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스즈키 세이준은 결코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60년대, 오시마 나기사나 시노다 마사히로 같은 동세대 일본 감독들이 이른바 '쇼치쿠 누벨바그'라는 이름으로 영화사의 한 장을 채워가고 있을 때, 그는 동시상영용 B급 영화를 만드는 그렇고 그런 액션 감독에 다름 아니었다. 이후 오랜 세월, 스즈키 세이준이라는 이름은 스튜디오에서 퇴출당한 비운의 감독이라는 꼬리표와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희귀한 스타일로 영화광들의 전설로 전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2001년, 마치 예기치 않은 손님의 방문처럼 그는 8년만의 신작 <피스톨 오페라>를 들고 베니스 영화제에 나타났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열렸던 두 차례의 회고전에는 젊은 관객들이 몰려들어 환호성을 울려댔다. 한때 미국 독립영화의 정신이었던 짐 자무쉬 역시 <고스트 독>에서 동양의 노장 감독에게 아낌없는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2002년 2월, 한국에서도 '회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스즈키 세이준과 조우했다.

그렇다면 1967년 <살인의 낙인 Branded to Kill> 이후 영화계에서 멀어졌던 그에게 쏟아지는 이 때 아닌 관심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국의 관객들에게 제 영화가 소개된다니 너무 얼떨떨해서 마치 어둠 속에서 볼을 꼬집힌 기분입니다”라는 다소 황망한 감독의 말처럼 이는 혹시 시대착오적인 유행에 편승한 일회성 해프닝인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의 영화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30년이라는 간극과 국경을 단숨에 뛰어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왕가위와 오우삼과 짐 자무쉬,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열렬한 숭배를 바치고 인용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감독 스즈키 세이준, 이제 그의 수상한 영화세계를 직접 만나보도록 하자. 분명한 점은 이 모든 것이 결코 너무 늦은 만남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동시상영용 B급 감독의 비극과 영광

60년을 기점으로 정점을 이룬 일본영화계에는 독특한 장르의 영화가 존재했다. 일류감독과 스타들이 만든 일급 영화와 함께 상영되는 프로그램 픽처, 즉 동시상영용 B급 영화가 그것이었다. 당시 한 해 500편이 넘는 상상을 초월하는 제작편수 중 99%를 채웠던 이 동시상영 영화들은 스튜디오에서 정해주는 시나리오와 스타, 제한된 제작비로 1달에 한편씩 후다닥 찍어내야 했던 맞춤 생산영화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들은 도제 제도에서 오랜 수련기간을 거쳐야 했던 젊은 감독들에게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그들은 상대적으로 스튜디오의 간섭이 적었던 이 영화에서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들을 감행할 수 있었다.

스즈키 세이준 역시 대표적인 동시상영용 영화 감독이었다. 1923년 동경에서 출생한 그는 48년 쇼치쿠 영화사의 계열 스튜디오에 입사한 것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54년, 오랜 침묵 끝에 새롭게 출격한 닛카츠로 적을 옮기게 된다. 감독 자신은 '단지 닛카츠가 월급을 많이 주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대답을 하고 있지만 여하튼 그는 닛카츠로 옮긴 2년 만에 입봉하게 된다. 쇼치쿠나 도호 같은 다른 스튜디오에 비해 인력이 모자랐던 닛카츠는 신인 감독과 배우를 발굴하는 것으로 당시의 가공할 제작편수를 채우려 했으며 스즈키 세이준 역시 그 수혜자가 됐던 셈이다. 이후 비운의 67년까지 근 10년 동안 40편의 영화들을 말 그대로 마구마구 쏟아냈으니, 아무리 스튜디오 소속의 맞춤 생산용 장인감독이라 해도 만드는 이가 먼저 지루해질 만도 하다. 이런 현실에서 스즈키 세이준이 선택한 승부수는 비슷비슷한 내용의 영화지만 어느 순간 졸던 관객이라도 눈을 번쩍 뜨고 바라볼 만한 순간들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어떤 영화든 반드시 한, 두 장면은 놀랄만한 명장면을 선사한다는 그의 전설은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서구 관객과 평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 <간토 방랑자>의 무너지는 하얀 벽과 순간 온통 붉게 물드는 배경, 뜬금없이 허공으로 총을 던지며 악당을 일망타진하는 <동경방랑자>의 라스트 신, ‘넘버1은 나다!’를 외치다 결국 총에 맞아 링 밖으로 떨어져 죽는 <살인의 낙인>의 넘버3 킬러 하네다의 모습, 손가락에 공력을 실어 총알처럼 콩알을 날려대는 <겐카 엘레지>의 놀라운 장면 등 어느 순간 가공할 에너지가 폭발하듯 배어 나오고 강렬한 색채와 이미지들이 넘실댄다. 여느 영화들과는 무엇인가 다른 그의 영화에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던 60년대 일본의 젊은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며 그는 점점 자신만의 색채를 더하고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해 갔다. 하지만 닛카츠 측에서는 주어진 시나리오를 슬쩍슬쩍 고쳐가며 시키는 대로는 절대 하지 않는 이 골치 덩어리 감독을 곱게 봤을 리 만무했다. 1967년 ‘넘버 3’ 킬러 하네다와 ‘넘버 1’ 킬러간의 이상한 순위쟁탈전을 다룬 <살인의 낙인>이 완성되자 스튜디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며 드디어 그를 해고하게 된다. 조직과 보스에게 배신당하고 방랑하는 자신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이후 TV 연기와 CF 연출로 영화 밖 세상을 유랑하는 동안 정작 그의 분신들은 영화광들의 열렬한 숭배 목록에 올라 있었으니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의 어떤 점이 영화광들의 마음을 그토록 울렁거리게 하고 40년이 흐른 지금에도 유효하게 하는 것일까?

