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방랑자

- 채플린의 후기작 <라임라이트>와 <뉴욕의 왕>을 중심으로



<라임라이트>(1952)와 <뉴욕의 왕>(1957)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중 비교적 덜 언급되는 후기작에 속한다. <라임라이트>에 이르러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찰리 채플린 고유의 캐릭터, 무엇보다 얼굴의 변화다. 중절모와 지팡이 그리고 콧수염은 방랑자 찰리 캐릭터를 완성해 온 구성물이다. 후기작에서 중절모와 지팡이는 여전하지만, 인중을 뒤덮은 짙은 콧수염은 찾아볼 수 없다. 콧수염과 함께 짙은 분장도 사라졌다. 분장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희끗한 머리카락과 얼굴을 뒤덮은 주름이다. 콧수염을 잃어버린 중절모와 지팡이는 이제 늙음의 한 표지가 된다.

방랑자로 정의되는 찰리 채플린의 고유한 캐릭터는 거리를 하나의 무대로 생성시키는 힘을 지녔다. 찰리 채플린의 행위는 도시 곳곳을 캐릭터화시켰다. 단적으로 <모던 타임즈>에서 나사를 조이는 강박관념을 가진 찰리는 거리 곳곳에 숨겨진 동그란 나사마저 비범하게 만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많은 일상 도구들은 새로운 표정을 찾았다. 찰리의 얼굴이 변했다는 것은 곧 도시의 얼굴이 변했다는 뜻도 된다. 찰리 채플린이 분장을 지운 채 카메라 앞에 서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분장을 지운 도시의 민낯을 드러내겠다는 선언이다. <라임라이트>와 <뉴욕의 왕>에서 캐릭터로서의 찰리 채플린 대신 인간 찰리 채플린이 등장한다. 거리의 악사의 존재가 여전히 거리를 무대로 만들고 있지만, 그 공기는 그의 전작에서 보여줬던 활력과는 다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는 늘 웃음과 애잔함이 공존한다. 그의 웃음은 묘한 페이소스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늘 얼마간의 슬픔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임라이트>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중 가장 비애감을 조성하는 영화일 것이다. 이때 비애감은 무엇보다 나이듦에 대한 비애감이다. 나이듦과 죽음은 ‘더는 어쩔 수 없는’이라는 감정을 동반한다. <라임라이트>에서 찰리 채플린이 연기하는 칼베로는 그 자체로 연기자 찰리 채플린을 그대로 반영한 인물이다. 칼베로는 이제는 한물간 코미디언이다. 모든 사람이 칼베로가 누구인지 알지만, 가까운 친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가 칼베로임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어쩌면 평생 캐릭터로 살아온, 그래서 캐릭터의 옷을 입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찰리 채플린의 실제 삶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후기작에서 찰리는 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으로 인해 변두리로 쫓겨난 부랑자가 아니다. 그는 허름하지만,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를 변두리로 내모는 것은 자본이 아닌 시간이다. 그가 방랑하는 거리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것으로서의 찰리 채플린의 얼굴이다.


<라임 라이트>에서 찰리 채플린의 얼굴이 가장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칼베로가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는 장면이다. 잠든 칼베로의 머리맡에는 그의 전성기 시절 초상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 인물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지만, 관객에게 익숙한 찰리 캐릭터는 아니다.) 초상사진으로 줌인하면 곧이어 무대 위에 칼베로가 전성기의 모습 그대로 등장해 ‘펠릭스와 헨리, 재주 부리는 벼룩들’이라는 제목의 무대 연기를 펼친다. 이 무대극은 벼룩을 의인화시키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벼룩을 형상화한 원맨쇼다. 눈 굴림만으로 손등 위를 점프하며 옮겨 다니는 벼룩들은 결국 칼베로의 몸속에 숨어든다. 칼베로가 벼룩을 떼어내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몸을 흔들며 무대를 퇴장하는 것으로 극은 끝난다.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커튼콜을 위해 다시 무대에 등장해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던 그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진다. 놀람과 슬픔이 뒤섞인 채 연신 객석을 두리번거리는 칼베로의 얼굴로 카메라가 줌인한다. 이어 칼베로의 시선숏에 비친 객석은 텅 비어 있다. 다시 칼베로의 멍한 얼굴로 돌아온 고정숏은 그대로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나 침대에 멍하니 앉은 칼베로의 얼굴로 연결된다. 이때 찰리 채플린의 텅 빈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채플린은 이것을 꿈 이미지로 만들면서 한편으로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현실의 숏 역시 ‘깨어남’을 표시하는 단절된 컷이 아닌, 하나로 이어지는 오버랩을 사용함으로써 꿈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비애감을 강조한다. 이 얼굴은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캐릭터들이 모두 담긴 얼굴이자, 그 얼굴의 의미를 송두리째 바꾸는 얼굴이다.



