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치미노, 할리우드의 저주받은 감독

지난 5일 저녁, ‘2011 시네바캉스 서울’의 부대행사로 마련된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현대성’에 대한 영화사 강좌의 첫 번째 시간으로 아메리카 뉴시네마에 종지부를 찍은 전설적 작품,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 상영 후 김영진 평론가의 강좌가 있었다. 너무 빨리 성공과 실패를 맛 본 ‘저주 받은 감독’ 치미노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할리우드가 혁신의 에너지로 넘치던 예외적인 시대에 대해 돌아보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그 일부를 지면으로 옮겨본다.


김영진(명지대학교 교수, 영화평론가): 재밌게 보셨는지? 영화가 좀 우울하다. 하여튼 몇 번을 봐도 지독한 엔딩이다. 모델이 되는 실존 인물이 있는데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고 한다. 왜 꼭 죽여야 했을까? (웃음) 이 영화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상업적 재앙으로 기록된다. 1100만 달러의 예산으로 기획됐다가 총 3500만 달러가 들고 흥행수익은 100만 달러 좀 넘었다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작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가 영화 한 편 때문에 부도가 났다. 아시다시피 치미노의 두 번째 영화인 <디어 헌터>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굉장한 예술적 권력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디어 헌터>의 결혼식 장면이 굉장히 긴데, 그 삽입 과정에서 트러블이 있었다더라. 헌데 치미노가 우겨서 그 장면을 넣었고 결과적으로 그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성공했다. 이러한 전례 때문에 이 영화는 제어가 안 된 거다. 비사에 의하면 편집할 때 치미노가 사설 경호를 붙여서 편집실 앞에 세워놨다고 한다. 그렇게 최종 편집으로 내놓은 것이 5시간 20분이었다. 이 3시간 40분 버전은 타협 끝에 간신히 나왔다. 3500만 달러는 지금으로 치면 3억 5천만 달러나 같다. 따라서 엄청난 광고에, 관객이 들 때까지 무제한 상영이라는 파격적인 계약을 하고 뉴욕에서 프리미어를 했다. 그런데 인터미션 때 치미노가 리셉션을 꾸려놓은 2층에 올라와보니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어디 갔냐’ 물으니 홍보하는 사람 말이 ‘다 집에 갔습니다.’ 그렇게 된 거다.
미국 평론가들도 한 명의 예외조차 없이 경쟁하듯 이 영화를 씹어댔다. 마치 예술적 방종의 사례인 것처럼. 사상이 불순하다 해서 공격받고, 자본주의의 최악의 사례로서 공격받고. 치미노는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다. 게다가 1985년인가에 ‘파이널 컷’이라고 이 영화의 프로듀서가 쓴 책이 있는데 그걸로 두 번 죽었다. 치미노는 광적인 완벽주의자여서 일주일에 한명씩 자르고 계속 시나리오를 고치고 있었더라는 에피소드들이 적혀있다. 농담 반으로 사실 약간 술 먹으면서 찍은 느낌도 있다. 도저히 미국 영화에 나올 수 있는 샷들, 엄청나게 광포한 에너지가 있잖나. ‘파이널 컷’에 그 비슷한 증언도 있다. 치미노는 ‘그 책은 전부 픽션’이라고 하며 그 책의 저자를 아직도 증오한다고 한다. 또 이 영화에 대해 한줌의 후회도 없다고 하고 5시간 20분짜리 원판을 자기 집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어쨌든 이 영화의 실패로 말미암아 치미노의 경력은 곤두박질 쳤다. 그는 미국 영화의 이단아 같은 존재이다. 아메리카 뉴시네마 마지막에 나타났다가 반딧불처럼 짧게 빛나고 사라졌다. 비슷한 시대에 등장한 위즈 키드라고 불렸던 영화 신동들, 코폴라, 스콜세지, 스필버그, 루카스 그룹과도 다르고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고전영화에 대한 자의식으로 장르를 일신하거나 수정했던 아메리칸 뉴시네마와도 다르다. 그는 건축과 연극을 전공했고, 연기도 좀 해보려고 기웃거렸다. 글재주가 이스트우드의 눈에 들어서 영화계에 들어왔고 그렇게 찍은 게 이스트우드와 제프 브리지스 나오는 <대도적>이다. 그런데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장렬한 엔딩을 찍은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 이상하다. <택시 드라이버>가 나온 1976년만 해도 스콜세지와, 폴 슈레이더가 마약하면서 굉장히 폭력적이고 어두운 영화를 찍어서 성공했다. <할리우드 르네상스>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폴 슈레이더가 극장에 가보니 어떤 영화의 줄이 엄청나게 서있었다더라. 어떤 놈인지 좋겠다하고 가서 봤더니 자기가 썼던 <택시 드라이버>였다고 한다. 그렇게 어두운 영화가 흥행할 줄 몰랐던 것이다. 불과 3,4년 차이인데 <천국의 문>은 대중들이 바라지 않는 영화가 돼버렸다. 시대는 레이건 시대로 넘어가고. 그 직전에 몇 개의 사례가 있었다. 스필버그는 <1942>라고 진주만 전투를 크레이지 코미디로 찍었고, 마틴 스콜세지가 찍은 <뉴욕뉴욕>도 있다. 재즈시대에 대한 엘레지를 갖고 있는. 역시 언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루카스가 그 영화를 보고 ‘형 결말만 해피엔딩으로 바꾸면 2000만 달러는 더 벌 수 있어’라고 말해서 한동안 절교했었다고 한다. 코폴라는 <지옥의 묵시록>으로 정말 지옥에 갈 뻔 했다가 깐느에서 상을 타면서 간신히 본전을 했다. 그 뒤 <원 프롬 더 하트>란 영화를 찍고 스튜디오를 무시한 채 자체배급하려다가 빚더미에 앉았다. 개 중 가장 야망이 컸던 영화는 <천국의 문>인 것 같다. 이 영화는 웨스턴에 수정주의적으로 접근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존 포드 같은 경우 미국의 신화가 이룩되는 모습을 묘사하잖나. 치미노의 관심은 그것이 파괴되는 과정이었다. <천국의 문>은 서부의 역사를 먼저 온 지주들과 이민자들 간의 계급투쟁의 역사로 그려내고 있다. 공권력은 무력하다. 미국인들에게는 엄청난 치부를 건드린 것이다.
본인은 ‘차마노’라고 발음한다는데 마이클 치미노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부 쪽 피고, 아마 필생의 꿈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듣다가 언젠가 찍어야지 생각했는데, <디어 헌터>로 인해 기회가 너무 일찍 찾아왔고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삼십대 후반에 찍을 수 있었던 거다. 그래서 그는 여한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3억 5천만 달러의 돈을 핸들링해서 바라던 대로 찍고. 망하면 어떤가. 몇 십 년 지나 여기 한국에서도 보고 있는데. (웃음) 형식적으로도 굉장히 특이하다. 그에게는 미국 영화에 대한 존경이 없는 것 같다. 베르톨루치가 80년대 말에 한 인터뷰를 보면, 자신은 자타공인 시네필이었고 오슨 웰스 같은 감독의 미국 영화를 보고 나름대로 카메라 워킹을 배웠는데, 요즘엔 거꾸로 미국영화 감독들이 자기 카메라 워킹을 의식하는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게 치미노라는 얘기를 한다. 기본적으로 달리나 트랙을 깔아놓지 않으면 안심 못하는 스타일 있잖나. 아니면 줌으로 밀고 들어가거나. 미국 영화엔 잘 없는 부분이다. 또 굉장히 음영이 짙은 조명을 쓴다.
