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이하 ‘<악마가>’)는 두 가지 이유로 기억할만한 영화이다. 최근 작고한 시드니 루멧의 유작이라는 사실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 명철한 이야기꾼 감독이 현대적 내레이션 방식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다루는 능숙한 솜씨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는 점이 두 번째이다. <악마가>는 멀티플 캐릭터의 시점으로 재구성된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 방식의 이야기이다. 내러티브는 각자의 삶에서 궁지에 몰린 앤디(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와 행크(에단 호크) 형제가 모의한 보석상 강도의 날을 중심으로 앞과 뒤의 시간들이 조금씩 살을 붙여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빚에 찌들어 있고 건사해야 할 아이가 있는 행크, 가족과 일터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앤디는 강퍅한 삶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피안의 세계를 찾아 부모님의 보석상을 털기로 한다. “여드름 짜는 것처럼 간단한”줄 알았던 거사가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뒤늦게 이를 수습하려는 형제의 좌충우돌은 점입가경이 되어간다.

<악마가>는 신문 사회면에 실릴법한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시드니 루멧의 장기가 제대로 드러난 영화이다.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1989)을 연상시키는 최상급의 강도 스릴러인 동시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도록 만드는 긴장과 서스펜스는 <형사 써피코>(1973) <개 같은 날의 오후>(1975) 같은 루멧의 전성기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켈리 매스터슨의 예리한 각본은 매사가 한심하고 절망적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모님의 가게를 터는 자식들, 세상살이의 황폐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형 앤디, 형수와 바람 난 시동생 행크, 가족의 죽음을 빌미로 행크를 협박하는 남자, 세상은 사악한 곳이라고 주문을 외듯 읊조리는 장물아비가 주체할 수 없이 무너져가는 세계의 내면을 스케치한다. 보석상 강탈이라는 중심 사건을 축으로 시간을 재배열하는 내레이션은 사건의 반복과 이야기의 틈새를 조금씩 메워가면서 깊어지는 이야기 방식을 택함으로써 파멸의 무드를 점진적으로 상승시켜 간다.



시간과 인물이라는 벡터를 통한 조각난 사건들의 종합으로 거대한 스토리의 맥락을 재구성하는 현대적 스토리텔링의 트렌드를 수용한 <악마가>는 그러나 부분들의 단순 종합 이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라는 제목 앞에는 ‘아마 당신은 30분 간 천국에 있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생략되어 있다. 애석한 것은 우리가 천국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짧고 달콤한 천국이 지나간 뒤 길고 황막한 지옥이 계속된다면? 시드니 루멧의 기념비들이 항시 그랬던 것처럼 <악마가>에서도 좌중의 호흡을 장악하는 배우들의 앙상블이 빛을 발한다. 냉정과 흥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앤디, 특유의 유약함으로 행크의 여린 내면을 묘사하는 에단 호크, 자애로움과 완악함을 한 몸에 담은 부조리한 가부장 알버트 피니의 존재감도 잊을 수 없다. 특별히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연기하는 앤디는 모호하며 비밀스러운 인물인데,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그의 절규에서는 소외와 소통불능을 남모르게 견뎌 온 절망감이 정밀하게 읽혀진다.



<악마가>는 악행의 자기 복제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한 부도덕한 형제의 범죄로부터 확산되는 부조리한 악행은 온 세계를 음울하게 물들인다. 평범한 가족의 삶을 패륜과 범죄의 수렁으로 인도하는 이 음울한 암각화는 하나의 행위와 감정을 낳은 다채로운 맥락을 탐사하는 다중적 심리 드라마이고 미국적 삶의 근간이라 할 가족의 붕괴를 다룬 가족 드라마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고 물화된 삶에 대한 비판이 주조음을 이루는 사회 드라마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청색 톤의 이미지는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무간 지옥으로 이 세계를 묘사한다. 무엇보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세상에 대한 적의를 거두지 않았던 반골 감독 시드니 루멧이 마지막 순간까지 탄력적으로 현실을 읽어 내고 그에 부합하는 적확한 이야기의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글/ 장병원(서울가족영상축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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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루멧의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1960)는 사실 정확한 제목은 아니다. 이외에도 <기타 치는 사나이> <말론 브란도의 도망자> 등으로 소개가 됐는데 이들 제목 모두 영화의 본질을 압축했다기보다는 극중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사비에르의 특징을 가져와 제목으로 둔갑시킨 경우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Orpheus Descending>을 테네시 윌리엄스 본인이 직접 각색한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는 당시의 미국 사회를 겨냥해 관계의 부조리를 묘사한 거대한 우화다.


