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다”

<사이비> - 연상호 감독



4월 작가를 만나다의 주인공은 <사이비>의 연상호 감독이었다. 지난 4월 26일, 어느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이야기를 그린 <사이비>를 상영한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매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 이날, 관객들은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처음부터 제목을 <사이비>로 생각했었는지 궁금하다.


연상호(영화감독)│일단 처음부터 제목은 사이비였다. 제목 먼저 나오고 이야기가 나온 케이스다. 원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이비라는 소재를 다루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엑스파일>을 좋아했는데, <엑스파일>의 에피소드를 한국에서 찍는다는 루머가 있었다. 한국 사이비 종교에 대해 멀더와 스컬리가 수사를 펼친다는 것이었다. 그 루머를 듣고 얼마나 재밌을지 혼자 상상해보고는 했다. 그 당시,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내가 좋아하는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한국에서 만들 수 있을지 생각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영화에 

<텔미썸딩> 정도를 제외하고는 스릴러 장르가 없었다. 한국적이면서도 <세븐>처럼 쫀쫀한 스릴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키워왔다. <살인의 추억> 이 나오면서 그 생각도 사라졌지만 말이다(웃음).

어쨌든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재밌는 장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처음에는 착한 말을 하는 악인과 거짓말을 하는 선인이 대결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김성욱│고등학교 때부터 이야기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인데, 어떻게 애니메이션을 선택했는지 궁금하다.


연상호│중·고등학교 때 TV를 통해 본 <스타워즈>나 <로보캅>을 좋아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후반부터 애니메이션에 심취하면서 아주 철저한 ‘오덕’의 길을 걸었다(웃음). 당시 청계천 같은 곳에서 구한 불법 자료가 세탁기 박스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는데 그러다보니 ‘독립 애니메이션’도 보기 시작했다. 일본 전통인형으로 만든 스톱모션 애니까지 구해봤을 정도였다. 거기서 더 깊숙하게 들어가고 싶어서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을 위해 그림을 시작했는데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으로 진로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 김이 빠졌다.


그리고 고3부터 비디오방을 갔다. 미술학원 앞에 아모르 비디오방이라고, 한 편 보는데 2,500원이었다. 거기 가서 맨날 <젖소부인 바람났네> 같은 에로 비디오를 봤다. 그런데 에로 비디오 밑에 안 팔리는 영화들, <전함 포템킨>,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 같은 것들이 깔려 있었다. 에로 비디오를 다 섭렵한 뒤 볼 게 없어서 그런 것들을 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짧은 시간에 굉장히 많이 봤다. 이건 오늘 처음하는 이야기인데, 그때 본 영화 중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해준 작품이 브래드 피트가 나온 <캘리포니아>였다. 보면서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는데 ‘저런 건 나도 만들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영화는 ‘뭐지 저게’ 이런 느낌이었는데 <캘리포니아>를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거다. 그리고 대학에 가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비디오카메라를 사고 편집프로그램을 속성으로 두 달 배운 뒤 찍기 시작했다. 당시 컴퓨터 하드 용량이 2기가였다. 그걸로 편집을 하고 동네 치킨집에서 일하는 잘생긴 친구를 배우로 캐스팅했다. 둘이서 20분 짜리 영화를 1년 동안 찍었다(웃음). 어찌나 그 배우가 말을 안 듣던지. 영화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비디오카메라가 60만원 정도였으니 정말 비싼 거였다. 백수 아들이 부모님을 졸라 그런 걸 샀으니 죄책감이 들더라. 그래서 뭘 해야할 것 같아서 비디오카메라 기능을 보니 ‘컴마 찍기’가 있었다. 그걸로 주변 사물을 조금씩 움직이며 찍으니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자는 생각까지 미쳤다. 인형영화 2편, 실사영화 2편 정도 만든 뒤 스톱모션의 한계를 개인적으로 느끼고 군대 갔다온 뒤 애니과 친구들이 쓰는 그래픽툴을 배워서 2D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내 첫 단편으로 알려진 <지옥>이 그 때 만든 것이다. 그 전에는 네 작품 정도 만들었는데 다 폐기했다.


김성욱│짤막한 역사인데 흥미진진하다. 덕후에서 <전함 포템킨>을 거쳐 <캘리포니아>, 2D 애니메이션까지. 궁금한 건 전작들도 그렇고 사회 쪽 주제를 다루는 이유이다.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 안에서 스토리텔링이 뛰어난 편이다. 실사영화를 만들어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회적 주제를 다룰 때 애니메이션이 적합한 장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연상호│애니메이션을 선택한 건 단순한 취향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실사보다 애니메이션이 좋았다. 그런데 단편 애니메이션으로는 제작 지원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강제적으로 애니메이션을 그만 두었는데 그때가 33살이었다. 하지만 <돼지의 왕> 시나리오는 이미 2006년에 써놓았었기 때문에 그걸 실사 영화로 만들려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런데 투자 가능성이 없다더라. 당시 친하게 지내던 양익준 감독이 <똥파리>를 만들어서 뜬 상태라 <돼지의 왕>을 독립영화로 만들면 1억 안에 만들 수 있을까 물어봤는데, 도저히 안 된다고 하더라. <똥파리>는 그래도 자기가 출연도 해서 어떻게 했다고 치지만, 예를 들어, 너 아침 교실 장면 어떻게 찍을 건데, 1억 가지고 스탭이랑 배우들 도시락은 어떻게 할 건데 하면서 3~4억은 든다고 했다. 그런데 3~4억은 독립영화로서는 굉장히 애매한 돈이다. 이것저것 다 안 되다 보니까 제작사에서 스타를 캐스팅할 수 있는 연령대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쓰라고 했다. 그래서 삽십대 남자 둘이 싸우는 <사이비> 시나리오가 나왔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도 다들 안 한다고 했다(웃음). 그래서 실사영화는 결국 못 찍었다.


그러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상상마당에서 독립영화에 1억원 정도를 투자하는 프로그램을 발견했고 거기에 과감하게 애니메이션으로 기획안을 제출해서 통과 됐다. <사이비>는 <돼지의 왕>이 잘 돼서 투자를 받을 수 있었던 케이스다. 사실 <돼지의 왕> 때도 그랬고, <사이비> 때도 그랬고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실사영화 만들어보라는 것이다. 얼마 전 프랑스의 배급사에서 네 가지 질문을 보내왔다. 첫 번째는 미국이나 영어권에서 활동할 생각이 있는가. 두 번째는 <사이비>를 실사 영화용으로 각색할 생각이 있는가. 세 번째는 실사 영화를 연출할 생각이 있는가. 네 번째가 영어를 할 줄 아는가(웃음). 지금도 실사와 애니메이션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



김성욱│답변은 했나?


연상호│했다. “뭐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지만 영어는 할 줄 모릅니다.”(웃음) 나는 <사이비>가 애니메이션이라서 더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비슷한 내용의 영화를 실사로 만들면 제작비 같은 부분이 너무 달라지기 때문에 제작하는 분들과 여전히 헤매고 있다. 돈이 많다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겠지만 남의 돈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어쨌든 나는 영화 쪽 일을 하는 사람이니 여건에 맞게 충실히 찍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왜 넣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 나는 <사이비>나 <돼지의 왕>이 사회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인적인 것에 대한 궁금함이 많았다. 내가 가진 화나 분노 같은 것을 표현하는 게 재밌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쓰려면 연구를 해야 하니까, 사람들의 화나 분노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보면 결국 사회, 환경, 국가, 이념에서 오는 것이다.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도 사회 부조리를 고발한다는 느낌보다는 이런 사회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충실히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다.


관객1│최근에 본 영화 중 몰입도가 제일 높았다. 기회가 된다면 꼭 실사로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연상호│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는 기회만 된다면 뭐든 할 생각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여건상 힘들 것 같다. 해외에서 <돼지의 왕>을 실사로 만들자고 했는데 결국 안 만드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미국이나 몇 군데에서 이야기는 있는 걸로 안다. 미국에서 연출할 기회라는 게 흔치 않은 기회라서 기회가 온다면 열심히 하겠지만 큰 기대를 갖고 있지는 않다. 진행된 건 전혀 없고 간만 보고 있다. 그리고 <사이비>는 종교적인 내용이 강해서 영어권에서 쉽게 다룰 수 있지 않다고 한다.


