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더럽혀진 삶이 깨끗해 질 수 있을까. 드라이 클리닝도, 세탁기도 해 낼 수 없는 삶의 빨래, 그 위로 얼룩진 채 굳어버린 오물들. 에밀리(장만옥)의 인생 역시 세탁 불능의 단계에 진입한 지 오래다. 1980년대를 호령하는 록스타였지만 지금은 로커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절망적인 단계에 이른 남편과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마약을 통해 다른 세계로의 도피 행각을 이어가는 에밀리.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싸우던 남편은 마약 과다 복용으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고 자신 역시 마약 복용혐의로 복역하는 신세가 된다. 6개월 후 출소해 유일한 피붙이인 아들을 찾지만 시부모의 눈에 며느리는 여전히 못 미덥고 위험한,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마약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침내 얼룩진 삶을 탈탈 털고 깨끗해졌음을 증명시키기 위해, 그래서 아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 <클린>은 '모성'이라는 이름의 비누를 에밀리의 한 손에,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마이크를 쥐어준다. '록시뮤직'의 브라이언 이노가 창조해낸 <클린>의 세계는 장만옥이 영화 말미에 부르는 노래 'Down in the Light'에 이르러 감정의 최고점을 향해 달려간다. 시아버지 역의 닉 놀테가 건네는 "사람은 변한다, 필요하다면"이라는 현실적인 위로와 함께.


결국 <클린>은 두 개의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는 영화다. 장만옥, 그리고 올리비에 아사야스. 허우 샤오시엔을 비롯해 아시아 영화에 대한 오랜 추종과 깊은 애정을 가져온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자신의 연출 데뷔작의 주인공으로 장만옥을 불러들였다. 한물간 프랑스 감독이 <동방삼협>(1992)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던 홍콩 여배우를 캐스팅해 뱀파이어 영화를 리메이크하려고 하지만 결국 무산되고 만다는 해프닝을 통해 프랑스 영화판을 풍자한 '영화에 대한 영화' <이마베프>(1996)를 통해 만난 이후, 두 사람은 1998년 결혼했지만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고 <클린>을 찍을 당시에는 이미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었다. 하지만 연인에서 동료로 돌아간 아사야스의 지휘에 장만옥은 근사한 독창을 선보였고 2004년 칸 영화제는 '여우주연상'이라는 힘찬 박수를 보냈다. <아비정전>(1990)에서 <첨밀밀>(1996)을 거쳐 <화양연화>(2000)로 이어지며 점점 연기의 폭과 깊이를 늘려갔던 장만옥에게 <클린>은 장국영도, 여명도, 양조위도 없는 세상에서 홀로 싸워낸 기록이다. 냉대와 외면 속에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하며 마약의 유혹과도 싸워야 하는 에밀리의 현실은 <첨밀밀>의 건강한 억척스러움으로 덤비기엔 너무 고단했고, 그 지속적 긴장감을 유지하기란 <화양연화>의 치파오같은 코스튬의 도움 없이는 쉽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위자료를 획득한 이후 지난 몇 년 간 장만옥을 모습을 스크린에서 볼 기회가 없었다. 새로운 연인과의 이별과 그 이유에 대한 비보와 루머, 지나치게 마른 모습이 찍힌 몇몇 사진들이 다 일 뿐이다. 에밀리가 아들과의 재회를 위해 편지의 끝에 절박하게 써 내려간 말 "I'm Clean……." 처럼 장만옥 역시 배우라는 이름 위에 7년 간 쌓인 먼지를 깨끗하게 털어내고 어서 돌아오기를.