 

충돌과 유희, 그 놀라운 쾌감

스즈키 세이준은 쇼치쿠 누벨바그 같은 동세대 문제적 감독들처럼 영화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의 보수성과 부조리를 비판하지도 않았고 철학적 성찰 같은 것을 담지도 않았다. 그의 영화에서 꽉 짜인 플롯이나 세상사에 달관한 것 같은 거창함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사람 목숨쯤은 파리처럼 여기는 냉혈 킬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통에 얼굴을 비벼대며 황홀경에 젖는 영화에서(살인의 낙인), 거실 창을 열면 갑자기 노란 흙먼지가 몰아치는 황망한 들판이 펼쳐지는 영화에서(야수의 청춘), 결전을 앞둔 야쿠자가 하얀 눈발이 날리는 촌스런 세트에서 ‘나는 고독한 방랑자…’ 어쩌구 저쩌구하는 엔카풍의 노래를 불러대는 얼토당토않은 상황에서(동경방랑자), 도대체 그 누가 철학을 논하고 논리를 따지겠는가(심지어 스즈키 세이준은 <동경방랑자>의 마지막 장면에 초록색 달까지 등장시키려 했단다. 물론 하얗게 질린 스튜디오측은 '도대체 초록색 달이 말이 되냐'며 소리를 질렀고 이 장면은 그저 감독의 상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그의 매력은 전통과 장르, 영화와 연극처럼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유의 양식화된 살인 장면과 현란한 색채 감각으로 스즈키 세이준이라는 이름을 주목받게 한 <야수의 청춘>(1963)이나 <간토 방랑자>(1963) <문신일대>(1965) 등에서 마치 연극의 라이트처럼 인물을 쫓아가는 조명, 연극조로 무뚝뚝하게 읊는 주인공의 대사처럼 그의 영화는 영화와 연극이라는 이질적인 매체들이 서로 충돌하며 존재한다. 여기에 전통극인 ‘가부키’를 야쿠자 영화라는 장르 안으로 끌어온 싸움 장면 등은 그의 영화에 특별한 힘을 실어주었다. 스스로를 ‘예술가’가 아닌 ‘엔터테이너’로 불렀으며 ‘영화란 모름지기 재미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신의 말처럼 그의 영화들은 그 자체가 영화적 유희였으며 순수한 영화적 경험이었던 것이다.

1966년 작인 <동경방랑자>와 <겐카 엘레지>, 그리고 <살인의 낙인>(1967)에 이르면 그의 영화적 유희와 과잉, 그리고 충돌은 절정을 이룬다. 특히 그로서는 드물게 파시즘에 대한 풍자를 전면에 내세운 <겐카 엘레지>는 제목 그대로 '싸움의 엘레지, 폭력의 엘레지'라 할 만다. 전쟁 발발 직전의 3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소년들은 공부대신 패싸움에 열중한다. 청순한 옆집 소녀에 대한 연정으로 가득 차 있는 주인공 소년은 주체할 수 없는 혈기를 잠재우기 위해 구국의 염을 다지고 내공으로 촛불을 끄는 수련에 힘쓰기도 하며 상대파 소년들과 잔악무도한 자작무기를 휘두르며 막가파식 싸움에 빠져든다. 이러한 설정은 사실 최고가 되기 위해 전국을 떠돌던 일본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의 일대기를 학원 안으로 가져온 것에 다름 아니다. <겐카 엘레지>는 이러한 장르간의 충돌을 이미 60년대에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의 영화들이 신선한 충격, 영화적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감독들이 사랑한 감독, 스즈키 세이준

영화광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감독들의 명단을 살펴보노라면 평론가나 관객이 좋아하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유독 같은 감독들에게서 높은 점수를 받는 감독들이 있다. 스즈키 세이준 역시 그를 발굴하고 아낌없는 헌사를 바쳤던 이들은 평론가보다는 젊은 영화광, 특히 영화광 출신의 젊은 감독들이 많았다. 하수구로 총을 발사하는 <살인의 낙인>의 기상천외한 살인 장면을 고스란히 옮겨온 짐 자무쉬의 <고스트 독>은 물론, 고독한 두 남자가 마주한 채, 마취도 없이 상대의 팔에서 총알을 빼는 <동경방랑자>의 장면은 반영웅의 표상 주윤발과 이수현이 함께 하던 오우삼의 <첩혈쌍웅>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시시껄렁한 폼으로 일렬로 걸어오는 야쿠자들의 모습에서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승리에의 염원이 적힌 일장기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패잔병에게서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떠올리는 창녀, 문득 패잔병과 군복을 입은 오빠의 모습이 겹쳐지는 <육체의 문>의 장면들을 보는 순간 피터 그리너웨이가 <필로우 북>에서 시도했던 파격적인 영상 실험들은 돌연 낡은 것으로 여겨진다. 평소 B급 액션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자랑해온 박찬욱 감독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스즈키 세이준의 신봉자이다(왜 아니겠는가!).

67년 이후 사실상 영화계를 떠났던 스즈키 세이준은 10년도 더 지난 80년에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찍었으며 81년에는 <아지랑이좌>를, 그리고 10년 후인 91년에는 <유메지>를 제작함으로써 이른바 '다이쇼 3부작'을 완성했다. 사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영화밖에 있었던 감독이 신작을 찍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영화를 발굴하고 전파했던 수많은 영화광들과 감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탐미적인 미학과 몽환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다이쇼 3부작'을 만나는 것은 과거 닛카츠 시대의 스즈키 세이준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는 일견 당황스런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과거, 치고받는 폭력과 넘나드는 장르의 충돌이 우아하게 정제되고 완성된 것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그의 영화는 과잉된 이미지들로 충만하며 영화 자체에 대한 유희정신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작 <피스톨 오페라>를 통해 자신의 최고작이자 오랜 세월 영화계에서 퇴출시킨 장본인 <살인의 낙인>을 재창조하고 있는 스즈키 세이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의 영화를 통해 순수한 영화적 유희정신이 꿈틀대는 그 흔적들을 직접 감지하고 즐기는 것뿐이리라.

 

글/모은영(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 프로그래머)

 

*이 글은 2002년 '키노'에 실렸던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일부 수정해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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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문화학교 서울’의 주최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의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열렸다. 기획자로서 나는 이미 팔순에 접어들고 있던 세이준 감독을 만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의 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모두들 무모한 시도라고 여겼지만 결국 세이준 감독이 서울을 찾았다. 3박 4일 동안 그는 ‘삶의 원칙을 위반하는 예외적인 사건’이라면서도 기자회견과 강연, 그리고 그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던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 감독들과 대담을 했다. 회고전은 성공적이었다. 2월18일부터 25일까지 8일간 아트선재센터(아직 정식으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개관하기 전이었다)를 대관해 개최한 회고전은 평균 객석점유율이 80%였고 6천명이 넘는 관객들이 몰렸다. 단순한 흥행 성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명의 저주받은 작가가 새롭게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그 며칠간의 동행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다. 가혹한 조건을 딛고 태어난 새로운 영화미학은 어떤 기술이나 색다른 아이디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조금은 운명론 같은 아주 견고한 세계관과 태도 말이다.

