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인 가운데 어떤 희망의 지점

 

지난 12월 6일 장 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고다르가 이야기하는 표현의 자유, 소유권, 디지털, 이미지, 영화에 대한 이 날의 강연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영화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게 무슨 얘기지?’ ‘곧 알게 될거야.’ 3부에선 ‘바르셀로나가 우리를 환대할 것이다’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약간 미래식으로 주어져있다. <필름 소셜리즘>이라는 영화 안에 ‘필름’과 ‘소셜리즘’ 은 없다. 영화의 모든 이미지들은 디지털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형으로 얘기하는 부분은 있지만 소셜리즘 그 자체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없다. 필름과 소셜리즘은 이미 20세기에 지나가버린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은 알게 될 것이거나 환대하게 될 것이며, 미래에 놓여있다고 생각된다. 2부의 마르탱 가족의 이야기에서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선거에 나갈 수 없다고 말하자 재밌는 얘기를 한다. 나중에 프랑스 부채의 30%는 아이들이 다 짊어지게 될 텐데 왜 아이들은 선거를 할 수 없느냐고 이야기한다. 미래형의 형태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아이들이 갖고 있는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들이 계속 얘기하는 것이 ‘be동사를 쓰는 사람과 이야기하지 마라’이다. 그것은 존재형으로서의 지금의 아이, 입후보의 권리도 없고, 선거도 할 수 없는 그 안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표현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엔 아니지만 미래를 짊어지게 된다. 존재형으로서는 여기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성의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은 이런 ‘아이’라는 생각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표현과 권리의 문제들이 있다.

먼저 디지털 시대로 갈수록 표현의 자유가 없어진다는 표현이 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직전의 고다르의 행보를 보면, 표현의 자유, 디지털, 소유, 소셜리즘과 관계된 부분들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프랑스 사회 내에서 아도피법이 논란이 되었다. 인터넷 상에서 불법으로 다운로드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으로, 이 법이 올해 프랑스 대선에도 논란이 되면서 올랑드 후보의 경우 ‘문화적 예외 2막’을 선언하면서 이 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겠다는 선거공약을 내세웠고, 당선이 됐기 때문에 이 법은 아마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 고다르 역시 이 아도피법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많이 했었고, 그러한 뉘앙스가 이 영화의 마지막에 삽입된 FBI 경고 문구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한 청년이 엄청난 양의 MP3 파일을 다운로드해서 재판에 기소된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청년에게 고다르가 재판비용에 사용하라며 돈을 붙였다고 한다. 상징적인 돈이다. 고다르는 인터뷰에서 필름의 소셜리즘이라는 것은 지적 소유권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기도 했었다. 물론 액면 그대로 모든 저작권을 부정해야만 예술적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말하는 저작권에 대한 부정성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 고다르는 예술가에게는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만 있을 뿐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했다. 또한 작품의 권리는 예술가가 갖는 것이 아니다. 고다르는 프랑스영화사 100주년 기념작품에서도 그런 말을 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멜리에스 영화를 복원해 상영하려고 했을 때, 멜리에스의 후손들이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엄청난 돈을 요구했었고 이에 대해 고다르는 비난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이 가져다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작권의 문제로 인해 타인의 이미지를 가지고서 예술가가 재창작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게 된다. 고다르와 같이 이미 50~60년대부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남의 영화를 보고 남의 영화를 무차별적으로 인용한 작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카피에 대한 것, 농담처럼 얘기하는 것이지만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 강고한 설정에 대해 고다르는 아주 부정적인 입장이다. 필름과 소셜리즘이 연결되어지는 지점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런 저작권과 관련된 부분이다.

 

 

동시에 몇 가지 지점들이 더 있다. 이를테면 모든 이미지가 디지털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특히 1부는 고다르의 이전 작업들과 어느 정도 연결점이 있어 보이는 2,3부에 비해 이미지도 굉장히 다르고 이미지들의 연결 방식도 굉장히 다르다. 복잡다단한 이미지들이 무차별적으로 아무 연관성 없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1부에는 비교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모든 장면들이 하나와 다른 하나 사이의 연결점이 전혀 안 보인다. 이미지의 연결에서 몽타주적 감각이 전무하다. 1부의 이미지는 최소한 5,6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찍은 것 같은데, 핸드폰에서 고화상 카메라까지 여러 다양한 디지털 장비로 찍은 것이다. 음식을 먹고, 춤을 추고, 수영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찍은 이미지들은 대체 누가 찍는지, 그리고 왜 찍는지,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모호한 형태로 촬영되어 있다. 말하자면 디지털적인 세계로서 구현된 현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1부에 대해 자본주의의 풍경을 담아낸 이미지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첫 대사에서 말하듯 돈은 공공재이고 그런 의미에서 물 같은 것이라면, 지중해의 크루즈라는 것은, 공공재라고 하는 물 위에 떠 있는 자본주의이며 이 자본주의는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것이 1부와 3부를 연결하는 것 같다. 크루즈라는 하나의 거대한 배 안에 다국적의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그들 전체가 모두 엑스트라처럼 등장한다. 이 배는 <타이타닉> 같은 배가 아니다. <타이타닉>은 위와 아래를 계급적으로 분리시켜놓고 그 분리된 계급성을 드라마로 구성한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위계성 자체를 철폐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인물들의 중심성, 주체가 대상을 찍는 관계의 중심성, 이미지의 위계성이라는 것이 없다. 이미지의 위계가 없다는 것은 디지털이라는 것 안에서 모든 이미지들을 무차별적으로 배치했다는 것이다. 디지털은 모든 이미지를 무차별적인 평등성 안으로 집어 넣어버린다. 이것은 누가 찍는가의 기원도, 근원도 존재하지 않는 무차별성이다. 드팔마는 <리댁티드>라는 영화를 찍을 때, 모든 장면을 영화에 등장하는 군인이 들고 다니던 캠코더로 찍은 영상과 CCTV 영상을 수평적으로 연결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방식으로 찍혀진 이미지들이다.

이 영화에는 그럼에도 인간적인 개입이 있는 촬영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사진이다. 디지털적으로, 동영상적으로 구성되어있는 이미지들은 평등한 형태의 무차별적인 이미지로 구성되는데, 그 행위 내부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손이라는 것을 빌어 구성해나가는 측면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영화 안에서 사진과 동영상 간의, 촬영한다는 것과 이미지로 구성되어져 있는 것 간의 충돌성이라는 지점이 있다. 3부에서 팔레스타인 작가에 의해 사진과 관련해서 팔레스타인에 언제 처음 사진이 등장하게 됐는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어떤 이미지를 찍는다는 것, 고유의 무언가를 촬영한다는 것, 그것이 갖는 보편화된 이미지에 대한 저항성의 측면이 사진과 관련해 등장하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부의 디지털 이미지는 위계성이 없어 평등해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무차별화시키는 지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글로벌화라는 것이 부각되고 있다. 고다르는 자주 ‘국가의 꿈은 하나이고, 개인의 꿈은 둘이 마주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국가는 하나를 원한다. 국경의 철폐라는 것, 지금으로 말하자면 신자유주가 극단적으로 일자를 추구해나간다. 국가가 하나를 꿈꾸는 반면 둘을 원하는 개인들의 꿈, 그것은 사랑을 원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개인으로서의 둘을 전제한다. 게다가 국가라는 말이 불어에서는 존재라는 것과 연결된다. be동사를 쓰지 말라고 하는 건 국가로서의 하나라는 존재로 전제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유럽의 위기라는 것이 지중해에 떠있는 크루즈호라는 설정 안에서 최근의 그리스 위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의 위기와 유럽의 문명적 위기라는 것이 1부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아마도 스페인 내전 당시에 사라진 황금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고 있다. 유럽사회 내에서 고다르가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보자면 프랑스 혁명, 그리스적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또 하나가 스페인이다. <작은 병정>을 만들 당시 고다르는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겐 스페인 인민전선의 투쟁도 없다. 우리는 전쟁과 박물관의 자식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스페인 인민전선을 언급하면서 언제나 회답처럼 나오는 것이 앙드레 말로다. 말로가 스페인 내전과 관련해 썼던 책의 제목이 ‘희망’이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스페인 내전을 얘기하면서 ‘필름’과 ‘소셜리즘’이 없는 가운데 기다리게 하는 것이 희망일 것이다.

