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감미로운 공포


클레르 드니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이다. 그녀는 뉴커런츠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그리고 신작 <금요일 밤>을 들고 부산을 찾았다. <금요일 밤>은 엠마뉴엘 베른하임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나와 애인의 방으로 이사하려는 한 여성의 불안한 심리를 그렸다. 그녀는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꽉 막힌 도시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오려는 남자를 거부하며 차창 바깥의 세계를 쳐다본다. 그리고 우연히 한 남자를 받아들인다. 낯선 이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타자와의 접촉과 만남. 여기에 침입이 발생한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의 모든 영화는 어떤 도착, 어떤 만남, 혹은 어떤 방문을 그린다. 여기에 낯선 이에 대한 매혹, 그(녀)를 받아들일지의 주저와 결정, 두려움의 감각과 미묘한 쾌락, 그리고 갱신되는 욕망들이 있다. 그녀는 침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두려움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삶에는 그런 무수한 침입이 있기 때문이다.


드니와의 두 번째 만남도 부산에서이다. 2004년, 이번에 그녀는 <침입자>를 선보였는데 이 작품의 일부 장면을 부산에서 촬영했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남자가 잠깐 머무는 장소가 부산이다. 그녀는 부산이 <침입자>의 두 부분, 즉 지옥과 천국의 중간 지대인 림보의 공간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부산은 전반부의 어두운 분위기와 후반부의 따뜻한 이미지를 연결하는 공간으로, 생동감과 활력으로 가득한 공간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하지만 당시 관객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지는 않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자신을 부산 관객이라 말한 몇 명이 던진 날선 질문들을 기억한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주인공 (백인) 남자가 부산의 호텔에서 맹인 (한국인) 여성의 마사지를 받는 장면이 구설수에 올랐다. 마사지를 하는 맹인 여성의 손가락이 남자의 피부를 만지고, 그의 몸에 있는 상처를 건드릴 때 남자의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린다. 이 장면에 관객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특별한 순간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중심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드니는 여기서 맹인 여성이 손으로 타인의 몸과 접촉할 때의, 피부를 접할 때의 감각과 고통을 영상에 가져오고 있다. 서로 다른 피부, 타자의 외관을 넘어서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다. 남자의 몸에 있는 수술 자국들, 검붉은 기미, 주름들이 마치 풍경처럼 펼쳐지고 있는데, 이는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이방인이 접하는 감각적인 풍경 같다. 서로 다른 문화적, 사회적, 인종적 배경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섞이고 침투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관능적이고 감미로운 공포의 세계이다.


이후 나는 드니를 부산에서, 그리고 전주에서 다시 만났다. 헤어질 때 언제나 그녀에게 ‘서울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었다. 이번에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은 그런 작은 소망이 실현되는 기회다. 국내에서 그녀의 근작 <돌이킬 수 없는>이 개봉하긴 했지만(한국에서 유일하게 개봉한 작품이다), 여전히 관객들에게 드니의 작품은 낯설다. 그런데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드니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결국 그런 낯섦에 접근하는 것이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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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탈 아커만 회고전 - 시네토크]


“제스처와 복화술의 미학”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 

조혜영 서울국제영화영화 프로그래머 시네토크





오늘 시네토크의 제목은 ‘제스처와 복화술의 미학’이다. <잔느 딜망>을 중심으로 샹탈 아커만이 가진 씨네페미니스트 작가로서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와 여성 작가성, 소수자 작가성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커만의 영화를 페미니즘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말을 한다. 왜냐하면 아커만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를 여성영화제나 게이 필름페스티벌에서 틀지 말라는 언급을 자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터뷰 때문에 샹탈 아커만이 레즈비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부인한다거나,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샹탈 아커만의 경우 소수자, 여성으로서의 작가성이 왜 이렇게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밖에 나타날 수 없는지에 대해서이다.


샹탈 아커만은 이름 앞에 많은 수사가 붙는 감독이다. 우선 아커만은 여성이며 유대계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은 나치를 피해 폴란드로 이주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이 점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인 <노 홈 무비>에 잘 드러나는 부분인데, 아커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2세라는 특별한 트라우마를 어린 시절부터 겪는다. 또한 그녀는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커만은 벨기에의 영화학교에 다니다가 18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영화를 혼자 만들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거래소에서 일하거나 극장 티켓을 파는 일을 통해 제작비를 마련해고, 1968년에 첫 단편을 만들었다. 그 작품이 바로 <내 마을을 날려버려>다. 그리고 오늘 본 <잔느 딜망>은 약 13분 길이의 <내 마을을 날려버려>를 3시간 21분으로 늘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영화의 주제는 물론이고, 영화 안에서 건축적 구조를 다루는 방식, 그리고 실내라는 공간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굉장히 비슷하게 표현된다. <잔느 딜망>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부엌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마을을 날려버려>에서도 역시 부엌에서 구두 닦기, 스파게티를 만들기, 청소 하기 등의 가사 노동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스에 불을 켜고 폭발하는 것이 이 영화의 엔딩이다.