 

창조의 원천, 그건 DNA와 선천적인 것이다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열린 첫 날의 마지막 회. <문신일대>가 상영된 후 관객들은 열광했다. 관객중의 몇 명은 영화를 보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이상하게 웃긴다’고 말했다. 원래 세이준 감독이 유머가 있는 분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영화의 내용은 잘 이해가 안되더군요’라며 반문했다. 빨간 구두는 도대체 무엇인지, 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남자가 모래밭에 화투장을 뿌리며 경찰에게 끌려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가령 주인공 남자가 살인에 연루되어 도피를 하는 장면에서 그를 뒤쫓는 빨간 구두의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그는 빨간 구두의 클로즈업으로 표현될 뿐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종의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우리의 시선은 매 순간 빨간 구두를 쫓아다닌다. 영화의 후반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빨간 구두는 또 다른 빨간 구두의 인물과 만나 멈칫 놀라고, 이내 관객들은 뒤집어진다. 도대체 빨간 구두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왜 빨간 구두여야 하는지는 대관절 알 길이 없다(물론 이 영화를 예민하게 본 사람들이라면 그가 누구인지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이 무언가에 홀린 듯 빨간 구두를 따라다녔다는 사실이다. 세이준의 영화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눈을 끌어당기고 당혹케 한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창조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모두들 그의 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일지 궁금해 했다. 세이준을 만나는 것은 그런 비밀에 조금 다가설 수 있는 기회처럼 보였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그의 답변은 지극히 단순하고 솔직했다. ‘내 창조의 원천이 뭐냐고? 그건 DNA와 선천적인 것이다’.

 

생활인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절에 대한 회상

스즈키 세이준 감독이 ‘문화학교 서울’의 초대에 응해 서울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잠깐 주저했다. 서울에 올 때는 수행원과 함께 오겠지만 갈 때는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거기서 혼자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미 팔순에 접어든 그의 결정이 우리를 불안케 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하지만 어쩌랴. 세이준은 반복을 싫어하는 감독이 아니던가. 갑자기 <동경방랑자>의 주인공처럼 기차에 몸을 싣고 유랑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회고전이 열린 이튿날, 세이준 감독이 서울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서 공항리무진을 타고 호텔에 도착한 그를 알아채기란 쉬운 일이었다. 어디서 보더라도 눈에 확 들어오는 할아버지였다. 털모자에 양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는 코닥 필름의 로고가 찍힌 긴 파카를 입은 그는 마치 이제 막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운동선수처럼 보였다. 체류일정을 잠깐 확인한 후 함께 명동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매운 음식을 꺼려했지만 술과 담배를 즐겼고 백세주를 한 병 마신 후에는 한국 소주를 마시고 싶어 했다.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왜 <피스톨 오페라>에 <살인의 낙인>의 킬러 시시도 조를 기용하지 않았나요?” 예상대로 그건 비밀이란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비밀스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는 마치 ‘내 영화엔 비밀이란 없소. 네 멋대로 이해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그는 인간이 다 닮았기에 대부분의 영화가 비슷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심지어 인간의 노력이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운명론자인가? 이름에 얽힌 비화를 들어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즈키 세이준의 본명은 스즈키 세이타로다. 그는 1950년대에 본명으로 영화를 시작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고, 이름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친구들과 작명소를 찾아가 세이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8년, 그는 세이준이라는 이름으로 <암흑가의 미녀>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작명소에 따지러 갔더니 새로운 이름은 10년 후에나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하게 10년 후인 1968년, 세이준은 닛카츠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인간의 운명이란 그렇게 씁쓸한 것일까.

<살인의 낙인>이 장 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와 같은 해 개봉했고 짐 자무시가 나중에 <고스트 독>(1999)에서 이 두 편의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것에 대해 물었더니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냐”고 되물었다. 조금 지나서야 그는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는 미국의 액션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말했다. 샘 페킨파 감독을 말하는 것이냐 묻자, ‘그렇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해 미안하다며 좋은 감독 한 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문득 임권택 감독이 떠올랐다. <장군의 아들>에 관해 말했고 임권택 감독이 <유메지>처럼 화가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자 그의 영화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감독들이 촬영소를 많이 활용하냐고 물었다. 세이준 감독에게 60년대 닛카츠의 촬영소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불행한 운명의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촬영소는 미국의 3-4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처럼 ‘생활인’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월급을 받으며 매일 출근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고, 아침에 출근해 필요한 장면을 요구하면 전문적인 스태프들이 다 알아서 세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비록 동시상영용 B급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는 전문화된 분업 체계를 통해 창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닛카츠에서 쫓겨난 후 독립 프로덕션에서 영화를 만들던 시절, 그에게 영화 만들기는 오히려 평범한 삶을 위배하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이 되었다. 집에서 혼자 천장을 보거나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보는 일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비현실적인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의 후기작들이 몽상적인 작품이 되었던 것도 자연스러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내 삶의 원칙과 위배되는 사건이다

