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행복을 배워가다 - 하워드 혹스의 <볼 오브 파이어>

2015. 8. 6. 14:572015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

[2015 시네바캉스 서울 상영작 리뷰]



행복을 배워가다 - 하워드 혹스의 <볼 오브 파이어>




하워드 혹스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빛나는 언어적 감각을 빼어난 속도와 리듬을 통해 표현한 감독이기도 하다. <스카페이스>(1932), <빅 슬립>(1946), <레드 리버>(1948)와 <리오 브라보>(1959),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는 당대 최고의 장인이자 유연하고 우아한 시각을 지닌 그의 영화적 세계를 가늠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의 재능은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아이 양육>(1938), <연인 프라이데이>(1940)에 이어 제작된 <볼 오브 파이어>는 혹스의 예외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의 빌리 와일더가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에 영감을 받아 쓴 귀여운 원작, 그레그 톨랜드가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구축한 뛰어난 공간 구성과 인물의 묘사, <존 도우를 만나요>(프랭크 카프라, 1941)에 함께 출연한 게리 쿠퍼와 바바라 스탠윅의 흠잡을 데 없는 연기는 이 영화를 보는 순간 유쾌함과 사랑스러움을 지닌 동화적 세계로 빠져들게 만든다.


여기 백과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모인 8명의 학자들이 있다. 높은 책꽂이와 쌓인 책들로 이루어진 직선의 세계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아내고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토론이 펼쳐지며, 그들의 규칙적인 공동생활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질서를 이룬다. 책으로 익힌 견고한 지식과 전문 분야에 관한 해박한 견해가 있지만 삶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를 모르는 이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무지할 때조차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들의 집에 혹스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 없는 활기찬 여인이 침범하면서 학자들의 시간표는 얽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바깥 세상의 흐름과 새로운 말하기의 방식, 음악과 춤, 변해가는 세상의 풍조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여성이라는 신비로운 존재로 인해 삶의 기쁨과 행복이 책에 국한되지 않음을 습득하는 과정에 있다. 모든 것이 대척점에 놓인 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한 가지는 자족적이며 행복한 삶인데, 지식의 공동체와 실제의 세상이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삶의 사소한 부분들이 지녔던 가치가 발견된다. 노학자들은 그녀를 공동체 모두가 사랑하는 딸로 삼고, 그녀는 아버지들을 얻는다. 나아가 사랑하는 마음의 발견과 고백은 결혼이라는 제의로 이어진다. 혹스가 이들의 변화를 드러내는 방식은 깊은 심도와 어두운 조명을 사용한 학자들의 집과 밝고 경쾌한 댄스홀을 대비시키는 것이다. 또는 스탠윅의 반짝이는 드레스가 점점 수수한 옷으로 변하는 것, 늘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고 있는 빛의 신성함이 느와르에 속할 법한 안광으로 변해가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학자들의 아카펠라와 드럼 부기 Drum Boogie 를 대비시키거나 스탠윅이 처음 등장할 때 반짝이는 의상을 입은 그녀의 손가락이 커튼을 잡고 있는 쇼트와 어둠 속에서 눈만 반짝이는 장면으로 변주되는 쇼트에서도 느낄 수 있다. 혹스는 계급(재단의 지원을 받는 학자-비속어를 배우기 위해 모여든 하층민, 갱의 보스-그의 애인인 스탠윅과 조직원들)을 횡단하면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말의 향연을 만들어낸다. 연구실에서도 행복했던 학자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질주하는 자동차를 타고 총을 겨누는 장면은 예기치 않은 만남과 그로 인한 새로운 배움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고립되어 살 수 없고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감정을 배우며,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테마는 동화적 세계와 현실을 잇고 상이한 세계를 행복하게 연결시킨다. 이 영화는 혹스의 대표작은 아닐지라도 그의 소박하지만 오밀조밀한 앙상블, 생동하는 유머와 활기만으로 충분히 사랑스럽다.


박인호 영화평론가


상영일ㅣ 8/22(토) 15:40 / 8/28(금)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