즉, 제목은 ‘내 마을을 날려버려’인데 정작 영화에서 날려버리는 것은 부엌이다. 부엌은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이자 건축물이다. 다시 말해 여성을 계속해서 가사 노동에 묶어두는 공간이다. 하지만 <내 마을을 날려버려>는 그 공간 안의 여성을 우울하게만 다루지 않는다. 아커만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 연기로 즐거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부엌은 파괴해야 할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아주 사랑스러운 행동들이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마찬가지로 <잔느 딜망>에서 잔느가 행하는 가사 노동들은 관객을 매혹하는 측면이 있다. 요리하는 모습, 커피를 따르는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지고, 일하는 여성의 손길에 대한 애정과 사랑스러움이 보인다. 여성의 가사 노동이 잘못됐다고만 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해 여성의 주체성을 버리는 것과 같다. 가사 노동은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 주체가 살아가는 삶 안에 포함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어머니가 가사 노동 안에 있는 것이 싫다고 해서 어머니의 삶을 부인하거나 경멸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주체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삶을 경멸하거고 낙인찍지 않는 것. <잔느 딜망>에서는 여성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테레사 드 로레티스를 비롯한 1970년대 씨네페미니스트 영화학자들이 <잔느 딜망>을 극찬했던 건 내용적 측면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페미니스트적인 주제를 전달할 수 있는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잔느 딜망>의 미학적인 특징 중 하나로 ‘리얼타임’을 들 수 있다. 인물의 행위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이에 해당한다. 영화에서 리얼타임 연출은 주로 잔느가 설거지나 요리 등의 가사 노동을 하는 순간에 등장한다. 한 쇼트는 대개 하나의 공간을 보여주는데, 가령 부엌에서 한 쇼트를 보여주다가 불을 끄고 나가면 숏이 끝나는 식으로 영화의 대부분이 진행된다. 공간을 열고 닫는 연극적 요소가 분명하게 보인다. 이를 통해 실내 건축 안에서 여성이 굉장히 많은 노동을 한다는 것, 또 그 노동들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잔느는 부엌에서는 가사노동을, 거실에서는 아들에게 각종 서비스를 하고, 침실에서는 성 노동을 한다.


아커만이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대로, 영화 전체가 온전한 리얼타임은 아니다. 3일의 이야기를 각각 한 시간 정도 보여준다. 뒤로 갈수록 하루가 조금씩 길어지는데, 그러면서 매번 잔느가 규칙적으로 해 온 일과가 점차 틀어진다. 이때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 같지만 일어나지 않으면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서스펜스 요소 중 하나가 리얼타임이 아닌 장면에서 나온다. 이 영화에서 리얼타임으로 보여주지 않는 장면은 무언가 억압되어 있지만 말로 옮기기 힘든 순간, 혹은 말하기 힘들기 때문에 억압되는 순간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잔느가 처음 남자 손님을 받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침실 안에서 일어나는 성행위를 직접 보여주는 것은 마지막의 살인 장면이 처음이다. 그전까지 매춘 장면은 잔느가 남자 손님을 받아 침실로 들어가는 모습에서 끝났다. 그리고 고정된 카메라가 계속 복도를 비추다가 순간 빛이 바뀌며 잔느와 남자 손님이 방에서 나오는 식으로 보여주었다. 잔느가 성노동을 하는 순간 시간의 생략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지의 경제학을 생각해보자. 어떤 여성의 이미지가 가장 많은 돈을 벌까. 그건 바로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그려질 때다. 많은 상업 영화에 가해지는 비판 역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것이엇다. 남성의 일방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이를 통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논의를 많이 해왔었다. 그리고 <잔느 딜망>은 경제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즉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있다. 대신 너무 일상적이거나 우소해서 우리가 잘라내기 쉬운 장면들, 가령 성노동 후의 목욕 장면이나 욕조를 청소하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영화 이미지의 경제학 측면에서 쓸데없다고 생각되는 장면을 리얼타임으로 보여주고, 그 반대의 장면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아커만은 <잔느 딜망>을 페미니즘적 인식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아커만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여성 촬영감독인 바베트 망골트와 함께 했고, 편집이나 제작 역시 여성 스탭들과 함께 했다. 또한 <잔느 딜망>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잔느 역을 맡은 델핀 세리그다. 델핀 세리그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이나 알랭 레네,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또 스스로 연출을 하기도 했던 감독이기도 하다. 당시 델핀 세리그는 한 명의 평범한 배우라기보다는 누보로망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주 지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제2의 성』을 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추종자이기도 했다. 샹탈 아커만이 당시 <나, 너, 그, 그녀>로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그런 델핀 세리그와 작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델핀 세리그가 스물 다섯살의 신인 감독인 샹탈 아커만과 함께 작업한 것은 그녀 스스로 아커만의 영화가 가진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델핀 셀리그가 영화의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샹탈 아커만과 함께 많은 토론을 했기 때문에 이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잔느 딜망>은 한 마디로 체험의 영화, 몸의 감각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인물의 행위를 느끼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가사 노동의 반복성, 그리고 그에 대해 여성이 가진 강박을 느낄 수 있다. 잔느가 매춘과 부르주아 여성으로의 정체성, 그리고 아들을 돌보는 삶을 동시에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각각의 공간 안에 규칙적으로 역할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성이 점점 깨지고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남는다. 규칙성이 틀어지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보인다. 어떤 파국의 균열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들의 대사에서 남성의 성기를 칼에 비유하는 장면이 있는데, 기호학적으로 해석해보면 영화의 엔딩에서 잔느가 남자를 가위로 찔러 죽이는 것과 연결할 수 있다. 잔느의 살인 행위는 여성에게도, 비록 억압되어 휴면 중이지만, 분명한 폭력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잔느의 아들은 여성은 사랑이 없으면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잔느는 사랑 없이도 오르가즘을 느끼다. 잔느가 오르가즘을 느끼는 후반부 장면은 가부장적 자본의 통제와 구속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영화가 개봉했던 초기에는 많은 비평들이 잔느가 오르가즘을 느끼는 장면을 마치 없는 것처럼 대했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잔느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인데 어떻게 오르가즘을 느끼는가,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잔느가 오르가즘을 느끼는 순간은 남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잔느 ‘자기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성적 쾌감마저 남자와 공유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도리어 자기만의 것이 필요하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긴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잔느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고, 빛이 통제되지 않은 채 잔느의 얼굴 위로 흩어지고 있다. 이 빛은 잔느가 중산층이 되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상가 건물 위에 있는 집은 노동자 계급의 집이다. 잔느는 실내에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유지하려 하지만 바깥의 빛이 끊임없이 실내를 침입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잔느는 빛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느낀다. 잔느는 비로소 <내 마을을 날려버려>의 폭파 이후처럼 ‘이후의 순간’, ‘나만의 시간’을 가진다.