그런데 치미노는 감정이 과잉이긴 과잉인데, 좀 다른 것 같다. 제가 좋아하는 장면이, 아무래도 삼각관계 같은 것 좋아하니까 (웃음) 주인공이 처음에 엘라(이자벨 위페르)를 만나는 장면이다. 굉장히 독특하다. 엘라는 기존 서부극에선 절대 주연이 될 수 없는 여자다. 학교 선생이나 클레멘타인 같은 여자가 주연이 되어야지. 이 여자는 포주다. 그러면서 숙녀의 품위도 가지고 있고, 또 자수성가한 비즈니스맨이기도 하다. 아르빌(크리스 크리스토퍼슨)과 어찌 보면 좀 부적절한 래링 관계인데 둘이 만나서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카메라가 움직이거나 인물이 움직이거나 둘 중 하나다. 파이가 왔다 갔다 하고 그 와중에 벗을 건 다 벗고 침대에 들어갔다가 선물을 사왔다니까 바로 뛰어나가고. 그냥 야생이다 야생. 그 사람들은 문명인이지만 그 살고 있는 곳과 행동하는 리듬 자체가 야생이다. 지금으로 치면 선물로 벤츠 뭐를 사준 건데 그걸 보란 듯이 몰고 가는 것 아닌가. 세레모니 중인 교회 앞을 확 지나가고, 분란이 일어나고. 엄청나게 불경한 묘사인데 그것 자체로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이는 어떤 미국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정적이 흐르면서 엘라가 강에서 나체로 목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여성, 자연, 어머니라는 시각적 메타포는 뭐 클리셰일 수도 있고 존 포드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것이지만. 그러고 나서 엘라가 아르빌과 걷다가 하늘을 딱 보면, 맑은 줄 알았던 하늘이 흐려진다. 이런 식의 묘사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DVD같은 걸로 보면 그런가 보다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중고등학교 때 중앙극장에서 봤는데 그 큰 스크린으로 봤을 때 이런 감정의 스케일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평단과 관객을 화나게 한 건 고전적인 내러티브의 무시였다.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없고 덩어리져있다. 지금은 절판 된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의 할리우드>라는 책에서 로빈 우드는 제일 마지막 장에서 치미노가 그러한 구성을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이라고 한다. 치미노는 건축가다. 캐릭터와 개연성을 촘촘히 설명하지 않고 공간 그 자체에서 벌어진 일을 계속 블록 식으로 쌓으면서 보여주는 형식적 혁신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무례한 영화가 없다. 주인공들이 삼각관계인 것을 한 참 지나서 알게 되지 않는가. 미국 영화 보통의 화술이라고 하면, 그리피스가 <국가의 탄생>을 찍으며 남북 전쟁을 남 출신 북 출신의 연애담으로 보여주니까 사람들이 집중하더라 이거다. 개인의 로맨스가 전면에 서고 역사는 배경이 되는 게 가장 효과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 연애담이 주가 아니다. 영화 첫 부분에 하버드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 미국이 전통 없는 나라인데 굉장히 전통 있는 척 하지 않나. 총장의 연설도 공허하지만 사회적 의무들을 강조하고. 허례허식처럼 보이는데 엄정한 의식이 있다. 이 틀을 깨는 게 아르빌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그 다음 단락으로 건너뛴다. 그 다음부터 벌어지는 일들은 하버드 때와는 너무 다른 얘기다. 거기서 맹세했던 것들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 세계다. 고로 치미노는 로맨스 부분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만큼의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홀하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롤러 스케이트 신고 댄스하는 게 어딨나. 지금 보기엔 굉장히 멋진 스펙터클인데, 현장에서는 악명이 높았다. 당시에는 스텝들이 치미노가 드디어 돌았다고 했다더라. 저게 예정으로 5일인데, 실제로 한 3주 찍었던 것이다. 그러니 제작비가 안 늘어나겠는가. 그리고 엘라는 언제 저렇게 저 커뮤니티에 자연스레 들어와 있나 싶다. 심지어 그 댄스 시퀀스의 대미를 장식한다. 전통적인 이야기이라면 뭔가가 있었을 텐데 치미노의 관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게 이어지는 게 또 왜, 쳐들어온다고 할 때 격론이 벌어지잖나. 제가 볼 땐 댄스 시퀀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카오스의 에너지. 보통 영화였다면 선악의 대립으로 묘사했을텐데 완전히 카오스다. 이런 식의 형식이 통할 수 있다고 했던 게 <디어 헌터>였고, 아 좀 아니구나 했던 게 이 <천국의 문>인데. 아메리칸 뉴시네마가 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게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약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 전통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이 붕괴되었을 때. 엄청난 세대 교체가 일어난 것 아닌가. 코폴라가 서른두살에 대부를 찍었는데, 이건 신의 은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약관 32세의 감독이 세상 다 산 듯한 영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코폴라는 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 뒤로 더 나은 영화를 만들지 못했고. 스필버그는 심지어 20대에 <죠스>를 찍었다. 영화들이 펑펑 터지니까 경영자들도 잠깐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게 <디어 헌터>까지 이어지고, <천국의 문>까지 간 거다. 뭐 웨스턴? 존슨 주의 전쟁? 마지막에 장렬한 전투씬이 있겠네. 투자한다. 뭐 이렇게 된 건데(웃음) 끝내는 실패한 거다. 공교롭게도 바톤을 터치한 사람들이 스필버그와 루카스이고.
어쨌든 치미노는 끝내 재기하지 못했다. 또 하나의 필생의 프로젝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이나 <죄와 벌>을 영화화하는 거였다고 하는데 누가 투자하겠는가 (웃음) 또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진을 이미 너무 빼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어 오브 드래곤>도 흥미롭고 엄청 격렬한 피로가 있다. 미키 루크하고 존 론인가가 사무실에서 말싸움하는 샷 보면 진짜 미국영화 같지 않게 잘 찍었다. 지금이야 홍콩영화가 한 때 무조건 360도 돌리고 해서 그저 그렇지만, 당시에는 진짜 놀라운 스타일이었다. 그 뒤로 잘 안돼서 유감이지만, 네 편까지는 상당히 흥미롭다. <천국의 문>도 시대적 상황과 잘 만났으면 성공했을 지도 모를 영화다. 저는 TV에서 많이 축약된 버전으로 처음 봤는데 굉장히 근사했고 좋아하는 영화다. 오늘 긴 영화 보시느라 여러분이 수고하셨다. (웃음) 이 여름바캉스 동안 계속 즐거운 영화 감상하시라.