관객2│비닐하우스 교회의 디테일이 좋았다. 어떻게 취재했는지 궁금하다.


연상호│기본적으로 개척교회는 특이한 곳이 많다. 아무 장소에 십자가만 세우면 개척교회다. 나도 크리스찬이라서 어릴 때 가본 적이 있다. 나무판 교회, 폐자재로 만든 교회, 천장에 나무 문짝이 붙어 있는 초현실주의 교회 등등. 그런데 사람이 많이 들어와야 하니까 공간이 넓어야 한다. 넓은 공간에 싸게 지으려면 비닐이 좋을 것 같아서 비닐하우스 교회를 떠올렸다. 그런 비슷한 건물들을 찾아서 자료에 참고했다.


관객3│감독님 작품 중 <창>을 보고 찝찝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사이비>의 결말에서 감독님이 의도하신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연상호│이 영화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꼬는 시선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바보 멍청이로 보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믿음을 갖고 있다. 꼭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더라도 부모님, 국가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은 누구나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믿음에 대한 생각을 늘 가져왔다.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이 정당한가, 같은 질문 말이다. 영화에 나오는 민철은 아무 믿음도 안 가진 사람 같지만 그도 갖고 있는 믿음이 있다. ‘모든 세상은 단순하게 돌아간다’, 또는 ‘단순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같은 믿음 말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민철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여러 층위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안 것이다.

엔딩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갖는 애매모호하고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믿음이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민철은 동굴에서 저주인지 기도인지 속죄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다. 이 말을 충실히 영상으로 표현하려 했다. 민철은 진짜이면서도 가짜인, 또는 가짜이면서도 진짜인 것들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것이 가짜이면서도 진짜일 수 있는 무언가와 맞닥뜨리는 순간이다. 그 결과 민철이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이 어떤 모습인지 마지막 장면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김성욱│영화 마지막 장면에 풍경이 굉장히 아름답게 묘사되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화사하고 반짝거린다.


연상호│일단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웃음). 미야자키 하야오는 워낙 유명한 감독이라 그에 대한 작가론을 여러 개 봤는데, 인상 깊게 본 것 중 하나가 “푸른 하늘, 그 밑에 폐허”라는 문장이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작품들을 보면 아름다운 대자연과 그 밑의 멸망한 인간 문명을 결합해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슬며시 차용했는데, 재개발로 사람들이 거의 다 나간 이 마을을 세계 종말이 가까워진 세계라고 봤다. 수많은 인간들의 감정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연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의 큰 틀과 거기서 살아간느 인간들의 감정이 중첩되고 충돌하는 이미지를 만들려 했다. 처음에는 인간들의 감정이 더 크게 보이겠지만 실은 그와 아무 상관없이 굴러가는 자연이 더 잔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관객3│두 가지 질문이 있다. 작품들의 배경에 현실적인 부분이 많다. 작품 만들 때 실제 장소를 많이 참조하는 편인지 궁금하다.

두 번째는 감독님이 얼마 전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린 한국 애니메이션 지원정책 관련 글에 대한 것이다. 동의하는 사람도 많으나 동의 안 한다는 사람도 많다.


연상호│다들 그렇겠지만 나도 열심히 취재를 하는 편이다. 디테일한 이미지를 주어진 환경 내에서 열심히 찾아본다. 그런데 표현주의적 연출을 좀 하는 편이다. 그림자를 극단적으로 쓰거나 빛을 많이 들여온다. 일그러진 이미지를 쓰는 건 아니지만 그런 그림자와 빛의 대조를 적극적으로 쓰려고 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 지원정책은 어마어마하게 문제가 많다. 지원금과 투자금에 차이가 있다. 투자금은 영화가 흥행이 되든 안 되든 돈을 다 갚아야 한다. 지원금은 돈을 받으면 돌려줄 의무가 없다. 물론 지원금 받으면 눈 먼 돈이 생기는 거라 편하다. 그런데 그 지원금을 둘러싼 관계들이 워낙에 복잡하다. <돼지의 왕>을 지원금으로 만든 줄 아는 분들이 많은데 <돼지의 왕>은 투자 받아서 만들었다. 지원금으로 들어온 돈은 천만 원 정도이다. <사이비>도 삼억 팔천 만원 정도 예산이 들었는데 그 중 팔천 만원 정도가 지원금이고 나머지는 투자금이었다. 즉 순제작비를 지원금으로 채운 적은 없다. 곧 나올 <서울역>도 투자금으로 만들었다. 지원 사업 공모에 낼 계획도 없다.


그런데 물론 그건 내 문제이고 독립 장편 애니메이션 하려는 동료들은 어떻게든 지원금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현실이 어떠냐면 5분 길이의 애니메이션 트레일러 만드는데 지원금 30억을 준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3, 4백억 예산의 장편 애니메이션 트레일러 만드는 데 30억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 돈 받은지 5년이 지났지만 거기서는 아직 작품을 만들지 않았다. 만일 투자금을 받는다면 그 돈을 갚아야 하는데 지원금을 30억 받으면 안 갚아도 된다. 일반적인 ‘상업 애니메이션’에 왜 공공재로서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하다못해 ‘독립 애니메이션’ 하는 나도 투자를 받는데 왜 상업 애니메이션 하는 분이 그 어마어마한 돈을 가져가서 안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는데, 논란이 있었던 것은 알고 있다. ‘될 만하니까 세금 걷어서 주지’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던데, 앞으로는 여기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열심히 영화 만들어주기 만을 바랄 뿐이다.


관객4│감독님의 작품들에서 스토리가 주는 충격과 불편함 이전에 영상에서 주는 불편함을 먼저 느꼈다. <돼지의 왕>에서 고양이를 괴롭히는 장면이나 <지옥>에서 쥐를 괴롭히는 장면들 같은 것. 왜 이렇게까지 자극적인 장면이 필요할까란 생각이 든다. <사이비>에서도 개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동물을 학대하는 장면이 꼭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걸 넣는 이유가 궁금하다.


연상호│ 일단 나는 폭력 장면 연출에 대해 원칙이 있다. 폭력 장면은 폭력적으로 연출한다는 거다. 폭력 장면을 멋있게 연출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물 괴롭히는 장면을 계속 넣고 있는데 나는 장르 영화를 만들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 필요하면 쓰는 편이다. <돼지의 왕> 때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외국에서는 고양이나 개를 죽이는 장면이 유아살해에 맞먹는 정도라서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이다. 위험하다고까지 말했다. 그래도 계속 그런 장면을 넣었다. <돼지의 왕> 같은 경우는 계급 사회의 구조를 복잡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단순히 약자를 착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도 또 다른 약자를 착취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것 말이다. <사이비>의 개 장면은 꽤 고민을 했다. 처음에 성철우 목사가 개를 쓰다듬는데 개는 꼬리를 흔들고 뒤에 닥칠 위험에 대해서는 모른다. 목사가 가고 나서 최경석 일당이 개를 죽이는 것이 마을 사람들이 앞으로 겪을 일에 대한 복선이라 생각했다. 최장로가 앞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저지를 일에 대한 짤막한 우화인 것이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데, 오프닝이 우화와 같은 역할을 하길 바랐다. 그리고 처음에 관객이 헉, 하고 충격을 받은 뒤 그 긴장감을 가진 채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기를 바란 것도 있었다.



관객5│목사가 직접 복수할 것이라 다른 사람을 시킨다.


연상호│착한 성철우 목사가 나쁘게 변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성목사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수가 행복하기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은 마지막에 아마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을까. 일단 성목사 혼자서는 최장로 일당을 상대할 수 없으니 도움이 필요했을테고, 또 한 편으로 성목사는 자신을 ‘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을 위해서 악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다.


관객6│<돼지의 왕>과 비교해 이번 <사이비>에 점수를 매기면 몇 점을 주겠는가.