<뉴욕의 왕>(1957)


<뉴욕의 왕>에서 찰리 채플린의 또 다른 인상적인 얼굴이 등장한다. 이번에도 웃을 수 없는 얼굴이긴 하나 그 이유는 전작과 달리 희극적인 것에 가까운데, 성형 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은 늘 비판하는 대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왔다. <모던 타임즈>에서 그는 공장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소외시키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기꺼이 거대한 기계 속으로 밀어 넣었다. <뉴욕의 왕>에서 찰리는 자신의 얼굴을 바친다. 그리고 후자의 결과가 더욱 참혹하다. 왜냐하면 그는 반강제적으로 웃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TV쇼 진행자인 메리 앤의 유혹과 자본의 궁핍함 때문에 샤도프 왕은 그토록 혐오하던 TV 출연에 적극적이 된다. 그러면서 화면에 잘 나오기 위해 성형의 유혹을 받고 결국 수술대에 오른다. 눈, 코, 입을 전면적으로 손대는데 수술 부작용 부위가 입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입은 얼굴에서 웃음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표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수술 부위를 터뜨리지 않기 위해 웃음을 참아야만 한다. 그러나 하필 메리 앤과의 데이트 장소에서 코미디 쇼가 진행된다. 연기자의 능청스런 무언극에 모든 사람이 웃음을 터뜨린다. 웃지 않는 것은 샤도프뿐이다. 샤도프는 자꾸만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돌아앉는다. 그러나 결국 웃음이 터지는 동시에 입술의 실밥이 터지는 참사가 일어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찰리 채플린은 우선 성형수술을 비판하고 있지만, 크게는 TV라는 매체에 대한 논평으로도 보인다. TV를 보는 행위는 결국 입을 꿰맨 채 웃는 것이 아닐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어색한 표정이 TV에 대한 찰리 채플린의 입장을 대변한다.


텔레비전은 늘 변화를 원한다. TV는 변화하는 대중의 관심을 반영하고 이를 고양하는 매체이다. <뉴욕의 왕>에서 특히 TV 매체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에서 채플린은 혁명가들의 쿠데타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한 왕 샤도프로 등장한다. 그러나 빼돌린 국고를 다시 수상에게 도둑맞으면서 호텔 방에 갇힌 빈털터리 신세가 된다. 그런 그에게 줄기차게 초대 메시지를 보내는 이가 있었으니 크롬웰 부인이다. 그녀가 자신을 방송에 출연시키기 위해 수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던 왕은 매번 초대를 거절하지만, 옆방 투숙객 메리 앤의 노골적인 유혹에 굴복해 결국 파티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나 파티 현장은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생방송 리얼리티 쇼였다. 샤도프의 기행은 그 자신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국에 생중계된다.

TV가 인간의 일생생활에 얼마나 가까이 들어와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호텔 욕조 한쪽 벽에 설치된 TV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는 브라운관 속 인물의 얼굴을 바스트숏으로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클로즈업된 얼굴의 사람은 마치 욕조 벽 속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얼굴만 드러내놓은 것처럼 보이며, 언제라도 TV를 뚫고 나올 듯 보인다. 욕실을 잡을 때 카메라는 늘 TV가 잘 보이는 방향에 놓여있다. 이는 사람들이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TV가 사람을 응시하는, TV가 본래적 역할을 초과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예견한 것이다. TV 속에 클로즈업 된 사람의 얼굴은 그대로 <모던 타임즈>에서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모니터 속에 나타난 사장의 얼굴과 겹친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발명된 기술이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전작의 자각이 <뉴욕의 왕>에서 역시 이어진다.