(by 백은하_10 아시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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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출신 감독 빌 어거스트가 연출하여 그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정복자 펠레>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19세기 말 덴마크의 한 시골 농장으로 배경으로 한 영화는 노년의 스웨덴 노동자 라세(막스 폰 시도)와 그의 어린 아들 펠레(펠레 베네가르)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덴마크로 건너오면서 시작된다. 브랜디가 물보다 싸고 건포도가 들어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 아이들이 일하지 않고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곳이라고, 라세는 덴마크로 향하는 배 안에서 어린 아들 펠레에게 희망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구간이나 다름없는 거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상이 된 가혹한 농장의 노동과 인간이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농노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덴마크의 저명한 사회주의 작가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의 동명소설 중 1부에 해당하는 주인공 펠레의 어린 시절을 그린 <정복자 펠레>는 19세기 말 농장을 소유한 부르주아와 노동자 간의 불평등한 관계, 그로부터 파생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 한 폭의 회화처럼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북구의 시골 풍광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정서를 반영하는 심리적 배경으로 존재한다. 탁월한 촬영이 돋보이는 영화는 펠레의 시선으로 농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지주의 아들과 사랑을 한 대가로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가야했던 젊은 처녀 노동자, 끊임없이 바람을 피워대는 남편이 마침내 자신의 어린 조카까지 손을 대자 광기에 휩싸여 남편의 성기를 잘라버린 지주의 아내. 라세와 펠레가 머물고 있는 농장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를 감싼 모순과 분노,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좌절이 어지러이 섞인 용광로로 묘사된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현재의 삶에 대한 분노를 생생하게 뿜어내는 펠레와 달리 아버지인 라세는 펠레 앞에서는 대담한 척 하지만 현재의 비루한 삶에 대항할 의지나 용기가 없는 평범한 하층민이다.


악랄한 농장 감독관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노동자 에릭은 펠레에게 희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2년 후 품삯을 받으면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 세계를 돌아다니겠다는 그의 희망은 어린 펠레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감독관의 불공정한 태도를 참다못해 쿠데타를 일으키던 에릭이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불의의 사고로 머리를 다치면서 그의 원대한 꿈은 사라진다. 노동자들의 리더였던 에릭이 바보가 되고, 은밀히 감독관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을 본 펠레는 안주할 수도 있었던 농장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반항적이면서도 유약한 펠레의 여윈 얼굴 위에는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에서 보았던 소년 장 피에르 레오가 겹쳐진다. 그러나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오가 절망적으로 얼어붙었던 것과는 달리 펠레는 차가운 바닷가를 부지런히 걸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세상을 정복하고 전진하리라는 소년의 의지가 고스란히 영화의 의지로 표출되는 순간이다.

(by 장병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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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작가 존 르 카레와 감독 존 부어맨의 만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실제 베를린에 파견되어 영국 스파이로 활동하기도 했던 존 르 카레는 동서 냉전기의 독일을 무대로 이중간첩을 소재로 한 세 번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크나큰 성공을 거두며 스파이 소설의 대가로 군림해왔다. 그런 그가 제작은 물론 시나리오 집필에도 참여한 작품이 바로 <테일러 오브 파나마>다. 영화의 핵심은 거짓 정보 때문에 벌어지는 파나마의 가상의 정치현실이다.

