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소재의 무거움에 함몰되지 않고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형식의 실험과 사례의 활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9월 1일부터 8일까지 열리는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 전은 언급한 특징을 보여주는 최근 한국 다큐멘터리의 주목할 만한 8편의 작품을 모은 특별전이다. 상영되는 8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국 다큐멘터리의 최근 경향이라 할 만한 움직임을 추적해본다.

서울아트시네마의 9월 프로그램 중 하나로 ‘다큐멘터리 진실의 정치학’을 마련한 건 극영화 일색의 극장가에 그 비중과 비율을 높여가고 있을 만큼 한국 다큐멘터리가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만 하더라도 <쿠바의 연인> <오월愛> <종로의 기적> 같은 작품이 예술영화전용관에서 높은 좌석점유율을 기록했고 <트루맛쇼>의 경우, 관객의 입소문을 타고 멀티플렉스로 상영관을 늘려가며 1만 명을 훌쩍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언급한 작품의 선전에 힘입은 걸까. 이후 개봉 대기 중인 한국 다큐멘터리는 <꿈의 공장> <용산> <청계천 메들리> <하얀 정글> 등 10여 편에 달한다.

‘재미’를 사수하라
최근 들어 두드러지고 있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부상은 관객의 인식 변화에 기댄 바가 크다. 일례로,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2009)가 유례없는 300만 관객을 동원하고 <아마존의 눈물>과 같은 TV프로그램이 기대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다큐멘터리는 지루하고 계몽적이라는 저간의 편견을 불식시키고 볼만하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실제로 올해 화제를 모았던 다큐멘터리를 보면 진실추구라는 다큐멘터리의 본령 외에 ‘재미’를 동일선상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 작품들이 눈에 띈다. 정호현 감독의 <쿠바의 연인>은 쿠바 남자와 한국 여자의 사랑 속에서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양국 간의 문화적 차이를 발랄하게 풀어냈고 이혁상 감독의 <종로의 기적>은 기성세대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동성애자들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밝게 생활하는 모습을 강조했으며 <트루맛쇼>는 TV맛집 프로그램의 조작 실태를 몰래카메라라는 코믹한 형태로 구성해 고발의 경직성을 완충했다.
이들 작품이 흥행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쿠바의 연인>, <종로의 기적> 5천 명, <트루맛쇼> 1만 2천 명의 관객동원) 다큐멘터리를 낯설어 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극장의 문턱을 낮춘 것은 사실이다. 시대가 예전 같지 않아서 창작자의 진정성에 기대 호소하는 방식만을 가지고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시위도 놀이로써 소화하는 세대가 등장했고 아무리 선의를 가진 목적의 행위라도 감성을 건드리지 않으면 지지를 얻기 힘든 시대가 도래했다. 유행에 민감한 메이저 극영화의 경우, 시대의 감성에 발맞춘 결과물로 발 빠르게 관객과 호흡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장시간의 제작 기간을 필요로 하고 (예컨대, 김동원 감독의 <송환>의 경우, 12년의 제작 기간, 500개의 촬영 테이프, 800시간의 촬영 분량이 소요됐다!) 소재와 주제의 성격이 직선적인 탓에 매니악한 작품으로 분류되어 다수의 관객과 만나기에는 애초에 한계가 존재했다.
<워낭소리>가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흥행성적을 떠나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시대의 감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텍스트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산골 노인부부와 함께 사는 늙은 소의 이야기를 다룬 <워낭소리>는 자연과 멀어진 도시인들에게 하나의 스펙터클로 작용하며 예상 밖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빌딩숲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워낭소리>의 자연은 평상시 보기 힘든 볼거리였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초월한 할아버지와 소의 우정은 경쟁과 약육강식의 사회생활 속에서 잊힌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감정의 도르래였다. 그런 관점에서 <쿠바의 연인>이나 <종로의 기적>, <트루맛쇼>는 모두 어떤 시대적 감성을 자극하는데 탁월한 연출을 보여준다. <쿠바의 연인>은 한국의 익숙한 풍경으로 자리 잡은 국제커플 중 한 쌍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되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차이를 좁혀가는 에피소드가 공감대를 형성했다. <종로의 기적>은 게이커뮤니티가 활발한 종로를 상징적인 배경으로 삼지만 특정 공간에 몰아넣지 않고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게이들을 통해 (여전히 편견이 존재하지만) 좀 더 다변화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트루맛쇼>는 맛에 대한 관심이 과열되고 있는 이때 TV맛집 프로그램의 허구를 전시하며 천박한 우리네 맛의 감식안을 폭로했다.