정리: 백희원(관객에디터) 사진: 조유성(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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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나 <사운드 오브 뮤직>(1965) 등 로버트 와이즈를 뮤지컬 영화감독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산 파블로>는 꽤 낯선 영화일 것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상 처음으로 1년 반 동안 대만과 홍콩에서 촬영을 감행한 대작이라는 점 외에 사소한 공통점을 찾기도 힘들다. 제작 여건은 다르지만 차라리 그의 SF영화 <지구가 멈춘 날>(1951)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로버트 와이즈는 <지구가 멈춘 날>에서 현란한 시각효과보다는 탄탄한 스토리에 더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의 라스트가 인상적인데, 지구를 찾은 로봇 고트의 장엄한 연설은 인류가 공격성을 버리지 않는 한 지구가 잿더미로 변할 것이며, 절멸에 처할 것임을 경고한다. 이는 단순한 경고성 발언이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과 힘의 행사가 불가피하다는 당시의 시대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시대극이긴 하지만 <산 파블로> 또한 베트남 전쟁에 직면한 1960년대라는 시대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다.
 


1926년의 중국 양자강에 떠 있는 미국의 포함 산 파블로가 영화의 주 무대다. 중국의 국민당이 세력을 확대하던 이 시기는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한 침탈과 폭력으로 역사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던 때이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내전을 벌이면서 외국인 배척을 펼쳐가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의 변화 가운데 엔지니어인 홀맨은 산 파블로호의 승무원이 되기 위해, 외국인 선교사의 일원인 셜리는 교사의 자격으로 중국을 찾는다. 둘은 내전의 소용돌이가 거세지면서 위험에 처하고 낯선 땅에서 사랑을 나눈다.

3시간에 이르는 대작이긴 하지만 <산 파블로>는 거대한 스펙터클 영화라기보다는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로버트 와그너는 대국에 의한 해외파병의 어리석음과 희생을 겪는 함선 승무원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세세하게 그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미국인을 보호하고 구하기 위해 중국에 머물고 있다며 애국주의를 고무하는 선장, 중국인 여인 메일리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 홀맨의 동료인 프랜치, 중국인을 교화시키기 위해 나선 선교사들의 이야기, 함선의 기관실에서 벌어지는 중국인 노동자와 선원들 간의 갈등, 이런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가 서브플롯으로 전개된다. 이런 이야기들은 스쳐지나가는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켜켜이 쌓여가며 비극의 징조와 파멸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홀맨은 끊임없이 거의 모든 이와 싸움을 벌이면서 매번 ‘적인 누구인가’라고 반문한다. 이런 의문은 최종적으로 홀맨이 죽어가며 내뱉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라는 말에 함축된다. 스티브 맥퀸은 홀맨의 복잡한 심경을 그의 생애 가장 훌륭한 연기로 소화했다. 원래 로버트 와이즈는 홀맨의 캐스팅에 폴 뉴먼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폴 뉴먼이 고사하면서 스티브 맥퀸으로 기회가 넘어갔는데, 당시 메이저의 중역들은 대작영화에 인지도가 적었던 스티브 맥퀸을 주역으로 캐스팅하는 것에 반대했다. <대탈주>(1963)의 성공 덕분에 스티브 맥퀸은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 로버트 와이즈 또한 이 영화로 세상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미국 군대가 2차 대전 이후만이 아니라 그 전부터 전 세계에서 오명을 얻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며 “이 영화는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고 있던 바로 그 때에 나왔다. 나는 베트남을 역사적 맥락 안에서 봐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시네토크
2011년 2월 26일 (토) 16:00 <산 파블로> 상영 후 김영진 영화평론가와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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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클래식 영화사 강좌 [2]