연상호│내가 만드는 작품은 늘 백 점이다(웃음). 그런데 만점이 몇 점인지는 모르겠다. 영화를 만들면서 아쉬운 점이 없을 수는 없지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 만든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블루레이 만드느라 <돼지의 왕>과 <사이비>를 연달아서 계속 보고 있는데 배우들은 <돼지의 왕>이 몰입도가 더 크다고 하더라.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이비>가 더 좋다. <돼지의 왕>은 나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작품이다. <지옥>도 마찬가지다.


김성욱│나에게 <돼지의 왕>은 이미지가 남고, <사이비>는 스토리가 남는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의 표현적 측면에서는 <돼지의 왕>이 더 적극적이었고, 이 영화는 상당히 사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민철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가 등장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연상호│<살인의 추억>과 <사이비>의 비슷한 장면들을 비교해보면 <사이비>가 더 멋있다(웃음).


김성욱│인물들이 다양한 맥락과 과거를 갖고 있어서 <돼지의 왕>보다 에피소드와 인물이 폭넓게 느껴진다. 일단 장로가 가장 인상적이다. 특히 헤어스타일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에서 최장로가 성경 구절을 구체적으로 인용하길래 실제 있는 말인지 찾아보았는데 진짜 있더라. 그리고 목사의 설교는 별게 없는데 장로의 언변은 디테일이 살아있다. 그런 대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듣고 싶다.


연상호│최장로가 언변으로 사람을 설득시키는 사람이라 디테일이 꼭 필요했다. 성경이 두껍지만 교회에서 주로 쓰는 구절은 거의 정해져있다. 사람들을 잘 끌어모을 수 있는 구절 말이다. 여러 후보들이 있었는데 돈과 관련된 이야기로 골라서 넣었다. 교회의 디테일, 이를테면 춤 같은 것은 직접 가서 찍어왔다.

내가 캐릭터 디자인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런데 친구 중 최규석 작가에게 시나리오를 보내주면 인물 스케치를 해 준다. 그렇게 최규석 작가가 최장로의 이미지를 보내주었는데 괜찮았다. 눈도 작고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표정을 하니 무서운 사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만들었다. 민철의 경우는 <파란 대문>(김기덕)에 나오는 장항선 배우를 참고했다. 그리고 성호는 강풀 작가(웃음).


김성욱│나는 목사 캐릭터가 굉장히 특이하게 느껴졌다. 목사의 제스처도 다채롭게 그려진다.


연상호│<사이비>에는 절제된 장면을 써보려 했다. 극에 들어간 환상 장면은 모두 성철우 목사와 관련된 것이다. 죽은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것과 엔딩에서 거울에 괴물이 등장하는 것. 그런 연출에 대한 동경이 있다. 후루야 미노루라는 만화가가 있다. <이나중 탁구부>, <두더지>, <시가테라> 같은 작품을 그린 작가인데 그가 자주 사용하는 연출이 뜬금포로 괴기스런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사이비>에 그런 걸 좀 해보고 싶었다. 절제된 상황에서 한 두 컷 정도 건조하게 들어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보는 사람의 감정을 이상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너무 절제해서 그런지 별 반응이 없더라.


김성욱│영화에서 신경 쓰이는 게 마을에 애가 없다는 것이다. 불모의 마을이다. 결국 공동체가 붕괴되는데, 이를 재건하겠다고 나선 것이 사이비다.

또 하나는 사랑의 문제이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도 극중에 나오지만 영화 속 사람들은 사랑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사람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신에게 요청한다.


연상호│일단 수많은 의문들을 끝까지 충돌시켜보려 했다. 칠성이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과 민철이 가족을 대하는 모습들을 비교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결국은 무엇이 옳은지 질문을 던지려 했다. 이건 기본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최근 ‘힐링’ 열풍이 불었다. 이걸 간단히 비꼴 수도 있겠지만 ‘이 바보 멍청아’ 하는 식으로 비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비꼼에 계속 반론과 반론을 갖다대어 엔딩에서는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답을 내기보다는 질문을 갖게 하는 것에 만족한다. 질문과 반론이 이어지며 영화를 보기 전에 갖고 있던 질문과는 다른 질문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성욱│<서울역>이 궁금하다. 서울역에 창궐하는 좀비 이야기라고만 들었다.


연상호│시나리오를 본 사람들이 엥? 이랬다. 대사가 거의 없고 액션과 액션의 연속이다. 영화가 나오려면 한참 멀긴 했지만 일단 혁명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혁명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혁명의 설계자들을 중심에 놓고 그린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혁명은 설계자에 의해 일어나는게 아니라 대중들이 갖고 있는 뭉뚱그려진 분노가 하나로 모이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의 설계가 설익을 수록 그 혁명이 더 폭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혁명을 그린 영화가 희생적인 영웅을 등장시키는 게 불만이었다. 나는 자기가 혁명에 참여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단순한 불만과 분노를 그리고 싶다. 그리고 이를 액션으로만 보여주는 것이 목표이다.


물론 욕 먹을 수도 있다. 그냥 좀비 나오는 영화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름대로 여러가지 설계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반인과 노숙자의 관계, 국가기관이 일반인을 대하는 태도, 노숙자와 좀비의 관계 등. 이를 통해 분노가 체계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우화를 만들려 한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그냥 좀비액션영화다. 흥행 했으면 좋겠다(웃음). 콘티그림이랑 선녹음한 걸 붙여 보았더니 영화가 너무 끔찍하더라. 그런데 무섭고 공포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더 큰 공포가 있는데 결국에는 그게 해피엔딩이라고 주장하는 느낌의 영화라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대를 하며 만들어가고 있다.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인데 배급이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 작업은 올해 말에 완성 예정이다. 그리고 <서울역> 외에 네 작품 정도를 더 준비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관객7│<서울역> 말고 다른 작품들은 어떤 것이 있나.


연상호│엠바고가 걸려 있어 자세하게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스릴러가 대부분이다. 애니메이션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관객8│계속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예산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실사와 비교해 애니메이션이 갖는 강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연상호│아까 말했듯 나는 후루야 미노루를 좋아한다. 그런데 항상 보고 나면 실망한다. 그래도 신작이 나올 때마다 기대하고, 보고 나면 실망하고, 이 과정을 반복한다. 그건 후루야 미노루라서 그렇다. 그의 그림과 스토리텔링이 너무 좋다. 그리고 나는 버전이 조금씩 다른 <아키라>가 일곱 개 있다. <인랑>도 박스세트, DVD, 블루레이 다 있다. 책상 옆에 놓고 있으면 배가 부르다. 우리 집에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없어도 그냥 갖고 있다. 왜냐하면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이비>가 실사로 만들어져 유명 배우가 민철을 연기했다면 나는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배우가 민철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을 보면 다들 그 형사를 ‘송강호’로 알면서도 재미있게 본다. 모르는 척 그렇게 보는 건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몰입을 잘 못 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영화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데 왜 뻔히 다른 인물을 써야할까. 소심한 양익준 감독이 <똥파리>에서 쌍욕을 하면 나는 그게 너무 웃기고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래서 내가 실사영화를 하는게 굉장히 어렵다. 그래도 내가 처한 산업의 시스템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만화만 하겠다고 고집하는 건 아니다.


관객9│마을이 수몰지구인데 마지막에 보면 주인공이 여전히 그 마을에 남아있다.


연상호│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마을이 물에 잠긴다는 것이 사람들이 우르르 나간 다음 갑자기 물이 쏟아지는 게 아니더라. 마을 이주 계획은 굉장히 장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수몰 자체도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다. 물을 서서히 흘려 넣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많은 분들이 얘기하듯 종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말 ‘직전’에 끝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종말에서 끝나면 관객들이 마음 편하게 극장을 나설 것 같아서 종말을 곧 앞둔 시점에서 끝내고 싶었다.




