다. 그는 한때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마약을 탐닉했으며, 영화에도 1960년대의 히피 정서가 강하게 묻어났다. 싸구려 영화 제작자이자 흥행사였던 코먼은 어느새 장 뤽 고다르와 함께 반전운동이 한창인 대학캠퍼스에서 강연하는 청년 문화의 대변자가 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코먼은 시대의 유행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대의 기운을 흡수한 창의적인 제작자

1970년대 초반 이후 코먼은 마약을 끊고 제작과 배급에 전념했다. 코먼은 그때 지쳐 있었다. 서서히 연출에서 손을 떼는 대신 제작과 배급에 전념했다. 코먼은 여전히 일 년에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지만 어떤 영화도 그가 직접 연출한 영화만큼 좋지는 않았다. 1970년대 초반 이후 그는 연출에서 멀어졌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색깔과는 달리 아웃사이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성공한 영화 사업가였다. 현실에서 아웃사이더가 아닌 그는 1960년대의 대항문화의 대변자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더욱 사업이 번창하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코먼은 훗날 뉴할리우드 영화 세대의 일원이 됐던 수많은 감독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자연스레 1960년대의 청년 문화의 기운을 수혈 받는 덤을 누린 것이다. 코먼은 회의가 들었다. 그는 ‘게임에서 이겼으면 운동장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0년에 코먼은 뉴월드픽처스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그는 <데스 레이스 2000>(1975)과 같은 재탕 영화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잉마르 베리만, 프랑수아 트뤼포, 페데리코 펠리니의 유럽 예술영화를 배급했다. 코먼이 <아델 H의 사랑 이야기>(1975) 등의 유럽 예술영화를 수입해 배급하는 일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자 예술영화도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할리우드 메이저가 너도 나도 유럽영화 배급에 뛰어들어 천문학적인 마케팅 공세를 퍼붓자 코먼은 그 일에서도 손을 뗐다. 메이저가 끼어든 예술영화 수입 배급 시장은 곧 파탄을 맞았고 미국에서 유럽영화를 보는 일은 과거지사가 됐다. 1983년에 코먼은 미국에서 가장 큰 독립영화 제작사가 된 뉴월드픽처스를 1천6백50만 달러에 팔고 콩코드/ 뉴 호라이즌스를 설립해 매년 20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했다. 상업적으로 승승장구한 그가 1987년에 올린 수익은 9천4백만 달러였다. 드라이브 인 극장이 쇠퇴하자 코먼은 비디오, 유선 텔레비전을 무대로 알찬 수입을 거두는 싸구려 영화를 제작했다.


연출에서 손을 뗀 코먼은 안전한 인사이더의 여유를 누렸다. 아내와 가족을 꾸리고 안정된 제작자의 지위를 누렸다. 마침 그 때는 뉴할리우드의 전성기가 지나고 <죠스>(1975) <스타워즈>(1977) 등의 블록버스터 시대가 열릴 참이었다. 코먼은 다시 그들 영화와 경쟁했다. <죠스>가 개봉하자 <피라나>(1978)를 만들고 <쥬라기 공원>(1993)이 성공하면 <카르노사우라>(1993)를 만드는 식이었다. 그것은 코먼의 전매특허처럼 된 제작 방식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현대 블록버스터는 1950년대에 코먼이 만들었던 저예산 B급 싸구려 장르영화에 영향을 받았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할리우드 고전과 유럽영화로부터 받은 영향 못지않게 사춘기 시절에 본 싸구려 장르영화에서 감성을 키운 세대였다. 마틴 스콜세지, 피터 보그다노비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를 비롯해 존 세일즈, 제임스 카메론, 로버트 타운, 로버트 드 니로, 데니스 호퍼, 찰스 브론슨 등의 코먼 영화 학교의 수제자들은 코먼을 떠나서 할리우드의 새로운 유행을 창조했고 코먼은 다시 그들을 모방했다.

