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얼 감독과의 시네토크 지상중계

 

지난 22일 열린 9작가를 만나다”에서는 음악을 하나의 캐릭터처럼 영화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유대얼 감독의 영화 세 편을 <유대얼 단편선>이란 이름으로 묶어 상영하고 감독과의 대화를 가졌다. 시종일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감동과 웃음이 오간 이날의 대회를 일부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최근에 <사중주>라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브라스 퀸텟>, <듀오>, <에튀드 솔로>가 있고, 삼중주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묶으면 하나의 완결된 형태가 될 것 같다. 혹시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계획에서 시작된 건지 우연인 건지 궁금하다.

유대얼(영화감독):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고 광고일을 하다가 영화를 너무 만들고 싶어서 제작년에 <브라스 퀸텟>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는 우연히 교회에서 연락이 와서 아이들이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를 만들자마자 곧바로 아시아나 영화제에서 연락이 와서 세 번째 작품을 만들게 됐다. <사중주>는 내가 재즈를 엄청 좋아하는 데다 한국에서 재즈를 소재로 한 극영화가 없다고 알고 있어서 첫 시도를 하고 싶어 작업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영화를 찍으면서 전작에 나왔던 배우들이 까메오로 나오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찍었는데 이제 트리오까지만 찍으면 다섯 편의 영화가 자연스레 하나로 묶일 것 같다.

 

김성욱: 영화에서 음악의 전곡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는데, 이 영화들에서는 언제나 전곡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음악이 모티브가 되고 많은 음악들이 나오는 만큼 영화를 착상해나갈 때 음악과 영화의 구성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궁금하다.

유대얼: 뭔가를 할 때 열정이 필요하다. 나에게 열정을 주거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음악이다. 굉장히 좋은 곡이 있을 때 그 곡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영화는 군악대 생활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abide with me>란 곡에 많은 애착이 있었고 장송곡으로 알려졌지만 장송곡으로만 쓰기엔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곡으로 뭐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내 군대 경험과 결부시키면 재밌을 것 같아서 영화를 만들게 됐다. 두 번째 영화는 선교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 어떤 찬송가가 좋을까 생각하다 어렸을 때 들었던 찬송가를 골랐다. 세 번째도 군대에서 착상한 이야기다. 사실 세 번째 영화는 처음 기획이 트레블링 숏이라고 해서 한국의 공간과 문화를 알리는 목적이 있었지만 내가 곡에 욕심이 있어서 음악영화로 만들었다. 어렸을 때 음악을 했었는데 지금은 못하고 있어서 음악에 대한 미련이 많다. 그걸 영화로 풀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김성욱: 코미디에 욕심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음악과 영상의 결합이 그렇다기보다 구조적으로 숏의 연결이나 장면의 구성에서 코미디적 설정이 많다. 이런 코믹한 설정들을 생각해 낼 때 광고 일을 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는가.

유대얼: 즐거운 걸 좋아하는 성향이다. 심각하거나 진지한 주제의 이야기도 즐겁게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것 같다. <에튀드 솔로>에서 첫사랑을 마주하는 장면도 밋밋하게 만나는 것보다 재밌게 만나게 하고 싶어서 그런 장면을 넣었다.

 

김성욱: 실제 연주자들을 캐스팅 하다 보니까 대사가 거의 없다. <듀오>에서 마스크를 하고 나오는 것도 내용상의 설정이긴 하지만 대사를 없애기 위한 장치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오히려 대사 없는 것이 영화를 무성영화처럼 생략적이게 만들어간다. 영화를 만들 때 캐스팅은 어떻게 하고, 전체적인 스텝 및 촬영의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유대얼: <브라스 퀸텟>은 실제로 군악대를 같이 보냈던 친구들 몇 명과 군악대를 나온 친구들 몇 명과 함께 했던 작업이다. <듀오>의 허민이라는 친구는 우연히 스타킹에서 연주하는 걸 보고 캐스팅했다. <에튀드 솔로>도 실제 피아니스트인 친구다. 이 친구는 독일 배낭여행 중에 만났는데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나중에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음악영화에서 어려운 점은 연주도 해야하고 연기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연기 보다 연주가 우선이다. 연주가 가장 중요한 영화에서 흉내내거나 어설프게 되면 감동이 떨어진다. 그래서 실제 연주자를 캐스팅한다. 스텝은 다 합쳐서 한 삼 십 명 정도 되는 것 같다. <브라스 퀸텟> <듀오>는 광고하면서 만났던 학교 선후배들과 같이 했고, <에튀드 솔로>는 영화 쪽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같이 작업했다.

 

김성욱: <브라스 퀸텟>에서 중간에 눈물 흘리는 여자가 등장한다. 이 여자의 등장 설정이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유대얼: 사실 해결이 안 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반대되는 상황에서 받아들이는 음악의 형태들에 대해 고민했다. 세 가지를 생각했는데, 첫 번째는 카페에서 즐거운 춤곡을 들으며 슬퍼하는 여자의 상황, 두 번째는 장송곡을 결혼식장에서 연주하는 상황, 세 번째는 이별 노래를 고백의 노래로 부르는 상황이다. 이런 식의 세 가지 코드를 생각했었는데 전달이 잘 됐는지 모르겠다.

 

김성욱: 세 편의 영화들을 보면 음악이 연주되는 장소가 결혼식장, 교회, 야외 공간이다. 이렇게 대개 일상적인 영역에서 음악이 연주되는데, 특히 <에튀드 솔로> 에서 야외 공간과 빛의 배치 및 구도가 신기하다. 연주를 하는 순간 빛에 의해 공간이 배치되고, 연주가 끝나고 순간적인 정적이 흐르는 느낌이 좋다. 촬영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묘한 순간을 포착했는가.

유대얼: 사실은 운이 좋았었다. 그 장면은 창덕궁에서 찍을 수가 없어서 민속촌에서 찍었는데, 때마침 빛과 공간의 느낌이 좋았었다. 연주자의 위치는 양달이고 애들이 앉았던 곳은 그늘이었다. 촬영하면서도 운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김성욱: 전체적으로 세 편의 영화가 끝나는 지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늘 에필로그가 있다. <브라스 퀸텟>이나 <듀오>에서는 전형적인 에필로그가 있고, <에튀드 솔로>에서는 숨겨진 과거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에필로그가 있다. 사실 코미디에서 에필로그는 약간의 반전을 주는 장치이다. 에필로그적 구성이 음악의 영향이 있는 건지 어떤 건지 궁금하다.

유대얼: 좋아하는 구성이다. 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만들다 보면 뒤에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연주가 끝나고 정말 끝나버리면 허전하지 않은가. 영화가 그렇게 끝나면 아쉬울 것 같다. 그래서 덧붙여 줄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붙으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관객1: <브라스 퀸텟>에서의 애니매이션이나 <듀오>에서 글씨 같은 경우 목소리가 아니고 다른 이미지들을 사용했는데 스스로의 생각인 건지 궁금하다.

유대얼: 영상디자인과를 나온 영향이 큰 것 같다. 미술 기반의 일을 하다보니 그런쪽으로 관심이 많이 가는 게 사실이다. <브라스 퀸텟>에서의 애니매이션의 활용은 내용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듀오>의 애니매이션은 아이들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길 바라며 활용했다. 물론 미술감독들과 충분히 상의하면서 만들었다.

 

관객2: <에튀드 솔로>에서 설마 저 소년이 저렇게 어른이 됐나 싶었다. 마지막에 붕대 감은 손을 보면서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혹시 반전으로 일부러 비주얼을 다르게 한 건가.

