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현재의 노스탤지어 혹은 이데올로기의 휴가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혁명 전야>

2015. 8. 6. 15:252015 시네바캉스 서울 영화제

[2015 시네바캉스 서울 상영작 리뷰]


현재의 노스탤지어 혹은 이데올로기의 휴가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혁명 전야>




“나는 혁명의 시절을 살고자 했다. 혁명 이전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베르톨루치의 데뷔작 <혁명 전야>의 주인공 파브리지오는 자신의 실패를 이런 식으로 말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혁명을 준비하는 청년의 삶을 그린 영화는 아니다. 반대로 실패의 이야기, 혹은 순응자의 이야기다. 마르코 벨로키오의 <주머니 속의 주먹 I pugni in tasca>(1965)의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파브리지오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성적인 퇴행을 겪고 있다. 때는 1962년 4월. 어느 화요일, 부활절 1주 전 파르마가 영화의 배경이다. 주인공 파브리지오는 약혼자 클레리아를 ‘자신이 받아들이기 싫은 도시의 달콤함’으로 표현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파브리지오가 예정된 부르주아 가족의 미래를 받아들이지 않고 혁명적 대안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숨 가쁜 움직임. 그는 가부장적 질서를 거부하려 한다. 부모 세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역사적 수준에서 보자면 이러한 시도는 아버지 세대로 대표되는 파시즘, 과거의 역사와 결별하려는 것이다. 파브리지오는 약혼자 클레리아를 거부하며 대신 숙모와 근친상간적 관계를 가지려 한다. 가족 관계의 규범을 무너뜨리려는 시도. 하지만 이는 인물의 성장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다. 영화는 최종적으로 그가 다가올 혁명에 사는 것에 실패하는 것, 순응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지식인이 혁명의 시기를 살아가는 것의 실패를 보여주기. 베르톨루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혁명에 관한 장황설을 늘어놓기보다는 혁명 전야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이데올로기적, 감성적 위기를 보여주는 데에 더 치중한다.





영화의 한 장면이 이러한 태도를 시각적으로 예시한다. 파브리지오가 숙모 지나와 함께 오래된 성탑 안에서 카메라 옵스쿠라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지나는 성탑 안에서 마치 어두운 극장에 앉아 있는 것처럼 일종의 거울의 유희를 통해 바깥의 파브리지오를 쳐다본다. 이 영화의 유일한 컬러 장면이다. 이때 지나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치 그림처럼, 우리가 고정되어 있다면 좋겠어”라 토로한다. 지나는 시간이 자신의 삶에 스며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동일하고 고정된 것으로 변경되지 않고 남아 있기를 소망하기. 마치 사진이나 회화의 표상처럼. 나중에 파브리지오 또한 비슷한 심정을 드러낸다. “내겐 다른 열병이 있어요. 현재의 노스탤지어죠.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이 너무 멀리 느껴져요. 그래서 나는 변화를 원치 않아요.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예요. 하지만, 나의 부르주아적 미래는 부르주아적 과거에 놓여있죠. 그래서 내게 이데올로기는 휴일이에요. 휴가죠. 나는 내가 혁명의 세월을 살기를 원했어요, 혁명 이전의 삶이 아니라.” 지나와 파브리지오의 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혁명 전야’라는 영화의 제목에서 ‘혁명’이 아니라 ‘전야’라는 시간성이다. 지나와 파브리지오는 현실의 역사적 순간과 거리를 두고 있기에 최종적으로 부르주아의 과거로 되돌아간다. 영화의 최종적 순간에 그는 숙모와의 근친관계를 청산하고 클레리아와 결혼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정치적인 내용으로서 혁명적인 작품은 아니다. 반대로 파브리지오의 실패를 바라보는 스타일과 형식, 비전에서의 혁신이 급진적이다. 혁명 영화가 아니라 베르톨루치의 영화 혁명이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 <혁명 전야> 상영일정 

- 8/14(금) 17시

- 8/22(토) 1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