아커만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리얼타임에 관심이 없다. 지속의 시간을 조작한 극적 시간이나 관습적인 영화 시간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나의 시간’에 관심이 있다.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자신만의 시간 속에 있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볼 때는 감독의 시간에 지배당한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이들에게 다르다. 나의 5분은 당신의 5분과 같지 않다. 영화를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말하는 건 내게 칭찬이 아니다. 내 영화에서 당신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바로 그것이 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저항감을 느끼는 이유다.” 영화의 마지막 긴 롱테이크는 타인의 시간 속에서만 살면서 자신을 통제하려 했던 잔느가 마침내 자기만의 시간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맑시스트들이 봐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야말로 노동 영화의 정수라고 느껴진다. 흔히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 대해서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를 영화로 옮긴 작품이라고 이야기 한다. 영화에 출연한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영화에게 주었음에도 영화가 어떻게 제작되는지 모른다. 이것이 맑스가 이야기한 소외다. 그래서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제작의 과정을 영화 ‘안’에서 보여주려 한다. 가령 필름이 어떻게 편집되고 어떻게 촬영되는지 보여준다. 베르토프는 혁명을 위해서는 우리 눈부터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영화의 눈, 즉 ‘키노-아이’를 주장한다. 그리고 샹탈 아커만의 경우, 맑스가 이야기했던 생산과 노동 문제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을 다룬다. 임금마저 받지 못하는 노동, 그리고 감정과 노동이 구분되지 않는 노동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잔느 딜망>은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 못지않게 맑시즘적 논의가 가능한 영화다. 노동, 감정, 그리고 언어적 표현 사이에 있는 몸의 움직임을 제스처라고 한다면, <잔느 딜망>에서 나타나는 아커만의 작업방식을 ‘키노-제스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정리 ㅣ황선경 자원활동가

사진 ㅣ송재상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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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섬뜩함

-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몰로흐>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권력 4부작’ 중 첫 번째 영화인 <몰로흐>는 히틀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권력의 민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두 번째 영화인 <황소자리>는 레닌을, <태양>은 히로히토 일왕을 등장시켰다. 구체적인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지만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던 자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세 영화는 같은 화법을 취한다. <파우스트>는 전작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야기하려면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 것이다). 감독은 히틀러의 권력이 기세등등하던 1942년을 배경으로 히틀러와 괴벨스, 히틀러의 부관이었던 마틴 보르만, 그리고 히틀러의 애인인 에바 브라운 등이 알프스의 고립된 저택에서 보내는 하루를 그린다.

그런데 정치적,역사적으로 굵직한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특별한 사건이나 팽팽한 긴장이 가득한 분위기를 그리는 건 아니다. 반대로 감독은 그냥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잠자리에 드는 그런 보통의 풍경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몰로흐>가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심지어 몇몇 장면은 블랙 코미디 같다는 느낌마저 준다. 이를테면 국가 운영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마틴 보르만은 그 육중한 덩치 때문에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는 ‘몸개그’를 선보이며, 히틀러는 눈밭에 나가 용변을 보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에바와의 잠자리를 피하려는 히틀러의 신경질과 우울증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감독은 최고 권력자들이 지닌 인간적인 모습들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며 이들이 두른 상징적 이미지를 부순다.