정리 ㅣ백지원 자원활동가

사진 ㅣ장혜진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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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포기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 5월 작가를 만나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





5월의 “작가를 만나다” 의 주인공은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이었다. 지난 5월 31일, <한공주>를 상영한 뒤 “무거운 표정”을 한 관객들과 이수진 감독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40분 가량의 대화가 끝나자 영화를 봤을 때보다 생각거리가 더 많아졌다. 공주의 힘든 삶을 지켜본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 이 영화를 어떤 계기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실제 사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수진(영화감독) : 날씨 좋은 토요일에 힘든 영화를 보셨다(웃음). <한공주>를 만들기 전에 영화에 나온 사건들 - 성폭행, 중고등학생들의 자살, 왕따와 같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게 계기였다.

김성욱 : 영화를 보면 “전 잘못한게 없는데요”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수진 : 그 대사가 집중력을 만들어준다. 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 먹을 때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굳이 나까지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유사 소재의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지만 포기하지 않으려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녀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따지기보다는 소녀가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

김성욱 : 흥미로웠던 것은 영화에 나오는 사물들, 그리고 작은 소음들이다. 거기에 한공주가 예민하게 반응한다. 선풍기라든지 형광등 깜빡거리는 것 말이다.


이수진 :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의 감독이 있고, 그걸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는 감독이 있다. 이야기를 다 쓴 다음 이걸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줄지 매우 고민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큰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부분에 대한 스케치를 보여주기로 했다. 공주의 집이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다보니 미장센적으로 새롭게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일단 아파트를 1층으로 설정한 뒤 그 앞으로 차가 지나다니게끔 했다. 그래서 형광등 조명 뿐 아니라 지나가는 자동차의 조명 등으로 긴장감을 주려 했다.

김성욱 : 사진 찍는 것에 공주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친구 집에 가도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계속 본다. 그리고 아줌마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기록에 대한 모티프 도 있고, 그걸 공개하는 것에 대한 모티프도 일관적으로 등장한다.

이수지 : 그러고보니 사진이 많이 나온 것 같다(웃음). 내가 사진을 전공해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김성욱 : 공주가 허밍하듯 부르는 노래가 있다.

이수진 : 크게 두 곡 정도를 사용했는데 하나는 음악감독이 직접 만든 곡이다. “스마일 어게인”이라는 곡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태리 민요다. “Ciao, bella ciao”라는 노래를 예전부터 굉장히 좋아했다. 나중에 꼭 써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넣어보았다.

공주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혼자서만 음악을 하는 친구다. 그런데 아이들의 아카펠라를 듣고 자신이 하던 음악과 달라서 신선하게 느꼈을 것이다.




관객 1 : ‘선생님 어머니’와 그녀의 애인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수진 : 사회적으로는 불륜이지만 그 두 사람이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공주가 겪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성행위라고 생각했다. 공주가 그걸 ‘듣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섹스의 ‘건강한’ 측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공주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묻는 분들도 있었는데,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 다음 장면은 과거 회상 장면이었을 것이다.


관객 2 : 나는 한공주를 도와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야기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어떻게 한 명도 도와주지 않을까 싶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공주가 인터넷에 자기 사진을 올리는 걸 두려워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영화로 인해 실제 피해자의 사건이 다시 한 번 알려졌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수진 : 두 번째 질문부터 답을 드리자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극영화이다.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픽션이다. 현실의 인물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GV를 할 때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를 처음 생각한 계기가 된 사건은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영화로 그 사건을 재조명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이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봤고 얼마나 생각했느냐에 따라 현실, 비현실이 다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현실을 미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관객 3 : 영화를 세 번 봤는데 처음에는 현재와 과거의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이제는 공주가 입은 옷 색깔로 현실과 과거를 구분한다. 그런데 현재의 공주는 보라색 후드티를 입는다. 나에게 보라색은 멍들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물병원에서 공주가 ‘새아버지’의 입술을 깨문 의미가 궁금하다.

이수진 : 보라색이 멍들었다는 뜻이라는 건, 다음에 같은 질문을 받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했다고 말해야겠다(웃음). 그런 해석도 정말 좋은 것 같다. 일단 현실과 과거를 나누기 위해 후드티 색깔을 구분했다. 그리고 보라색을 선택한 건 보라색이 배우와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웃음).

입술을 깨문 이유에 대해서는 - 공주는 수동적인 아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안 하는데 엄마에게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이야기 듣기를 거부했다. 그런 맥락에서 그 장면은 공주가 유일하게 리액션을 하는 장면이다. 왜 하필 입술을 깨물었냐 하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 생각을 했다. 과거에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런 방식으로 엄마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김성욱 : 그 전에 친구가 뱀파이어에 대한 얘기도 한다. 내러티브적으로 직접적인 연결은 없지만 뱀파이어, 입술, 피 이런 것들이 묘하게 연결이 된다. 형식적 구성에 대해 묻고 싶은데, 현재에 과거가 끼어드는 시간적 구성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플래시백이라고 하지만 명확하게 과거와 현재가 나뉘는 형식은 아니다. 이럴 때 미스테리 구조가 생긴다는 위험도 있다. 처음에 이 구조를 어떻게 떠올렸는지 궁금하다.

이수진 : 의외로 그 구조가 제일 빨리 정해졌다. 내가 그런 시간 구조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단순히 가해자는 나쁘고 피해자는 불쌍하다는 식으로 얘기한 뒤 끝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 의도를 살릴까 고민하다 지금의 구조를 떠올렸다.

그리고 과거를 보여줄 때 사건 위주로 갈지 감정 위주로 갈지도 고민했다. 사건을 중심에 놓으면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소재를 이용한다는 느낌을 줄 것 같았다. 그래서 감정 중심으로 갔다. 인물의 감정에 따라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게 했다.

관객 4 : 이 영화는 성장드라마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끝에는 결국 한공주가 성장을 못 하고 비극을 맞는다.

이수진 : 성장의 개념이 저마다 다를 것 같다. 과거에 <한공주>가 아닌 다른 ‘성장드라마’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는데 누가 이건 성장영화가 아니라고 하더라. 눈에 확 드러나는 변화가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성장은 젓가락질 못하는 아이가 계속 포크를 쓰면서 속으로 열등감을 지우는 그런 것이다. <한공주>에 눈에 보이는 희망이나 성장은 없다. 하지만 나에게 성장은 공주가 하루 또 버티는 것이다. 그런 의지를 갖는 게 내가 생각하는 성장이다. 또 엔딩 장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는 판타지로 느껴질 텐데, 나는 공주가 헤엄을 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관객 5 : 공주는 물을 싫어할 것 같은데 수영을 굳이 선택하는게 감정 이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공주 뿐 아니라 동윤이(한공주의 친구이자 가해자 중 한 명)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이수진 : 말씀하신 게 맞는데, 나는 이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왜 하필 물이냐, 왜 하필 수영이냐 라고 하시면 명확히 답을 못 드릴 것 같다.

동윤이도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감싸려는 것은 아닌데, 아이들이 가면을 쓰게 했다. 십대는 가치관이나 윤리관이 갖춰지지 않은 시기라서 반은 동물, 반은 인간으로 그리려 했다.

관객 6 : 공주는 왜 계속 살아가고자 했을까

이수진 :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주와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일을 겪은 뒤에도 힘들다고 생각한다. 별 생각 없이 “죽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관객 7 : 이 영화의 실제 인물이 누구인지 찾아보는 걸 꺼린다고 하셨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 영화가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는 사실에 설득력을 얻기도 할 것이다. 감독님은 영화 속 세상과 실제 세상의 간극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수진 : 처음 받는 질문이다(웃음). 좀 부끄러워서 이야기를 안 하는데, 사회도 물론 바뀌어야 하지만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분들도 내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변화한 만큼 함께 고민하며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요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한다.

김성욱 : 소녀들의 관계가 각별하게 나온다. 이런 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정도를 제외하고는 많이 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관계를 묘사했는지 궁금하다.