지난 1월 6일 한겨울의 클래식 상영작 중 <리피리> 상영 후에 두 번째 영화사 강좌로서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강연이 열렸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상영된 <리피리> 상영 후에 ‘줄스 다신의 백년’이란 제목으로 열린 강좌여서 더욱 뜻깊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뮤지컬학부 교수): 줄스 다신의 <리피피>는 범죄 강탈영화의 원형 같은 작품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스탠리 큐브릭 <킬링>도 연관이 있다. 장 피에르 멜빌도 비슷한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다가 <리피피>가 나와서 좌절했다는 얘기도 있다. 멜빌은 그 시절 아내한테 영화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당신 영화 그만 했으면 좋겠어'라는 타박을 듣고 있었는데 그 때 자크 베케르가 찾아와 영화 잘 봤다고 해서 겨우 다시 기운을 냈다고 한다. 멜빌은 그때 <리피피>를 봤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멜빌은 기획하던 영화를 <리피피>와 비슷하지 않게 하려고 바로 플롯을 바꿨다고 한다. 결과는 <리피피>에 역시 못 미쳤지만. 그렇게 나온 영화가 <암흑가의 세 사람>(1970)이다. 그만큼 <리피피>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영화다. 이 영화는 사실 줄스 다신이 미국에서 쫓겨나서 프랑스에서 힘들게 지낼 때 만든 영화인데 실제 줄스 다신은 만들고 싶어하지도 않았던 영화라고 한다. 촬영도 30일만에 끝났고. 하지만 억지로 찍었는데도 줄스 다신 필모그래피 중에 정점을 찍은 것이 정말 대단하다. <리피피>가 혁신을 이룬 점은 원작에서 간략하게 넘어가는 강탈 신이 실질적인 클라이막스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봐도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다. 상황만 갖고 말이다. 음악 담당자가 음악을 다 만들어놓았는데 영화를 보더니 '아. 어떤 음악보다 긴장감이 넘친다. 장면만으로도 하모니가 좋아서 이 장면에서는 음악을 넣지 않겠다' 이렇게 얘기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강탈 신 이후에도 매우 흥미롭게 진행된다. 엔딩도 흥미롭고, 토니는 죽어가는데 뒤에 앉은 꼬마는 '나무들을 봐요' 이렇게 말한다. 자라나는 새싹인 꼬마의 혈기왕성한 모습과 대비되는, 회한에 가득찬 토니의 모습이란. 토니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행위를 했다. 후배 아들을 살려줌으로써 자기 일생에서 가장 놀라운 일을 해냈다. 나무와 카오스적인 도시의 풍경,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모습들은 강탈 시퀀스와 대비되면서 정말 인상적인 엔딩을 보여주었다.

오프닝 역시 흥미롭다. 역시 한 사람의 인간성을 알려면 고스톱을 쳐봐야 한다. (웃음) 돈 잃을 때 토니의 그 수식 없는 표정은 참 인상적이다. 이와 대비되는 클로즈업 장면이 보석들을 훔칠 때 나온다. 재물을 보는 사내들의 얼굴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다. 또 죄를 저지른 후에 대가를 치르는 과정을 가차없이 보여주는데 줄스 다신이 연기한 이탈리아 기생 오래비 세자르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세자르가 넷 중에 제일 쾌락주의자였는데 죽는 장면의 미장센이 묘하다. 나이트클럽에 쓰이는 소도구들이 창고에 여기저기 놓여있고 그 가운데 처절하게 묶여있는데, 그 대비가 주는 느낌이 참 좋다. 다신은 1939년까지 배우하다가 감독으로 전향한 사람인데 감독 본인이 주연하면서 멋있게 나오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에 비해 다신은 아주 의미심장한 역을 맡았다.

<리피피>는 줄스 다신 개인적으로도 전기가 된 영화이다. 다신은 이 영화로 깐느에서 감독상을 받는데, 거기서 운명적으로 두 번째 부인 멜리나 메르꾸리를 만난다. 메르꾸리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뻔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여우주연상 없음' 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메르꾸리가 그리스 민주화에 힘쓰던 안티 파시스트이어서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깐느에서 <리피피>를 보고 다신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다신이 그리스를 왔다 갔다 하면서 둘은 사귀게 된다. 메르꾸리에 따르면 줄스 다신은 자연인으로서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메르꾸리가 '난 새벽에 자서 오후에 일어난다.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나요?'라고 하자 당연하다고 말하고 '걷는 것 좋아하시나요?'라는 질문에도 물론 그렇다고 했다고 한다. 멜라니 메르꾸리는 사실 500미터만 걸어도 숨차해야하는 (웃음) 그런 부잣집 딸이었는데, 그에 반해 다신은 맨날 걸어다녔다고 환다. 그것도 춤추면서. 다신은 사석에서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었고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완전히 터득한 쇼맨십 넘치는 남자였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자면 멜리나 메르꾸리와 결혼하고 나서 다신의 영화가 바뀐다.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바꾼다든지. 하지만 실상은 메르꾸리를 만나기 전의 영화로 줄스 다신의 영화사적 공헌이 인정되곤 한다. 그는 <리피피>와 그 전의 영화로 미국 네오리얼리즘의 아버지로 불린다. 다신 때부터 진짜 거리에서 찍는 스트릿 필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DVD로 나와있는 <브루트 포스>(1947), <벌거벗은 도시>(1948), <밤 그리고 도시>(1950) 같은 영화는 명불허전이다. <도둑들의 하이웨이>(1949)도 정말 좋다. 이 영화는 사과 농장에서 직접 시카고 선물 시장으로 사과를 옮기는 사람들의 얘기이다. 신선하게 최대한 빨리 갖다줘야 해서 트럭 기사들은 잠도 안 잔다. 그들은 폭력배에 가까운 시장 주인들과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주인공은 진짜 고물 트럭의 운전수인데 그의 뒤를 사기꾼 둘이 쫓는다. 고장나길 기다리면서. 그러다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트럭이 불타고 사과도 사라진다. 잔해를 보면서 사기꾼이 오는데 트럭 기사의 죽음을 보면서 잠바 자크를 올려닫는다. DVD 인터뷰에서 본 얘기인데 아무도 그 장면을 얘기하지 않지만 줄스 다신 본인은 제일 좋아하고 서늘하다고 느끼는 장면이라고 전한 바 있다. 그런 묘사가 이 감독의 특기이다. 미국 영화에 이런 것을 도입한 것이다. 네오리얼리즘도 그렇지만 피지컬한 것으로 감정을 묘사했다. 데 시카도 <자전거 도둑>에서 캐리 그랜트가 아니라 일반인을 쓴 건 그 사람 연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걸음걸이 때문이라고 한다. 남용하면 안 되겠지만 <자전거 도둑> 주인공의 걸음걸이, 손짓, 발짓, 눈빛 같은 것은 캐리 그랜트가 아무리 잘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피지컬한 것을 통해서 존재를 투과시키는 것, 이걸 줄스 다신이 미국 영화에서 최초로 했다.

