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데카당스라는 비스콘티의 낙인

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이 한창이던 지난 12일, 그동안 여러 차례 비스콘티의 영화세계에 들려줬던 한창호 영화평론가가 다시 한 번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했다. 그는 비스콘티의 유작 <순수한 사람들> 상영 후 이어진 강연에서, 비스콘티의 미학적 유산에 대해 풍부한 그림 자료들을 곁들이며 들려주었다.


한창호(영화평론가):
<순수한 사람들>이 비스콘티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마지막 미학적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맡게 됐다. 먼저 <순수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나중에 그림 자료들을 보면서 데카당스라는 비스콘티의 낙인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이 영화는 비스콘티가 만 70세가 좀 안 됐을 때 발표된 작품이다. 영화를 찍을 때 몸이 굉장히 안 좋았다. 결국 3월 정도에 세상을 뜨고 말았고, 5월에 칸에서 최초로 소개가 됐다. 칸이 많이 사랑했던 감독이었고 유럽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받던 감독이었으니, 많은 대접을 받는 분위기였다. 영화가 비관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흥행 8위를 했다. 죽기 직전까지 영화를 만들고 어느 정도 흥행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된다. 영화가 시작할 때 책을 넘기는 손은 비스콘티의 오른손이다. 이때 왼쪽 반신은 마비된 상태였다. 3년 전에 <루드비히>를 찍다가 무리해서 쓰려졌고 반신이 마비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후에 재활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하여 <가족의 초상>을 만든 후, 불행하게도 다시 쓰러져서 이 영화는 휠체어에서 연출을 했다. 비스콘티는 1차 편집본을 보고 대단히 실망하여 대대적으로 수정을 하겠다고 말한 후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이후 각본과 촬영감독이 합심하여 수정해서 만든 작품이 지금의 버전이다. 원작 소설의 작가 가브리엘 단누치오는 이탈리아 데카당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기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초인에 대한 세속적 욕망이 컸다. 보편적인 평범함에 대해 경멸이 있었고, 여성편력이 대단했다. 소설의 주제는 주로 쾌락과 죽음에 집중되어 있었다. 죄의식을 자극하거나 자기 파멸적인 쾌락과 자기 자신을 스스로 몰락시켜가는 죽음 등 금지의 선을 넘어서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범죄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그 당시 세기말적 유럽의 정후와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비스콘티 본인이 갖고 있는 데카당스, 부패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끌림 같은 게 단누치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게 된 것이다.

비스콘티는 툴리오라는 캐릭터에 매혹을 느꼈다. 대표적인 상층 부르주아 계급인데, 이 남자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것이다.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있고, 누구도 자기를 심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기적인 존재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버림받는 부분에 대해 견뎌내지 못하고 광기에 빠져서 아이를 죽이게 된다. 그 남자에 대해 비스콘티가 동병상련이나 자기 연민을 느낀 것 같다. 비스콘티 전공자들은, 이 작품 또한 상층 부르주아 남자를 통해 그 당시 이탈리아 상층부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반사회성이나 윤리적인 부분을 데카당스라는 방법을 통해 표현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에는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후의 작품에 그런 사회적인 부분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코뮤니스트였던 비스콘티가 <센소>를 내놨을 때 사람들이 많이 실망했는데, 공격한 것도 옹호한 것도 좌파 비평가였다. 비스콘티를 옹호한 사람들은 루카치의 리얼리즘에 대한 옹호자들이었다. 루카치의 리얼리즘은 외관과는 상관없이 세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진실을 담고 있다면 오히려 더 리얼리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례로 든 것이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다. <센소>가 루카치적인 리얼리즘의 영화적인 모범이며, 제대로 된 리얼리즘의 사례를 보여준 것이 비스콘티라는 주장이다.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후의 영화들에는 패배주의와 개인주의자들이 체념 등이 드러나 있으며 필멸의 존재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대한 성찰이 있다. 데카당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리얼리즘이나 사회적인 맥락에 대한 해석에는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순수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인형의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장식된 공간과 의상, 마리오네트처럼 의례화 된 행동만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반쯤 죽은 존재들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을 준다. 활기가 없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인다. 데카당스의 멜로드라마 표현법이 더 멜랑콜리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프린트 상태가 좀 안 좋고 컬러가 탈색돼 있어서 좀 아쉬웠다. 덧붙이자면 툴리오를 연기한 남자배우 지안카를로 지안니니는 당시에 코미디 배우였다. 능청스럽고 여성스럽게 빈대 붙는 남자 역할을 굉장히 잘했다. 여기에서 단누치오와 병든 비스콘티의 분신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줄리아나를 연기한 여자배우 로라 안토넬리는 70년대에 주로 벗는 역할을 했었다. 비스콘티는 육체적 외양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비스콘티가 데카당스 멜로드라마를 표현하는 방식은 대단히 회화적이다. 그림자료를 보면서 비스콘티의 회화적으로 표현된 데카당스의 멜로드라마 미학에 대해 알아보자. 비스콘티는 데카당스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죽음을 회화적인 도상을 통해 표현한다. <강박관념>의 남자주인공 지노는 대단히 어두운 집 내부에서 살인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유령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히스테릭하게 나온다. 어둠이라는 자극을 도상적으로 잘 보여줬다. 남자가 불안감에 빠져있으니 여자주인공 죠반나가 남자를 달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파티를 한다. 파티 준비를 할 때, 멕베스와 멕베스 부인이 살인을 공모하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사자를 상징하는 여자가 낫을 가지고 등장한다. 데카당스 시절의 독일권 화가인 뵈클린의 <페스트>(1898)의 그림과 유사하다.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죽음을 표현한 그림이다. 데카당스라는 테마가 미술을 통해 표현됐다. 또한 죠반나가 영화의 도입부에서 지노를 만나자마자 사랑을 나눈 후 돈만 많은 남자랑 사는 것에 대해 의자에 앉에 몸을 비비 꼬면서 한탄하는 장면은 모딜리아니의 <장 에뷔테른>(1918)을 참조했다. 눈동자가 없는, 데스마스크. 체념, 자극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를 표현했다.


