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6. 15:14ㆍ2015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
[2015 시네바캉스 서울 상영작 리뷰]
‘사랑’의 또 다른 정의 - 마스무라 야스조의 <치인의 사랑>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1967년작 <치인의 사랑>은 근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다. <치인의 사랑>은 1949년과 1960년도에 기무라 케이고 감독에 의해서도 여러 번 영화화되었던 작품이다. 원작 『치인의 사랑』은 다니자키 특유의 심미주의가 잘 살아난 대표작 중 하나로, 1924년에서 1925년에 걸쳐 발표되었다. 원작자인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 근대 문학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도쿄 대학(당시, 도쿄 제국 대학) 재학 중 『문신』을 발표하며 작가로 등단하였다. 여성의 신체로 묘사된 관능적 세계에 빠져버린 남성상을 주로 다루며 탐미파 대표 작가로 인정받았다.
마스무라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치인의 사랑> 이전에 이미 다니자키의 소설 『문신』 도 그가 영화화했었다는 점이다. 물론 다니자키 작품뿐만 아니라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 등 다양한 문학 작품 등을 영화화했었지만, 유독 다니자키의 이름이 눈에 띄는 것은 다니자키의 소설과 마스무라의 영화에게서 묘한 교집합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마스무라 영화에 등장하는 기존 가치 체계를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는 여성상에서 느껴지는 다니자키 소설 속 여주인공들의 유전자였다. 특히 <치인의 사랑>속 주인공 나오미는 시대를 넘어서도 매력을 지니고 있는 여성상에 틀림없다.
마스무라의 제작 의도에 따르면 <치인의 사랑>을 통해서 “현대 사회에 억눌린 남자들의 욕구 불만이나 인간성을 되돌리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모습을 철저하게 강렬한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대량생산 시대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가족은 부정되고 그 형태가 옅어지게 된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전복되고 그런 관계 속에서 남성들은 실제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women이 아니라 표상으로서의 ‘여성the Woman’에게서 자신의 잃어버린 위치를 되찾고자 한다. <치인의 사랑>에 등장하는 죠지도 나오미를 실제 존재로서의 여성women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판타지 속에 존재하는 여성Woman으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들의 그런 우매하고 가엾은 모습이 죠지라는 30대 중반의 현대 남성으로 마스무라의 작품 속에서 희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죠지는 자신이 만든 새장으로 나오미를 가둬두려 하지만, 그녀는 그 새장 속을 답답해하며 각종 일탈을 시도한다. 그 과정 속에서 두 연인의 모습은 우스움을 넘어서 기괴함까지 느끼게 한다. 가출한 나오미의 사진을 붙들고 그녀의 부재를 슬퍼하는 죠지의 모습에서는 미디어와 광고 속의 ‘여성Woman’들에 심취하여 그녀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현대 남성들의 모습과도 오버랩된다. 그리고 사진을 애무하듯 만지는 죠지의 모습은 마스무라의 1969년도 작품 <눈 먼 짐승>의 여성의 조각을 애무하듯 만지는 맹인 미치오와도 연결된다. 현대 남성들의 여성Woman에 대한 소유 판타지는 실제 여성women과의 만남에서 항상 미끄러지는 그들의 안타까움을 대변하는 것이다. 죠지뿐만 아니라, 극 중에 등장하는 대학생, 하마다와 구마가야 또한 실제적 존재로서 나오미가 아니라 자신들의 판타지 속의 나오미를 사랑하고 그녀의 신체를 탐할 뿐이다.
죠지와 나오미는 소비문화에 중독된 현대인들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물질적인 소비에 탐닉하는 나오미와 자신이 만들어낸 나오미라는 판타지에 탐닉하는 죠지의 모습에서 충분히 현대인들의 기괴한 증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의 서사를 관통하며 흐르는 기괴함은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하는데, 본인이 말의 역할을 하며 나오미를 등에 태우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죠지의 모습과 나오미의 슬픔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은 마치 대 피터르 브뤼헐 大 Pieter Brueghel 의 그로테스크한 회화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클로즈업되는 나오미의 얼굴 사진이다. 실제 그녀의 기괴한 표정과 대비되는 강렬한 그녀의 얼굴 사진은 실제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women과 표상으로서의 여성Woman 사이에서 분열하는 현대 여성의 모습을 즉물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인은 <치인의 사랑>이란 제목처럼 치인(痴人:어리석고 못난 사람)들이 되어 버렸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랑’에 중독되어 버렸다. 영화 내내 반복되어 등장하는 공장의 굴뚝과 기계 소음이 화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처럼 현대인들의 강박이 그들의 사랑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한태준 일본영화연구자
<참고문헌>
増村保造 著, 『映画監督 増村保造の世界』, ワイズ出版, 1999
Shohini Chaudhuri(쇼히니 초두리), 『페미니즘 영화이론』, 노지승 역, 앨피, 2012
** <치인의 사랑> 상영일정
- 8/14(금) 20:00
- 8/20(목) 17:10
- 8/29(토)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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