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회고전 특집 1]


시네마 - 에이돌론

: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입문, 혹은 논쟁을 위한 서설


한국의 올리베이라 수용 약사(略史)

오랜 준비 끝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마련한 이번 회고전은 올리베이라의 작품 대부분이 한꺼번에 상영된다는 점에서 아주 귀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보고 그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할 기회가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때 지난 15년 동안 한국에서 올리베이라의 영화가 어떻게 소개되었는지 그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본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1993년 작품인 <아브라함 계곡>이다. 용케도 NHK 위성방송 BS2 채널까지 서비스하는 지역유선방송에 가입해 두었던 덕분인데, 2000년 초에 방영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작품 외에도 <상자>(1994)와 <수도원>(1995)이 함께 방영되었는데,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스토리에 의존해서 일본어 자막 중 한자(漢字) 부분만을 띄엄띄엄 읽어 가며 그나마 따라갈 수 있었던 <아브라함 계곡>만을 끝까지 보았다.


사실 올리베이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었던 1998년까지만 해도 이때까지 그는 자신의 사후에 공개하도록 한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1982)을 포함해 총 19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시네필들의 영화적 지도 어디에도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그의 영화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 그보다 한참 전인 1970년대였고, 1990년대는 한국에서 이른바 시네필 문화가 싹튼 시기 실은 영화 자체에 대한 열광보다는 어렵사리 구해 본 영화에 대한 자부심이나 쉽게 볼 수 없는 영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가득한 시기였다 로 간주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기이한 일이다. 해외 영화제를 방문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프로그래머나 기자 혹은 평론가들이 그의 영화를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떤 영문인지 그들은 올리베이라를 국내의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일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언급이 일부 있었다 해도, 그것은 영화와 직접 대면하는 것을 유예시키면서 ‘저 바깥에는 이러이러한 근사한 것들이 있다’고 자랑하는 ‘교도관의 비평’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의 영화가 극장에서 처음 상영된 것은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1999년)에서였는데, 초청된 작품은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1678)의 무대를 현재로 옮겨 각색한 <편지>였다. 아마 이 영화가 같은 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올리베이라의 영화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폐간된) 영화잡지 『필름 컬처』의 주간이자 (지금은 사라진) 서울시네마테크 대표였고 (이제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였던 임재철 평론가 덕택이었다.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시절(2001~2004), 그는 페드로 코스타, 루크레시아 마르텔, 알랭 기로디 등 이제는 국제적인 감독이 된 이들의 초기작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그리고 존 포드의 회고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2005년에 <불안>(1998)을 자신이 설립한 영화사인 이모션픽처스를 통해 수입, 개봉한 바 있다. 이 영화는 현재까지 한국에서 정식으로 극장 개봉된 유일한 올리베이라 영화다.) 2001년 7월 5일부터 1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는 (그전에 오즈 야스지로, 오슨 웰스, 알랭 레네 회고전을 선보였던) 서울시네마테크 주최로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걸작선 및 포르투갈 영화특집」이라는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올리베이라의 영화 다섯 편 <프란시스카>(1981), <지배의 공허한 영광>(1990), <아브라함 계곡>,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1997), <불안> 이 한꺼번에 상영되었다. 같은 해 광주국제영화제에서는 <나는 집으로 간다>(2001)가, 이듬해에는 <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2001)이 상영되었다. 또한 2002년 포르투갈대사관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주최로 열린 제2회 포르투갈 현대영화제 2001년의 제1회 영화제는 당시 서초동에 자리하고 있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렸는데 한심한 영화들뿐이었다 에서는 <언어와 유토피아>(2000)가 상영되었다.


스크린에서 비로소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뜻밖에도 두 편의 올리베이라 영화가 국내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방영되었는데, 하나는 2001년 10월 KBS 위성 2TV를 통해 방영된 <수도원>이고, 다른 하나는 2002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스카이라이프 MGM 채널을 통해 방영된 <새틴 슬리퍼>(1985)이다. 당시로선 해외의 올리베이라 마니아들 가운데서도 실제로 본 사람이 거의 없었던 <새틴 슬리퍼>가 ‘나의 사랑, 나의 기사’라는 제목으로 방송될 예정이라는 걸 MGM 편성표에서 확인하고 영화가 시작되기 1시간 전부터 텔레비전 앞에 붙어 앉아 있던 기억이 나는데, 실망스럽게도 방송판은 400분에 달하는 오리지널이 아니라 해외용으로 제작된 130분짜리 축약판이었으며 게다가 조악하게 영어로 더빙된 것이었다. (나는 2012년에야 <새틴 슬리퍼> 오리지널 버전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 찾은 기록에 따르면, 이 영화는 역시 ‘나의 사랑, 나의 기사’라는 제목으로 1990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미심쩍은 것이라 확인이 필요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좀 어렵다.)


이후 사정은 바뀌어 지난 10여 년 동안 올리베이라의 신작은 국내 영화제를 통해 꾸준히 소개되어 왔다. 2011년에는 그의 ‘좌절된 사랑의 4부작’ <과거와 현재>(1971), <베닐드 혹은 성모>(1975), <불운의 사랑>(1978), <프란시스카> 이 부산과 전주영화제에서 (구성을 달리하며) 각각 마련한 포르투갈 영화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모두 상영되었는가 하면, 같은 해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열린 포르투갈영화주간에서는 올리베이라의 장편 데뷔작인 <아니키 보보>(1942)와 그가 배우로 출연한 작품이자 포르투갈 최초의 유성영화인 <리스본의 노래>(코티넬리 텔무 감독, 1933)가 상영되었다. 올리베이라 탄생 100주년을 맞아 <나의 경우>(1986)부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수수께끼>(2007)까지 21편의 장편을 모은 DVD 박스세트가 포르투갈에서 출시된 이후로는 온갖 ‘어둠의 경로’로 그의 영화가 ‘유통’되고 있으며, 심지어 <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 뽀르또’라는 제목으로, <나의 경우>는 감독의 이름이 ‘올리비에라’로 바뀐 채 의심스러운 리핑판 DVD로 국내에 출시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바뀐 것일까? 냉정히 말하자면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가까스로, 즉 특별전이나 영화제 같은 임시변통의 창구를 통해, 혹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케이블 혹은 위성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혹은 각종 어둠의 경로를 통해 산발적으로 접할 수 있었을 뿐이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 않은가? 2014년 현재까지 올리베이라는 총 32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그 가운데 25편이 지난 15년 동안 국내에서 상영, 방영 혹은 DVD로 출시되었지만, 흡사 고다르처럼,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보이기는 하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다. 빠른 기간 내에 시네필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지만 논쟁의 대상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어떤 이들은 그가 100세가 넘어서도 왕성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숭배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겐 올리베이라에 대한 담론이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두 개의 물음

“영화는 비(非)물질적이야. 그것은 유령이지.”

