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자크 리베트”

- 이용철 평론가 시네토크


지난 7월 2일(토)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상영 후 이용철 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있었다. 다양한 키워드와 함께 리베트의 필모그래피를 짚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날 이용철 평론가가 들려준 이야기의 일부를 정리해 보았다.



이번 “자크 리베트 회고전”에서 시네토크를 제안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와 리베트의 유작 <작은 산 주변에서>였다. 리베트의 영화 중 가장 즐겁게 본 작품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를 평하며 ‘시네마 오브 플레저 cinema of pleasure’라는 표현을 썼다. ‘쾌락’이라고까지 번역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만큼 즐거운 영화라는 말일 것이다. 리베트의 작품 중에는 무겁거나 심각한 것도 있지만 나는 그런 영화보다는 ‘가볍게’ 본 영화를 선택했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는 엔딩을 정확하게 기억하기 힘든 영화 중 한 편이다. 어떤 때는 호숫가에서 두 사람이 배를 타는 장면을 엔딩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공원에서 셀린느가 줄리를 따라가는 장면으로 기억한다. 진짜 엔딩인 고양이 장면으로 기억할 때도 있다. 분명 영화를 봤고, 또 좋아하는 영화인데도 매번 혼란을 느낀다.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가 바로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이다.



1. 자크 리베트가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에 비해 덜 알려진 이유


오늘은 크게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처음 이야기할 건 자크 리베트가 누벨바그의 다른 감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유이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자크 리베트라는 이름이 비교적 많이 알려진 편이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거의 그림자에 감춰진 누벨바그 감독 정도로 알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리베트의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얼마 전 “라브 디아즈 특별전”에서 10시간짜리 영화도 상영한 적이 있는데, 아시다시피 리베트의 <아웃 원>은 상영시간이 13시간이다. 게다가 라브 디아즈와 달리 리베트는 이 영화를 필름으로 찍었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어떤 영화를 100시간 동안 촬영하고 2~3 시간의 결과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린다. 그런데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대에 이렇게 과감한 영화를 찍었던 감독은 별로 없다. 또한 오늘 본 영화도 그렇지만 내러티브의 복잡함이 만만하지 않다. 그렇게 어려운 영화를 찍다 보니 상영관도 잘 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짧게 찍었던 영화인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가 190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리베트의 영화는 대중적인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당연히 자크 리베트의 인지도도 떨어졌다.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리베트가 만들었던 영화의 특성 때문이다.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은 그 감독의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예를 들어 클로드 샤브롤은 ‘스릴러’, 에릭 로메르는 ‘구애’, 이런 식이다. 한 명의 감독이 뚜렷한 주제나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런데 리베트의 경우에는 한 줄의 설명으로 그의 영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필모그래피의 스펙트럼도 넓고, 개별 영화도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리베트는 자신만의 선명한 이미지를 갖지 못했고 그게 ‘감점’ 요인이 됐다.

그리고 이건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는데, 리베트의 영화를 이야기하려면 기본적인 교양이 좀 필요하다. 이를테면 작품 내에서 직접 거론하는 이름이 정말 많다. 루이지 피란델로, 드니 디드로 등의 작품을 각색하거나 인용을 한다. 안 그래도 접근하기 힘든 영화인데 이런 식의 교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중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오늘 시네토크를 위해 자료를 좀 찾아봤는데, 리베트에 대해 독립적으로 나온 책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리베트와 그의 영화는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영화를 보신 분들은 분명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많은 분들이 리베트와 친해지길 바란다.


2. 자크 리베트를 설명하는 키워드들


- 누벨바그

자크 리베트를 설명하는 세 가지 키워드를 하나씩 이야기해 보겠다. 첫 번째는 물론 ‘누벨바그’다. 리베트는 누벨바그 멤버 중 최고의 영화광이었고, 감독 데뷔 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시네마테크를 찾은 감독이라 알려져 있다. 일례로 리베트가 옹호했던 90년대 작품 중 폴 버호벤의 <쇼걸>이 있다. 이 영화는 이미 잊힌 영화가 된 것 같은데, 그 당시에도 이 영화를 다들 쓰레기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리베트는 이 영화를 옹호했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영화를 보러 다닌 것이다.