이수진 : 이를테면 립밤 장면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긴 했는데 배우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더 풍부한 디테일을 얻은 경우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남자애가 여고생을 바라볼 때 갖고 있는 이미지들을 참조했다. 화장실에 같이 가는 그런 거 있지 않나(웃음). 또 배우자에게도 많이 물어보았다. 왜 화장실에 같이 가냐라고 물었더니 ‘친한 친구니까 같이 가지’라고 말하더라. 그런 부분을 다 반영했다. 누군가는 ‘여자를 잘 아시네요’ 라고 말하던데, 또 어떤 곳에서는 여자를 잘 모른다고 말하더라. 굉장히 혼란스럽다(웃음).

솔직히 나는 여자를 잘 모른다. 그리고 남자도 잘 모른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공주, 화옥이, 조여사 같은 내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해 잘 알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해야 영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욱 : 촬영할 때 즉흥 연출이 있었나? 아버지와 식사하는 장면에서 소주병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이수진 : 즉흥적인 걸 좋아하지 않는다. 즉흥 연출 잘 하는 사람은 천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작 과정이 여유롭지 않아서 사전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해야했다. 즉흥이라는 것도 그 준비를 바탕으로 무엇을 보탤 때 만들어지는 거라 생각한다. 소주병 에피소드도 시나리오부터 있었다.

김성욱 :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라고 말했는데, 마지막의 친구들이 공주의 전화를 받았을 지 궁금하다. 어떤 숙제를 받아든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수진 : GV 할 때마다 앞에 나오면 관객분들의 표정이 무겁다. 다음에는 좀 밝은 표정을 짓게하는 영화를 찍고 싶다. 아니면 무표정이라도 좋다(웃음). 서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정리 ㅣ김보년 

사진 ㅣ 곽혜원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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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은 아마 사랑받기를 원할 것이다.”


11월 작가를 만나다 - 정재은 감독의 <말하는 건축 시티:홀>



일 년 반 전에 <말하는 건축가>로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던 정재은 감독이 지난 11월 30일, <말하는 건축 시티:홀>로 “작가를 만나다”에 다시 초대를 받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시청 신청사 건립의 과정을 기록한 이 영화는 서울시청의 ‘쓰나미 디자인’을 무조건 비판하는 게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건물이 나왔는지 차분하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나니 왠지 싫기만 했던 신청사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감독은 과연 어떤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처음 이 영화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처음에는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정재은(영화감독)│<말하는 건축가>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이 영화를 시작했다. 정기용 건축가가 공공건축에 대해 남다른 노력을 했던 분이었기 때문에 나도 공공건축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울시청에 관심이 갔다. 만약 어떤 기업이 멋진 빌딩을 짓는 것이었다면 영화로 안 찍었을 것이다. 일단 공공건축이었고, 또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걸 건축가가 총괄 디자이너가 아니었다면 영화를 못 찍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말하는 건축가>처럼 유걸 건축가에 대한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촬영 영역이 커졌다. 처음 트리트먼트를 만들 때는 시민들이 싫어하는 지금의 쓰나미 디자인이 어떻게 정해졌는지와 완공을 앞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 하지만 시공사나 서울시에서 촬영을 못하게 한 부분들이 있어 쉽지 않았다.


김성욱│왜 <말하는 건축가>가 아니라 <말하는 건축 시티: 홀>이라고 이름을 붙였나.


정재은│건축가보다 건축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건축이란 것이, 게다가 시청을 만든다는 것이 한 사람만 잘한다고 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전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김성욱│이건 사견이지만 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여러 시청 디자인 중에서 다른 건축가의 디자인이 더 좋았다. 그런데 이런 사견이 항상 문제가 된다(웃음). 무책임한 발언들 말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디자인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있었을 법한 논쟁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정재은│건물을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의 의도가 매우 중요하다. ‘서울시청’이다 보니 당연히 서울시장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런데 시장의 임기가 4년이다 보니 많은 시장을 거치면서 건물이 조각조각 만들어져 버렸다. 전 시장이 시청을 만든다고 했을 때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그 의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화에도 나오듯 사람들은 “나는 다른 안이 좋지만 시민들이 원하는 게 이것 같아서 지금처럼 결정했다”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2년 넘게 디자인을 계속 바꾸면서 그 사회를 살아가던 시민들의 의식과 여론,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뭔가 대단한 걸 원했지만 그 대단한 걸 만들기에는 사회의 준비가 부족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사실 이 프로젝트는 애환의 프로젝트다. 우리 모두의 한계를 고스란히 갖고 있기에 애틋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사람들이 지금의 시청을 좋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보면 밑에 있던 사람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 만든 건물에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애틋하게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성욱│행정적인 어려움이 영화에서 부각된다. 전문적인 논의들은 알아듣기 어렵지만 이 사람들이 어떤 논란 속에서 서로 책임지기 어려운 조건 속에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유걸 건축가도 마찬가지다.


정재은│맞다.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 사실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건축주’를 다뤄야 하는 영화다. 건축주가 왜 서울시청을 새로 만들기를 원하는지, 또 어떻게 만들기를 원했는지 그 생각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시장은 바뀌었고 그때마다 시청의 설계도 조금씩 바뀌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 한 명의 잘잘못을 따지기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김성욱│풍선 모양 구조물의 디자인에 대해 설명할 때 인부들이 지나가는 순간은 완벽한 코미디의 순간이자 사람들의 갈등이 들어있기도 한 순간이다. 촬영을 끊지 않은 것이 절묘했다.


정재은│정말 완전한 장면이다. 그게 극영화였으면 NG였을 텐데 다큐멘터리를 찍다보니 NG와 OK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컷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낸 이 영화의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김성욱│후반부에 관련자들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 그 장면의 마무리는 혼자 책상에 앉아 괴로워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다.


정재은│시청을 짓는 7년의 과정 안에서 그런 회의들은 엄청 많았을 것이다. 좀 지겹더라도 관객들이 그런 힘든 과정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작은 일로도 이렇게 엄청난 회의를 하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논란이 있었을까 유추해 보는 것이다.


김성욱│시청 광장에서 시위를 하는 분들의 인터뷰도 있다. 신청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런 인터뷰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재은│물론이다. 시민 인터뷰를 정말 많이 시도했다. 우연히 만난 전문가도 있었고 건축을 잘 모르는 분도 있었다. 그런데 전체적인 방향을 감독이 미리 정해두고 거기에 맞는 시민들의 인터뷰만 짧게 보여주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문적인 영역에서는 전문가들의 선택도 어느 정도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부에서 하는 건 일단 다 비판해 버리면서 더 새로운 걸 시도해 보려는 노력까지 비판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돈을 그렇게 써서 저런 걸 만드느냐 하면서 말이다. 나는 시민들이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보고 배워야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지 않은 시민들이 간단하게 한두 마디 하는 건 영화에 넣고 싶지 않았다.


관객 1│<말하는 건축가>를 봤을 때는 뿌듯하고 행복했는데 오늘 이 영화를 보니 너무 착잡하다. 마지막에 건축가, 그리고 함께 일하던 분들이 모이는 장면이 있다. 3천 억짜리 프로젝트고 7년에 걸쳐서 완공이 됐으니 축제가 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분들은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 영화를 그분들도 봤을 텐데 소감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정재은│사실 그분들은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특히 영화에 출연하신 분들은 아마 앞으로도 거의 십 년 동안 지금 시청과 관련된 일들을 해야 할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시청이 여전히 진행 중인 일의 영역이다. 그리고 시민들도 지금의 건물을 너무 안 좋아했고, 우리나라 문화가 열심히 일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축하해 주는 문화도 아니다. 착잡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래도 영화를 보신 분들은 감동을 받으신 것 같다. 특히 내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벌어진 상황들을 그냥 보여준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신 것 같다.


관객 2│영화랑 관계 없는 질문일 수도 있겠는데, 지금 낙원상가 건물도 굉장히 이상한 건물이다. 만약 감독님이 이 건물에 대해 영화를 찍는다면 어떤 관점에서 접근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극장을 많이 다니셨을 텐데 좋은 극장의 조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듣고 싶다.



