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노 비스콘티는 네오리얼리즘으로 시작했지만 뒤로 갈수록 극단적인 탐미주의 경향을 보여준 이탈리아영화사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그런 비스콘티의 영화적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루키노 비스콘티 특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에 네오이마주의 백건영 편집장이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중심에 놓고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세계를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저주받은 자들>(1969), <루드비히>(1972)와 더불어 비스콘티의 탐미주의 3부작 중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은 관능적 사랑에 관한 낭만적 서사이자 노예술가의 처연함이 동시에 배어나는 작품이다. 비스콘티는 <저주받은 자들>에서 파시즘이 가한 육체적 폭력에 주목하는 한편 <맥베스>의 구조 위에 도스토엡스키에서 영감 받아 처음으로 색채와 분장, 인물들의 모습을 표현주의로 처리하는데, 이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미 현란한 의상과 무대장치와 엄청난 엑스트라를 동원한 스펙터클 대작 <센소>(1954)에서 오스트리아 점령하의 베니스를 묘사한 바 있는 비스콘티는 이 작품에서 오페라 연출을 흠모했음에도 결국 영화작가로 살아가야 했던 그의 모순된 인생역정의 총체화를 시도한다. 또한 이 작품은 예술창작과 쾌락적인 삶 간의 관계에 대한 명상록이기도 하다.
비스콘티는 이 영화로 토마스 만의 동명소설을 섬세하고 우아한 시각적 이미지로 풍부하게 해석해 놓았다. 게다가 음악의 탁월한 선택과 엑스트라 하나하나에게까지 정성을 다해 만들었음직한 당대 최고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피에로 토시의 의상이 어우러지면서, 영화의 어떤 장면도 놓치거나 버릴 것이 없도록 만들고 있다. 특히 영화 전체를 뒤덮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은 훌륭한 영화음악이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닌 '보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한다. 비스콘티 영화세계의 변화만큼이나 그가 선택하는 영화음악의 변화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를테면, 그는 초창기 베르디와 벨리니의 오페라를 선호하더니 이후 부르크너와 바그너를 거친 후 말러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 모든 심미안적인 감각과 기교가 비스콘티라는 거장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했겠는가.
사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만들어지던 1971년을 전후한 시기는 이탈리아 영화인들 스스로 ‘파탄의 시대’라 부를 만큼 영화산업이 쇄락의 길을 걷던 시절이었다. 시대적 사명감에 불탄 젊은 영화인들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현실의 벽을 넘으려 했지만 한 시대를 표현하기에 그들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가운데 비스콘티와 펠리니가 선배로서의 역할을 주도했고, 파솔리니와 베르톨루치, 타비아니 형제들이 가세함으로써 이탈리아 영화는 역사와 영상 사이, 국가와 민중 사이에서 벌어진 간극을 메우게 된다. 비스콘티는 이러한 시기에 ‘탐미주의 3부작’을 내놓지만, 현실에서 비켜서있는 것처럼 보이는 서사로 인해 ‘역사 밖으로의 탈주’라는 의심과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대가들의 영화는 과거나 미래에 기울지 않고 한 시대에만 집중하지 않는 법’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비스콘티에 대한 비난은 무력화 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영화는 그 사실, 모든 예술의 예술성은 그 표현 자체가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에 있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베니스의 황혼과 말러 5번 교향곡