- 파울루 로샤의 <건축가 올리베이라>(1993) 중에서 올리베이라의 말

논쟁을 자극하기 위해, 다소 도발적인 두 개의 ‘불경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올리베이라는 포르투갈적인 감독인가? 그의 영화는 진정 ‘시네마틱’(cinematic)한가? 물론 이 물음에 모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견해가 궁금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모두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미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1998년에 발표한 짧은 글에서 <신곡>(1991)과 <수도원>에 대해 논하면서 “위대한 올리베이라 안에는 독일적인 구석이 있다.”고 쓴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올리베이라는 독일이 지난 2백여 년 동안 하나의 국가로서 그 자신에게 품은 불확실성을 (오히려)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활용한 신화와 우화들을 통해 포르투갈적 카톨리시즘을 구조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바디우는, 테오도르 폰타네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후 모든 독일 예술은 어느 정도 이념(Idea)의 교훈주의 및 교육적 목적 이는 서사적 혹은 심리적 요소들과 이러한 요소들의 상징적 역할에 대한 강조 사이의 간극에 자리하고 있다 에 의해 오염되어 왔는데, 올리베이라 영화의 알레고리적 구조에서는 그러한 독일적 특성이 느껴진다고 본다. 올리베이라에 대한 장문의 통찰력 있는 비평을 남긴 포르투갈 평론가 고(故) 주앙 베나르드 다 코스타는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영화에서의 ‘영원한 여성성’(eternal feminine)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물론 이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유명한 마지막 문장(“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고양시킨다.”)과의 관련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올리베이라 영화에서 이 모티프는 때로 아주 직접적으로 시각화된다. 예컨대, <아니키 보보>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소년과 소녀가 작은 인형의 양쪽 팔을 하나씩 잡은 채 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이후 올리베이라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될 (로베르 브레송적인) ‘접촉에 대한 망설임 혹은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감지하게 된다 건물 사이로 난 오르막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준다(사진 1). 잠시 후, 이들의 모습 위로 상승(고양)의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구름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사진 2). 올리베이라가 자신의 실제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1952년에 구상했지만 반세기가 넘어서야 실제로 스크린에 옮긴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2010)에서 샤갈의 회화를 연상케 하는 ‘승천’(사진 3) 장면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디우의 지적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올리베이라 안에는 분명 독일적인 구석이 있지만, 그만큼이나 프랑스적인 구석 및 이탈리아적인 구석도 있으며, 유대적인 구석 포르투갈에서 올리베이라(올리브나무)나 페레이라(배나무)처럼 나무와 연관된 성은 유대계로 추정되곤 한다 도 있고, 심지어 북구적인 구석도 있다. 분명 올리베이라는 주제 레지우,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 등의 포르투갈 문학에서도 그의 영화를 떠받치는 언어적 자양을 취해 왔다. 한편으로 포르투갈 바깥의 관객들이 그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포르투갈 작가들의 작품이 거의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영화가 비단 독일만이 아니라 다양한 범유럽적 작품들(문학, 미술, 연극, 음악 그리고 영화)의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올리베이라의 ‘멀티미디어’ 걸작 <나의 경우>인데, 여기서는 피란델로의 『작가를 찾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키는 주제 레지우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공연과 사무엘 베케트의 텍스트가 겹쳐지고, 돌연 무대 위에 뉴스릴 영화가 영사되고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내걸리는가 하면(사진 4와 5),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이상적인 도시>를 모델로 한 세트에 욥기의 인물들이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함께 등장하고(사진 6), 또한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한 촬영팀의 모습이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올리베이라는 <신곡>과 관련해 어떻게 다양한 문화에서 나온 텍스트들을 한데 묶는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냐는 질문에 대해, 그것들은 다양한 문화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모두 “우리의 서구적 시각 혹은 교육에 따른 원죄의 문제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원천을 가진다고 답하기도 한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포르투갈 영화에 있어 지배적인 장르는 바로 포르투갈 영화 자체”(주앙 베나르드 다 코스타)라고까지 말해지는 포르투갈 영화의 기벽(奇癖)의 전형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포르투갈을 잠깐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그곳의 공간과 사람들에게서 느낀 인상에 가장 가까운 올리베이라 영화는 <아니키 보보>나 <상자>처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만 국한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영화는 ‘포르투갈 영화적’이되 ‘포르투갈적’이지는 않다. 올리베이라의 ‘포르투갈 영화’는 종종 포르투갈이라는 한 국가의 영역을 넘어 유럽, 보다 크게는 레이몽 벨루가 지적한 바대로 문명(civilization) 혹은 세계의 운명에 대한 몰두로 나아가곤 한다. 포르투갈이 위기에 닥친 시기에 부활해 제국을 지배하리라 믿어졌던 16세기의 전설적인 왕에 관한 주제 레지우의 희곡 『세바스티앙 왕』을 영화화한 <제5제국>(2004)처럼 일견 지극히 지역적인 소재를 다룬 것처럼 보이는 작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앙골라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병사의 구술을 통해 포르투갈 국가의 흥망성쇠를 삽화적 형식의 영화적 프레스코화로 담아낸 가공할 걸작 <지배의 공허한 영광>은 또 어떤가. (벨루는 올리베이라야말로 한 편의 영화 안에 조국의 역사를 담아내면서 그 설립에서부터 제국의 몰락에 이르는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아는 유일한 영화감독이라고 썼다.) 올리베이라의 고향 포르토를 가로지르는 도우루 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곳에 있는 작은 등대마저도, 이 작은 도시의 하루를 열고 닫는 제의적 사물(<도우루 강의 노동>(1931))로 출발해 문명의 메타포(<포르토에서의 어린 시절>)로까지 전화된다.


‘포르투갈 영화적’이되 ‘포르투갈적’이지는 않은 영화, 어쩌면 이는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주앙 보텔료, 페드로 코스타,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 미겔 고메스 등 여타 포르투갈 감독들의 영화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일 수 있다. 올리베이라가 특별한 것은, 영화를 사유함에 있어서 ‘시네마틱’이라고 하는 정의가 불가능한 모호한 개념에 집착하기보다는, 영화를 하나의 예술이나 미디어가 아닌 일종의 기능(function)으로서, 다른 예술 혹은 미디어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며 작동하기 위한 장(場)을 조절하는 기능으로서 받아들이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건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초기영화 혹은 원시영화 시기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한데, 올리베이라가 그 시기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의 영화관(觀)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나의 가정으로 남겨두기로 하자.) 여기서 그의 ‘유령’(fantasma)으로서의 영화론(“영화란 항상 현실의 유령이다.”)이 나온다. 영화는 실체 없는 비물질적인 것이지만, 다른 실체적인 것들 사이의 간극에 유령처럼 거하며 기능한다. 스페인 영화감독 빅토르 에리세는 올리베이라의 이러한 영화관에서 ‘영화의 불확정적 본성’을 본다. 이는 공인된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들로 인해 순수영화의 힘이 약화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영화에게 남겨진 일은 자신의 강둑에 물을 대는 것, 그토록 빠른 시간에 그것이 협곡들을 내며 가로질렀던 예술들 사이로 파고드는 것, 교묘하게 예술들을 포위하는 것, 보이지 않는 지하수로를 내기 위해 심층의 토양으로 스며드는 것”이라 지적하며 영토(실체) 없는 영화, 곧 ‘불순한 영화’(cinéma impur)를 옹호했던 앙드레 바쟁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올리베이라는 (복수로서의) 세계는 물론이고 문학, 미술, 연극, 음악 그리고 영화 모두를 동등한 층위의 현실로 간주한다는 점 영화 자체 또한 영화가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현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은 포르투갈 북부 트라스-우스-몽트스 지방의 전통적 그리스도 수난극 재현 행사를 담은 올리베이라의 두 번째 장편 <봄의 제전>(1963)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에서도 지독히 바쟁적이다. 영화 장치는 그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시청각적 기록 혹은 보존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같은 층위에서 조우하게끔, 즉 비교되고, 교차하고, 충돌하게끔 만든다. 영화를 매체적으로, 혹은 그것에 고유한 특성(‘시네마틱’)이 있다는 가정 하에 사유하기보다는 일종의 기능으로 사유하는 올리베이라의 이러한 영화관을, 여러 비디오 작업들과 <필름 소셜리즘>(2010)이나 <언어와의 작별>(2014) 같은 디지털 작업에서 전면화된 고다르의 영화관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때 올리베이라는 “영화는 연극을 넘어설 수 없고 다만 그로부터 떠날 수 있을 뿐”이라거나 “영화는 연극을 시청각적인 방식으로 고정시키는 과정”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영화란 ‘촬영된 연극’과는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고 믿는 순수주의자들에게 이런 주장은 경악스러운 것으로 비칠 것이다. 또한 그는 “나는 음성적 이미지, 문학적 이미지를 영화적으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것은 시도할 필요조차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문학적인 구절을 스크린에 등재(register)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유성영화의 커다란 장점이다.”라고도 단언한다. 올리베이라를 따라, 이미지라는 단어를 비단 가시적인 것에만 결부시키지 않고 시각적 이미지, 문자적 이미지, 음성적 이미지, 음향적 이미지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 고려한다면, 유성영화의 영화-기능은 이러한 이미지의 힘을 빌려 앞서 언급한 상이한 현실들을 일시적으로 공통의 공간에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올리베이라와 고다르는 다르지 않다.) 이때 이미지들 간에 차이는 있지만 위계는 없다. 그리고 위계가 없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것들은 다시 공통의 공간에서 상호 비교, 교차, 충돌될 수 있다. 비교, 교차, 충돌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간극들뿐 아니라 그 간극에서 방사되는 여러 유령들과 마주치게 된다. 올리베이라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각인시킨 ‘좌절된 사랑의 4부작’은 비센트 산체스와 주제 레지우의 희곡, 혹은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와 아구스티나 베사-루이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연극적 공간과 제스처,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힘을 영화로 다시 끌어안으면서 이 간극들과 유령들을 한껏 풀어놓고 있다. (평자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겠지만 4부작 가운데 가장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 걸작이자 올리베이라 최고의 작품이라 할 <불운의 사랑>은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1968)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 가운데 원작이 없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유일한 작품이다.)