<도둑들의 하이웨이>는 제작 조건이 안 좋아서 도둑 촬영하듯이 했다는데 로케이션이 생생하다. <리피피>도 로케이션의 승리다. 강탈하는 날, 새벽은 초조하게 시작된다. 청소하는 차. 사람들 오가고. 도로 젖어있고. 그 공간은 일상적이면서도 위협적인 느낌을 준다. 세트에서는 절대 찍어내기 힘든 느낌이다. 어떻게 그렇게 잘해냈는지 궁금하다. 이론 상으론 멋있는데 잘 안 되니까. 신림동 고시촌에서 억지로 찍어도 그 느낌이 잘 안 나온다. 로케이션은 미스테리다. 그래서 누벨바그 세대가 보고 경악한 것 아닌가. 트뤼포는 <리피피>가 '내가 본 최고의 필름 느와르'라고 했다. 그것도 파리에서. 미국 감독이 어떻게 파리에서 이렇게 잘 찍었나. 누벨바그도 혁신적인 것이 거리에서 찍어서였는데 직간접적으로 용기 준 것이 <리피피>였다. 좌절 받은 이들이 절치부심해서 누벨바그를 탄생시켰다. <리피피>는 <암흑가의 세 사람>보다 경제적이면서도 무드도 일어난다. 사건도 사건 대로 전개시키면서 말이다. 줄스 다신이 쫓겨난 건 미국 영화의 큰 손실이라고 생각된다. 줄스 다신이 미국을 떠나게 된 건 매카시즘 광풍 때였다. 에드워드 드미트릭이 다신을 공산주의자로 고발했다. 그 후 다신은 <밤 그리고 도시>라는 영화를 급히 만들어낸다. 폭스 사에서 급히 불러서 '이게 거의 마지막 영화 될지 모른다, 찍다가 잘릴지도 모르니까 비싼 장면부터 찍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신은 원작소설도 읽지 못하고 런던으로 가서 찍기 시작했다. 영국 언론에서는 되게 안 좋아했는데 사람들은 무척 놀랐다. 런던을 이렇게 보여주다니! 배우도 좋지만 공간이 주는 느낌이 압도적이다. 그래서 '나를 왜 크레딧에 올렸냐'면서 원작자가 화를 냈다고 한다. 이걸 듣고 다신도 인정했다고 한다.

<리피피>의 주인공 토니는 정말 인상적인 인물이다. 인생을 잘못 살았다. 막장으로 살았고 그렇다고 또 돈을 크게 번 것도 아니고. 기껏 감옥 생활했는데 나와보니 포커판에서 쫓겨나고, 애인한테도 배신당했다. 하지만 전문가의 소질을 살려서 조그마했던 판을 키운다. '진열장 말고 금고 털이를 해야지'하고. 현대 영화에서는 이런 악인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드물었다. 다신 영화에서는 주조연 가릴 것 없이 연기가 뛰어나고 풍모가 인상적이다. 그 중에 토니가 제일 인상적이다. 표정 자체가 일상적인 표정이 아니지 않나. 불만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이면서도 포스가 있고, 강한 가운데 약함이 있고. 토니는 참 여러 가지 겹을 가진 얼굴을 지녔다. <도둑들의 하이웨이>에서도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적인데, 사기꾼 역을 맡은 배우가 실은 청각 장애인이었다고 한다. 연극만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 의심할 나위 없이 영화도 배우들의 예술임을 실감한다.


<리피피>는 우리나라에서 전설로만 회자되다가 2002년에 복원판이 나오고 재개봉하면서 유명해졌다. 줄스 다신 감독도 2000년대까지 살아계셨다. 2년 전에 신종플루로 돌아가시고 최후 작품 1980년에 나온 <Circle of Two>이고, 그 전에 <일요일은 안 돼요>와 영화 음악으로 유명했던 <페드라> 같은 영화도 있었다. 마지막 히트작은 리피피 비슷한 느낌의 <토프카피>(1946). 이후엔 빅 히트작이 없다. 멜라니 여사와 더불어 사회활동하느라 에너지가 분산된 듯하다. <리피피> 정도의 영화 찍었으니 됐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줄스 다신은 스트릿 필름의 창시자까진 아니지만, 엘리아 카잔과 더불어 실제 거리를 무대로 영화를 찍은 거장이다. 잘 정돈된 스튜디오에서 조명 써가면서 찍는 게 할리우드 느와르였는데 말이다. 트뤼포가 <리피피>를 '내 생애 최고의 필름 느와르'라고 말한 이유도 이것이다. 실제 거리에서 어떻게 저리 뽑아내는지 경이로울 정도다. 그의 스타일은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스튜디오 붕괴되면서 B급 영화의 틈새가 생기고 장르 영화가 융성하던 분위기 덕분이기도 하다. 조셉 로지의 경우 유럽으로 건너간 후에도 유럽화되어서 우아한 영화를 계속 선보였는데 다신의 경우는 유럽에서 만든 작품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하지만 그는 <리피피>와 더불어 미국 영화사에 한 장을 연 작품들을 만들었다. 현대적인 영화의 원형이라 할 만한, 구구절절이 얘기하지 않고, 외형을 심플하게 드러내면서 정수를 건져내는 감독이었다. 화면만으로 긴장을 버텨내는 영화가 많지 않다. 사운드가 발달하면서 페이크가 많아졌다. 모든 위대한 영화 감독들은 무성영화감독들과 경쟁하는 것 같다. 화면만으로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줄스 다신처럼 25분 음악 없이 대사 없이 간다는 건 요새도 아무나 못할 것이다. (정리: 최용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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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바캉스가 한창이던 지난 8월 8일은 특별히 정한 <대부>의 날이었다. 비록 안타까운 사정으로 <대부2>의 상영이 취소되긴 했지만,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강연으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만난 <대부>의 위력에 모두 큰 감흥에 젖은 가운데, 김영진 평론가는 촌철살인의 짧고도 굵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교수): 언제 봐도 재미있는 영화다. 83년에 처음 봤다. 서울극장 리바이벌 상영이었는데, 학교 졸업하고 당당하게 본 첫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였다. 너무 쇼킹했고 특히 마지막 교차편집이 너무 쇼킹해서, 그 다음날 한 번 더 봤다. 한 동안 코폴라의 광팬이 됐었다. 국내 출시된 DVD의 서플이나 피터 비스킨드 프리미어 수석기자가 쓴 책(『할리우드의 르네상스』라는 제목으로 국내 번역)에 영화에 대한 많은 비화가 있다. 처음부터 코폴라가 연출하고 싶어서 한 영화는 아니었다. 60년대 코폴라는 미국에서 펠리니나 고다르 같은 영화를 만들려 했었다 한다. 대학의 유명한 수제였다는데, 대학 3학년 무렵 로저 코먼이라는 B급 영화 제작자에게 스카우트되어서 시나리오도 쓰고 온갖 일들을 다 했다고 한다. 구소련 SF 영화를 사와서 원본 시나리오 없이 대충 화면 보면서 더빙용 시나리오를 쓰는 등 많은 작품을 했다. 특히 <패튼>의 시나리오가 유명하다. 아카데미상도 받았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써 가면서 연출도 했는데 찍는 족족 망했다. 연출한 영화 중 <빗속의 연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의 주부가 가출하는데, 가출 동기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녀가 자아를 찾는 여행을 해 나가는 로드무비다. 하지만 이 영화도 큰 빚을 졌다. 프레드 아스테어를 데려다가 고전 뮤지컬에 대한 오마주 영화를 찍었는데 그것도 망했다.