영화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일몰 직전의 뱃길을 가르는 여객선과 단단히 차려 입은 노신사 구스타프 아센바흐(더크 보가드)의 모습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그림같이 매혹적인 첫 번째 시퀀스에서 금빛 물결을 수놓는 음악은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인데, 지독한 염세주의자인 말러는 자신의 음악에서 늘 죽음을 노래했고 5번 교향곡의 1악장에도 ‘죽음의 행진- 신중한 속도로, 엄격하게 장례행렬처럼’이라는 부제를 붙여놓았을 정도다. 하지만 영화에 흐르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4악장 ‘아디지에토’다. 이 악장은 말러가 연인인 ‘알마’에게 보내는 연서와도 같은 곡이지만 그 선율 뒤에는 음울한 죽음의 그림자가 담겨있다. 이렇듯 애잔하면서도 치명적인 음악은 죽음을 맞게 될 아센바흐의 비극적 사랑을 예시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또한 비스콘티는 영화의 시작부터 죽음에 대한 명상코드를 가득 채워놓고 있는데, 다른 이들의 활기찬 모습과는 달리 갑판 의자에 앉아 무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하는 아센바흐에게서 삶의 활력과 재충전을 위한 휴양지가 아닌 죽음 앞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는 자의 모습이 발견되는 것도 이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산마르코로 가서 증기선을 타려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심술궂은 곤돌라 사공에 의해 리도 섬으로 가는 것은 저승세계로의 여행을 연상케 한다. 이렇듯 잔잔함 속에 담겨진 격정적 선율의 말러 5번 교향곡이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의 틈새를 메워보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치명적 사랑이 몰고 올 노예술가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일 따름이다. 

심장발작으로 인해 요양 차 베니스로 온 아센바흐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열풍이 시작된 바닷가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위해 로비에 들어서면서부터 그가 지켜온 도덕적 가치는 한 순간에 무너진다. 롱테이크로 로비에 앉은 인물들을 훑어가며 한 바퀴 돌던 카메라가 멈춘 지점에 타지오(비요른 안드레센)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순수하면서도 신비로운 외모를 지닌 타지오는 항상 이성과 합리성을 덕목으로 살아오던 아센바흐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그는 내면에 숨겨져 있는 동성애 본능을 끄집어내면서 이전에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디오니소스적 관능의 세계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영화는 죽음을 앞둔 노작곡가의 시선과 행적을 통해 예술의 창작과 타락한 쾌락, 삶과 죽음, 이성과 감성, 디오니소스적 감성과 아폴론적 이성 사이를 넘나들면서 대극적 서사를 펼쳐내기에 이른다. 

소격화되고 중복된 재현

비스콘티의 영상미학의 중심은 소격화와 중복된 재현방식이다. 세밀하게 말하면, 비스콘티는 카메라를 편집도구화 시키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서사의 단절과 분리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시각, 청각적 재료를 가지고 특별한 방식으로 극단적이리만치 정확하게 조율해온 그가 이 영화에서는 과도하리만큼 줌을 사용한다. 즉, 비스콘티 영화의 특징 중 하나인 클로즈업을 배제한 거리감두기가 이 영화에서는 줌-인-아웃의 극단적 활용을 통해 시각적 거리감을 유지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심리적 거리감이 아니라 시각적 거리감이라는 것이다. 줌을 사용한 장면들의 대부분은 아센바흐의 시점이거나 그의 심리상태를 설명하는 것에 할애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줌이 그 대상을 타지오로 선택할 때는 그의 얼굴과 동선까지 포착하며 빠르게 코앞까지 당겨버리는데 반해, 아센바흐의 경우는 그의 감정변화를 감추기라도 하듯 애써 일정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과도한 클로즈업이 사용된 예는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근접촬영 정도에 머물곤 했을 따름이다. 가령 아센바흐와 타지오가 처음 대면하는 로비 장면을 보면, 관객은 타지오에게 매료된 아센바흐의 표정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로 볼 수 있다. 다만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 심적 동요가 일고 있음을 간파할 뿐이다. 이러한 장면은 둘이 마주치는 호텔에서, 해변에서, 시내 골목길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카메라는 냉정하고 또 차갑게 둘 간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대신해 말러의 선율과 매혹적 미장센이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센바흐는 타지오에게 한마디의 말도 걸지 못하면서 그를 따라 해변을 산책하며 끊임없이 주시한다. 또한 타지오가 자기 또래의 동료들과 지나치게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질투로 온몸이 타들어 간다. 비스콘티가 유럽 전역을 돌면서 겨우 찾아낼 정도로 가장 공들여 캐스팅한 비요른 안데르센이 연기한 타지오라는 캐릭터는 대사는 거의 없지만, 과연 그 외모 자체가 엄청난 신비로움과 모호함을 뿜어낸다. 그는 아센바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어느 순간 그에게 강렬한 시선을 되돌려주다가도 그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은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탐미주의의 최고봉으로 이 작품을 거론하게 만드는 다른 이유이기도 한데 즉, 실제적인 연애양식과 무관하고 에로티시즘의 서사를 뒤집으면서 오로지 시각효과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센바흐에게 있어 동성애란 실제 충족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시각적' 만족에 바탕을 둔 것이란 점이다. 덧붙이면 타지오와 아센바흐의 관계는 시각적 만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인데, 타지오를 사랑하게 됨에 따라 아센바흐는 ‘주시하는 자’이면서 ‘바라보는 자’가 되며, 아센바흐와 타지오의 감정교류는 오로지 시선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센바흐가 죽기 직전, 콜레라로 인해 철 이르게 텅 비어버린 해변에 홀로 서 있는, ‘주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카메라’는 아센바흐의 동성애적 정열의 ‘시각적’ 성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영화에 거듭 등장하는 유사한 장면과 인물들의 설정으로 인해 불러오는 기시감(旣視感)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아센바흐가 탄 여객선의 이름인 에스메랄다는, 아센바흐가 베니스로 오기 전 찾아간 매음굴 창녀의 이름과 동일하며, 식당에서 타지오가 치던 곡과 에스메랄다가 자기 방에서 치던 피아노곡 모두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점도 일치한다. 회상 신에서 아센바흐는 에스메랄다와 성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이는 에스메랄다라는 과거를 돌려보내는 대신 타지오를 선택하는 치환과정을 통해 아센바흐의 성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반복재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영화에는 세 명의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선상에서 만난 화장한 노인과 곤돌라의 무허가 뱃사공, 그리고 호텔에 들어와 노래를 부르던 밴드가 그들이다. 불균질적으로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마치 죽음을 예비하고 인도하는 저승사자의 예고 없는 방문처럼 느껴진다.

