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Feature'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1.14 2014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시작하며
  2. 2014.01.13 [개막작] 페이 무의 <작은 마을의 봄>

 

 

2014년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1914-1977)의 탄생 백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올해 랑글루아 백주년 행사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함께 벌일 예정이다. 랑글루아는 책에서 언급된 영화들, 영화의 역사에 그저 이름만 있던 영화들을 살아있게 했다. 시네마테크의 상영 덕분이다.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의 아버지이자 영화 프로그래머란 직업의 창시자로, 영화의 아이들(cine-fils)이 그러하듯 적어도 이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은 어떤 의미로든 그의 아이들이다. 그의 특별함은 탁월한 열정뿐만이 아니라(그는 시네마의 종사자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열정passion이라 여겼다), 그것을 어떻게 전시하고 조직하는가에 있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의 역사에 정통하는 것만이 아니라 특별한 재능을 요하기 때문이다.

 

랑글루아는 영화와 관련해 손쉬운 합의를 도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영화의 종사자들에게 무조건적인 우정을 보내기도 했지만, 또한 치명적인 증오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 치명적 결과는 알다시피 1968년에 있었던랑글루아 사태로 벌어졌다. <랑글루아의 유령>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클로드 샤브롤이 지적하듯이랑글루아 사태는 그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명성, 그리고 그가 필연적으로 양산한 적들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영화의 역사는 친구만이 아닌 적들과의 전투의 흔적들이다. 우리의 동료이자 친애하는 적들. 자연스럽게 어떤 친구들은 적으로 돌아서고, 또 반대로 그를 시기했던 이들이 친구가 되기도 했다. 가령,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못지않은 아름다운 벨기에 시네마테크의 설립 자인 자크 르도는 그의 적대적 경쟁자였다. 물론 나로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와 친구들과의 돈독한 우정이다. 특별히 랑글루아와 그의아이들중의 한 명인 주앙 베르나르 다 코스타(1935-2009)와의 우정의 관계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베르나르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를 포함해 페드로 코스타 등 포르투갈 감독들이 존경했던 포르투갈 시네마테크의 관장이었다. 베르나르는 젊은 시절에 리스본에서 영화사의 위대한 고전들과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5-60년대 리스본에서는 정치적 검열과 문화적 빈곤, 그리고 고립주의 때문에 과거의 영화와 만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1958, 23살의 나이에 그는 처음으로 파리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를 방문해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의 고백. “극장문을 열고 처음 들어갔을 때의 그 감정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전함 포템킨>, <국가의 탄생>, <일출>, 그리고 <잔다르크의 수난>과 같은, 글에서 많이 읽었던, 사진들로만 보았던 영화들을 내 눈앞의 스크린으로 마침내 보게 되었을 때의 그 감정을?” 영화는 늘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가 의미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았던 영화들을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우리가 기대하는 영화들은 언제나 아직 보지 못한, 하지만 존재하게 될 영화들’(고다르)이다. 그 후, 베르나르는 굴벤키안 문화재단의 영화부문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1973년 랑글루아의 도움으로 리스본에서로셀리니 회고전을 개최할 수 있었다. 리스본의 시네필들은 랑글루아가 대동한 로셀리니를 극장에서 만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무방비 도시>가 상영되는 오프닝 행사에서는 상영 후에 기립박수와 함께자유 만세파시즘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난무했다고 한다.

 