영국 정부는 전략적 요충지인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이 제3국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영국 정보부 M16 소속 앤디 오스나드(피어스 브로스넌)를 파나마로 파견한다. 앤디는 재단사 해리 펜델(제프리 러시)의 비밀스런 과거를 약점 삼아 정보원으로 일하게 만든다. 해리는 파나마의 정, 관계 요인들을 대상으로 고급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데다 그의 미국인 부인 루이사(제이미 리 커티스)는 파나마 운하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운하의 운영권을 중국으로 넘기려 한다는 해리의 거짓 정보는 급기야 미국이 군사작전까지 동원하게 만든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픽션처럼 느껴지지만, 미국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을 시작하며 주장했던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가 지난 2004년 최종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혀졌던 일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도 그렇듯 존 르 카레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미국의 대외정책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적인 성격이 강하다. 한창 제임스 본드로 활동하고 있던 피어스 브로스넌을 <007 언리미티드>(1999)와 <007 어나더데이>(2002) 사이에서 비열한 바람둥이 스파이로 캐스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언 플레밍의 반대말이 존 르 카레라면 피어스 브로스넌은 역시 똑같은 M16 요원으로 둘 모두를 오간다. 리 마빈의 매력이 빛나는 독특한 필름 누아르 걸작 <포인트 블랭크>(1967), 시종일관 긴장을 놓치지 않는 호러 어드벤처 <서바이벌 게임>(1972), 기이한 컬트 SF <자도즈>(1973) 등을 만들며 장르영화에 대한 과감한 시도와 재해석을 보여줬던 존 부어맨으로서는 바로 첩보영화 장르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개봉 당시 <사이트 앤 사운드>의 마크 싱커는 “들쑥날쑥하지만 가끔은 뛰어난 작가인 존 르 카레와 마찬가지로 들쑥날쑥하지만 훨씬 무원칙적으로 뛰어난 감독 존 부어맨의 만남”이라고 썼다. 유머와 풍자라는 점에서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단점도, 장점도 많은 그들로부터 장점이 더욱 큰 교집합을 이룬 의외의 첩보영화 수작이다. 더불어 해리는 2차대전 첩보영화 <카사블랑카>(1942)를 빗대 파나마를 찾은 앤디에게 “영웅들이 없는 카사블랑카가 바로 파나마”라고 말한다.

by 주성철 씨네21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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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화는 린치처럼 어렵지 않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2005) DVD 코멘터리에서 이례적으로 데이비드 린치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데이비드 린치가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얻은 무한대의 자유, 그러니까 <인랜드 엠파이어>(2007)로 나아가기 전 <로스트 하이웨이>(1997)와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의 '몽환적 린치 월드'를 거치며 '디지털적' 방법론을 모색하다가 결국 디지털 이미지에 안착한 그의 현재에 대한 얘기였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블루 벨벳>(1986)과 <트윈 픽스>(1992)의 공간에서 여전한 악몽의 미로를 펼쳐놓지만 보다 더 내밀한 심연으로, 그리고 크로넨버그가 언급한 현재의 린치와 가장 가깝게 다가 선 첫 번째 작품이다.


명성과 부를 누리고 사는 색소폰 연주자 프레드(빌 풀먼)는 의처증에 시달리다가 아내 살해혐의로 체포된다. 그리고 자동차 정비공 피트(발타자 게티)는 폭력배 보스의 정부로부터 유혹을 받아 살인을 저지른다. 패트리샤 아퀘트가 그 두 여자를 함께 연기하며 전반부의 후반부의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프레드와 피트 역시 장면을 뛰어넘어 역할을 바꿔 혼란을 가중시킨다. <사이트 앤 사운드>의 킴 뉴먼이 말한 것처럼 시놉시스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는 “영화는 내러티브의 논리를 매 순간 파괴하면서 상호 모순적이고 불가해한 사건들을 즐기고 있다”고도 덧붙인다. <블루 벨벳>(1986)과 <트윈 픽스>(1992)처럼 필름 누아르 플롯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로스트 하이웨이>에서는 의도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플롯에 매혹된다.

말하자면 <로스트 하이웨이>는 과거의 린치와 현재의 린치를 잇는 가교다. 어둠의 힘 앞에서 무기력한 빌 풀먼은 <블루 벨벳>의 카일 맥라클란의 또 다른 버전이며, 패트리샤 아퀘트는 앞서 역시 <블루 벨벳>이나 <트윈 픽스>에서 목격했던 학대받고 살해당하는 여성 캐릭터의 변주다. 하지만 <로스트 하이웨이>는 기존의 린치 월드로부터 히치콕의 <현기증>(1958)과 큐브릭의 <샤이닝>(1980)을 지나 또 다른 악몽의 세계, 더욱 끝없이 부유하는 이미지들과 만나 새로운 지도를 그린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조금씩 어긋나는 시간, 그리고 과감한 생략과 비약 속에서 혼란은 가중되지만 그 이미지와 사운드의 놀라운 향연은 ‘영화’ 그 자체의 경계와 대면하게 만든다. <포지티프>의 미셸 앙리는 <로스트 하이웨이>를 두고 “영화가 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경계가 되는 그 어떤 것에 접근한다는 매우 강한 느낌을 준다”고 썼다.