‘시네마틱’이란 결코 하나의 기원을 갖지 않는 데다 언제나 일시적일 뿐인 간극들과 유령들이 흡사 모종의 실체에 수렴될 수 있는 것인 양 우리를 미혹시키는 허위 개념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각각이 조작(operation)하는 영화-기능과 그 조작의 수준이 다른 무수한 영화감독들이 존재하고 분명 우리는 그들을 어떤 위계에 따라 배치할 수 있지만, 자신이 시네마틱하다고 ‘믿는’ 사례들을 쌓아올리거나 ‘~은 시네마틱하지 않다’는 식의 부정신학적 논법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가 다른 누구보다 더 ‘시네마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영화란 실체가 아닌 기능이기 때문에 그와 결부된 형용사를 가질 수 없다. 반면, 문학적인 것, 음악적인 것, 회화적인 것, 연극적인 것은 존재한다. 영화의 이와 같은 특성에 대한 가장 빼어난 메타포는 히치콕의 <현기증>(1958)의 마들렌이다. 그녀는 그런데 과연 ‘그녀’라고 지시해도 되는 것일까? 주인공 친구의 아내와 그녀인 양 행세하는 여자, 그리고 그림 속의 여자 가운데 어디에도 정확하게 귀속되지 않지만 이 세 개의 실체 혹은 이미지를 관장하는 기능이고 또한 그것들 사이에서만 활동하는 유령적 형상이다. 올리베이라 인물들의 ‘좌절된 사랑’은 종종 그들이 이러한 유령적 형상(만)을 실체라 믿고 정작 실체를 거부하는 데서 기인한다. 스카티가 끝내 주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올리베이라는 그의 세 번째 장편 <과거와 현재>에서 이러한 <현기증>적인 주제를 완벽하게 자기 식으로 번안해냈다. 네크로필리아에 사로잡힌 주인공, 죽은 자의 ‘부활’, 끝내 주인공의 열정의 대상이 되지 못한 자의 자살 등이 묘사된 것은 히치콕의 영화와 유사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현기증>의 남성적 환상을 여성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완다라는 여성의 열정은 죽은 첫째 남편(의 초상), 그의 쌍둥이 동생,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어디에도 정확하게 귀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모든 것들은 실체적인 것, 그만의 형용사를 지닐 수 있는 것들의 에이돌론(eidolon)이다. 그리스어로 에이돌론은 분신, 유령 그리고 이미지의 뜻을 모두 지닌다. 놀랍게도 영화는 이러한 분신들의, 유령들의, 이미지들의 간극에서 더할 나위 없이 실재적인 감각을 산출해낸다. 하지만 이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시네마틱’의 신학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무염시태(無染始胎)했다고 믿는 <베닐드 혹은 성모>의 베닐드나 죽은 여인이 사진 속에서 미소 짓는 모습을 보았다고 믿는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의 이삭처럼, 시네필리아는 감각의 절대성을 믿는 것(영화는 곧 세계다)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올리베이라의 에피쿠로스적인 이미지들에서 기인하는 감각의 진실성을 믿었던 그는 역사상 최초의 시네필, 하지만 아직 영화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시네필이었다 면모가 있다고 본다.


유운성│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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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존 포드의 다른 영화들도 상영해 달라고 항의해야 한다”

- 영화평론가 태그 갤러거와의 만남


지난 9월 14일(일), 미국의 영화평론가 태그 갤러거가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 존 포드의 영화 세계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다. 그가 직접 편집해 만든 영상을 본 뒤 관객들의 질문이 다시 1시간 30분 동안 이어졌다. 이날 자리는 감독 존 포드에 대한 훌륭한 배움의 자리인 동시에 누구보다 진지하게 영화를 대하는 그의 열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방금 본 50분 정도의 영상은 태그 갤러거 씨가 직접 만든 것으로, 하나의 비평이자 독특한 형식의 강의이기도 하다. 이제 바로 관객분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오늘 만남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먼저 태그 갤러거 씨가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라고 밝힌 <역마차>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역마차>는 1939년에 만들어진 영화다. 존 포드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영화를 굉장히 많이 만들었다. 1939년에는 네 편, 1940년에는 두 편, 1941년에는 두 편을 찍었다. 일 년에 두세 편씩 영화를 찍은 셈인데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욕망의 시기”를 시작한 시점의 첫 번째 영화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로 이 작품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영화평론가)사실 이 비디오에서 보여드린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많은 답변 중 하나이다. <역마차> 같은 경우는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발명이라 생각한다. <역마차>를 보면 모든 것이 새롭다. 어떻게 12명이 넘는 많은 인물들을 표현하는가, 어떻게 그 많은 인물들 간에 상호작용을 발생시키는가 등이 모두 완전히 새로우면서 조화로운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회화 작품이나 음악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와 똑같은 것 같다.


사실 평론가에게서 있어 가장 어려운 질문은 그것을 왜 좋아하냐는 것이다. 사실 평론가는 싫어하는 이유에 대답하는 것이 훨씬 쉽다. 내가 존 포드에 대해 책을 쓴 이유도 수년 동안 들어온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어떤 것을 좋아할 때 그것이 아름답고 멋지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늘 어떤 구체적인 이유를 대야 한다. 이런 것들을 왜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정말 답하기 어렵다. 여러분들은 왜 어려운 질문만 하는가(웃음).


김성욱그런데 태그 갤러거 씨는 처음에 나와 만났을 때 존 포드 영화 중 무엇을 좋아하냐고 질문했었다(웃음).


관객 1존 웨인이 존 포드의 영화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 배우인지 궁금하다. 또는 존 웨인의 연기 중 어떤 요소가 그를 그렇게 특별하게 만드는지 알고 싶다.


태그 갤러거사실 존 포드에게는 여러 명의 주인공이 있다. 그중 첫 번째 인물이 해리 캐리다. 존 포드는 해리 캐리와 1917년부터 1921년 사이에 21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존 포드는 해리 캐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화 제작의 비밀은 항상 눈 속에 있는데 왜냐하면 눈으로는 모든 감정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해리 캐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그가 항상 느긋한 방식으로 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해리 캐리는 관객들로 하여금 다가오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는 배우였다.


존 포드는 존 웨인에게 해리 캐리의 이러한 특징들을 연기하라고 조언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비평가들 사이에서 가장 환영을 받았던 것은 소위 메소드 연기였다. 그런데 당시 비평가들 사이에서 메소드 연기를 제일 못한다고 평가받은 배우 중 하나가 존 웨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존 웨인의 연기에 대한 커다란 오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서 코끼리가 춤을 추고 한쪽에서는 핵폭탄이 터지는 와중에 존 웨인이 커피를 홀짝이고 있다면 사람들은 코끼리나 핵폭탄이 아닌 존 웨인을 볼 것이라고 확신한다. 존 웨인의 연기 방식은 존 포드가 지도했던 굉장히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해리 캐리는 존 포드에게 연기뿐 아니라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영향을 주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홀로 떠나가는 것들이 중요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존 포드와 해리 캐리는 사막에서 같이 캠핑을 하거나 하면서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존 포드는 자신이 해리 캐리와 보냈던 상황들을 영화에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0년대 초기만 해도 감독, 배우, 작가, 촬영 감독 등은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함께 생활했다. 이것이 할리우드 이전의 영화 제작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 포드는 시간이 지나 영화 산업의 지형도가 변해감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포드의 영화를 보면 워드 본드나 헨리 폰다 같은 배우들이 지속적으로 출연한다. 그리고 이런 것이 포드가 지향한 공동체 정신이었다. 배우나 감독, 촬영 스태프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그 속의 감정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장 르누아르 감독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관객 2존 포드 영화와 관련해 ‘정치적 올바름’의 맥락에서 인디언에 관련된 논쟁이 반드시 일어난다. 나도 친구들에게 <역마차>를 자주 변호하곤 했다. 태그 갤러거 씨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을 텐데 그때마다 어떻게 존 포드를 ‘변호’하는지 듣고 싶다.