거의 할리우드의 기피 인물이 된 상황에서 갑자기 <대부>의 연출을 맡게 된 거다. 대부라는 소설이 그렇게 베스트셀러가 될 줄 몰랐다가 폭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니까 급히 6개월 내에 영화를 찍으려고 한 거다. 그런데 아무도 안 하려 해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사람이 코폴라였던 것. 코폴라가 이탈리아 계통이라서, 같은 이탈리아 계통끼리 마피아를 욕되게 하는 영화를 찍겠냐 해서 택했다고 한다. 최악의 선택이라고 지인들의 전화를 받고, 코폴라 나름대로도 굉장히 창피해하면서 내키지 않아했다고 하며, 촬영 중에도 일주일마다 해고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해고 즉시 투입할 감독도 늘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해고 위협을 받은 결정적 이유는 말론 브란도와 알 파치노를 캐스팅한 것, 시실리 로케이션 고집한 것 등이었다. 당시에 알파치노는 인물도 안 되고 키도 작고 연기도 못하는 배우였다. 브로드웨이 초짜 배우도 저것보단 잘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한 여러 가지 악조건들을 무릎 쓰고 나온 영화가 <대부>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하자 마자 박스 오피스의 기록을 갈아치웠고, 그 당시에 드물게 와일드 릴리즈 상영되었다. 그래서 코폴라는 그 날로 바로 로버트 에반스에게 백지수표를 받았으며, 그걸로 페라리를 샀다가 그날 저녁에 술 먹고 사고내서 파손됐다고 한다. 코폴라에게도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다는 거다. 말론 브란도는 당시에 퇴물배우이자 말썽꾸러기였다. 코폴라가 브란도의 집에 오디션하러 찾아갔다고 하는데, 브란도는 코폴라를 맞이할 때 입안에 뭘 물고 영화 속의 그 모습처럼 준비해서 맞이했다고 한다.

코폴라는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에 대한 세 가지 착안점을 밝혔는데, 마피아는 아메리카에 대한 메타포라는 거다. 세 가지 지점에서 같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이익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는, 무자비하게 적을 살상할 수도 있는 집단. 그리고 둘 다 자기 내가 매우 자비로운 집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코폴라는 더 나아가서 차라리 마피아가 미국보다 낫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적어도 마피아는 자기 구성원들은 배신을 하지 않는 이상은 확실하게 보호해주니까 말이다. <대부> 1편은 굉장히 마피아가 미화되어 있다. 그래서 코폴라는 2편에서는 그것을 반성하고 굉장히 차갑게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편이 더 좋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우리는 판타지를 갖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사회시스템(자본주의)을 충실히 할수록 가족주의가 깨진다. 비토 콜레오네 시절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첫 살인을 저지르고 가족 내에 들어와서 어린 마이클과 노는 장면 등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콜레오네는 아버지 못지않게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소외된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계속 배신하고, 그래서 죽이게 된다. 이런 주제를 마르크시즘 적인 텍스트보다 더 깊은 레벨에서, 이와 같이 다뤄낸 영화가 또 없는 것 같다. 처음 40분의 결혼식 시퀀스에서 이 모든 게 다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는 청탁이 이뤄지고 있다. 바깥에선 밝은 햇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누리고 있다. 계속해서 안과 바깥이 대비되며, 모든 등장인물이 소개된다. 유일하게 거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마이클이다. 케이가 계속 물어보는데, 마이클만이 거기에서 분리되어 양지의 세계에 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패밀리 속으로 들어오고 변해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이번만은 대답해 줄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소름끼치는 모습. 그러면서 마이클은 계속 고립된다.