누벨바그 감독 중 가장 먼저 영화를 찍으려 한 사람도 바로 리베트였다. 그의 장편 데뷔작이 된 <파리는 우리의 것>은 사실 이미 50년대 중반에 제작에 들어갔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부족해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없었고, 결국 샤브롤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완성했지만 그때는 이미 60년대였다. 즉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가 개봉한 뒤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리베트가 ‘1번’이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출발부터 그는 그림자에 묻혀 있었던 셈이다. 참고로 고다르는 리베트의 이런 점을 인정했다. 영화에 대한 기술을 잘 아는 사람은 리베트였다고 말했고, “만약 리베트가 나보다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면 나보다 훨씬 유명해졌을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 연극

리베트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가 바로 ‘연극적 성격’이다. 물론 <아웃 원>이나 <지상의 사랑> 같은 작품들은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하거나 연극 자체를 다루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리베트의 영화가 ‘연극적’이라는 오해를 사고는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리베트는 연극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연극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지, 연극 무대 자체를 영화로 옮긴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오해가 리베트와 그의 영화가 누벨바그에 반反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문제를 일으켰다. 아시다시피 누벨바그 감독들은 프랑스 영화의 문학적 전통과 단절하려 했다. 그런데 리베트의 초기작 <수녀>는 디드로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였고, 그 뒤로도 연극을 소재로 많이 삼다 보니 리베트의 영화가 누벨바그와는 다르다는 오해를 샀다. 그리고 그런 오해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영화를 계속 보여주어야 그런 오해가 사라질 텐데 방금 말했듯 리베트는 그러지 못했다. <아웃 원>이 공개 당시 딱 한 번 상영됐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하지만 나는 그 연극적인 성격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리베트는 ‘세계’라는 개념을 좋아했다. 특히 그 세계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게임을 벌이는 걸 좋아했다. 그런 테마가 리베트의 경우에는 어떤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다는 이미지에 가까웠던 것 같다.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연극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리베트는 실제로 이걸 아주 좋아했다. 리베트는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과 다르게 자크 베케르나 장 르누아르와 같은 선배 감독들의 현장에서 조감독 경력을 쌓았다. 르누아르는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리베트도 이 말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냥 영화를 보는 것도 좋지만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걸 아주 좋아한 것이다. 그런 점이 도드라지다 보니 리베트의 영화를 연극적인 영화라 오해하는 일이 생긴다.

- 실험 영화

또 하나의 오해가 있다. 리베트를 ‘실험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 평가하는 것이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는 20세기 초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소련이나 독일을 많이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1920년대 초반의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인상주의 영화 운동에 상대적으로 적게 주목한다. 하지만 아벨 강스나 마르셀 레르비에의 영화를 보면 피카소의 그림을 영화화했다는 착각이 들 만큼 기이한 영화들이 많다. 그런 움직임은 전쟁을 통과하면서 사라졌지만, 리베트는 프랑스 영화사의 이 흐름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사실 리베트가 ‘실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아니지만, 영화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리베트를 아방가르드 운동의 후예로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좀 억울하기는 하다. 리베트는 실험을 위한 실험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단지 리베트는 자신이 한 번 만든 영화와 똑같은 영화를 만들지 않으려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가 있었다. 그런 자세가 결과적으로 리베트의 영화를 실험적인 영화로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학자 데이빗 톰슨 같은 경우는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가 <시민 케인> 이후 만들어진 가장 혁신적인 영화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누벨바그와 연극, 실험 영화를 키워드 삼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키워드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도끼에 손대지 마라> 같은 경우가 특히 그렇다. 즉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감독이 바로 자크 리베트이다.


3.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이제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에 대해 몇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며 이야기해 보겠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리베트가 만든 영화가 바로 <아웃 원>이다. 이 작품이 워낙 길다 보니 배급용 프린트를 별도로 못 만들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아웃 원>의 프린트는 세상에 딱 한 벌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배급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리베트가 그걸 많이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아웃 원>을 4시간으로 재편집한 <아웃 원: 유령>이란 버전을 따로 만들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리베트는 피로감을 좀 느낀 것 같다. 13시간짜리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도 그렇고, 그렇게 힘들게 만든 영화가 관객과 많이 못 만났기 때문이다.

그 뒤 리베트는 셀린느 역을 맡은 줄리엣 베르토와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당연히, 제작비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다 보니 그 작품이 준비하는 도중에 엎어졌다. 그런데 리베트가 그 과정에서 줄리엣 베르토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여자 주인공이 두 명 정도 나오는 작은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그리고 줄리엣 베르토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줄리 역을 맡은 도미니크 라브리에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각본을 썼고, 이 각본이 바로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였다. 참고로 이 영화는 리베트가 만든 영화 중 거의 유일한 상업적 성공작이라 볼 수 있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누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고양이나 두 인물의 행동 패턴 같은 것들을 보면 그렇다. 실제 이 영화의 제목인 ‘배 타러 가다’부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 소설의 제일 첫 페이지를 보면 작가인 루이스 캐롤이 쓴 시가 나온다. 이 시에는 ‘세 아이와 함께 보트를 타러 갔다.’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앨리스의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즉 영화의 제목 자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첫 장면에서 셀린느가 뭘 떨어뜨리고 줄리가 따라가는 건 누가 봐도 앨리스와 토끼를 떠올리게 한다. 그 외에 한정된 공간 속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도 앨리스가 이야기 내내 벌이는 패턴이다.

