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존 포드는 웨스턴 장르의 진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포드의 경력은 곧 웨스턴 발달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여겨지곤 한다. <역마차>(1939)가 고전적 웨스턴을 완성한 작품이라면, 2차 대전 후에 나온 <수색자>(1956)는 서부와 서부 영웅에 대한 수정을 통해 다시 한 번 웨스턴을 완성시킨 걸작으로 평가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수색자>로부터 6년 뒤인 1962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작가적 성찰이 돋보인다. 그가 도달한 성찰의 깊이는 서부극과 영웅주의를 탈신화화하기에 이른다. 포드의 후기작 중에서 단연 손꼽히는 작품이며, 미국에서 웨스턴이 쇠퇴하고 있던 시기에 만들어진 기념비적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동부에서 법대를 갓 졸업한 변호사 청년 랜섬 스토다드는 서부로 향하던 중 악당 리버티 밸런스의 습격을 받아 우연히 신본이라는 마을에 들어가게 된다. 스토다드는 존 웨인이 연기하는 서부 사나이 톰 도니폰과 핼리라는 여인의 도움으로 밸런스에 대한 복수를 준비한다. 또 한편으로 그는 마을을 연방정부에 가입시키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신의를 쌓아나간다. 결국 스토다드는 밸런스와의 결투에서 이겨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로 불리게 되지만, 나중에는 밸런스를 쏜 사람이 도니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설이 사실이 될 때는 전설을 기록한다"는 신본 스타 편집장의 대사처럼,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전설이나 신화가 역사와 문명과 맺는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화는 스토다드라는 동부 출신 변호사를 통해 서부의 황야가 문명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플래시백 속의 플래시백으로 보여 지는 스토다드와 밸런스의 이전 결투에서 숨어있던 도니폰의 존재가 드러날 때, 영화는 역사 과정에서 신화가 갖고 있는 역할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토다드가 대표하게 될 새로운 시대를 위해, 과거의 서부 영웅인 도니폰은 자신의 커뮤니티와 사랑한 여인을 모두 넘겨준 뒤, 자신의 집을 불태워 버린다. 스토다드는 역마차보다는 기차와 어울리는 인물로, 서부의 미래를 제시한다. 이에 반해 도니폰은 자신이 써온 서부의 역사를 스스로 지워버리고, 이방인 혹은 무법자가 되어 사라지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스타 편집장에게처럼 철도가 건설된 이후로는 잊혀져버린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서부극과 서부영웅에 대한 송가로 생각되는 영화다. 또한 웨스턴을 대표하는 두 사람, 존 포드와 존 웨인이 함께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해서 더욱 웨스턴 장르에 대한 반영적 영화로 비춰진다. 특히 존 웨인이 연기하는 톰 도니폰이 핼리와 함께 살기 위해 짓던 집을 자신의 손으로 불태우는 장면은 <수색자>에서 이튼이 집을 떠나가는 장면과 비교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된 도니폰의 집을 다시 찾아온 핼리는 여전히 그 시절의 선인장 장미가 피어있는 것을 보고 추억에 빠진다. 돌아갈 집조차 사라진 도니폰에게 남은 것은 초라한 관과 오랜 친구들뿐이지만, 그의 관 위에 놓인 선인장은 여전히 아름답다.


결국 워싱턴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핼리와 스토다드는 신본으로 돌아오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스토다드는 처음 그가 신본에 도착했을 때처럼 변호사 사무실을 차릴까 생각한다. 영화는 스토다드가 원경에서 기차와 함께 신본에 도착했던 것처럼, 마지막에는 다시 서부라는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안고 떠나가는 기차를 비춘 채 끝난다. (이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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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테렌스 피셔의 <프랑켄슈타인 죽이기>



호러영화의 재 창조자라고 불리며 컬트영화 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테렌스 피셔는 저예산 호러영화의 명문인 영국의 해머프로덕션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피셔는 이미지, 주제, 소재의 측면에서 언제나 충격적이고 기괴한 것에 관심을 가졌다.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드라큘라 등을 소재로 하여 초자연적인 괴담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의 주인공들은 단순히 기괴하거나 공포스러운 것만이 아니라, 주로 운명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힘 앞에 쓰러져 가면서, 이 운명 때문에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마는 비운의 희생자들이기도 했다. 피셔의 이러한 독특한 시선은 많은 영화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현대 호러영화의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피터 커싱이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할을 맡은 <프랑켄슈타인 죽이기>(1970)는 뇌에 대한 괴기한 집착을 다루는 영화다. 프랑켄슈타인이 죽인 자의 머리를 담아 들고 다니는 통과 연구실에 있는 인체와 해골은 이를 잘 보여주는 이미지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옛 연구 파트너이자 연구의 중대한 결과물을 가지고 있는 브렌트 박사가 미쳐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병원에서 빼돌려 정신병을 치료하여 숨겨진 연구결과를 찾기 위해, 살인과 폭력을 마구 자행한다. 여기서 정신병이라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뇌 이식 연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프랑켄슈타인, 뇌 이식을 연구하다가 정신병에 걸린 브렌트, 정신병원 의사인 칼은 미묘한 삼각구도를 형성한다.