유대얼: 비주얼적으로 같은 배우가 나오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한번에 알게 된다. 나는 극중 인물과 관객이 동시에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게 하고 싶었다. 음악을 통해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경험을 극중 인물과 관객이 함께 하면 어떨까 싶었다.

 

 

 

 

 

 

 

 

 

 

 

 

 

 

 

 

 

 

 

 

 

 

관객3: 앞으로 같이 작업을 하고 싶은 음악감독이 있는지, 그리고 음악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찍을 계획도 있는지 궁금하다.

유대얼: 내 시나리오를 100% 공감하고 훨씬 더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음악감독이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개인적으로 휴머니즘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자극적인 느낌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들이 의욕이 생기고 기쁨이 생기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음악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만든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 것 같다. 물론 음악이 좋은 영화를 하고 싶다.

 

정리: 최혁규(관객 에디터) | 사진: 박지연(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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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9일 브라이언 드팔마의 <분노의 악령> 상영후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시스템 내부의 균열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비전에 대한 감각을 담고 있는 영화만큼이나 흥미로웠던 이날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 시네바캉스의 ‘이미지의 파열’ 섹션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의 미국 영화들 안에서 시스템적 균열의 양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을 꼽았다. 그 중 <분노의 악령>(1978)은 일순위 중 하나였고, 나머지 영화들이 그에 따라 배치됐다고 할 수 있다. ‘시네필의 바캉스’ 섹션의 영화들은 좀 더 일탈적인 영화들로, 그 자체로 작가들이 마치 바캉스를 떠나듯이 휴양하며 찍은 듯한 영화들인데 비해, ‘이미지의 파열’의 영화들은 바캉스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즉물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시스템 내에서 균열을 만들어내는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이나 시스템의 만족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주면서도 스스로 고유한 파열을 만들어가는 과정 안에서 고군분투했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오늘 상영한 드팔마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다. 영화 안에는 젊은 시절의 긴장성이나 트라우마, 분노 같은 것들이 있는데, 허무맹랑하지만 한편으로는 놀랍고 가혹한 진실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트라우마를 품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고, 이들은 자신의 힘을 어찌할 바 모른다. 그 힘이 어디서 기원하는가는 모호하지만, 죽음과 관련된 트라우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컨트롤하려는 집단이 있다. 그것은 국가적인 기관으로 등장하고,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창조력의 엄청난 힘을 컨트롤하려는 집단에 의해 희생당하는 한 명의 젊은이 로빈과 그 과정에서 오히려 아버지를 파괴해나가는 길리언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분노의 악령>에는 비전의 매혹 같은 것이 존재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투시자들의 삶에 대해 말하는데, 지나간 삶과 다가올 삶, 아주 무한한 우주의 기억을 간직한 세계와 접속해 보게 되는 투시자들의 비전을 길리언과 로빈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드팔마는 그러한 비전을 놀라운 방식으로 이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다.

 

 

영화에는 두 개의 스토리 라인이 있고, 이 둘이 얽혀가면서 최종적인 국면에 이른다. 하나는 아버지가 아들 로빈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관계가 파열된 이후에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는 이야기 안에는 일종의 이상한 미스터리 플롯, 패러노이드 이야기의 형식이 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미국영화의 상당수가 이런 식의 편집증적인 영화, 음모적 영화라고 불리는 장르 안에 있으며, 그런 맥락 안에 이 영화가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길리언이 염력을 통해 로빈과 교통해가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는 트라우마 혹은 초자연적인 것 못지않게, 일종의 증인, 증언과 같은 연결점이 있으며 이는 앞서 말씀드린 비전을 독특하게 표현해낸다.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지켜보는 자로서의 길리언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이중적 공포를 갖고 있다. 하나는 무언가를 자꾸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텅 빈 극장에 앉아 비어있는 스크린을 지켜보는데, 그 스크린이 뭔가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 혹은 뇌 속의 무언가가 비집고 나와 스크린에 그대로 투영되어, 마치 영화를 보듯이 사건을 목도하게 되는 그런 공포다. 길리언의 또 다른 공포는 접촉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와 손을 잡거나 만지면 피가 나오게 되기 때문에 그녀는 어머니와의 접촉도 꺼리게 된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캐리>(1976)와 이면화를 이루며, 더 넓게 보면 <캐리>와 <분노의 악령>, <홈 무비>(1980), <드레스 투 킬>(1980), <블로우 아웃>(1981)이 굉장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분노의 악령>은 원작 소설에서 출발한 것이긴 하지만, <캐리>와의 연속선 안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분노의 악령>에서 아이들이 갖고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국가가 컨트롤하려한다면, <캐리>에서는 어머니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고양시키려 한다. 그 억압되어있던 에너지가 영화 후반부에 학교에서 벌어지는 파티에서 폭발하는데, 캐리는 양동이 가득 담긴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서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것은 분할화면의 사용이다. 캐리의 에너지가 자신의 몸의 한계를 넘어서게 될 때 몸 바깥으로 나아가게 되면서 순수한 힘으로 전이된다는 점이 특별하다. 그녀가 쳐다본다든가 손짓을 하면 그 에너지가 곧바로 분할화면의 다른 프레임 안에 파괴적인 힘으로 형상화된다. 하나의 프레임이 갖는 용적의 한계를 넘어서는 에너지가 또 다른 프레임들을 복수적으로 양상하는 특징이 있다. <분노의 악령>에서는 프레임의 경계지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말하자면 후면영사처럼 표현되어 있는 또 다른 방식의 장면적 전환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캐리>의 분할화면과 <분노의 악령>의 독특한 프레임 배치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사실 <캐리>와 <분노의 악령>이 연결되는 가장 큰 맥락은 <캐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길리언을 연기하는 에이미 어빙은 <캐리>에서는 캐리의 친구로 등장한다.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캐리의 무덤을 찾아가는 꿈을 꾸는데, 무덤에서 나온 캐리의 손은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분노의 악령>에서 길리언이 어떻게 초자연적 능력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영화에서는 설명되지 않는데, <캐리>와 연관지어 보면, 캐리의 능력을 길리언이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접촉을 통해 트라우마의 기억을 간직하게 된다는 것, 누군가가 죽어가며 분출하는 슬픔과 분노를 그것을 보는 자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은 드팔마의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며, 이후에 <드레스 투 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유명한 엘리베이터에서의 살인 장면에서 죽어가는 자와 시선을 교환하고 그녀가 내미는 손을 잡으려는 여자에게 희생자의 마지막 제스쳐, 공포스런 몸짓이 이전되는 과정은 거울을 통해 왜곡된 프레임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드팔마의 영화에 존재하는 접촉과 전수, 이전의 과정들은 달리 말하면 일종의 증인적 행위로서의 보기이며, 이는 드팔마 영화에서의 비전을 특징짓는다. 캐리의 무덤가에서 캐리와 접촉하면서 전수받은 초자연적 에너지가 <분노의 악령>에서는 점차적으로 꿈틀거리며 뛰쳐나오게 되는데, 그런 에너지들을 어떻게 조절해나가면서 장면화 하는지가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다.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텔레파시 능력을 표현하는 장면인데,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등장한다. 그 이미지들은 죽음과 연관되어져 있으며, 하나는 과거를 다른 하나는 미래를 지칭하는 사건이다. 길리언이 계단에서 360도 패닝하면서 보는 것과 후면영사되는 과거의 장면은 시선에 의해 매칭되지 않지만, 그녀의 시선에 의해 점차적으로 과거의 장면을 보는 것 같이 표현된다. 과거는 마치 투사되는 영화의 이미지를 보는 것처럼 설정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입회되어 있는 듯하다. 그녀는 현재에 있지만 과거를 보고 있고, 과거는 그녀 바깥에 있지만 동시에 과거 안에 그녀가 내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녀가 보게 되는 파편적인 이미지들은 사실상 세계를 이루는 단편들이며, 이 단편들은 전체적인 종합성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각각의 조합들을 통해 비가시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나가버린 과거를 증언하는 것과 비슷한 영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증언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비전을 경유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분노의 악령>의 한 장면에선 영화를 본다는 설정이 초래하는 공포의 순간이 있다. 로빈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순간을 촬영한 영상을 끊임없이 로빈에게 보여줌으로써 무언가를 본다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트라우마가 로빈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계속 증가시켜나간다. 이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인물들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증가시키는데, 트라우마적 보기의 방식이 초래하는 서로 다른 두 길이 존재한다. 드팔마가 캐리에 이어 로빈에게서 자기파괴적인 상태로 귀결되는 젊은이의 결말을 보여주었다면, 그들과 유사한 설정을 두면서 동시에 거기에서 이탈해나가는 길리언이라는 새로운 젊은이를 둠으로써 또 다른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분노의 악령>은 억압된 성인의 질서로 보수화되기 전단계에, 완벽하게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염력, 텔레파시로 표현되는 이들의 능력은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가시화시키는 능력,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창조성의 능력과도 닮았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국제적인 기관과 음모에 의해 이러한 젊은이들의 에너지들을 끌어들이고 통제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쾌감은 젊은이들의 능력을 컨트롤해나가는 세계 안에서 그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어떤 방식으로 전환해서 어떻게 그 세계와 싸움을 벌여나갈 것인가를 제시하는 점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드팔마의 고군분투의 느낌이 있다. 70년대에 뉴아메리칸시네마의 많은 감독들이 시스템에 투항해 주류적인 영화 안으로 편입되어 갈 때, 드팔마는 굉장히 이상하고 저급한 익스플로테이션한 장르들을 끌어들여 영화를 만든 뉴아메리칸시네마의 별종이었다. 그러 그가 <캐리>나 <분노의 악령>을 통해 주류적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러한 작가들이 갖는 공포와 불안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면 보기의 능력과도 연결된다. 길리언은 내가 보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에 눈을 감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눈을 감음으로써 발생하는 어떤 비전의 과정이다. 눈을 감을 때 어떤 종류의 비전이 열리게 되는가, 이런 새로운 비전이 갖는 힘이 무엇인가를 이 영화는 알레고리처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젊은이들이 에너지를 분출했던 60년대라는 시기를 거친 이후에 영화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대의 자각 능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적 보기의 방식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두 눈을 감음으로써 바라보는 눈 먼 보기의 방식들, 증인적 보기의 방식들과 대단히 유사하다. 경우는 좀 다른지만 클로드 란츠만은 <쇼아>를 만들면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할 때 맹인의 눈처럼 그것을 지켜본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눈을 찌르거나 눈을 감는 것, 길리언이 로빈의 텅 빈 방을 보는 것과 같은 장면들, 그런 식의 맹인의 우화나 맹인적 보기의 방식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새로운 보기의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굉장히 이상한 방식의 공포영화로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맹아적으로 표현되었고, 이는 이후 <드레스 투 킬>, <블로우 아웃>에서 보다 선명하게 표현된다.