기타를 애지중지 아끼는 사비에르는 뱀가죽 재킷을 입고 다녀 ‘스네이크 스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뉴올리언스에서 악사생활을 하던 중 예기치 않은 소동에 휩싸여 새로운 도시로 떠나던 중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 기거하게 된다.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옷가게 점원 일자리를 얻게 돼지만 그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오래 전 병들어 누운 남편의 감시 속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토렌스 부인(안나 마냐니)은 사비에르의 처지에 호감을 느낀다. 아니 그를 위안의 안식처로 삼으려 한다. 그러자 남편의 의심의 눈초리가 점점 이들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은 대개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속한 환경과 시대에 굴절된 양상을 보인다.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비에르와 토렌스 부인의 사랑이 극의 중심을 차지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사비에르는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마을의 기득권 세력, 즉 백인 남자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그와 가깝게 지내는 토렌스 부인을 방해하기 위한 남편은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세를 규합하려 든다.



반목하는 집단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시드니 루멧은 인물의 설정과 공간의 활용 등을 통해 은근한 방식으로 이를 시각화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시각적 콘셉트는 ‘고립’과 ‘분할’이라 할만하다. 고립의 측면에서 사비에르와 토렌스 부인은 확실히 옷가지에서부터 남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사비에르의 뱀가죽 잠바는 일상복 일색인 마을에서 어딜 가나 튀기 마련이고 검은 옷으로 일관하는 토렌스 부인의 경우, 마치 상복을 입은 듯 매사가 침울하고 음산하다. 그러다보니 공간 역시도 철저히 분할된 형태를 보인다. (그것은 희곡이 원작이기에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매장을 가운데 두고 사비에르와 토렌스 부인은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매장의 사각지대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고, 철창 패턴으로 이뤄진 이층의 방에서 토렌스 부인의 남편이 기거하는 식이다.

기득권은 기득권끼리, 소외된 이들은 소외된 이들끼리 그들만의 공간을 점유하지만 결국 공간의 싸움에서 사비에르는 그 자신이 이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백인의 룰을 따르지 않을 경우, 이방인인 사비에르가 차지할 자리 따위는 없다. (그가 왜 뉴올리언스에서 쫓겨났는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이런 경험이 처음일 토렌스 부인에게 몸을 사리는 사비에르의 입장은 이해 불가능한 처사로 비친다. 여기서 시드니 루멧의 혜안이 돋보이는 이유는 토렌스 부인 역에 미국인이 아닌 이탈리아 배우 안나 마냐니를 과감히 캐스팅한 까닭이다. 외부인이면서 (극중 그녀의 영어 연기는 그녀가 미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늘 남편의 감시에 있었던 탓에 집 바깥에서 벌어지는 소동의 메커니즘을 알 수 없는 그녀는 결국 사비에르를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다.

영화가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면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를 빨갱이 사냥에 대한 은유로 읽는 것도 가능하지만 사실 이와 같은 내용은 시드니 루멧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목격되는 주제의식이라 할만하다. 그런 점에서 시드니 루멧이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영화화한 이유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루멧의 영화적 제재는 늘 거대한 시스템에 편입하지 못하는 이들의 비극이었다. <뱀가죽 옷을 입은 사나이>를 시드니 루멧의 최고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영화적 특징을 드러내는 단적인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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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루멧 추모 상영회를 준비하며...


지난 4월, 시드니 루멧이 세상을 떠났다. 다작의 감독으로 멜로드라마, 코미디, 풍자극, 형사물, 법정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 손을 대었던 루멧은 미국 사회와 법적 시스템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생전에 사회파 감독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24년 필라델피아에서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 시절이 그러했듯 대공황기의 아이로 성장했다. 사회적 문제에 민감했던 것은 태생적이었고 인간의 의식과 조건, 사회적 불평등에 관심을 보이면서 특히나 인간을 구속하는 형사 사법제도에 흥미를 느꼈다. 루멧의 영화는 정서적이지만 감상적이지는 않다. 그가 시스템에 관심을 가졌던 탓이다. 좋은 영화는 ‘보이지 않는 스타일’을 지녔다고 늘 생각했기에 그는 불필요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과장된 스타일을 꺼렸다. 배우들을 존중하는 것이 그의 덕목이었다.