소쿠로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끌어들인다. 이미 영화가 시작할 때 감독은 죽은 개와 그 사체가 뿜는 악취를 강조하며 이 영화에 죽음의 기운을 드리운다. 그리고 틈틈이 무기력하게 늘어진 히틀러를 보여준 뒤, 마지막 장면에서 에바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히틀러에게 말하게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어요.” 즉 <몰로흐>는 수백 만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주역들을 등장시킨 뒤 이들을 조롱하고, 나아가 이 권력자 역시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히틀러 역시 약한 인간일 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몰로흐>의 이런 주제는 일견 당연한 것이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너무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역사의 특별한 사례에 적용시킬 때는 어떤 허무함이 동시에 발생하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학살한 권력자 중 하나인 히틀러도 죽음이라는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한 명의 초라한 인간일 뿐이라는 허망한 결론 말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히틀러에 대한 연민으로도(‘그 역시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보통 사람이었다’), 또는 역사에 대한 지독히 냉소적인 태도(‘히틀러가 죽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결국 죽고 말았다’)로도 읽히는 <몰로흐>의 이런 접근 방식은 어떤 당혹감마저 안겨준다. 영화 공개 후 작품과 소쿠로프에 대해 반동적이라는 비판이 나온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동의 여부를 잠시 미뤄놓고 생각해보면 <몰로흐>는 절대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질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몰로흐>는 히틀러의 인간적인 약함 그 자체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이를 통해 ‘히틀러’로 상징되는 절대적인 권력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규정짓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드러내려 한다. 이미 작동 중인 절대적인 권력과 그 권력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자 사이에 필연적인, 또는 개연성 있는 연결 고리가 없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즉 <몰로흐>는 권력의 비인간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그려진, 히틀러가 가졌다고 가정되는 권력은 더욱 공포스러운 것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논리적인 이해 너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무기력해 보이고 죽음을 피할 수도 없는 히틀러가 어떻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까, 란 질문. 그리고 그렇게 행사되는 권력이 불러들인 파국 앞에 어떤 그럴듯한 설명도 내놓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 무력감과 공포.


그런 맥락에서 <몰로흐>의 가장 문제적인 장면 중 하나를 보자. 히틀러와 측근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에바 브라운이 마음에 안 드는 자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자는 농담을 한다. 그러자 히틀러는 묻는다.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가 어디지?” 분위기는 금새 냉랭해지고, 사람들은 서둘러 화제를 바꾼다. 많은 전범들이 실제로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부인했음을 상기하면 이는 끔찍한 농담이자 도발적인 문제 제기다. 그러나 이 장면은 히틀러의 권력이 실은 이미 히틀러라는 개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수백 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정작 ‘권력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인물이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말이다.

그렇기에 <몰로흐>는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시 강조하자면, 이 영화는 권력과 권력자의 성격에 대해 어떤 명쾌한 설명을 제시하기 보다는 이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차원에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른 어떤 영화보다 2차 대전 당시의 역사를 오싹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우스꽝스러운 언행을 보이는 영화 속 권력자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과 전쟁으로 부서져 가는 세상의 이미지가 아무렇지 않게 같이 제시될 때 권력은 결국 불가해한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즉 <몰로흐>가 그리는 건 우리의 이해 자체를 거부한 채 버티고 서 있는 권력의 섬뜩한 모습 그 자체이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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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운명의 멜랑콜리

-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러시아의 영욕이 ‘겨울 궁전’ 속에 모두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의 마지막 왕조인 로마노프 왕가의 궁전으로,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당한 곳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10월>(1927)에서 화려함의 극치로 묘사된 바로 그 궁전인데, 지금은 세계 최대 규모인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만약 대홍수로 세상이 파멸 직전에 놓인다면, 소쿠로프는 에르미타주를 ‘노아의 방주’에 싣고자 한다. 그곳엔 러시아를 넘어 인류의 찬란한 영광이, 또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 모두 들어 있어서다.

바로크 회화의 경외감


<러시아 방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겨울 궁전에서 시작한다. 로코코 스타일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귀족, 군인들이 궁전 안으로 몰려 들어가고, 막 잠에서 깬 듯 내레이터는 “여기가 어디지?”하면서 관객의 의문을 대신 묻는다. 곧 이어 우리는 표트르 대제(그의 이름에서 도시 이름 페테르부르크가 나왔다)가 자기 신하를 때리며 심하게 꾸짖는 장면을 본다. 말하자면 지금 내레이터는 18세기 초에 와 있고, 그는 곧이어 프랑스 외교관을 만난다. 이 외교관이 궁전을 본격적으로 산책할 것이고, 우리는 그의 발걸음에 따라 앞으로 95분간 이어질 원테이크 영화를 볼 것이다. <러시아 방주>는 처음으로 원 숏 원 시퀀스(One Shot One Sequence) 형식을 선보인 경이로운 작품으로 영화사에 기록된다.

