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Review] 대중유토피아를 향한 집단적인 꿈 - 보리스 바르넷의 <저 푸른 바다로>


대중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은 20세기의 꿈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 형식을 지닌 산업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강력한 추진력이기도 했다. 대중유토피아를 향한 집합적 꿈은 그것의 역사의 추인에 필요한 신화와 전설을 필요로 했다. 동시에 거대한 규모로 이 꿈은 투사되어야만 했다. 개인의 행복과 함께하는 사회와 세계를 감히 상상하는 것, 그리고 그 사회와 세계가 실현될 추진력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영화를 필요로 했다. 영화는 무엇보다 확대의 기술이었고 꿈을 투사하는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35mm의 작은 직사각형에 담긴 세계는 크게 확대된 스크린에 투사되어 대성당이나 피라미드보다 더 큰 세계로 비춰진다. 20세기 초의 카메라는 기차, 전차 등의 대중교통 수단이나 대도시 군중, 집단의 움직임을 담아냈고 영사기는 그러한 집단적인 군중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었다. 스크린에 투사된 세계는 우리가 현실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들이며, 마찬가지로 스크린에 흘러가는 시간은 현실의 시간을 넘어선 신화의 시간, 영원의 시간, 기원의 시간, 반복의 순환적 시간이다. 영화는 유토피아를 향한 집합적 꿈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미학적 차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렇게 20세기 초에 소비에트와 할리우드의 두 개의 거대한 꿈의 공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에이젠슈테인과 동시대의 작가이지만 세계영화사의 정전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던 보리스 바르넷의 아름다운 작품 <저 푸른 바다로>(1933)는 두 선원과 해변의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그린다. 소비에트 혁명은 꿈을 투사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을 원했고, 보리스 바르넷은 소비에트 몽타주 작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유토피아적 세계를 그려낸다.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작가들, 르네 클레르, 자크 타티, 장 르누아르, 그리고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영화들에서 우리는 이러한 세계의 흔적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토키의 여명기에 무성영화의 매혹을 그대로 간직한 동시대 루이스 부뉴엘의 <황금시대>(1930)나 장 비고의 <라탈랑트>(1934)와 비교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by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