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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

[리뷰] ‘바캉스적’인 일상 - 자크 로지에의 <맨느 오세앙>

[2015 시네바캉스 서울 상영작 리뷰]


‘바캉스적’인 일상 - 자크 로지에의 <맨느 오세앙>




시원한 바다와 맑은 하늘. 바캉스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다. 그런데 <맨느 오세앙>에서 이런 이미지를 기대할 수 없다. 말하자면 <맨느 오세앙>은 바캉스 이미지가 없는 바캉스 영화다. 영화 속에 오직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해가는 여정과 부유하는 사건이다. 영화는 바쁘게 기차를 잡아타는 브라질 삼바 댄서 데자니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파리에서 항구 도시 낭트로 향하는 기차 맨느 오세앙에 오른다. 그러다 역을 통과할 때 스탬프를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표원과 논쟁이 벌어지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이때 변호사 미미가 불어에 서툰 데자니라를 돕는다. 이를 계기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은 함께 앙제에서 하차한다. 그곳에서 미미의 고객인 선원 마르셀을 만난다. 목적지는 파리에서 앙제로, 앙제에서 섬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영화에서 목적지는 하나의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분기하는 공간으로서의 장소다. 인물들은 기차에서 자동차로, 비행기에서 배로 끊임없이 갈아탄다. 운송수단이 어디에 도착했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동은 늘 어떤 사건을 파생시키므로 공간이 변화함에 따라 사건 역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결과적으로 사건은 목적성을 상실하거나 벗어난다.


이야기의 중심인물 역시 조금씩 변한다. 영화는 애초에 중심인물처럼 보이던 데자니라가 미미와 기차에서 내린 뒤, 불현듯 기차에 남겨진 검표원들의 대화를 삽입한다. 그전까지 그저 기차 안에서 일어나는 잠깐의 실랑이를 위해 등장한 조연처럼 보였던 검표원은 이를 통해 데자니라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중심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데자니라의 이야기처럼 보였던 영화는 곧 변호사의 이야기로, 선원의 이야기로, 검표원의 이야기로, 데자니라를 관리하는 감독의 이야기로 분화한다. 이들은 별안간 한곳에서 합쳐지고 또 흩어진다.



등장인물의 공통점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행자라는 것이다. 영화는 여행자로서의 데자니라와 동시에 일상의 여행자들을 세운다. 검표원은 스스로 이야기하듯 땅의 여행자이며, 선원은 바다의 여행자다. 이와 관련시키자면 변호사는 매번 다른 사건들을 떠도는 사건의 여행자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주, 조연의 구분이 따로 없다. 그들은 각기 다른 소리와 질감을 가진 하나의 덩어리 같다. 그들은 변호사 미미가 마르셀을 위한 변론에서 언급했듯 버려질 것이 없는 조화로운 개별 언어이자, 유쾌한 합주 장면에서 등장한 피아노, 기타, 각종 도구, 춤, 노래처럼 조잡해 보이나 꽤 조화로운 공연의 구성 요소들 같다.


이 영화가 바캉스를 그리고 있다면 여기에서 휴가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났다가 다시 복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바캉스는 일상적인 사건과 구별할 수 없다. 오직 일상적인 장소와 운송수단의 연쇄만으로 이뤄진 이 영화는 어떤 바캉스 영화와도 닮지 않았다. 모험을 그린 영화, 이를테면 자크 리베트의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1974)와 닮았다. 마술 책을 즐겨 읽는 줄리와 마술사 셀린느가 환상으로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를 통해 자크 리베트는 환상과 실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독특한 세계를 형성했다. <맨느 오세앙>에서의 일상과 바캉스 역시 매듭 없이 연결되며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바캉스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김소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