그에게 예외적인 사건은 방한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공동기자회견이 있었다. 공동기자회견은 단지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세이준 감독은 그런 자리를 원치 않았지만 자신을 초청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지난해에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이 열렸고 올해는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이 개최될 예정이라고 말해주었더니 그는 자신이 ‘오즈나 나루세처럼 이미 죽어버린 감독도, 예술 영화를 만든 감독도 아닌 그저 영화적 재미를 추구한 오락 영화를 만든 감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회고전이 열린 것에 대해 ‘아직 살아 있는데 회고전을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장례식을 하는 기분’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기자회견장에서 세이준은 60년대의 일본 영화가 사양길에 있었고, 무국적 야쿠자 영화들이 만들어질 시기에 일주일에 두 편씩 상영하는 영화를 위해 20일에서 25일 정도의 제작기간 동안 영화를 만들었고, 오락 영화의 요소에 춤과 액션, 그리고 관객을 놀라게 하는 서스펜스를 섞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 기자가 ‘예술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는 ‘예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화가 이렇다’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세이준은 기자 회견을 마치면서 자신은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런 식의 기자회견이 사실은 자신의 삶의 원칙을 위배하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모두 그에게서 무언가를 듣고 싶어 했다. 그렇게 세이준은 서울에서 자신의 삶의 원칙에 위배되는 사건을 단지 관객들을 위해 두 번이나 가졌다. 그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세이준은 영화보다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공연장을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적절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수요일 오후, <살인의 낙인>은 일치감치 매진이 되었고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다. 갑자기 3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네마테크 서울이 개최한 ‘로베르 브레송 회고전’ 때 이마무라 쇼헤이의 <인류학 입문>, 오시마 나기사의 <청춘 잔혹 이야기>와 더불어 세이준의 <살인의 낙인>을 상영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관객들은 사실 생뚱한 반응을 보였다. 이 예상치 않은 영화에 적지 않게 당황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번 회고전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그때와 사뭇 달랐다. 주인공 시시도 조가 밥 냄새에 흠뻑 취할 때마다 관객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세이준은 <살인의 낙인>이 매진되었다고 말하자 정말이냐며 기뻐하면서도 당황했다. 이어 벌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세이준은 내내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한 관객이 ‘당신 영화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고 질문했고, 세이준은 ‘그건 버릇 같다. 그런 식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진다’고 말해 관객들을 감격(?)시켰다. 이게 정답이 아닐까? 정말 그는 그렇게 안하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날 저녁, 행사를 주관한 문화학교 서울의 스태프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세이준은 젊은 사람들로 가득한 분위기에 흥겨워했고, 요새 한국의 젊은이들이 무슨 고민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궁금해 했다. 사무국장이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 같다. 영화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자 ‘당신이야말로 진국’이라며 웃음을 보였다. 때마침 그가 배우로 출연했던 영화 이야기가 나왔고, 세이준은 몇 해 전에 금성무가 출연한 <불야성>이라는 영화에서 야쿠자의 보스로 출연했다고 자랑을 털어놓았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당시 개봉 중이었던 <2009년 로스트 메모리스>에 잠깐 출연했다고 말하자 ‘대사를 잘 외우지 못하는 이마무라 쇼헤이가 어떻게 출연했을까’라며 농담을 했다.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을 보았냐고 누군가 질문했고 그는 처음엔 짐 자무시도 <고스트 독>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내 ‘영화 마지막에 지저분한 곳에서 주인공이 비참하게 죽는 영화가 그거냐’고 말했다. 그렇다고 말하자 그 영화를 일본에서 개봉할 때 보았으며 짐 자무시와 술자리를 갖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자기라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을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최후를 맞게 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그날도 소주를 주문했다.

 

삶은 꿈처럼 덧없는 것이기에 네 멋대로 해라

스즈키 세이준은 2001년 유럽에서 영화 제작 제의가 있었지만 제작비 조달 문제로 영화 제작이 중지되었기에 ‘당장 계획 중인 영화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시나리오가 준비된 영화가 무려 7편이나 있고, 그 중 한 편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보였다. 우리 모두는 그의 다음 영화와 즐겁게 만나고 싶었다. 한국의 노장 감독들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회고전에 참석한 스즈키 세이준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창조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50여 년 동안 옹골차게 영화를 만들어온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번 회고전을 통해 한국에 팬이 많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그런데 왜 팬레터 한 장 없냐’고 물었고, ‘아마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말하자 ‘그렇다면 와락 껴안는 등의 태도라도 있지 않냐’며 농담을 했다. 물론 그건 농담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오랜 기간 동안 끈질기게 영화를 만들어왔던 것은 어떤 표현을 위해서가 아니라(그의 말을 빌자면 ‘영화에 의미가 없는데, 왜 의미를 만들려고 하냐’는 말처럼) 농담처럼 말한 본인의 버릇과도 같은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사실 말이 아니라 그런 태도들이었다.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면서 스즈키 세이준은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였지만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금요일 12시. 세이준은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떠나기 전 그는 우리들에게 점심을 사먹으라며 우리의 할머니들이 그러하듯 꼬깃꼬깃한 돈을 주머니에 찔러 주었다. 그는 부산으로 가서, 그리고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이준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떠나기 전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겨주었다. ‘삶은 꿈처럼 덧없는 것이기에 네 멋대로 해라’.

 

글/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 이 글은 2002년 ‘필름 2.0’에 실렸던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시네마테크 2012년 9월 소식지에 일부 수정해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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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누벨바그의 거장 스즈키 세이준(鈴木淸順, 1923 )에 관한 국내 첫 번째 연구서인 『폭력의 엘레지 스즈키 세이준』(김성욱 엮음, 2002)이 근 10년 만에 새롭게 개정판으로 출간된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대표 최정운 www.cinematheque.seoul.kr)은 오는 11일부터 10 21일까지 한달 반 동안 열리는 스타일의 혁신: 닛카츠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개최를 맞아 그동안 초판이 절판되어 스즈키 세이준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국내 독자들의 구입문의가 많았던 『폭력의 엘레지 스즈키 세이준』을 새롭게 개정판으로 재출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의 전신인 문화학교서울 총서 중 하나로 다시 출간하게 된 개정판에는 세이준에 관한 박찬욱, 김지운, 오승욱 감독들의 비평 글, 2002년 세이준 감독의 방한 당시 감독들과 나눈 대담, 그리고 이번 회고전에서 처음 상영되는 20편의 세이준 작품에 대한 소개글이 수록되어 있다.

스즈키 세이준은 5-60년대 일본의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오락용 장르 영화를 다량 만들었지만, 그 영화들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내며 특유의 영화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감독이다. 60년대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들은 갱 영화, 야쿠자 영화, 뮤지컬, 코미디를 가로지르며 장르의 관습성과 진부한 내러티브를 파괴하는 '스타일의 혁신'을 이루었다.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에 담긴 폭력과 코미디, 블랙 유머는 독특한 '세이준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이 영화들은 당시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열광시켰다.

