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이제는 잘 아는 사람, 살면서 마주쳤던 사람들 같다”
- 윤성호 감독이 말하는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지난 2월 3일,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 상영 후 이 영화를 선택한 윤성호 감독과의 시네토크가 열렸다. 케이블TV에서 <우묵배미의 사랑>을 본 뒤 갑작스레 선택작을 바꾸게 되었다고 밝힌 윤성호 감독은 영화에 대한 세세한 감상을 들려주었다. 그 현장을 전한다.

 

 

윤성호(영화감독): <우묵배미의 사랑>을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다. 제가 많이 좋아하는 영화이긴 하지만 여러 번 본 건 아니다. 총 세 번 봤는데 한 번은 96년 대학생 시절 공강시간에 학교 도서관에서, 또 한 번은 케이블 방송에서, 마지막은 오늘 극장에서 본 거다.

김숙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이 영화는 90년에 나온 영화인데, 90년이라는 해는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장이 펼쳐지고 새로운 감독들이 드러나서 신호탄을 강하게 쏘아 올리던 해인 것 같다. 80년대하고는 약간 다르다.
윤성호: 저는 이번에 보면서 조금 감상이 달랐다. 오히려 80년대 영화 같았다. 장선우 감독님은 90년대부터 화제에 오른 감독인데, 이 영화를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좋아하실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만드시는 동안 여러 애로사항이 있었을 텐데 감독의 자의식이나 선택이 얼마나 반영됐을지 궁금해졌다. 이 영화의 원작 「우묵배미의 사랑」은 박영환 작가의 『왕룽일가』라는 6편의 연작소설 중 하나의 중편소설이다. 8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근대와 현대가 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원작 소설이 80년대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먼저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이게 브랜드가 있다 보니까 배일도의 친구 역할로 최주봉 씨가 쿠웨이트 박으로 나오는데, TV에서 히트한 캐릭터를 하나 넣어달라고 부탁받은 느낌이 약간 있다. 그리고 시어머니와의 화해도 이상하게 비중이 많이 할애되어 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과연 장선우 감독의 모든 선택이 반영이 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모든 걸 장악했다기보단 제작자나 투자자의 요구와 적절하게 수렴을 하면서 노력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김숙현: 장선우 감독이 그 이전 세대 감독들의 자장 아래 있으면서 본인의 스타일을 찾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들, <너에게 나를 보낸다>, <경마장 가는 길>은 이 영화와 굉장히 다르다. 오늘 보면서 여자 캐릭터들이 강하다는 생각을 했다. 배일도의 아내로 나오는 새댁 역 유혜리 씨의 에피소드가 그렇게 비중있게 나오지 않아도 될 텐데 12살 때 과거도 나오고, 시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도 길고 섬세하다. 90년대는 민주화 이후 이런저런 창작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 인재들이 영화로 모여들고 대학가에서는 페미니즘도 폭발하는 시기였다. 남녀묘사는 80년대 여성을 그리던 식과는 좀 다른 것 같다. 특히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이 다르다.
윤성호: 그땐 저도 여성학 수업을 많이 듣던 시절이었고, 영화가 웃기고 묘하긴 했는데 불편했다. 배일도가 미싱 공장에 첫 출근하던 날, 사장이 민공례에게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을 던지고 배일도도 덩달아 더한 농담을 던진다. 그런데 민공례는 좋아 죽으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줌마들이 굉장히 걸쭉하게 리액션을 던진다. 이게 너무 낯설었다. 그런데 보다 보니까 오히려 저게 더 현대적인 것 같다. 왜냐면 가난하고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제한받은 여자가 자기 스토리를 만들어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구질구질하더라도 자신을 세팅한다는 게 이제야 오는 것 같다. 작년 한해 한국영화들은 나름 흥해도 되고 특별히 흠 잡을 게 없는 것 같아 부러웠다. 그러고 있다가 케이블에서 <우묵배미의 사랑>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은 이런 영화 한 편을 대중영화로 만들 수 없구나, 하면서 뭔가 각성이 되고 기운을 수여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까 저때도 나름의 영세한 자본이나 마케팅 홍보가 작용을 했고 저때의 감독님들도 외롭게 자기 것을 지켰겠구나, 해서 지금 한탄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김숙현: 영화 보는데 박중훈 씨가 밥 먹는 씬이 인상 깊었다.
윤성호: 밥 먹는 장면에 테이크를 다섯 번만 갔다고 생각해보면 장선우 감독님이 박중훈 씨 괴롭히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웃음). 제가 인상 깊게 본 장면은 배일도와 민공혜가 기차에서 가위바위보 하면서 술 마시는 장면이다. 묘하게 귀여우면서 어설프다. 그런데 그 장면은 사실 원작에서 쉽게 지나간다. 배창호 감독님, 장선우 감독님, 이명세 감독님 이렇게 세 분을 보면, 각각 비슷한 영화인 것 같으면서도 스타일의 차이가 느껴진다. 배창호 감독님의 <꼬방동네 사람들>이 훨씬 위험한 설정이 많은데 절대 망측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명세 감독님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예쁜 문방구를 만드시는 것 같고, 장선우 감독님은 망측한 걸 보여주길 좋아하시는 것 같다. 민공례와 배일도가 비닐하우스에서 밀회하는 장면도, 거기서 굳이 민공례의 팬티를 보여주시고 호떡이 팬티까지 젖어있다고 하면서 웃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사람의 어떤 부분을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관객1: 감독이 영화 속 인물을 냉정하게 비판하는 것 같지만,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장선우 감독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 게 보이는지 궁금하다.
윤성호: 솔직히 말해서 비주류에 대한 따뜻한 감성은 한국영화가 다 갖고 있는 것 같다. 장선우 감독만의 시선은 아닌 것 같고, 시선이나 설정 말고 캐릭터의 터치를 봐야 하는 것 같은데 장선우 감독님은 즐거워하시는 것 같다. ‘저 사람들 저렇게 굴러가는 거지, 재밌지 않냐?’ 하시면서 자기가 그린 인물들을 귀여워하시는 것 같다.

