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10. 14:58ㆍ특별전/한 겨울의 클래식
한겨울의 클래식 영화사 강좌 [2]
지난 1월 6일 한겨울의 클래식 상영작 중 <리피리> 상영 후에 두 번째 영화사 강좌로서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강연이 열렸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상영된 <리피리> 상영 후에 ‘줄스 다신의 백년’이란 제목으로 열린 강좌여서 더욱 뜻깊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뮤지컬학부 교수): 줄스 다신의 <리피피>는 범죄 강탈영화의 원형 같은 작품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스탠리 큐브릭 <킬링>도 연관이 있다. 장 피에르 멜빌도 비슷한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다가 <리피피>가 나와서 좌절했다는 얘기도 있다. 멜빌은 그 시절 아내한테 영화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당신 영화 그만 했으면 좋겠어'라는 타박을 듣고 있었는데 그 때 자크 베케르가 찾아와 영화 잘 봤다고 해서 겨우 다시 기운을 냈다고 한다. 멜빌은 그때 <리피피>를 봤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멜빌은 기획하던 영화를 <리피피>와 비슷하지 않게 하려고 바로 플롯을 바꿨다고 한다. 결과는 <리피피>에 역시 못 미쳤지만. 그렇게 나온 영화가 <암흑가의 세 사람>(1970)이다. 그만큼 <리피피>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영화다. 이 영화는 사실 줄스 다신이 미국에서 쫓겨나서 프랑스에서 힘들게 지낼 때 만든 영화인데 실제 줄스 다신은 만들고 싶어하지도 않았던 영화라고 한다. 촬영도 30일만에 끝났고. 하지만 억지로 찍었는데도 줄스 다신 필모그래피 중에 정점을 찍은 것이 정말 대단하다. <리피피>가 혁신을 이룬 점은 원작에서 간략하게 넘어가는 강탈 신이 실질적인 클라이막스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봐도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다. 상황만 갖고 말이다. 음악 담당자가 음악을 다 만들어놓았는데 영화를 보더니 '아. 어떤 음악보다 긴장감이 넘친다. 장면만으로도 하모니가 좋아서 이 장면에서는 음악을 넣지 않겠다' 이렇게 얘기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강탈 신 이후에도 매우 흥미롭게 진행된다. 엔딩도 흥미롭고, 토니는 죽어가는데 뒤에 앉은 꼬마는 '나무들을 봐요' 이렇게 말한다. 자라나는 새싹인 꼬마의 혈기왕성한 모습과 대비되는, 회한에 가득찬 토니의 모습이란. 토니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행위를 했다. 후배 아들을 살려줌으로써 자기 일생에서 가장 놀라운 일을 해냈다. 나무와 카오스적인 도시의 풍경,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모습들은 강탈 시퀀스와 대비되면서 정말 인상적인 엔딩을 보여주었다.
<리피피>는 줄스 다신 개인적으로도 전기가 된 영화이다. 다신은 이 영화로 깐느에서 감독상을 받는데, 거기서 운명적으로 두 번째 부인 멜리나 메르꾸리를 만난다. 메르꾸리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뻔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여우주연상 없음' 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메르꾸리가 그리스 민주화에 힘쓰던 안티 파시스트이어서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깐느에서 <리피피>를 보고 다신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다신이 그리스를 왔다 갔다 하면서 둘은 사귀게 된다. 메르꾸리에 따르면 줄스 다신은 자연인으로서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메르꾸리가 '난 새벽에 자서 오후에 일어난다.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나요?'라고 하자 당연하다고 말하고 '걷는 것 좋아하시나요?'라는 질문에도 물론 그렇다고 했다고 한다. 멜라니 메르꾸리는 사실 500미터만 걸어도 숨차해야하는 (웃음) 그런 부잣집 딸이었는데, 그에 반해 다신은 맨날 걸어다녔다고 환다. 그것도 춤추면서. 다신은 사석에서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었고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완전히 터득한 쇼맨십 넘치는 남자였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자면 멜리나 메르꾸리와 결혼하고 나서 다신의 영화가 바뀐다.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바꾼다든지. 