모든 영화가 시대와의 접점 없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지만 진실 추구와 고발, 폭로와 같은 정보제공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다큐멘터리에게 있어 동시대성은 가장 중요한 영화적 좌표다. 이에 더해 무거울 수밖에 없는 메시지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화법의 선택, 즉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용한 방법으로써의 재미 추구는 또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는 <볼링 포 컬럼바인>(2002) <화씨 9/11>(2004) 등을 연출한 마이클 무어가 선구자라 할만하다) 다만 이는 최근 한국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여러 경향 중 하나로 생각해야지 모든 작품에 적용되는 연출은 아니다. 한국사회에 갈수록 만연한 불순(?)세력의 정보 차단 현상과 맞물리면서 한국 다큐멘터리는 다종한 소재와 다기한 형식으로 진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추구하라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진실과 고발이라는 다큐멘터리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한편으로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감행하는 작품이 집중되고 있다. 이런 경향의 기저에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특수성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비리에 대한 감시 역할을 수행하던 TV시사고발 프로그램의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구멍 뚫린 국민의 알권리의 일부분을 다큐멘터리가 메우고 있는 것. 개봉을 앞둔 김성균 감독의 <꿈의 공장>과 송윤희 감독의 <하얀 정글>은 물론이고, 여러 경로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고 있는,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에서 주요하게 소개되는 태준식 감독의 <당신과 나의 전쟁>, 이강현 감독의 <보라>, 문정현 감독의 <용산> 모두 우리의 생존권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문제들을 정면에서 응시한다.
<꿈의 공장>은 세계적인 브랜드로 떠오른 국내 최대 기타회사 콜트/콜텍의 횡포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하얀 정글>은 타인의 생명을 다루는 고귀한 의료 행위가 장삿속으로 변질된 한국 의료계의 검은 실상을, <당신과 나의 전쟁>은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무관심 속에 그들만의 투쟁으로 전락한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1년 동안 촬영한 기록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보라>는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의 근로자는 해당 사업장의 보건 관리 업무를 맡은 보건관리대행기관의 산업의학전문의에게 3개월에 한 번씩 보건관리를 현장에서 받는다)에 근거하여 이뤄지는 현장 보건 관리의 실체를, <용산>은 2009년 1월 거리로 내몰린 용산 철거민을 비롯해 6월 항쟁의 이한열 열사, 광주민주항쟁의 시민까지, 죽음으로 내몰리는 약한 자의 현실을 다룬다.