찰리 채플린의 TV에 대한 비판의식을 이어받은 작품은 피터 위어의 <트루먼 쇼>(1998)다. 메리 앤은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도 TV 녹화 중이라는 사인을 받으면 갑자기 광고 멘트를 읽기 시작한다. 그녀의 모습은 이로부터 40여 년 뒤에 만들어진 <트루먼 쇼>의 상황과 그대로 닮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 생애를 TV 속에서 살아가던 남자 트루먼의 아내(실제로는 아내 역할의 배우)는 광고 시간에 맞춰 집안에 놓인 물건에 대한 광고 멘트를 읊는다. 이 작품은 TV, 광고가 삶에 침투해 들어왔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다. <뉴욕의 왕>은 이제 찰리를 변두리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변화하는 대중의 관심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고 찰리 채플린이 늘 무언가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방랑은 늘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관계 맺기의 영화가 아닌 적이 있었을까. 멜로를 전면에 드러낸 <시티 라이트> 같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흔히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정리되는 <모던 타임즈> 역시 산업화 시대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찰리와 가난한 소녀의 사랑은 생각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방랑자 찰리는 거리의 부랑자, 가난한 자 등의 삶과 만나는데 <라임라이트>에서 그가 관계 맺는 인물은 심리적인 외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가난한 발레리나 테리다. 테리는 자취방에서 가스를 열어 놓은 채 자살을 시도하다 이웃 남자 칼베로에 의해 구출된다.



<라임라이트>(1952)


테리는 칼베로와 앙상블을 이루며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을 보여주는 외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은 극에 무성영화의 기운을 불러오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테리의 무용극은 대사가 아니라 춤을 비롯한 신체적 표현과 음악으로만 이뤄진 일종의 무언극이다. 테리에 대한 칼베로의 헌신은 무성영화에 대한 찰리 채플린의 애정이기도 하다. <라임라이트>에서 발레리나 테리의 성공과 칼베로의 사실상의 실패는 무성영화에서의 성공과 유성영화에서의 실패라는 자각으로도 읽힌다. 테리는 무성에 가까운 몸짓으로 사람들과 성공할 수 있었지만, 말로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칼베로는 실패한다. 칼베로의 실패는 그야말로 유성영화에 대한 찰리 채플린의 실패이기도 한 것이다. 칼베로는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무언의 슬랩스틱으로 돌아간다. 이 공연으로 칼베로는 사람들의 호응을 받는다. 그의 퍼포먼스는 오케스트라 쪽으로 몸을 던져 북 속에 엉덩이가 박힌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칼베로는 이 퍼포먼스로 인해 척추를 다쳐 죽어간다. 무성영화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이지만, 유성영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 이것이 북 속에 몸이 낀 채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로 표현된다. 이를 통해 유성영화와 무성영화 사이에 끼인 존재로서 자신을 투영한다.


침대에 누워 죽어가면서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테리를 바라보는 칼베로는 극의 초반, 자살을 시도했던 테리와 극중극에서 죽어가는 연기를 펼치며 침대에 누워있던 테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무대 위에서 죽어갔던 테리처럼 무대 밖에서 칼베로는 죽어간다. 칼베로의 모습을 테리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은 온당하나, 여기에는 남녀관계보다 더 깊은 것이 내재해 있는 것 같다. 죽어가는 칼베로를 배경으로 힘차게 춤추며 도약하는 테리의 모습은 그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칼베로는 테리의 어두운 트라우마를 가져가면서 테리를 온전하게 탄생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칼베로와 테리의 관계는 채플린이 몇몇 작품에서 보여준 소녀와의 절절한 멜로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키드>처럼 버려진 아이와 의붓아버지가 관계 맺는 영화와도 연결된다.


채플린은 <뉴욕의 왕>을 통해 다시 한 번 아이와의 호흡을 자랑한다. <키드>의 존 역시 연약함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지만, <뉴욕의 왕>의 루퍼트는 괴팍한 구석이 있다. 루퍼트는 무정부주의자로, 모든 형태의 권력을 부정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괴짜 소년이다. 샤도프 왕은 개교를 앞둔 진보 학교 방문 행사 도중 소년 루퍼트를 만난다. 루퍼트는 독재를 비판하면서도 독재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행동으로 샤도프의 입을 막아 버린다. 기계를 비판하기 위해 기계 속으로 들어갔듯이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은 독재를 비판하기 위해 독재자가 되었고, 루퍼트 역시 그렇다. 루퍼트 역은 채플린의 아들인 마이클 채플린이 연기해 더욱 의미를 더한다. 이 만남으로 인해 샤도프는 루퍼트를 가장 불쾌한 소년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가 공산주의자와 결탁한 혐의로 수감되자 루퍼트는 고아와 다름없는 신세가 돼 샤도프를 찾아온다. 샤도프의 호텔 앞에서 눈을 맞은 채 벌벌 떠는 루퍼트를 외면하지 못하고 그를 집으로 들인다. 그리고 이것은 채플린이 관계 맺는 대상이 넓고 깊어졌음을 시사한다.