이런 훈훈한 우정에 더해 나로서는 그들의 우정을 넘어선 차이 또한 주목한다. 거부하고 싶더라도 우리는 결국 랑글루아의 키드이겠지만 서로 다른 상황과 시간대, 조건에 있기에 친화성 못지 않게 거리를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다. 리스본의 베르나르 또한 파리의 랑글루아와는 다른 프로그래밍을 해야만 했다. 마치, 파리의 고다르와 저 남미의 글라우버 로샤가 만났을 때 로샤가 말했던 것처럼. 당신들은 영화를 해체하고 있는데 우리는 해체할 영화가 없으니, 먼저 영화를 구축해야만 합니다! 랑글루아는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 저급한 것과 고급한 것의 문화적 기준을 거부하는 프로그래밍으로 유명했다. 그는 심지어 좋은 영화만 선별한 것이 아니라 아닌 모든 영화를 보존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작품이 좋은지 누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영화사는 그 반대의 진실을 언제나 보여주었었다. 반면, 베르나르는 주로 작가들의 회고전에, 그리고 다소 교훈적이고 영화사의 위대한 정전의 작품을 상영하는 데에 치중했다. 이는 1970년대 리스본에서 절실했던 일이다. 무엇보다 먼저 관객을 늘리고 좋은 작품을 접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걸작들을, 그동안 상영되지 못했던 영화들을 소개하고 보다 근본적인 영화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했다.

 

 

 

파리의 랑글루아는 상상적인 프로그래밍을 꿈꾸었다. 그는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가정한 프로그래밍, 가령 이 가상의 관객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들이 하루 동안 종일 영화를 볼 경우에 서로 이질적인 영화들의 자유로운 배치로 영화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다리를 놓는 비밀스러운 기획을 하기를 원했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영화적 이미지들이 그려내는 비밀스러운 성좌의 구축. 이미 시네마테크를 설립하기도 전에 그는 샹젤리제의 작은 공간을 빌려서시네마 판타스티크Le Cinéma Fantastique’라는 제목의 기획전을 개최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에 랑글루아는 어떤 휴식 시간도 없이 세 편의 장편 영화를 연달아 상영했다. 장 엡스탱의 <어셔 가의 몰락>(1928),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그리고 폴 레니의 <라스트 워닝>(1929). 이 세 편의 정해진 주제와 기획의 의도는 분명치 않다. 그는 한 편의 영화 이전에, 그리고 다음 영화와의 관계에 영화가 놓여지기를 원했다. 라울 월쉬의 영화 전에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를, 미조구치의 영화 다음에 히치콕의 영화를 상영하는 식으로. 계몽적인 기획의 주제보다는 삼투현상에 의한 영화 교육을 믿었던 것이다. 종종 랑글루아의 영화박물관의 전시는 심지어 연대기도 그 어떤 꼬리표도 달지 않은 전시물들의 배치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전통적인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은 랑글루아의 그런 방식의 배치에 비전문가라는 경멸을 표하기도 했다). 만약 이런 식이라면 고물상의 무질서한 배치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라는 비난들. 하지만 상상의 시네마크는 이런 꿈이었다. 어느 날, 루브르 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모든 전시물들의 꼬리표를 제거하고 마음대로 예술품들을 뒤섞어 버린다. 그 다음 날 관객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박물관에 들어와 연대기도, 주제도 무시된 채 무질서하게 배치된 예술작품들을 감상하게 된다. 그런 날들이 오게 되면 더 비밀스러운 예술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친구들이 어떤 일관된 기준 없이 선택한(친구들 스스로 작품을 선택하는 고유의 일관성과 철학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들이 상영되는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열린다. 정말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이 무질서한 영화들의 사이, 우연한 관계와 배치에 더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부탁드린다. 위계와 통제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한계를 두어서는 안 된다. 짐 자무시의 영화가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을 상기하고 싶다. No Limits, No Control.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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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

 

- 페이 무의 <작은 마을의 봄>의 모순과 충돌

 

 

 

침울함 가득한 작은 마을,

일렁이는 정념을 품고 있는 사람들

死氣沈沈的小城, 春心蕩漾的人們

 

지아장커는 <플랫폼>의 선전 책자에 이 글귀를 써 넣음으로써, 작은 마을 속 무너진 성벽 위에서 어찌할 도리 없는 심경을 토로하던 <작은 마을의 봄 小城之春>(1948)의 위원(玉紋) 30년 뒤 펀양(汾陽)의 젊은이들을 오버랩시킨다. <해상전기> <베니스 70 : 미래 재장전>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작은 마을의 봄>의 성벽을 보여줌으로써, 잊혀진영화를 기념하고자 했다. <해상전기>에서는 상하이의 기억과 함께 페이 무(費穆)를 다시 불러들였고, <베니스 70 : 미래 재장전>에서는 넓은 홀 안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작은 마을의 봄>의 공공연한 상연을 꾀한 것이다.