특히 이들 작품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주류 언론의 은폐 속에 무관심으로 내몰리는 이슈를 향한 진실의 정치학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종류의 다큐멘터리는 작품의 유효성이 극장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극장 밖의 현실로 연장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이를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바꾼다'는 의미로 비장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적인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둘 때 비로소 관객의 접근이 용이해진다. 사실 다큐멘터리의 본질은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현상에 카메라를 밀착함으로써 우리의 본모습을 폭로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더 정확히는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 현상의 이면을 들추는 이들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를 작동하는 시스템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다큐멘터리들이 현재는 미지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만큼 관객의 호응도를 미리 재단할 수 없지만 다루는 소재는 우리 사회에서 첨예한 이슈거리인 까닭에 익숙하게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잠시 언급을 보류했지만 박경근 감독의 <청계천 메들리>는 좀 다른 경우에 해당한다. 해당 소재가 내포한 사회적 파급 효과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영화들에서 더 나아가 형식적인 실험에 더욱 힘을 기울인다. <청계천 메들리>는 서울 청계천에서 쇠를 다루는 영세한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단순한 현실의 기록을 넘어 이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기록화면과 멀티이미지의 향연 속에 한국과 일본, 근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쇠의 사회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진화하고 분화되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영토 확장 배경에는 저 너머의 진실을 찾겠다는 창작자의 용기 있는 태도가 짙게 배어있다. 이 용기의 정체는 진실 탐구에 따르는 위험과 인내심의 감수와 더불어 이를 최대한 정확하게 알리겠다는 창작자의 사명감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다만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구국의 결단에 방점을 찍기보다 작품의 미학성도 놓치지 않겠다는 창작자의 정체성 또한 확연히 드러난다. 진실과 재미의 순간을 목도하라, 이것이 한국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미학의 현주소다.

글/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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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

8월의 ‘작가를 만나다’에서는 ‘2011 시네바캉스 서울’ 시즌에 맞춰 특별행사로 멜로의 제왕 허진호 감독과 함께 했다. 일찌감치 매진사례를 기록, 객석을 꽉 채운 가운데 그의 초기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가 연이어 상영되고 상영 후에는 영화를 만든 허진호 감독과 <봄날은 간다>의 주연배우인 유지태씨가 함께 자리하여 관객과의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허남웅 프로그래머의 진행 하에 사랑과 시간, 기억에 대한 열띤 이야기들이 오가며 후끈 달아올랐던 그 현장을 전한다.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방금 보신 영화 <봄날은 간다>는 올해로 개봉 10주년을 맞았다. 오늘의 행사를 위해 중국에서 어제 오신 허진호 감독과 주연배우인 유지태씨를 모셨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허진호(영화감독): 늦게 와서 마지막 장면만 봤는데, 옛날 생각이 났다. 저에게 중요한 영화인데 이렇게 많은 분이 와주셔서 감사하다.
유지태(배우): 제가 시네마테크를 종종 오는데, 이렇게 많은 관객이 온 걸 처음 봤다. 역시 스타감독님이 오니 그런 것 같다. 제 인생의 영화를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한다는 게 기쁘고 10년 전 영화를 같이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

허남웅:
<봄날은 간다>는 사운드 엔지니어에 대한 아이디어를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를 구상한 걸로 안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생각하셨는지?
허진호: 요즘은 이렇게 영화를 만들지 않는데 예전엔 단편적인 생각들이나 어떤 정서들을 쌓아가면서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 시작은 노래에서 했다. 어머니가 자주 부르시던 18번이다. 그 노래가 가지는 어떤 멜로디와 가사가 저에게 정서적인 느낌으로 왔었던 거 같다. 그래서 그걸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다가 우연히 KBS ‘직업의 세계’에서 사운드 엔지니어 다큐멘터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시작했다.

허남웅: 여기서 나오는 상우는 순수하고 착한 영혼인데 사랑에는 미숙한 인물이다. 그 인물을 봤을 때 어떠한 느낌에서 출연을 결심했는지?
유지태: <봄날은 간다>는 참 좋은 영화가 될 거라 생각해서 출연했다. 그 당시에는 최고의 감독님이셨기 때문에 (웃음) 아 물론 지금도 최고다. 그리고 배우로써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우를 보면 저의 모습이 영화 안에 담겨 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다시 찍는다면 다시 표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허남웅: 감독님은 유지태란 배우의 어디서 상우를 봤는지, 처음부터 염두에 두신 건지?
허진호: 처음부터는 아니다. 그 당시 배우를 먼저 생각하진 않았다. 전에 찍은 영화도 그렇고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어떤 배우랑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원래 영화가 연상연하구조가 아니고 같은 나이의 커플이었는데, 갑자기 연상연하로 가면 어떨까 그런 걸 생각하면서 지태를 생각했다. 제 기억에 처음 만났는데 한 시간에 두 마디 했던 것 같다.