정재은│낙원상가는 60년대부터 70년대, 80년대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고 김수근 건축가가 건축한 건물이다. 70년대의 한 정치적인 야심가와 건축가가 의기투합해 유토피아적인 꿈을 꾸면서 과감하게 도시 설비를 했던 결과물이 바로 이곳 낙원상가다. 조만간 김수근 건축가에 대한 작업을 할 것 같은데, 그때 이 건물도 당연히 찍을 것이다.

좋은 극장의 문제는 주변에 어떤 관객층을 소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요즘은 특히 먼 길을 걸어서 영화를 보러 찾아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좋은 시네마테크는 영화와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곳에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뻘쭘하게, 관객들과 동떨어진 곳에 새 건물을 짓는다고 좋은 게 아니다. 극장을 자주 이용할 사람들과 가까운 곳에 짓는 것이 중요하다.


관객 3│건물을 사람으로 비유하면 지금 신청사는 아기고 전에 있던 건물은 할아버지인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만약 이 아기가 말을 한다면 어떤 말을 할까?


정재은│독특한 비유다(웃음). 그러니까 저 건물이 아기인데, 사생아다. 불행한 것이다. 엄마 아빠가 자기 역할을 다 해서 낳지 못하고, 돌보지도 못한 그런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 아기의 사정을 알면 연민을 보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지금 관객분들도 영화를 보았으니 보는 눈이 아마 좀 달라질 것이다.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뉴스에서는 시청이 생긴 것도 주위 풍경과 안 어울리니까 모두 싫다고만 한다. 그런데 사실 건축이란 게 꼭 주변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좋은 것도 아니다. 좋은 건축이 뭔가, 어떤 디자인이 내가 생각하는 시청에 가장 가까운가, 시청이라는 게 대체 뭔가, 이런 것들을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시청이 무슨 말을 할까, 그런 것은 사실 잘 모르겠다. 아마 사랑받길 원할 것이다. 결국은.


김성욱│정재은 감독은 영화를 꽤 전략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웃음). 보고 나면 그 다음 작품이 더 궁금해진다. 공공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멈춰 버린다. 이제 공공건축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막 다가서려는 순간, 서울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보여주고 서울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나 버린다. 그러니 그 다음을 보고 싶어진다. 본격적으로 공공건축에 대한 작업을 다시 할 생각이 있나.


정재은│또 다른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할지 극영화를 해볼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올 겨울에 좀 쉬면서 차기작을 준비해 보려 한다. 서울시청을 다뤘으니 공공건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큰 프로젝트는 이미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오프닝과 엔딩에 나오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도시 설계에 관한 것 말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특히 신도시들의 대부분은 굉장히 인위적으로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도시들이다. 누군가가 선을 그은 뒤 여기는 학교, 여기는 집, 이런 식으로 대충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정신에 그 도시 설계가 자연스럽게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인데, 우리는 거기에 많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영화에는 신도시에서의 삶과 도시 설계를 다뤄보고 싶다. 도시의 패턴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 영화를 계획하고 있다.


김성욱│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고, 얼마 전 시청에서도 상영회를 했다. 한 달 가까이 상영을 하면서 느낀 게 있다면 듣고 싶다.


정재은│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새롭게 안 것들을 관객들도 영화를 보며 알아가는 것이 너무 좋다. 극영화에서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다 보니 지식과 정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 내가 접하고 알게 된 새로운 지식과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게 굉장히 큰 기쁨이다. 이렇게 딱딱한 다큐멘터리인데 오늘도 지금 이렇게 주말에 시간을 내서 보러 온 관객들이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회적으로 조금 더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싶다.


정리│백지원 자원활동가  

사진│곽혜원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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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저예산 영화에는 그에 맞는 제작 방식이 있어야 한다”

- <러시안 소설> 신연식 감독과의 대화




지난 10월 12일, “작가를 만나다”의 주인공으로  <페어 러브> 이후 오랜만에 신작을 발표한 신연식 감독을 초대했다. 적은 예산과 적은 수의 스태프, 그리고 신인 배우들을 기용해 만든 <러시안 소설>은 여러 개의 층위를 가진 스토리텔링과 2부로 나눈 구성 등 독특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미 다음 영화인 <배우는 배우다>를 완성했으며 그 다음 영화까지 구상하고 있는 신연식 감독은 차분한 목소리로 <러시안 소설>에 대한 이야기와 연출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까지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중 일부를 옮긴다.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영화가 몽롱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러시안 소설>이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는지 궁금하다.


신연식(영화감독)│처음 시작은 중년 멜로 3부작 중 하나였다. 무명 소설가가 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고, 잠들기 전에 만난 여자와 깨어나 유명해진 후 만나는 여자가 다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연기 레슨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중년 멜로였던 것이 내가 레슨하던 친구들을 섭외하면서 자연스럽게 젊은 친구들이 등장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김보년│러닝타임이 140분으로 긴 편이지만 밀도가 있어서 더 짧게 줄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처음부터 이 정도 상영 시간을 예상한 건가. 그리고 전반부와 후반부의 영화적 느낌도 다르다.


신연식│러닝타임은 100% 예상한 대로 나왔다. 원래는 전반부와 후반부를 따로 나누어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전반부가 없으면 후반부를 설명하기 어려워서 지금처럼 만들었다. 독립영화의 경우 제작과정에서 러닝타임이 길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는 전반부 90분, 후반부 50분이라는 목표 그대로 만들었다. 이번 영화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구조적 특성은 어디서부터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실제의 삶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후반부 전체가 죽기 전에 남겨둔 소설일 수도 있다. 그렇기 떄문에 처음부터 전반부와 후반부에 이질감을 주려고 노력했다.


김보년│신인배우들도 많고, 전반부와 후반부의 영화 톤이 달라지는 등 연기 지도에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을 것 같다.


신연식│많은 사람들이 내가 연기를 타이트하게 지도한다고 많이 오해한다. 그런데 나는 현장에서 연기지도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특히 이번에는 경험이 많은 배우들이 아니라 많은 요구를 하기 어려웠다. 좋은 연기를 끌어내려면 촬영 전부터 연기자들의 전력을 파악해야 한다. 배우가 자라온 환경과 쌓아온 경력이 다르기에 연기톤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에게 일을 맞추는 편이다. 일에 사람을 맞추면 결과가 좋을 수 없다. 함께한 배우들을 모두 영화 작업 전부터 잘 알고 있던 편이라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김보년│영화 속에서 ‘러시안 소설’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는 하지만(“길이가 길고, 인물도 많이 등장해요”) 그 말 자체가 어떤 선입견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제목을 정할 때 어떤 느낌을 의도했나.


신연식│제목에 대한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이 제목을 쓴 이유는 내 삶이 누군가에게는 창작의 소재로 쓰일 수도 있고, 어떤 관점으로 내 삶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각자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러시아 소설이냐 프랑스 소설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27년을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사실은 러시아 소설이 아니라 한국 소설이더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객들도 러시안 소설 같은 삶을 각자 다르게 상상할 것이다.


김보년│감독님이 잠깐 출연하던데, 원래 계획한 것이었나.


신연식│그렇다. 나는 내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배우들에게 대사 한 마디만 주더라도 그 친구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며 쓴다. 사람을 움직이려면 돈을 주거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돈을 줄 수 없으니 비전을 줘야 할 텐데, 내가 맡은 역할은 비전을 줄 수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웃음). 그래서 내가 했다.



관객1│인물들의 이름을 배우들의 실제 이름으로 지었다.


신연식│내가 연기 레슨을 해주던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 것이라 배역이 헷갈리지 않도록 그대로 사용했다. 상업영화를 할 때도 조연의 경우는 배우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배우들에게 너 이외의 배우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인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배우들이 대본을 보고 더 집중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효’, ‘재혜’처럼 이름 자체가 특이하고 예쁘기도 했다.


김보년│<좋은 배우> 때도 그렇고 이 영화의 숲도 그렇고, 공간 헌팅이 인상적이다.


신연식│영화에 등장하는 담양은 영화에 투자를 해준 친구의 고향이다. 여행을 갔을 때 미리 헌팅을 해둔 곳이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체크해 본다. 시나리오를 쓰고 난 다음 배우와 공간을 찾으면 예산에 맞출 수가 없다. 특히 독립영화를 찍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막연한 기대만 갖고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장소도, 캐스팅도 다 정해 놓은 다음 시나리오를 썼다.