특히 칼은 가장 불가해한 느낌을 주는 인물로서 프랑켄슈타인과 묘한 친연성을 갖고 있는데, 인상조차도 그처럼 무감각하고 냉철해 보인다. 칼은 별다른 저항 없이 프랑켄슈타인의 공모자가 된다. 그가 프랑켄슈타인의 수술을 도울 때면 자신이 치료하지 못한 정신병을 프랑켄슈타인이 뇌 이식 수술을 통해 고치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의학적 경이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칼은 이미 모든 수술이 끝난 후에, 무의미한 저항을 시도할 뿐이다.

이 작품은 심리적으로 큰 공포를 조장하는 호러영화는 아니지만, 서스펜스의 적절한 조절을 통해 극적 긴장을 유지한다. 영화의 긴장감은 대부분 시청각적 요소들의 강렬함과 거침없이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서사의 극적 쾌감을 잘 드러내는 편집효과를 통해 발생한다. 고딕풍의 공간, 의상과 괴기한 요소들의 충돌로써 구축되는 미장센, 그리고 음악과 사운드는 호러영화들의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면서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인간의 훼손된 신체의 언캐니한 이미지나 신체를 훼손하는 소리의 섬뜩함은 영화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이를테면 시체를 유기했던 정원의 화단에서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면서 시체가 땅속에서 튀어나오고 피분수가 되어 흩날려지는 장면은 강렬하고, 뇌 이식 수술을 할 때 두개골을 가르는 톱질 소리는 매우 섬뜩하다. 제한된 공간과 요소만으로 큰 과장 없이 연출되었음에도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피셔의 빼어난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박영석)


 >>>상영일정
1월 28일 19:00
2월 7일 13:00
2월 28일 13:00 상영 후 비평좌담_시네필의 윤리_크리스 후지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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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존 포드의 <말 위의 두사람>


존 포드의 <말 위의 두 사람>은 텍사스의 어느 작은 마을이 배경이다. 보안관 맥케이브(제임스 스튜어트)는 그랜트 요새의 사령관으로부터 코만치 족에 납치된 백인을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백인 한 명을 구해올 때마다 500달러의 대가를 받기로 한다. 계약을 맺고 돈을 받고 일한다는 점에서 맥케이브는 기존 존 포드의 서부극 영웅들과 다르다. 분명 어딘가 포드의 영화답지 않은 구석이 있다. 평론가 짐 키이츠는 이 영화를 두고 “존 포드의 서부극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 중 하나”라고 일축한 바 있고 실제로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포드 자신도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제작자와의 친분 때문에, 또 당대 서부극 스타였던 리차드 위드마크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이미 계약을 마친 상태였기에 연출을 수락했던 것. 원치 않는 시나리오 때문인지, 결과적으로 짐 키이츠가 말 한대로 “사실상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서부극”이 탄생했다.


영화에는 여러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꼬여 있다. 영화 안에는 존 포드 여러 서부극이 스쳐 지나간다. 인디언에게 납치된 백인을 구출한다는 이야기는 분명 <수색자>와 닮았다. 맥케이브와 짐 게리(리처드 위드마크)의 우정은 <황야의 결투>에서 와이어트 어프와 닥 할러데이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두 남녀의 모습을 담은 결말 부분은 <역마차>의 결말과 겹친다. 또한 태그 갤러거의 말처럼, 이 작품에서 존 포드의 실험성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기존의 서부극에서 긍정적으로 묘사했던 기병대 문화, 가부장제, 백인우월주의를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수색자>와 <상사 럿리지>에 이어 반인종주의를 다룬 서부극이라는 점에서 감독의 세계관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존 포드는 회의주의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의 변화는 맥케이브라는 캐릭터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맥케이브 역의 제임스 스튜어트는 이 영화로 존 포드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는데 당시 주로 스쿠루볼 코미디에서 도덕적인 캐릭터나 안소니 만의 서부극에서 내면 심리가 복잡한 히스테릭한 인물을 연기하던 그가 이 영화에서는 실용주의와 시장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본주의형 영웅을 연기한다. 이후 제임스 스튜어트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존 웨인의 대를 잇는 서부극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말 위의 두 사람>은 분명 포드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영화지만, 감독 특유의 스타일만큼은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와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인물들의 행동을 다큐멘터리처럼 스케치하는 연출력은 포드의 인장과 같다. 많은 평자가 지적하는 대표적인 장면은 맥케이브와 짐 게리가 강가에 앉아 시가를 태우는 씬이다. 4분여에 이르는 긴 대화가 진행되는 동한 한 번의 커트도 없다. 짐 키이츠는 이 장면을 “간결하고 경제적인 쇼트로 그 표현력이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이라고 평했다. 한편 하스미 시게히코는 호숫가에 앉아 마티(셜리 존슨)와 이야기를 나누던 짐 게리가 돌을 던지는 모습을 두고, “고요한 호수에 일어나는 잔물결이 두 사람의 사랑을 암시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말 위의 두 사람>에는 포드의 전작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포드 특유의 연출력이 장면 마다 살아 숨 쉬는 영화다. 포드의 팬이라면 놓쳐서는 안 되는 필견의 작품인 것이다. (이도훈)