그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영화계에 뛰어들기 전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라디오 방송과 극단에서 실질적인 경력을 쌓았다. 어린 시절에는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고 영화에도 출연했다. 처음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배우로 시작해 연출가로 전환했는데,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두각을 보여, 이어 1957년에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통해 정식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가 영화계에 뛰어든 1950년대는 미국 영화계 전체가 격변을 치르던 시기였다. 동부 연안파 감독의 엘리아 카잔, 가족 멜로드라마를 혁신한 니콜라스 레이, 파괴적인 에너지를 몸에 끌어들인 로버트 알드리치와 사무엘 풀러 등 미국영화계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데뷔작인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미국적 액션의 형식에 재판영화라는 합의적 모델을 선보인 것으로 각별하다. 핵의 공포를 다룬 서스펜스 드라마 <미지에의 비행 Fail-Safe>(1964), 전쟁의 후유증을 다룬 <전당포>(1964), 부패한 경찰의 실체를 다룬 <형사 써피코>(1973) 등에서 루멧은 라디오, 연극무대, 텔레비전에서의 활동에서 체득한 꼼꼼한 리허설, 엘리아 카잔과 더불어 배우의 적극적인 연기를 뽑아내는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다.

사회적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뤄 '최고의 뉴욕영화'라는 찬사를 얻은 작품은 단연 <뜨거운 오후>(1975)이다. 1972년 8월 22일에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영화화했는데, 일종의 도시형 부조리극이다. 은행 강도와 인질, 그들을 둘러싼 경찰의 하루 동안의 대치 상황이 이야기의 전부이지만 단순한 설정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시간을 더해가며 사회적 문제로 확장된다. 돈을 강탈하려 했던 주인공 서니(알 파치노)는 인질을 볼모로 경찰과 대치하면서 미디어를 조롱하고, 경찰을 꼼짝 못하게 만들면서 마치 록스타처럼 대중을 선동한다. 거리의 공간은 집회가 벌어지는 아고라, 혹은 법정의 공간처럼 기능한다. 미디어가 등장하고, 군중들은 배심원처럼 사태에 참여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 한다. 하지만 FBI가 개입하면서 토론과 변증의 공간은 공공적인 폭로의 공간으로 변질된다. 그런 가운데 미국식 민주주의의 좌절이 그려진다. 아티카 대폭동(1971년 9월, 뉴욕의 아티카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1,200여명의 죄수들이 교도관을 인질로 잡고 인권유린에 항의하는 폭동이 벌어졌었다), 워터케이트 사건 이후의 들끓는 미국사회, 그리고 케네디, 로버트 존, 마틴 루터 킹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폭력과 암살의 정황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은 개 같은 날이 된 것이다. 이런 비판적 경향은 텔레비전이 지닌 강대한 힘과 인간의 추악함을 그린 <네트워크>(1976)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1982년 루멧은 부정의료 사건과 싸운 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린 <폴 뉴먼의 심판>(1982)으로 다시 법정 드라마로 되돌아왔다. 90년대에 들어서 <글로리아>(1999)같은 범작들도 만들긴 했지만 루멧은 유작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2007)로 잉마르 베르히만의 유작 <사라방드>(2003)가 보여준 '말년의 양식'에 비견할 말한 작품을 남겼다. 보석 강도의 장면에서 시작해 사건은 그것이 전후하는 시간 속에서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확장된다. 중산층 가족의 내면에 자리한 광기와 불안, 폭력과 섹스가 변화하는 사회와 가족의 관계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으로 그려진다. 돈이 부족한 형제가 부모의 가게를 강탈하는 용의주도한 범죄를 벌이면서 점차 도시 전체에 만연된 자본주의적 질서와 개인주의의 역학이 서서히 부각된다. 그런 세계에서 고립된 인간에게 출구란 없다. 극중의 대사를 옮기자면 그에게 세상은 사악한 곳이었다.