관객2│영화 속에서 “21세기에는 비즈니스의 영향이 더 커지고 있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예술과 비즈니스의 관계에 대한 지론이 궁금하다.


신연식│기본적으로 영화는 산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는 특이하게도  50~70억이 들어가는 이벤트 산업이자 벤처 산업이다. 그 이벤트에 비해 규모가 큰 산업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두루 살필 역량을 가진 사람이 제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도 <러시안 소설>로 새로운 제작 방식을 실험해 보았다. 친구들에게 투자를 받았고, 현장 스태프는 나와 촬영감독, 동시녹음기사, 그리고 밤에만 오는 조명감독이 전부였다. 더 큰 예산으로 많은 스탭들과 작업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저예산으로 진행했다.


한국의 영화 제작은 30억짜리 영화에 맞춰져 있다. 3억짜리 영화를 찍어도 30억짜리 영화와 제작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장부에서 ‘0’만 하나 빼는 것이다. 하지만 저예산에는 저예산에 맞는 제작 방식이 있다. 그렇게 할 때에만 더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제작비 5억, 10억을 쉽게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 돈도 굉장히 큰 돈이다. 내 개인적인 기준으로 총 제작비 2억 5천이면 이미 산업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2억 5천을 넘지 않는 제작비로, 그에 맞는 적절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관객3│영화의 처음과 끝에 ‘어제 놓친 고기를 잡기 위해 오늘 잡은 고기를 놓아주는 낚시꾼’ 이야기가 나온다.


신연식│이 영화를 만들기 전 전작의 흥행 실패로 억대의 빚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20년간 해온 영화를 그만둘까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내가 잡다 놓친 물고기를 잡으려고 지금 잡을 수 있는 물고기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대사가 나오더라.


관객4│저예산으로 영화 작업을 하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쓰면 현장이나 후반 작업에 대한 부담이 있을 텐데.


신연식│전혀 없었다. 시나리오를 완성 안 시키고 촬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특히 더 좋은 엔딩을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경우도 있다. 나는 창조적인 ‘능력’이 사람에게 기본적으로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창조적인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려 한다. 현장에서 나를 통해 일어나는 일은 나의 상상력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일어나는 변수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시나리오를 쓸 때도 전략은 80%만 짜는 것이 맞다고 본다. 100%를 짜면 생각했던 것과 조금만 달라도 전체가 어그러진다. 80%를 짜야 현장에서의 대처와 맞물려 100%가 완성된다. 나에게 시나리오는 설계도라기보다는 지도이다. 보물을 찾기 위해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널지 배를 탈지는 보물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정하는 것이다. 다만 찾으려는 보물을 중간에 바꾸는 것은 안 된다. 감독은 그 하나의 보물을 계속 보는 사람이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결정하는 사람 말이다.


관객6│왜 나레이션을 ‘많이’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영상미가 기억에 남는데 이를 위해 어떤 것을 고려하는지도 궁금하다.


신연식│형식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누군가의 관점으로, 그리고 소설 형식을 빌려서 그린 것이기 때문에 옛날 소설의 삽화 같은 느낌으로 나레이션을 넣어 보았다. 그리고 나레이션을 사용하면 동시녹음기사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도 좀 했다(웃음). 영상미를 위해서는 로케이션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촬영의 기술적인 고려 이전에 이 공간을 어떤 성격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극장에서 영화를 찍는다고 할 때 단순히 좋은 그림, 배우의 동선, 카메라 위치를 먼저 생각하는 것보다 이 극장에 어떤 성격을 부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걸 잘 설정하고 나면 좋은 그림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김보년│그렇다면 우연재(영화 속 소설가들이 함께 모여 사는 집)는 어떻게 설정했나.


신연식│사실 우연재는 한곳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다. 한 공간에서 찍다가 쫓겨나면 다른 곳에 가서 찍었다. 그래서 우연재는 100%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찍지 못했다. 예산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리고 별도의 미술팀만 있었어도 더 좋았을 것이다.



관객7│영화 속에 신효가 창작한 소설이 여러 개 나오는데, 그중 ‘조류인간’은 독립적인 영화로 만들 계획이 있다고 들었다.


신연식│<조류인간>은 지금 당장 찍을 준비를 다 해놓았다. <러시안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러시안 소설>의 시나리오를 쓸 때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욕을 할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했었는데 <조류인간>은 훨씬 흥미진진하다.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신비로운 느낌으로 다루었다.


김보년│<페어 러브>도 그렇고 감독님의 영화에서 나이 든 사람이 비교적 더 멋있게 그려진다. 감독님께 중년이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


신연식│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렸을 때 당한 것을 나이 먹어서 똑같이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모르고 당했던 것을 나이를 먹으면 알고도 당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도 둘 사이에는 어떤 다름이 있는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이런 느낌이 커진다.


김보년│개인적으로 캐릭터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열등감이 기억에 남는다. 신효도 신효지만 성한어디로 갔을지 궁금하다. 성한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가 과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신연식│신효와 성한은 내가 갖고 있는 양면의 콤플렉스를 다 반영한 것 같다. 감독님들 중에는 스타일이 세련되고 학식이 넘치는 분들도 있고, 예술혼을 완전히 불태우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양쪽 다 아니다. 내 인생이 잘 안 풀리는 것도 내가 애매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 신효가 성한에게 느끼는 콤플렉스, 성한이 신효에게 느끼는 콤플렉스를 나는 다 갖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성한은 크리에이터가 아니다. 신효도 딱히 크리에이터는 아니었는데 이상한 방식으로 둘이 협업을 할 때 크리에이션이 발현된 것이다. 성한은 아마 그 순간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 것 같다. 신효가 잠들어 있던 것처럼 성한도 27년의 세월을 거기서 못 벗어난 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을 성한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리│김지혜 자원활동가 

사진│김윤슬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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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영화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경복> 최시형 감독과의 대화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영화라는 게 있다고 한다. 예외적인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첫 번째 영화의 기회가 감독들에게 있는 법이다. <경복>은 그런 영화다. 젊음의 지나가는 한때라는 소재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가 그러한 삶을 지극히 예외적인 방식으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동굴 속에 있고, 또 동굴을 통과하려 한다. 일종의 몽상가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미래는 어쩌면 예정된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시도하려 했던 ‘전前’의 삶을 살지 않았던 이들은 삶의 달콤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예외적인 데뷔작을 찍은 최시형 감독과 9월의 ‘작가를 만나다’에서 나눈 이야기를 소개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촬영을 진행한 시기와 최종본이 나온 시기가 꽤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중간에 칼라로 된 화면들은 추가로 촬영을 한 것인가?


최시형(영화감독)│촬영은 2009년에 끝났고 중간중간에 편집을 해서 201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했다. 2010년에 군대를 갔다가 처음 편집했던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웃음). 그 뒤 계속 다시 편집했고, 여러 영화제에 상영을 하는 동안 편집본이 매번 달랐다. 2013년에 개봉을 위해 마지막으로 편집했다. 추가 촬영은 없었다.


김성욱│영화의 제목이 ‘경복’인데 고등학교의 이름이기도 하고 ‘큰 복’이란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경복고등학교를 다닌건가?


최시형│경복고등학교 79회 졸업생이다. 영화에 나온 동환이란 친구도 거기서 만났다. 그런데 학교 이름의 의미보다는 매일 경복궁역에서 배우, 스탭들이랑 술 먹고 놀았다는 의미가 더 크다(웃음). 무엇을 하든 함께하는 것은 큰 복이고 좋은 것이란 의미에서 이 제목을 지었다.


김성욱│영화에서 공간적인 배경이 차지하는 부분이 큰데, 뒷부분에서 이해가 잘 안 가는 장면이 있다. 밖에 나가자마자 다시 문을 열고 또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처음 봤을 때는 밖으로 나갔다가 안으로 또 들어오는 것이 이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이라는 생각도 했다. 인물들이 바깥으로 나가기 보다는 또 다른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으로 여자들이 또 들어간다.