형식적으로 이 영화는 아메리칸 뉴시네마 중에서 가장 고전적 방식으로 찍혀있다. 주제 상으로는 급진적이지만. 일종의 권력이동 드라마다. 시점이동에 관해 굉장히 신중하고 영민한 방법을 쓰고 있다. 영화의 첫 숏에서 카메라가 줌 아웃되면 그것이 비토의 시선임이 밝혀진다. 한편, 비토가 암살시도를 당할 때, 카메라가 부감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서부터 시점이동이 시작된다. 병원에서 마이클이 아버지를 구해낼 때 감동적인 숏-리버스숏이 나온다. 정말 믿을 만한 게 마이클 밖에 없는 상태인 거다. 유일하게 아버지를 닮은 아들. 비토가 울자 서서히 마이클에게 시점이 이동한다. 영화의 첫 숏과 대구를 이루는 숏이 솔로노와 협상 건을 놓고 의논할 때 마이클이 하지 말자고 말할 때, 카메라가 틸 다운하고 천천히 이동하면서 마이클에게 이동하여 클로즈업으로 끝나는 숏이다. 첫 장면의 비토 콜레오네와 대구를 이루는 숏으로, 아주 훌륭한 테크닉이다. 부자간의 마무리를 짓는 건, 정원에서 부자간의 대화 장면이다. 둘이 얘기를 할 때, 아주 사적인 친밀한 얘기와 비즈니스 얘기를 번갈아가며 한다. 아들 얘기, 전화국 얘기. 블로킹이 바뀌면서 카메라 포지션도 바뀌고 두 사람의 더블 클로즈업을 잡고 있다. 비토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나는 네가 거물이 되면 했다. 상원의원...." 그러자 마이클이 이것도 좋다고 한다. 아주 뛰어나게 연출하고 있는 장면이다. 거의 무장해제 된다. 손자와 노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마이클이 어떻게 새로운 보스가 되는 지를 보여줄 때에도, 톰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다 처리해 버린다. 새로운 보스가 되는, 즉 또 다른 인간이 되어버리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생생함이다. 마리오 푸조의 원작도 굉장히 뛰어난 소설이다. 직접 취재하거나 그러지 않으면 쓸 수가 없는 소설이다. 꼴레오네가 말하는 "바르지니와 협상을 주선하는 사람이 오면 그 사람이 배신자다"라는 대사는 결코 책상에 앉아서 쓸 수 없다. 정말 그 세계의 사람들을 많이 취재한 사람마이 쓸 수 있는 대사다. 풍부한 디테일들을 가지고 할리우드의 엄청난 물적 지원을 받으면서 많은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만들어낸 기적 같은 작품이다. 코폴라는 계속해서 이 영화를 능가하는 작품을 찍고 싶어 했으나, 내 견해로는 결국 그러지 못했다. 요즘 <테트로> 같은 영화를 보면, 오히려 자기가 젊었을 때 찍고자 했던 영화를 이제서야 찍는 거 같다. 코폴라 필생의 테마인,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을 가지고 말이다. <지옥의 묵시록>도 마찬가지다. 이 양면성의 측면에서.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코폴라 할아버지가 코폴라 아버지를 교육을 시키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창고에서 플룻을 부는데 마피아가 나타났다고 한다. 코폴라 할아버지는 마피아들에게 총들을 전해주었고, 마피아들이 얘는 누구냐고 하자, "걱정 안 해도 된다, 내 아들이다."라고 했다는데, 코폴라 아버지는 이 때 마피아 앞에서 플룻을 불었다고 한다. 그들이 잘한다고 돈을 더 주고 갔다고 한다. 코폴라는 아버지의 이 일화를 굉장하다고 여겼다. 가장 잔인한 것과 따스한 것이 공존하는 순간이라 여긴 거다.


관객1: 대부를 한 다섯 번째 보는데 이해가 안 되는 장면 중 하나가 다섯 개 패밀리를 다 소집해서 돌아오는 길에, '내 아들을 죽인 것이 바르지니인 것을 알았다'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복선이 나왔는지?
김영진: 그것은 결국 감일 게다. 회합의 주도권을 쥐고 분위기를 리드하는 것이 바르자니인데, 아마도 거기서 눈치를 챈 것이 아닐까 싶다. 나도 이 영화를 열 번 이상 본 것 같다. 학생들과 수업 중에도 곧잘 본다. 의외로 학생들은 이 영화를 많이 안 봤더라. 내 기억으론 <7인의 사무라이>를 보여주면 자는데, <대부>는 안잔다. 더 젊을 때는 <대부2>를 더 좋아했는데, 지금은 <대부1>이 더 좋다. <대부2>는 너무 날이 서 있어서 좀 괴롭다. <대부1>은 날도 서 있지만, 정서적으로도 우리를 위로해주는 측면이 있다. 대중영화로서 완벽하고, 할리우드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개인의 기량과 시스템의 힘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 아닌가 싶다. (정리 :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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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강좌1] 일본영화계에 대한 단념, 극한의 데카당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을 맞아 전후 일본 영화사에 혁명적 바람을 일으킨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영화사 강좌를 마련했다. 지난 14일 저녁 오시마의 가장 최근작인 <고하토> 상영 후에는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가 ‘오시마 나기사의 레퀴엠에 관하여’란 주제로 열띤 강연을 펼쳤다. 그 현장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영진(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오늘 강연은 먼저 <고하토>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오시마 나기사 영화의 전체적인 경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영화는 2000년에 칸영화제에 출품이 됐었는데 원래는 1995,6년에 제작하려고 했으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반신마비가 되는 바람에 몇 년간 연기가 됐던 프로젝트다. 감독은 이 영화를 1999년에 완성했고, 2000년 칸에서 소개될 당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영화제를 방문했었는데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존해 움직이던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난다. 히지카타 토시로를 연기한 비트 다케시는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 이후 두 번째로 오시마 나기사 감독과 작업한 거다. 비트 다케시와 최양일(콘도 이사미)을 캐스팅한 까닭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영화촬영 중 문제가 생겼을 때 대신 작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각본은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 나와 있는 시바 료타로의 <신센구미 혈풍록>을 토대로 했다. 사무라이들에 얽힌 많은 에피소드들 중에서 미소년 검객(카노 소자부로, 마츠다 류헤이 분)의 에피소드와 이노우에 겐자부로라는 나이든 사무라이 에피소드 두 개를 결합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원래는 이노우에와 함께 대결하러 가는 무사가 미소년이 아닌데 영화에서는 설정을 바꿨다. 이노우에는 콘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로에게 검술을 가르쳐줬던 사람인데, 이들은 이십대에 일가를 이루었지만, 이노우에는 그 후로 검술실력이 늘지 않은 채로 사십대가 되었다. 제일 어린 오키타 소지는 천재 검객이었다고 한다. 신센구미에 관한 얘기는 일본에선 굉장히 유명해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신센구미는 막부 말기에 존왕양위를 외치면서 교토에서 천왕을 위해서 일종의 치안조직처럼 활동을 한 보수적인 집단이다. 막부조직이 원활하게 가동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신 치안을 담당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좋아했고, 그 시기 사람들의 3분의 1정도가 길거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사회가 혼탁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예법이 발달한 이유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센구미는 정통 사무라이 집단이 아니다. 모집을 한 것이기 때문에 계통도 족보도 없었고 하급조직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만 공유되는 비밀인데, 이들은 신센구미 2세대이다. 원래 조장이 따로 있었는데 콘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로, 오키다 소지, 이노우에 겐자부로가 작당을 해서 조장을 죽였다. 영화의 스토리는 어떤 거대한 시스템이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시마 나기사는 왜 이 영화를 찍었는지, 신센구미 스토리의 어떤 점에 매혹되었는지가 궁금해진다. 물론 마지막에 히지카타가 벚꽃을 베는 장면에선 우리가 일본영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고, 그 점이 매혹적이기는 하다. 이 영화는 굉장히 데카당스하다. 남자 하나를 두고 남자들끼리 이렇게 질투하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감염되어 가는데, 히지카타가 벚꼿을 베는 것도 일종의 단념을 위한 행위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직에 대한 단념이기도 하고. 영화에서 미소년 검객은 기성세대의 사무라이에 비해서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이다. 신센구미에 입대한 목적이 없다. 단지 사람을 베어보고 싶어서 입대했다고 말한다. 콘도세대처럼 자기 나름의 명분이나 출세욕 같은 게 없다. 굉장히 유희적인 세대의 젊은이가 들어온 것인데, 이 점은 세대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00년 부산영화제에서 요모다 이누히코라는 일본의 학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점에 대해 “오시마 나기사가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일본사회 자체에 대한 단념이자 현재 일본영화계에 대한 단념”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오시마 나기사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일본영화의 적자는 다케시와 최양일이다. 조금 더 간다면 기요시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다케시나 최양일과 대비되는 미소년 검객은 오시마 나기사가 혀를 차는 이와이 순지 세대라고 볼 수 있다. 한 세대가 저물어서 새로운 세대가 올라오고 있는데, 그 상황에 대한 단념이라는 거다. 이런 과정을 이 영화는 굉장히 데카당스하게 보여준다. 60년대부터 오시마 나기사는 굉장히 전투적으로 영화를 찍었다. 일본사회에서 그만한 파워풀한 존재감을 지닌 감독은 없었던 것 같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을 하다가 그의 영화에 반발을 하고 나온 사람이다. 일본식 도제시스템에서는 그럴 경우는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는데, 오시마 나기사나 이마무라 쇼헤이 같은 거물들은 그들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다. 자주영화 시스템을 통해 실험적이고 힘겹게 영화를 찍었다. 영화의 화두도 시스템 내의 성과 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백주의 살인마>를 보면 살인마를 파괴된 공동체, 실패한 역사로부터 나온 괴물처럼 묘사하고 있다. 오시마 나기사는 60년대에 사회적 균열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70년대 들어서면서 힘을 잃어버린다. 전공투의 실패 이후로 더 이상 출구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감각의 제국>을 만들 때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감각의 제국>의 소재인 아베 사다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한 실화인데, 실제로 로망포르노로도 만들어졌고 이와 비슷한 소재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감각의 제국>은 단념의 극단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다. 폐쇄된 골방에서 자극적인 섹스를 하던 남녀가 퇴행해 가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게다가 성기를 절단까지 한다. 당시 오시마 나기사는 서구에서 일본의 장 뤽 고다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그런 감독이 포르노그라피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굉장한 스캔들이 되었다.