한 푼도 잃지 않은 제작자

로저 코먼이 B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던 1950년대는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가 왔던 시기였다. 풍요로운 아이젠하워 시대에 드라이브 인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여흥을 즐기던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코먼은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는 섹스와 폭력을 끼워 넣어 화제를 끄는 영화를 만들었다. 1950년대에는 가수 프랭키 아발론이 나오는 <비치 파티> 시리즈가 유행했지만 1960년대에는 주로 공포영화와 갱영화, 액션영화 장르에서 파격적인 B영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영화들을 곧잘 찍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반항적인 히피주의 정서를 끌어안은 영화들을 내놓았다.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는 이런 B영화 흐름의 절정은 <이지 라이더>(1969)가 장식했다. 로저 코먼의 <와일드 엔젤스>에서 주연을 맡았던 피터 폰다는 비슷한 소재의 <이지 라이더>에서 제작, 주연을 맡고 역시 B영화 배우인 데니스 호퍼에게 감독을 맡겼다. 37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이 영화는 누가 봐도 B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를 배급한 콜럼비아는 6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마약이나 폭력 등 금기시된 주제를 공공연히 다루던 B영화의 흐름이 주류 할리우드영화와 접맥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B영화와 주류 영화의 교배는 1970년대에 한발 더 나아간다. 조지 루카스는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미국의 스크린을 장식한 <플래시 고든> 유의 B급 공상과학영화와 로저 코먼의 <별들 너머의 전쟁>(1980)에서 영감을 얻어 <스타워즈>를 만들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출세작인 <죠스>도 1950년대의 B급 공포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 중심에 로저 코먼이 있었다. 그는 유행이 돌고 도는 사이클에서 늘 안전 궤도를 타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코먼의 전설적인 성공의 원인은 간단했다. 할리우드의 구속을 벗어난 곳에서 그는 자기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트레이시 로드와 같은 포르노 스타를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화려하고 비싼 세트를 쓰지 않는 대신 값싸게 마음대로 찍는 영화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때로 그런 코먼의 스타일은 경이적인 성취를 거두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의 초기 대표작인 <공포의 구멍가게>(1960)는 ‘사람들이 액션 페인팅을 하고 달리는 듯한 느낌’의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코먼은 가장 인습적인 영화를 제작하면서 가장 비인습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모순된 제작자이자 감독이었다. 25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고 50여 편의 영화를 연출한 코먼의 영화는 액션, 유머, 쾌감을 가리키는 것이 됐다. 그 대가로 그는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쓰는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조나단 드미의 말대로 ‘위대한 독립영화 작가’였다.

글/
김영진 (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전’이라는 주제로 리처드 플레이셔와 로저 코먼, 테렌스 피셔의 영화 18편을 4월 한 달 동안 상영한다. 이들은 B영화를 언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감독들이지만 국내에는 소개되는 기회가 적어 여전히 미지의 작가들로 남아있다. 리처드 플레이셔, 로저 코먼, 테렌스 피셔 각자의 장문의 특집을 준비한 건 이런 연유에서다. B영화는 어떻게 탄생해 전성기를 누렸고 지금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B영화의 특집에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B영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어정리가 필요하다. ‘B Pictures’를 번역한 ‘B급 영화’라는 표현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급’이라는 부정적인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B영화를 A, B, C 등의 위계에 따른 저급한 영화, 혹은 이류 감독이 안이한 발상으로 만든 저질의 영화라 간주한다. 하지만 별난 감성의 예외적인 감독이 만든 괴상한 영화가 B영화라는 것은 편견에 가깝다. B영화를 특별한 개인들에 귀착시키는 것 또한 동일한 우를 범할 수 있다. 이런 논의들이 B영화의 역사성과 익명성을 손쉽게 가려버린다.

B영화는 태생적으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역사, 그것의 부침과 함께 했던 영화들이었다. 특수한 일면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개인의 취향에서 비롯된 결과 또한 아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고 산업의 문제였다. 할리우드의 밝은 조명 뒤편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고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밝고 호화로운 영화들만을 제조했던 것도 아니다. 반대의 극에서 빈곤의 문제가 동전의 양면처럼 있었다. B영화는 말하자면 할리우드라는 제국주의 내부의 거대한 식민지였다. 할리우드의 화려함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했던 구조적인 빈곤에서 B영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구조화된 빈곤과 어둠의 미학은 193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화려한 할리우드에 이질적인 어둠을 선사한 유니버설 호러의 역사가 있다. 괴물들을 끌어오고 공포를 조장한 이는 로베르토 플로레리였다. 그는 무르나우와 프리츠 랑의 카메라맨이었던 칼 프로인트를 끌어들여 유니버설을 어두운 영화의 산실로 만들었다. RKO의 발 류튼 또한 어둠과 공포, 빈곤, 염가의 영화를 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1930년대 초에 B영화가 양산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조건은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구조적인 개편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말에 유성영화가 도래하면서 20세기 폭스사는 유성영화 촬영소를 신축했고 구래의 촬영소를 폐기하는 대신에 B부서를 만들었다. 주로 저예산 영화를 만들기 위한 부서였다. 폭스를 위시해 MGM, 파라마운트, RKO에 B영화의 담당부서들이 만들어졌고, 새로운 기획자들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이들이 B영화의 전담 프로듀서들이었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바깥에도 B영화를 만들어낼 독립 제작사들이 있었다. 이른바 '빈곤지대poverty row'라 불리던 곳에 염가의 영화를 제작할 리버플릭(1935), 모노그램(1931), PRC(Producers Releasing Coporation, 1939) 등의 영화사들이 있었다.

