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 드니 회고전 상영작 리뷰]


몸의 리듬이 전부라 말하고 싶은 - <좋은 직업>(1999)



클레르 드니의 <좋은 직업>은 진행되는 내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육체의 선율에 경도되게 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말조차 궁색하게 느끼도록 해버린다. 적어도 이 영화를 말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드니 라방이 “이것이 삶의 리듬”이라는 가사의 노래에 맞춰 무지막지한 막춤을 추는 모습에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순간을 언어화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영화를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는 동시에, 그런 언어화를 경유해 설명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순간이 아닌가란 고민도 하게 된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 생각을 이어나가든 그에 앞서 말하고 싶은 건 그것이 맞닥뜨리는 순간 무심코 이 영화에서는 몸의 리듬이 전부라 말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엔딩이라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에 담긴 몸의 리듬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영화의 서사와 배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작인 허먼 멜빌의 『수병 빌리 버드』의 영향이나 프랑스와 프랑스 식민지 아프리카 사이의 역사, 중심 인물들의 관계 구도와 진행이 이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파악해 나가며 보는 방법이다. 그랬을 때 이 영화가 어떻게 자연과 문명, 신화와 역사, 은유적 허구와 직접적 기록, 무심한 세계와 인간적 행위 사이를 넘나들며 모호하면서도 섬세한 방식으로 보는 이의 감각을 자극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실로 마지막 장면을 접하기 직전까지는 그런 교양 지식을 결여한 자신의 감상 태도를 다소 탓하며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드니 라방의 춤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러한 지적 활동 의무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고 하면서 그저 멍하게 스크린을 바라보게 될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 담긴 몸의 리듬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인정이 차라리 도움이 되는지도 모른다. 이 춤의 정체에 대해 말하자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제까지 이 영화에 있어 왔던 다른 춤들과의 차이점들을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군무가 아니라 독무다. 구호나 호령에 맞춘 각 잡힌 춤이 아니라 음악에 따라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막춤이다. 훈련된 육체의 절제미를 지닌 춤이 아니라 무언가에서 풀려난 육체의 폭발력을 지닌 춤이다. 그런데 이 마구잡이의 독무를 통해 폭발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육체를 놓고 불가피하게 추방된 육체라 해야 할지 비로소 해방된 육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도 야심도 목표도 없이 흡사 패잔병처럼 자기만의 방에서 살아는 부대장 포르시티에의 세계, 아름다움도 선의도 영웅의 존재도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다수에게 그것의 가능성을 탐하게 하는 신참병 상탕의 세계, 그 사이에서 자신에게 남아있는 진실된 세계는 전자뿐이며 후자는 허위의 세계일 뿐이라 믿는 듯한 드니 라방은 후자의 세계를 끝장내 버리면서 전자의 세계로부터도 영원히 쫓겨나길 택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자리하는 그의 춤은 그래서인지 추방당한 자의 비죽거림 같기도 하고 해방된 자의 발광 같기도 하다.


이 위험하고도 눈부신 엔딩이 가능했던 것은 드니 라방이란 배우의 덕이 큰 것 같다. 부드러움과 사나움, 자기통제와 방탕함, 아름다움과 추함이 언제 어느 쪽으로 쏠릴지 알 수 없이 대단히 불균형한 상태로 응집돼 있다는 느낌을 주는 육체, 그 육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와 역사와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는 어떤 삶의 리듬을 무방비하게 감각하게 한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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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 드니 회고전 - 상영작 리뷰]


불안의 정서 - <침입자>(2004)



<침입자>의 혼란스러움은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국경이 있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경계에서 세관원인 여자와 탐지견이 등장한다. 뒤이어 그녀의 가정,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집을 보여주고, 여자와 남자의 성애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고는 어두운 숲속, 담을 넘는 침입자들의 이미지. 이러한 이미지들의 배열에서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의 맥락을 잡아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오프닝 시퀀스의 역할이 서사의 인과관계를 쌓아가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봐야 할 것은 이미지들 그 자체다. 국경, 개, 가족, 그리고 침입자의 이미지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변주되며 나타난다. <침입자>는 심장 이식을 받은 루이 트레보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이 서사는 인과관계를 가지는 사건들의 선형적인 배열보다는 이미지들의 중첩을 통해서 구성된다.



