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숨길 수 없는 낙관성

- 애드리안 라인의 <플래시댄스>

 

 

 

 

 

<플래시댄스>는 “제니퍼 빌즈의, 제니퍼 빌즈에 의한, 제니퍼 빌즈를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릴 만한 새로운 얼굴로 발탁된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되어 이후 배우 경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플래시댄스>를 다시 찾아보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80년대와 9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은 돈 심슨과 제리 브룩하이머 콤비의 첫 작품이기도 한 <플래시댄스>는 매우 단순하고 심지어 노골적인 영화다. 영화는 수시로 춤을 추는 제니퍼 빌즈의 육체를 훑으며 그녀의 풍성하고도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클로즈업한다. 제니퍼 빌즈가 맡은 알렉스는 성당 신부에게 “요즘 부쩍 섹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라며 고해를 하는 순진한 아가씨이면서 동시에 식당에서 남자친구인 닉을 육체적으로 유혹하는 대담함을 보이는 캐릭터로 설정된다.

 

제니퍼 빌즈의 매력은 ‘남자들을 위한 노골적인 유혹의 영화’에 반감을 품는 여성관객들마저도 반하게 만들 정도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이후 숱한 영화에서 패러디 및 오마주의 대상이 되었다. 난니 모레티 감독 역시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 그만의 방식으로 제니퍼 빌즈에세 찬사를 바치기도 한다. 또한 <풀 몬티>에서 주인공들이 본격적으로 스트립쇼를 연습하기 전 참고삼아 보는 영화 역시 <플래시댄스>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는 존 트라볼타와 <토요일 밤의 열기>로부터 시작된 디스코 열풍을 이어가면서도 한편으로 뉴욕 브룩클린에서 유행하던 브레이크 댄스를 전세계에 전파한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알렉스가 친구인 지니와 함께 거리에서 만난 ‘스트리트 댄서’는 브레이크 댄스씬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크레이즈 레그스. 그는 알렉스의 오디션 장면에서 일부 브레이크 댄싱의 대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들어진 지 딱 30년 만에 다시 보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80년대 미국을 지배한 주요 슬로건이었던 ‘낙관성’이다. 꿈과 실력과 용기만 있다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 그렇게 한 번도 정식 댄스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알렉스는 정식 발레학교로의 진학과 부유한 남자친구와의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성공의 주역이 된다. 엉덩방아를 두 번이나 찧고 실격한 지니가 부모에게 “엉덩방아 찧는 것도 잘하더라”라며 위로를 받는 장면이나, 알렉스가 오디션 장에서 실수를 하지만 “다시 해도 될까요?”라며 즉시 재도전을 해 결국 합격통지서를 받아드는 엔딩 장면에서 이러한 낙관성은 극대화된다. 6, 70년대 꽃을 피웠던 로큰롤과 아메리칸 뉴 시네마, 그리고 ‘새로운 헐리우드’의 시대가 종말을 맞았던, 그리고 노조의 파업에 ‘대량해고’로 맞섰던 레이건 재임기의 보수적인 미국을 ‘좋았던 시절’로 느끼게 만드는 장면들인 것이다. 불과 30년의 간극에 이 영화가 더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김숙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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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새로운 시각기계가 야기하는 공포

- 스튜어트 고든의 <지옥인간>

 

 

 

 

메리 셸리가 19세기 초에 『프랑켄슈타인』을 쓴 이후로 SF나 공포 장르에서 과학자들은 종종 인간 이상의 능력을 얻기를 원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에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가 붙은 것처럼 이러한 과학자들은 기술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다가 신의 영역에 도전한 죄로 처벌받는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을 각색한 <지옥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튜어트 고든의 <지옥 인간>은 그의 데뷔작 <좀비오>처럼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 과학자들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좀비오>에서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이었다면 <지옥 인간>에서는 ‘제3의 눈’을 가지는 것이다.