비밀의 매커니즘 - 동성애와 콜레라

독일작가 토마스 만의 작품에는 ‘에로틱한 우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에로틱한 우정’이 동성에 향해지면 동성애적 경향을 띠게 되는데, <부덴부로크가의 사람들>에서 한노가 같은 남자에게 쏟는 감정, <토니오와 크뢰거>에서 토니오가 한스에게 보내는 동경심, 영화로도 만들어진 <마(魔)의 산>에서 카스토르프가 동급생 히페에게 보내는 연정, <파우스트 박사>에서 아드리안이 천재적인 어린 조카에게 보내는 감정이 그러한 것이며, 토마스 만 역시 부인과 결혼하기 전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할 때, 한때 동성애적인 갈등을 겪었다는 것이 최근에 공개된 그의 일기에서 드러났다.
타지오를 향한 아센바흐의 열망은 차치하더라도, 영화 초반 심장에 이상이 생긴 아센바흐를 바라보며 손을 잡고 안도의 한숨을 짓는 알프레드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 두 사람 사이도 의심의 여지가 충분할 정도지만,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동성애는 과격한 성애표현은 고사하고 사소한 신체접촉조차 나오지 않는다. 비스콘티는 왜 육체적 관계를 배제하고 오로지 시선의 충족으로만 치명적인 사랑을 표현했을까? 그것은 베니스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비밀’의 기능성을 모두 충족시킴으로써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더하려는 수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중요한 장치인 동성애는 ‘비밀’과 ‘은밀함’ 아래서 기능할 때야 비로소 격정성이 커진다는 것이고, 베니스가 한 때 동성애자들의 천국이었다는 공공연한 사실을 바탕으로 오히려 그 장소를 배경으로 삼되, 정상적인 관광객들 사이에 두 남자를 배치시킴으로써 사적 비밀 유지를 통한 욕망의 극대화를 노렸다는 것이다.
과연 “욕망은 비밀을 자양분으로 하여 자란다”는 말과 이렇듯 완벽하게 접점을 이루는 영화가 또 있을까? 영화 속 베니스는 콜레라가 창궐하여 사람이 죽어 나가고 시내의 상점은 문을 닫았으며 거리에서는 방역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리도 섬 베인즈 호텔에 투숙중인 관광객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관광수입으로 먹고 사는 도시에서의 전염병 발병이 불러올 결과 때문에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이다. 결국 시내와 호텔 사이에 비밀과 생존이라는 벽이 가로놓인 셈이다. 또한 아센바흐가 타지오를 사랑하는 것 역시 비밀이다. 물론 이것은 사적인 비밀이기에, 그는 혼자 생각하고 상상하며 오로지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드러내고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절절한 심정을 대변해주는 장면이 영화에도 나오는데, 환전소 직원으로부터 “콜레라가 발생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내일 당장 이곳을 떠나라”는 말을 듣는 순간, 타지오의 가족에게 알림과 동시에 타지오의 머리를 쓰다듬는 꿈같은 상상을 잠시나마 해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결국 그는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한 채 “절대로 그렇게 미소 짓지 마. 누구한테도 그렇게 미소 짓지 마. 널 사랑한다”라는 독백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공표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렇듯 영화는 공적 비밀과 사적 비밀을 병치시켜놓음으로써 아센바흐의 열망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숨통을 조여 오는 공간 속에서 사적 비밀을 유지하고 이어가고자 애쓰는 노신사의 몸부림이 추하거나 부도덕하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공감가능 한 것 역시 비밀의 메커니즘이 지닌 속성들 때문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결국 아센바흐는 청교도적인 그의 도덕적인 관념과 이상이 타락되는 것이 두려워 타지오로부터 도망치고자 기차역으로 달려가 뮌헨 행 열차를 타려고 한다. 하지만, 역무원들의 사소한 실수는 오히려 그에게 타지오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빌미거리와 희망을 선사해준다. 다시 리도 섬 호텔로 가는 배 위에서 미소 짓는 아센바흐, 그리고 타지오를 보려고 다시 찾은 해변 가에서 가족들에 둘러싸인 타지오를 보며 짓던 흐뭇한 그의 미소. 이때 그의 삶은 처음으로 활기를 띠며 배경음악은 연신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던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대신 생명력 넘치는 3번으로 바뀐다. 타지오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예술혼으로 승화라도 시키려는 걸까? “감각적인 것을 통하지 않은 예술은 거짓“이라는 플라톤의 말을 독백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이르고, 해변에서 타지오를 바라보던 그는 악상이 떠오른 듯 처음으로 작곡에 몰두하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 콜레라를 피해 떠나려는 타지오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해변을 찾은 아센바흐. 그리고 베니스에서 잠든다.