데이비드 린치가 <로스트 하이웨이>에 대해 가장 최근에 한 얘기는 그가 쓴 에세이집 <데이비드 린치의 빨간방>에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O.J.심슨 재판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영화는 그 사건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돼 있을 것이다. 심슨을 보고 놀란 점은, 그가 미소도 짓고 때론 웃음을 터트리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그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태연히 골프를 치기도 했다. 나는 한 인간이 정말 살인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삶을 이어갈지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공포를 회피하려고 마음이 스스로 기만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인 ‘심인성 기억상실’이라는 말을 접하게 됐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그런 심리현상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성철 씨네21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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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LA, 사립탐정 제이크 기티스(잭 니콜슨)는 묘령의 여인으로부터 수력 자원부의 수석 엔지니어인 남편 홀리스 멀웨이의 불륜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제이크는 홀리스가 젊은 아가씨와 데이트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그가 찍은 사진은 신문에 대서특필된다. 당시 홀리스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발생한 LA의 물 전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얼마 후 홀리스의 진짜 아내인 에블린(페이 더너웨이)이 등장하면서, 제이크는 자신의 의뢰인이 가짜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홀리스가 익사체로 발견된다.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 제이크는 홀리스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곧 에블린과 그녀의 아버지 노아(존 휴스턴)가 각기 다른 제안을 해온다.

실상 이 영화에서 '차이나타운'은 엔딩 신에만 단 한번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 내내 주인공들 사이에서 주문처럼 맴돌며 불길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제이크는 예전에 차이나타운에서 근무하던 경찰이었고, 거기서 어떤 여자를 보호하려다 실패한 다음 경찰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평범한 불륜이라고만 생각했던 홀리스 멀웨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과거의 악몽이 자신을 향해 촉수를 뻗쳐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는 거기서부터 애써 달아나려 하지만 실패한다. "Cherchez la Femme(그 여자를 찾아내)." 모든 느와르 소설은 이 문구에서 시작한다. <차이나타운>도 마찬가지다. 영화엔 실체로서 등장하지 않는 제이크의 옛 여자, 홀리스와 함께 있던 젊은 여인, 에블린. 제이크는 영화 내내 이 세 명의 여성을 뒤쫓지만 그녀들은 자꾸만 미끄러져 달아난다. 그리고 가까스로 그녀들의 실체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자기파멸의 지옥을 마주하고 있음을, 자신이 다시 한 번 차이나타운에 와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가 (혹은 무엇이)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 적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고, 과거는 되풀이된다. 추적의 끝은 언제나 시작점으로 귀환한다. 그 모든 비밀이 밝혀지더라도, 끝에 이르러선 힘없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잊어버려. 여긴 차이나타운이야."


로만 폴란스키는 미국에서 만든 마지막 영화 <차이나타운>을 통해,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그 어떤 영화들보다 더 챈들러적인 본질을 꿰뚫는 걸작을 완성했다. 모든 대사와 쇼트들이 영화의 충격적인 반전을 향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잭 니콜슨과 페이 더너웨이는 산산조각나기 일보 직전의 표정으로 LA의 가뭄 속을 헤맨다. 수수께끼는 단순하지 않은 방식으로 증폭되며 인과응보의 해결을 조롱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창조주들의 죄악은 사막 위의 환영과도 같은 도시 LA에 피비린내 나는 악취를 심어놓는다. 느와르의 교과서라 불리는 <차이나타운>의 마지막 대사, 통렬한 비극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 "잊어버려, 제이크. 여긴 차이나타운이야"AFI에서 선정한 '미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 100'에서 74위를 차지했다.

글|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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