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만나다] “소녀가 포기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 <한공주> 이수진 감독

2014. 6. 2. 15:00작가를 만나다

“소녀가 포기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 5월 작가를 만나다.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





5월의 “작가를 만나다” 의 주인공은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이었다. 지난 5월 31일, <한공주>를 상영한 뒤 “무거운 표정”을 한 관객들과 이수진 감독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40분 가량의 대화가 끝나자 영화를 봤을 때보다 생각거리가 더 많아졌다. 공주의 힘든 삶을 지켜본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 이 영화를 어떤 계기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실제 사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수진(영화감독) : 날씨 좋은 토요일에 힘든 영화를 보셨다(웃음). <한공주>를 만들기 전에 영화에 나온 사건들 - 성폭행, 중고등학생들의 자살, 왕따와 같은 문제들이 끊임없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게 계기였다.

김성욱 : 영화를 보면 “전 잘못한게 없는데요”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수진 : 그 대사가 집중력을 만들어준다. 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 먹을 때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굳이 나까지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유사 소재의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지만 포기하지 않으려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녀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따지기보다는 소녀가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

김성욱 : 흥미로웠던 것은 영화에 나오는 사물들, 그리고 작은 소음들이다. 거기에 한공주가 예민하게 반응한다. 선풍기라든지 형광등 깜빡거리는 것 말이다.


이수진 :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의 감독이 있고, 그걸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는 감독이 있다. 이야기를 다 쓴 다음 이걸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줄지 매우 고민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큰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부분에 대한 스케치를 보여주기로 했다. 공주의 집이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다보니 미장센적으로 새롭게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일단 아파트를 1층으로 설정한 뒤 그 앞으로 차가 지나다니게끔 했다. 그래서 형광등 조명 뿐 아니라 지나가는 자동차의 조명 등으로 긴장감을 주려 했다.

김성욱 : 사진 찍는 것에 공주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친구 집에 가도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계속 본다. 그리고 아줌마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기록에 대한 모티프 도 있고, 그걸 공개하는 것에 대한 모티프도 일관적으로 등장한다.

이수지 : 그러고보니 사진이 많이 나온 것 같다(웃음). 내가 사진을 전공해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김성욱 : 공주가 허밍하듯 부르는 노래가 있다.

이수진 : 크게 두 곡 정도를 사용했는데 하나는 음악감독이 직접 만든 곡이다. “스마일 어게인”이라는 곡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태리 민요다. “Ciao, bella ciao”라는 노래를 예전부터 굉장히 좋아했다. 나중에 꼭 써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넣어보았다.

공주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혼자서만 음악을 하는 친구다. 그런데 아이들의 아카펠라를 듣고 자신이 하던 음악과 달라서 신선하게 느꼈을 것이다.




관객 1 : ‘선생님 어머니’와 그녀의 애인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수진 : 사회적으로는 불륜이지만 그 두 사람이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공주가 겪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성행위라고 생각했다. 공주가 그걸 ‘듣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섹스의 ‘건강한’ 측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공주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묻는 분들도 있었는데,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 다음 장면은 과거 회상 장면이었을 것이다.


관객 2 : 나는 한공주를 도와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야기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어떻게 한 명도 도와주지 않을까 싶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공주가 인터넷에 자기 사진을 올리는 걸 두려워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영화로 인해 실제 피해자의 사건이 다시 한 번 알려졌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수진 : 두 번째 질문부터 답을 드리자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극영화이다.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픽션이다. 현실의 인물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GV를 할 때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를 처음 생각한 계기가 된 사건은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영화로 그 사건을 재조명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이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봤고 얼마나 생각했느냐에 따라 현실, 비현실이 다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현실을 미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관객 3 : 영화를 세 번 봤는데 처음에는 현재와 과거의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이제는 공주가 입은 옷 색깔로 현실과 과거를 구분한다. 그런데 현재의 공주는 보라색 후드티를 입는다. 나에게 보라색은 멍들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물병원에서 공주가 ‘새아버지’의 입술을 깨문 의미가 궁금하다.

이수진 : 보라색이 멍들었다는 뜻이라는 건, 다음에 같은 질문을 받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했다고 말해야겠다(웃음). 그런 해석도 정말 좋은 것 같다. 일단 현실과 과거를 나누기 위해 후드티 색깔을 구분했다. 그리고 보라색을 선택한 건 보라색이 배우와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웃음).

입술을 깨문 이유에 대해서는 - 공주는 수동적인 아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안 하는데 엄마에게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이야기 듣기를 거부했다. 그런 맥락에서 그 장면은 공주가 유일하게 리액션을 하는 장면이다. 왜 하필 입술을 깨물었냐 하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 생각을 했다. 과거에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런 방식으로 엄마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김성욱 : 그 전에 친구가 뱀파이어에 대한 얘기도 한다. 내러티브적으로 직접적인 연결은 없지만 뱀파이어, 입술, 피 이런 것들이 묘하게 연결이 된다. 형식적 구성에 대해 묻고 싶은데, 현재에 과거가 끼어드는 시간적 구성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플래시백이라고 하지만 명확하게 과거와 현재가 나뉘는 형식은 아니다. 이럴 때 미스테리 구조가 생긴다는 위험도 있다. 처음에 이 구조를 어떻게 떠올렸는지 궁금하다.