허남웅: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 배우는 감정을 드러내는데 미세한 연기를 하고 대사도 중의적인 느낌이 많은데 연기 하면서 어떠한 식으로 상우를 준비해갔는지 궁금하다.
유지태: 감독님이랑 카페에서 말없던 시간이 세 달이 되니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겠더라. 감독님의 연출스타일이 배우를 지켜보는 방식을 취한다. ‘저 사람은 뭘 가지고 있을까’ ‘저 사람은 컷을 부르지 않으면 무슨 반응을 할까?’ ‘저 사람의 실제성격은 무엇일까?’ 이런 걸 많이 탐구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컷을 안 해서 굉장히 당황하고 불쾌한 의사를 표현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그만큼 예민하고 섬세한 분이다. 그래서 호흡 맞추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그런 방식이 재미있었다.

허남웅: 유지태 배우는 대사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좋은 영화는 인상적인 대사들이 많이 있다. 영화 개봉 후에 광고에도 대사가 많이 쓰였는데 특히 기억나는 대사가 있다면?
유지태: <봄날은 간다>의 작업방식은 기존의 영화제작방식과 차이가 있었다. 기억을 수놓는 듯한 작업이다. 만든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순간, 기억 그리고 공간을 담는다. 마치 다큐멘터리 형태 같다. 그래서 제가 기억하기로는 대사들이 대체적으로 수정되고 바뀌었다. 리허설을 통해 만들어졌다. 근데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이건 대본에 있던 대사다. 나머지는 리허설 하면서 감독님, PD, 스태프, 배우의 머릿속에서 나온 대사들이다.

허남웅: 이 영화가 재미있는 지점은 인물의 감정들을 사운드로 자연의 소리로 표현을 한다. 그런 아이디어는 사운드 엔지니어라는 출발에서 이미 생각을 하신 건지 아니면 헌팅을 다니면서 이렇게 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건지?
허진호: 헌팅 하면서 생각했다. 파도소리를 헤어질 때 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헤어질 때는 쓸쓸한 바닷가가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허남웅: 개인적으로 유지태 배우의 연기관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은수네 집 침대에서 자다가 떨어지는 장면이다. 그때 머리는 정말로 자다가 일어난 사람 같았다. 그럴 싸 한 게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느낌이 보이는데.
유지태: 감독님을 만나면서 리얼리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배우가 얼마나 극에 빠져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머리 눌린 것은 순간 만들었다. 연기는 만드는 것 같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 인생이 괴롭다. 어쨌든 영화 속의 리얼리티 그리고 배우가 얼마만큼 영화에 몰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관객: 영화 중간에 보면 은수랑 상우가 헌팅 하다가 무덤을 보면서 은수가 저기 둘이 같이 묻히자는데 대답을 안 했다. 그 장면은 어떤 계기에서 넣으신 장면인지 미리 염두에 두고 찍은 건지 아니면 즉흥인지 궁금하다.
허진호: 그때 그 장면은 꼭 필요한 장면이라 생각했다. 죽어서도 같이 묻히는 약속.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가사에서도 약속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때 배우들의 작품해석이 달랐다. 은수랑 상우 중 누가 먼저 좋아한 건지에 대한 신경전이 있었다. 그래서 제가 둘이 정말 좋아하는 거다. 누가 먼저 좋아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고 했다. 그 당시에 행복한 순간 이런 걸 생각했는데 그 대답을 왜 안 했는지는 지태씨에게 듣고 싶다.
유지태: 갑자기 당황스럽다. 신경전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런 것 보다 이제 영화를 어디까지 생각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 고민을 했었다. 영화 속 주인공 남녀가 사랑을 하면 진짜 사랑을 해야 하는 건가? 그래서 분위기를 조장하는 영화들도 있다. 씬을 잘 만들기 위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혼란스러웠다. 무덤 씬 같은 경우는 기억을 하는데 차 타고 가다가 차를 세워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장면이다. 즉흥적이긴 하지만 감독님이 생각을 반복했던 그림이 있어서 헌팅 하다가 저 장면이 내가 찍고자 하는 장면이다 해서 찍은 것이다.