<센소>는 그림자, 육신이 없는 것, 유령에 대한 영화다. 오페라 시퀀스가 지나고 나서 베니스의 밤에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 "나를 당신의 그림자로 받아주면 되지 않겠느냐" 라는 남자의 대사가 나온다. 농담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여자는 발이 안 보이고, 남자는 흰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두 사람 모두 유령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다가가 있는 모습을 밤에 길거리를 방황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거대한 무덤 속을 걷고 있는 두 그림자처럼 영화가 시작된다. 이 때부터 데카당스라는 테마가 비스콘티의 영화에 들어온 것이라고 본다. <레오파드>는 죽음과 소녀의 테마를 다룬다. 영화 마지막의 가장 아름다운 춤 장면에서, 비스콘티는 죽음과 소녀라는 서양 미술사의 오래된 테마를 변주한다. 검은 옷을 입은 버트 랭커스터가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이고,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순결한 소녀를 상징하는 것처럼 대조시켜놨다. 한스 발둥의 <죽음과 소녀>(1517)의 메멘토 모리, 비어츠의 <죽음과 소녀>(1848)를 참조했다. 낭만주의 시기에는 죽음이 센슈얼하게 그려진다. 뭉크의 <죽음과 소녀>(1893)에서는 소녀가 죽음을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표현한다. 죽음을 사랑의 대상으로, 죽음에 더 방점이 찍힌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레오파드>에서는 랭커스터에 방점이 있으며, 죽음을 상징하는 그 남자가 더 아름답게 나온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질병의 멜랑콜리와 염을 다룬다. 마지막 시퀀스 바로 전에 아센바흐가 이발소에서 화장을 하고 거울을 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다음날 그 복장 그대로 해변에 나갔다가 타치오를 보며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화장은 자신을 꾸미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죽은 자가 하는 의례로서의 염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또한 이 장면에서는 말러의 교양곡 5번 2악장 아다지에토 장송곡이 나온다. <루드비히>는 밤의 찬가다. 푸른색의 영화다. 비스콘티는 컬러에 대한 해석이 참 섬세한 사람이다. 루드비히라는 달의 왕에 관련된 이야기다. 비스콘티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루드비히는 예술가로 태어나야할 사람이 왕으로 태어난 것이다. 첫사랑에의 실패를 위무하기 위해 바그너의 음악에 빠지며, 중간에 동성애자로 변하는 상황을 운명의 저주처럼 받아들인다. 그런 부분에 비스콘티의 삶이 들어가 있다. 병든 사람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루드비히가 자기 왕궁 안에 인조 호수를 만들어 놓고 백조의 왕자처럼 거기에서 놀고 있는 장면이 있다. 건물 내부의 컴컴한 물이 있는 공간은 일종의 자궁이다. 차라리 엄마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 본능적으로 죽음으로 돌아가려는 심경이 드러난다. 비통함과 우울함을 증폭시키는 장면이다. <센소>를 만들 때 주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을 것을 스스로 알았을 텐데, 그런 점을 이겨낸 것은 멋진 행동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천성과, 그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한 천성을 계속해서 표현해 낸 것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낭만주의 시기의 예술가의 초상에 맞도록 자기 자신이 살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리: 박영석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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