 

 

이런 비슷한 시도를 근래 나왔던 영화들 중 토니 스콧의 <데자뷰>(2006)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는 감시적 기제를 통해 과거의 한 순간을 들여다보게되는 설정이 있다. 보기의 힘을 강조하고 그 능력을 이용해 테러라는 하나의 트라우마적 사건을 구제해 들어가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서도 그런 부분을 보여주는데, 두 영화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물이 거대한 하나의 거대한 스크린을 마주한다는 사태이다. <데자뷰>의 덴젤 워싱턴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과거의 트라우마를 보게 된다. 그는 언제나 늦게, 죽음 이후에야 도착해서 희생자를 구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과거의 시간 안으로 뛰어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야기의 설정은 좀 다르지만 이 영화에서, 방대한 양의 기억의 아카이브에 접촉해서 과거의 순간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것, 스크린을 통해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생생하게 접촉해 들어가는 설정들은 길리언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안에 접촉해 하나의 비전을 열어가는 행위와 굉장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60년대의 넘쳐났던 에너지들이 서서히 소멸해가던 70년대 중후반에 그 에너지들이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되기 보다는 오히려 트라우마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영화에서 카사베츠가 연기한 칠드레스는 마지막 순간에 길리언에게 눈물을 흘릴 것을 권하고(이는 감정의 착취적 소비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서 자신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만 길리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잠재되어 있던 폭발적인 에너지의 창조적 전환의 실패와 추락, 그로 인한 고통과 비애에 내장되어 있는 에너지를 다시 파괴적인 힘으로 발휘해 들어가는 것이다. 길리언은 국가기관의 수장으로 존재하는 이 아버지의 몸을 완전히 박살내버리는데, 이것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본다면 그런 식의 에너지를 영화적인 힘으로써 바꿔나가는 것은 비전의 힘이며 그러한 비전의 힘을 배양시켜나가는 것, 바로 여기에 드팔마라는 감독의 이후로의 방향과 그가 고심했던 바, 그리고 이 영화의 매력이 있다. 사유의 착취, 감정의 착취를 만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주류적인 것일 수 있고, 사회 안에서 보자면 시스템적으로 작동하는데, 새로운 보기의 방식들을 만들어가며 그러한 시스템들을 파열해가는 은유로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이 영화가 나로서는 흥미롭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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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바람과 불>의 김경만 감독과의 시네토크 현장

 

지난 8월 18일 열린 “작가를 만나다”는 최근 개봉해 화제를 몰고 있는 <미국의 바람과 불>의 김경만 감독과 함께 했다. 푸티지 영상작업이 제기하는 역사와 인식, 영상의 문제에 대해 나눈 이날의 이야기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대한뉴스 60년 치를 극장에서 보는 느낌이 있다. 몇 가지 영상들은 특정 세대나 연령층마다 기억을 환기시키는 방식이 다를 거란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런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됐고, 첫 번째 장편으로 <미국의 바람과 불>이라는 작품을 만들게 되었는지에 대해 듣고 싶다.

김경만(영화감독): 사실 시작은 오래됐다. 옛날 기록필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략 10년 전 쯤으로, 영화작업을 처음 시작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국가가 직접 제작한 기록필름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바나 국가가 사람들을 향해 주입했던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 말고도 아름답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풍경들도 많이 있었다. 워낙에 한국이라는 곳이 항상 해묵은 문제들을 반복해온 곳이니까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무의미하지 않은 것 같았고, 영화로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 했다. 당시 여러 계획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그 중 하나로, 한국인들의 미국 사랑, 한국이라는 곳이 더 이상 우리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다는 느낌에서 기획하게 됐다.

 

김성욱: 여러 영상들을 보면서 이러한 주제로 압축이 되었을 때는 작업을 끌어가도록 만드는 특정한 영상들이 있었을 것 같다.