다음에 만들어진 <열정의 제국>은 개인적으로는 대형스크린으로 처음 본 일본영화였다. 당시 프랑스문화원의 특별상영회에서 영화를 봤는데 시각적, 청각적으로 굉장한 자극을 받았고, 내용도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 때부터 오시마 나기사 감독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당시에는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볼 수는 없었다. 오시마 나기사와 친분이 있었고 60년대부터 계속 주목할 만한 평론을 썼던 사토 타다오라는 일본의 원로 평론가가 김성욱 프로그래머와 대담한 것을 보면 후기작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아마도 성과 폭력이라는 틀로 일본사회에 반기를 들었던 그가 점점 자기파괴적인 쪽으로 끌리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오시마 나기사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 대해서는 매일 먹고도 질리지 않는 일본식 두부를 잘 만드는 감독이라고 말했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식으로 잘 로컬화시킨 스테이크를 만든 감독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독주에 가까운 일본식 사케를 만든 게 아니었을까라는 말을 했다. 그런 점에서 “영화라는 것은 사회에 독을 조금씩 흘려넣는 일이다”라고 얘기했던 스즈키 세이준과 비슷한 태도를 지닌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 실험과 주제적 실험을 병행하면서 좌충우돌한 감독이다. 60년대 모든 시도를 다 해 보고, 70년대 들어와서는 침묵했다가 그 후에는 극한의 데카당스와 자기파괴적인 충동에 자석처럼 끌려가듯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보이는 말년의 루키노 비스콘티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소멸해가는 육체와 그 반대편에서 커져가는 관능성, 생명에 대한 열정이나 탐닉을 데카당스하게 그린다. 퇴폐미를 통해 파괴의 극점에 도달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밟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된다. 지금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투병중인데, <고하토>라는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보여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60년대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찍혀져 있고 영화 중간에 코믹한 요소들도 많이 있다.

신센구미가 몰락하기 전에 이미 시스템 내에 몰락의 징조가 있었고, 히지카타는 마지막에 그것을 예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비트 다케시가 무표정하게 얘기하면서 검을 휘두르는 장면이 좋았다. 너무 많이 본 세팅이나 스토리라면서 칸에서의 비평적 평판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요모다 이누히코라는 일본평론가의 해석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검을 든 사무라이로 일본영화계에서 거의 단독자로 살아온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말년이 되어 단념을 영화적으로 매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계를 넘을 만큼 넘어 본 감독이 <감각의 제국>을 통해서는 실제 정사를 표현했고, 이러한 불가능한 지점들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고 나서는 추동력을 상실해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오시마 나기사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와 더불어서 정말 대단했던 것 같다. 오시마 나시사의 전성기 영화들과 후기작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니 남은 기간 동안 즐겁게 관람하셨으면 좋겠다. (정리: 김수현)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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