형식적인 측면, 특히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오르게 한다. 리베트의 영화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벌이는 게임 같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데 리베트는 이걸 마치 게임처럼 다룬다. 이를테면 그의 영화에는 정확한 시간이 나오지 않는다. ‘9월의 마지막’, ‘12월의 초’, ‘1980년의 어느 날’ - 이렇게 모호한 시간을 제시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재미있는 건 그 시간을 뒤섞는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와 현재를 만나게 한다. 극 중에서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한 소년이 사실은 줄리가 어릴 때 옆집에 살았던 소년의 이야기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리베트는 이 영화에서 시간을 섞거나 반복한다.

- 매직

다음 키워드는 ‘매직’이다. 마술이라고 말하면 어감이 살지 않는다(웃음). 이 영화에도 매직이 나온다. 소품으로 마술책이 직접 나오기도 하고 셀린느의 직업이 다름 아닌 마술사이기도 하다. 참고로 <지상의 사랑>이나 <작은 산 주변에서> 같은 영화도 마술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왜 그럴까. 리베트의 중요한 세계관 중 하나가 ‘미스테리’다. 리베트에게는 현실과 미스테리를 연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매직이다. 현실에서는 미스테리를 풀 수 없지만 매직을 통하면 현실과 미스테리를 연결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리베트의 영화에는 매직이 자주 등장한다. 만약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에 매직이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보자. 아마 그 매력이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매직과 관련해 조르주 멜리에스의 이야기도 조금 하고 싶다. 아시다시피 멜리에스는 <달나라 여행>을 만든 감독인데, 원래는 마술사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영화에도 마술의 트릭을 사용한 장면이 많다. 그런데 영화의 역사에서 리얼리즘이 중요하게 평가받으면서 멜리에스가 추구했던 ‘매직’의 측면이 많이 사라졌다. 심지어 마술적인 영화가 촌스러운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리베트는 그 매직을 다시 영화 안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감독이다.

- 문 / 퍼즐과 추리

리베트의 <북쪽에 있는 다리>를 보면 퍼즐 맞추기에 대해 리베트가 보여주는 태도가 있다. 특히 현실과 초현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설정하고, 그 사이에 있는 문을 열기 위해 퍼즐을 푼다는 테마가 많이 나온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에도 어설프지만 추리의 과정이 나온다.

- 악당

리베트의 영화에는 ‘악당’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악당은 선악의 개념과는 다르다. 악당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들은 악을 저지르기보다는 미스테리를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보통의 악당은 나쁜 짓을 해서 주인공을 괴롭힌다. 그런데 리베트의 악당은 주인공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반복하며 미스테리를 강화한다. 또한 다른 영화에서는 악당이 나중에 처벌을 받는데 리베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미스테리를 제공하는 역할만 맡고, 주인공들을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에서 관객은 누가 소녀를 죽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신 주인공들이 소녀를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만 보여준다.

- <뱀파이어 Les Vampire>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를 떠올려 보자. 셀린느와 줄리가 책을 훔치는 장면이 있다. 이때 두 사람이 입고 있는 머리를 덮는 검은 타이즈는 <뱀파이어>의 주인공 루시도라가 입었던 의상이다. 그리고 자막도 흥미롭다. 영화에 몇 번씩 반복되는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란 자막은 <뱀파이어>에 나왔던 자막이다.

리베트의 영화에서 자막이 맡은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고 또 하나는 이야기의 흐름을 알려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왜 필요한지 알 수 없는 자막이다. 보통은 명확한 시점을 이야기하거나 인과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자막을 사용한다. 하지만 리베트는 오히려 관객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자막을 사용한다. 자막으로 시간을 헷갈리게 만드는 식이다. 그 이유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 여성들

이 영화가 당시 인기를 누렸던 건 1968년의 페미니즘 운동과도 관련이 있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는 지금이나 당시나 페미니즘, 혹은 퀴어 시네마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줄리와 셀린느의 관계를 동성애로 보는 해석이 많았다.

페미니즘은 1970년대 영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재미있는 건 할리우드와 유럽이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남자들이 페미니즘을 굉장히 피곤하게 생각했다. ‘여자들이 설친다. 그러니 우리들은 갈 곳이 없다.’는 식이었다. 70년대 할리우드에서 남자 두 명이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는 로드무비가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진 건 사실 페미니즘 운동과도 연관이 있다.