프랑스 외교관은 서구중심주의자로서, 러시아는 유럽이 아니라며, 러시아적인 아름다움을 폄하한다. 이를테면 러시아의 영웅인 표트르 대제는 걸핏하면 신하를 때리는 폭군에 가깝고, 에르미타주의 미술관은 바티칸의 복제물이라는 식이다. 내레이터는 외교관과 대화를 나누며, 종종 논쟁도 하고, 그의 궁전 내 여행에 동참한다.


외교관이 주목하는 궁전 내의 대상은 크게 세 가지다. 미술, 정치적 군사적 의례(의전과 의장), 그리고 음악이다. <러시아 방주>는 이 세 가지를 대상으로 18세기부터 현재까지 대략 3백 년의 역사를 넘나든다. 여행은 연대기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먼저 외교관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건립한 계몽군주 예카테리나 여제가 참관한 연극 공연을 본 뒤, 궁전 내의 그림들을 감상하기 시작한다. 만약 수집품이 그 나라의 미술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라면, 외교관은 에르미타주에는 라파엘로 급의 걸작은 없다며 러시아의 미술 문화를 애써 무시하려 든다. 곧 이어 외교관이 본 것이 신고전주의의 거장인 안토니오 카노바의 조각들이다. 우윳빛 대리석에 새겨놓은 그리스 로마의 찬란한 문화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자 외교관은 조금씩 태도를 바꾼다.


태도의 변화는 바로크 그림들을 보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외교관이 바로크의 걸작 회화들을 볼 때, <러시아 방주>는 소쿠로프 특유의 숭고의 시간에 이른다. 곧 걸작에 압도되는 경외감과 함께, 아름다운 대상에서 느끼는 쾌감 같은 이중적인 감정이 밀려오는 것이다. 외교관은 플랑드르의 바로크 거장인 반 다이크의 『이집트로의 탈출 중의 휴식』(1630)부터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때 카메라는 아기 예수를 지키려는 성모의 불안과 예수를 찬양하는 아기 천사들의 기쁨을 자세히 전달하려는 듯,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클로즈업하며, 외교관의 흥분된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루벤스의 『바리새인 시몬 집에서의 만찬』(1629) 속 바리새 여성이 예수의 씻은 발을 금발 머리칼로 정성스럽게 말리는 장면, 엘 그레코의 『베드로와 바울』(1592)에서 두 성인이 아직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서로 실망하고 있는 모습, 렘브란트의 『다나에』(1636)에서의 황금빛 여성의 누드, 그리고 역시 렘브란트의 『탕아의 귀환』(1669)에서의 용서와 사랑이라는 부친의 관용의 태도에 눈을 떼지 못한다. 에르미타주의 바로크 회화들은 아마 대홍수 이후의 ‘러시아 방주’ 속의 가장 안전한 자리에 놓일 것 같다.




비스콘티의 멜랑콜리 닮은 무도회 피날레


소쿠로프의 영화세계에서 군인, 전쟁, 군사(軍事)는 자주 등장하는 주요한 테마다. 과거는 물론 현대에도 러시아는 여러 전쟁에 개입했고, 이는 현대 러시아 사회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소쿠로프는 1994년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에 주둔하는 러시아 군대에 가서, 군인들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혼의 목소리: 전쟁의 기록>을 제작하기도 했다. 군사와 관련해서, <러시아 방주>에서 특별히 다루는 것은 러시아 황제의 의전과 그에 따른 군인들의 의장이다. 19세기 페르시아와의 갈등에서, 페르시아 주재 러시아대사관의 외교관들이 현지인들에 의해 학살된 비극이 있었다. 영화는 이제 관계가 정상화되어, 페르시아의 외교관이 러시아 황제를 방문하여, 과거의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의전 행사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장면은 의전이기보다는 웅장하게 안무된 무용에 가깝다. 황제와 외교관은 마치 무용극의 주인공처럼 마주 서서 의례적인 발언을 하고 있고, 화려한 홀 안엔 드레스와 군복으로 최고의 멋을 부린 상류층 인사들이 합창단처럼 둘러서서, 역사적인 장면을 더욱 빛내고 있다. 말하자면 겨울궁전 안엔 러시아의 영욕의 역사가 모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러시아 방주>의 피날레는 주로 18세기, 19세기 복장을 한 상류층 사람들의 무도회다.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의 통치를 거쳐 러시아가 제국으로 성장하던 시기와 볼셰비키 혁명 전야, 곧 19세기 로마노프 왕가의 퇴보의 역사가 동시에 기억되는 시간이다. 화려한 홀 안의 중앙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 악단인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거장 발레리 게르기에프의 지휘로 마주르카를 연주하고 있다. 이 곡은 마하일 글린카의 오페라 『황제를 위한 삶』의 춤곡이다. 글린카는 러시아 음악의 시조로, 『황제를 위한 삶』은 러시아 오페라의 선구작으로 평가된다. 말하자면 러시아의 자긍심을 한창 북돋는 작품이 연주되고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역사의 절정을 향유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무도회는 마냥 흥겨운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무도회가 끝난 뒤 이들이 전부 궁을 빠져나가는 장면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자랑하며 모두 걸어 나오면, 카메라는 마치 겨울궁전이 종말의 대홍수 속으로 떠날 듯 시커먼 바다를 조용히 비춘다. 말하자면 겨울궁전은 원래의 자기의 삶을 다 마쳤고, 그 삶을 누렸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화려한 의상과 빛나는 무대에서의 춤 장면은 마치 비스콘티의 <레오파드>(1963)의 마지막 장면 같다. 춤은 죽음을 앞둔 역사 속 사람들의 마지막 축제여서, 사라질 운명의 망각에 대한 멜랑콜리의 정서까지 전달하고 있어서다.