고다르와 절친한 사이인 알랭 베르갈라의 표현에 따르자면, <필름 소셜리즘>은 가장 절망적인 영화이다. 아무것도 없고, 뭔가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떤 희망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희망의 한 지점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이다. 고다르 영화 중에 이렇게 동물이 많이 나오는 영화는 처음인 것 같다. 특히 2부에 등장하는 라마가 특이하다. 알랭 베르갈라는 고다르의 현재의 위치가 이 라마 같다고 말한다. 라마는 원래 유목적인 동물인데, 이 영화에서는 언제나 묶여있고, 움직임이 없다. 대신 귀만 쫑긋 세우고 사람들 주변에 있다. 마치 라마처럼 고다르가 스위스의 자기 집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듣고 있는 그런 예술가적 위치를 얘기하는데 그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고다르의 영화에서 동물과 아이의 등장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영화의 1부에는 사실 대화라는 것이 없다. 말은 있는데, 일반적인 의미에서 A컷과 B컷으로 대화가 연결되는 씬이 없다. ‘사상은 우리들을 나누고, 꿈은 우리들을 합친다’는 대사가 나온다. 고다르는 이 영화로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얘기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꿈이 우리를 합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사상, 이데올로기는 다 언어에 기초해 있는데, 이 영화에는 언어에 대한 부정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이와 동물은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그들은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는 언어 이전의 언어로 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 이후에 고다르가 만들고 있는 영화의 제목은 <안녕, 언어여>이다. 인간적 대화라고 하는 것이 갖는 불충분성과 어려움이라는 것을 넘어서는, 다른 언어의 방식으로서의 대화, 소통 혹은 관계 맺기. ‘하나 안에 또 다른 타자가 있고 타자 안에 또 다른 하나가 있어서 결국 우린 셋이다’라고 대사, 또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감명 깊게 들었던 ‘진보는 우리들을 타자에게로 이끈다’는 표현이 있다. 마찬가지로 동물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목인 필름과 소셜리즘은 영화 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뭔가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절망적인 느낌도 있지만 그럼에도 말로의 책의 제목을 빌어 어떤 희망의 지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알게 될 거야, 도래하게 될 거야, 라는 것이 영화이거나 소셜리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 사진: 정지은(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크리스 마르케의 <아름다운 5월> 상영 후 정지연, 김성욱 평론가 대담 지상중계

 

지난 12월 9일, 크리스 마르케의 작은 회고전을 마무리하며 정지연 영화평론가와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좌담이 열렸다. 이 날의 좌담은 <아름다운 5월>의 방법론과 접근법, 크리스 마르케의 정치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 현장을 여기에 옮긴다.

 

 

정지연(영화평론가): 크리스 마르케 영화를 처음 본 건 세네프에서 주최한 크리스 마르케 특별전이었다. 그때 <붉은 대기>를 보고 감동 받았다. 어제 <아름다운 5월>을 보고나서 <붉은 대기>를 <아름다운 5월>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젯밤엔 <붉은 대기>를 다시 봤는데 지금 시점에선 <아름다운 5월>이 더 좋은 것처럼 느껴진다. <아름다운 5월>은 이브 몽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브 몽땅의 고혹적인 목소리만으로 모든 게 용서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정치적인 영화라는 관점에서도 <아름다운 5월>의 접근법이 더 재밌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이 흥미롭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선 존 카사베츠가 <얼굴들>(1968)을 만들던 때였다. 크리스 마르케라는 감독을 생각했을 때, 이 사람은 정말 소비에트적인 감독인 것 같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알렉산더 메드베드킨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찍었다. 실제로 1967년에 메드베드킨을 처음으로 만나서 그의 <행복>(1934)이라는 영화를 복원, 재상영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5월>에서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2부에서는 두려움과 더불어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던 고다르는 <필름 소셜리즘>(2010)에서 이런 말을 한다. “러시아와 행복이 결합되기 전에는 죽고 싶지 않다.” 크리스 마르케가 소비에트적이라고 하는 건 소비에트 영화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2,30년대 소비에트 영화에 대단한 존경과 영화인으로서의 자부심, 긍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근본적으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소비에트 영화감독들도 그랬지만, 마르케는 영화라는 기계가 만들어졌을 때 자신을 프로메테우스라고 생각했었다. 영화라는 기계를 통해서 노동자 계급에게 새로운 무기를 전달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리스 마르케는 평생을 통해서 영화를 통해 민중, 노동자, 거리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당시에 메드베드킨이 시도했던 <시네트레인>이라는 건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사람들의 연결을 만들어내려 시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크리스 마르케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하층 계급들에게 하나의 무기로서 영화를 전달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만남을 통해서 관계를 형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고전기 시기에서 5, 60년대 이후 극영화가 바뀌어가는 관점 중 하나는 사람과의 만남을 영화를 통해서 구현해내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고전기 영화가 극화성을 가지고 있다면,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나 다큐멘터리, 혹은 카사베츠의 영화엔 사람들과의 만남을 영상화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르케가 지극히 소비에트적인 것 같다. 그리고 그 특징이 가장 잘 구현된 작품이 오늘 보신 <아름다운 5월>이라는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지연: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소비에트적이라고 하는 건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일단 크리스 마르케는 강인한 좌파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고, 자기 작품 안에서 실제로 혁명과 역사에 대한 질문, 또한 민중들의 개별적인 삶이 어떻게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요인들과 만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혁명 영화들은 너무나 이상적인 것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마르케는 자기 작품 안에서 그런 이상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탐구하려고 했던 감독이다. 또 한편으론 몽타주 실험이 많았던 것 같다. 1920년대 몽타주라는 개념은 샷과 샷이 만나면서 어떻게 의미들을 만들어 내는지에 집중한다. <아름다운 5월>에서도 오프닝과 엔딩에 쓰인 몽타주가 재미있다. 오프닝에서 이브 몽땅의 내레이션은 아름다운 5월의 파리, 누구나 연상하는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서 배경에 깔린 사운드는 사이렌 소리, 도시의 소음 등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다. 또 시작은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이라는 근대적 조형물인데 마지막에 와 닿는 건 감옥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감옥을 보여주고, 감옥 이후에는 명대사가 나온다. “감옥이 있는 곳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슬픔이 있는 곳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서 부자가 나올 수 없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미지와 실질적인 삶을 충돌시키면서 배치하는 전략들이 눈에 띈다.