 

불가사의한 영화 공간으로 빨려 드는 듯한 그의 대표적인 걸작 <살인의 낙인>(1967)은 너무나 독특한 스타일, 실험적인 영상, 전혀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 전개 등이 화근이 되어 당시 영화사 사장으로부터 "영문도 모를 영화를 만드는 녀석 따위는 필요 없어"라는 분노를 자아냈다. 그 때문에 스즈키 세이준은 영화사로부터 해고당했고, 분노한 스즈키 세이준의 팬들은 자발적으로 '스즈키 세이준 공동투쟁 위원회"를 결성해 메이저 스튜디오와 싸움을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스즈키 세이준은 일본 영화계에서 추방되어, 그 후 10년 간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1980 <지고이네르바이젠>으로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에 복귀하였으며, 이어지는 <아지랑이좌> <유메지>에서 1920년대 다이쇼 시대의 데카당스와 낭만주의를 빼어나게 표현해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2001, 10년만의 신작 <피스톨 오페라>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특별 상영되고 일본에서 대단한 관객동원을 하는 등 여전한 영화적 정열을 보여주고 있는 거장 감독이다.

 

이번에 개정판으로 다시 독자들과 만나게 되는 도서 『폭력의 엘레지 스즈키 세이준』은 이전까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스즈키 세이준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1부에는,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세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 글들이 실려 있다. 김성욱의 <세이준의 낙인에 대하여>는 세이준 영화의 스타일을 시공간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으며,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두 편의 글 <그리고 그 침묵의 성립> <스즈키 세이준, 또는 계절의 부재>는 세이준 영화의 형식을 꼼꼼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영화들의 독특한 스타일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곽서희의 <영화주의의 유령> '형상 분석'이라는, 세이준의 영화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의 지평을 제공하는 글이다. 또한 이상용의 <스즈키 세이준 영화의 자기 반영성>은 세이준의 영화 전반에서 전복의 즐거움을 이끌어내고 있다.

 

2부에는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영화 5편에 대한 리뷰가 실려 있다. <간토 방랑자> <도쿄 방랑자> 등 야쿠자를 다룬 영화에서는 장르의 유희와 세이준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즐거움을 읽어내고 있으며, <육체의 문> <위안부 이야기> 등 여성의 육체를 다룬 영화들에서는 여성의 몸 뒤에 숨은 욕망과 갈등, 그리고 일본 사회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 등을 읽어내고 있다.

부록의 바이오그래피와 스즈키 세이준의 대표작에 대한 소개글에서는 세이준의 작품에 대한 보다 세밀한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번 개정판에는 2002년 문화학교 서울 주최로 열린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에 세이준 감독을 직접 초청하여 열렸던 스즈키 세이준과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 감독의 대담, 박찬욱, 오승욱, 김지운 감독의 세이준의 영화에 대한 비평 글, 그리고 20여 편의 세이준의 영화에 대한 소개글이 새롭게 수록되었다. 또한 책의 서두에 실린 스즈키 세이준의 편지는, 스즈키 세이준의 친필을 접하는 즐거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은 일반 서점이나 온라인 배포는 이뤄지지 않으며,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현장에서만 직접 구입할 수 있다. 도서 정가는 15,000원이며, 서울아트시네마 관객회원은 2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또한 서울아트시네마는 이번 스즈키 세이준 개정판 출간을 기념하여 회고전 기간 동안 도서를 구입한 고객에게 스타일의 혁신: 닛카츠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포스터를 증정하는 특별 이벤트도 펼칠 계획이다.

 

한편 닛카츠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국제교류기금과 공동으로 여는 스타일의 혁신: 닛카츠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는 오늘 개막하여 10 21일까지 약 6주 동안 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며, 스즈키 세이준의 초기작 포함 29편의 세이준 영화와 그외 닛카츠 대표작 9, 38편의 작품을 상영한다.

 

■ 감독 소개

스즈키 세이준 鈴木清順 / Suzuki Seijun (1923 ~    )

1923년 도쿄에서 태어난 스즈키 세이준(鈴木淸順) 1960년대 관습적인 영화 스타일과 진부한 내려티브를 파괴한 급진적인 영화감독으로 일본영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미학을 선보인 거장이다. 1956 <항구의 건배, 승리를 나의 손에>로 데뷔한 스즈키 세이준은 60년대 혁신적인 야쿠자 영화들을 선보이며 갱 영화, 야쿠자 영화, 뮤지컬, 코미디를 가로지르며 장르의 관습성을 파괴하는 '스타일의 혁신'을 이뤄냈다. 대표작으로 <살인의 낙인>(1967)이 있으며, 80년대 이후 다이쇼 시대의 데카당스와 낭만주의를 빼어나게 표현한 '다이쇼 낭만 삼부작'으로 호평을 받았고, 2001 <피스톨 오페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의 혁신적인 스타일은 이후 왕가위, 짐 자무시, 쿠엔틴 타란티노, 오우삼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엮은이 소개

김성욱

중앙대 영화학과 박사.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 도서 목차

세이준으로부터의 편지

개정판 서문 - (김성욱)

서문 - (김성욱)

 

1부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세계

들어가는 글 - 세이준의 낙인에 대하여 (김성욱)

그리고 그 침묵의 성립 (하스미 시게히코)

스즈키 세이준, 또는 계절의 부재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주의의 유령 -<살인의 낙인> (곽서희)

스즈키 세이준 영화의 자기반영성 (이상용)

 

2부 리뷰

명예와 의리를 위한 외로운 야쿠자의 길 - <간토 방랑자> (모은영)

육체의 문을 통과할 때, 사랑의 신비를 알게 될 것이다 - <육체의 문> (이용철)

역사를 서사화하는 욕망의 미장센 - <위안부 이야기> (박지연)

야쿠자, 멜랑콜리, 파토스 - <도쿄 방랑자> (장병원)

싸움의 연대기 - <겐카 엘레지> (최은영)

3부 증언: 우리는 어떻게 세이준을 사랑하게 되었나?

좌담: 불타는 B무비 연대의 시간: 스즈키 세이준+박찬욱+김지운+류승완

본의는 아니지만, 뻔뻔하게 (박찬욱)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매력 (김지운)

파시즘을 농락하는 그 유쾌함이여! (오승욱)

 

부록

바이오그래피

주요 작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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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대 규모의 스즈키 세이준 영화와 조우하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대표 최정운 www.cinematheque.seoul.kr)는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제작사인 닛카츠 창립 100주년을 맞아 일본국제교류기금과 함께 오는 9 11일부터 10 21일까지 약 6주간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비롯해 닛카츠 영화사의 대표작 9편과 영화 역사상 가장 화끈한 영화를 만든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초기작을 포함 세이준 영화 29편을 상영하는 스타일의 혁신: 닛카츠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을 개최한다.