<라임라이트>는 그의 관계 맺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찰리의 방랑은 늘 부랑자, 빈민 등 하층민들과 만나는 여정이었다. <라임라이트>에서 채플린이 관계 맺는 대상은 인간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찮은 미생물에 대한 애정으로 나아간다. 앞서 언급한 벼룩을 소재로 삼은 무대극은 물론이고, 칼베로는 가사를 통해 정어리의 삶, 곤충이나 해파리의 삶을 예찬한다. 온갖 미물에 대한 예찬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긍정, 필연적으로 죽음에 대한 받아들임이기도 하다. 찰리 채플린은 그가 죽어 보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존재하기를 꿈꿨던 것 같다. 그의 바람대로 채플린은 영원한 방랑자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채플린은 방랑자로 살고, 방랑자로 죽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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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전문가, 찰리 채플린

- 채플린의 초기작을 중심으로




찰리 채플린의 영화는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웃음보다 슬픔이 더 강하게 남는다. 찰리 채플린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건 이런 특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줄 수 있는 감독이자 배우였다. 그리고 둘은 신기하게도 서로의 영역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원숭이에게 코를 물어뜯기는 채플린의 모습에 웃었다고 해서 <서커스>의 마지막 장면이 덜 슬퍼지는 것이 아니며, 아이를 뺏기고 홀로 남은 채플린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키드>의 권투 장면이 덜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채플린은 웃음과 눈물이 서로 섞이지 않게끔 각 장면들을 세심하게 조율했고,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하나의 장면에서 마음껏 슬퍼하거나 마음껏 웃을 수 있다(이 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이것이 버스터 키튼과 채플린의 차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키튼이 만들어내는 장면에는 종종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경찰>의 마지막 장면이나 <카메라맨>에서 키튼이 혼자 야구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이 글에서는 채플린 영화의 눈물에 집중해보려 한다. 이 ‘눈물’이란 말은 단순한 상투적 표현이 아니다. 채플린은 자신의 연출과 연기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슬픈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시티 라이트>에서 채플린의 마지막 표정, 또는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의 마지막 뒷모습을 생각해보자. 이런 장면들은 진지하게 영화의 근본적인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거나 사람의 뒷모습을 롱숏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관객을 슬프게 할 수 있는 것일까(그리고 이걸 해내는 영화와 여기에 실패하는 영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고민 중이다. 그리고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채플린의 비밀’, ‘채플린의 신비’ 운운하며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어떤 미지의 영역에 가둬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런 방식을 택하기보다는 내가 채플린의 영화에서 슬픔을 느낀 장면들을 하나씩 이야기해보려 한다. ‘채플린의 비밀’에 닿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느낀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둘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 글이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단순한 나열로 흐르더라도 양해해주길 바란다. 또한 많이 논의된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라임 라이트>와 같은 대표작보다는 초기 장편인 <키드>, <파리의 여인>, <서커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키드>(1921)

<키드>(1921)

<키드>는 채플린이 처음으로 만든 장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한 가난한 여인이 아이를 버린다. 아이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가 결국 채플린의 품에 안기고, 채플린은 이 아이를 제 자식처럼 정성껏 키운다. 그러나 경찰이 이 사실을 알자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려 한다.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채플린은 소동 끝에 아이를 뺏기고 실의에 빠진다. 그런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지금은 부자가 된 아이의 어머니가 극적으로 자식과 재회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채플린은 경찰의 안내를 따라 깔끔한 집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아이와 만난다. 채플린과 아이,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가면 “THE END” 자막이 뜬다.

이 이야기에서 도드라지는 건 단연 외로움의 감정이다. 국어사전은 외로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홀로 되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하다.” 동어반복을 하자면 <키드>에서 도드라지는 건 홀로 되어 의지할 곳이 없어 쓸쓸해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슬픔의 감정이 만들어지는 건 주인공들이 외로워할 때이다. 단적으로 말해 채플린에게는 돈이 없어서 맛없는 음식을 먹거나, 힘센 사람에게 억울하게 맞거나, 먹고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다. 심지어 아이가 아픈 것도 슬프게 그려지지 않는다. 가난이나 약함은 슬픔의 재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소 무리하게 도식화하자면, 채플린에게 가난은 웃음의 소재이지 슬픔의 소재가 아니다.