한창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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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방랑자

- 채플린의 후기작 <라임라이트>와 <뉴욕의 왕>을 중심으로



<라임라이트>(1952)와 <뉴욕의 왕>(1957)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중 비교적 덜 언급되는 후기작에 속한다. <라임라이트>에 이르러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찰리 채플린 고유의 캐릭터, 무엇보다 얼굴의 변화다. 중절모와 지팡이 그리고 콧수염은 방랑자 찰리 캐릭터를 완성해 온 구성물이다. 후기작에서 중절모와 지팡이는 여전하지만, 인중을 뒤덮은 짙은 콧수염은 찾아볼 수 없다. 콧수염과 함께 짙은 분장도 사라졌다. 분장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희끗한 머리카락과 얼굴을 뒤덮은 주름이다. 콧수염을 잃어버린 중절모와 지팡이는 이제 늙음의 한 표지가 된다.

방랑자로 정의되는 찰리 채플린의 고유한 캐릭터는 거리를 하나의 무대로 생성시키는 힘을 지녔다. 찰리 채플린의 행위는 도시 곳곳을 캐릭터화시켰다. 단적으로 <모던 타임즈>에서 나사를 조이는 강박관념을 가진 찰리는 거리 곳곳에 숨겨진 동그란 나사마저 비범하게 만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많은 일상 도구들은 새로운 표정을 찾았다. 찰리의 얼굴이 변했다는 것은 곧 도시의 얼굴이 변했다는 뜻도 된다. 찰리 채플린이 분장을 지운 채 카메라 앞에 서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분장을 지운 도시의 민낯을 드러내겠다는 선언이다. <라임라이트>와 <뉴욕의 왕>에서 캐릭터로서의 찰리 채플린 대신 인간 찰리 채플린이 등장한다. 거리의 악사의 존재가 여전히 거리를 무대로 만들고 있지만, 그 공기는 그의 전작에서 보여줬던 활력과는 다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는 늘 웃음과 애잔함이 공존한다. 그의 웃음은 묘한 페이소스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늘 얼마간의 슬픔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임라이트>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중 가장 비애감을 조성하는 영화일 것이다. 이때 비애감은 무엇보다 나이듦에 대한 비애감이다. 나이듦과 죽음은 ‘더는 어쩔 수 없는’이라는 감정을 동반한다. <라임라이트>에서 찰리 채플린이 연기하는 칼베로는 그 자체로 연기자 찰리 채플린을 그대로 반영한 인물이다. 칼베로는 이제는 한물간 코미디언이다. 모든 사람이 칼베로가 누구인지 알지만, 가까운 친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가 칼베로임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어쩌면 평생 캐릭터로 살아온, 그래서 캐릭터의 옷을 입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찰리 채플린의 실제 삶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후기작에서 찰리는 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으로 인해 변두리로 쫓겨난 부랑자가 아니다. 그는 허름하지만,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를 변두리로 내모는 것은 자본이 아닌 시간이다. 그가 방랑하는 거리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것으로서의 찰리 채플린의 얼굴이다.


<라임 라이트>에서 찰리 채플린의 얼굴이 가장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칼베로가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는 장면이다. 잠든 칼베로의 머리맡에는 그의 전성기 시절 초상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 인물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지만, 관객에게 익숙한 찰리 캐릭터는 아니다.) 초상사진으로 줌인하면 곧이어 무대 위에 칼베로가 전성기의 모습 그대로 등장해 ‘펠릭스와 헨리, 재주 부리는 벼룩들’이라는 제목의 무대 연기를 펼친다. 이 무대극은 벼룩을 의인화시키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벼룩을 형상화한 원맨쇼다. 눈 굴림만으로 손등 위를 점프하며 옮겨 다니는 벼룩들은 결국 칼베로의 몸속에 숨어든다. 칼베로가 벼룩을 떼어내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몸을 흔들며 무대를 퇴장하는 것으로 극은 끝난다.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커튼콜을 위해 다시 무대에 등장해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던 그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진다. 놀람과 슬픔이 뒤섞인 채 연신 객석을 두리번거리는 칼베로의 얼굴로 카메라가 줌인한다. 이어 칼베로의 시선숏에 비친 객석은 텅 비어 있다. 다시 칼베로의 멍한 얼굴로 돌아온 고정숏은 그대로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나 침대에 멍하니 앉은 칼베로의 얼굴로 연결된다. 이때 찰리 채플린의 텅 빈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채플린은 이것을 꿈 이미지로 만들면서 한편으로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현실의 숏 역시 ‘깨어남’을 표시하는 단절된 컷이 아닌, 하나로 이어지는 오버랩을 사용함으로써 꿈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비애감을 강조한다. 이 얼굴은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캐릭터들이 모두 담긴 얼굴이자, 그 얼굴의 의미를 송두리째 바꾸는 얼굴이다.