루이 트레보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그는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 지대에서 개 두 마리를 기르며 한 여자와 살고 있다. 그의 심장에 문제가 생기고, 어느 날 집 근처를 배회하던 남자를 살해한 뒤에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집을 떠난다. 스위스로 건너간 그는 심장 이식을 받기 위해 브로커를 찾는다. 심장 이식을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그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들을 찾고자 한다. 부산을 거쳐 타히티로 향한 그는 자신이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트레보가 아들을 위해 산 배를 타고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서사에는 많은 공백이 있고, 클레르 드니는 이 비어 있는 지점들을 맥락을 찾기 어려운 이미지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장례식, 죽음과 관련된 꿈의 이미지들로 채워 넣는다. 하지만 이 이미지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끼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이미지들로 인해 영화는 하나의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불안이다. 영화가 전달하는 이 감각은 관객의 몫이면서 동시에 영화 안에서 트레보가 경험하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너의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숨어 있다.” 트레보는 외부의 적, 자신의 영역을 배회하던 적을 제거하지만, 또 다른 적을 자신의 내부에 심어놓는다. 타인의 심장이 그것이다. 내부로 침입한 이 심장이 트레보를 불안에 빠뜨린다. 심장과 죽음에 관련된 꿈들을 꾸고, 심장을 거래한 브로커는 계속해서 그의 주변을 서성인다. 이 불안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그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다. 트레보는 침입당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침입하는 자다. 그는 새로운 심장,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국경 또는 경계를 넘는다. 이 넘어섬의 행위를 통해 그는 다른 장소에, 다른 사람으로 존재한다. 타히티에서 배를 타기 전, 그는 한 남자의 시신을 확인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세관원의 남편으로 등장한 아들의 시신이다. 하지만 트레보에게는 새로운 아들이 생겼다. 그는 이 새로운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여행을 떠난다.


송재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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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리뷰]


관객의 무력한 위치 - <백인의 것>(2009)



많은 경우, 클레르 드니의 영화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특히 드니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표준적이고 양식화된 스토리텔링 형식을 크게 벗어난다. 그녀는 이야기의 인과 관계를 생략하고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주요 정보를 누락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시간을 뒤섞은 다음 그에 대한 지표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꿈이나 상상 장면을 현실인 것처럼 그리기도 한다. 당연히 관객은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야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인의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비교적 간단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감독은 인물들에 대한 정보나 인물들간의 관계, 그리고 주요 사건에 대한 인과 관계를 생략한다. 이를테면 관객은 마리아가 생명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왜 그렇게 농장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으며, 아들 마누엘이 왜 갑자기 비정상적 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마리아와 반군 지도자 복서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둘은 왜 이렇게 에로틱하게 그려진걸까). 결국 관객은 제한적인 정보를 통해 이런저런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한 뚜렷한 상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애초에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연출 방식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양식화된 인과 관계에 대한 거부일 수도 있고, 관객들을 영화의 의미 생성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키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맥락으로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미지가 하나 있다. 바로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검게 탄 시체다. 이야기의 흐름상 이 시체가 누구인지는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 시체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를 특정 인물로 인지할 수 있게 만드는 지표(인종, 성별 등)를 지워버린다. 앞뒤 상황으로 비춰보아 마리아의 아들 마누엘이 아닐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먼 거리에서 불탄 시체의 신원을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체는 결과적으로 <백인의 것>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하려 했던 마리아는 이 시체를 본 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한 인물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이 행위를 통해 쉽게 잊기 힘든 강렬한 정서적 파장을 만들며 이야기를 끝낸다. 단적으로 말해 이 시체는 영화의 의미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충격 효과는 의미 체계 안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 사건을 촉발시킨 시신의 이미지가 실은 텅 빈 구멍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만약 이 시신이 마누엘의 것이 아니라면? 또는 마누엘이 무사히 살아있다면?). 그렇기 때문에 <백인의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부조리한 영화로 남는다. 하지만 클레르 드니는 이 문제에 대해 답이나 실마리를 제시할 생각이 없다. 이는 소위 ‘열린 결말’과도 다르다. 열린 결말이라면 관객이 영화 안에서 발생 가능한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 관객은 그냥 무지無知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앎 앞에서 무력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삶의 불가해한 근본적 속성을 영화 안에 구현하려 한 클레르 드니의 연출적 전략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영화 <백인의 것>은 디제시스적 세계 내에서 발생 가능한 어떤 의미를 추구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이는 공들여 어떤 세계를 만든 뒤 그 안에 있는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의미를 좇을 수 없게 통로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시니컬하게까지 느껴지는 연출자의 이러한 태도는 이 영화 앞에서 선뜻 마음을 여는 걸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게 관객인 나는 <백인의 것> 앞에서 무력하게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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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영화: 클레르 드니의 세계