 

관객2: 한국영화가 르네상스를 맞이한 지금 이 시기에도 이 영화 같은 걸 못 만들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들려주셨으면 좋겠다.
윤성호: 못 만든다는 게 아니라 대중 상업영화로는 못 만들 것 같다는 얘기다. 옆에 있을 것 같은 궁상맞은 캐릭터를 다루고 해결되지 않는 서사를 다루는 영화들은 기획 단계에서 폐기될 것 같다. 일단 제목부터가 ‘우묵배미의 사랑’이 안 될 것 같다(웃음). 이건 한국영화 산업이 발전하면서 데이터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잘 모르고 배팅했던 것들은 시행착오 같지만 그게 쌓여서 스펙트럼을 낳았다. 이젠 투자자들이 연출자들의 ‘썰’에 속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산업 문제는 문제고, 괜히 엄살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이 영화도 찍으면서 고민이 많았을 테고, 촬영조건도 훨씬 열악했을 것 같다. 어느 시대건 자본과의 줄다리기는 당연히 있었겠구나, 그럼 나는 어떻게 균형을 잡을지 그런 고민을 한다.

 

관객3: 영화 속 민공례라는 캐릭터는 순수한 것 같다가도 결국엔 엄청난 선택을 한다. 공례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윤성호: 이 영화를 고른 가장 큰 이유가 민공례 캐릭터 때문이다. 이제는 잘 아는 사람, 살면서 마주쳤던 사람들 같다. 그리고 순수하다고만 요약할 수 없는 ‘밀당’의 고수다(웃음). 자기를 발현할 만한 도구가 너무 없어서 아무것도 못 잡을 것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자기 스토리 하나 만들어 보려고, 나도 뭐 하나 잡아보려고, 내 인생에서 선택 하나 있어본 척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정리: 송은경(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문지현(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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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집시들은 음악으로 숨을 쉰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 가수 하림이 말하는 토니 갓리프의 '라쵸 드롬' 

 

지난 2월 2일, 영화 <라쵸 드롬>의 상영이 끝나고 ‘누에보 플라멩코 컴퍼니’의 열정적인 플라멩코 특별 공연이 있었다. 스크린 안에서 울려 퍼지던 집시 음악을 현실로 옮겨온 무대는 관객들로 하여금 넋을 놓게 만들었다. 뒤이어 가수 하림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하림은 관객들을 시종일관 웃게 만들다가, 마지막에는 ‘연어의 노래’를 부르며 감동을 선사했다. 그 현장의 일부를 전한다.