김경만: 하나의 영상은 아니었다. 옛날 필름의 어떤 장면 뿐 아니라,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당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떤 변화가 가속화됐다고 느껴졌다. 기존의 공간을 부수고 다시 세운다든지, 예전에는 없던 행사들을 많이 기획한다든지, 영어공용화 정책을 내세운다든지 하는 변화들을 보면서 이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김성욱: 놀라웠던 건 이 영상들의 대부분을 한 사람이 찍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형식적인 면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감독이 직접 찍은 영상들이 국가의 홍보영상들과 조응해 들어가고, 둘 사이에 큰 충돌을 못 느꼈다. 보통 이런 작업을 하게 되면 두 가지 접근이 있을 텐데, 그 중 하나는 실제로 있었던 뉴스영상에 대한 내재적인 비평 같은 것으로, 특정 장면이나 이미지들을 크리티컬한 방식으로 끄집어내어 내레이션을 가한다든가 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미지나 영상들이 무차별적으로 굉장히 비슷하게 묶여, 어떻게 보면 전체가 국가적 풍경을 담고 있는 공식적인 영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김경만: 제 생각은 좀 다르다. 국가가 기록한 필름들은 관습적인 방법으로 찍어내듯이 촬영을 했는데, 제가 촬영한 부분은 혼자 촬영했었고,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져서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어떤 행사의 풍경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뉴스릴은 한정된 시간 안에 여러 꼭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컷이 짧은 데에 비해, 제가 촬영한 소스들은 컷이 길다. 사실 애초에는 둘이 많이 섞이기를 기대하고 계획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기록필름과 촬영분이 그렇게 많이 섞이진 않은 것 같다.

 

김성욱: 특히 후반부에서 얘기하신 톤의 차이가 있긴 하다. 영어마을이나 기독교집회 같은 장면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공간을 지켜보는 듯한 긴 쇼트들이 이전에 국가가 제작한 기록영상들과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어떤 특정한 내용들을 전달하는 영상들이 있고 동시에 그런 푸티지들을 통해서 도달하려고 하는 작가의 측면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작업 안에서 어떤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이 영상들이 누구에 의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제작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영상을 통해 확인하거나 지시할 수 있는가에 대해 굉장히 몰두하기도 한다. 보는 사람 각자가 느낄 수는 있겠지만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런 부분에 관심 갖게 되는 측면도 있을 것 같다. 영화의 후반부에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빈 공간을 보여주고 이어지는 폭격영상은 폭격의 이미지가 전쟁이나 위협 같은 것을 지시하긴 하지만, 영상 자체의 파괴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듯한 느낌도 갖게 된다.

김경만: 마지막 영상에서는 지금의 해묵은 문제의 반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어떤 일탈 같은 것을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솟구쳐 올라가는 장면을 넣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누가 기록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감독들 개개인의 개인성이 드러났다기보다 이런 영상들을 국가가 기록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사운드나 말, 이미지 자체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중요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이 다른 것들과 얼마나 충돌하는지, 실제 혹은 진짜라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있었다.

 

 

김성욱: 영상을 찍고 보여주는 방식 안에서의 파시즘의 기제가 있다. 이 영화에서 후반부에 등장하는 서울 올림픽 게임에서의 투포환 선수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30년대 독일의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장면들을 찍어나가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양식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식으로 70~80년대에 국가가 만들었던 영상을 지배하는 틀이 있었을 텐데, 그 틀이 세련되지는 않았다.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지배적일 수 있었던, 그 집단적 양식의 방식이란 무엇이었을까. 스펙터클한 국가적 미장센을 만들어냈던 부분들에 대한 촬영이 대부분이지만, 그것을 조직화 해나갔던 양식이나 스타일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김경만: 국가가 미장센이나 스타일을 고민했을 것 같진 않다. 굉장히 많이 만들긴 했는데 그런 것에 대해 고민보단, 영상에 담길 어떤 의도나 내용에 치중했던 것 같다. 굉장히 많이 만들길 했는데, 그런 것에 대한 고민보다 의도나 내용에 치중했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리펜슈탈이 만든 것처럼 아름답게 만들지 못했고, 엉성하고 빈틈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식의 영화작업을 알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 같다. 말씀하신 올림픽 장면은 사실 86 아시안 게임의 장면들인데, 그 영상들에서 파시즘보다는 경제적인 경쟁관계와 같은 어떤 국제질서를 제시할 수 있었으면 했다. 바로 그 뒤에 IMF 직후에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지는데, 항상 한국에 대해 얘기할 때 급속한 경제성장 같은 것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김성욱: 국가의 홍보영상들을 영화연출의 측면에서 보면 국가가 만든 홍보영상들은 내러티브가 빈약하고 배우의 연기가 서툴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전두환이 레이건 옆에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쑥스럽고 부담스러운, 어딘가 위축된 듯한 모습이나, 박정희가 미군장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너무나 왜소한 나머지 그들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볼 때의 뭔가 어색한 느낌 같은 것이 있다. 이런 영상들을 보면, 영상이 기능하는 바와 달리 영상 속 인물들이 보이는 어색함이 더 특징적으로 들어오게 된다. 푸티지 영상을 접하게 될 때 작가로서 기록물들의 어떤 가치나 활용성, 매력을 느끼게 되는지 궁금하다.

김경만: 풍경들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박정희가 케네디를 만났을 때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에서 일반적인 쇼트는 사실 이 영화에서 보듯이 다소곳하게 손을 무릎에 얹고 있는 모습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모습이 저로선 좀 더 보여주고 싶었던 쇼트였다. 숨겨져 있거나 덜 알려져 있는 다른 풍경이 좀 더 보여져야할 풍경이라고 생각 했다. 항상 사실이나 현재의 풍경들은 굉장히 매끈하고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완성된 공산품처럼 제시 되는데, 실제의 모습이나 풍경은 절대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순간들이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한국에서 살면서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좀 더 보여주고 싶었다.

 

김성욱: 개인적으로 영화의 첫 장면의 마치 기차의 도착 같은 장면에서, 카메라가 기차레일을 쭉 따라가면서 사람들을 찍는데, 사람들은 기차나 카메라를 바라보는 느낌이 있다.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는다는 것이 반대로 카메라에 자기가 찍힌 걸 보고 있다는 건데, 다른 식으로 얘기하자면 이 영화의 푸티지 전체가 카메라 안에 자기를 어떤 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를 조직화하는 것이고, 이는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찍혀진 영상 안에 찍혀지는 사람이 그것을 의식화해서 무언가를 수행해나간다는 것 안의 기제가 있다. 일종의 접대의 미장센인데, 영화에서도 보면 모두가 접대장면이다. 미국과 관련해서 끊임없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줘야하는지에 대한 총력전의 느낌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후반부에 영어 공용화 관련해서 집중적으로 보여지는 부분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이 있었을 것 같다.

김경만: 영어마을이란 곳이 영어를 떠나서 그 공간 자체가 보여주는 게 굉장히 많다.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매끈한 공간이지만 굉장히 어색하고 비현실적인 공간인데, 그런 것들이 한국이 표상하는 미국이라는 유토피아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공간은 존재하지 않고, 이상한 유령 도시나 롯데월드 같은 곳인데 자꾸 한국정부가 그런 공간을 자신들의 이상향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너무 기이하게 느껴져서 이 영화에서는 아주 기묘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었다.

 

김성욱: 과거의 푸티지 영상, 특히 뉴스보도영상을 통해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작가의 경우 영상의 메시지나 내용 뿐 아니라, 당시에 그런 순간이 기록되어질 때 갖고 있었던 매개성, 영상이 담겨지는 형식과 유통되는 방식, 이런 여러 가지 정황적인 것들을 보게 된다고 생각된다. 푸티지 영상들을 접할 때, 영상과 관련해서 어떤 느낌들을 갖게 되는지 궁금하다.

김경만: 복잡한 느낌이 들고,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보도영상 뿐 아니라, 픽션도 있고, 재연영상도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본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다만 인식의 역사 정도는 흔적으로 남아있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개인의 인식은 분명히 아니고, 한 사회나 국가의 일반적인 인식에 닿아있는 부분인 것 같다. 물론 그 필름에 남아있는 풍경들에서 아름답고 눈길을 끄는 것들도 많지만,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주로 그런 생각들이다.