태그 갤러거나는 <역마차>에서 인디언을 그린 방식이 정치적 올바름에 관해 변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디언에 대한 표현 때문에 추천하기 어려운 영화가 있다면 오히려 <역마차>가 아니라 <수색자>일 것이다. <수색자>의 인디언은 악당으로서 훨씬 잔인하게 묘사된다. <역마차>에서의 인디언이 개척 시대에 존재하는 어떤 위험일 수밖에 없다면 <수색자>에서의 인디언은 더 위험한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수색자> 또한 인디언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백인들이 인디언에 대해서 갖고 있던 정신병적인 반응, 혹은 극단적인 차별들을 탐험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파치 요새>와 같은 영화들을 보면 인디언이 승리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인디언은 백인의 거짓말에 맞서는 굉장히 고귀하고 용감한 인물들로 묘사된다. 사실 나는 지난 50년간 존 포드를 변호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을 5년 내지 10년만 기다리고 나면 그때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곤 했다.

관객 3요즘도 ‘모뉴먼트 밸리’가 서부극의 어떤 상징으로써 등장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모뉴먼트 밸리를 처음 촬영지로 삼은 것이 존 포드가 아닐까 싶다. 어떠한 계기로 존 포드가 모뉴먼트 밸리에서 촬영을 시작하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모뉴먼트 밸리가 모든 서부영화에 등장한 것은 아니고, 동시에 모든 존 포드의 영화에 나온 것도 아니다. 존 포드는 모뉴먼트 밸리뿐 아니라 그와 비슷해 보이는 장소를 선정하기도 했다(그 중 하나가 <웨건 마스터>에 등장한다). 그렇지만 <역마차>에서의 모뉴먼트 밸리는 주목할 만하다. 특히 존 웨인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뒤쪽으로 암석들이 쭉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리스의 성전 같은 느낌을 주면서 정신적 힘까지 보여준다. 또한 암석 자체가 스스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존 포드가 특히 모뉴먼트 밸리를 좋아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정확한 답을 할 수는 없다. 처음에 말했듯 왜 어떤 것을 좋아하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존 포드 영화 속 모뉴먼트 밸리를 좋아한다면, 그 장면을 볼 때 어떤 느낌을 받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존 포드의 영화 속 장소들을 감상하는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회화의 배경 속 성이나 계곡, 강 같은 것들은 그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로 기능한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존 포드 영화 속의 모뉴먼트 밸리도 영화 속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자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역할을 한다(특히 <역마차>에서).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에 나오는 죽음의 계곡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참고로 존 포드 서부극의 로케이션에 대해 궁금하다면 카를로 가바첵 Carlo Gaberscek 이라는 사람이 쓴 책들을 추천한다.


관객 4존 포드의 영화 중 ‘이것이 존 포드의 영화구나’라며 의식하고 본 첫 번째 영화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때의 감상이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사실 나도 모른다(웃음). 나는 십대 시절 텔레비전에서 수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크레딧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심지어는 어떤 배우가 나오는지도 관심이 없었고 특히 감독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교에서 같이 지냈던 룸메이트는 감독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이름을 대면 그 친구가 그 영화의 감독이 누구인지를 말해 주었다. 그 감독이 바로 존 포드였다. 나는 존 포드를 알기 이전에 존 포드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욱존 포드가 무르나우의 영화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그 전에 독일 표현주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하지만 간단하게 존 포드가 무르나우에게 영향을 받은 것만 이야기한다면 분위기를 이용해서 인물이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일 것이다. 조명 같은 요소도 중요하지만 특히 움직임에 있어서 아들을 기다리는 워드 본드의 연기를 떠올려 보자. 그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들이 방에 들어왔을 때 벌떡 일어나기보다는 천천히 성경을 덮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런 느린 움직임은 나에게 마치 조각품들이 일어나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것이 바로 존 포드가 무르나우에게서 직접적으로 받은 영향이 아닌가 한다.

관객 5<역마차>를 보면서 이 영화가 소위 ‘클래식’의 대명사처럼 불리지만 동시에 얼마나 클래식과 거리가 먼지 새삼 느꼈다. <역마차>의 고전성에 대한 당신이 생각이 듣고 싶다.

태그 갤러거사실 나는 고전적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해리 캐리가 아들인 해리 캐리 주니어와 함께 <역마차>의 시사회에 참석했다. 그때 해리 캐리는 아들에게 “저것도 옛날에 했던 거야!”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이처럼 <역마차>가 만들어지기 20년 전부터 여러 번 반복되었던 것들을 이 영화는 다시 한 번 재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마차>는 그 당시에 매우 현대적인 영화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인 관념에서 존 포드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의 영화에서는 살인 행위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동시대 감독이었던 하워드 혹스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이다. 가령 <웨건 마스터>에서 주인공은 사람을 죽이고 난 뒤 총을 던져 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살인에 환호하는 것은 존 포드의 영화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역마차>의 링고는 예외이다. 하지만 링고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인다. 즉 야성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황야의 결투>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안에서는 야성의 법칙과 문명의 법칙을 동시에 사용한다. 가령 와이어트 어프는 연방 보안관이라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개인적인 복수에 나선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예를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상원의원인 제임스 스튜어트가 그렇게 위대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람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사람을 살해한 이유는 단순히 여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변호사였기 때문에 스스로 법적인 대상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성의 법칙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 미국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야성에서 이루어지는 부패 위에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관객 6장 마리 스트라우브는 존 포드야말로 가장 브레히트적인 감독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태그 갤러거<아파치 요새>를 보면 많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등장한다. 그 사람들은 매우 고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훌륭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명령을 받고 어느 순간 인디언들을 죽이러 떠난다. 포드에게 있어 이러한 행동들은 특히 군인들에게 일반적이다. 군인은 포드에게 명예로운 존재들이지만 동시에 사람을 죽여야 하는 근본적인 모순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인이 존 포드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생각한다. 존 포드는 항상 사악한 사람들이 사악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 사악한 것으로 이어진다고 말했었다. 이러한 이중성이야말로 생생히 살아있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라우브가 존 포드를 브레히트적이라고 했던 것은 <아파치 요새>의 마지막 장면을 두고 한 말이다. 선한 군인으로 등장했던 존 웨인이 사악한 군인으로 등장했던 설스데이의 모자를 쓰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그 장면에 대해 스트라우브는 존 웨인이 결국 억압하던 자의 의상으로 갈아입으며 관객들의 감정이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감독이 의도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예전에 스트라우브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실험영화가 무엇이냐는 주제가 대두되었다. 그때 스트라우브는 “실험영화란 <롱 그레이 라인>(1955)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롱 그레이 라인>에는 대포에 앉은 남자가 대포알을 떨어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의미심장한 것은 대포는 남자의 성기, 그리고 대포알은 고환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자의 성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만들어지지만 동시에, 영화 안에서 이곳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끊임없는 실망과 패배의 반복이 이루어지면서 두 개의 충돌되는 의미가 연결된다. 스트라우브는 비엔나의 어떤 미술관으로부터 평화의 벽을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한쪽 벽 전체를 방금 이야기한 <롱 그레이 라인>의 그 장면으로 묘사하였다.