 

지아장커의 이러한 시도는 중국 대륙에서 <작은 마을의 봄>과 페이 무가 너무나 오랫동안 망각과 부정을 강요당하고 있었음에 대한 한 가지 이의 제기라 할 것이다. 오늘날 페이 무의 <작은 마을의 봄>이 중국 영화사상 최고 걸작으로 상찬받고 있음을 생각할 때, 지아장커의 이러한 시도는 의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작은 마을의 봄>은 중국 영화사상 최초로 카메라의 내적인 주관 시점을 확립한 영화이자, 섬세한 묘사, 다원적인 시공간, 단선적인 서사 진행을 깨뜨린 환형 서사 구조를 이룬 영화로서 미학적 성취와 영화사적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들이 페이 무와 <작은 마을의 봄>을 오랫동안 대륙에서 쫓아낸 이유였으며, 페이 무 자신과 <작은 마을의 봄>이 품고 있는 모순이기도 하다.

 

 

 

1932 <도시의 밤 城市之夜>으로 데뷔한 페이 무는 1951년 홍콩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미완성작을 포함해 스무 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고전 문화에 대한 소양을 익혔고, 자라서는 서구식 신식 교육을 받은 그는 동서 문물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지식인 영화 인사로서 상하이 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영화가그림자 연극 影戱으로 불리고 있었고, 서사 면에서는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소설, 극 전통에서 비롯한 전기傳奇 형식이 우세했던 시절, 페이 무는 연극이 문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었듯 영화 역시 독립된 예술 형식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영화가 연극과는 달리 시공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고, 동일한 내용이 어떤 형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무수히 변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감독으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한 가지 원칙으로, 관객을 극 중 인물이 처한 환경에 동화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 영화만의 분위기를 창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카메라 운용, 리듬감, 사운드, 정서를 통해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구체적 방법의 제시로 이어졌다. ‘신영희新影戱라고 명명된 이 주장은 중국의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내용을 통해 중국 영화를 정의하고자 했던 당시의소설적전통에 대해시詩로써 응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은 당시 시대적 정황 속에서 거처할 바를 얻을 수 없었다.

 

페이 무가 영화를 만들던 때는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와 겹친다. 국민당과 공산당을 막론하고 영화는 주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선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당시의 중국 영화들에 대해 내용이 형식을 초월해 버리는 경향이 종종 보인다며 우려를 표하던 그 역시 그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도시의 밤>은 빈민과 부르주아의 명확한 대비를 이루었다며 좌익 평론가들에게 상찬을 받았고, <랑산첩혈기 狼山喋血記>(1936)는 시골 촌부가 늑대를 잡는 이야기를 통해 침략자 일본에 대항하는 항전 선전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고, 돌아온 탕자의 참회와 인류애를 그린 <천륜 天倫>(1935)은 가정 윤리의 회복을 그림으로써 공산당의 계급 투쟁론에 대한 응수로 유교적 전통 윤리관을 강조한 국민당의 신생활운동에 영합하는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작 페이 무는 공산당과 국민당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이 둘 양쪽으로부터 그의 영화는 종종 오해를 받았고, 비난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 어찌 낙담하지 않고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작은 마을의 봄> 직전에 그는 <금수강산 錦繡江山>이란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미완성으로 끝난 이 영화는 항일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며 모두가 하나되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항일 전쟁 승리 후 <금수강산>을 통해 어떤 기대를 표시하고자 했던 시도는 국공내전의 재시작으로 좌절되었고, 아마 이때 그가 맛보았을 피로감이 <작은 마을의 봄> 전반에 깔렸을 터.