<키드>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를 보자. 침대에 누운 채플린이 다리를 펴면 찢어진 이불 사이로 발이 튀어 나온다. 제대로 된 이불도 없는 채플린의 형편을 보며 관객은 슬퍼해야 할까. 그러나 곧 채플린은 그 찢어진 틈 사이로 머리를 밀어 넣어 이불을 망토로 만들어버린다. 이 장면은 가난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채플린의 방법을 잘 보여준다. 아이가 아파서 누워있는데도 멍청한 의사를 등장시켜 웃음의 순간을 만드는 것도 비슷한 경우이며, 극단적인 빈곤의 상황을 묘사하며 웃음을 준 <황금광 시대>라든지 부자와의 빈부 격차를 유머 요소로 사용한 <시티 라이트>도 같은 예이다.

그런데 외로움의 문제로 넘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채플린이 연기한 트램프, 또는 채플린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좀처럼 슬퍼하는 일이 없다가도 외로움 앞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속수무책이다. 채플린도 그렇고 아이를 버린 여자도 그렇다. 따라서 혼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독립적인 주인공 같은 건 <키드>뿐 아니라 채플린의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채플린은 영화 안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너무나 행복해하고, 그 사람이 떠날 때마다 이런 외로움은 처음이라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때 스크린 안에는 슬픔의 감정이 가득 차오른다.

꼭 이야기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 바로 <키드>에서 아이가 채플린과 헤어지는 첫 번째 장면이다. 이 이별 시퀀스에서 채플린은 아이를 뺏기기 싫어 주먹을 날리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지붕을 오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경찰에 저항한다. 채플린의 필모그래피에서 찾기 힘든, 거의 액션 활극이라 불러도 좋을 이 거친 저항의 몸짓은 혼자 남겨지기 싫어하는 채플린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소란스러운 장면이 결국 관객을 슬프게 만든다. 채플린에게 혼자 남겨진다는 외로움은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고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은 감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채플린이 아이와 다시 만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단순하고 소박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큰 안도감과 감동을 준다.



<파리의 연인>(1923)

<파리의 여인>(1923)

<키드>의 제작으로부터 2년이 지나 개봉한 <파리의 여인>은 채플린이 출연하지 않았으며, 유머가 없는 심각한 분위기의 멜로드라마다. 이야기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어떤 연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작은 사건으로 인해 멀어졌다가 계속되는 오해 때문에 갈수록 더 멀어진다. 결국 사랑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남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권총 자살을 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여자는 고아들을 보살피며 조용히 살아가는 인생을 택한다.

이 작품은 언뜻 가슴 아픈 사랑을 그린 영화 같지만 영화의 에필로그와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막 때문에 인생의 보편적인 외로움을 다룬 이야기로 읽을 가능성이 열린다. 만약 채플린이 사랑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면 남자가 죽은 뒤 곧 영화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야기는 비극성이 정점에 달한 순간 끝났을 것이며, 남녀 주인공의 안타까운 운명은 더욱 강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죽고 난 이후에도 영화는 8분 동안(<파리의 여인>의 1/10의 분량에 해당한다) 혼자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남자의 어머니와 여자가 어떻게 교감을 나누고, 여자가 어떻게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지 말이다. 즉 채플린에게는 남자가 죽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이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게 중요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무도회장에서 남자는 총으로 자신을 쏘고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자 곧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어 남자의 시신을 둘러싼다. 그런데 영화는 이때 갑자기 숏을 바꿔 집에서 혼자 지내는 남자의 어머니를 보여준다. 이 편집은 매우 갑작스러우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아마 채플린에게는 여러 선택이 있었을 것이다. 남자의 시신을 보여주어 슬픔을 더 강조할 수도 있었고 충격을 받은 여자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채플린은 숏을 바꾸어 혼자 조용히 지내는 노모의 모습을 보여준 뒤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온다.


이 편집은 ‘논리적’이지 않다. 공간의 연속성은 물론 사건의 논리적 연속성과 정서적 연속성을 모두 깨트리기 때문이다. 비극이 절정에 달한 순간 갑자기 그 흐름을 끊고 전혀 다른 장면을 삽입하는 건 다른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편집이 아니다. 그러나 채플린의 머릿속에서는 남자가 죽는 숏과 홀로 남겨진 노모의 일상을 보여주는 숏이 붙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채플린에게는 한 사람의 죽음과 남은 사람의 외로움을 연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편집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비극에 슬퍼함과 동시에 남겨진 사람의 외로움을 떠올리는 것. 그만큼 채플린은 외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이었다.