 

에드워드 프레토리우스 박사는 기계를 통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생물체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의 조수인 크로포드는 기계의 위험성을 눈치 채고 그를 말리지만, 에드워드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에드워드의 죽음 이후 크로포드는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힌다. 그는 자신이 정상임을 주장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인 캐서린과 함께 에드워드의 사택으로 돌아와 기계를 보여준다. 캐서린은 기계를 작동하고 난 뒤에 이 기계가 가진 알 수 없는 힘에 매혹된다.

 

이 영화에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기괴한 생물체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기계가 불러오는 생물체들뿐만 아니라 기계 자체도 등장인물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에게 괴물들을 물리적으로 처단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계의 플러그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 기계는 일종의 시각 기계이다. 이 기계의 플러그를 올리는 것은 감추어진 무언가를 보려는 시도이다. 등장인물들은 종종 기계 자체에 이끌리는 동시에 기계를 혐오한다.

 

이 영화에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을 연상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 기계가 신체의 변형을 유도하는 시각 기계라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에드워드의 조수인 크로포드의 송과선은 기계로부터 자극되어 머리 밖으로 튀어나와 ‘제3의 눈’이 된다. 이것은 크로포드로 하여금 보는 행위를 새롭게 하는 동시에 크로포드의 정신을 장악한다. 크로포드는 자신의 새로운 시각 때문에 괴물이 된다. 이러한 점이 시각 기계로부터 얻은 ‘새로운 육체(new flesh)’를 이야기하는 <비디오드롬>을 상기시킨다. <지옥 인간>은 <비디오드롬>만큼 비디오 시대의 공포감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새로운 형태의 시각 기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운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흥미로운 공포 영화이다.

 

박민석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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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제계 음악은 그저 좋은 것입니다

- 가수 이자람이 말하는 <페임>

 

올해 ‘친구들 영화제’의 첫 번째 시네토크의 주인공은 판소리꾼이자 뮤지컬 배우, 그리고 가수인 이자람이다. 지난 1월 19일, 시네토크의 첫 문을 연 그녀는 이번에 처음으로 영화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열정적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영화를 잘 모른다며 겸손해 했다. 여러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던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올해 ‘친구들 영화제’의 첫 번째 시네토크의 주인공은 판소리꾼이자 뮤지컬 배우, 그리고 가수인 이자람이다. 지난 1월 19일, 시네토크의 첫 문을 연 그녀는 이번에 처음으로 영화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열정적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영화를 잘 모른다며 겸손해 했다. 여러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던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이번에 처음 친구들영화제에 참여하신 이자람씨에게 먼저 소감을 여쭈도록 하겠다.

이자람(가수):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영화인’이라는 이름에는 소외감을 느끼는 수준으로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시네마테크에서 연락을 주셔서 같이 영화를 볼 수 있고, 그 영화를 고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겁 없이 함께 하기로 했다가 조금 후회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어렸을 때 봤던 영화중에 제 가슴을 뜨겁게 했던 영화가 뭐가 있을까 생각했고 <페임>을 골랐다.

 

허남웅: <페임>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언제 처음 <페임>을 보셨고, 그 뜨거운 감정이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이자람: 정말 어렸을 때 <페임>을 봤다. 어머니께서 삽입곡인 아이린 카라의 ‘페임’을 좋아하셔서 비디오로 빌려다 봤다. 대체 언제인지도 모를 어릴 때의 일이다. 젊은 친구들이 재능은 있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는 것 같다. 참 옛날인데도 굉장히 잘 만들었구나하고 다시 느꼈다.

 

허남웅: <페임>은 재능이 과연 나에게 있는 것일까, 또 이 재능을 앞으로 계속해서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고민들과 불안에 대한 영화다. 음악을 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겪었던 고민이나 갈등이 <페임>을 보면서 새롭게 생각났을 것 같다.