크리스 마르케는 이론가고 지식인이었다. <아름다운 5월>은 자본주의 사회로서의 프랑스, 제국주의로서의 프랑스, 근대화 과정 속에서 피폐해지는 프랑스라는 이론적 프레임 안에서 진행이 된다. 그런데 그런 프레임은 지식인들의 관념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거기서 그곳의 개인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가령 프랑스 시민들에게 5월에 가장 인상적인 건 이상기온이고, 노동자들의 파업도 소음 때문인 것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이 근대성,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적 국면과 어떻게 탈구되고 구성되는지를 재미있게 질문하고 답한다. 마르케는 ‘정치적 수준과 일상적 수준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그 스스로 내부적인 것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김성욱: 저 역시도 오프닝이나 엔딩 장면들이 생각이 난다. 맨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첨탑 같은 데 사람이 올라가는 장면이다. 100% 확신할 순 없지만 거긴 파리의 도서관인 것 같다. 레네가 만든 <세상의 모든 기억>(1956)이라는 영화가 파리국립도서관에 관한 다큐멘터리인데 그 건물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 2막의 첫 시작은 무덤에서 시작한다. 2막 끝 무렵, 감옥 나오기 바로 직전엔 개선문이 있는 에뚜아르 광장이 나온다. 로메르의 <에뚜아르 광장>(1965)이란 영화에서도 묘사되듯이 그곳은 굉장히 남성적인 공간이다. 훈장 달고 있는 사람들이 특별한 기념일에 과거의 영예로운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다. 관광객들이 많이 가지, 파리 시민들은 잘 가지 않는다. 그 다음에 감옥이라는 공간이 나온다. 저는 방금 얘기하신 내레이션 직전에 나온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감옥에서 벌어질 수 있는 두 가지 기적이 있는데 하나는 안에서부터 문이 열리는 것, 또 하나는 거리를 자유스럽게 계속 질주해 가는 것. 그러면서 바깥을 향하는 것 같이 자동차를 타고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도서관, 무덤, 감옥 등이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개선문, 에펠탑을 찍은 장면들의 배치는 레네와 비슷한 것 같다.

또 하나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건 1962년이라는 시점의 파리라고 하는 도시 안 풍경과 사람들이다. 극장 스크린으로 이 영화를 보니까 재빨리 넘어가는 컷들이 보인다. 1부가 처음 시작할 때 마치 르네 클레르의 <파리는 잠들다>(1924) 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공간이 묘사되다가 순간적으로 한 컷에 여자 얼굴이 들어온다. 그 다음에 파리 사람들 얼굴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그건 ‘고독’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 영화 2부의 거의 마지막은 거의 다 얼굴들을 비추고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불안한 표정과 근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을까? 거의 동시대에 고다르가 만든 <국외자들>(1964)에서 안나 카리나가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왜 파리 지하철 안 사람들의 얼굴은 피곤함으로 가득한 걸까” 이런 대사를 한다. 여기서도 사람들의 얼굴에 담겨진 불안함에 대해 얘기를 한다. 방금 몽타주 얘기 때문에 생각이 났는데, 그와 더불어서 나오는 대사가 “죽음에 대한, 육체의 소진에 대한 두려움일까. 그런 한계적인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으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예술이었다”라는 대사였다. 그 대사는 50년대 바쟁적인 논의와 비슷한 것 같다. 바쟁이 영화 예술에 대한 근본적 충동을 ‘미라 콤플렉스’라고 얘기할 때 그건 죽음에 대한 저항이었고, 최종적 단계에 도달한 게 사진이나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 말미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표정들을 다루면서 뜬금없이 예술에 대해 얘기를 하고, 그러고 나서 방금 얘기하신 그런 대사가 나올 때, 이 영화는 어떤 점에서 보면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내려고 했던 시도라고 생각이 든다. 1962년이라는 시대 안에서 파리의 풍경을 담아내면서 그 안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 얼굴이 크리스 마르케 영화를 특징짓는 핵심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1958년에 크리스 마르케가 북한을 방문했었다. 거기서 첫 번째 챕터와 마지막 챕터를 장식하는 건 얼굴에 대한 거였다. 마르케가 북한에 가서 제일 크게 느낀 게, 서구 사람들은 미소가 사라지고 나면 그 뒤에 싸늘함, 냉정함이 남는데, 북녘 사람들의 얼굴은 그렇지 않아서 흥미로웠다고 했다. 그리고 북한 여성들의 얼굴사진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마지막엔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웅변가는 수다쟁이에 불과하고, 심지어 하나의 구호이고, 정치는 변하고, 통계는 날조된다. 동맥은 깨지고, 귓불은 빛을 발한다. 하지만 인간의 얼굴은 그것이야말로 태양이요, 달이다. 나를 향해 돌아보는 얼굴 바로 그것이 나와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크리스 마르케가 책 거의 마지막에서 얘기하는 구절이다. 얼굴이라고 하는 것, 얼굴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나를 통해 바라보는 것, 그것이 나와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 그것을 포착해 나가는 것이 마르케의 영화적 작업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 영화 말미에 당시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표정들이 스쳐 지나갈 때 그건 초상 작업 같은 것이다. 또한 그것이 에드가 모랭과 장 루슈가 만든 <어느 여름의 연대기>(1961)라는 작품과의 차별점 아닐까. 실제로 <어느 여름의 연대기>는 <아름다운 5월>에 굉장히 큰 영향력을 줬다. <어느 여름의 연대기> 촬영감독이 <아름다운 5월>의 촬영감독 미하일 롬의 스승이었다. 많은 다이렉트 시네마를 찍은 사람이고, 장 루슈는 캐나다에서 온 이 사람과 함께 <어느 여름의 연대기>를 촬영했다. 그 촬영감독의 제자가 <5월>을 찍은 미하일 롬이다. <아름다운 5월>은 촬영 자체가 흥미롭다. 동시에 이 영화나 장 루슈 영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50년대 말~60년대 초 프랑스에서 개발된 경량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술적 부분들이 이런 촬영 방식과 사람과의 만남, 인터뷰를 영화로 찍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촬영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몇몇 장면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시하듯 찍혔다. 이 시기 극영화를 찍은 감독들(고다르, 레네 등) 영화들보다 훨씬 더 테크닉에서 뛰어난 것 같다. 전문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일상적인 다큐멘터리라서, 미적인 관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정지연: 제목은 <아름다운 5월>로 번역되는데 실제로 영화 시작부터 나오는 건 고독과 불안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고독, 불안의 경우는 5,60년대 유럽의 모더니스트들이 지속적으로 시각화하려고 했던 근대적 소외나 불안의 이미지들과 연결되는 것 같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 <어느 여름의 연대기>를 안 떠올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질문도 같다(“당신은 행복하신가요?”). <어느 여름의 연대기>에서는 카메라가 정박된 게 아니라 이동하면서 사람들을 향한다. 그런데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과연 사람들이 이 낯선 물체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말할지, 에드가 모랭과 장 루슈가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이 진솔한 자기 얘기를 해서 놀랐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나온 게 시네마 베리테다. 시네마 베리테는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와는 다르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계속 관찰하면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이고, 시네마 베리테는 질문 속에서 질문을 추동한다는 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은 좀 객관화된 진실이다. 저는 이 작품이 현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좀 더 중요하고 <어느 여름의 연대기>보다 의미 있는 실험이었다고 본다. 두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아름다운 5월>에서는 객관적 진실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반부 내레이션에도 나오듯 진실은 목적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에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마르케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대답들 속에서 사유의 과정들, 사유의 단초들을 이끌어 낸다. 영화에서 해석하는 자, 사유하는 자의 태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고정된 진실, 객관화된 진실이 아니라 이것들로부터 어떻게 사유를 이끌어 낼 것인지, 어떻게 해석해 낼 것인지, 해석자의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 이건 60년대 다큐멘터리에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그때까지 다큐멘터리는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증언, 기록의 위상에 대단히 고착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5월>은 이미지 그 자체의 증언이 아니라 이걸 어떻게 붙이고 해석하느냐, 즉 해석자의 위치를 다큐멘터리에서 처음으로 부각시킨 것 같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그렇고 이후 작품에서 크리스 마르케의 인터뷰에서 했던 얘기가 ‘이미지의 비가시성’이었다. 다시 말해 이미지들이란 건 그냥 순간의 현상적인 표현에 불과하고 그 자체로 진실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결국 바라보는 사람이 그것을 연결함으로써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말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지막 볼셰비키>(1993)에서 오프닝에 조지 스타이너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를 사로잡는 건 과거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이미지일 뿐이다.” 여기서 ‘과거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객관적 과거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어떻게 과거의 이미지를 기억하느냐에 따라 그 이미지는 다르게 전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환송대>(1962)를 보면 한 남자에게 각인된 과거 한 순간의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있다. 그런 이미지들을 연결함으로써 사유의 구성을 맥락화하는 게 중요했던 사람 같다. 그래서 본인에 대해서 ‘이미지의 사냥꾼’이라는 말을 했다. 차이가 있다면 사냥꾼은 찾아서 죽이는 사람이지만, 자신은 현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적당한 순간에 카메라로 포획함으로써 영속화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천사의 사냥꾼’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5월>은 5, 60년대 다큐멘터리의 진실과 객관성에 대한 신화로부터 벗어나서 해석하는 자, 사유하는 자의 위상을 높였던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닐까. 그렇지만 관념적인 좌파적 이상주의로 빠지지는 않는다. 크리스 마르케는 소비에트 혁명에 대한 이상적인 시선들이 있었고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쿠바 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이 실패할 때 받은 상처도 컸던 것 같다. 파트리시오 구즈만과 크리스 마르케 사이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은 마르케보다 20년 정도 후배다. 구즈만이 사회주의 실험기 1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첫 해>(1971)를 찍었는데 마르케가 그 작품을 보고 인트로 영상이랑 더빙을 마르케가 직접 연출해서 프랑스에 소개를 했었다. 또 구즈만이 <칠레 전투>를 찍을 때 크리스 마르케가 생필름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후 구즈만이 <칠레 전투>를 칸에서 공개하게 되는데, 마르케가 구즈만에게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즈만이 익히 짐작하기를, 마르케는 좌파적 신념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는데 자기는 그런 관점에서 칠레 전투를 편집한 건 아니었고, 비무장한 민중들의 삶을 약간 휴머니즘적인 관점으로 찍었다고 말한다. 마르케도 그런 점에서 보면 참 완고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한 구즈만은 크리스 마르케가 대단히 은둔하는 태도가 강하다고 얘기를 했다. 이브 몽땅은 자서전에서 크리스 마르케가 굉장히 신사적이고 지적인 사람이라고 전한다. 마르케는 작품도 재밌지만 사람도 독특하고 매력적인 것 같다.