허남웅: 마지막으로 소감과 앞으로 계획을 듣고 이 자리를 마치겠다.
유지태: <봄날은 간다>를 여러분들과 같이 보고 이야기해서 너무 좋았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서 소설 중에 『사랑을 묻다』라는 소설이 기억난다. 사람이 싸울 수 없는 것은 자부심이라더라. 세상에는 많은 가치관도 있고 트렌드를 따르는 대중도 있는데 이렇게 영화를 고집하고 이런 작품을 만들어서 저는 자부심을 느낀다.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허진호: <봄날은 간다>가 언제까지 기억될지 생각을 한다. 영화가 슬픈데 그런 기억들이 어떤 평온함을 주는 것 같다. 그런 기억과 평온을 주는 영화로 계속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정리|정태형(관객에디터) 사진|정은정(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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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는 한국 관객에게는 낯선 실뱅 쇼메의 작품이다. 실뱅 쇼메는 2003년 발표한 <벨빌의 자매들>로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를 정도로 애니메이션계의 실력자로 꼽히는 감독이다. 물론 감독에 대한 설명만으로 <일루셔니스트>에 대한 국내 관객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는 다소 역부족이다. 그럼 이건 어떤가, <일루셔니스트>가 <윌로씨의 휴가>(1953) <나의 아저씨>(1958) <플레이타임>(1967)으로 유명한 자크 타티의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면?

원래 자크 타티는 <플레이타임>을 연출하기 전 <일루셔니스트>라는 작품을 기획 중에 있었다. 자크 타티가 직접 연기한 기존의 윌로씨 캐릭터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든 무심하게 본인의 리듬으로 독보적인 행동반경을 확보하는 무한 긍정의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와 달리 <일루셔니스트>에서는 긍정의 이미지를 많이 버려야 했던 까닭에 자크 타티는 이를 영화화하는 대신 자신의 서랍 속에 간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982년 자크 타티는 유명을 달리 했고 <일루셔니스트>의 시나리오는 그 후 딸 소피 타티쉐프의 보관 하에 있다가 실뱅 쇼메의 손에 들어오게 됐다.

실뱅 쇼메는 시나리오를 본 후 자크 타티가 영화화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일루셔니스트>의 주인공은 자크 타티가 창조한 윌로씨가 아니라 자크 타티 본인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자크 타티와 윌로씨는 외견 상 같은 인물에 속하지만 각각의 영화 속에서 보이는 정서상의 차이는 무지하게 크다. 자크 타티를 그대로 끌어들인 <일루셔니스트>의 주인공 타티쉐프의 직업은 록스타와 텔레비전의 유행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마법사다. 그는 공연할 만한 장소가 있으면 스코틀랜드의 오지마을까지 달려가지만 호응은 그리 큰 편이 아니다. 오직 한 소녀 앨리스만이 그의 무대에 반해 타티쉐프를 따라나선다. 하지만 처음 보는 도시의 화려함에 반한 앨리스는 남자친구를 만나 타티쉐프와는 안녕을 고한다.