글/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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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어떨 때 ‘영화적’이라는 것의 의미를 실감하게 되는가.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2010)의 도입부는 문자 그대로 ‘영화적인 것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피아노 연주가 흐르는 아늑한 밤, 비가 오고 있다. 거리를 비추는 나트륨 등의 따뜻한 빛은 비의 차가운 질감과 대비된다. 불빛과 함께 차가 도착하고 우산 쓴 남자가 사진관의 벨을 누른다. 그는 (‘죽은 자’의 사진을 찍어줄) 사진사를 찾는데, 사진사는 멀리 출장 중이다. 우연히 지나가던 남자가 젊은 사진사를 추천한다. 젊은 남자 ‘이작’(리카르도 트레파)은 그렇게 해서 죽은 자의 초대를 받는다. 슬픈 운명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단 2분 30초에 걸쳐 영화는 느와르, 드라마, 미스터리로 시시각각 변하고, 내 가슴은 설렘을 거듭한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는 그 짧은 도입부만으로 나를 영화적 순간에 취하게 한다.


사진은 ‘현존을 영원화 하는 작업’이다. 피사체는 시간이 흘러도 늙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사진을 통해 그 모습 그대로의 피사체와 영원히 만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앙젤리카의 가족이 원하는 건 조금 다르다. 그들은 앙젤리카의 아름다운 시신을 사진에 담아 영원히 간직하려 한다. 비록 그녀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으나 그녀는 이미 죽은 몸. 그렇다면 죽음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걸까, 아니면 죽지 않았다는 헛된 망상을 품겠다는 걸까. 벽을 따라 둘러앉은 가족들은 앙젤리카와 그들 사이에 위치한 사진사가 그들이 의뢰한 작업을 수행하는 걸 바라본다. 그들은 몇 분 작업의 결과물로 ‘영원하는 현존’을 얻기를 희망한다. 사진사가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원하는 물건을 얻을 것이다. 문제는 사진사에게 일어난다. 카메라에 잡힌 앙젤리카가 그를 향해 눈을 뜨며 방긋 웃는 것 아닌가. 죽은 자가 움직이고 있다니!


움직이는 피사체는 사진이 아닌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배우는 인물을 필름 속에 남긴다. 나는 영화가 ‘인물을 유령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름 속에서 인물이 유령처럼 떠돌거나 쉬고 있을 거라 여긴다. 영사기가 돌아갈 때에야 인물이 쉬던 몸을 이끌고 재등장해 움직이는 거라고 짐작한다. 배우의 영원한 몸짓이 아닌 유령이 된 인물의 피곤한 몸짓을 본다는 거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기쁨 없는 거리>(1925)의 첫 몇 분을 보라) 영화를 본다는 건 환영을 보는 것이다. 이작은 환영과 사진 사이에 묶인 인물이다. 그는 포도밭으로 나가 일꾼들의 몸을 찍기를 즐기는, 그러니까 보이는 것에서 진실을 구하기를 갈망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환영이 나타났으니 이거 큰일인 거다. 게다가 그의 위치가 그를 더욱 환장하게 만든다. 주변인들은 유령을 알아볼 리 없건만, 그는 유령에 사로잡혀 있고, 관객은 유령과 어울려 지내는 인물을 바라보며 유령‘성’을 인식한다. 결국 죽어나는 건 인물이다.


영혼의 무게는 얼마쯤 될까. 이작이 묵는 하숙집을 방문한 중년의 여자는 “물질은 영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몸속에서 영혼이 차지하는 무게는 21그램 정도라고 주장하는 자는 바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작의 영혼이 떠날 때 그의 몸이 털썩 쓰러지기에 이른다. 몸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건 바로 영혼이다. 얼마 후, 우리는 죽은 이작이 누운 방의 바깥에서 스크린을 바라본다. 맞은편 베란다 너머로는 햇살이 가득한데, 죽은 자와 현실 사이에는 그가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이어 여주인이 창을 닫자 검은 화면만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현실은 저 너머에 있고, 죽은 자는 사진과 영화 사이에서 목숨을 거두며, 우리는 스크린 밖에 남는다.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인가.