이자람: 물론 그렇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에서 울컥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택시를 몰고 오더니, 스피커를 돌려서 음악을 크게 틀고, ‘우리 아들이야!’라고 막 외치는 장면이 그것이다. 자식이 예술이라는 텃밭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는 다들 그런 마음인 것 같다. 어느 부모나 자기 자식이 유명해지기를, 스타가 되기를, 그래서 적어도 먹고 살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즐거운 것은 잠깐이기 때문에 많이들 걱정을 한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하는 말들이 와 닿았다. 어렸을 때는 뻔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그러나 지금은 제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페임>속 선생님들이 많이 하더라.

 

허남웅: 그 중에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선생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이자람: 다른 분야의 선생님들이 모두 그 분야의 예술이 가장 어렵다고 할 때 공감했다. 그 어떤 것도 어렵지 않은 것이 없다. 회사에 가는 것,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 판소리를 하는 것, 노래를 하는 것, 배우로서 사는 것, 창작하는 것. 그 중에서 겪어본 것들은 몇 개 없지만 가끔은 배우라는 이름도 듣고, 가끔은 밴더라는 이야기도 듣고, 가끔은 뮤지컬 배우라는 말도 듣곤 하는데 각 단어가 주는 책임감은 정말 무거운 것 같다.

 

 

 

 

 

허남웅: <페임>은 오디션에서부터 1,2,3,4학년의 과정들을 일렬로 보여준다. 이자람씨는 자유로운 영혼이시지만 본인 역시도 제도권의 교육에 들어가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 과정이 경험과 흡사한 면이 있을 테고, 차이점이 있을 텐데.

이자람: 그렇다. 일단 예술을 하는 사람이 모인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쳤지만 그런 점심시간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웃음) 그런 것을 의도해서 공연을 만들려고 노력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적은 없다. 실제로 예술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는 모두가 자신의 끼와 재능을 뿜어내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자신보다 더 큰 재능과 끼가 있는 친구를 부러워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이 굉장히 초라하게 느껴진다. 마치 영화 속에서 따로 나가서 밥 먹는 친구들처럼.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끼와 재능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모였다가 이후 ‘어떻게 먹고 살아갈 것인가’, ‘그 끼와 재능을 담보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허남웅: 아마 예술에 종사하는 분들은 계속해서 고민의 차원이 있을 거라고 본다. 영화가 보여줬듯이 처음에는 오디션에 합격될 수 있을 것인가, 합격하고 나서는 내 재능이 만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최종적인 고민은 이 제목과 같다고 본다. 이자람씨는 음악을 하면서 그 고민의 차원들이 어떻게 발전을 해왔는지. 특히나 먹고 사는 문제를 많이 이야기했는데.

이자람: 왜냐면 먹고 사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예술과 먹고 사는 것이 별개라고 생각을 했다. 또 그게 멋있어 보였고.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것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허세이고, 불가능하거나, 망가지거나, 혹은 0.01%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이야기다. 음악이랑 공연예술을 하시는 분들에게 성공의 척도는 인기를 얻는 것이다. 인기를 얻는 것은 얼마나 표가 팔리는가, 얼마나 표가 팔려서 내가 극장이나 해외에 팔려나가는가의 척도다. 요즘은 많은 오디션, 많은 스타 탄생이 나타나고 있다. 순수예술이라고 말해도 좋을 장르에 몸을 담고 있는 나는 아무리 공연이 나고, 매진이 되고, 해외를 가더라도 대중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페임>의 아이들 중에는 할리우드 스타도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판소리의 길을 모색하면 아무리 성공을 해도 그런 삶을 살 수는 없다.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자기가 가고 싶은 정확한 성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언제나 이러한 것들이 숙제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허남웅: 사실 <페임>을 보면서 4학년을 마쳤다고 해도 이 친구들이 모두 성공하리라 낙관하기 힘들다. 다른 질문을 던져주는 결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졸업 후에는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자람씨는 결말을 어떻게 보셨는지.