 

  

허남웅(영화칼럼니스트):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 처음 참석하시게 된 소감은.
하림(가수): 원래 처음 친구들 영화제 있을 때부터 ‘친구들’로 있었다. 나로 하여금 영화를 고르게 해주신 건 대단한 영광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직접 필름으로 가져다 보여주셔서 정말 행복했다. 필름으로는 처음 본다.

 

허남웅: <라쵸 드롬>을 선택하신 이유는.
하림: 학교에서 강의할 때 교재로 쓰고 있다. (웃음) 여러분들께 나에 대한 오해를 풀어드리고 싶기도 했다. 왜 앨범을 안내고 저렇게 10년 넘게 돌아다니고 있는지. 이 영화를 보고 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나도 10년 넘도록 여행을 하면서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는 것이니까 내 이야기인 것 같아서 골랐다.

 

허남웅: <라쵸 드롬>은 ‘좋은 길’이라는 의미로 알고 있는데, 이 영화는 집시들이 이동하는 곳의 음악을 흡수하여 들려주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하림 씨도 여행을 많이 다니시고, 그 곳의 음악을 배우고 악기를 익히면서 자신의 음악을 해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에 다녀온 여행지와 그 곳에서 배운 악기 또는 음악이 무엇인지.
하림: 최근에는 아프리카 쪽을 많이 갔다. 거기엔 악기가 워낙 없으니까 음악을 딱히 배우지는 않았다. 최근에 음악 쪽으로 많이 느낀 곳은 아랍문화권이다. 이집트 쪽 음악들에 흥미가 있다. 서양 음악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이집트 쪽의 음계나 리듬이 우리 핏속에 있는 ‘그것’을 건드려준다. 영화 중간에 할머니가 담배를 물고 왔다 갔다 하시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왜냐하면 우리는 노래 중간에 박수를 치는 박자에서 약간 촌스럽다고 말하는 포인트가 있다. (직접 노래하며 설명) 그게 촌스러운 게 아니라, 동양 문화권에서는 강세가 앞에 있어서 그렇다. 본능적으로 앞부분에 치는 거다. 그런 것들을 볼 때, 아랍권이 서양과 동양이 나뉘는 경계선 같은 곳인데, 나는 그 곳의 음악을 들으면서 많이 느꼈다.

 

 

허남웅: 개인적으로 나이 드신 분이 춤을 추고 나서, 아기를 받아 젖을 먹이는 장면을 재미있게 보았다. 음악이 특별한 게 아니라 생활과 밀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림 씨가 인상 깊게 본 장면을 소개해 달라.
하림: 프랑스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처음에 말을 씻기고 재주넘기 하다가 쫓겨나지 않나. 중간에 친구가 벤츠를 몰고 찾아온다. 정착 집시가 있고 유랑 집시가 있다. 부자인 정착 집시가 기타 연주를 하며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철조망에 매여 있는 꽃을 보고 따라간다. 꽃으로 길을 가르쳐주는 장면이 로맨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남웅: 음악이 생활 속의 낭만을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든다.
하림: 집시들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음악을 하면서 위로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잘하기도 했겠지만. 그래서 삶이 음악이 되는 것이고.