반면 리베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페미니즘을 자기 영화에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를 퀴어 영화로 해석하는 의견에 동의하는 편은 아니다. 자크 리베트라는 감독 자체가 남자 주인공보다 여자 주인공을 좋아했다. 앞에서 리베트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걸 좋아한다고 했는데, 특히 그는 여자 배우와의 작업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스릴러 장르의 형식을 가져와 여성 배우가 그 안에서 반응하는 걸 훨씬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 같다(리베트의 영화에 여성들이 등장하는 스릴러 영화가 많은 것도 이 이유 때문인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를 장르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쪽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퀴어 시네마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 대해서는 특히 <북쪽에 있는 다리>나 <4인조 La bande des quatre> 같은 작품을 참조하길 바란다.

- 공동체적인 영화

리베트는 공동체적 방식으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이 영화에 나온 여성 배우들이다. 물론 헨리 제임스의 『다른 집 The Other House』 같은 장편 소설의 영향을 받았고, 전문 시나리오 작가도 참여하기는 했지만, 많은 부분의 이야기는 배우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영화 제작에 즉흥적인 부분이 많았다. (이 노선을 끝까지 유지한 건 아니다. 후기에는 엄격하고 고전적인 제작 환경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많다.) 배우들과 공동으로 작업을 하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드는 장면이 많았다.

- 창작으로서의 미스테리

이와 관련해 창작의 미스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영화를 만들 당시 리베트는 어떤 신을 찍으면서도 그 다음에 어떤 신을 찍을지 몰랐다. 왜냐하면 영화를 찍고 있는 현장에서도 시나리오가 아직 완성이 안 됐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그날그날 시나리오를 써왔고, 그러다 보니 제작 환경 자체가 ‘미스테리’였다. 즉 영화의 이야기뿐 아니라 창작 과정 자체가 미스테리였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실 자크 리베트의 거의 모든 영화는 ‘미스테리 영화’라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 본 것과 진실의 문제

리베트의 영화는 처음 몇 장면을 보고 전체 상을 파악할 수 없다. 이를테면 다른 영화에서는 악당을 처음에 정해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악당 같은 사람이 나오면 대부분 그 사람이 악당인 식이다. 하지만 리베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보는 인물의 정체가 변하거나, 또는 그의 본질적인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래서 관객들은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해야 한다. 쉽게 판단하면 실패한다.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도 그렇다. 처음에는 소피가 나쁜 여자처럼 보이지만 뒤로 갈수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따라가는 묘미가 있다.

지금까지 리베트의 영화와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에 대해 몇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며 이야기했다. 만약 리베트의 영화를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세계로 확장된 무대에서 문을 열고 닫으며 벌이는 술래잡기 같은 게임’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이 영화도 그렇고 리베트의 영화들이 대체로 이런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장이 길어서 좀 재미는 없는 것 같다(웃음).

정리 김보년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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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 드니 회고전 상영작 리뷰]


몸의 리듬이 전부라 말하고 싶은 - <좋은 직업>(1999)



클레르 드니의 <좋은 직업>은 진행되는 내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육체의 선율에 경도되게 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말조차 궁색하게 느끼도록 해버린다. 적어도 이 영화를 말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드니 라방이 “이것이 삶의 리듬”이라는 가사의 노래에 맞춰 무지막지한 막춤을 추는 모습에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순간을 언어화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영화를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는 동시에, 그런 언어화를 경유해 설명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순간이 아닌가란 고민도 하게 된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 생각을 이어나가든 그에 앞서 말하고 싶은 건 그것이 맞닥뜨리는 순간 무심코 이 영화에서는 몸의 리듬이 전부라 말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엔딩이라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에 담긴 몸의 리듬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영화의 서사와 배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작인 허먼 멜빌의 『수병 빌리 버드』의 영향이나 프랑스와 프랑스 식민지 아프리카 사이의 역사, 중심 인물들의 관계 구도와 진행이 이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파악해 나가며 보는 방법이다. 그랬을 때 이 영화가 어떻게 자연과 문명, 신화와 역사, 은유적 허구와 직접적 기록, 무심한 세계와 인간적 행위 사이를 넘나들며 모호하면서도 섬세한 방식으로 보는 이의 감각을 자극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실로 마지막 장면을 접하기 직전까지는 그런 교양 지식을 결여한 자신의 감상 태도를 다소 탓하며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드니 라방의 춤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러한 지적 활동 의무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고 하면서 그저 멍하게 스크린을 바라보게 될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 담긴 몸의 리듬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인정이 차라리 도움이 되는지도 모른다. 이 춤의 정체에 대해 말하자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제까지 이 영화에 있어 왔던 다른 춤들과의 차이점들을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군무가 아니라 독무다. 구호나 호령에 맞춘 각 잡힌 춤이 아니라 음악에 따라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막춤이다. 훈련된 육체의 절제미를 지닌 춤이 아니라 무언가에서 풀려난 육체의 폭발력을 지닌 춤이다. 그런데 이 마구잡이의 독무를 통해 폭발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육체를 놓고 불가피하게 추방된 육체라 해야 할지 비로소 해방된 육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도 야심도 목표도 없이 흡사 패잔병처럼 자기만의 방에서 살아는 부대장 포르시티에의 세계, 아름다움도 선의도 영웅의 존재도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다수에게 그것의 가능성을 탐하게 하는 신참병 상탕의 세계, 그 사이에서 자신에게 남아있는 진실된 세계는 전자뿐이며 후자는 허위의 세계일 뿐이라 믿는 듯한 드니 라방은 후자의 세계를 끝장내 버리면서 전자의 세계로부터도 영원히 쫓겨나길 택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자리하는 그의 춤은 그래서인지 추방당한 자의 비죽거림 같기도 하고 해방된 자의 발광 같기도 하다.