낯섦, 이방인, 주변부, 어두움, 신체, 감각, 타자 등. 클레르 드니의 영화가 연상시키는 미묘한 단어들이다. 1990년대 이후 프랑스 영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흐름으로 비평가들은 ‘감각’과 ‘신체’에 대한 관심을 꼽는다. 그 대표적인 감독이 필립 그랑드리외, 가스파르 노에, 브루노 뒤몽, 베르트랑 보넬로, 카트린느 브레이야 등이다. 클레르 드니 역시 이런 경향에 속하는 주요 감독으로 여겨진다. ‘감각의 영화’라 할 수 있는 이 경향은 조형적 측면의 강조라는 프랑스 영화미학 전통을 신체와 연결해 확장시키며, 영화적 서사구조와 미장센에 독특한 흐름을 형성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조형적 내레이션을 신뢰하는 영화에 동질감을 느낀다”고 밝힌 것처럼 드니는 영화의 설명적인 화면 구성이나 대사보다는 조형적인 이미지를 통한 내레이션 구성과 연결에 집중한다. 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대사보다는 침묵, 안무와 같은 신체 언어, 스토리의 빈번한 생략, 파편화된 화면 구성, 인과율의 단절과 같은 영화 언어의 사용은 클레르 드니의 영화가 프랑스 영화 가운데서도 더욱 낯설고 난해하게 느껴지고,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진형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이방인과 타자의 세계


프랑스 행정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카메룬, 소말리아, 지부티 등 아프리카를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클레르 드니는 자신을 ‘아프리카의 딸’이라고 할 정도로 아프리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드니에게 아프리카는 낯선 곳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항상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드니는 데뷔작 <초콜렛>(1988)에서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인 여성의 호기심과 애정어린 시선으로 아프리카를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초콜렛>을 시작으로 드니는 이후 식민주의와 포스트 식민주의로서의 아프리카에서 나아가 이질적이고 낯선 세계에 대한 관심과 시선, 이방신, 타자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으로서의 타자의 신체 등 그녀의 영화를 특징 짓는 여러 요소로 영화적 지형도를 그려나간다.