 

허남웅: 플라멩코가 집시의 음악으로 분류되는 것인가.
하림: 집시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음악이다. 유럽에 여러 민족들의 본연의 음악이 있다. 그 중에 집시의 영향을 받은 유럽음악들이 곳곳에 있다. 그 중에 하나이다. 스페인에도 여러 종류의 음악들이 있는데, 그 중 안달루시아 지방의 집시들이 음악을 굉장히 잘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음악이기도 하지만 뿌리는 집시족에서 흘러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허남웅: 최근에 아랍 쪽을 여행하셨다고 했는데, 아랍 쪽에도 유목민들이 많지 않나. 유럽 집시들의 음악에 특징이 있는가.
하림: 집시 음악은 북인도 라자스탄, 즉 동양에서 출발했다. 그 쪽의 동양음악들을 보면, 아까 플라멩코도 그렇고, 음절이 딱딱 끊어지는 게 아니라 한 음절에서 여러 음이 나온다. (직접 ‘산토끼송’으로 시범) 이것을 전문용어로 멜리스마라고 한다. 우리나라 국악에도 이러한 전통이 있지만, 서양음악에는 멜리스마가 없다. 그리고 강세가 앞박자에 있다. 또 도레미로 음계가 구분이 안 간다. 피아노로 표현할 수 없는 음계들이 특징이다. (정리하자면) 꺾는 창법, 앞에 있는 악센트, 음계가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아니다. 박자도 세다 보면, 따라갈 수가 없다. 본능적으로 굉장히 어렵다. 이것이 집시음악을 비롯한 동양 음악의 특징이다. 토니 갓리프의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루마니아에서도 서양악기들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복잡한 음악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관객1: 영화 중반에 기도상 같은 것이 나오는데, 무슨 행사인지.
하림: 검은 얼굴의 성모마리아 주간이라고 해서, 프랑스에 있는 카톨릭 명절이다. 종교들이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그 장면에 나오는 사람들은 프랑스에 있는 집시들이었다. 그들이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연주를 하고 지하 동굴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지 않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관객2: 영화를 보면 항상 남자들은 악기를 치고, 여자들은 춤을 춘다. 그것이 집시들의 룰인지. 여자들은 즉흥적으로 춤을 춘 것인지. 또 집시들은 항상 흥에 겨워서 숨을 쉬는 것처럼 음악을 하는지.
하림: 남자들이 춤을 추는 것보단 여자들이 춤을 추는 것이 더 멋있다. (웃음) 물론 남자들도 영화 속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음악으로써 숨을 쉰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허남웅: 마지막 장면에서 벽으로 막힌 창문 앞에서 여성이 플라멩코 노래를 하는데, 음악에 담겨있는 가사 자체가 자신들의 처한 상황을 들어달라고 호소를 하는 것 같다.
하림: 영화의 결말에서는 집시들의 슬픈 혹은 피곤한 점을 부각시키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프랑코부터 히틀러까지 우리는 피해자였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나. 감독이 오랜 시간 동안 집시의 역사 속에 있었던 일들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중간에 아우슈비츠의 상황도 나오는데, 그 때 유대인들을 비롯한 슬라브족들, 거기에 집시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집시들이)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학살을 많이 당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관객3: 집시라는 말이 유럽에서 안 좋게 쓰인다는데. 정확히 그들을 지칭하는 말이 무엇이 있나. 또 집시와 집시 음악에 대한 영화를 추천해주신다면.
하림: 집시라는 말은 ‘이집트 사람’이라는 말이다. 집시들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온 순례자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집시들이 자기 자신을 부르는 말은 ‘롬’(집시 말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보헤미안이라는 말은 동유럽의 지방을 가리킨다. 또 영화 추천은 토니 갓리프가 집시 출신인 자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영화들이 있다. (집시 3부작 등) 동유럽 집시에 대한 영화는,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들도 집시를 많이 다루고 있다. 이 영화들을 보면 집시들의 성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지유진(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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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리뷰

집시의 역사, 음악으로 듣다
- 토니 갓리프의 '라쵸 드롬'

 