이 위험하고도 눈부신 엔딩이 가능했던 것은 드니 라방이란 배우의 덕이 큰 것 같다. 부드러움과 사나움, 자기통제와 방탕함, 아름다움과 추함이 언제 어느 쪽으로 쏠릴지 알 수 없이 대단히 불균형한 상태로 응집돼 있다는 느낌을 주는 육체, 그 육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와 역사와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는 어떤 삶의 리듬을 무방비하게 감각하게 한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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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 드니 회고전 - 상영작 리뷰]


불안의 정서 - <침입자>(2004)



<침입자>의 혼란스러움은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국경이 있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경계에서 세관원인 여자와 탐지견이 등장한다. 뒤이어 그녀의 가정,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집을 보여주고, 여자와 남자의 성애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고는 어두운 숲속, 담을 넘는 침입자들의 이미지. 이러한 이미지들의 배열에서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의 맥락을 잡아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오프닝 시퀀스의 역할이 서사의 인과관계를 쌓아가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봐야 할 것은 이미지들 그 자체다. 국경, 개, 가족, 그리고 침입자의 이미지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변주되며 나타난다. <침입자>는 심장 이식을 받은 루이 트레보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이 서사는 인과관계를 가지는 사건들의 선형적인 배열보다는 이미지들의 중첩을 통해서 구성된다.



루이 트레보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그는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 지대에서 개 두 마리를 기르며 한 여자와 살고 있다. 그의 심장에 문제가 생기고, 어느 날 집 근처를 배회하던 남자를 살해한 뒤에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집을 떠난다. 스위스로 건너간 그는 심장 이식을 받기 위해 브로커를 찾는다. 심장 이식을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그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들을 찾고자 한다. 부산을 거쳐 타히티로 향한 그는 자신이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트레보가 아들을 위해 산 배를 타고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서사에는 많은 공백이 있고, 클레르 드니는 이 비어 있는 지점들을 맥락을 찾기 어려운 이미지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장례식, 죽음과 관련된 꿈의 이미지들로 채워 넣는다. 하지만 이 이미지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끼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이미지들로 인해 영화는 하나의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불안이다. 영화가 전달하는 이 감각은 관객의 몫이면서 동시에 영화 안에서 트레보가 경험하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너의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숨어 있다.” 트레보는 외부의 적, 자신의 영역을 배회하던 적을 제거하지만, 또 다른 적을 자신의 내부에 심어놓는다. 타인의 심장이 그것이다. 내부로 침입한 이 심장이 트레보를 불안에 빠뜨린다. 심장과 죽음에 관련된 꿈들을 꾸고, 심장을 거래한 브로커는 계속해서 그의 주변을 서성인다. 이 불안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그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다. 트레보는 침입당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침입하는 자다. 그는 새로운 심장,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국경 또는 경계를 넘는다. 이 넘어섬의 행위를 통해 그는 다른 장소에, 다른 사람으로 존재한다. 타히티에서 배를 타기 전, 그는 한 남자의 시신을 확인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세관원의 남편으로 등장한 아들의 시신이다. 하지만 트레보에게는 새로운 아들이 생겼다. 그는 이 새로운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여행을 떠난다.