 

김성욱: 개인사가 별로 안 알려진 감독이다. 사진도 거의 없고, 인터뷰도 거의 없는 편이다. 크리스 마르케의 정치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다. <아름다운 5월>은 2부가 되면서 조금씩 관계의 변화들이 발생한다. 마르케를 다큐멘터리 작가로 부르는 것과 에세이스트라고 부르는 것에 차이가 있다. 제 생각엔 랑시에르가 얘기했던 어법이 가장 적당한 것 같다. 에세이스트는 자기 머릿속에 있는 걸 바깥에다 표현한다. 다큐멘터리 작가는 무언가가 밖에 있고 그걸 어떻게 배치하고 결합하느냐에 몰두하는 사람이다. 마르케가 이 두 부분을 왔다갔다 하는 게 있지만 에세이스트에 가까운 것 같다. 근데 랑시에르 식으로는 다큐멘터리 픽션을 만든 사람이라고 얘기된다. 이 영화의 2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당히 많은 몽타주들이 동원됐고, 장면 장면과의 연결이 굉장히 의도적인 배치들도 있고, 내레이션도 마찬가지다. 마르케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시네마 베리테에 대한 정의는, ‘시네마 베리테(영화 진실)가 아니라 시네 마 베리테(영화 나의 진실).’ 그게 이 영화를 보면 적합한 것 같다. 크리스 마르케라는 감독이 어떤 정치적인 활동을 했던 건 사실이다. 60년대 말~70년대 초 마르케는 영화 집단 ‘SLON’의 멤버였다. 당시 SLON은 우리나라로 치면 노뉴단 같은 것인데 트럭에다가 필름을 들고 다니면서 파업 현장을 기록했다. 그 기록들을 이태리에서 상영하고 상영료도 받고, 유럽에서 잘 나가는 영화제작집단이어서 ‘좌파의 MGM’이라고 불렸다. 여기서 메드베드킨의 영화도 상영을 했고, 구즈만 영화작업에도 관여를 했다. <붉은 대기>는 전 세계 다큐멘터리스트가 결합해서 만든 영화였다. 게다가 마르케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카메라를 노동자 손에 쥐어준 작가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5월>처럼 사람들의 말을 담아내는 게 지금으로선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대적으로 특정한 시간대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담아내는 건 당시로선 텔레비전이나 신문이 할 수 있을 법한 거였다. 영상 르포르타주, 혹은 미디어가 보도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담아내려고 했던 시도라는 점에서 보면 첫 번째 미디어 실험가였다고 볼 수도 있다. 크리스 마르케라는 작가 자체가 갖고 있었던 정치성이 영화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금에 있어서도 의미를 가진다면 어떤 부분이 있을까, 이런 점들이 크리스 마르케 영화를 볼 때 떠올려보게 되는 지점들이다.

 

정지연: 크리스 마르케 영화들에서 그런 정치적인 관심들이 있다. 그런데 이 시기 1세계 지식인이라 자부했던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 정치적 발언에 대한 책무가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드러난다. 61년 10월 파리에서 알제리인 대학살이 일어나고, 62년 7월에 알제리 독립선언이 일어난다. 이것들을 좌파 지식인이 목도하면서 어떤 책무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2부에서 사람들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뭐가 가장 중요합니까? 알제리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의 발언 속에는 국수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발언들도 있다. 크리스 마르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답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런 역사적 국면이 일반인들에게는 어떻게 괴리되고 있는지, 무엇이 그들을 역사적인 이슈로부터 괴리시키고 있는지를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 같다. 빈민가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여주면서 ‘공간이 작을수록 세계를 향한 건 TV를 통해서’라고 하는데, 50년대 텔레비전은 대중적인 탈정치화를 가속화시킨 매체였다. 마르케는 삶과 정치가 분리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선 질문은 정치적인 쪽으로 유도를 하되 사람들의 빗나간 대답들을 관찰한다. 마지막에 갑자기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예술이 나타났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결국 영화감독으로서 영화를 찍는다는 게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언급인 것 같다. 소비에트 영화처럼 직접적으로 민중을 계도하고 영화가 갖고 있는 선동력에 주목하기보다, 질문의 순간들, 사유의 순간들을 영화적인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순간의 이미지를 영속화시키고, 그 사유의 이미지를 영속화 시키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라고도 봤던 것 같다.