길 위의 한 소년이 타악기 리듬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부르고 있다. 소년의 가족은 가축들을 이끌고 사막과 다를 바 없는 황무지를 지나 어딘가에 도착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동안, 주민들은 첫날밤을 맞게 될 신혼부부를 위해 노래로 밤을 지새운다. 날이 밝으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시 이동을 시작하고, 몇몇 소년들이 길을 가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홀려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노래가 멈추면 다시 이동, 노래가 들리면 다시 쉬어감, 다시 이동, 다시 쉬어감의 반복. 여정은 그렇게 계속된다.
‘라쵸 드롬’이란, ‘좋은 길’을 뜻하는 로마니어다. 현재는 그 모태가 거의 사라져 남아있지 않은 로마니어는, 우리가 흔히 집시라 부르는 로마니인들의 고유 언어다. 로마니인들은 천여 년 전 인도의 북서부 지방에서 출발해 전 세계로 흩어져 유목민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유럽으로 가장 많이 흘러들어왔다. 토니 갓리프 감독의 몸속에도 그런 로마니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알제리인 아버지와 로마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로 이주해 연극에 뛰어들었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운명처럼 로마니인에 관한 3부작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라쵸 드롬>은 그중 <레스 프린스>와 <가쵸 딜로> 사이에 놓인 2번째 작품이다. 언뜻 다큐멘터리로 오인하기 쉬우나 실은 섬세한 연출을 거친 이 영화는, 천 년에 걸쳐 로마니인들이 걸어온 길을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따라 걷는다. 각기 다른 시대와 지역에 도착하면 그들의 음악도 그에 맞춰 조금씩 다른 옷을 입는다. 인도 라자스탄-이집트-터키-루마니아-헝가리-슬로바키아-프랑스-스페인 안달루시아에 걸친 그 길은 실크로드 버금갈 만한 집시들의 노랫길이다.
집시에 관한 이 음악적 인류학의 신비로운 흥취는 천년의 세월과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음악으로 이어내는 방식에 있다. 거기에는 음악에 대한 매혹이 있다. 영화는 음악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소년들을 뒤따르고, 그 순간에 힘입어 이야기도 한 시대와 지역의 로마니인들로부터 다른 시대와 지역의 로마니인들에게로 넘어간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를 사는 로마니인들의 때로는 쾌활하고 때로는 구슬픈 멜로디와 춤사위는 어떤 시련에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아우슈비츠가 남긴 흉터와 프랑코 독재 정권의 어두웠던 시절까지 통과한다. 어쩌면 주소 없이 살아온 그들의 유일한 주소는 음악에 새겨져 있는 지도 모른다. 그 주소의 변경을 따라 흘러가는 영화는 플롯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음악을 놓는다. 신과 신 사이,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의 도약은 음악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니 로마니인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 동안 떠돌이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준 힘도 음악에 있고, 이 영화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도 음악에 있는 셈이다. 시공을 뛰어넘는 음악의 힘은 그렇게 영화에까지 전염되어 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스토리텔링도 아니고, 비주얼텔링도 아니고, 사운드텔링으로 집시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까닭이다.

 

이후경 /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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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리뷰

숨길 수 없는 낙관성
애드리안 라인의 '플래시댄스'

 