송재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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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리뷰]


관객의 무력한 위치 - <백인의 것>(2009)



많은 경우, 클레르 드니의 영화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특히 드니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표준적이고 양식화된 스토리텔링 형식을 크게 벗어난다. 그녀는 이야기의 인과 관계를 생략하고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주요 정보를 누락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시간을 뒤섞은 다음 그에 대한 지표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꿈이나 상상 장면을 현실인 것처럼 그리기도 한다. 당연히 관객은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야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인의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비교적 간단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감독은 인물들에 대한 정보나 인물들간의 관계, 그리고 주요 사건에 대한 인과 관계를 생략한다. 이를테면 관객은 마리아가 생명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왜 그렇게 농장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으며, 아들 마누엘이 왜 갑자기 비정상적 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마리아와 반군 지도자 복서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둘은 왜 이렇게 에로틱하게 그려진걸까). 결국 관객은 제한적인 정보를 통해 이런저런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한 뚜렷한 상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애초에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연출 방식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양식화된 인과 관계에 대한 거부일 수도 있고, 관객들을 영화의 의미 생성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키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맥락으로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미지가 하나 있다. 바로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검게 탄 시체다. 이야기의 흐름상 이 시체가 누구인지는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 시체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를 특정 인물로 인지할 수 있게 만드는 지표(인종, 성별 등)를 지워버린다. 앞뒤 상황으로 비춰보아 마리아의 아들 마누엘이 아닐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먼 거리에서 불탄 시체의 신원을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체는 결과적으로 <백인의 것>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하려 했던 마리아는 이 시체를 본 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한 인물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이 행위를 통해 쉽게 잊기 힘든 강렬한 정서적 파장을 만들며 이야기를 끝낸다. 단적으로 말해 이 시체는 영화의 의미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충격 효과는 의미 체계 안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 사건을 촉발시킨 시신의 이미지가 실은 텅 빈 구멍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만약 이 시신이 마누엘의 것이 아니라면? 또는 마누엘이 무사히 살아있다면?). 그렇기 때문에 <백인의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부조리한 영화로 남는다. 하지만 클레르 드니는 이 문제에 대해 답이나 실마리를 제시할 생각이 없다. 이는 소위 ‘열린 결말’과도 다르다. 열린 결말이라면 관객이 영화 안에서 발생 가능한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 관객은 그냥 무지無知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앎 앞에서 무력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삶의 불가해한 근본적 속성을 영화 안에 구현하려 한 클레르 드니의 연출적 전략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영화 <백인의 것>은 디제시스적 세계 내에서 발생 가능한 어떤 의미를 추구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이는 공들여 어떤 세계를 만든 뒤 그 안에 있는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의미를 좇을 수 없게 통로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시니컬하게까지 느껴지는 연출자의 이러한 태도는 이 영화 앞에서 선뜻 마음을 여는 걸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게 관객인 나는 <백인의 것> 앞에서 무력하게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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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영화: 클레르 드니의 세계


낯섦, 이방인, 주변부, 어두움, 신체, 감각, 타자 등. 클레르 드니의 영화가 연상시키는 미묘한 단어들이다. 1990년대 이후 프랑스 영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흐름으로 비평가들은 ‘감각’과 ‘신체’에 대한 관심을 꼽는다. 그 대표적인 감독이 필립 그랑드리외, 가스파르 노에, 브루노 뒤몽, 베르트랑 보넬로, 카트린느 브레이야 등이다. 클레르 드니 역시 이런 경향에 속하는 주요 감독으로 여겨진다. ‘감각의 영화’라 할 수 있는 이 경향은 조형적 측면의 강조라는 프랑스 영화미학 전통을 신체와 연결해 확장시키며, 영화적 서사구조와 미장센에 독특한 흐름을 형성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조형적 내레이션을 신뢰하는 영화에 동질감을 느낀다”고 밝힌 것처럼 드니는 영화의 설명적인 화면 구성이나 대사보다는 조형적인 이미지를 통한 내레이션 구성과 연결에 집중한다. 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대사보다는 침묵, 안무와 같은 신체 언어, 스토리의 빈번한 생략, 파편화된 화면 구성, 인과율의 단절과 같은 영화 언어의 사용은 클레르 드니의 영화가 프랑스 영화 가운데서도 더욱 낯설고 난해하게 느껴지고,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진형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이방인과 타자의 세계