<뉴욕의 왕>(1957)


<뉴욕의 왕>에서 찰리 채플린의 또 다른 인상적인 얼굴이 등장한다. 이번에도 웃을 수 없는 얼굴이긴 하나 그 이유는 전작과 달리 희극적인 것에 가까운데, 성형 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은 늘 비판하는 대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왔다. <모던 타임즈>에서 그는 공장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소외시키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기꺼이 거대한 기계 속으로 밀어 넣었다. <뉴욕의 왕>에서 찰리는 자신의 얼굴을 바친다. 그리고 후자의 결과가 더욱 참혹하다. 왜냐하면 그는 반강제적으로 웃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TV쇼 진행자인 메리 앤의 유혹과 자본의 궁핍함 때문에 샤도프 왕은 그토록 혐오하던 TV 출연에 적극적이 된다. 그러면서 화면에 잘 나오기 위해 성형의 유혹을 받고 결국 수술대에 오른다. 눈, 코, 입을 전면적으로 손대는데 수술 부작용 부위가 입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입은 얼굴에서 웃음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표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수술 부위를 터뜨리지 않기 위해 웃음을 참아야만 한다. 그러나 하필 메리 앤과의 데이트 장소에서 코미디 쇼가 진행된다. 연기자의 능청스런 무언극에 모든 사람이 웃음을 터뜨린다. 웃지 않는 것은 샤도프뿐이다. 샤도프는 자꾸만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돌아앉는다. 그러나 결국 웃음이 터지는 동시에 입술의 실밥이 터지는 참사가 일어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찰리 채플린은 우선 성형수술을 비판하고 있지만, 크게는 TV라는 매체에 대한 논평으로도 보인다. TV를 보는 행위는 결국 입을 꿰맨 채 웃는 것이 아닐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어색한 표정이 TV에 대한 찰리 채플린의 입장을 대변한다.


텔레비전은 늘 변화를 원한다. TV는 변화하는 대중의 관심을 반영하고 이를 고양하는 매체이다. <뉴욕의 왕>에서 특히 TV 매체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에서 채플린은 혁명가들의 쿠데타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한 왕 샤도프로 등장한다. 그러나 빼돌린 국고를 다시 수상에게 도둑맞으면서 호텔 방에 갇힌 빈털터리 신세가 된다. 그런 그에게 줄기차게 초대 메시지를 보내는 이가 있었으니 크롬웰 부인이다. 그녀가 자신을 방송에 출연시키기 위해 수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던 왕은 매번 초대를 거절하지만, 옆방 투숙객 메리 앤의 노골적인 유혹에 굴복해 결국 파티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나 파티 현장은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생방송 리얼리티 쇼였다. 샤도프의 기행은 그 자신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국에 생중계된다.

TV가 인간의 일생생활에 얼마나 가까이 들어와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호텔 욕조 한쪽 벽에 설치된 TV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는 브라운관 속 인물의 얼굴을 바스트숏으로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클로즈업된 얼굴의 사람은 마치 욕조 벽 속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드러내놓은 것처럼 보이며, 언제라도 TV를 뚫고 나올 듯 보인다. 욕실을 잡을 때 카메라는 늘 TV가 잘 보이는 방향에 놓여있다. 이는 사람들이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TV가 사람을 응시하는, TV가 본래적 역할을 초과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예견한 것이다. TV 속에 클로즈업 된 사람의 얼굴은 그대로 <모던 타임즈>에서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모니터 속에 나타난 사장의 얼굴과 겹친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발명된 기술이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전작의 자각이 <뉴욕의 왕>에서 역시 이어진다.


찰리 채플린의 TV에 대한 비판의식을 이어받은 작품은 피터 위어의 <트루먼 쇼>(1998)다. 메리 앤은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도 TV 녹화 중이라는 사인을 받으면 갑자기 광고 멘트를 읽기 시작한다. 그녀의 모습은 이로부터 40여 년 뒤에 만들어진 <트루먼 쇼>의 상황과 그대로 닮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 생애를 TV 속에서 살아가던 남자 트루먼의 아내(실제로는 아내 역할의 배우)는 광고 시간에 맞춰 집안에 놓인 물건에 대한 광고 멘트를 읊는다. 이 작품은 TV, 광고가 삶에 침투해 들어왔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다. <뉴욕의 왕>은 이제 찰리를 변두리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변화하는 대중의 관심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고 찰리 채플린이 늘 무언가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방랑은 늘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관계 맺기의 영화가 아닌 적이 있었을까. 멜로를 전면에 드러낸 <시티 라이트> 같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흔히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정리되는 <모던 타임즈> 역시 산업화 시대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찰리와 가난한 소녀의 사랑은 생각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방랑자 찰리는 거리의 부랑자, 가난한 자 등의 삶과 만나는데 <라임라이트>에서 그가 관계 맺는 인물은 심리적인 외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가난한 발레리나 테리다. 테리는 자취방에서 가스를 열어 놓은 채 자살을 시도하다 이웃 남자 칼베로에 의해 구출된다.