슬랩스틱 연기를 구사하는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 자크 타티를 모델로 한 주인공, 첨단의 3D가 아닌 고전적 2D 애니메이션이라니, 여러 모에서 현대 영화의 리듬과 역행하는 <일루셔니스트>는 타티의 영화적 유산을 가감 없이 계승한다. 말보다 행동으로, 대사보다 이미지로, 감각적인 묘사보다 정서가 충만한 미장센으로 무장한 자크 타티의 영화에는 날로 고도화되는 사회를 풍자하면서도 한줌의 순수를 긍정하는 낭만이 풍만했다. 그래서 살아생전 자크 타티의 영화에는 ‘순수’에 대한 향수의 정서가 충만했다. <일루셔니스트>가 이들 영화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일루셔니스트>의 실뱅 쇼메는 굳이 그 순수의 정서를 되살리려 하지 않는다. 아니, 자크 타티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싫어 영화화를 뒤로 미룬 것일지도 모른다. 자크 타티는 그 자신의 영화 속에서 순수라는 ‘마법’을 되살려 관객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했지만 그 마법이 오래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 보인다. (타티가 10년을 기획해 만든 <플레이타임>은 관객의 철저한 외면 속에 흥행에 실패, 이후 거액의 빚더미에 올랐다) <일루셔니스트>에서처럼 한 순간 소녀의 순수한 마음을 혹하게 할 수는 있지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첨단화, 디지털의 물결 속에서 마법과 같은 아날로그적 행위는 더 이상 위력을 발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CG로 대변되는 규모의 스펙터클에 익숙한 현대의 관객들에게 <일루셔니스트>는 한동안 잊고 있던 고전적 가치의 마법을 되살리지만 그 뒷맛은 달콤, 씁쓸하기만 하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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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바울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프랭클린 J.샤프너의 <혹성탈출>(1968)은 지구 멸망 후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8월 18일 국내 개봉하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지구가 왜 멸망해 원숭이들의 행성이 되었는지를 밝히는 프리퀄에 해당한다.) 테일러 박사는 날로 삭막해지는 지구를 떠나 우주여행을 하던 중 어느 행성에 불시착한다. 동료와 함께 생명체의 흔적을 발견하던 중 테일러는 원숭이 무리를 만난다. 말도 할 줄 알고 지능도 갖춘 이들은 원시인처럼 사는 인간들을 지배하며 행성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이들은 테일러 일행을 보자마자 잔혹한 방법으로 포획하고 감옥에 가둔 후 목숨을 위협한다.

 

<혹성탈출>이 영화 팬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주목을 끄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한다. 우선 기술적인 측면에서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원숭이 족의 묘사는 아카데미 의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완벽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가는 인간과 원숭이의 주종관계(?)를 역전시켜 놓은 설정을 통해 인간의 호전성과 어리석음을 비판한 뼈있는 태도에 있다. 사실 <혹성탈출>은 원작에서 배경만을 옮겨왔을 뿐이지 내용은 영 딴판에 속한다. 소설은 테일러 일행이 원숭이 행성에서 유명해지고 희극적인 인생을 사는 것과 달리 영화는 철저히 비극적인 형태를 취한다. 서로가 우수한 종이라며 테일러와 설전을 펼치는 원숭이 장로의 말을 빌리자면, 타인의 영역을 독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인간들에 반해 자신들은 문명을 파괴하는 전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과 같은 배경을 공유하는 영화가 이야기를 달리하게 된 데에는 현실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혹성탈출>이 개봉한 1968년은 상반된 이념간의 대립에 따른 냉전의 비극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특히 세계의 경찰관 역할을 자처했던 미국은 세계 평화라는 명분하에 무고한 젊은이들을 참혹한 베트남의 전장으로 밀어 넣으며 의미 없는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런 기성세대에 대항한 젊은이들의 저항과 반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곧바로 영화로 전이 되어 기존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표현 수위의 영화들이 기성세대를 조롱하며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이름으로 새로운 조류를 이끌었다.

 