최시형│편집본을 본 사람들이 가장 질타했던 장면이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이런 것들을 반복하는데, 다른 시공간에 있는 두 개의 쇼트를 연속된 숏으로 붙이는 게 습관이다. 나는 자연스럽다고 했는데 큰 화면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시공간에 있는 인물들이라도 동일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영화를 통해 만날 수 있다는 사소한 믿음이 있다. <경복>의 두 인물은 이제 스무 살이고 이수라는 동네 형은 한때 스무살이었다. 그리고 두 주인공들은 이제 이 집에서 나가는 것이고 여자들은 이제 이 집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접점을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김성욱│데뷔작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상대적인 데뷔작과 절대적인 데뷔작. 절대적 데뷔작은 두 번 다시 찍을 수 없을 것 같은 영화다. <경복>에도 그런 느낌이 있다. 처음에만 찍을 수 있고 예외적으로만 찍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의 느낌을 담아낸다.  <경복>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여행을 떠나면 그후의 장면들은 하나의 휴가처럼 그려진다. 이후의 삶은 어떨지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빛나는 시간인 것이다. 여행을 떠날 때보다 떠나기 전 짐 꾸릴 때가 가장 재미있듯이 그런 ’전’의 느낌을 이 영화가 담아낸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내부적 공간이 갖고 있는 힘이 독특하게 다가왔다. 보통 밖에 나가면 어떤 불안감 같은 것을 느끼는데,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안에서 갖는 즐거움의 시간을 중단하는 것을 계속 유예한다.


최시형│그동안 몇 편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면서 늘 호기심과 질문들이 있었다. 이 장면에서는 B가 주인공인데 A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카메라가 A를 비추는 것 같은 ‘좋지 않은 정석적인 방법’에 의문이 생겼다. 내 영화를 찍고 싶다고 생각하며 몇 편의 단편 시나리오를 썼는데 영화 찍는 게 쉽지가 않으니 안 찍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경복의 이야기는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어느 날 공짜로 쓸 수 있는 카메라들이 생겼고, 윤성호 감독님이 집을 비우시면서 그 집에서 촬영을 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며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전국 노래자랑>의 이종필 감독, <숨바꼭질>의 허정 감독, <라라에게>의 신이수 감독 등이 모이고 나니 그냥 그 사람들을 찍는 게 더 재미있었다. 우리만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다. 데뷔 못 하고 매일 술 마시고 놀면서 개똥철학 얘기하는 모습이 더 좋게 느껴진 거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렇게 영화를 찍고 난 다음 4년 동안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매일 술 먹고 놀던 낭만이 이제는 끝이라고,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고 직감했던 것 같다.




김성욱│영화를 보면 정지된 사진들을 쓰는 경우가 있다. 특히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들을 때 정지 사진이 뜬다. 정지된 사진을 활용하는 것 자체도 어떤 느낌을 전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훅하고 지나가 버리는 젊은 시절, 출발점의 시간을 다루는 영화에서 정지 사진을 쓰니 어쩌면 그 시간을 붙잡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최시형│그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져온 건 우리가 술 먹고 정성일 평론가 성대모사를 하면서 놀았으니 순전히 재미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스탭 사이에서도 영화는 사진에서 시작하는 게 맞다는 파가 있고, 한 줄의 문장에서 시작하는 게 맞다고 주장하는 파가 있다. 나는 전자다. 그리고 사진을 전공한 이종필 감독이 영화 촬영 전에 사진을 많이 찍는데 나도 그런 방법을 사용한 거다. 무식한 말일 수도 있는데, 나는 어떤 순간을 기록한 사진이 있을 때 그 다음 장면이 무엇일까, 그 장면이 좋았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는 마음이 영화라고 종종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사진을 사용하고 싶었다. 정지 사진을 쓰는 것도 습관 중 하나이다.


김성욱│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가 걸어가는 발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끝 장면도 그런 식이고, 그 장면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계속 걸어가는 느낌 말이다.


최시형│솔직히 말해,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데뷔작 <지루한 삶>의 첫 컷을 따라했다. 이종필 감독과 함께 영화를 봤는데 그 장면이 좋았다. 우리끼리는  나름 의미를 붙였는데 그건 사실 말장난 같고, 솔직히 따라한 것이다(웃음).


관객1│우는 장면이 나온 다음에 친구가 음악을 그만뒀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미래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상상인지 궁금하다.


최시형│연인 사이든 친구 사이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보다 시간이 지났을 때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형근이란 인물에게 집에서 나가는 건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시간이 지났을 때 서로 좋아하던 것들이 변했으면 더 슬퍼할 것 같다. 그래서 넣은 숏이다. 그 다음 장면은 배우가 독일에 갔을 때 문득 보고 싶어서 스카이프를 하면서 연기를 시켰다. 그 메신저 창을 다시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넣은 장면이다.


김성욱│영화 끝부분에서 두 친구가 떠난 뒤에 세 명의 여자가 방에 들어오는데 그후 전개되는 장면에 독특한 느낌이 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에서 여자가 떠난 후에 양조위가 그 공간에 앉아 있는 장면이 생각난다. 하나의 공간 안에 연관성을 지닌 두 명의 사람이 따로 있지만 함께 있는 느낌 말이다.


최시형│여자 인물들이 들어온 후 피아노치는 장면까지는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이다. 지금 이야기를 들으니 또 <중경삼림>을 따라한 것 같기도 하다. 누구나 한집에 여러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사는데 어릴 때부터 그게 유치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엄마 방, 아들 방, 딸 방 이렇게 나뉘어져 있고 아빠는 큰딸 방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없다. 집을 삼팔선마냥 나눠 놓은 다음 밥 먹을 때만 다 모이는 이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 때는 ‘공간에 어떤 인물이 있고 시간이 흐른다’를 기본 개념으로 한 뒤 한 공간에 인물들을 전부 모이게 하고 싶었다. 나는 영화를 공간에서 시작하는 편인 것 같다.


김성욱│터널 장면 같은 경우는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이런 영화에서 터널을 찍는 건 너무 클리셰다. 그런데 그렇다고 터널을 안 찍으면 이런 느낌이 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터널 장면은 많이 등장할 뿐 아니라 묘한 느낌을 내기도 한다.


최시형│이종필 감독과 함께 항상 터널을 자주 걸었다. 터널이란 것은 좌우가 없고, 한쪽 끝으로 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걷는 옆으로는 차들이 무섭게 달린다. 이런 이미지가 영화를 지탱할 수 있는 가장 큰 구조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혼자 걷는 것보다 둘이 걷는 게 좋다’는 의미에서 혼자 걷게 한 다음에 다시 두 명이서 걷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터널 장면이 영화의 큰 주제이기도 하다. 갈등을 했던 것은 터널을 걸은 다음 햇빛을 받으면서 밖으로 나오는 장면이었다. 많은 고민을 했는데 그건 다음 영화에서 하자는 생각으로 덮어버렸다.


김성욱│베르톨루치의 젊은 시절 영화를 들어 말하자면, 세상의 바깥으로 출하는 것은 어렵지만 대신 “이미지로 탈출”하는 것은 가능하다. <경복>에서는 오히려 그 터널을 탈출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다. 영화 속 집도 밀실 같은 동굴로 그려지지만 충분히 탈출할 수 있다고 본다.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찍고 싶나.


최시형│나는 지금 29살인데 첫 영화를 20살에 찍고 십 년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잘못한 것도 많고 실수도 많이 했는데 요즘은 그에 대한 반성과 공부를 하고 싶다. 어릴 때 <동방불패>, <쇼생크 탈출>, <타이타닉>, 왕가위의 영화들을 좋아했는데, 영화는 그래도 꿈이나 판타지가 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음 영화는 무조건 로드무비를 만들 거다. 터널을 나온 두 인물이 무언가를 찾아가는 영화를 잘 만들고 싶다.



정리│백지원 자원활동가 / 사진│김윤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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