B영화의 현실화는 그런 점에서 1930년대, 불황시대의 유효수요 부족으로 관객동원의 감소를 막기 위해 할리우드가 동시상영용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이다. B영화는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극장이 두 편의 영화를 한 편의 가격에 제공할 필요로 고안되었다. 동시상영용 B영화는 가능한 빨리 찍고(quickies), 싸게 찍는(cheapies) 영화들이어야만 했다. 모든 메이저 영화사가 B부서를 개장했고, 배급업자의 주문에 따라 값싸고 빨리 찍는 저렴한 영화들이 양산됐다. 화려한 할리우드가 위기에 처하면서 '빈곤지대' 또한 활력을 찾았다. 실제로 193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75%가 B영화들이었고 대략 4천편의 영화가 이 시기에 나왔다.

B영화의 전성시대

B영화들 대부분은 100,000만 불미만의 제작비에 2-3주 이내의 촬영으로 만들어졌다. 폭스사의 경우 B부서에서 1년에 24편의 B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B영화 전담 프로듀서뿐만 아니라 ‘빈곤지대’의 독립영화사들이 끊임없이 B영화를 찍어냈고, 이들 영화는 메이저 영화사의 배급라인을 통해 모든 극장에 유통, 배급되었다. 가히 B영화의 전성기였다. 제작만 된다면 모든 B영화들이 당당하게 A영화와 함께 상영될 기회를 얻었다. 부율제로 배급된 A영화와 달리 B영화는 단매로 극장에 배급됐기에, 매매가격 대비 제작비용만 적절하게 맞출 수 있다면 B영화는 언제나 안정적인 수입을 거둘 수 있는 할리우드의 효자종목이었다. 그리하여 전설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염가 영화를 미학의 경지로 이끈 에드가 울머! 그는 유니버설에서 벨라 루고시와 카를로프를 주연으로 <검은 고양이>(1934)를 만들었는데, 단 96,000달러의 예산으로 19일 만에 완성해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의 전설은 유니버설을 떠나 그가 할리우드 사상 가장 가난한 영화사인 PRC에서 다량의 B영화를 제작하면서였다. 그의 최고작 중의 하나인 <우회>(1945)는 65분의 러닝타임에 제작비 2만 불, 촬영기간 5일으로 전무후무한 B 필름 누아르의 전설이 됐다.

당시의 B영화는 작가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저렴한 영화들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창의력과 간결함, 엄격한 것과 하찮은 것의 혼합으로 영화를 생산했는가를 경이롭게 보여준다. 거대 스튜디오의 B부서와 독립영화사는 신속하게 저렴한 영화를 생산하면서, 심지어 말 한 마리로 악당과 영웅이 말을 번갈아 타며 추적을 벌이는 웨스턴을 촬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이 촬영하던 세트를 철거하기 전에 몇 시간의 도둑촬영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수일이 걸릴 장면을 단 몇 시간에 롱테이크로 끝내버리는 기적적인 성공을 보여준 작품들이 B영화였다. 뉴딜부터 2차대전기에 걸친 10년간은 할리우드의 황금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B영화의 마지막 활황기였다. 대략 3백 50명 정도의 B영화감독들이 있었고, 그 대부분은 지금은 이름도, 제목도 알 수 없는 감독들, 영화들로 남아 있다. 이런 거대한 익명성이야말로 B영화의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B영화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A와 B의 구분 또한 흐릿해진다. 모노그램, 리퍼블릭은 1950년대에는 A급 영화의 제작을 단행했고 B영화들 또한 이전의 동시상영용 영화로 안정적인 배급망을 통해 유통될 수 없었다. 이런 애매함은 할리우드가 독점금지법에 따라 조금씩 붕괴하고, 텔레비전에 관객들을 빼앗기고, 컬러영화를 단행하면서 빠른 촬영의 저예산 영화를 만들 여유가 없어지면서 확대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전후의 할리우드에서 새롭게 데뷔한 감독들은 A영화와 B영화의 경계가 소멸된 지점에서 새롭게 영화작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조셉 로지는 RKO에서 <녹색 머리의 소년>(1948)으로 데뷔했고, 니콜라스 레이 또한 <그들은 밤에 산다>(1948)로 첫 영화를 만들었다. 비록 이러한 영화들은 A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의미의 B영화라 부르기도 망설여진다. 실제로 1948년 이래, 촬영소 축소에 따라 B영화 제작에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텔레비전으로 이동했고, 텔레비전용 B영화라 부를법한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촬영소 부지의 매각에 따라 할리우드의 B부서 또한 사라졌고, 남겨진 것은 속칭 ‘2류 영화’들로 이전의 B영화들은 통속적인 상업영화와 혼용되어 불려졌다. 촬영기간의 제한, 저예산, 짧은 러닝타임의 단순함의 미덕은 사라지고 동시상영용 영화의 전국적인 안정적 배급망 또한 붕괴하면서 B영화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위기와 더불어 시련을 겪었다. 할리우드의 파산과 경매라는 가혹한 조건에서 새롭게 영화를 만들어야만 했던 현대적인 작가들이 이 시기에 등장한다. 이른바 전환기의 시기에 넓은 의미의 B영화를 계승한 이들은 단연 조셉 루이스, 로버트 알드리치, 사무엘 풀러, 리처드 플레이셔와 같은 이들이었다.