하지만 실상은 메르꾸리를 만나기 전의 영화로 줄스 다신의 영화사적 공헌이 인정되곤 한다. 그는 <리피피>와 그 전의 영화로 미국 네오리얼리즘의 아버지로 불린다. 다신 때부터 진짜 거리에서 찍는 스트릿 필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DVD로 나와있는 <브루트 포스>(1947), <벌거벗은 도시>(1948), <밤 그리고 도시>(1950) 같은 영화는 명불허전이다. <도둑들의 하이웨이>(1949)도 정말 좋다. 이 영화는 사과 농장에서 직접 시카고 선물 시장으로 사과를 옮기는 사람들의 얘기이다. 신선하게 최대한 빨리 갖다줘야 해서 트럭 기사들은 잠도 안 잔다. 그들은 폭력배에 가까운 시장 주인들과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주인공은 진짜 고물 트럭의 운전수인데 그의 뒤를 사기꾼 둘이 쫓는다. 고장나길 기다리면서. 그러다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트럭이 불타고 사과도 사라진다. 잔해를 보면서 사기꾼이 오는데 트럭 기사의 죽음을 보면서 잠바 자크를 올려닫는다. DVD 인터뷰에서 본 얘기인데 아무도 그 장면을 얘기하지 않지만 줄스 다신 본인은 제일 좋아하고 서늘하다고 느끼는 장면이라고 전한 바 있다. 그런 묘사가 이 감독의 특기이다. 미국 영화에 이런 것을 도입한 것이다. 네오리얼리즘도 그렇지만 피지컬한 것으로 감정을 묘사했다. 데 시카도 <자전거 도둑>에서 캐리 그랜트가 아니라 일반인을 쓴 건 그 사람 연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걸음걸이 때문이라고 한다. 남용하면 안 되겠지만 <자전거 도둑> 주인공의 걸음걸이, 손짓, 발짓, 눈빛 같은 것은 캐리 그랜트가 아무리 잘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피지컬한 것을 통해서 존재를 투과시키는 것, 이걸 줄스 다신이 미국 영화에서 최초로 했다.
<리피피>의 주인공 토니는 정말 인상적인 인물이다. 인생을 잘못 살았다. 막장으로 살았고 그렇다고 또 돈을 크게 번 것도 아니고. 기껏 감옥 생활했는데 나와보니 포커판에서 쫓겨나고, 애인한테도 배신당했다. 하지만 전문가의 소질을 살려서 조그마했던 판을 키운다. '진열장 말고 금고 털이를 해야지'하고. 현대 영화에서는 이런 악인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드물었다. 다신 영화에서는 주조연 가릴 것 없이 연기가 뛰어나고 풍모가 인상적이다. 그 중에 토니가 제일 인상적이다. 표정 자체가 일상적인 표정이 아니지 않나. 불만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이면서도 포스가 있고, 강한 가운데 약함이 있고. 토니는 참 여러 가지 겹을 가진 얼굴을 지녔다. <도둑들의 하이웨이>에서도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적인데, 사기꾼 역을 맡은 배우가 실은 청각 장애인이었다고 한다. 연극만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 의심할 나위 없이 영화도 배우들의 예술임을 실감한다.
<리피피>는 우리나라에서 전설로만 회자되다가 2002년에 복원판이 나오고 재개봉하면서 유명해졌다. 줄스 다신 감독도 2000년대까지 살아계셨다. 2년 전에 신종플루로 돌아가시고 최후 작품 1980년에 나온 <Circle of Two>이고, 그 전에 <일요일은 안 돼요>와 영화 음악으로 유명했던 <페드라> 같은 영화도 있었다. 마지막 히트작은 리피피 비슷한 느낌의 <토프카피>(1946). 이후엔 빅 히트작이 없다. 멜라니 여사와 더불어 사회활동하느라 에너지가 분산된 듯하다. <리피피> 정도의 영화 찍었으니 됐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줄스 다신은 스트릿 필름의 창시자까진 아니지만, 엘리아 카잔과 더불어 실제 거리를 무대로 영화를 찍은 거장이다. 잘 정돈된 스튜디오에서 조명 써가면서 찍는 게 할리우드 느와르였는데 말이다. 트뤼포가 <리피피>를 '내 생애 최고의 필름 느와르'라고 말한 이유도 이것이다. 실제 거리에서 어떻게 저리 뽑아내는지 경이로울 정도다. 그의 스타일은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스튜디오 붕괴되면서 B급 영화의 틈새가 생기고 장르 영화가 융성하던 분위기 덕분이기도 하다. 조셉 로지의 경우 유럽으로 건너간 후에도 유럽화되어서 우아한 영화를 계속 선보였는데 다신의 경우는 유럽에서 만든 작품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하지만 그는 <리피피>와 더불어 미국 영화사에 한 장을 연 작품들을 만들었다. 현대적인 영화의 원형이라 할 만한, 구구절절이 얘기하지 않고, 외형을 심플하게 드러내면서 정수를 건져내는 감독이었다. 화면만으로 긴장을 버텨내는 영화가 많지 않다. 사운드가 발달하면서 페이크가 많아졌다. 모든 위대한 영화 감독들은 무성영화감독들과 경쟁하는 것 같다. 화면만으로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줄스 다신처럼 25분 음악 없이 대사 없이 간다는 건 요새도 아무나 못할 것이다. (정리: 최용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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