김성욱추가적으로 답변하자면 <아파치 요새>의 마지막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전쟁에 반대했던 존 웨인을 결국 전쟁에 나서게 만드는 힘의 정체다. 그 알 수 없는 힘은 군대 혹은 국가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공동체의 파멸을 이야기하는 영화로 남는다.

관객 7좋아하는 것을 왜 좋아하는지 설명하기 힘들다고 했는데, 혹시 존 포드 영화에서 싫어하는 영화나 덜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지 알고 싶다.

태그 갤러거대체 이런 것을 왜 듣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웃음). 내가 싫어하는 장면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도노반의 산호초>에서 워터 스키를 타는 장면이다.


김성욱존 포드가 1894년생이라서 탄생 12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을 하게 됐다. 그런데 1894년생 감독 중에는 또 다른 감독도 있다. 킹 비더, 레오 맥커리 등 말이다. 1890년대생 다른 감독과 비교해 존 포드가 특별하다고 느끼는 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 영화’라고 했을 때 존 포드를 즉각 떠올리는 것처럼 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존 포드를 꼽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태그 갤러거1894년에 태어난 감독으로는 조셉 폰 스텐버그나 장 르누아르도 있다. 미국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 ‘미국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먼저 질문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결국 백인이라는 것이, 더 나아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미국적인 감독을 대라고 하면 나는 킹 비더와 하워드 혹스를 꼽을 것이다. 킹 비더가 신실한 사람을 대표한다면, 하워드 혹스는 매우 세속적인 욕망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존 포드는 아일랜드계의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이들과는 아주 다른 이방인이었다. 당시 아일랜드계 천주교 신자들은 흑인이나 멕시코, 아시아계의 사람들처럼 무시를 받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아이리쉬 카톨릭’의 특성은 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 존 포드는 역시 아이리쉬 카톨릭이었던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완벽하게 미국인라고 느낀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관객 8최근에 비디오 에세이 제작이 영화 비평이나 영화 연구의 한 방법으로 각광받고 있다. 책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다시 비디오로 제작할 때 어떤 것들이 가장 흥미로웠고 어떤 점이 어려웠는지 묻고 싶다.

태그 갤러거│처음에는 DVD에 수록하기 위해 비디오를 만들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25개 정도의 영상을 만들었다. 영화라는 시각적인 예술을 비평하면서 사진이라든지 영화 속 이미지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비효과적인 방법이다. 마치 음악을 비평하면서 악보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500자 정도를 줄거리 설명에 할애해야 하고, 또 장면을 설명하는 데 글자를 낭비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독자들은 그것이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라며 매도한다. 하지만 직접 화면을 보여주며 비평을 하면 독자들이 금방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비평에 있어 비디오는 의견을 전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을 왜 다른 비평가들은 사용하지 않는지 오히려 궁금하기도 하다(웃음).

김성욱│존 포드에 대한 책도 썼지만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에 대한 책도 썼다. 두 감독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태그 갤러거두 사람은 모두 천주교 신자이다(관객 웃음). 지금 여러분은 모두 웃으셨지만 이것은 굉장히 진지한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매주 성당에 가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그들의 세계관이나 사고방식은 모두 카톨릭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사람이 모두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해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고민하는 방식이 비슷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로셀리니 감독 역시 무르나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은 더 많은 공통점이 생각나지 않는다. 1년 후에 다시 와서 더 이야기하도록 하겠다(웃음).


김성욱│오늘이 존 포드 특별전의 첫날이다. 마지막으로 태그 갤러거 씨의 인사말을 듣겠다.


태그 갤러거오늘이 첫날이라면 이번 상영작들을 한 편도 놓치지 않고 다 보길 바란다. 그리고 존 포드는 1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걸 다 보여주지 않는다. 여러분은 존 포드의 다른 영화들도 상영해 달라고 이 극장에 항의를 하고 데모를 해야 한다!


정리│이상연 자원활동가

사진│곽혜원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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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20주년 존 포드 회고전> 


존 포드, 무덤의 시학



존 포드의 영화에 관해 많은 평자들이 대체로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는 편이지만, 나는 존 포드의 영화에서 무덤과 묘비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그의 특별한 시학에 제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무덤과 묘비는 최소한 모뉴먼트 밸리를 언급하는 것만큼의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런 무덤의 시학에 대해 언제든 다시 고쳐 쓰게 될 짧은 생각의 글이다.

모뉴먼트 밸리가 포드 서부극의 시원의 풍경으로, 인간을 소형화하는 광경이자 초원이 시작하는 세계이고 장엄한 무한성의 숭고이며 인간의 가능성의 장을 제공하고 잠재적인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풍경이라면, 무덤과 묘비는 대체로 인간의 작은 기억들의 흔적이 간직된 가족묘들이다. 모뉴먼트 밸리가 신전에 가까운 자연의 건축물이라면 무덤과 묘비는 인간의 쪽에 있다. 여기서 무덤은 단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학을 형성한다. 무엇보다 행동과 표상의 시학이다. 가령, 무덤 앞에서 인물들은 무언가를 고백하고 결심한다. 이는 또한 역사의 시학으로, 무덤과 묘비는 인간 삶의, 공동체의 무덤이다. 존 포드 영화의 인물들의 여정은 언제나 이런 두 개의 무덤을 통과해 나가는데, 마찬가지로 포드의 세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우리 또한 이 여정을 밟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존 포드를 서부극의 거장이라 말하는 것이 요즘은 도리어 불경한 말처럼 들리지만,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는 서부극이 아니었다면 그의 영화에 그토록 매혹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서부의 풍경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나로서는 그러하다. 서부극은 오직 미국 작가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적인 장르였고, 포드의 작품 가운데 비서부극이 때로는 서부극을 압도할 만큼 뛰어나더라도 동시대 할리우드 감독들과 비교 불가능한 작품으로 남게 된 그의 압도적인 유산은 결국 서부극이다. 포드의 작가성을 고유한 것이라 말하더라도 상대화될 수 없는 포드의 세계가 근원적으로 서부에서 기원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선택 이전에 아메리카라는 대지가 불가피하게 요청했던 것이다. 미국 영화가 태생적으로 국민적인 역사에 고유의 성격, 신념을 이룬 전통에 일련의 새로운 해석을 형성하도록 요청받았다면 - 영화가 민족국가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과제 - 하나의 예술이 국민 전체와 동일성을 이루는 풍경만큼이나 광대한 문제를 다루는 서사시로서의 서부극은 불가피했다. 서부극의 과제는 무엇보다 새로운 인간 공동체의 구축으로, 이상을 실현하는 기획이었다. 동시대 소비에트도 같은 꿈을 꾸었지만 오직 미국만이 결국 성공을 이뤄냈다.


어떤 연유로 오직 존 포드만이 이러한 과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가 이 작업을 소명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포드 영화의 영웅들처럼 그 또한 집단적인 이상에 격려받아 노력을 했던 것이다(그가 맥카시즘의 상황에서 세실 B. 드밀이 획책한 영화감독조합의 반공주의자 색출작업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나는 존 포드입니다. 서부극을 만들고 있죠”라고 했던 말은 유명한 일화다). 기실, 존 포드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란 이름이 없는 공동체, 서부의 땅을 평정한 무명의 병사,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이민자들, 사회를 구축하려는 작은 마을의 주민들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합중국의 건립을 도왔던 이들이다. 때론 보답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일상적인 영웅주의에 쌓인 개인에게 완수해야할 사명을 부여해 준 이들이 그들이다.


