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랭크 카프라와 유토피아 - 프랭크 카프라의 <잃어버린 지평선>

2015. 8. 6. 15:012015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

[2015 시네바캉스 서울 상영작 리뷰]



프랭크 카프라와 유토피아 - 프랭크 카프라의 <잃어버린 지평선>




<잃어버린 지평선>이 개봉한 1937년에 프랭크 카프라는 경력의 정점에 있었다. 일찍이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콜럼비아 영화사를 일으켜 세우고, <디즈 씨, 도시에 가다>(1936)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째 수상한 직후였다. 그 시기 할리우드에서 보기 드물게 전권을 가지고 작가적 지위(“one man, one film”)를 실현한 카프라는 당대 평균 제작비의 2배를 들여 대작 판타지 영화 제작에 나섰다. 영국 작가 제임스 힐튼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옮긴 <잃어버린 지평선>은 그러나 첫 상영에서 차가운 반응을 얻었고, 프랭크 카프라는 크게 좌절한 나머지 3시간 반에 이르는 영화의 첫 두 릴을 불태워 버렸다. 이 영화의 운명은 그 순간 카프라의 손을 떠났다. 첫 최종 편집본 6시간에서 프리미어 상영본 3시간 반, 제작자 편집본 132분. 거기서 일반 상영본은 14분이 더 줄어들었고, 1952년에는 92분 버전까지 나왔다. 1973년 AFI는 13년에 걸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필름들을 조각조각 모아 이 영화를 복원했지만 여전히 불완전하다. 영화에도 생명이 있다면, <잃어버린 지평선>은 제 아버지의 손에 반쯤 죽은 상태로 반 세기를 보낸 뒤 지금 우리 앞에 불구의 몸으로 돌아온 셈이다.



<잃어버린 지평선>은 카프라의 영화치고 다소 전개도 느리고 유머도 덜한 편이다. 이는 상영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낙원에서의 삶을 그리는 데 할애한 카프라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상상적 통념에 기댄 그 세계의 재현은 다소 관습적인 차원에 머무른다. 지루한 낙원이랄까. 이를테면 콘웨이가 도착한 ‘샹그릴라’라 불리는 그곳은 법, 경찰, 군대가 없고, 사유재산도 없으며, 시기, 질투, 탐욕도 없이 누구나 불로장생하는 ‘꿈 같은’ 세상이다. 비둘기조차 꼬리에 피리를 달고 날아다니며 세상을 음악으로 가득 채우는 곳. 샹그릴라는 티벳 국경지대에 위치한 라마교 사원 공동체라지만 실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 유토피아다. 언뜻 고전기 할리우드에서 인민주의풍의 코미디 장르의 일인자였던 카프라가 난데없이 판타지영화를 찍었다 싶겠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유토피아의 구현은 프랭크 카프라의 영원한 주제다. 몇몇 평자들은 흥행과 비평의 실패라는 점 외에도 이 작품을 카프라의 필모그래피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하곤 하지만, <잃어버린 지평선>은 이상향에 대한 카프라의 의지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그 직전의 <디즈 씨, 도시에 가다>와 직후의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1939), <존 도우를 만나요>(1941)와 연결된다. <잃어버린 지평선>은 카프라가 자신의 소박한 이상주의자 영웅들인 디즈 씨, 스미스 씨, 도우 씨를 통해 이곳 미국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머나먼 저곳에서 발견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느긋하고 평온한 샹그릴라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영화는 거의 몰아치듯 급박하게 결말을 향해 간다. 눈사태를 간신히 피하고 눈보라 속을 구르며 현실로 돌아오는 콘웨이의 여정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 무시무시한 순간들로 장관을 이룬다. 카프라의 다른 영화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장대한 스펙터클. 낙원을 떠나 홀로 첩첩의 설산을 넘는 콘웨이를 롱 샷으로 잡은 이 시퀀스는 초반부 어둠 속 수많은 군중들을 뚫고 불길 사이로 비행기를 띄우며 지옥에서 빠져나가려는 자들의 근접 숏들과 근사한 대조를 이루며 인상적인 구조를 빚어낸다. 아직 에필로그가 남아 있다. 카프라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낙원으로의 회귀라는 엔딩으로 대공황과 2차 대전 사이에 놓여 있던 당대인들에게 무얼 전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유토피아에 대한 낙관은 그때 당시 프랭크 카프라에겐 의지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조차도 결국 전후에 이르러 잃어버렸지만 말이다.



강소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