  * 카르트 블랑슈: 시네필 크리스 후지와라의 선택
  말 위의 두 사람//Two Rode Together
  1956|109min|미국|Color|35mm|12세 관람가

  * 상영일정
  1/16 (토) 19:00
  1/21 (목) 16:00
  2/27 (토) 14:00 상영후 존 포드 강연 - 크리스 후지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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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olly 2010.01.22 14: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가 정말 재밌더라구요.
    서부극에 편견이 좀 있었는데, 이번에 상영하는 다른 존 포드 영화들도 기대하고 있어요.

[영화읽기] 프리츠 랑의 <이유없는 의심>



소설을 쓰는 톰 캐럿은 신문사를 운영하는 오스틴 스펜서의 딸 수전과 약혼한 사이다. 사형 집행에 톰과 함께 입회한 어느 날, 오스틴 스펜서는 언론의 영향력을 업고 사형 제도의 잔인함을 고발하려는 극단적인 구상을 떠올린다. 무고한 죄수가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집행 직전에 밝혀진다면 사형찬성론자와 사법당국도 개심하리라는 것.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과연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무고한 죄수 역할을 할 것인가이다. 오스틴은 미래의 사위 톰 개럿에게 증거를 위조하여 패티 그레이의 살인범으로 잡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결백함을 밝히라고 권유한다. 톰 개럿은 처음엔 내켜하지 않지만 종국에는 수전과의 결혼을 미루면서까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실행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기획은 그들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고, 오스틴 스펜서의 의도 ‘너머’에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이유없는 의심>의 프랑스 개봉 제목이다)’이 존재한다.

 

<이유없는 의심>은 살인과 범죄를 소구하는 언론을 소재로 하여 <도시가 잠든 사이에>, <블루 가디니아>와 함께 프리츠 랑의 ‘언론 누아르 3부작’으로도 불린다. 프리츠 랑이 미국에 건너와 처음 만든 작품 <분노>처럼, 영화는 필부가 억울한 혐의를 쓴 채 부조리한 거대 제도와 싸우는 이야기의 변주처럼 시작한다. 프리츠 랑이 이러한 소재를 계속 변주하는 것의 심인을 그의 사생활에서 찾은 호사가들도 많았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인이 ‘자살’이었던 첫 아내의 살인범으로 그가 여러 해 동안 수사선상에 올랐던 사실, 그녀가 욕실에서 자살하는 동안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될 작가 테아 폰 하르보우와 살롱에 있었다는 그의 알리바이 등. 반세기도 넘은 거장의 과거사는 선정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보다는 그 사건들을 겪은 프리츠 랑이 바라본 세계가 띄는 혹독한 차가움을 이해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다난한 개인사는 물론이고, 나치즘 발호와 그에 경도된 하르보우와의 이혼 등을 겪고 독일을 떠난 후(또 다른 호사가들의 증언을 빌자면, 괴벨스와 면담한 다음 날 독일을 떠났다는 프리츠 랑의 증언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겨우 도달한 피난처 미국서 겪게 된 창작의 어려움과 상업적 실패, 영화제작자들과의 투쟁, 심지어 매카시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체험 등. 이 모든 것을 모두 겪고 난 프리츠 랑이 바라보는 세계는 차라리 처형 장면, 톰 개럿의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고 자동차와 함께 불타버리는 오스틴 스펜서의 사고장면, 사면 받지 못하고 감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톰 개럿의 마지막 뒷모습마저 핍진성 넘치지만, 냉정한 미장센으로 표현한다. 미국서 마지막 영화를 만들던 랑의 속내는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뱅골의 호랑이>, <인도의 무덤>이 구축한 자신만의 피안으로 이미 건너가 버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장 뤽 고다르 등 50년 대 말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진으로 활약했던 누벨바그 감독들이 재발견하기까지 이 작품은 대중의 냉대와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 <이유없는 의심>은 미국에 도착한 직후, 아마도 일말의 희망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었을 랑이 두 번째로 만들었던 <한번뿐인 삶>과 같은 형태를 지녔으나 다른 색조를 지닌 짝패와도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비관적인 정조 속에서도 죄 없이 아름다운 연인들을 그리던 <한번뿐인 삶>과 관객들을 배심원 취급하며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살인과 계략, 그 너머의 소름끼치는 진실을 재현하는 이 영화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심연이 흐르는지. (신은실_시네마디지털서울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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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존 포드의 <철마>