<플래시댄스>는 “제니퍼 빌즈의, 제니퍼 빌즈에 의한, 제니퍼 빌즈를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릴 만한 새로운 얼굴로 발탁된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되어 이후 배우 경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플래시댄스>를 다시 찾아보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80년대와 9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은 돈 심슨과 제리 브룩하이머 콤비의 첫 작품이기도 한 <플래시댄스>는 매우 단순하고 심지어 노골적인 영화다. 영화는 수시로 춤을 추는 제니퍼 빌즈의 육체를 훑으며 그녀의 풍성하고도 탄탄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클로즈업한다. 제니퍼 빌즈가 맡은 알렉스는 성당 신부에게 “요즘 부쩍 섹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라며 고해를 하는 순진한 아가씨이면서 동시에 식당에서 남자친구인 닉을 육체적으로 유혹하는 대담함을 보이는 캐릭터로 설정된다.
제니퍼 빌즈의 매력은 ‘남자들을 위한 노골적인 유혹의 영화’에 반감을 품는 여성관객들마저도 반하게 만들 정도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이후 숱한 영화에서 패러디 및 오마주의 대상이 되었다. 난니 모레티 감독 역시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 그만의 방식으로 제니퍼 빌즈에세 찬사를 바치기도 한다. 또한 <풀 몬티>에서 주인공들이 본격적으로 스트립쇼를 연습하기 전 참고삼아 보는 영화 역시 <플래시댄스>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는 존 트라볼타와 <토요일 밤의 열기>로부터 시작된 디스코 열풍을 이어가면서도 한편으로 뉴욕 브룩클린에서 유행하던 브레이크 댄스를 전세계에 전파한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알렉스가 친구인 지니와 함께 거리에서 만난 ‘스트리트 댄서’는 브레이크 댄스씬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크레이즈 레그스. 그는 알렉스의 오디션 장면에서 일부 브레이크 댄싱의 대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들어진 지 딱 30년 만에 다시 보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80년대 미국을 지배한 주요 슬로건이었던 ‘낙관성’이다. 꿈과 실력과 용기만 있다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 그렇게 한 번도 정식 댄스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알렉스는 정식 발레학교로의 진학과 부유한 남자친구와의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성공의 주역이 된다. 엉덩방아를 두 번이나 찧고 실격한 지니가 부모에게 “엉덩방아 찧는 것도 잘하더라”라며 위로를 받는 장면이나, 알렉스가 오디션 장에서 실수를 하지만 “다시 해도 될까요?”라며 즉시 재도전을 해 결국 합격통지서를 받아드는 엔딩 장면에서 이러한 낙관성은 극대화된다. 6, 70년대 꽃을 피웠던 로큰롤과 아메리칸 뉴 시네마, 그리고 ‘새로운 헐리우드’의 시대가 종말을 맞았던, 그리고 노조의 파업에 ‘대량해고’로 맞섰던 레이건 재임기의 보수적인 미국을 ‘좋았던 시절’로 느끼게 만드는 장면들인 것이다. 불과 30년의 간극에 이 영화가 더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김숙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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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작은 몸짓과 시선이 전하는 통렬함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가 말하는 시네마테크 선택작 ‘내일을 위한 길’

 

지난 1월 30일, 시네마테크의 선택작인 레오 맥커리의 <내일을 위한 길> 상영 후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이 영화는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작품 중 하나'라는 소회로 시작된 강연은 영화의 감흥을 곱씹을 수 있도록 한 시간이었다. 그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시네마테크의 선택작을 고르며 고민하던 중 문득 생각했던 작품이 레오 맥커리의 <내일을 위한 길>이었다. 노년이 되신 분들이 시대의 흐름에서 느끼는 고립감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 있지 않나.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영화의 목록들도 있지만, 삶의 마지막에 아마도 보고 싶은 영화들도 있다. 예를 들어 파스빈더는 삶의 마지막에 죽어가면서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를 봤다고 한다. 나에게는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후반부가 아주 인상 깊다. 부부가 작별을 고하기 위해 허니문을 떠났던 도시를 다시 방문하는 부분이다. 앞으로 서로를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마지막을 어떻게 정리해 가는지,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뭉클하다. 영화가 아주 정갈하다.