드니 영화의 특이성은 먼저 영화의 배경과 인물의 선택에서 드러난다. 배경은 항상 이질적이고 낯선 장소이며, 지정학적으로 주변부에 속해 있다. 또한 배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예외적이고, 극단적일지라도 사건의 전개 양상은 매우 일상적이다. 드니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주류에서 멀리 떨어진 소외 계층에 속하며 사회적으로 타자이다. 흑인, 게이, 청소년 등 이방인이나 주변인, 혹은 심리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단절된 이들에 대해 드니는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아프리카와 흑인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 관심으로, 데뷔작 <초콜렛>에서 프랑스 식민지 카메룬에서 안주인을 사랑한 흑인 하인에 대한 시선에서 이런 특징이 엿보인다. 알제리를 비롯해, 아프리카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는 프랑스의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이유에서 찍은 <네네트와 보니>(1996)는 그 변두리인들 가운데 부모 없이 사춘기를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오누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잠들 수 없어>(1993)에서는 흑인 게이 살인자의 삶을 이방인인 리투아니아 처녀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프랑스 독일 공동 채널 ‘아르테’의 제작 의뢰로 만들어진 <좋은 직업>(1999)은 중동의 디부티라는 변방에서 프랑스 외인부대의 생활을 담은 것이다. 가장 평범한 백인 프랑스 여인의 하룻밤을 다룬 <금요일 밤>(2002)은 이제까지 자신이 누렸던 작은 소우주에서 다른 지대로 이행해 가려는, 이젠 더 이상 여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직은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 타자로 여인이 묘사된다.

이처럼 그녀는 초기 아프리카와 흑인이라는 분명한 지정학적 지형도를 확장시켜 주된 관심을 이방인, 타자와 몸이라는 탈-시공간적이고 근본적인 테마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영화 속 배경도 파리와 같은 주류 공간으로 바뀌고 백인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변모는 그녀의 주된 관심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심층적이고 내적인 문제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와 관련한 작업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낭시가 직접 출연하는 단편이 포함된 옴니버스 <텐 미니츠: 첼로>와 낭시의 동명의 책에서 영감을 얻은 <침입자>(2004)는 낭시에게 얻은 철학적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낭시의 책 『침입자』는 자신의 심장이식 수술의 경험을 존재 내에 공존하는 타자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통해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클레르 드니의 관심과 일치한다.





감각의 세계, 매혹의 대상이자 장애물로서의 몸


이렇듯 그녀의 관심은 낯선 것들이 우리의 신체, 감각의 작용, 욕망과 어떻게 연결되며 작용하는가이다. 감각으로서의 몸은 그녀의 영화에서 이중적이다. 초기 매혹과 호기심의 대상으로서의 몸의 포착은 후반으로 갈수록 욕망의 충돌과 장애물로서의 몸의 표현에 집중한다. 낯설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매혹적인 동시에 위험하다. 이는 몸과 감각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이다. 무엇보다 타자의 몸은 매혹적이다. 가시적으로 외부에서 바라본 몸은 이끌림, 매혹적인 욕망의 세계로 초대한다. <좋은 직업>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소녀들의 몸, 사막에서 신체를 단련시키는 외인부대의 몸은 마치 현대무용에서 안무 동작처럼 시각적이고 형상적인 아름다움과 매혹의 대상으로 묘사된다(드니는 프랑스의 안무가인 마틸드 모니에르의 신체를 담아낸 <마틸드를 향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네네트와 보니>에서 보니는 이웃에 사는 빵집 부인의 몸에 매혹되고, 네네트는 임신한 자신의 신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매혹된다.

매혹된 신체와의 만남은 처음에는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촉각적인 접촉, 어루만짐, 애무 등으로, 이는 긴장되고 욕망하는 신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곧 그 접촉은 의도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은 때로 충돌하고 서로를 파괴한다. 시각적 만남 이후 촉각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 영역은 겹쳐지고 확장된다. 그리고 다시 가장 근접한 만남, 접촉면 사이 혹은 그 위에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탄생한다. 타자들이 만나 이루어지는 세계, 타자를 인지하고 접촉이 일어난 후에 이루어지는 감각 세계는 이성을 넘어선 세계로, 여기에는 감각의 충돌이 있다.