 

 

 

1949년 신중국이 성립하고 나서, 주류로 등극한 좌익적 시선이 모든 분야에 걸친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하면서 페이 무는 철저한 부정을 당하게 된다. 이는 <도시의 밤> 이후 페이 무의 영화들이 형식주의로 향하는 퇴보를 계속했다고 보던 3, 40년대 좌익 평론가들의 시선을 계승한 것이었고, 드물기는 하나영혼의 현실주의라며 그의 영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목소리들은 삭제한 것이다. 페이 무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80년대 말이 오기 전까지, 신중국에서 페이무를 언급한 문헌은 단 하나. 1962년에 출판된 청지화程季華의 『중국전영발전사』다. 이 책에서 페이 무는계급 투쟁에 대해 소심하고 불안정한 태도를 보였고, 퇴폐로 기울었다고 서술되었고, <작은 마을의 봄>쁘티 부르주아 계급 예술가로서 페이 무가 지닌 이중성과 허약함을 반영하며, 위대한 (인민) 해방 전쟁 시대에 대한 그의 우울, 모순, 소심함을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책은 비록 청지화의 이름을 달고는 있었으나, 편찬 과정에서 샤옌夏衍을 비롯한 문화부 주요 인사들의 검토와 협의를 일일이 거쳤다고 한다. 중국 영화사의 정본으로 오랫동안 권위를 갖고 있던 이 책은 그러므로 신중국이라는 집단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 되며, <작은 마을의 봄>은 그렇게 70년대 말까지도 대륙에서는 공개적으로 상영될 수가 없었다.

 

그랬던 것이, 80년대 말에 이르러 대륙에서 페이 무와 <작은 마을의 봄>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는 바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먼저 1982년에 이탈리아에서 중국 초기 영화 회고전이 열렸고, 홍콩과 타이완 인사들의 평론과 연구 성과가 소개되었다. <작은 마을의 봄>형식주의는 영화 예술 본연의 가능성을 개척한 시도라 재평가되었고, 화면 중의 정지 화면으로 제시되는난초는 동양화와 고전 시가의 사의寫意를 재현한 것이라며 중국의 전통 미학을 영화 속에 구현한 사례로 상찬되었다. 그리고 2006, 페이 무 탄생 백 주년을 기리는 토론회가 열렸다, 잠깐 동안의 홍콩 피난을 거쳐 신중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돌아갔다가 냉대와 모욕을 당하고 쫓겨났던 바로 그 베이징에서.

 

지역성이 강조되고 다원적인 헤게모니가 공존하리라는 전지구화적 세계 전망 아래, <작은 마을의 봄>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일원론적인 영화 중심에 대항할 중국 영화의중국다움의 지표로 재정의되고 있다. 여기에는 시장을 통해 전지구화적 주도권 다툼에 참여하고자 하는 중국 영화의 야심과화어전영 華語電影이 자기정체성을 기대고자 하는 중화 문화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일종의 초조감이 작용한다. 대륙에서 근래 나오고 있는 <작은 마을의 봄>에 대한 연구들이 이 영화가 지닌 중국다움을 강조하며, 오늘날의 중국 영화가 참고해야만 할중국 영화의 원 텍스트로서 의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5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어떤 한 영화를 둘러싼 평가는 이렇게뒤집어졌다’. 이것이 <작은 마을의 봄>이 품고 있는 모순이다.

 

한 가지 더, 글을 마치기 전에 <작은 마을의 봄>의 현대성을 두고 홍콩의 영화 평론가 리주오타오 李焯桃가 제기한 문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작은 마을의 봄> 9일간 다섯 명의 인물들이 닫혀 있는 작은 마을 안에서 겪게 되는 육肉과 영靈, 정情과 이理의 충돌을 그린 영화다. 위원이 전자라면, 그녀의 남편 리옌 禮言은 후자를 대표한다. 영화의 목소리가 관객들로 하여금 위원에 동감하게 했지만, 카메라는 리옌의 눈높이를 취함으로써 리옌을 동정하게 한다. 이렇게 소리와 영상은 충돌을 이루며, 우리를 욕망과 도리 사이에서 머뭇거리게 한다. 동과 서, 공산당과 국민당, 내용과 형식, 계몽과 봉건 사이를 오가는 페이 무의 모순이 거처한 바다.

 

홍지영푸단대 연극영화학 석사과정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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