글/
이용철(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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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샌닥의 동명 그림책을 영화화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2009)는 제작 단계부터 악소문에 시달린 영화였다. 그것은 모두 연출자인 스파이크 존즈 감독에 대한 것이었다. 원작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바꿔 모리스 샌닥을 분노케 했다는 얘기부터 너무 난해하게 찍은 까닭에 제작자가 직접 편집에 나섰다는 소식까지. 일단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관련한 오해부터 풀자면, 스파이크 존즈를 연출자로 결정하는데 가장 목소리를 높인 인물은 바로 모리스 샌닥이다. 샌닥은 오래전부터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실사 영화를 기획해왔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과거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이에 실망한 샌닥은 괴물의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실사가 낫다고 판단했다. 단, 실사 화면에 CG로 처리하는 것이 아닌 라이브 액션이어야만 했다. 샌닥의 기획 의도처럼 스파이크 존즈 역시 애니메이션을 주장하는 제작사에 맞서 실사를 주장하며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을 이루었다.

영화화된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스파이크 존즈의 색깔이 원작의 아우라를 뛰어넘는다. 수공업적인 형태의 제작 방식, 즉 사람이 괴물의 탈을 쓰고 연기함으로써 풍겨나는 인간적인 따뜻함은 이 영화의 핵심 정서라 할만하다. 스파이크 존즈가 거대한 인형의 형태로 구현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자연스러울까 걱정의 시선이 없었던 게 아니다. (바로 그 이유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감독에 대한 악소문을 키운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탈을 쓰고, 여기에 미세한 표정과 행동을 CG로 더해 되살려낸 괴물의 실체는 실제 존재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스파이크 존즈가 죽어도 라이브액션을 고집한 이유를 알만한 대목이다.

원작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장난이 심해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고 방에 갇힌 맥스(맥스 레코즈)가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갔다 와 보니 따뜻한 밥이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 전부다. 간단한 원작의 이야기와 샌닥이 그린 20장 정도의 그림을 토대로 101분의 상영시간을 채우는 건 순전히 맥스와 괴물간의 소통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다. 맥스와 괴물 모두 친구가 된 기쁨에 못 이겨 숲을 파괴하고, 놀이를 한답시고 일부러 나무에 생채기를 내며, 피곤에 못 이겨 잠을 잔다는 것이 탑을 쌓듯 서로 뒤엉키는 등 이건 아이들의 감수성이 아니면 도저히 구현 불가능한 디테일이다. (안 그래도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어댑테이션>(2002) 등은 모두 아이들처럼 자기만의 동굴 속에 갇혀 놀기 좋아하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소유자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궁극적으로 아동을 타깃삼은 가족영화다. 다만 할리우드가 부러운 이유 중 하나는 가족용이라고 해서 절대 어른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주요한 이미지는 바로 ‘동굴’이다. 이 이미지는 맥스가 계속해서 자기만의 요새 속으로 숨어드는 심정을 대변한다.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맥스나 그들만의 섬에 갇혀 사는 괴물은 어떤 면에서 소외된 자와 닮았다. 그들이 동굴처럼 좁은 곳으로 몸을 숨기는 이유는 고립을 강조해 역설적으로 같이 놀아달라는 항의의 성격을 지닌다. 다른 한 편으로는 소외된 자들끼리 그들만의 이상향을 건설해 고립의 벽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의미도 내포한다. 그래서 맥스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도 괴물들과 함께 그들만의 요새를 건설하려하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대신 맥스는 계획을 철회하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화해하기에 이른다.

스파이크 존즈는 항상 고립된 자들의 이야기를 즐겨 다뤄왔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크레이그 슈와츠(존 쿠삭)와 로테 슈와츠(카메론 디아즈)는 부부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심적 공허감으로 외로운 인물들이었고 <어댑테이션>의 찰리 카우프먼(니콜라스 케이지)은 대중들이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열 증세를 겪는 무명작가였다. 결코 많지 않은 작품이지만 스파이크 존즈의 필모그래프를 관통하는 주제는 일관됐다. 소수자들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나오라는 격려이고 다수자들에게는 소수자에게 좀 더 손을 뻗어줄 것을 호소하는 목소리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도 다르지 않다. 자기 안팎의 고립을 뛰어넘어 서로 소통하자는 주제를 설파한다. 가족 해체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는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유효한 메시지인 것이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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