이수진 : 의외로 그 구조가 제일 빨리 정해졌다. 내가 그런 시간 구조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단순히 가해자는 나쁘고 피해자는 불쌍하다는 식으로 얘기한 뒤 끝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 의도를 살릴까 고민하다 지금의 구조를 떠올렸다.

그리고 과거를 보여줄 때 사건 위주로 갈지 감정 위주로 갈지도 고민했다. 사건을 중심에 놓으면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소재를 이용한다는 느낌을 줄 것 같았다. 그래서 감정 중심으로 갔다. 인물의 감정에 따라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게 했다.

관객 4 : 이 영화는 성장드라마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끝에는 결국 한공주가 성장을 못 하고 비극을 맞는다.

이수진 : 성장의 개념이 저마다 다를 것 같다. 과거에 <한공주>가 아닌 다른 ‘성장드라마’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는데 누가 이건 성장영화가 아니라고 하더라. 눈에 확 드러나는 변화가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성장은 젓가락질 못하는 아이가 계속 포크를 쓰면서 속으로 열등감을 지우는 그런 것이다. <한공주>에 눈에 보이는 희망이나 성장은 없다. 하지만 나에게 성장은 공주가 하루 또 버티는 것이다. 그런 의지를 갖는 게 내가 생각하는 성장이다. 또 엔딩 장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는 판타지로 느껴질 텐데, 나는 공주가 헤엄을 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관객 5 : 공주는 물을 싫어할 것 같은데 수영을 굳이 선택하는게 감정 이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공주 뿐 아니라 동윤이(한공주의 친구이자 가해자 중 한 명)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이수진 : 말씀하신 게 맞는데, 나는 이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왜 하필 물이냐, 왜 하필 수영이냐 라고 하시면 명확히 답을 못 드릴 것 같다.

동윤이도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감싸려는 것은 아닌데, 아이들이 가면을 쓰게 했다. 십대는 가치관이나 윤리관이 갖춰지지 않은 시기라서 반은 동물, 반은 인간으로 그리려 했다.

관객 6 : 공주는 왜 계속 살아가고자 했을까

이수진 :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주와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일을 겪은 뒤에도 힘들다고 생각한다. 별 생각 없이 “죽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관객 7 : 이 영화의 실제 인물이 누구인지 찾아보는 걸 꺼린다고 하셨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 영화가 단순한 픽션이 아니라는 사실에 설득력을 얻기도 할 것이다. 감독님은 영화 속 세상과 실제 세상의 간극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수진 : 처음 받는 질문이다(웃음). 좀 부끄러워서 이야기를 안 하는데, 사회도 물론 바뀌어야 하지만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분들도 내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변화한 만큼 함께 고민하며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요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한다.

김성욱 : 소녀들의 관계가 각별하게 나온다. 이런 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정도를 제외하고는 많이 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관계를 묘사했는지 궁금하다.

이수진 : 이를테면 립밤 장면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긴 했는데 배우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더 풍부한 디테일을 얻은 경우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남자애가 여고생을 바라볼 때 갖고 있는 이미지들을 참조했다. 화장실에 같이 가는 그런 거 있지 않나(웃음). 또 배우자에게도 많이 물어보았다. 왜 화장실에 같이 가냐라고 물었더니 ‘친한 친구니까 같이 가지’라고 말하더라. 그런 부분을 다 반영했다. 누군가는 ‘여자를 잘 아시네요’ 라고 말하던데, 또 어떤 곳에서는 여자를 잘 모른다고 말하더라. 굉장히 혼란스럽다(웃음).

솔직히 나는 여자를 잘 모른다. 그리고 남자도 잘 모른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알아갈 뿐이다. 그리고 공주, 화옥이, 조여사 같은 내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해 잘 알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해야 영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욱 : 촬영할 때 즉흥 연출이 있었나? 아버지와 식사하는 장면에서 소주병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이수진 : 즉흥적인 걸 좋아하지 않는다. 즉흥 연출 잘 하는 사람은 천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작 과정이 여유롭지 않아서 사전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해야했다. 즉흥이라는 것도 그 준비를 바탕으로 무엇을 보탤 때 만들어지는 거라 생각한다. 소주병 에피소드도 시나리오부터 있었다.

김성욱 :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라고 말했는데, 마지막의 친구들이 공주의 전화를 받았을 지 궁금하다. 어떤 숙제를 받아든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수진 : GV 할 때마다 앞에 나오면 관객분들의 표정이 무겁다. 다음에는 좀 밝은 표정을 짓게하는 영화를 찍고 싶다. 아니면 무표정이라도 좋다(웃음). 서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정리 ㅣ김보년 

사진 ㅣ 곽혜원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