 

김성욱: 영어마을이나 기도회에서 사람들이 서서히 퇴장해나가는 모습이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무인의 영상을 보면서 과연 대중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생긴다.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큰 관계 안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대중의 집단성을 담아내는 것에 있어서 국가적 홍보영상의 방식을 탈피해나가는 또 다른 방식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 대중을 다큐멘터리 안에서 담아내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김경만: 사실 이 영화가 담으려고 했던 건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월드컵경기장에서 있었던 대형 기독교집회 같은 경우 개개인의 얼굴을 너무 가까이에서 잡지 않으려 했다. 개개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그곳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만이 가능했다.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어떤 식의 인식이 작동하고 있는가에 더 관심이 간다. 물론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는 많이 있는데, 보도영상과는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단지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그런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영화에서 한정 짓는 것 말고, 그것 바깥의 개인의 모습이 훨씬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관객1: 후반부에 대형 기도회도 나오지만,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이 궁금하다.

김경만: 사람들은 자기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거기에 항상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에 대해선 정치라는 게 개입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에서 미국이 어떤 존재인가의 문제는 일종의 어떤 믿음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이 기독교와 많이 겹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전쟁 때부터 시작된 한국사를 주류 기독교 쪽에서는 일종의 구원서사처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관객2: 작업을 위해 굉장히 많은 자료를 봤을 텐데, 자료를 고를 때의 기준이 궁금하다. 그리고 음악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차이코프스키나 바흐를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하다.

김경만: 한국인의 미국사랑, 한국사회가 자기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장면들을 굉장히 많이 모았다. 보여주고 싶은 장면들, 제가 가지고 있는 인식과 맞는 장면을 찾아다녔다. 특히 국가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실제완 다르다는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들을 많이 찾았다. 그런 과정에서 구성을 많이 바꿨었고, 그에 따라 다시 추린 장면들을 재조정 했고, 그런 식의 반복들을 많이 했다. 하나의 명확한 기준을 갖고 선택했다고 말하긴 힘들다. 영화의 음악은 장면들보다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의 장면과 음악을 결부시켜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미국의 대규모 폭격은 남한에서는 거의 예기되지 않는 사실인데, 폭격 아래에 있었던 한국인들이 갖게 되는 여러 감정과 생각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3: 저는 대한뉴스 세대가 아니어서, 왜 한국이 미국을 그렇게 사랑하고 편승해가고 싶어했는가에 대해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젊은 세대에 대해서는 등장하지 않아서, 과거에 대해선 집요하게 추적하는 데 비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현재의 목소리는 담기지 않았다. 앞으로 다른 방향이나 프로젝트가 있다면 알고 싶다.

김경만: 한국이 사실 많이 낡았다. 낡은 문제를 반복하는 것 중 하나가 반공문제 같은 것도 있다. 그것이 물론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세계를 이해해나가려면 계속 어떤 것들을 고쳐나갈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는데, 계속 같은 굴레 속에 갇혀 있어서 한국이 여러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차적으로는 한국사회 안에서 뭔가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막아놨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반복적인 낡은 생각들에 관심이 많이 가고, 다른 작업들 역시 그런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정리: 장지혜(관객 에디터) |사진: 박지연(자원 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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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5일, 우리에게 미지의 감독으로 남아 있는 자크 로지에의 두 번째 장편 <오루에 쪽으로>(1973)가 상영되었다. <오루에 쪽으로>는 바다에서 펼쳐지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카메라에 담아낸 영화로, 마치 극장 안에서 바캉스를 다녀온 것 같은 생생함과 휴가가 끝난 후의 쓸쓸함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영화 상영 후에는 자크 로지에의 초기 단편들과 함께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해 상세히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강연이 열렸다. 그 현장을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아직은 미지의 작가인 자크 로지에의 영화를 처음 소개하는 사람이 저라는 것이 꽤나 즐거운 일이다. 오늘 자크 로지에라는 작가의 기이한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로지에가 만든 단편들의 일부를 보겠다. 로지에가 50년대에 만든 단편 영화를 보면 놀라운 느낌을 받게 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자크 로지에의 단편 영화를 보고 질투심 같은 걸 느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로지에의 <신학기(Rentrée des classes)>(1956)는 트뤼포의 <개구쟁이들>(1957)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나는 로지에의 단편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어떤 학생이 신학기에 학교에 가다 친구의 꼬임에 빠져 냇가에 가방을 던진 후 가방을 찾아서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두 번째로 보여드릴 영화는 <블루진(Blue Jeans)>(1958)이라는 영화인데, 칸에서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두 청년이 여자를 꾀려고 하는 내용이다. 이 두 편의 단편을 보게 되면 자크 로지에가 자연, 바다, 해변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다.

 

로지에의 첫 장편 데뷔작은 <아듀 필리핀>(1962)이라는 영화다. 1959년에 고다르가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들고 나서 제작자가 고다르에게 동료 감독 중에서 괜찮은 감독을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고다르가 추천한 감독이 자크 드미, 아녜스 바르다, 자크 로지에였다. 그 덕분에 제작자가 자크 로지에의 데뷔작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작자는 비용이 덜 들도록 촬영을 짧게 끝내기를 원했지만 자크 로지에는 빨리 찍는 작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로지에는 장편을 총 4편 만들었는데, 근 10년에 한 편 꼴이다. 빅토르 에리세와 더불어 과작의 작가라 불릴 만하다. 그런데 이런 작업방식이 로지에의 대중적 지명도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됐다. <아듀 필리핀> 개봉 당시 극장 관람객은 5천 2백 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다르 영화의 제작자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들을 미국에 배급했는데, 미국의 수입자는 로지에의 영화를 전혀 수입할 생각을 안 했다고 한다. <아듀 필리핀>이 미국에 처음 소개되기까지 10년이 걸렸고, 오늘 보신 <오루에 쪽으로> 역시 프랑스 개봉 후로부터 20년이 지나서였다. 16mm로 촬영된 영상을 35mm로 블로우 업 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한다. 고다르는 로지에를 빨리 찍는 작가라고 소개를 했지만, 사실 로지에는 촬영을 느리게 진행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두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서 작업했고, <아듀 필리핀>에는 4만 미터의 필름을 썼다고 한다. 당시 감독들마다 사용했던 필름의 양을 따지면 샤브롤이 1만 7천 미터, 고다르가 1만 미터 정도였다. 촬영을 굉장히 길게, 많이 한 것이다. <아듀 필리핀>은 현장 녹음이 잘 들리지 않아서 더빙 작업에만 5개월이 더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쓰고 작업한 것이 아니라서 동시녹음이 좋지 않아 후시로 배우의 입술 움직임을 해독하며 녹음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로지에는 그렇게 효율적인 작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돈이 많이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제작자 입장에서 보면 효율성은 많이 떨어지는 셈이다.