<황야의 결투>

그러므로 내게 가장 특별한 존 포드 영화의 순간들이란 인물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무덤과 묘비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발생한다. 가령, <황야의 결투>(1946)에서 내가 사로잡혔던 순간은 와이어트 어프(헨리 폰다)가 막냇동생의 무덤가에서 묘비에 적힌 연도 표기를 보며 짤막하게 한탄할 때였다(#사진1). “그래, 18년을 살았구나.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났구나. 너 같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그런 마을이 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란다.” 툼스톤은 악당들의 말에 따르자면 ‘서부에서 무덤이 가장 많은 동네’이다. 전직 보안관이었던 와이어트 어프는 동생의 무덤 앞에서 다시 총을 들기로 약속한다. 바로 전까지 그는 툼스톤의 보안관이 되어달라는 마을 주민들의 솔깃한 제안을 거절했던 터이다. 그는 총을 내려놓았다. 무덤과 폐허, 죽음의 이미지들과 어둑한 밤의 시간에 저 멀리 모뉴먼트 밸리가 보인다. 어린 동생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무덤 앞에서 와이어트 어프의 맹세는 그러므로 몇 가지 서로 다른 시간들의 연결을 작동시킨다. 영화의 배경은 1880년대 초반. 영화가 개봉된 것은 1946년이다. 포드가 2차 대전에 참전한 이후에 만들어진 첫 번째 영화다. 동생의 죽음은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던가. 어찌된 일인지 이 영화에서 그러나 죽음은 여전하고, 은퇴한 보안관은 다시 총을 들어야만 한다. 와이어트 어프의 다짐은 몇 가지 상황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의 의문이 거기에 있다. 그는 형제의 복수를 위해 총을 다시 들었지만(<역마차>(1939)에서 존 웨인이 총을 들었던 것도 형제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 복수를 좀 더 공적인 차원해서 진행하기 위해서는 보안관의 배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덤 앞에서 와이어트 어프의 맹세는 보다 진전된 미래를 위한 것이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 <청년 링컨>(1939)에서 링컨을 연기한 헨리 폰다가 무언가를 결심하는 것도 무덤 앞에서이다(#사진2). 링컨은 사랑하던 여인의 무덤 앞에서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무덤 앞에서 그는 세상을 떠난 이들과 매장된 희망과 약속, 어떤 결심과 약속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객들도 도래할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무덤 앞에서 매장된 희망이 무엇이었는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쳥년 링컨>


<황야의 결투>에서 무덤의 이미지가 일종의 은유였다면, 비교적 그의 초기작인 <순례자들>(1933)에서는 전쟁의 폐허를 보다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여인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도 각별한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아들을 전쟁에 내몬 한 여인이 전사자의 무덤을 찾아가는 극적인 순간이 있다(#사진3). 그녀는 고집불통의 초로의 미망인이다. 그녀는 아들을 1차 대전에 참전시키는데, 때마침 아들은 한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와의 연애를 달갑지 않게 여겼고, 모성의 질투에 눈멀고 이상한 애국주의에 사로잡힌 그녀는 아들을 전선에 내보낸다. 몇 개월 후, 아들은 프랑스 전선에서 명예의 전사를 하고, 그와 사랑을 나눴던 여인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1차 대전 종전 10주년을 기념해 정부가 전사자들의 어머니를 프랑스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초청했던 때에 어머니는 며느리와 손자가 아들의 묘비에 바치도록 요청한 꽃을 들고 전사자들의 무덤을 찾는다.

                                                                     <순례여행>


                                                                    <황색 리본>


<수색자>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무덤을 찾는 이들은 대체로 남자들이지만, 후기작으로 갈수록 여인들이 그 앞에 서는 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가령, <황색 리본 She Wore a Yellow Ribbon>(1949)이나 비록 묘비와 무덤은 등장하지 않지만(그런 점에서 존 웨인은 이름 없이 사라져간 무명용사에 가깝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 등이 그러하다. <황색 리본>에서는 6일 후면 은퇴를 앞둔 기병대의 대장 존 웨인이 영화의 초반부에 죽은 부인의 무덤을 찾는다(#사진4). “매리 커팅 브리틀즈. 1834년, 11월 10일에 태어나, 1867년 6월 2일에 세상을 떠나다.” 그녀의 무덤 앞에서 존 웨인은 영원히 군대라는 건 변하지 않을 거라며 그가 은퇴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경을 고백한다. 아마도 서부로 가서 캘리포니아에 정착할 것이며, 오늘은 조지 커스터의 기병대가 모두 몰살했다는 슬픈 소식이 있었다고 말한다.(존 웨인의 이미 <아파치 요새>(1948)에서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었다. <아파치 요새>는 동부에서 온 기병대 장교인 서스데이(헨리 폰다)와 ‘아파치 요새’의 실세인 요크(존 웨인) 간에 벌어지는 갈등을 통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서 보여주는 서부개척의 신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일찌감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화의 진위성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이다. 인종주의자인 서스데이는 자신의 진급을 위해 무리하게 아파치 일당과 대결을 벌이다 장렬하게 산화하는데, 사실 이 죽음은 영화가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무리한 시도 끝에 벌어지는 어리석은 죽음이다. 그럼에도 서스데이의 보잘 것 없는 무용담은 거대한 신화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를 존 웨인은 말을 삼가면서 묵인한다. 존 웨인이 그릇된 현실의 조작된 신화를 수용하는 것은 그가 비루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공동체가 그것의 응집을 위해 이러한 거대한 신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덧붙여 전쟁을 다루지만 전쟁을 회피하려는 몸짓으로 가득한 <기병대>(1959)의 특별함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만, 여기서는 줄이기로 한다). 그는 이어 부인의 묘비 앞에 물을 붓는데, 이 순간 묘비명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시클라멘 꽃을 가져온 젊은 여인 댄드리지이다. 그녀는 아침에 있었던 작은 소동극에 대해 사과하고 부인의 무덤에 놓을 꽃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녀가 떠나고, 존 웨인은 예의 무덤 앞에서 댄드리지가 자신의 부인처럼 착한 여인이라 되뇐다. 존 웨인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댄드리지의 결혼 후에 그녀에게서 받은 노란 꽃을 받아 무덤으로 향한다. 아마도 무덤에 바쳐진 꽃에 대해서 말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이 장면이 <수색자>(1956)에서 어린 데비가 무덤에서 스카의 그림자를 보는 장면과 형상적으로 조응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더 먼저일 것이다(#사진5). <황색 리본>에서의 여인의 등장이 죽은 여인에 대한 박애적인 표현이었다면, <수색자>에서의 그림자는 불안과 공포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이 두 장면이 기묘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존 포드 영화의 미스터리이다.


                                                           <리버티 밸러스를 쏜 사나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무덤과 묘비가 등장하지 않는, 하지만 가장 강렬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단연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일 것이다. 이 영화는 서부극으로 칭하기엔 꽤나 심심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뉴먼트 밸리가 배경에서 사라졌고, 도박장이나 목장, 술집 같은 남성적인 공간들도 희미해지더니 부엌, 집, 학교, 법정 등의 공간이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포드적인 공간과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란 그러므로 존 웨인이 술에 취해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다. 집도 법도 없는 무법자인 리버티 밸런스와는 달리 톰(존 웨인)은 이미 집이 있고, 또 새로운 집을 지으려고 한 사람이다. 단지 그에게 없는 것은 여인이다. 그가 집을 불태워 버리는 순간은 그러므로 여인을 잃은 것만이 아닌 그 자신이 거주할 곳을 버리는 행위이다. 집을 불태우는 것은 <수색자>에서 존 웨인이 최종적으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보다 더 격렬한 감정의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일관된 기호로 등장하는 주목할 만한 것은 선인장 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할리는 모자 상자처럼 생긴 상자를 들고 있다. 처음에는 그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밝혀지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톰의 관 위에 선인장이 놓이게 되면서 그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이 선인장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사진 6,7). 이 장면은 처음에 예고되긴 했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랜섬이 인터뷰를 하러 간 동안 할리는 마차를 타고 불타버린 톰의 집으로 가는데, 거기서 만발한 선인장 꽃을 보게 된다. 과거의 회상장면에서, 톰은 자기 집 옆에 있던 선인장 꽃을 선물로 할리에게 주는데, 할리는 부엌 옆의 정원에 그것을 심어놓는다. 나중에 그 꽃을 보며 랜섬은 할리에게 진짜 장미를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할리가 장미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여기에 댐에 만들어지고 물이 들어오게 되면 다양한 꽃들이 필 것이고 그때 장미를 볼 수 있게 될 거다”라 이야기한다. 여기서 장미와 선인장 꽃은 할리와 랜섬, 톰과 연결되어 있다.