B영화를 계승한 장인

리처드 플레이셔는 이들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덜 알려진 감독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영화가 유명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한 <바이킹>(1958)이나 조 단테가 리메이크를 해서 유명해진 <마이크로 결사대>(1966), 쥘 베른의 고전 과학소설을 영화화한 <해저 2만리>(1954),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원래 연출을 하기로 했던 <도라! 도라! 도라!>(1970), 그리고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출연한 <레드 소냐>(1985)와 같은 후기의 작품들은 상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B영화의 작가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작품은 기억하지만 리처드 플레이셔라는 작가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는 대단히 모호한 작가로 남았다. 비평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은 적 또한 없다.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간과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전속되어 장르를 넘나드는 지극히 범용해 보이는 작품들을 양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47년에서 1951년까지 그는 RKO에서 9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이어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초까지는 폭스사에서 1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범죄영화, 서부극, SF, 모험영화, 성서영화 등 그가 손을 대지 않은 장르는 없었고(거의 대부분은 영화사가 그에게 의뢰했던 결과이다), 그리하여 그의 작가적 개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시대적으로 보자면 다채로운 장르를 섭렵한 로버트 와이즈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탁월한 대중영화를 만든 것도 아니다. 리처드 플레이셔의 독특함은 언제나 장인처럼 주어진 영화들을 만들면서 모든 영화들에서 혁신적인 기술과 발명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들은 플레이셔의 영화들 중에서 B필름 누아르에서 연원한 범죄에의 세심한 탐구(<난폭한 토요일>(1955), <강박충동>(1959), <보스턴 교살자>(1968), <릴링턴가의 살인>(1971), <라스트 런>(1971), <두목은 죽었다>(1973)), 시대극의 재건축(<바이킹>), SF적 상상력의 현실화(<소일렌트 그린>(1973))로 유명한 작품들이다. 이들 영화들에서는 프리츠 랑, 스탠리 큐브릭, 오토 프레민저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냉혹한 스타일이 느껴진다. 플레이셔의 영화는 교훈적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냉담하고, 문명화에서의 질병에 대한 무자비한 진단과 고독한 인간의 삶, 혹은 사회적 부적응을 보이는 인물들의 병리학적 행위들에 주목한다. 그런 점에서 그를 돋보이게 한 영화들은 범죄영화들이다. 가령 <강박충동>에서는 사회적 도덕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자본가 계급의 두 학생이 니체 이론에 매혹을 느껴 자신들의 우월함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소년을 살해하고 경찰과 게임을 벌인다. 반면, <릴링턴가의 살인>에서는 전쟁을 치른 고독한 노년의 남자가 어떻게 끔찍한 살인을 거듭하는가를 보여주는데, 고립된 장소에서의 압박감이 느껴지는 카메라의 배치, 임상실험에 가까운 인물의 행태를 담아내는 무서운 시각으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플레이셔의 영화는 범용한 장면 하나하나가 더해지면서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밀도와 강렬한 텐션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경이로움에 빠져들게 한다. 그것은 때로는 <강박충동>에서처럼 살인이라는 액션의 주요사건이 결코 보이지 않으면서도 화면에 운동의 소용돌이를 휘몰아치게 방식이다. 액션을 대신하는 법정드라마의 형식이 이 감독에게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험적인 정신과 스타일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아무래도 <보스턴 교살자>일 것이다. 이 영화는 상이한 시선과 응시로 구축된 작품으로, 전반부가 연쇄살인범을 잡으려하는 경찰의 탐색이 다큐멘터리 터치로 그려져 있다면 후반부는 살인마의 도덕적 딜레마와 심리학적 질문이 주관적인 상상과 결합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신적이라 할 만한 분할화면의 도입은 동시대 로버트 알드리치나 1970년대 이래 브라이언 드 팔머의 전매특허라 여겼던 활용을 앞서는 것이다. 플레이셔는 이 영화에서 살인마로 분한 토니 커티스의 연기 지도에 비디오를 활용했고 라스트의 백색의 방을 구현하기 위해 벽을 발광시켰다고 한다. 플레이셔의 탁월함은 물론 이런 이야기나 소재의 능수능란한 연출이나 기술적 혁신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인물들(그들이 비록 살인자나 악인일지라도)에 감정의 깊이를 부여한 감독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작품들에서 인물들도 훌륭하지만, 특히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젊은이들이 맹위를 떨치던 시대에 <라스트 런>이나 <두목은 죽었다>에서 그가 보여준 늙음을 의식한 인물들, 인생의 만년을 맞이하는 사내들의 모습은 깊은 울림을 준다.