 

김성욱: 마지막에 나왔던 예술에 대한 언급은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같은 시간대 만들었던 <환송대>랑 비교해보면 시간, 기억이라는 화두가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보존되는가, 현재 관점에서 보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이 영화에서 5월 기억을 계속 떠올리게끔 얘기 하는 것에는 알제리에 대한 망각이 있다. 레네가 <밤과 안개>에서 당시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아우슈비츠를 망각했는지 질문했던 것처럼, 마르케도 <아름다운 5월>에서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알제리를 망각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바꿔서 얘기하면 어떻게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망각된 현재 안에서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영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겠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고 크리스 마르케는 망각된 사람들을 상기시키는 작업을 하는 건데, 그건 인터뷰의 말에서만큼은 완벽하게 나오지 않는 거다. 그랬을 때 기억이라고 하는 건 과거에 있는 것들을 재현해 가는 게 아니라 새롭게 구성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것이다. 그게 메드베드킨에 대한 다큐를 만들 때 마르케가 제기했던 질문이었다. 사람들에게 메드베드킨을 아냐고 물어보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을 한다. 역설적인 건 아무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영상화 할 것인가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억을 만들어줄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게 영화작업이 됐던 거고, 그래서 과거를 회고하는 기억이 아니라 ‘미래적인 순간에 도래하는 것으로서의 기억’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역설은 <환송대>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모든 정치영화는 두 가지를 다룬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방금 얘기하신 것처럼 집단성의 문제를 다룬다. 국가, 공동체, 권력집단, 대항하는 정치집단 등, 정치는 어쨌든 둘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집단성, 혹은 집단적 주체성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대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인 영화들이 추가하고 재현해 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타자와의 관계이다. 정치영화엔 이 두 가지가 결부되어 있다. 마르케 영화를 봤을 때 사람들은 모두 순수하게 개별적이다. 자기 앞에서 문을 닫아버린 프랑스 사람들이 어떻게 집단화될 수 있는가, TV으로만 세계와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집단성이 일어날 수 있는가. 62년의 시점에서는 정치적인 집단적 주체성이 구현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68년을 거치면서 <붉은 대기>는 그런 집단적 주체성, 집단적 이미지를 구축해가는 영화이고, <숨은 고양이 찾기>는 그런 것들이 사라진 이후에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주체성에 대한 질문이 들어가 있다. 가장 저차원적인 정치적인 영화들은 그 집단적 주체성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만들어간다. 한국에서 나오는 대부분 상당부분의 정치영화들이 그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생각도 없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 생각도 없다. 집단적 대변자로서의 영웅적인 서사라든가, 집단성이라는 걸 인간적 드라마로 바꿔나가는 구조들이 대부분이다. 마르케가 5, 60년대에 시도했던 건 민중의 집단성을 표상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집단적으로 무리지어 움직여가는 이미지들이 있는데 그건 말하자면 군중이다. 군중은 숫자일 뿐이지 관계의 어떤 부분도 내재하고 있지 않은 집단적 무리다. 그와 다른 방식으로 집단성을 구현해나가길 시도한다는 것이 마르케 영화와 정치성이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까.

 

정지연: 크리스 마르케는 역사를 찍는다고 진실이 드러나는 건 아니라고 얘기하면서 기억상실의 이미지라는 말을 했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분쟁, 학살을 경험하는데, 어떻게 이를 끊임없이 망각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런 망각으로부터 자신의 이미지 서사, 이미지 정치학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들을 복권해내고 붙잡고 영속화시키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억은 망각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그 이면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역사를 다시 쓰듯 기억을 다시 써야 한다.” 승리한 자들이 기념비 세우는 역사가 아니라, 폐허 아래 묻힌 자들, 실패한 자들의 역사를 끊임없이 발화해야 하는 상기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마르케는 이미지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국면들을 사유케 만드는 것이 자신에게 중요한 이미지 정치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미지 수사학이나 정치학을 구축한 그의 작품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정리: 송은경(관객에디터) | 사진: 황초희(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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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고양이 찾기> 상영 후 변영주, 이해영, 홍세화와 함께한 토크 지상중계

 

<태양 없이>, <제5단계>, <숨은 고양이 찾기>가 연달아 상영되던 이른바 ‘크리스 마르케 데이’였던 지난 12월 1일, 마지막을 장식하는 행사로 오픈토크가 열렸다. 변영주, 이해영 감독이 진행한 이날 오픈토크의 특별한 손님으로는 홍세화 전 진보신당 대표가 참석하였다. 영화와 정치에 대해 날카로운 이야기가 오갔던 그 현장을 여기에 옮긴다.

 

 

변영주(영화감독):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이해영 감독과 제가 계속 오픈토크를 하고 있다. 이번 달은 무슨 주제로 해야 되나, 뭔가 대선과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이런 얘기를 하던 차에 꼭 모시고 싶었던 분, 홍세화 선생님을 성공리에 모시게 되었다. 먼저 영화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객석 쪽 질문을 받아서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다. 제 기억으론 크리스 마르케의 몇몇 작품들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이 됐고, 오늘도 1시부터 계속 상영이 있었다. 오늘 함께 본 <숨은 고양이 찾기>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홍세화(진보신당 전 대표): 이 영화를 잘 몰라서 그런 건지, 영화가 참 어렵단 생각이 들었다. 원제가 ‘장대에 올라선 고양이’ 이런 뜻인데 그 의미가 뭘까, 이런 생각을 쭉 하면서 봤다. 그 중에서도 저는 파리 광경이 나오니까 그 부분이 더 정감이 갔다. 빅토르 위고의 말이 있는데, ‘파리는 항상 이를 드러내고 있다, 웃지 않으면 화를 낸다’고 했다. 그러니까 웃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으르렁거린다는 것이다. 데모현장의 표현도 그런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알 것 같으면서 알쏭달쏭하다.

변영주: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들이 기본적으로 그 다음 단계의 시네마 베리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시네마 베리테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충돌하고 사운드도 다른 사운드로 구현이 된다. 애초에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 카메라와 마이크가 가서 개입을 한다. 그로 인해서 갑자기 전혀 상관없는 공간이 주제와 연관이 된 것처럼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마르케는 마치 그 다음 단계처럼, 자기가 만들어내는 영화 안에서도 시퀀스와 시퀀스가 서로 긴장을 하고 서로 교류를 한다. 제가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뭉뚱그려서 얘기하는 걸 보면 저도 되게 어렵게 봤다는 거다(웃음).

이해영(영화감독): 말한 내용 중 핵심은 없었다(좌중 웃음).

변영주: 재미도 있지만 어렵다. 저는 김성욱 프로그래머한테 물어봤다. ‘저 고양이 실제 있는 그림이야? 없는 그림이야?’ 실제로 저 시기에 시위현장에서 자주 보이던 고양이 그림이라고 한다. 김성욱 프로그래머 말을 빌리자면, 몇 년 동안 이 시기 파리를 중심으로 한 말도 안 되는 정치적 혼란을 흡사 아주 오래 전부터 지켜봐왔던 누군가의 시선처럼 지켜보는 그런 이미지의 영화인 것 같다. <숨은 고양이 찾기>라고 하면서 보이는 프랑스의 현실. 이를테면 좌파들도 결국 시라크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위도 있고, 중간 중간 보이는 우파들의 시위도 있다. 일단 홍 선생님께서 이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당시의 프랑스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홍세화: 프랑스는 결선 투표제를 채택하여 대통령을 뽑을 때 총 두 번 투표를 한다. 2002년 봄 1차 투표 때 현직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가 20%로 1등을 하고 2등은 사회당 후보인 리오넬 조스팽이 되리라 믿었다. 그리고 극우주의자 장 마리 르팽은 3등을 하리라고 봤다. 그는 프랑스 실업자가 300만이면 이주민 노동자 300만 명을 쫓아내면 된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다. 그런 극우 후보가 1차 투표에서 2위를 하게 되는 이변이 일어난 거다. 젊은이들이 당연히 조스팽이 되리라 생각해서 투표 안 하고 놀러갔다는 속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험은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결선 투표에 가게 되니까 우파인 시라크와 극우파인 장 마리 르팽이 결선에 가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결국 결선투표가 82대 18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이게 프랑스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해영: 영화에 나온 고양이 캐릭터 이름이 ‘또마’다. 또마를 그리는 화가는 퐁피두 광장에서 거대한 퍼포먼스를 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화가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제가 이 화가를 만나 본 적이 있는데, 당시 <29년>이라는 영화를 준비 중이던 2008년이었다. 주인공이었던 류승범 씨와 카페에서 술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마침 그 카페 벽에다가 또마라는 분이 고양이를 그리고 있었다. 그때 그분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벽에다 고양이 그림을 그렸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MB정권 초기였고, 이런 민감한 소재의 영화를 과연 만들 수 있을지 불안감과 조바심 때문에 잠을 거의 못 자면서 영화를 준비했던 때였다. 어쩌면 프리프로덕션하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그런데 결국 영화는 엎어졌다. 영화가 엎어지니까 갑자기 이 고양이가 생각났다. 그때 그 분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는, 말하자면 한량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의 삶보다 내가 더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이 나의 삶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더 찾아보니까 홍대에도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관련 상품도 많이 나와 있어서 제 차에 또마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 몇 년이 흘러서 오늘, MB정권 말기에 <26년>이 저와 관계없이 개봉을 했다. 크리스 마르케, 또마, <26년>이 묘하게 겹치면서 환기가 된다. 두 분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게 있다. 지금 정권 말기가 되면서 정치적인 이슈를 다룬 영화가 쏟아지고 있다. 제가 알기론 어떤 정권 말기에도 이 정도로 영화가 이렇게 집중되어 나온 적 없었던 것 같다. 여기에 이 정권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정치적인 독립영화 혹은 상업영화중에서 혹시 보신 게 있는지 궁금하다.