프랑스 행정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카메룬, 소말리아, 지부티 등 아프리카를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클레르 드니는 자신을 ‘아프리카의 딸’이라고 할 정도로 아프리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드니에게 아프리카는 낯선 곳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항상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드니는 데뷔작 <초콜렛>(1988)에서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인 여성의 호기심과 애정어린 시선으로 아프리카를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초콜렛>을 시작으로 드니는 이후 식민주의와 포스트 식민주의로서의 아프리카에서 나아가 이질적이고 낯선 세계에 대한 관심과 시선, 이방신, 타자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으로서의 타자의 신체 등 그녀의 영화를 특징 짓는 여러 요소로 영화적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드니 영화의 특이성은 먼저 영화의 배경과 인물의 선택에서 드러난다. 배경은 항상 이질적이고 낯선 장소이며, 지정학적으로 주변부에 속해 있다. 또한 배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예외적이고, 극단적일지라도 사건의 전개 양상은 매우 일상적이다. 드니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주류에서 멀리 떨어진 소외 계층에 속하며 사회적으로 타자이다. 흑인, 게이, 청소년 등 이방인이나 주변인, 혹은 심리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단절된 이들에 대해 드니는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아프리카와 흑인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 관심으로, 데뷔작 <초콜렛>에서 프랑스 식민지 카메룬에서 안주인을 사랑한 흑인 하인에 대한 시선에서 이런 특징이 엿보인다. 알제리를 비롯해, 아프리카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프랑스의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이유에서 찍은 <네네트와 보니>(1996)는 그 변두리인들 가운데 부모 없이 사춘기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오누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잠들 수 없어>(1993)에서는 흑인 게이 살인자의 삶을 이방인인 리투아니아 처녀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프랑스 독일 공동 채널 ‘아르테’의 제작 의뢰로 만들어진 <좋은 직업>(1999)은 중동의 디부티라는 변방에서 프랑스 외인부대의 생활을 담은 것이다. 가장 평범한 백인 프랑스 여인의 하룻밤을 다룬 <금요일 밤>(2002)은 이제까지 자신이 누렸던 작은 소우주에서 다른 지대로 이행해 가려는, 이젠 더 이상 여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직은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 타자로 여인이 묘사된다.

이처럼 그녀는 초기 아프리카와 흑인이라는 분명한 지정학적 지형도를 확장시켜 주된 관심을 이방인, 타자와 몸이라는 탈-시공간적이고 근본적인 테마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영화 속 배경도 파리와 같은 주류 공간으로 바뀌고 백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변모는 그녀의 주된 관심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심층적이고 내적인 문제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와 관련한 작업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낭시가 직접 출연하는 단편이 포함된 옴니버스 <텐 미니츠: 첼로>와 낭시의 동명의 책에서 영감을 얻은 <침입자>(2004)는 낭시에게 얻은 철학적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낭시의 책 『침입자』는 자신의 심장이식 수술의 경험을 존재 내에 공존하는 타자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통해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클레르 드니의 관심과 일치한다.





감각의 세계, 매혹의 대상이자 장애물로서의 몸


이렇듯 그녀의 관심은 낯선 것들이 우리의 신체, 감각의 작용, 욕망과 어떻게 연결되며 작용하는가이다. 감각으로서의 몸은 그녀의 영화에서 이중적이다. 초기 매혹과 호기심의 대상으로서의 몸의 포착은 후반으로 갈수록 욕망의 충돌과 장애물로서의 몸의 표현에 집중한다. 낯설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매혹적인 동시에 위험하다. 이는 몸과 감각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이다. 무엇보다 타자의 몸은 매혹적이다. 가시적으로 외부에서 바라본 몸은 이끌림, 매혹적인 욕망의 세계로 초대한다. <좋은 직업>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소녀들의 몸, 사막에서 신체를 단련시키는 외인부대의 몸은 마치 현대무용에서 안무 동작처럼 시각적이고 형상적인 아름다움과 매혹의 대상으로 묘사된다(드니는 프랑스의 안무가인 마틸드 모니에르의 신체를 담아낸 <마틸드를 향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네네트와 보니>에서 보니는 이웃에 사는 빵집 부인의 몸에 매혹되고, 네네트는 임신한 자신의 신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매혹된다.

매혹된 신체와의 만남은 처음에는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촉각적인 접촉, 어루만짐, 애무 등으로, 이는 긴장되고 욕망하는 신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곧 그 접촉은 의도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은 때로 충돌하고 서로를 파괴한다. 시각적 만남 이후 촉각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 영역은 겹쳐지고 확장된다. 그리고 다시 가장 근접한 만남, 접촉면 사이 혹은 그 위에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탄생한다. 타자들이 만나 이루어지는 세계, 타자를 인지하고 접촉이 일어난 후에 이루어지는 감각 세계는 이성을 넘어선 세계로, 여기에는 감각의 충돌이 있다.