감각의 충돌은 가시적인 영역에서 섹스를 만들고, 범죄를, 그리고 전쟁을 만든다. 그 충돌은 때로 매혹과 경이감을 일으킬 것이나 때로 파괴와 해체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결과는 섹스와 범죄의 결말로서의 어둠의 세계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1990)에서의 불법 투계장, <트러블 에브리 데이>(2001)에서 섹스를 하며 신체를 훼손하는 미지의 질병에 걸린 주인공들, <돌이킬 수 없는>(2013)에서 근친상간적 어둡고 은밀한 공간은 그런 어둠의 세계를 반영한다. <백인의 것>(2009)에서 흑인, 백인의 것, 즉 타자에 대한 과도한 매혹은 식민주의과 살육과 내전을 만든다.

하지만 클레르 드니에게 주된 관심은 결과로서의 가시적인 사건보다는 감각-충돌의 만남과 그 세계의 생성에 있는 듯하다. 그녀의 관심은 비가시적인 사건, 즉 최초의 접촉, 시각적인 만남과 촉각적인 만남, 그리고 그 접촉면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비가시적 영역을 가장 접근해서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그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감각-욕망의 어두운 세계


후기작 <트러블 에브리 데이>, <백인의 것>, <돌이킬 수 없는>과 같은 작품은 느와르풍의 영화, 범죄, 호러, 스릴러와 같은 장르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 영화에서 드니는 감각의 어두운 측면, 즉 신체의 훼손, 파괴, 욕망, 집착, 강박증 등과 같은 이미지들에 집중한다. 여기에는 감각-욕망의 극단적 이미지들, 충동과 파괴가 있으며, 그것이 만들어낸 느와르적 세계, 퇴락한 세계, 음모와 범죄가 있다. <돌이킬 수 없는>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낯설고 기이하며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일반적인 장르로서의 범죄, 스릴러 영화는 오래된 장르적 관습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안전장치를 제공한다. 비교적 분명한 선악구도와 징벌적 결말 구조, 어두운 세계에 대한 익숙한 묘사, 장르적 내러티브와 이미지의 차용의 현실지시적 강도, 사실적인 묘사의 수위가 높더라도 상대적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드니 영화에서 모호한 선악 구도, 빈번한 생략, 과거와 현재의 혼재, 지극히 일상적인 접근 등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방식과 예측을 벗어난 결말은 관객에게 난해함과 불편함을 준다. <트러블 에브리 데이>에서 타자의 신체의 훼손은 관습적 호러 장르에서 용인되는 방식과 다르다. 위협의 순간은 가장 매혹적인 순간에 일어난다. 접촉에의 욕망이 가장 극에 달한 순간에 신체는 파괴된다. <백인의 것>에서 피를 나눈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사람들이 총으로 위협하고, 가장 정상적이고 안정된 순간이 우리를 배신할 것이다.




드니가 그리는 영화적 지형도에서 가장 분명한 변화를 보려면 <초콜렛>과 <백인의 것>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타자이자 이방인인 백인 여성이 바라본 아프리카 식민지라는 동일한 요소가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커다란 간극으로 드러난다. 향수가 깃든 로맨틱하고 평화로운 공간으로서의 <초콜렛> 속의 백인 여성과 그것을 거울화(mirroring)하는 <백인의 것>의 백인 여성은 교만하고 물욕에 찬 눈먼 여성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름다운 원피스를 입고 흑인들과 친근하게 지내며 함께 노동하면서 자신이 누리는 평화와 안락한 삶의 이면을 보지 못한다. 저변의 어두운 세계가 서서히 드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감각을 신뢰하는 ‘눈먼 자’이다. 두 영화는 여전히 몸과 감각의 세계를 그리지만, 한편에서 다른 한편으로의 분명한 이행이 있다. 타자의 매혹적인 신체라는 순진한 세계는 그 욕망의 감각이 만들어낸 어두운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드니의 인물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감각 세계의 충돌로 인물은 이미 파괴되고 분열되었다. <잠들 수 없어>에서 살인마가 되고, <백인의 것>에서 백인 여성과 아들은 광기에 빠지고, <돌이킬 수 없는>에서 아버지와 딸, 그리고 어머니까지 세 명 모두는 분열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한 가족이다. 감각 세계에서 자아가 파괴되고 길을 잃은 신체는 광인이 되기에 이른다.  