변영주: 이해영 감독 말대로 여타 어떤 정권 말기에도 이렇게 정치적인 영화가 상업영화 독립영화 가릴 것 없이 봇물처럼 나온 적이 없었다. 그중 굉장히 좋았던 영화도 있었다. 사실 독립영화는 언제나 정치적인 소재를 직접적으로 이야기 한다. 이를테면 <두 개의 문>. <26년>이라든가 <남영동 1985>의 경우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이번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재집권을 막으려는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고, 혹여 그랬을 때 상영이 되지 못할까 봐 개봉시기가 조절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방금 이해영 감독이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이미 투자가 얘기되고 캐스팅까지 다 된 영화가 갑자기 엎어진 건 초유의 일이었다. 독립영화에 관심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디액트나 독립영화전용관 등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누군가에 의해 쫓겨나는 건 상상을 못 했었다.

홍세화: 저도 <두개의 문>이랑 <부러진 화살>을 봤다. <화차>는 아직 못 봤다(웃음). 사실 제가 영화를 잘 못 본다. 앞으론 자주 봐야겠다.

이해영: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영화들이고 다음 정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앞당겨 개봉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드는 사람 입장보다 관객의 소비패턴이, 영화를 보는 게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것의 전부라는 면죄부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만 소비되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그리고 영화가 수단의 기운에 편승해서 졸속 제작 되었다면 위험한 일일 것이다.

 

변영주: 다시 <숨은 고양이 찾기>로 돌아가서, 결선투표제는 1차 투표에서 누가 몇 프로가 되건 1, 2등이 결선으로 간다는 것인지.

홍세화: 50%가 넘지 않으면 그렇다. 그러니까 1차 투표에선 자기가 좋아하는 후보를 사표에 대한 우려 없이 찍을 수 있다. 1차 투표는 내가 좋아하는 후보를 찍는 것이고, 2차 투표는 내가 싫어하는 후보의 반대편을 찍는 것이다.

변영주: 그럼 우리는 2차 투표만 하고 있는 거다(웃음).

홍세화: 지금 우리 경우처럼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는 일은 프랑스에선 있을 수가 없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는 결선 투표제를 한다. 대선은 2주, 국회의원은 1주 만에 뽑는다. 투표일이 일요일인데 투표율도 높은 편이다.

변영주: 르팽이 처음 출현했을 때는 지역정당으로 시작을 했었다. 당시 프랑스의 평범한 시민이라면 그런 정당이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이젠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도 많이 보수화되었고 우익정당을 지지하는 젊은이 숫자도 그만큼 늘어난 거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보면서 우경화되어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르팽처럼 이주민 노동자에 대한 공격적인 언설도 분명 있다. 분명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도 동시적으로 생각하면서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홍세화: 아무래도 보면서 견주게 된다. <르몽드>는 사설에서 극우파가 결선에 나오게 된 상황 자체가 “프랑스의 수치”라고 했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그동안 좌파, 지식인, 문화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배경도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은 노동의 분업체계 안에서도 위계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소위 중도좌파들은 조직된 노동이나 상층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노동이 위계화 되면서 하층들이 좌파들로부터 버림받는 상황이 됐다. 이때 이들에게 접근한 게 바로 극우파였던 거다.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북유럽에서도 극우세력이 20%에 가까운 지지율을 받고 있는 게 그런 문제에 있다. 보통 20대 80의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상위 20이 80을 갖고 있고 하위 80이 나머지 20을 갖고 있는 양극화된 사회에서는 이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 민주주의만 제대로 작동하면 된다. 왜냐면 80만 제대로 투표하면 되니까. 그런데 지난 4.11 총선에서도, 월 소득 100만원이 안 되는 층에서 투표한 사람들 중 새누리당 지지율이 71%였다. 그만큼 서민층 내지 극빈층이 오히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이다. 비록 역사적 배경이나 층위는 다르지만 이렇게 견주어 볼 수는 있다.

 

 

관객1: 이 영화를 보면서 68혁명과 <몽상가들>이란 영화를 떠올렸는데, 시위에 참가하려는 영화 속 주인공에게 친구가 ‘네가 화염병을 던지려고 달려 나가는 순간 넌 네가 적대시하는 사람과 동일해져’라고 말한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병을 들고 뛰어나가는 사람도 아닌, 어떻게 보면 어정쩡한 자리에 있다. 사람들이 제게 ‘너는 누구와 연대하고 있어?’라고 물어볼 때 ‘나는 모두와 연대하고 있다’고 답하는데 그들은 그걸 ‘아무와도 연대하고 있지 않다’는 말로 듣는 것 같다. 두 사람 이상이 같은 꿈을 꾸려면 그 방법이 무엇일지 질문 드리고 싶다.

홍세화: 우선 68혁명이 갖고 있는 사회적 변혁의 추진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것이 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려면 회사에 남편의 동의서를 제출했어야 했다. 그만큼 가부장적인 사회였는데 68혁명 이후에는 엄청난 격변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들이 있었다. 그리고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다양하게 활동들이 있을 텐데, 이것이 문화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 핵심은 사회적 존재인 ‘나’가 그 안에서 총체적으로 인식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건 자기 능력에 따라, 자기 적성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따라서 다르다. 그리고 화염병을 던지는 순간 저들과 똑같이 된다는 얘기는, 싸우는 과정 자체가 싸움을 통하여 우리가 획득하고자 하는 사회를 닮아야 한다는 얘기인데, 사실 한국 같은 사회에서 그걸 지킨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건 각자가 고민 속에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속에서 스스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 같다.

 

관객2: 두 분 감독님께, 요즘 나오는 정치적인 영화, 정치적인 엔터테인먼트, 새누리당이나 MB를 희롱하는 엔터테인먼트가 저소득 계층들에게 정말 설득력을 가지고 손을 내밀 수 있을지, 그럴 수 있다면 그 영화들이 제안해야 할 바가 뭔지 궁금하다. 그리고 홍세화 선생님은 정치인으로서 느끼셨던 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홍세화: 제가 지난 1년 동안 진보신당 대표 자리를 맡았다. 글 쓰는 서생으로서 정치를 보았을 때와 현실 진보정치는 역시 다른 것이었다. 현실정치를 겪으면서 알게 된 모든 것이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걸 알게 되어서 또한 좋은 일이다. 제 삶에 있어서 현실 진보정치에서의 1년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1년이었지만, 결국 유의미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고통이 두렵지 않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의미 없는 고통이다.” 힘들었지만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해영: <26년>도 <남영동 1985>도 <MB의 추억>도 아직 못 봤지만 이런 생각은 든다. 실제 역사사건을 소재로 하면서 희생자나 유족 분들이 아직 살아있는 사건을 다루는 영화라면, 그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만이 목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분노를 같이 공유하자, 그것만으로 소비되면 굉장히 위험한 것 같다. 감정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는 영화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장 적절하게 이상적인 답안을 준 영화가 <두 개의 문>이라고 본다.