이자람: ‘이제 쟤들 큰일 났다.’하는 생각을 했다.(웃음) 카메라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친구며, 냉담한 관객들 앞에서 자신을 컨트롤할 공력이 부족한 친구며. 그런 것들이 그들을 단단하게 하거나 혹은 갑자기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건 그들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큰 결말을 만드는 거니까 응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남웅: <페임>을 보면 힘들어하는 학생이 나온다.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계기는 오직 음악이다. 마지막 장면 역시 음악에 의해 그 모든 갈등들이 풀어진다. 이자람씨에게 음악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자람: 저한테 음악은 그냥 좋은 것입니다.(웃음) 되게 좋은 것 중에 하나다. 이를테면 미술은 잘 모르지만 미술을 보는 걸 좋아한다. 사진은 잘 모르지만 사진을 보는 걸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음악도 좋아하고 소비하는 것 중에 하나다. 때로는 만들 수도 있더라. 때로는 내가 무대 위에서 할 수도 있다. 그만큼 누군가가 또 금방 할 수 있는 것이고, 열심히 하는 누군가의 음악은 대단해서 부럽기도 하고, 무릎을 꿇을 때도 있다. 음악은 나에게 여러 가지 삶의 면 중에 하나다.

 

정리: 배동미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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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ongchamp bags uk 2013.05.02 2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통음식에 관한 연구 결과들

 

리뷰

 

삶은 왜 이토록 허무한가?

 

- 졸탄 후스자릭의 <신밧드>

 

 

 

 

졸탄 후스자릭의 <신밧드>는 ‘헝가리의 프루스트’라고 불리는 쥴라 크루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쥴라 크루디가 그러했듯(그리고 그 누구보다 프루스트가 그러했듯), 졸탄 후스자릭은 <신밧드>에서 한 남자가 죽음과 사랑이라는 화두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한 남자가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들을 만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과거의 기억을 되찾아 간다는 면에서 이 영화는 짐 자무쉬의 <브로큰 플라워>나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과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삶은 아름다운 거짓말의 연속이다”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죽음을 앞둔 한 부르주아 남자의 삶의 공허함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두 영화와 방향을 달리 한다.

 

사실 <신밧드>는 죽어가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이미 죽은 남자가 내레이션과 이미지를 통해 기억을 소환해내는 영화다. 영화는 개화하는 꽃, 물에 떨어진 기름의 이동, 썩어가는 낙엽, 여성의 머리카락, 타들어가는 숯, 거미줄, 여성의 사진과 꽃, 떨어지는 빗방울 등의 극단적인 클로즈업 숏으로 시작하고, 이어서 죽은 남자가 마차에 실려 가는 장면과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클로즈업의 촉각적인 이미지들은 그 남자의 기억을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들로 밝혀진다. 이렇듯 영화는 프롤로그에서 그 구성을 명확히 밝힌다. 즉 <신밧드>는 죽어가는 남성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로만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죽은 자의 목소리를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들과 그녀들의 나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집들, 그리고 낙엽이 깔린 길과 설원의 광활한 풍경 등의 이미지로 재구성된 기억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죽음 때문에 우리는 하루도 한가하게 지낼 수 없다”라는 사무엘 베케트의 말처럼, 신밧드는 하루도 한가하게 지내지 않고 사랑했던 여인들을 찾아가 그녀들과의 추억을 떠올려 보지만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삶은 공허하다. 그녀들은 항상 묘지 주위를 배회하는 사람처럼 그에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는 그녀들에게 퇴폐적인 향락만을 갈구할 뿐이다. 이렇듯 물신주의자인 상류층의 한 남성이 느끼는 극도의 허무감은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에 기인한다.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제시하듯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후반이다. 이 시기는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의 등장으로 인해 전 유럽이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을 때이다. 이런 영화가 풍기는 기이하고 불안한 분위기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앞둔 시대의 분위기를 퇴폐적인 몰락의 이미지로 그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실패한 사회주의 국가가 어떻게든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려는 상황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되찾아 과오를 씻으려던 죽은 남자의 행위가 결국 들판을 가로질러 실려 가는 그의 주검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가 어떻게든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발버둥치지지만 결국은 몰락하고 실패했다는 것을 허무주의적 태도를 통해 우화적으로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동구권의 영화에 대해 소개가 많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신밧드>는 보석 같은 작품이다. 한국에서 헝가리 감독에 대한 정보는 벨라 타르, 미클로스 얀초, 이스트반 자보와 같은 감독 정도일 것이다. <사이트 앤 사운드>의 마이클 앳킨슨은, 졸탄 후스자릭의 작품이 굴절된 시간 구조와 분절된 숏을 연결하는 빠른 몽타주로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미클로스 얀초의 우아한 트래킹 숏과는 대비되는 미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동구권의 영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놨다는 점에서, 죽음의 의미와 삶의 공허함 그리고 사랑에 대한 사색을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분위기 속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죽은 것을 통해 세상을 둘러싼 기억들을 소환한다는 점에서 <신밧드>는 눈 여겨 봐야할 작품이다.