 

닛카츠는 1912, 일본영화의 여명기에일본 활동사진 주식회사日本活動写真株式社’, 약칭 닛카츠(日活)로 출발한 영화 제작사다. 매 시대마다 다양한 성격의 영화들로스타일의 혁신’을 이뤄낸 영화사로 전전의 신파 영화에서부터 리얼리즘이나 문학성을 살린 현대극에 이어 전후의 액션 영화와태양족 영화’로 불리던 청춘 영화, 그리고 70년대의닛카츠 로망 포르노’까지 시대와 영화 산업의 변모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여기에는 미조구치 겐지, 이치카와 곤, 스즈키 세이준, 이마무라 쇼헤이 등의 작가들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닛카츠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번 특별전은 스타일의 혁신이라는 부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닛카츠의 대표 감독이자 일본 B급 영화의 기인으로 불린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를 되돌아보는 데 초점을 맞췄다. 1956<바다의 순정>으로 데뷔한 이후 독창적인 실험으로 이름을 알린 스즈키 세이준이 주목 받은 건 적은 예산과 저급한 시나리오, 열악한 환경에서 만든 B급 영화를 통해 독특한 시각적 효과, 잔혹한 폭력과 유머스러운 설정이 공존하는 실험을 행했기 때문이다. 저예산 ‘B급 영화’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그는 그래서 1960년대 일본 ‘누벨바그’의 대표주자로 불리며, 왕가위, 쿠엔틴 타란티노와 짐 자무시 등 후배들이 존경하는 감독으로 꼽는 인물이 됐다.

 

이번 닛카츠 창립을 기념해 마련한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에서는 그 동안 한국에서 보기 어려웠던 그의 초기 작품 <항구의 건배, 승리를 나의 손에>, <악마의 거리>, <8시간의 공포> 등을 포함해 29편의 영화가 관객을 맞이한다. 또한 이외의 작품으로 미조구지 겐지의 <후지와라 요시에의 고향>, 이마무라 쇼헤이의 <끝없는 욕망>, 이치카와 곤의 <나홀로 태평양> 등 닛카츠 대표작 9편을 더해 총 38편을 상영한다. 또한 이번 회고전 기간에는 부대행사로 일본영화연구에 정통한 영화연구자들과의 시네토크도 세 차례 준비되어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끝없는 욕망> 상영 후에는 니혼대학에서 예술학을 전공한 유양근 박사가, 스즈키 세이준 <카와치 카르멘> 상영 후에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는 황미요조 씨의 강연이 예정되어 있다. <살인의 낙인> 상영 후에는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와의 시네토크가 마련되어 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는 닛카츠 100주년 특별전은 어떻게 시대와 영화산업의 변화에 따라 하나의 영화제작사가 다양한 영화를 만들고 변모해왔는지를 역사적 시각에서 살펴보기 위한 기획이다. 특히 29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유례없는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은 저예산의 한계를 넘어 대중영화의 스타일의 혁신과 성취가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살펴볼 즐거운 기회다”라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한달 반 이상의 긴 기간 동안 세이준 뿐 아니라 이마무라 쇼헤이, 미조구치 겐지, 이치카와 곤, 구레하라 고레요시 등 닛카츠에서 활동한 개성 넘치는 작가들이 닛카츠의 도전 정신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에 만든 다양한 영화들을 한번에 만날 수 있는 이번 특별전은 닛카츠가 기존의 스타일을 어떻게 혁신해나갔는지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국제교류기금과 공동으로 기획된 이번 특별전은 오는 911일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의 상영을 시작으로 10월에는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12월에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하반기 내내 전국적인 순회상영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보다 상세한 작품 정보는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www.cinemathrque.seoul.kr)를 참고하면 되며, 맥스무비, 예스24 등 지정 예매처에서 인터넷 예매도 가능하다. (문의 02-741-9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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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8일, 프랑수아 트뤼포의 <사랑의 도피> 상영 후 “앙투안 드와넬의 모험”이란 주제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번 시네토크는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사랑의 도피>로 마무리되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전반적인 이야기와 트뤼포의 영화세계에 대한 것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함께 보며 진행됐다. 여기에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이 영화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부부의 거처>로 트뤼포는 드와넬 시리즈를 마감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동료 감독 한 명이 코펜하겐의 한 극장에서 2시에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8시에 <부부의 거처>로 끝나는 '드와넬 시리즈'를 연속 상영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트뤼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시리즈를 한 편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편 더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부부의 거처>의 말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고, 그래서 작정하고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행복하게 결말을 맺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거의 10분 이상 과거 드와넬 시리즈의 영화 클립을 사용했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400번의 구타>로 시작한 트뤼포의 영화적 특징이 가장 많이 녹아들어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트뤼포의 영화를 드와넬 시리즈를 이야기하려 한다.

 

이 영화의 시작은 아침을 맞은 두 연인의 아침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뤼포 영화가 그러하듯 성애의 장면은 없다. 사소한 순간이지만 처음의 장면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두 연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중간에 에펠 탑이 보인다는 것이다. <400번의 구타>의 첫 시작이 에펠 탑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왜 에펠탑인가? 트뤼포는 유년기에 거리를 방황하고 돌아다닐 때 에펠 탑을 중심 기점에 두고 길을 찾았다고 한다. 트뤼포의 영화 대부분에는 그런 기억 때문인지 언제나 에펠 탑이 나온다. 이 영화는 외부 풍경으로 에펠 탑이 보이지 않고, 내부의 공간에 자리잡혀 있다. 굳이 말하자면 <400번의 구타>가 바깥으로 떠도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안으로 들어오는 영화, 내향적인 영화, 내부로 향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완결편이기에 영화 곳곳에 과거의 장면을 활용하고 있다. 몇 가지 플래시백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첫 번째 플래시백은 앙투완과 부인이 이혼을 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를 줌인하면서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드와넬 시리즈는 드와넬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 오면 드와넬 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플래시백이 사용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앙투안 드와넬의 삶을 복수적인 시점으로 보고 있는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두 주인공이 닮았다. 베르트랑은 돈 주앙 같은 인물이지만 여자를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사랑한 남자로, 두 사람의 캐릭터가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대신 차이는 있다. 베르트랑이 외향적이라면 앙투안은 트뤼포와 비슷하게 내향적인 인물이다.
 