이 영화에 대해 할 말은 많지 않다. 다만 몇 가지 사전적인 정보를 말씀드리고 싶다. 이 영화를 만들었던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경제 불황이 계속되던 때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의 차압이나, 일자리 부족 같은 문제가 많았다. 시기적으로만 보자면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또한 루즈벨트에 의해 사회보장제도가 처음 마련되던 시기였다. 영화의 후반부, "젊은 때 저축하라"는 표어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이 보장제도에 대한 것이다. 사회적인 맥락에서만 보자면, 이 시대에 노년의 부부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은 결혼 생활동안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주다 보니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불행인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레오 맥커리의 개인적인 사정이다. 1936년에 레오 맥커리는 상한 우유를 먹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경험이 맥커리에게 죽음에 대한 불안과 민감성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개인적인 사연 때문인지 맥커리의 영화 인물들은 동시대 비고되는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 속의 인물들보다 어둡고 자기비하적이거나 불안, 혹은 민감함이 더 커 보인다. 비슷한 스크루볼 코미디를 찍어왔음에도 이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1936년에 맥커리가 건강을 회복 한 후에 정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와 관련해 영화 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1937년에 노인을 다루는 영화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레오 맥커리는 로렐과 하디, 막스 브라더스와 함께 코미디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이렇게 슬픈 멜로 드라마를 만든 것이다. 노년의 멜로드라마, 이것은 장르적으로도 특별한 경우다. 이 영화가 맥커리의 가장 웃긴 영화라고 하는 <놀라운 진실>과 같은 해에 나왔다는 것은 놀랍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영화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와 비슷하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레오 맥커리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장면 편집, 카메라 워킹에는 화려한 부분이 전혀 없다. 하지만 한 장면 안에서 인물들을 위치시켜놓고 찍어 나가는 그 순간,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통렬함이 잘 표현되어있다.

 

공간 속에 있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아주 작은 표정, 시선, 몸짓들이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브리지 게임을 하는 중, 헤어진 아내에게 남편의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을 보자. 카메라는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그 아내를 관객들이 정명으로 보게끔 만든다. 이 영화의 많은 장면들은 중심인물들을 정면으로 보도록 만들거나 반대로 거꾸로 등져 보이도록 한다. 마치 중심인물들이 무대의 객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남편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서 아내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브리지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소리가 커져가자 게임을 중단하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이 장면이 지속되는 내내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관객들은 그 장면을 보며 그녀가 이 장면에서 초래하는 결과들, 그녀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이 멜로드라마적인 통렬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영화 속에 많이있다. 양로원에서 온 편지를 보는 장면, 이 장면은 아주 심플하게 구성되어 있다. 양로원에 가겠다고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자 아들의 표정에는 잠깐 미소가 번지다가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온다. 하나의 장면 안에서 감정의 미묘한 상태가 변해가는 미니멀한 부분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위치와 시선, 몇 개 정도의 짧은 컷들이 복합되어 감정을 컨트롤 해 나간다. 특히 관객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구성해 나가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17살 손녀딸 로다와 할머니가 이야기 하는 장면을 보자.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17살 때는 모든 게 아름답게 보였고, 70살이 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짐짓 그런 것인 척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편의적으로 3막으로 보자면, 영화의 초반에 주인공의 집이 저당 잡히는 순간으로부터 모든 파국이 발생한다. 사실 이 출발점은 작은 사건에 불과해 보인다(아마도 얼마 후에 부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라는 대사처럼). 이후의 이야기는 작은 헤어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 수 없는 일로 흘러가는 것이다. 2막에서 부부는 헤어졌다가, 3막에서 다시 만난다. 1막과 2막은 가족의 이야기다. 그런데 3막이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는 이야기가 가족에서 소셜한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짐짓 그런 것인 척 한다'는 태도가 사회적인 영영에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장면을 보자. 노부부는 1막에서부터 '짐짓 그런 것인 척 한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3막에서 노부부에게 차를 판매하려던 사람 역시 차를 태워주며 그런척한다. 결국 부부가 차를 자랑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며 차를 살 형편은 아니다 라고 말 했을 때, 그 또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호텔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가족 관계에서는 잘 기능하기 힘들었던 일이사회적인 규모로 확장되어 진행된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정작 노부부는 대우를 받고 있다. 3막의 부분은,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에 의한 대우랄까, 관계성의 회복에 대한 사회적 비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감정을 분명히 토로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간다. 이 영화의 세계는 잘 구성된 세계인 것 같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이유가 다 있지 않나. 부모도, 자식들도 (부모를 모실 수 없는) 이유가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 내에서 조그만 하나의 변화가 어떻게 이 전체를 교란시켜나가는가를 보여준다. 조화로운 질서의 파괴가 어떻게 작은 것에서 번져나가는지를 보게 된다.

 

정리: 김경민(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주원탁(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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