                                                                    <아일랜드의 연풍> 


<아일랜드의 연풍>


<아일랜드의 연풍>(1952)에서도 꽃은 종종 남성과 여성의 정신적, 감정적 교감이 이루어질 때 하나의 기호로 등장한다. 영화의 첫 부분에 고향을 찾은 존 웨인의 어머니의 내레이션은 장미를 언급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된 설정도 집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어두운 과거를 숨긴 존 웨인은 고향 이니스프리로 돌아와 어머니 집을 방문해 새롭게 삶을 시작하려 한다.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새롭게 집을 건설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후 <수색자>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의 파괴된 집과는 꽤 대조적인 예외적인 영화다. <황야의 결투>가 그러하듯이 시대적 설정만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한국전쟁 직후에 촬영된 영화로(존 포드는 이 영화 전에 <이것이 한국이다>(1951)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전쟁과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코믹한 이야기의 깊숙한 곳에 자리해 날카로운 이미지로 남겨져 있다. 존 웨인은 전직 권투선수로 사람을 죽였던 어두운 과거를 지녔지만 이는 마치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미군 같다는 인상이다. 영화의 거의 설명되지 않는 이미지들 중의 하나는 존 웨인이 처음 등장할 때 화면의 전경을 차지하는 십자가이다(#사진8). 나중에 우리는 이 십자가와 동일한 형상을 그가 모린 오하라와 데이트를 하는 장소에서 보게 된다(#사진9). 존 웨인은 그녀에게 “이런 무덤가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무덤에서의 이상한 만남. 어둠 속에 놓였던 남자, 무덤가를 배회하던 남자가 그 어둠 가운데 밝은 빛으로 등장한 여인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긋난 시간성,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교차로 이루어진 무덤과 묘비에 대한 더한 설명이 아직 남았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이 이상한 이미지들 앞에서 짧은 생각을 해보는 수밖에는 없을 뿐이지만.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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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영화: 작가, 요시다 기주의 작품 세계

 

 

 

 

 

주로 요시다 요시시게로 알려진 요시다 기주(이하 요시다)는 1933년 2월 16일 후쿠이현 후쿠이시의 직물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고, 동경 니혼바시에 있던 지점에서 지냈다고 한다. 요시다가 태어난 지 2년 후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요절하게 되는데, 그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부재의 흔적은 아마도 이 시절부터 내재화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요시다는 2차 대전 중 대공습을 피해 동경으로 이사 간 이후부터 프랑스어를 배우고, 본격적으로 구미의 여러 영화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를 읽고 매혹되어 대학 시절에는 사르트르의 작품에 심취한다. 그런 문화적인 영향 탓일까, 요시다는 동경대학교 문학부 불문과에 진학해 대학교수를 지망했다. 하지만, 이전부터 눈이 좋지 않던 아버지의 실명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 그는 쇼치쿠 오후네 촬영소 연출부에 조감독으로 입사한다. 요시다는 거기서 입사 10일 만에 현장에 보내져, 1년 선배인 오시마 나기사와 알게 되고 그가 소속된 팀의 조감독으로 일하게 된다.

 

요시다의 본격적인 영화활동은 그 후, 신인감독으로 1년 정도 활동한 시기에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대한 창작 활동을 펼치면서 나기사를 비롯한 7명과 동인잡지 『7인』을 편찬하면서 시작했다. 이때 썼던 『해변의 묘비 海辺の墓標』가 기노시카 게이스케의 눈에 띄었고, <노을진 구름 夕やけ雲>(1956)부터 <후에후키강 笛吹川>(1960)까지 4년간 기노시타의 조감독으로 지내면서 그에게 스튜디오 시스템 안의 제작방식에 대해 지도받았다. 물론 굳이 요시다 감독의 작품 속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을 말한다면 오즈 야스지로일 것이다. 그가 오즈 야스지로에게 영향을 받고 계승했던 것은 단순한 형식의 모방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즈만이 지니고 있는 모더니티, 항상 긴장감을 지니고 ‘지금/현재’와 맹렬하게 투쟁하는 동시대인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계승을 말한다. 2003년도에 나온 15년 만의 신작 <거울의 여자들 鏡の女たち>이 그 대표적 작품인데, 요시다는 영화에서 ‘본다’는 행위에 대한 모더니즘적 과제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빠르게 재편성되는 전후 일본사회 속에서 소외를 바라본 그는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의미’만을 전달하는 ‘영화’라는 제도=장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었다. 때문에 그는 전후 일본이라는 상황과 작가로서의 주체성을 문제 삼는다. ‘하나의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 등장인물과 관객을 동일시하고 의미를 조종하는 상업 영화에 대한 그의 비판은 무조건적으로 공유되는 ‘일본’이라는 서사를 뒤흔드는 새로운 작품으로 전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약: 패턴화에 대한 강한 거부

 

 

 

 

요시다 감독의 <쓸모없는 녀석 ろくでなし>, <피가 마른다 血は渇いている>등의 초기 작품은 기존 상업 영화의 패턴화된 반항과 감동적인 휴머니즘이란 것에 조소하는 작품이다. 그에게 기존의 형식을 빌려 작업을 하는 것은 패배를 의미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전위영화 작가들도 기존의 형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형식이 내포하고 있는 사상에 자신이 가둬지는 것을 의미했기에 거부했었다. 하지만, 요시다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든 형태를 관객에게 강요하는 것도 관객에게 사유할 자유를 빼앗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다.


요시다 기주는 만드는 자와 보는 자의 어디까지나 평등한 대치, 이것이 영화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영화 속에서 작가에 의해 확실한 결론이 맺어진다던지, 감정에 호소하여 어떤 특정 생각에 가치를 부여하는 영화를 피하고자 했다. 그것은 관객의 자유를 빼앗는 작가가 지닌 권력에 의한 폭력적 개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시다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 중,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확실히 알아볼 수 있도록 묘사하지 않았다. 기존 상업 극영화에서 보이는 선악의 구분은 작가라는 권력을 지닌 한 사람의 가치판단으로 결정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극 중 인물들의 행동이 서로 연쇄를 이루고, 이러한 행동들이 서로 전체적으로 이어져 중층적 상황으로 겹쳐진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전체성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구성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점과 점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 각각의 점들은 언제든지 끊어짐과 이어짐을 반복한다. 이는 똑같은 것의 반복, 즉 자기복제가 아니라 자기부정을 통한 반복, 변주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요시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작품 전반에서 작가가 지닌 특유의 개성이 발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전작을 부정하고, 사고의 부단한 운동으로서의 영화를 모색해왔다. 자기모방으로 인한 패턴화된 작품들이야말로 그가 경멸하며 피하고자 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패턴화도 거부하고, 쇼치쿠라는 거대 영화사를 나온 그가 틀에 박힌 상업 영화에 던진 화두는 일본 영화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제도’가 지닌 터부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요시다는 카메라 저편에 위치한 권력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있어, 영화가 지닌 남성적 재현방식을 오카다 마리코(岡田茉莉子)라는 배우의 신체성을 통해 탈구축화하였다. 그는 영화가 지닌 허구성에 대해서 자각적인 시선을 지니고 그러한 허구성을 전경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융합과 반발의 중층적 세계, 요시다의 영화들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구축된 그물망과도 같은 연결조직은 앞서 언급한 <거울의 여자들>에서 그 집대성을 이룬다. <거울의 여자들>은 통속적 멜로드라마에 회의적인 시선을 지닌 요시다가 비평적으로 만든 멜로드라마이다. 이 영화의 연관성은 요시다와 오카다가 함께 작업한 최초의 작품 <아키츠 온천 秋津温泉>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바라본다’라는 행위에서 나타나는 표상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에 접근하고 있다.