플래시백이 활용되는 것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플래시백은 기차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기차의 움직임과 더불어 과거로의 시간이 흘러간다. 기계의 운동은 앞으로 향하고 그 가운데 앉혀진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을 상기한다. 운동과 시간이 결합되어 있다. 운동성은 기제들, 즉 기차나 자동차가 있고 필름의 움직임이 과거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과거의 플래시백을 실제로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이 과거에 출연했던 영화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사실은 기록된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영화에서 플래시백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 안에서 있었던 어떤 심상이 펼쳐져 나가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과거에 촬영된 필름의 릴이 다시 펼쳐져 나가는 플래시백이다. 절차적으로는 같지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질료가 트뤼포가 이미 십여년 전에 촬영한 필름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라는 시간이 철저하게 물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물질적인 사물, 필름, 사진 같은 것들을 통해서 과거라는 시간이 환기되어 간다.

 

 

 

 

영화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소설로서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가려고 했던 드와넬의 이야기다. 과거에 영화로 봤던 그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픽션(소설)이라는 것을 사용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과 소설에는 차이가 있다. 이 영화의 맥락 안에서만 보자면, 앙투안 드와넬에게 있어 소설은 자신의 삶과 인생을 회고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소설이라는 것을 통해서 변경해가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근거로 해서 작품을 만들어나가기에 자기의 삶을 조금 윤색하거나 각색해나가는 것이 가진 창작성의 문제도 담겨져 있다. 동시에 그것은 드와넬 시리즈라는 것 자체가 트뤼포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자전적 성격의 한계성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어떻게 삶과 영화를 결합하는가의 문제, 이것은 트뤼포를 위시한 누벨바그 감독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고다르와 트퓌로를 비교하자면, 고다르가 삶과 영화를 원 플러스 원처럼 플러스 결합했다면, 트뤼포는 마이너스로 했던 것 같다. 즉, 삶에서 빠진 부분을 영화로 메꾸려 했던 것 같다. 삶에서의 부족분을 삶에서 회복시킬 수 없었기에 영화라는 것으로 대치시켰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에게 삶과 영화가 대등했다면, 트뤼포는 영화가 삶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영화에서 앙트완이 소설을 쓰는 창작 행위의 동기가 트뤼포의 그것처럼 삶의 부족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드와넬이 어째서 소설가가 됐는가, 혹은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이 왜 소설가가 됐는가를 생각한다면 이런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정에서 재판관인 여자를 쳐다보는 장면의 플래시백이 있다. 여자의 안경을 쳐다보는 순간, 클로즈업이 되면서 <부부의 거처>에서 크리스틴의 모습을 회상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회상이라는 것을 특정한 사물, 사진, 필름 등을 경유해서 진행되는, 회상의 물리성이라는 프로세스를 거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400번의 구타> 이후의 드와넬 시리즈 전체를 봤을 때, 드와넬의 직업이 어떤 변천을 거쳤는지를 유심히 보면 드와넬이란 인물과 직업이라는 게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드와넬이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그러면서 소설가가 된다. 예술적인 표현들과 표현의 매질, 즉 물질적인 질료성의 프로세스들을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트뤼포가 매진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콜레트가 기차 안에서 소설을 읽어나갈 때 책과 과거의 회상 장면이 오버랩되어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 충. 과거에 필름으로 찍혀진 것, 즉 이미지와 활자화된 문자와의 충돌이 있다. 자전적이 소설과 자기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이다. 이 둘이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되어 있다. 트뤼포의 영화에서는 오버랩, 디졸브, 아이리스 등의 장면들이 많다.

 

소설 그 자체와 나중에 소설을 읽으면서 이 여자가 떠올렸던 자신의 과거의 기억이 충돌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필름으로 찍힌 것과 회상, 이미지라는 것과 활자화된 문자가 같이 충돌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은 자전적인 소설을 쓴 것인데 자기의 이야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인 이미지로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된다. 트뤼포 영화를 보면 디졸브, 오버랩, 아이리스 같은 방식의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표현적 방식 안에서 영화적 디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나간다. 이런 특징들은 누벨바그 작가군 중에서도 트뤼포가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런 방식을 자주 사용했던 이유는 장 콕도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기차의 플래시백 장면에 이어 앙투안이 자신이 신작소설의 구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특별하다. 그 전까지 소설은 자신이 겪어왔던 것에 근거해서 구성한 픽션이라면, 여기서의 신작은 자기가 떠올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나중에 보면 자기가 경험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자신이 경험한 것이냐 아니냐라는 (진위성) 문제보다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사진이 꽤나 흥미롭다. 한 남자가 사진을 찢어버려서 찢어진 사진을 앙트완이 줍게 되고, 조각난 것을 붙여서 그가 여자를 찾아다닌다는 설정인데, 이것이 영화에서 크게 작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에서 얼굴은 모른 채 단지 다리만 보고 빠져서 그 여자를 쫒아 다니게 되는,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베르트랑의 추적의 삶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찢어진 사진을 포토몽타주 하듯이 붙여서 완성된 형태로 사진 속 여자를 찾는 행위의 여정이 영화의 마지막에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트뤼포 영화에서 사진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만났던 모든 여자들과 그 여자들이 보낸 편지를 보면서 그것을 근거로 소설을 쓰게 된다. 과거의 기억을 사진에 의지해 떠올리면서 추억을 완성해나가는 행위로 소설을 쓴다. 말하자면 사진이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흔적이고, 무언가를 창조해나갈 수 있는 물리적인 근거점이 된다. 다른 한편, 사진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되어 있다. 그것을 일종의 포즈이다. 그래서 달리 말하자면 트뤼포의 영화가 (영화라는) 운동성과 (사진이라는) 정지성, 이 둘 사이를 오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충돌은 앙투안의 연애적 삶에도 관통한다. (사진으로 표현된) 정지성이라는 것이 영원하고 불변적인 사랑을 말한다면, 움직이는 (영화의) 끊임없이 가변적인 연애가 있다. 끊임없이 여자를 바꿔가는 앙트완의 연애는 굉장히 부지런해야 하는 삶이고, 앙투안은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내내 열심히 뛰어다닌다.