신체, 감각 작용은 비극을 만든다. 매혹의 순간은 일시적이며 달콤하지만, 파괴의 지점까지 이끌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경고의 메시지가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의문은 우리가 어떻게 신체를 길들이고 서로 화해할 수 있는가이다. 혹은 비가시적인 감각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되는지를 알고, 그것을 조정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드니의 인물들은 실패한 인간이다. 그리고 경제적, 이념적, 종교적 갈등과 테러로 얼룩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현재, 세계의 모습이 이를 증거한다.

임세은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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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감미로운 공포


클레르 드니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이다. 그녀는 뉴커런츠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그리고 신작 <금요일 밤>을 들고 부산을 찾았다. <금요일 밤>은 엠마뉴엘 베른하임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나와 애인의 방으로 이사하려는 한 여성의 불안한 심리를 그렸다. 그녀는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꽉 막힌 도시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오려는 남자를 거부하며 차창 바깥의 세계를 쳐다본다. 그리고 우연히 한 남자를 받아들인다. 낯선 이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타자와의 접촉과 만남. 여기에 침입이 발생한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의 모든 영화는 어떤 도착, 어떤 만남, 혹은 어떤 방문을 그린다. 여기에 낯선 이에 대한 매혹, 그(녀)를 받아들일지의 주저와 결정, 두려움의 감각과 미묘한 쾌락, 그리고 갱신되는 욕망들이 있다. 그녀는 침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두려움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삶에는 그런 무수한 침입이 있기 때문이다.


드니와의 두 번째 만남도 부산에서이다. 2004년, 이번에 그녀는 <침입자>를 선보였는데 이 작품의 일부 장면을 부산에서 촬영했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남자가 잠깐 머무는 장소가 부산이다. 그녀는 부산이 <침입자>의 두 부분, 즉 지옥과 천국의 중간 지대인 림보의 공간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부산은 전반부의 어두운 분위기와 후반부의 따뜻한 이미지를 연결하는 공간으로, 생동감과 활력으로 가득한 공간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하지만 당시 관객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지는 않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자신을 부산 관객이라 말한 몇 명이 던진 날선 질문들을 기억한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주인공 (백인) 남자가 부산의 호텔에서 맹인 (한국인) 여성의 마사지를 받는 장면이 구설수에 올랐다. 마사지를 하는 맹인 여성의 손가락이 남자의 피부를 만지고, 그의 몸에 있는 상처를 건드릴 때 남자의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린다. 이 장면에 관객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특별한 순간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중심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드니는 여기서 맹인 여성이 손으로 타인의 몸과 접촉할 때의, 피부를 접할 때의 감각과 고통을 영상에 가져오고 있다. 서로 다른 피부, 타자의 외관을 넘어서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다. 남자의 몸에 있는 수술 자국들, 검붉은 기미, 주름들이 마치 풍경처럼 펼쳐지고 있는데, 이는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이방인이 접하는 감각적인 풍경 같다. 서로 다른 문화적, 사회적, 인종적 배경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섞이고 침투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관능적이고 감미로운 공포의 세계이다.


이후 나는 드니를 부산에서, 그리고 전주에서 다시 만났다. 헤어질 때 언제나 그녀에게 ‘서울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었다. 이번에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은 그런 작은 소망이 실현되는 기회다. 국내에서 그녀의 근작 <돌이킬 수 없는>이 개봉하긴 했지만(한국에서 유일하게 개봉한 작품이다), 여전히 관객들에게 드니의 작품은 낯설다. 그런데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드니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결국 그런 낯섦에 접근하는 것이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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