 

 

관객3: 두 분 감독님이 크리스 마르케를 좋아하신다고 들었다. 두 분께서는 마르케의 어떤 면모를 좋아하시는지 간략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한다. 그리고 홍세화 선생님께서 아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 허무주의가 만연해 있다고 하셨다. 그런 얘기들은 한국사회에도 많이 나오는 얘기인 것 같다. 진짜로 젊은이들의 무관심이 현실 제도정치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보시는지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변영주: 개인적으로 크리스 마르케뿐만이 아니라 시네마 베리테 감독들을 좋아한다. 우리가 현실세계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건 극영화로 만들건, 결국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세계관, 취향, 영화적인 관점, 그 모든 것들에 의해 반영된 현실이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과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 현실이 아닌 것과 현실, 자기의 주관 또는 세계관과 현실세계의 어떤 것들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긴장감, 이런 것들이 시네마 베리테 영화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공부가 된다.

이해영: 저는 크리스 마르케의 사진 작업들을 많이 봤다. 사진 작업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건 사람을 바라볼 때 아무런 편견 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같은 태도였다, 크리스 마르케의 사진이나 다큐멘터리를 이따금 찾아볼 때마다 그런 태도가 환기되는 것 같다. 즐기기보단 교과서 같은 작품들인 것 같다.

홍세화: 프랑스 정치에선 시위상황이 굉장히 유희적이다. 한편 한국에선 요즘 시위도 거의 없고, 모순이 의식을 통해 엄청나게 통제되거나 물리력에 의해서 억압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수평적으로 비교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사회적 모순이 첨예한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모순이 드러나지 않을 만큼 정치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은 대단히 두려운 거다. 아예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차라리 누가 좋고 싫고, 이렇게 접근이나 가능하면 모르겠는데, 아예 담을 쌓는 현상은 그 분들 대다수가 혐오하는 정치를 계속 혐오스럽게 놔두는 가장 강력한 정치 현상이다. 한마디로 탈정치라는 건 그 혐오스런 정치를 계속 혐오스럽게 놔두는 강력한 정치적 행위다.

변영주: 마지막으로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 떠오르신 몇 가지 생각이 있으시다면?

홍세화: 투표 잘 해야겠다. 영화운동, 문화운동, 정치운동, 뭐든지 운동이라는 건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현실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피치 못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 또 하나는 지금 제가 강조하려는 것인데, 바꾸어야 할 현실로서의 의미다. 똑같은 현실이란 말에서 우리의 경우는 전자의 의미가 너무 강하다. 그만큼 현실을 변화시키는 게 어렵기 때문에 운동을 말하는 사람들은 좀 더 적극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한국사회에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에 장벽 같은 것이 있다. 선거판만 보더라도 엄청난 단절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상대와의 관계가 적대 관계지 경쟁 관계가 아니다. 소통, 소통 하지만 장벽 내에서의 소통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사유하는 존재라면 이 장벽을 어떻게 깰 수 있을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한국 사회에서 나름대로 사회비판의식을 갖게 되고 세상 보는 눈을 얼핏 뜨게 되는 경우는 스무 살 안팎에서, 선배 잘못 만나면 길이 열리게 된다(웃음). 이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장벽을 뚫어서 어떻게 하려는 시도보다는 비판에 머무는 건 그것이 제일 쉽기 때문이다. 어떤 작업이든 벽을 뚫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진짜 과제가 아닌지, 그렇게 생각한다.

변영주: 요즘 극장에서 독점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영화가 다양하게 상영되지 못한다. 정말 이게 상영이냐. 많은 분들이 대기업 욕을 하신다. 그러면 그들이 영화를 그만두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나? 그건 아닌 것 같다. 이건 영화계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질서의 어떤 리얼한 단편이다. 단순히 대기업이 정신을 차리는 걸로 끝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뭘 해야 하지?’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작은 영화들은 여전히 설 자리를 잃고 말 거다. 선생님도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정말 투표를 잘 해야 하는 건 개개인의 삶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문>은 단순히 불쌍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면 우리는 어떤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건지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정말 놀라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번 대선과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내 삶 안으로 다가오는 순간 세상이 또 한걸음 전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해영: <두 개의 문>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연분홍치마가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그 친구들 영화 하는 걸 보면, 다음 정권은 독립영화인들이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정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정권이었으면 좋겠다.

변영주: MB정권 들어와서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정말 힘들어졌다. 갑자기 지원이 끊기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행되기도 했지만, 그걸 지켜줬던 유일한 힘이 관객들의 관심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독립영화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고, 오늘 자리해주신 여러분들, 그리고 홍세화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정리: 송은경(관객에디터) | 사진: 박지연(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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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단계> 상영 후 유운성 영화평론가 시네토크 지상중계

 

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이 한창이던 지난 12 1, 영화제 속의 작은 특별전으로 마련된 크리스 마르케 오마주섹션 상영작 중 하나인 <5단계> 상영이 끝난 후 유운성 영화평론가와 함께하는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5단계>를 중심으로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세계에 대해 짚어본 시네토크 현장을 여기에 옮긴다.

 

 

유운성(영화평론가): 방금 보신 크리스 마르케 감독의 <5단계>란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크리스 마르케는 지난 729일 아흔 한 살의 나이로 타계했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번 서울아트시네마가 마련한 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에서 5편의 영화를 모아 작은 추모 영화제를 하고 있다. 워낙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이기도 한데, <5단계>를 처음 볼 때 혹은 거듭해서 볼 때조차도 간과할 수 있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 이 시간을 이용해 그 부분에 대해 말해보겠다.

 

< 5단계>는 로라라는 여자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남긴 오키나와에 대한 전략 게임을 해독하는 내용이고 그 중간에 크리스라는 내레이터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영화 초반에 중요한 장면이 있다. 카메라가 지하철 문틈으로 창 밖을 찍은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이제 나는 이미지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미지를 해독하는 자다라는 말하는 부분이다. 그 말처럼 영화는 오키나와 전략 게임과 관련한 여러 푸티지들을 다시 보고 해독하는 과정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영화는 크리스라는 인물의 편집의 결과물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크리스 혹은 크리스 마르케 자신이 편집한 것이라는 보여준다. 즉 도입부에서부터 이런 구조가 제시된다. 영화의 시작은 마우스를 조작하는 손을 네 개의 숏으로 나눠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사람의 손이 아니라 두 사람의 손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는 손은 시간적으로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다른 두 개의 손이고, 이를 교차 편집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한 손은 크리스 마르케 자신의 손일 것이고, 다른 손은 로라의 손일 것이다. 이것이 <5단계>이라는 제목이 뜨기 전의 도입부다. 최종적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여자는 사라졌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남긴 게임과 오키나와에 대한 이미지들만 남는다. 그것을 크리스라는 인물이 편집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로라가 있는 자리를 현재로 인식하고 보게 된다.

 

두 번째로 영화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도 간과되거나 무시하게 되는 부분은 주인공인 로라의 이름이 오토 프레밍거의 1944년 작인 <로라>의 이름을 따왔다는 점이다. 그 영화에서 이야기를 빌려온 건 아니지만, 과거에 다가간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두 영화 간에 흥미로운 대응 지점이 있다. <로라>는 로라라는 이름의 여자가 죽은 후 그녀의 과거를 쫓는 어느 한 저널리스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필름 느와르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녀가 누구인지는 글쓰는 사람의 회고를 통해서 형성된다. <5단계>에서는 성별 역전이 있다. 회고를 하는 쪽이 여자다. 로라라는 여자는 사라진 남자친구와 그가 만든 게임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녀의 직업은 글 쓰는 사람이고, 그녀의 남자친구는 게임 개발자, 즉 이미지와 형상을 다루는 사람이다. 그래서 < 5단계>는 로라라는 여성의 진술과 크리스의 목소리가 이끌고 가는 예민한 관찰자의 여성적 다큐멘터리다.