엄밀한 의미에서 리처드 플레이셔는 전형적인 B영화감독은 아니다. 1950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B영화의 대표주자는 고전적인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이질성의 미학을 선보인 조셉 루이스였다. 플레이셔는 그러나 B영화의 소멸기에 영화를 시작해(그것도 디즈니에서의 <해저 2만리>라는 A급 영화가 그를 세상에 작가로서 알린 첫 성공작이었다), B영화를 계승한 장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B영화의 소멸의 시기에 그 조건이 없어진 상황을 두고 B영화를 재검토한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A와 B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시기에 B영화의 시스템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시도를 벌였다. 소재와 장르를 불문하고 다층적인 의미와 깊이를 담아내는 탁월한 화면의 구성, 제한된 조건에서의 기술적 혁신들은 B영화의 미덕이었다. 리처드 플레이셔의 영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그의 영화를 새롭게 보는 것은 특정한 조건에서 나온 B영화에의 긍정의 시도이다. 아직 제 위치를 부여받지 못한 리처드 플레이셔의 영화는 여전히 발견 중에 있다.

글/
김성욱(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B영화의 제왕이라 불린 로저 코먼의 자서전 제목은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 푼도 잃지 않았는가'입니다.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손해를 보지 않았는가가 핵심입니다. 돈을 버는 일보다 영화를 많이 찍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로저 코먼은 메이저 영화사들이 스튜디오를 매각하고 자사의 영화관을 정리하던 1940년대 말에 영화계에 들어섰습니다. 당시 영화관들은 생존전략으로 특색 있는 작품들을 찾고 있었고 그런 요구에 재빨리 대응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작가들이 일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던 시기입니다. 그렇게 로저 코먼의 전설적인 영화적 삶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B영화의 작가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로저 코먼을 통상적인 의미의 ‘개인적’인 작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후대의 평가야 물론 작가라는 개인의 이름으로 작품들을 선별하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B영화의 작가들은 당대에 언제나 작품의 뒤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익명적‘인 작가들이었습니다. 그는 3백여 편의 영화에 제작자로서 이름을 올렸고, 갖은 방식으로 영화에 관여했습니다. 그가 관여하는 방식, 혹은 그의 주변에 몰려든 이들과의 관계에서 볼 때 로저 코먼은 개인으로 호명되기 보다는 집단체, 결합체, 혹은 운동체로서의 작가라 부를 수 있습니다.

1960년대에 그의 주변에는 영화계 입문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를 위시해 잭 니콜슨, 데니스 호퍼, 피터 폰다, 찰스 브론슨, 로버트 드 니로, 토미 리 존스, 워렌 오트, 로버트 타운, 몬티 헬만, 피터 보그다노비치, 마틴 스콜세지, 조나단 드미, 제임스 카메론, 조 단테, 론 하워드, 존 세일즈 등이 코먼의 영화학교 문하생으로 성공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코먼은 그들에게 영화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들은 나중에 할리우드를 위기에서 구해낸 뉴시네마의 기수들로 성장합니다. 코먼은 제작 외에도 해외의 예술작품을 미국에 공개하는 활동도 벌여 국제적인 영화의 이식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저예산의 한계적인 영화를 만들었을지언정 코먼은 모든 영화, 모든 장르에 손을 대어 세상을 여행했고 영화계가 위기에 처한 순간에 구제를 시도한 영화인이 되었습니다.