 

<거울의 여자들>에서 요시다는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극을 일종의 내적 규범으로서 구축하면서, 시선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180도 법칙을 어느 특권적 순간을 위해서 보존하고 있다. 외화면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시선은 배역으로서 그녀들의 내면을 나타내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본다’라는 행위 자체가 강조되고 있다. 마치 그녀들은 스스로에게 부과된 ‘목격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적 영화 제작에 항상 반발하고 도전해 왔던 요시다는 영화가 지닌 허구성을 스크린 앞으로 드러낸다. 그는 배우를 영화가 지닌 허구성의 상징으로서 사용하는 한편, 허구성 그 자체를 은폐해버리는 형식으로서의 리얼리즘에 의혹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허구의 현실성 속에서 오카다 마리코라는 여배우의 신체를 통해서 요시다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울mise-en-abîme의 세계를 구현해낸다.

 

 

오카다 마리코라는 여성, 배우, 타자 그리고 환상

 

 

 

 

한 살 때 무성영화 스타였던 아버지 오카다 토키히코(岡田時彦)를 여의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배우가 되어, 그 이후 150편의 경력을 지닌 오카다 마리코는 한 명의 여배우로서, 제작자로서,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로서 요시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존재이다. 요시다와 결혼하기 전에는 토호와 쇼치쿠의 간판 여배우로 활약해 왔던 그녀였다. 만약 그녀와의 긴 시간 동안 공동 작업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요시다 기주의 영화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시다의 영화에서 오카다 마리코라는 존재는 구조적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오카다 마리코에게 집약된 요시다 영화의 여성상은 여배우라는 페르소나와 사적인 개인 간의 대립이 아닌, 어디까지나 여성성이 지닌 허구성을 스크린 안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허구로서의 여배우와 여배우 자신의 현전성 사이의 미묘한 관계성에 요시다 자신이 상상하는 ‘영화적 제도’가 지닌 모순과 허구를 겹쳐 제시하고 있다. 요시다는 배우라는 육체, 여배우의 육체가 연기라는 틀을 넘어서 관객과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되는 것에 절대적 신뢰를 두고 있었다. 배우의 육체를 통해서 영화의 의미는 작가/남성의 시선이 부여한 의미를 벗어나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여배우와 여성이라는 경계, 즉 여배우라는 허구와 여성이라는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고, 오히려 여배우라는 허구의 리얼리티가 부각된다. 요시다의 작품 속에서 여배우란 존재는 그 스스로 ‘거울’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들은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장하거나, 화장하는 것으로 영화의 형식을 동요시킨다. 요시다에게 있어 ‘여성 속에 내재한 여배우성’은 남자에게 있어서는 바라볼 수밖에 없는 타자의 시선을 비추는 거울처럼 굴절된 자신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따라서 그의 영화가 지닌 타자성은 항상 여성을 매개로 하여 나타난다.

 

오카다 마리코가 지닌 특이성은 그녀 스스로의 타자성, 부재성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그녀가 부재를 반영하는 것에 의해 그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에 있다. 이러한 부재성이 역으로 제도적인 젠더 규범에 대한 강렬한 반항으로 작용한다. 타자성을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단지 ‘거울’로서 반영함으로써 남성들이 숭배하는 ‘여성’이란 젠더를 이화시킨다. 오카다 마리코라는 배우의 신체를 통해서, 그녀의 시선을 통해서, 그 목소리를 통해서 요시다 기주는 자신만의 독자적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다시 시선으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요시다 영화 속에서 외화면을 바라보는 오카다의 시선은 외화면에 존재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외화면의 텅 빈 공간만을 바라보고 있다. 외화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외화면의 텅 빈 공간이 서로 겹쳐지면서 의미의 부재와 신체적 행위의 현전 속에서 다층적 의미가 생성된다. 환상과 현실이 정해지지 않는 세계, 영화에서 그녀의 클로즈업은 묘한 매력을 더하며 두 세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의 영화에서 환상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주체가 지닌 ‘욕망의 대상’이 아닌 ‘장면으로 현전하는 무대’이다.

 

요시다 기주는 자신의 타자성을 여배우성=여성성으로 전이시킴으로써 이야기를 탈구축하는 형태로 원인-결과를 추구하는 고전적 극적 구조를 부정하고 해체시킨다. 이런 ‘영화’라는 제도=장치에 대한 도전과 반발의 정점에는 오카다 마리코라는 여성, 배우, 타자가 있었다. 감독은 오카다가 바라보는 외화면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자신을 위치시켜 ‘보는 주체’에서 ‘관찰되는 객체’가 되어 타자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화라는 제도=장치 안에 내재된 권력적 시점을 드러낸다. 스크린 너머의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부재는 관찰자와 관찰되는 자를 시각적으로 같은 위치에 놓아 제도가 지닌 허구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새로운 관계성을 모색하게 만든다. 요시다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영화를 해체하고 계승하면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낸 작가이자, 그의 작품들은 ‘영화’라는 제도=장치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반(反)영화라 할 수 있다.

 

 

한태준│일본영화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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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과 암컷의 관계, 그 풀 수 없는 삶의 비밀

 

수부는 음화(淫畵)를 팔아서 먹고 사는 사내다. 그는 미망인 하루의 집에 하숙 들어 살며 그녀와 애인 사이로 지낸다. 하루의 아들 코이치는 엄마 품에 안겨 수부에게 돈을 뜯어내려 한다. 딸 케이코는 수부의 음탕한 시선을 거절하지 않는다. 이마무라 쇼헤이를 잘 아는 관객이라면 예상하겠지만, 사실상 가족처럼 살아가는 이 네 사람 사이에 어떤 일정한 질서는 없다. 그가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을 거쳤으나, 사부의 정연한 세계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신 만의 길을 찾아 떠났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세계는 어지럽다. 인간의 욕정 때문이다. 그 욕정이 오즈의 세계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마무라의 세계에서는 종종 자연적 상태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잦은 충돌을 빚는다. 수부, 하루, 코이치, 케이코, 네 사람의 욕정이 일으키는 작용과 반작용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끝내 부수어버린다.

“그 누구도 수컷과 암컷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조수를 앞에 두고 수부는 말한다. <인류학 입문>에서 탐구의 대상은 수컷이나 암컷으로서의 인간이다. 수컷과 암컷 외의 명명법은 허울에 불과하다. 특히,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처럼 가족적 위계 내에 자리 잡고 있는 호칭은 제대로 정박하지 못하고 늘 불안하게 떠돈다. 딸이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남동생이 아들이 되기도 하며, 여동생이 아내가 되기도 한다. 이마무라의 현미경에 포착된 세계에서 가족이라는 기계는 작동을 멈추고 인간들 사이에는 욕정의 난반사가 일어난다. 그렇게 성과 욕망은 모든 문명적 조리에 선행하고, 포르노그래피는 인간에 관한 학문이 될 수 있다.

들여다보다. 그것은 이마무라 식 인류학의 중첩적 구조를 특징짓는 행위다. 수부가 만든 포르노그래피는 동시에 수부에 관한 포르노그래피다. 하루가 죽은 남편의 환생으로 여기며 매일 들여다보는 잉어도 동시에 매일 하루를 지켜보고 있다. 렌즈의 안쪽과 바깥쪽이 뒤바뀌면서, 삶과 영화적 기록의 경계도 얇아진다. 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부에게 제작비를 대려는 의사 양반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남자의 욕망은 영화 속으로 흘러들고, 영화 속 사태는 남자에게로 전이된다. 인물들은 주체와 대상의 자리를 끊임없이 헤맨다. 다만 그 과정에서 더욱 혹독하게 시달리며 그 과정을 더욱 씩씩하게 견뎌내는 쪽은 여자들이다. 그들은 남편 혹은 아버지 자리에 대신 앉게 된 남자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생명체로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질서가 기능한다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바로 그런 동물적 질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부는 하루를 닮은 인형과 함께 태평양 바다로 흘러든다. 그는 그녀에게 털을 심어주며 아파도 조금만 참으라고 말하지만, 하나의 고통이 끝나면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라고 말한다. 섹스를, 고통을, 살아있음의 증거로 받아들이며 견뎌나가는 것.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본들 명쾌하게 이해하거나 답을 내리기 어려운 것. 욕정에 젖은 인간이 삶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일 뿐이라고, 누군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태평양 바다가 경쾌하고도 무심하게 일렁이며 이쪽을 내다보고 있다.

 

글/ 이후경(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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