 

또한 프레밍거의 <로라>는 플레시 백으로 펼쳐지는 과거를 미심쩍게 그려냄으로써 통상 영화에서 보여주는 플레시 백이라는 장치가 기만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영화를 통해 그려내는 과거가 신뢰할 만한 것인가라는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반면에 <5단계>는 과거의 전쟁 이미지가 많은 부분을 구성하고 있고, 그런 기존의 이미지들을 분석하고 비평하고 해야 한다고 말하는 에세이적인 영화다. 또한 구스타보란 군인의 이미지를 다루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지로 재현되는 죽음이라는 것의 모호함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이다. <5단계>는 누군가 사라진 시점부터 시작하고,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건 이후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 말하는 영화다. 두 영화를 모두 보면 알겠지만 < 5단계> <로라>를 반토막 내서 기이하게 리메이크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처음에도 말했듯 <5단계>에 대해서 말할 때 작업 프로그램에 대한 선언처럼 들리는 이제 나는 내 자신이 만든 이미지가 아니라 다른 이미지를 해독하는 자다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다. <아름다운5> 같은 영화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간 현장성이 강한 작품이다. 반면에 < 5단계>는 크리스 마르케적 스튜디오 영화다. 몇몇 이미지를 제외하고는 기존의 영상물을 재활용하거나 본인이 조작해서 만들어낸 이미지들이다. 누군가가 남긴 온갖 기록물들을 가지고 작업한 영화, 이것은 파운드 푸티지 작업으로 이미지를 재활용해서 만드는 영화라는 아이디어다. 이런 생각은 작업자의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지는 미래적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다. 크리스 마르케는 1990년대 이후에 텔레비전, 인터넷 등을 이용해 이런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감독 중에 하나였다. 영화 감독의 지성이 이미지에 담기게 될 것이라는 기존의 견해에 반박하며 지성은 코멘트나 편집을 해서 만들 수 있는 원재료 자체에 있다는 입장으로, 촬영의 과정이 제거되고 컴퓨터를 이용해 활용 가능한 텍스트, 이미지, 사운드를 조합하는 것이다.

 

하나 더 말해야 할 건 영화적 지위에 대한 것이다. <5단계>는 영화적 미장센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영화는 카메라 앞에 놓이게 될 대상들을 어떻게 배치할 지가 문제가 아니라 관객, 시청자의 눈에 보이는 이미지들을 어떻게 배치할 지가 문제라는 얘기다. 이런 식의 영상들을 만들어 내는 작업은 카메라 앞에 무엇을 어떻게 놓을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심지어 로라가 사이버 스페이스를 유영하는 장면은 흡사 미디어 아트 작품 같다. 영화 제작 방법론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관점에서 봤을 때 크리스 마르케는 사진 작가나 영화 감독이라고 규정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설치 미술가나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하기도 힘들다. 여기서 그를 영화 감독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영화 감독이라는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 < 5단계>는 한 편의 영화라는 형태로 주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크리스 마르케를 영화 감독이라고 했을 때는, 기존 이미지와 사운드를 재활용해서 편집하기도 하고 비영화적인 요소들을 포괄적으로 활용해서 화면에 배치하는 일종의 기호 디자이너라는 개념으로 이동한 것이다.

 

크리스 마르케의 <5단계>라는 영화를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영화는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으로 시작한다. 영화에 나타나는 사물들을 읽어보면 이 영화는 쥐와 고양이 사이에 있는 올뻬미 같은 영화다. 마우스로 시작했던 영화는 스크린 세이버라는 고양이로 끝나고, 이 공간에서 가능한 이미지의 존재론을 탐구하는 지혜의 올빼미가 있다.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에서 고양이의 기능은 여러 가지일 텐데, 여기서는 고양이를 스크린을 구하는 자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영화가 비영화적인 이미지를 통해 영화 이후의 시대에 진입한다고 해도 여전히 핵심은 영화가 세상과 역사하고 연결고리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사이에서 고양이라는 존재는 쥐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전령과도 같은 존재다. <5단계>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도 여전히 역사하고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영화이자 포스트 시네마의 정치학이다. 다른 기회가 있다면 크리스 마르케가 이 영화에서 여러 영상들을 다루는 방식과 내부적 작업으로 역사적인 이미지에 접근해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정리: 최혁규(관객에디터) | 사진: 박지연(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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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여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미와 풍요의 여신 '비너스'를 떠올릴 때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는 대개가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에 가깝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이 온전한 과정에서 이뤄진 걸까. 다시 말해, 비너스가 반드시 백인이어야 할 이유는 무얼까. 만약 비너스가 흑인이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떤 이미지로 기억할 것인가. '만약'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압델 케시시 감독의 <블랙 비너스>(2010)는 흑인 여자가 어떻게 대상화되었는지를 '사트지 사라 바트만'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사트지는 1770년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노예 신분으로 유럽으로 건너와 서커스 쇼에서 사람들의 볼거리로 전락한다. 아프리카 흑인을 미개인으로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물에 가까운 '연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갇혀 울부짖는가 하면 우리를 빠져나와 음악에 맞춰 춤도 추는 등 인간에 가까운 행동으로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수치심을 참다 못 한 사트지는 공연 중 눈물을 흘렸다가 '인간'(?)인 사실이 발각되어 이용 가치가 떨어진다. 그래도 살아야했기에 거리의 여자로 연명하던 사트지는 결국 성병에 걸려 1815년 사망한다.

압델 케시시가 <블랙 비너스>에서 카메라를 운용하는 방식은 사트지를 향한 유럽인들의 시선과 이 때문에 고통스런 그녀의 심정을 양가적으로 반영한다. 사트지가 '연기'를 하는 장면에서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대상으로써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면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 선 카메라는 표정에 서린 수치심을 포착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고통의 감정이 인간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할 때, 이와 같은 영화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는 극 중 유럽인들에게서 그들이 미개인으로 바라보는 사트지보다 더 야만적인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유럽인들의 시선을 부정적인 쪽으로만 단순화하는 건 아니다. 편협한 시선을 비판하면서 이들을 향해 특정한 시각으로 곡해할 수 있는 함정의 소지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하여 극 중 인물들 대부분이 사트지를 미개인 혹은 야만인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서도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보호본능을 발휘하는 유럽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입체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건 이 때문이다. 오히려 <블랙 비너스>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편견의 학술화에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실제로 사트지의 사망 후 프랑스 과학자의 손에 넘겨진 시신은 박제되어 그녀의 종족과 오랑우탄 간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에 활용되었다(영화는 이를 오프닝 장면에 배치한 후 그들이 미개인이라 일컫는 사트지가 실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밝혀 나간다). 심지어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에 넘겨져 1974년까지 전시되었을 정도다. 이는 아프리카 흑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시선이 오랜 시간, 심지어 지금까지도 얼마나 고착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한 것이다.

사트지를 연기한 야히마 토레스는 <블랙 비너스>가 연기 데뷔작이었다. 압델 케시시는 <블랙 비너스>의 전작인 <생선 쿠스쿠스>(2007) 당시 야히마 토레스를 일찍이 점찍어두고 그녀에게 사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사트지의 인생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탓인데 야히마 토레스는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충격적인 영화의 결말만큼이나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 보인다.

 

글/ 허남웅(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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