이번 ’B영화의 위대한 거장 특별전‘에서 소개하는 리처드 플레이셔, 테렌스 피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처드 플레이셔는 로버트 와이즈와 더불어 모든 장르영화에 손을 대었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만들고 오슨 웰즈에서 아놀드 슈왈제네거까지 다양한 배우들을 섭렵한 다채로운 작가입니다. 로버트 알드리치, 사무엘 풀러 등과 더불어 리처드 플레이셔는 1950-19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재발견해야만할 위대한 작가입니다. 비록 공포영화에 전념했지만 1930년대 미국공포영화와 1970년대 새로운 공포영화의 가교가 되었던 해머 공포영화의 걸출한 작가 테렌스 피셔도 있습니다. 이들은 영화사의 정식 교과서에 제대로 등재되지 못한 인물들이지만 영화를 위기에서 구한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글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대표 최정운 www.cinematheque.seoul.kr) 4 9일부터 5 8일까지 한 달간  ‘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전이란 제하로 리처드 플레이셔, 로저 코먼, 테렌스 피셔 이 세 감독의 대표적인 B영화들을 조명해보는 특별전을 개최한다. 상영작은 총 18편으로 리처드 플레이셔의 영화 9, 로저 코먼의 영화 3, 테렌스 피셔의 영화 6편을 소개한다.

B
영화는 1930~40년대 당시 관객 감소를 우려한 미국의 스튜디오들이 한 번에 두 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동시상영을 기획하면서 나온 용어다. 메이저에서 잘 나가는 감독과 배우를 고용해 만든 A영화와 상대적으로 예산이 적고 한물간 스타나 신인배우를 기용해 만든 마이너한 영화를 하나로 묶어 상영하게 된 것. 그래서인지 B영화는 졸속 제작한 작품이라는 인식을 관객들에게 심어 놓았다. 하지만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 대한 독점금지법과 컬러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선호로 인해 전통적인 개념의 B영화는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이러한 이유로 로저 코먼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B영화라고 소개하는 매스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은 B영화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감독들이다. 리처드 플레이셔와 로저 코먼과 테렌스 피셔는 영화 역사상 가장 오락적이면서 가장 막 나가는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유명하다. 저예산 졸속의 B급이 아닌 메이저에서 허용하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제작환경을 최대한 활용한 영화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열띤 환호를 받고 있다. 이들이 만든 영화는 각자의 개성도 뚜렷해서 B영화라는 범주로만 묶일 뿐 작품의 성격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리처드 플레이셔는 서구사회의 이면을 건드린 테마로 주목 받았으며, 로저 코먼은 메이저에서 독립한 영화가 가져야 할 창조적인 연출과 손해 보지 않는 제작방식을 확립했다. 또한 테렌스 피셔는 익숙한 괴수물을 가져와 자극적인 소재와 충격적인 연출을 가해 독특한 영화적 기운을 창조하기도 했다. 이들이 후대에 미친 영향도 막대해서 리처드 플레이셔의 <닥터 두리틀>(1967) <레드 소냐>(1985) 등의 작품은 리메이크되어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로저 코먼의 경우, 그의 작품을 통해 영화를 배웠던 마틴 스콜세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잭 니콜슨 등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의 위치에 올랐으며, 미술과 세트가 돋보이는 테렌스 피셔 영화의 특징은 현대 공포물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쳐 현대 공포물에 공통적으로 인용되는 요소가 되었다.


이번 영화제를 기획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는 이번 ‘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전은 각기 다른 개성과 색깔, 스타일을 지닌 감독들의 세계를 만나며 색다른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라며 주류 할리우드와는 다른 불순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소위 B영화의 진가, 할리우드의 어두운 그림자를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말했다.

한편 이번 영화제에서는 가장 많은 상영작을 선보이게 된 리처드 플레이셔를 중심으로 이러한
B영화들이 현대영화사에 미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강연도 마련한다.  B영화와 리처드 플레이셔’란 주제로 마련된 시네토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지평이 넓은 B영화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