 

 

방금 보신 단편 중 첫 번째 단편에서 자크 로지에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로지에의 기본적인 특징은 탈선이라 할 수 있다. 정상적 궤도에서 자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영화사에서 보면 <익사에서 건져낸 부뒤씨> 같은 장 르누아르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로지에는 르누아르의 조감독을 하기도 했다. 정상적 궤도에서 빠져나가는 상황으로, 등교길에서 갑자기 책가방을 물에 던지면서 꼬마는 자연적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 어린아이의 모험은 우연히 던져진 가방에서 시작해, 그 가방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그런 점에서 르누아르적인 탈선이 있다. 로지에는 르누아르의 계승자이자, 로지에 이후의 작가로 보면 키아로스타미, 이오셀리아니의 선구자격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자연의 시냇물의 아름다움은 그 물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장애물과 만나며 굴절되는 데 있다. 직선의 움직임도 가능하지만 그건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라고 말했다. 지그재그 3부작 같은 영화가 <신학기>와 비슷하다. 이런 영화들이 강력하게 환기시키는 것은 삶의 영역에서 우회로를 해 나가는 것이다. 이들 영화는 지그재그로 진행되는 사건을 그리는데, 그때 삶의 근원적 진실에 훨씬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렇게 정상적 궤도에서 탈선해가는 경향이 로지에에게 시대와의 불화성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다. 즉 상업적 효율성에서 보면 영화를 찍기 전에 시나리오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 작품을 만들어 나가고 사전적 준비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는데, 로지에는 늘 탈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경향이 대부분 휴가나 바캉스 영화라는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휴가의 감독, 그리고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화 제작에서도 너무 오래 휴가를 떠난 것이다(웃음). 바캉스의 감독이라는 점에서 자크 로지에는 에릭 로메르와 비슷하지만, 로메르는 굉장히 효율적으로 1년에 한두 편씩 영화를 만들었다. 프랑스 평론가 장 두셰에 의하면, 자크 로지에는 상업적 규칙을 지키지 않았고, 그 어떤 규칙도 지키지 않으려 했던 작가로 표현되고 있다. 자유로움을 좋아했다는 점이 그의 영화를 돋보이게 만들지만 제작의 어려움도 낳은 것이다.

 

 

로지에의 두 단편과 <오루에 쪽으로>를 보면 그런 점이 느껴진다. 아이가 물뱀을 쫓아가는 장면처럼 정상적 궤도에서 일탈해 나간다는 건 바깥 저편으로 나가는 것이자, 거기서 낯선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일반적인 영화가 갖고 있는 규칙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이야기적이라기보다 몸짓, 말투, 웃음소리들, 이상한 제스처들, 다양한 소리들로 가득 차있는 영화에 가깝다. 그래서 동시대적으로 보면 존 카사베츠 영화와 비슷하다. <오루에 쪽으로>는 카사베츠의 <남편들>(1970)의 여성적 버전 같다. 야생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연관성을 찾아보면, 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1987)의 첫번째 에피소드와도 비슷하다. 로메르도 이런 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상적 궤도에서 많이 탈피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레네트>는 예외적으로 많이 이탈해있는 영화다. 로메르의 바캉스 영화나 자크 로지에의 바캉스 영화는 그런 식으로 노출된, 무의식적인 야생성(savage)과 만나는 것이 특징이다. <오루에 쪽으로>에서 굉장히 길게 나오는 보트 타는 장면은 그런 느낌을 준다. 요즘으로 보면 거의 3D 체험이 가능할 정도다. 그렇게 자연과의 만남이라는 사건들이 있다. 그런데 카메라가 자연과 만난다는 것, 바캉스를 영화로 찍는다는 것 외에도, 그런 야생성을 영화의 내부로 비집게 들어오게 하면서 영화를 내부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로지에의 또 다른 특징이다. <오루에 쪽으로>를 보면 인물들이 자연적 세계로 나가는 것도 있지만, 바깥의 자연이 내부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침입이 있다. 가령 집 안에 물고기, 장어가 돌아다니고, 그 때문에 내부의 소동이 벌어진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영화적 사건으로 보자면, 그것은 카메라가 찍는 자연적 대상으로 배경을 찍어 나갈 때 영화가 갖는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들을 겪는다는 것이다. 자연적 세계, 굉장히 낯선 세계는 완벽히 컨트롤 불가능하고 여기에 영화가 들어가게 되면서 영화의 진행 경로가 자연스럽게 여러 우회들을 거쳐나가게 된다. 트뤼포는 <아듀 필리핀>이나 <오루에 쪽으로> 같은 영화가 누벨바그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루에 쪽으로>는 말 그대로 파도wave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0여 분 간 요트의 장면은 누벨바그란 게 뭔지 그대로 보여준다. 자크 로지에는 어떤 면에서 순항의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적 세계와의 만남이라는 것은 세계의 풍부함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위한 것이고, 카메라 앞에 오는 삶의 역동성을 직접적으로 영화가 담아내는 계기를 이루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 소수의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동시녹음, 올 로케이션 현장 안에서 영화의 규칙성을 탈피해 나가는 과정들을 느낄 수 있다.

 

 

로지에의 두 번째 단편 <블루진>은 자크 로지에의 인물들의 출발점 같기도 하다. 로지에의 인물들은 고독하고 위약한 인물들이다. 똑같은 바캉스의 인물을 그려도 로메르의 사람들은 자기 논리에 빠져있고 자기변명, 자기합리화가 분명하다. 그들은 결코 자기 태도를 바꾸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이상한 궤변을 부린다. 그런데 로지에의 인물들은 멜랑콜리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이들은 종종 집단으로 구성된다. <블루진>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하고 <아듀 필리핀>에는 셋, <오루에 쪽으로>는 여자 셋 남자 둘이 나온다. 그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함께 노니는 것이다. 현대적인, 도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반대로 규칙적 세계에서 일탈해나가는 상황에서는 이오셀리아니의 영화가 그렇듯이 같이 노래 부르고 와인 마시고 떠돌아다니는 등 의 집단성이 발휘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오루에 쪽으로>도 그렇고, 자크 로지에 영화에서는 연인보단 동성 친구끼리 나오는 경우가 많다. 도시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자연적 세계에서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흥취를 영화가 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흐름과 하모니가 있다. 그런데 <오루에 쪽으로>의 결말이 굉장히 쓸쓸해 보이는 건, 그 하모니가 깨지는 과정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관객들은 세 여자의 각각의 리듬을 잘 모른다. 그러다 카메라가 각각의 인물을 따로따로 보여주는 방식에서 조금씩 그들은 개별화가 된다. 대표적인 장면은 모두 모여 음식을 먹던 중 조엘이 꺄린과 패트릭이 이야기하는 걸 지켜보는 부분이다. 그것도 모르고 질베르는 계속 엉뚱한 얘기를 하고, 조엘은 꺄린이 패트릭과 내일 배를 타러 간다는 사실에 좀 짜증이 나 있는 상태다. 그때부터 영화에서 균열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고, 일탈적인 것의 집단성이 무너져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것이 이 영화를 좀 쓸쓸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오루에 쪽으로>는 시대성을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있다. 즉 우리는 세 여자가 갖고 있던 집단성이 점차 괴멸되어가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영화가 직접적으로 지칭하고 있진 않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67~68년의 젊은이들의 집단적 열기가 완전히 빠진 이후에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기운의 쇠락이 보이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자크 로지에는 68혁명의 젊은 기운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히피 유토피아의 쓸쓸함을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이후에 나올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물론 이 작품이 시대적 감각들을 정치적이나 사회적 주제 안에서 드러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형식과 젊음에 대한 태도는 동시대적인 쓸쓸함에 대한 느낌이 있다. 영화에는 저항적인 음악을 만들었던 공(GONG)이라는 락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밴드의 사이키델릭한 음악이 영화의 서두와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런 점에서 젊음의 소멸성과 그에 대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가 사라지는 시간을 담아냄으로써 그 시간들을 보존하는 기능도 하기 때문에, 쓸쓸한 지난여름의 기억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럼으로써 보존되어 있는,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의 보존 같은 것도 있다.