 

 

 

 

보시는 것처럼 콜레트와 관련한 장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사진이 있다. 하나는 증거사진이 되는 범인의 프로필 사진이다. 이것은 <400번의 구타>에서의 앙투안이 타자기를 훔쳐서 도주하다가 경찰서에서 수감되면서 사진을 찍을 때와 유사한 종류의 사진이다. 넓게 이야기하자면, 트뤼포의 영화 그리고 드와넬 시리즈 영화에서 사진은 체포, 구금, 포획, 정지와 연결된다. 정지라는 것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라면, 이는 트뤼포의 삶에서 구속과 관련되는데 이는 감옥이나 군대, 학교와도 같은 공간과 연결된다. 트뤼포의 삶 자체가 구속과 탈주를 계속 반복해왔다. 사실 20대까지 트뤼포의 삶이라는 것은 구속된 상태에서 탈주의 욕망을 끊임없이 반복해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벨바그의 시절을 거치면서 구속에서의 탈주 욕망이 한편으로는 내부화되는 운동으로의 변화가 있다. 즉, 가정을 꾸리는 것, 트뤼포에게는 두 번째 가정을 꾸리는 것, 아이를 만드는 것, 혹은 앙투안에게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 이런 삶이 반복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부로 움직이는 운동으로, 바깥으로 나가려는 운동과 충돌한다. 콜레트가 사건 파일을 뒤적거리다 발견하는 두 종류의 사진, 즉 살인 사건의 사진과 드와넬이 흘린 여자의 사진은 모두 사진의 본성, 즉 무언가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은 구속과 체포, 탈주를 반복한 트뤼포를 구제한 앙드레 바쟁의 영화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라는 글에서 바쟁은 무언가의 흔적, 성화성과도 같은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 포토몽타주와도 같은 여인의 사진은 그런 트뤼포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모든 작가들은 영화적 역량을 무엇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그 세계가 달라진다. 즉, 영화적 파워의 본성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트뤼포에게 영화의 강력한 힘이란 구속과 탈주를 반복한 그가 영화관에서 경험한 것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아이가 영화관의 어둠에서 무언가를 지켜봄으로 해서 자기를 투사할 수 있었고, 그 영화관의 낯선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응시, 바라보는 사람들과의 낯선 사람들과의 감정적 연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두번째 측면이 트뤼포의 영화를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갔다. 트뤼포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고려한 영화다. 그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 해도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면 다른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전제해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트뤼포는 후자의 감독이 되려 했다. 동시에 트뤼포의 인정욕구가 있다. 이는 영화의 투사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자신을 인정해가는 것, 자신을 이해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트뤼포의 영화는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영화에 기입된다. 내가 영화를 본다는 조건이 영화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실현한 사람은 히치콕이었다. 특히 <이창>에서 그러하다. 트뤼포가 히치콕을 끌어오는 것은 그가 히치콕의 형식을 빌어온 것도 있지만 트뤼포 자신의 영화적 경험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트퓌로의 영화에서는 그래서 본다는 것과 관련한 문제, 특히 시점의 문제가 언제나 특이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시점의 문제가 운동성을 갖게 되면 추적이 된다. 그것이 연애 영화에서는 한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이런 형식이 만개된 작품이 <도둑맞은 키스>나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라고 볼 수 있다. 영화 관람의 경험이 영화 안에 녹아들어갔을 때 표현되는 두 번째 방식은 그의 영화 안에 언제나 그림자적인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메인 캐릭터를 닮은 분신적 존재가 영화 안에 이중으로 등장한다. 그 존재들은 언제나 익명적이거나 대단히 낯선 사람들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언제나 앙투안과 짝패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도둑맞은 키스>에서 크리스틴을 쫓아다니는 이상한 남자가 있다. 그런 인물들과 앙트완이 공유하는 감정이 있다. 이 부분이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관객의 행위 자체를 영화 안에 기입시켜 버리는 트뤼포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트뤼포 영화는 물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라는 것은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필름이 돌아간다, 프로젝션에 의해 스크린에 이미지가 투영된다는 식의 기계적 매커니즘과 기계적 매커니즘의 작동, 프로세스에 따라서 감정이라는 것들이 전개되어 간다. 트뤼포는 이런 전제를 망각하지 않고 언제나 감정의 전달보다 중요하게 보고, 기계적 프로세스와 감정의 프로세스가 언밸런스하게 되는 것이 이들의 낭만적 연애를 어렵게 만들어가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의 피아노 건반의 기계적 움직임과 연주자의 감정의 언밸런스가 있다. <도둑맞은 키스>에서의 파리의 속달체계에 의해 편지가 전달되는 것과 낭만적인 편지도 그러하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앙트완이 무언으로 편지를 직접 전하는 것은 감정의 표현과 감정을 담는 표현의 매체가 같은 속도로 진행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도 마지막에 그런 순간이 도래하게 된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샤를르 드네는 한 여자에서 다른 여자로 매번 갈아타는 남자의 실제 이유가 너무 근접해지는 것에의 두려움, 상처받는 것에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트뤼포의 친밀함의 다른 측면이다. 즉, 트뤼포적인 인물들은 상황을 (연애적 사건을) 컨트롤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친밀함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400번의 구타>에서 극장의 사진을 훔쳐갔던 앙트완은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인 <사랑의 도피>에서는 남이 버린 사진을 붙여서 그 사진의 여자를 찾아가 사랑을 완성한다. <사랑의 도피>의 마지막은 <400번의 구타>의 놀이공원에서의 장면과 앙트완이 현재의 여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병치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트뤼포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앙트완은 놀이 기계의 움직임의 가속화로 벽면에 정지된 것처럼 붙어버린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회전차의 구조는 영화의 전사인 조에트로프zoetrope와 대단히 비슷하다. 정지된 사진, 움직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구조, 이러한 (영화적)기제를 동원해서 삶을 반추해가는 것이 드와넬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 김고운(관객에디터) | 사진: 김아라(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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