순수미와 정신의 힘을 믿었던 인물 아센바흐, 때문에 말년에 찾아온 벼락같은 사랑 앞에서 너무 힘없이 무너지는 그의 모습은 더 없이 가엽고 애처롭기만 하다.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어서도 아니고, 금기된 사랑이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친구인 알프레드와의 논쟁을 통해 “미와 순수는 정신적 행위”라 부르짖으며, “감각을 통해서는 정신에 도달할 수 없다”던 아센바흐였기에, “천재성은 신이 주는 선물”이라는 알프레드의 말을 맞받아치며 “난 예술의 악마적인 힘을 믿지 않”던, 그러나 타지오를 만난 이후 ‘예술의 악마적인 힘은 천재의 양식이자 필수적인 요소’라는 논리와 타협하며 염색과 얼굴의 화장을 하고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했던 아센바흐의 모습에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형상을 찾을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까운 것이리라.
결국 생의 마지막, 아센바흐가 바라본 것은, 살면서 한 순간도 놓지 않았던 그러나 찰나에 잃어버린, 정신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 순수미의 표상 아폴론이었다. 유럽 상류사회를 조롱하던 악사의 웃음소리도 창궐하던 전염병도, 노예술가의 치명적 사랑의 서사도 바닷가에 선 타지오가 몸으로 만들어내는 아폴로의 현현(顯現) 앞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으니 어찌 베니스에서라면 죽음인들 슬프다 하겠는가. 그러니 감성이 이성을 무너뜨리고, 순수미가 퇴폐미 앞에서 허물어지는 순간일지라도 끝없이 자신을 다잡고자 애쓰던 아센바흐의 마지막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며, 동시에 처연하지만 아름답고 몽환적이면서 절절한 비스콘티의 탐미주의에 경의를 표한다. (글/ 백건영_ 영화평론가, 네오이마주 편집장)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