 

 

로지에는 “나는 뤼미에르처럼 영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적 상태를 기록하는 상태로서의 영화를 선호했다. <오루에 쪽으로>를 보면 그런 미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바캉스 영화인데, 바캉스라는 건 자연적 세계 안에서 사람들을 노출시키고 직접적이고 투명한 것들을 드러낸다. 여름의 바캉스에서 공간, 상황들의 투명함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투명하게 드러내게 되는 과정들이 보인다. 직접성이나 투명성이란 말은 어떤 해석의 골조나 설명들로 연결되지 않고 관객이 직접 이미지와 접촉시켜 나가는 가능성을 가진 작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경험의 회복으로도 볼 수 있다. 다른 매개들을 거쳐 해석하거나 이야기를 이해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현실과 접촉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는 파졸리니의 영화를 두고 베르톨루치가 했던 말, 즉 영화가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과정들을 묵격하는 것 같은 기쁨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를 발견하는 것 같은 기쁨, 사람 혹은 사물과 접촉하는 원초적인 상태의 경험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정리: 송은경(관객 에디터) 사진: 황초희(자원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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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8일, 프랑수아 트뤼포의 <사랑의 도피> 상영 후 “앙투안 드와넬의 모험”이란 주제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번 시네토크는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사랑의 도피>로 마무리되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전반적인 이야기와 트뤼포의 영화세계에 대한 것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함께 보며 진행됐다. 여기에 그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이 영화는 앙투안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부부의 거처>로 트뤼포는 드와넬 시리즈를 마감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동료 감독 한 명이 코펜하겐의 한 극장에서 2시에 <400번의 구타>로 시작해 8시에 <부부의 거처>로 끝나는 '드와넬 시리즈'를 연속 상영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트뤼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시리즈를 한 편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편 더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부부의 거처>의 말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고, 그래서 작정하고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행복하게 결말을 맺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거의 10분 이상 과거 드와넬 시리즈의 영화 클립을 사용했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400번의 구타>로 시작한 트뤼포의 영화적 특징이 가장 많이 녹아들어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트뤼포의 영화를 드와넬 시리즈를 이야기하려 한다.

 

이 영화의 시작은 아침을 맞은 두 연인의 아침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뤼포 영화가 그러하듯 성애의 장면은 없다. 사소한 순간이지만 처음의 장면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두 연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중간에 에펠 탑이 보인다는 것이다. <400번의 구타>의 첫 시작이 에펠 탑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왜 에펠탑인가? 트뤼포는 유년기에 거리를 방황하고 돌아다닐 때 에펠 탑을 중심 기점에 두고 길을 찾았다고 한다. 트뤼포의 영화 대부분에는 그런 기억 때문인지 언제나 에펠 탑이 나온다. 이 영화는 외부 풍경으로 에펠 탑이 보이지 않고, 내부의 공간에 자리잡혀 있다. 굳이 말하자면 <400번의 구타>가 바깥으로 떠도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안으로 들어오는 영화, 내향적인 영화, 내부로 향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완결편이기에 영화 곳곳에 과거의 장면을 활용하고 있다. 몇 가지 플래시백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첫 번째 플래시백은 앙투완과 부인이 이혼을 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를 줌인하면서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드와넬 시리즈는 드와넬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영화에 오면 드와넬 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플래시백이 사용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앙투안 드와넬의 삶을 복수적인 시점으로 보고 있는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두 주인공이 닮았다. 베르트랑은 돈 주앙 같은 인물이지만 여자를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사랑한 남자로, 두 사람의 캐릭터가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대신 차이는 있다. 베르트랑이 외향적이라면 앙투안은 트뤼포와 비슷하게 내향적인 인물이다.
 
플래시백이 활용되는 것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플래시백은 기차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기차의 움직임과 더불어 과거로의 시간이 흘러간다. 기계의 운동은 앞으로 향하고 그 가운데 앉혀진 사람들은 과거의 시간을 상기한다. 운동과 시간이 결합되어 있다. 운동성은 기제들, 즉 기차나 자동차가 있고 필름의 움직임이 과거의 시간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과거의 플래시백을 실제로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이 과거에 출연했던 영화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사실은 기록된 과거를 다시 되돌아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영화에서 플래시백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 안에서 있었던 어떤 심상이 펼쳐져 나가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과거에 촬영된 필름의 릴이 다시 펼쳐져 나가는 플래시백이다. 절차적으로는 같지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질료가 트뤼포가 이미 십여년 전에 촬영한 필름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라는 시간이 철저하게 물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물질적인 사물, 필름, 사진 같은 것들을 통해서 과거라는 시간이 환기되어 간다.

 

 

 

 

영화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소설로서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가려고 했던 드와넬의 이야기다. 과거에 영화로 봤던 그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픽션(소설)이라는 것을 사용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과 소설에는 차이가 있다. 이 영화의 맥락 안에서만 보자면, 앙투안 드와넬에게 있어 소설은 자신의 삶과 인생을 회고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소설이라는 것을 통해서 변경해가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근거로 해서 작품을 만들어나가기에 자기의 삶을 조금 윤색하거나 각색해나가는 것이 가진 창작성의 문제도 담겨져 있다. 동시에 그것은 드와넬 시리즈라는 것 자체가 트뤼포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자전적 성격의 한계성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어떻게 삶과 영화를 결합하는가의 문제, 이것은 트뤼포를 위시한 누벨바그 감독들의 공통된 질문이었다. 고다르와 트퓌로를 비교하자면, 고다르가 삶과 영화를 원 플러스 원처럼 플러스 결합했다면, 트뤼포는 마이너스로 했던 것 같다. 즉, 삶에서 빠진 부분을 영화로 메꾸려 했던 것 같다. 삶에서의 부족분을 삶에서 회복시킬 수 없었기에 영화라는 것으로 대치시켰다고 볼 수 있다. 고다르에게 삶과 영화가 대등했다면, 트뤼포는 영화가 삶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영화에서 앙트완이 소설을 쓰는 창작 행위의 동기가 트뤼포의 그것처럼 삶의 부족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드와넬이 어째서 소설가가 됐는가, 혹은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이 왜 소설가가 됐는가를 생각한다면 이런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정에서 재판관인 여자를 쳐다보는 장면의 플래시백이 있다. 여자의 안경을 쳐다보는 순간, 클로즈업이 되면서 <부부의 거처>에서 크리스틴의 모습을 회상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회상이라는 것을 특정한 사물, 사진, 필름 등을 경유해서 진행되는, 회상의 물리성이라는 프로세스를 거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400번의 구타> 이후의 드와넬 시리즈 전체를 봤을 때, 드와넬의 직업이 어떤 변천을 거쳤는지를 유심히 보면 드와넬이란 인물과 직업이라는 게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드와넬이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그러면서 소설가가 된다. 예술적인 표현들과 표현의 매질, 즉 물질적인 질료성의 프로세스들을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트뤼포가 매진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콜레트가 기차 안에서 소설을 읽어나갈 때 책과 과거의 회상 장면이 오버랩되어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 충. 과거에 필름으로 찍혀진 것, 즉 이미지와 활자화된 문자와의 충돌이 있다. 자전적이 소설과 자기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것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이다. 이 둘이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되어 있다. 트뤼포의 영화에서는 오버랩, 디졸브, 아이리스 등의 장면들이 많다.