<라임라이트>(1952)


테리는 칼베로와 앙상블을 이루며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을 보여주는 외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은 극에 무성영화의 기운을 불러오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테리의 무용극은 대사가 아니라 춤을 비롯한 신체적 표현과 음악으로만 이뤄진 일종의 무언극이다. 테리에 대한 칼베로의 헌신은 무성영화에 대한 찰리 채플린의 애정이기도 하다. <라임라이트>에서 발레리나 테리의 성공과 칼베로의 사실상의 실패는 무성영화에서의 성공과 유성영화에서의 실패라는 자각으로도 읽힌다. 테리는 무성에 가까운 몸짓으로 사람들과 성공할 수 있었지만, 말로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칼베로는 실패한다. 칼베로의 실패는 그야말로 유성영화에 대한 찰리 채플린의 실패이기도 한 것이다. 칼베로는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무언의 슬랩스틱으로 돌아간다. 이 공연으로 칼베로는 사람들의 호응을 받는다. 그의 퍼포먼스는 오케스트라 쪽으로 몸을 던져 북 속에 엉덩이가 박힌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칼베로는 이 퍼포먼스로 인해 척추를 다쳐 죽어간다. 무성영화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이지만, 유성영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 이것이 북 속에 몸이 낀 채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로 표현된다. 이를 통해 유성영화와 무성영화 사이에 끼인 존재로서 자신을 투영한다.


침대에 누워 죽어가면서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테리를 바라보는 칼베로는 극의 초반, 자살을 시도했던 테리와 극중극에서 죽어가는 연기를 펼치며 침대에 누워있던 테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무대 위에서 죽어갔던 테리처럼 무대 밖에서 칼베로는 죽어간다. 칼베로의 모습을 테리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은 온당하나, 여기에는 남녀관계보다 더 깊은 것이 내재해 있는 것 같다. 죽어가는 칼베로를 배경으로 힘차게 춤추며 도약하는 테리의 모습은 그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칼베로는 테리의 어두운 트라우마를 가져가면서 테리를 온전하게 탄생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칼베로와 테리의 관계는 채플린이 몇몇 작품에서 보여준 소녀와의 절절한 멜로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키드>처럼 버려진 아이와 의붓아버지가 관계 맺는 영화와도 연결된다.


채플린은 <뉴욕의 왕>을 통해 다시 한 번 아이와의 호흡을 자랑한다. <키드>의 존 역시 연약함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지만, <뉴욕의 왕>의 루퍼트는 괴팍한 구석이 있다. 루퍼트는 무정부주의자로, 모든 형태의 권력을 부정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괴짜 소년이다. 샤도프 왕은 개교를 앞둔 진보 학교 방문 행사 도중 소년 루퍼트를 만난다. 루퍼트는 독재를 비판하면서도 독재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행동으로 샤도프의 입을 막아 버린다. 기계를 비판하기 위해 기계 속으로 들어갔듯이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은 독재를 비판하기 위해 독재자가 되었고, 루퍼트 역시 그렇다. 루퍼트 역은 채플린의 아들인 마이클 채플린이 연기해 더욱 의미를 더한다. 이 만남으로 인해 샤도프는 루퍼트를 가장 불쾌한 소년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가 공산주의자와 결탁한 혐의로 수감되자 루퍼트는 고아와 다름없는 신세가 돼 샤도프를 찾아온다. 샤도프의 호텔 앞에서 눈을 맞은 채 벌벌 떠는 루퍼트를 외면하지 못하고 그를 집으로 들인다. 그리고 이것은 채플린이 관계 맺는 대상이 넓고 깊어졌음을 시사한다.


<라임라이트>는 그의 관계 맺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찰리의 방랑은 늘 부랑자, 빈민 등 하층민들과 만나는 여정이었다. <라임라이트>에서 채플린이 관계 맺는 대상은 인간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찮은 미생물에 대한 애정으로 나아간다. 앞서 언급한 벼룩을 소재로 삼은 무대극은 물론이고, 칼베로는 가사를 통해 정어리의 삶, 곤충이나 해파리의 삶을 예찬한다. 온갖 미물에 대한 예찬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긍정, 필연적으로 죽음에 대한 받아들임이기도 하다. 찰리 채플린은 그가 죽어 보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존재하기를 꿈꿨던 것 같다. 그의 바람대로 채플린은 영원한 방랑자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채플린은 방랑자로 살고, 방랑자로 죽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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