대륙 횡단철도가 꿈으로만 여겨지던 때. 일리노이주 스피링필드에 사는 꼬마 데비는 여자 친구 미리암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그는 아버지 브랜던과 함께 철도가 놓일 길을 탐사하는 여정에 오른다. 그러나 인디언의 습격을 받게 되고, 브랜던은 ‘두 개의 손가락’에게 살해당한다. 시간이 흘러 1862년. 링컨은 유니언 퍼시픽, 센트럴 퍼시픽과 계약을 체결한다. 바야흐로 대륙 횡단철도의 시대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대작 서부영화 <철마>(1924)의 내용이다.


 

1923년 파라마운트에서 제작한 <포장마차(The Covered Wagon)>가 성공을 거두자, 경쟁사였던 폭스도 당시 유행하던 대작 서부영화나 서사적 서부영화를 기획하게 되는데, 그에 적합한 연출자로서 존 포드를 지목했다. 당시 포드는 1921년까지 유니버셜에서 40여 편에 달하는 영화를 만들었고 <스트레이트 슈팅>과 같은 작은 규모의 서부극도 연출한 바 있었던 터다. 그렇게 포드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철마>는 그 장엄함이 실로 말할 수 없는 대작, 서사적 서부영화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철마>는 일단 규모부터 남달랐던 영화다. 주 내용은 1869년 서부를 연결하던 유니온 퍼시픽의 철도와 동부를 연결하던 센트럴 퍼시픽의 철도가 유타주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을 다루고 있다. 극중 인물로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설적인 총잡이 와일드 빌 히콕, 서부 개척가 버팔로 빌이 등장한다. 또한 철도 파업, 소 떼의 이동, 인디언 습격과 같은 서부 개척시대의 주요 사건들이 서브 플롯으로 흐른다. 특히 후반부의 총격 씬은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한다. 수십 명의 인디언이 기차와 철도 노동자들을 원형으로 포위했다가 횡렬로 바꾸어 공격하는 장면은 마치 로마시대의 백병전을 방불케 한다.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물량을 투입한 작품이다. 기록에 의하면 한 마을 전체가 세트장으로 사용되었으며, 4천여 명의 일꾼과 기병대, 2백 개의 철도 레일, 8백 명의 인디언, 그리고 2천8백 마리의 말과 1천3백 마리의 버팔로, 1만 마리의 소가 동원되었다 한다. 오늘날로 치자면 블록버스터에 해당하는 대작인 셈이다.



 

단순히 규모만 컸던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19세기 미국에 접근하는 미덕도 가지고 있다. 철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주 노동자가 백인이 아니라 중국인, 아일랜드인이라는 점은 영화에 사실감을 불어 넣는다. 또한 계급 간 갈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도 영화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다. 링컨이 계약서에 사인하고 철도 건설업자들끼리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노동자들이 황무지에서 노래를 부르며 레일을 까는 장면과 대비를 이룬다. 비단 정치 경제인만이 아니라 노동자들도 역사의 주체였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처럼 <철마>는 균등한 시선분배와 객관적인 접근을 통해 서부 개척사를 신화가 아니라 역사로 접근하고 있다.

 

한편 영화에는 훗날 서부극의 모티브가 되는 테마들이 여럿 있다. 극의 중심을 차지하는 주요 테마는 로맨스, 복수, 인디언이다. 데비와 미리암 사이에서 꽃 피는 로맨스는 기사도 문학과 19세기 서부극 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가족을 살해한 적에게 복수하는 설정은 <역마차>나 <황야의 결투> 등 이후 포드의 서부극에서 자주 사용되는 코드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데비의 아버지를 죽인 ‘두 개의 손가락’이 백인이라는 것이다. 존 포드의 후기작들이 인디언과 인종간의 경계를 다룬다는 지점을 고려한다면, 분명 <철마>는 포드 서부극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존 포드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이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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