 

소설 그 자체와 나중에 소설을 읽으면서 이 여자가 떠올렸던 자신의 과거의 기억이 충돌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필름으로 찍힌 것과 회상, 이미지라는 것과 활자화된 문자가 같이 충돌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은 자전적인 소설을 쓴 것인데 자기의 이야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인 이미지로 오버랩되는 방식으로 장면화된다. 트뤼포 영화를 보면 디졸브, 오버랩, 아이리스 같은 방식의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표현적 방식 안에서 영화적 디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나간다. 이런 특징들은 누벨바그 작가군 중에서도 트뤼포가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런 방식을 자주 사용했던 이유는 장 콕도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기차의 플래시백 장면에 이어 앙투안이 자신이 신작소설의 구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특별하다. 그 전까지 소설은 자신이 겪어왔던 것에 근거해서 구성한 픽션이라면, 여기서의 신작은 자기가 떠올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나중에 보면 자기가 경험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자신이 경험한 것이냐 아니냐라는 (진위성) 문제보다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사진이 꽤나 흥미롭다. 한 남자가 사진을 찢어버려서 찢어진 사진을 앙트완이 줍게 되고, 조각난 것을 붙여서 그가 여자를 찾아다닌다는 설정인데, 이것이 영화에서 크게 작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에서 얼굴은 모른 채 단지 다리만 보고 빠져서 그 여자를 쫒아 다니게 되는,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베르트랑의 추적의 삶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찢어진 사진을 포토몽타주 하듯이 붙여서 완성된 형태로 사진 속 여자를 찾는 행위의 여정이 영화의 마지막에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트뤼포 영화에서 사진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에서 베르트랑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만났던 모든 여자들과 그 여자들이 보낸 편지를 보면서 그것을 근거로 소설을 쓰게 된다. 과거의 기억을 사진에 의지해 떠올리면서 추억을 완성해나가는 행위로 소설을 쓴다. 말하자면 사진이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흔적이고, 무언가를 창조해나갈 수 있는 물리적인 근거점이 된다. 다른 한편, 사진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되어 있다. 그것을 일종의 포즈이다. 그래서 달리 말하자면 트뤼포의 영화가 (영화라는) 운동성과 (사진이라는) 정지성, 이 둘 사이를 오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충돌은 앙투안의 연애적 삶에도 관통한다. (사진으로 표현된) 정지성이라는 것이 영원하고 불변적인 사랑을 말한다면, 움직이는 (영화의) 끊임없이 가변적인 연애가 있다. 끊임없이 여자를 바꿔가는 앙트완의 연애는 굉장히 부지런해야 하는 삶이고, 앙투안은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내내 열심히 뛰어다닌다.

 

 

 

 

보시는 것처럼 콜레트와 관련한 장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사진이 있다. 하나는 증거사진이 되는 범인의 프로필 사진이다. 이것은 <400번의 구타>에서의 앙투안이 타자기를 훔쳐서 도주하다가 경찰서에서 수감되면서 사진을 찍을 때와 유사한 종류의 사진이다. 넓게 이야기하자면, 트뤼포의 영화 그리고 드와넬 시리즈 영화에서 사진은 체포, 구금, 포획, 정지와 연결된다. 정지라는 것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라면, 이는 트뤼포의 삶에서 구속과 관련되는데 이는 감옥이나 군대, 학교와도 같은 공간과 연결된다. 트뤼포의 삶 자체가 구속과 탈주를 계속 반복해왔다. 사실 20대까지 트뤼포의 삶이라는 것은 구속된 상태에서 탈주의 욕망을 끊임없이 반복해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벨바그의 시절을 거치면서 구속에서의 탈주 욕망이 한편으로는 내부화되는 운동으로의 변화가 있다. 즉, 가정을 꾸리는 것, 트뤼포에게는 두 번째 가정을 꾸리는 것, 아이를 만드는 것, 혹은 앙투안에게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 이런 삶이 반복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부로 움직이는 운동으로, 바깥으로 나가려는 운동과 충돌한다. 콜레트가 사건 파일을 뒤적거리다 발견하는 두 종류의 사진, 즉 살인 사건의 사진과 드와넬이 흘린 여자의 사진은 모두 사진의 본성, 즉 무언가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은 구속과 체포, 탈주를 반복한 트뤼포를 구제한 앙드레 바쟁의 영화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라는 글에서 바쟁은 무언가의 흔적, 성화성과도 같은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 포토몽타주와도 같은 여인의 사진은 그런 트뤼포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모든 작가들은 영화적 역량을 무엇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그 세계가 달라진다. 즉, 영화적 파워의 본성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트뤼포에게 영화의 강력한 힘이란 구속과 탈주를 반복한 그가 영화관에서 경험한 것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아이가 영화관의 어둠에서 무언가를 지켜봄으로 해서 자기를 투사할 수 있었고, 그 영화관의 낯선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응시, 바라보는 사람들과의 낯선 사람들과의 감정적 연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두번째 측면이 트뤼포의 영화를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갔다. 트뤼포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고려한 영화다. 그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 해도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면 다른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전제해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트뤼포는 후자의 감독이 되려 했다. 동시에 트뤼포의 인정욕구가 있다. 이는 영화의 투사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자신을 인정해가는 것, 자신을 이해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트뤼포의 영화는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영화에 기입된다. 내가 영화를 본다는 조건이 영화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실현한 사람은 히치콕이었다. 특히 <이창>에서 그러하다. 트뤼포가 히치콕을 끌어오는 것은 그가 히치콕의 형식을 빌어온 것도 있지만 트뤼포 자신의 영화적 경험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트퓌로의 영화에서는 그래서 본다는 것과 관련한 문제, 특히 시점의 문제가 언제나 특이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시점의 문제가 운동성을 갖게 되면 추적이 된다. 그것이 연애 영화에서는 한 남자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이런 형식이 만개된 작품이 <도둑맞은 키스>나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라고 볼 수 있다. 영화 관람의 경험이 영화 안에 녹아들어갔을 때 표현되는 두 번째 방식은 그의 영화 안에 언제나 그림자적인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메인 캐릭터를 닮은 분신적 존재가 영화 안에 이중으로 등장한다. 그 존재들은 언제나 익명적이거나 대단히 낯선 사람들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언제나 앙투안과 짝패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도둑맞은 키스>에서 크리스틴을 쫓아다니는 이상한 남자가 있다. 그런 인물들과 앙트완이 공유하는 감정이 있다. 이 부분이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관객의 행위 자체를 영화 안에 기입시켜 버리는 트뤼포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트뤼포 영화는 물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라는 것은 기계적인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필름이 돌아간다, 프로젝션에 의해 스크린에 이미지가 투영된다는 식의 기계적 매커니즘과 기계적 매커니즘의 작동, 프로세스에 따라서 감정이라는 것들이 전개되어 간다. 트뤼포는 이런 전제를 망각하지 않고 언제나 감정의 전달보다 중요하게 보고, 기계적 프로세스와 감정의 프로세스가 언밸런스하게 되는 것이 이들의 낭만적 연애를 어렵게 만들어가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의 피아노 건반의 기계적 움직임과 연주자의 감정의 언밸런스가 있다. <도둑맞은 키스>에서의 파리의 속달체계에 의해 편지가 전달되는 것과 낭만적인 편지도 그러하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앙트완이 무언으로 편지를 직접 전하는 것은 감정의 표현과 감정을 담는 표현의 매체가 같은 속도로 진행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도 마지막에 그런 순간이 도래하게 된다.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샤를르 드네는 한 여자에서 다른 여자로 매번 갈아타는 남자의 실제 이유가 너무 근접해지는 것에의 두려움, 상처받는 것에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트뤼포의 친밀함의 다른 측면이다. 즉, 트뤼포적인 인물들은 상황을 (연애적 사건을) 컨트롤하기 위해, 그리고 그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친밀함에 저항하는 측면이 있다. 

 

<400번의 구타>에서 극장의 사진을 훔쳐갔던 앙트완은 드와넬 시리즈의 마지막인 <사랑의 도피>에서는 남이 버린 사진을 붙여서 그 사진의 여자를 찾아가 사랑을 완성한다. <사랑의 도피>의 마지막은 <400번의 구타>의 놀이공원에서의 장면과 앙트완이 현재의 여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병치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트뤼포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앙트완은 놀이 기계의 움직임의 가속화로 벽면에 정지된 것처럼 붙어버린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회전차의 구조는 영화의 전사인 조에트로프zoetrope와 대단히 비슷하다. 정지된 사진, 움직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구조, 이러한 (영화적)기제를 동원해서 삶을 반추해가는 것이 드와넬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 김고운(관객에디터) | 사진: 김아라(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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