 

최혁규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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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정의를 지키는데 이유가 어딨어

- 존 스터지스의 <황야의 7인>

지난해 <황야의 7인>이 톰 크루즈 주연으로 다시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존 스터지스 감독이 만든 <황야의 7인>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무엇보다 율 브리너,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찰스 브론슨 등의 개성적인 배우들이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작품의 성공으로 이후 속편이 세편이나 만들어지기도 했다. 때마침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 분노의 추격자>가 개봉하는 즈음에 과거의 서부극과 새롭게 만날 좋은 기회다.

 

 

서부극에서 총싸움은 장르의 약속이다. 서부극의 주인공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총을 빼들고 상대와 싸워야 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보안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가장을 잃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인디언들의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서, 잃어버린 조카를 찾기 위해서 등등. 이들은 결국 싸워야만 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싸움의 이유다. 제대로 된 싸움의 이유만이 이들의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존 포드의 <역마차>의 키드(존 웨인)는 처음에 등장할 때만 해도 위험한 무법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디언들과 싸우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총을 빼들 때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었다. 즉 왜 싸우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존 스터지스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리메이크해 만든  <황야의 7>은 흥미로운 영화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세 번의 총격전에서 눈여겨 볼 것은 첫 번째와 마지막 싸움인데 여기서 주인공들은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데도 싸운다. 이를테면 마을 사람 모두가 죽은 사람의 장례를 거부하고 있을 때 크리스(율 브리너)는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관이 실린 마차에 용감히 올라탄다. 그리고는 생명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싸움을 한바탕 벌인 뒤 결국 죽은 자를 땅에 묻어준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거기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옳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이 거침없는 행동이 관객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준다.

 

마지막 싸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악당은 의외로 이해심이 넓은 편이라서 힘들게 붙잡은 크리스 일행을 말까지 태워서 마을을 떠나게 해준다. 그러니 주인공들이 이대로 마을을 떠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예전처럼 악당에게 세금을 바치며 살았을 테고, 주인공들은 다시 자유로운 총잡이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말머리를 돌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떤 액션 장면보다 이 결심의 순간이 가장 큰 짜릿함을 준다. 꼭 싸워야 할 이유도 없고(배신은 마을 사람들이 먼저 했다) 수적으로도 불리하지만(“자네들 정말 미쳤군!”), 결국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을 향한 측은지심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총을 함부로 다룬 악당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또는 마을에 숨겨 놓았다고 믿는 보물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관객의 짐작일 뿐이며 우리는 7인의 총잡이들의 속마음을 끝내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 조차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눈빛과 단호한 몸짓은 결국 관객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설득시키고야 만다. 이보다 명쾌하고 매력적으로 싸움의 이유를 납득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글_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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