<혹성탈출>은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기획된 영화이었다. 영화 초반 테일러의 동료 다지가 불시착한 행성의 땅 위에 작은 성조기를 꽂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테일러는 매우 실소한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우주로까지 확장시키는 팍스아메리카니즘의 어리석음이란! 또한 테일러를 대하는 원숭이들 간에 노장파와 소장파가 서로 상이한 반응을 보여 대립하는 이유는 당연히 미국의 기성세대와 젊은이들 간의 반목을 그대로 반영한 설정임은 자명하다. 무엇보다, <혹성탈출>의 중요한 의의는 지구 멸망이라는 극단성에 기대어 어리석은 전쟁의 역사를 반복해온 인간을 비웃은 결말부에 있다.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던 테일러가 “우주의 무한함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란 얼마나 미비한 존재인가" 하고 읊는 대사가 있다. 그런 별 볼일 없는 미물이 전쟁을 일으켜 우주의 한 요소를 파괴하려 든다니 그게 얼마나 웃긴 노릇이냐는 거다. (촬영 역시 인간의 하찮음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 속에 점처럼 자리 잡은 등장인물 숏을 수시로 비춘다.) 샤프너는 <혹성탈출>의 스크립트를 준비하면서 총 3가지의 결말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진다. 원작자 샤프너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주의 질서를 모욕한 전쟁광 인간을 통렬하게 비판한 지금의 결말에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그렇게 문제적 시대는 문제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글/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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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만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현재형의 작가다. 지금 전 세계 영화계에 마이클 만 만큼 범죄 묘사를 통해 현대 도시의 속성을 기막히게 드러내는 감독은 없다. 일찍이 <도둑들>(1981)에서 범죄와 도시의 상관관계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던 마이클 만은 <히트>(1995)에 이르러 그만의 작가적 방식을 확고히 하기에 이른다.

닐(로버트 드 니로)은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프로페셔널 범죄자다. 일이 수틀리면 미련 없이 몸을 피하기 위해 집에는 가구 한 점 들여놓지 않고 심지어 동료들과 달리 가족은 물론 여자 친구도 사귀지 않는다. 닐을 쫓는 LA 경찰국 강력계 반장 빈센트(알 파치노) 역시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빈틈이 없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가족과의 관계는 살얼음판이다. 이미 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가진 그는 현 부인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 못한다. 빈센트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닐! 그를 검거하려는 의지만이 빈센트를 살아있게 만든다. 그런 빈센트를 바라보는 닐의 눈빛에는 혐오감 대신 동료 의식이 짙게 서려 있다.

이 영화 속 LA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그곳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태양열이 작렬하는 대신 네온사인이 발광하는 밤거리가, 야자수가 늘어선 해변가 대신 범죄 모의가 빈번히 이뤄지는 뒷골목이 화면을 장식한다. 그러다 보니 LA의 사랑과 낭만은커녕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물론이고, 날로 조직화되어가는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 이를 쫓는 경찰 역시도 더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 언제나 쫓는 형사와 이어져있기 때문에 쫓기는 범죄자는 고독한 법이 없다. 그렇게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진 도시에서 닐과 빈센트, 그러니까 범죄자와 형사의 꼴도 구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마이클 만은 처음으로 한 화면에서 호흡을 맞추는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의 꿈의 캐스팅이 성사된 후 (<대부2>(1974)에 함께 출연했지만 시대 파트를 달리한 까닭에 현장에서 맞닥뜨린 적은 없다.) 자연스럽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1963)을 떠올렸다. 제목처럼 전반부와 후반부가 완전히 성격을 달리해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것처럼 <히트> 역시도 닐과 빈센트의 만남을 정확히 중간에 두고 둘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전반부와 본격적인 추격전이 벌어지는 후반부로 짝패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히트>를 통해 범죄자와 경찰, 낮과 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특히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히트>로 생생한 거리 총격전의 신기원을 이룩한데 이어 <콜래트럴>(2004)과 <마이애미 바이스>(2006)에서 HD카메라를 도입해 전쟁 뉴스릴과 같은 총격 장면을 선보인 후 <퍼블릭 에너미>(2009)에서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마이클 만의 영화에 대해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 뱅상 말로자는 “마이클 만은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유명한 스타들과 거대 예산으로, 스필버그 영화에 육박하는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어낸다. 작가성과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하면서, 두 대립적인 것의 행복한 결합을 이뤄내고 있다.”라고 평했다. 우선적으로 관객을 고려하면서 사회의 문제, 미장센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는 마이클 만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히트>는 가장 우선적으로 관람해야 할 영화인 것이다.

글/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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