감각의 충돌은 가시적인 영역에서 섹스를 만들고, 범죄를, 그리고 전쟁을 만든다. 그 충돌은 때로 매혹과 경이감을 일으킬 것이나 때로 파괴와 해체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결과는 섹스와 범죄의 결말로서의 어둠의 세계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1990)에서의 불법 투계장, <트러블 에브리 데이>(2001)에서 섹스를 하며 신체를 훼손하는 미지의 질병에 걸린 주인공들, <돌이킬 수 없는>(2013)에서 근친상간적 어둡고 은밀한 공간은 그런 어둠의 세계를 반영한다. <백인의 것>(2009)에서 흑인, 백인의 것, 즉 타자에 대한 과도한 매혹은 식민주의과 살육과 내전을 만든다.

하지만 클레르 드니에게 주된 관심은 결과로서의 가시적인 사건보다는 감각-충돌의 만남과 그 세계의 생성에 있는 듯하다. 그녀의 관심은 비가시적인 사건, 즉 최초의 접촉, 시각적인 만남과 촉각적인 만남, 그리고 그 접촉면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비가시적 영역을 가장 접근해서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그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감각-욕망의 어두운 세계


후기작 <트러블 에브리 데이>, <백인의 것>, <돌이킬 수 없는>과 같은 작품은 느와르풍의 영화, 범죄, 호러, 스릴러와 같은 장르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 영화에서 드니는 감각의 어두운 측면, 즉 신체의 훼손, 파괴, 욕망, 집착, 강박증 등과 같은 이미지들에 집중한다. 여기에는 감각-욕망의 극단적 이미지들, 충동과 파괴가 있으며, 그것이 만들어낸 느와르적 세계, 퇴락한 세계, 음모와 범죄가 있다. <돌이킬 수 없는>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낯설고 기이하며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일반적인 장르로서의 범죄, 스릴러 영화는 오래된 장르적 관습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안전장치를 제공한다. 비교적 분명한 선악구도와 징벌적 결말 구조, 어두운 세계에 대한 익숙한 묘사, 장르적 내러티브와 이미지의 차용의 현실지시적 강도, 사실적인 묘사의 수위가 높더라도 상대적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드니 영화에서 모호한 선악 구도, 빈번한 생략, 과거와 현재의 혼재, 지극히 일상적인 접근 등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방식과 예측을 벗어난 결말은 관객에게 난해함과 불편함을 준다. <트러블 에브리 데이>에서 타자의 신체의 훼손은 관습적 호러 장르에서 용인되는 방식과 다르다. 위협의 순간은 가장 매혹적인 순간에 일어난다. 접촉에의 욕망이 가장 극에 달한 순간에 신체는 파괴된다. <백인의 것>에서 피를 나눈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사람들이 총으로 위협하고, 가장 정상적이고 안정된 순간이 우리를 배신할 것이다.




드니가 그리는 영화적 지형도에서 가장 분명한 변화를 보려면 <초콜렛>과 <백인의 것>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타자이자 이방인인 백인 여성이 바라본 아프리카 식민지라는 동일한 요소가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커다란 간극으로 드러난다. 향수가 깃든 로맨틱하고 평화로운 공간으로서의 <초콜렛> 속의 백인 여성과 그것을 거울화(mirroring)하는 <백인의 것>의 백인 여성은 교만하고 물욕에 찬 눈먼 여성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름다운 원피스를 입고 흑인들과 친근하게 지내며 함께 노동하면서 자신이 누리는 평화와 안락한 삶의 이면을 보지 못한다. 저변의 어두운 세계가 서서히 드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감각을 신뢰하는 ‘눈먼 자’이다. 두 영화는 여전히 몸과 감각의 세계를 그리지만, 한편에서 다른 한편으로의 분명한 이행이 있다. 타자의 매혹적인 신체라는 순진한 세계는 그 욕망의 감각이 만들어낸 어두운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드니의 인물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감각 세계의 충돌로 인물은 이미 파괴되고 분열되었다. <잠들 수 없어>에서 살인마가 되고, <백인의 것>에서 백인 여성과 아들은 광기에 빠지고, <돌이킬 수 없는>에서 아버지와 딸, 그리고 어머니까지 세 명 모두는 분열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한 가족이다. 감각 세계에서 자아가 파괴되고 길을 잃은 신체는 광인이 되기에 이른다.  

신체, 감각 작용은 비극을 만든다. 매혹의 순간은 일시적이며 달콤하지만, 파괴의 지점까지 이끌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경고의 메시지가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의문은 우리가 어떻게 신체를 길들이고 서로 화해할 수 있는가이다. 혹은 비가시적인 감각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되는지를 알고, 그것을 조정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드니의 인물들은 실패한 인간이다. 그리고 경제적, 이념적, 종교적 갈등과 테러로 얼룩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현재, 세계의 모습이 이를 증거한다.

임세은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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