그리고 곧 등장하는 자막은 이러한 생각에 또 하나의 근거를 제시한다. “시간은 상처를 치료하고, 그 경험은 옆 사람을 향한 헌신이 행복의 비밀이라는 걸 가르쳐 준다.” 채플린은 행복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직접 힘주어 말한다. 이 말에 따르면 외로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으며 ‘고독’과 같은 낭만적 개념과도 거리가 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다소 갑자기 등장하는, 여자가 고아들을 돌보며 살아간다는 설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채플린은 비록 슬픈 일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삶의 옳은 방식이라고 말한다. <파리의 여인>의 에필로그가 감동을 주는 이유이다.



<서커스>(1928)

<서커스>(1928)

그런데 <서커스>에서 채플린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내린다. <키드>에서는 유사 가족을 이루었고 <파리의 여인>에서는 고아들과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황금광 시대>(1925)에서는 커플까지 맺었지만 이 작품에서 채플린은 그냥 외롭게 남는 쪽을 택한다. 이 자체로도 슬픈 결말이지만 전작들의 따뜻한 결말을 떠올려보면 이 변화는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커스단에 들어간 채플린은 단원인 메르나와 가까워지고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메르나는 채플린을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단원을 좋아한다. 이 사실을 안 채플린은 자신이 프로포즈하려고 샀던 반지까지 남자에게 주면서 두 사람을 이어주려 한다. 결국 메르나와 남자는 행복하게 결혼을 하고, 채플린에게 계속 함께 서커스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채플린은 이들을 따라가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걸어간다. 영화는 여기에서 끝난다.

이때 채플린이 타의에 의해 혼자 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외로움을 떠안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메르나와 그녀의 남편은 분명 채플린에게 같이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채플린은 뒤에서 따라가겠다고 거짓말까지 한 뒤 혼자 남는다. 이 행동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토록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하던 채플린이 자발적으로 외로움을 택했다는 사실이 영화 내-외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슬픔의 감정을 만든다. 이 장면은 부인할 수 없이 쓸쓸하고 서글프고 막막하다.


이런 <서커스>은 결말은 <키드>의 행복한 결말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 정도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키드>의 채플린은 사람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채플린은 과연 그곳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을까? 혹시 모자의 행복을 지켜보다 <서커스>처럼 어느 날 다시 어디론가 떠난 건 아닐까. 괜한 걱정을 사서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서커스>의 마지막 장면은 그 정도로 어둡고 우울한 인상을 준다. 참고로 이 작품 이후 채플린이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결말을 다시 보여준 건 8년이 지난 뒤였다(1936년 작인 <모던 타임즈>). 그리고 1925년 작품인 <황금광 시대>를 1942년에 재편집해 개봉할 때는 이상하게 원래 엔딩이었던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을 잘라 내버리기도 했다. 채플린과 연인이 계단을 올라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리는 장면에서 영화를 끝낸 것이다. 즉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행복한 마무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떠난 텅 빈 공간을 보여주며 영화를 끝낸다(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채플린의 개인사를 들춰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자녀의 사망, 그의 곁을 떠나갔던 여인들, 불명예스러운 스캔들, 그리고 유성 영화의 등장과 같은 요인들을 끌어들여 그의 작품과 개인사를 겹쳐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다른 차원의 해석이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서커스>의 외로운 정서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서커스>의 결말을 보며 마음이 아파 슬퍼지다가도 그 감정에 완전히 몰입하기는 망설여진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외로움을 거부하는 따뜻한 정서, 또는 <모던 타임즈>의 결말에 드러나는 작은 희망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포자기의 정서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서가 <서커스>를 채플린의 작품 중에서 이질적인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서커스>는 외로움을 다루는 채플린이라는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눈앞에 있는 ‘안전한’ 결말(서커스단에 합류하는 것) 대신 떠돌이로 남는 것을 택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 결단의 무게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결말에서 채플린이 내린 선택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 없어도 그 장면에서 배어나는 외로움의 감정 자체는 절대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채플린은 그렇게 관객과 자신의 외로움을 공유하고야 만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영화를 통해 외로움을 전염시키는 힘이 있었고 <서커스> 이후로도 계속해서 외로움을 자기 작품의 주요 테마로 삼았다. 그야말로 외로움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전문가였던 것이다.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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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영 2015.10.21 1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