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어머니’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탈리아의 남성들은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집안의 시설이 고장 났을 때 어머니의 이름을 팔면 한달 후에 온다던 수리공이 그날 바로 찾아와 고쳐준다는 일화도 어머니의 영향력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비스콘티의 초기작 <벨리시마>는 거칠고 강한 전후의 이탈리아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안냐 마냐니는 <벨리시마>에서 자신의 딸을 소모시키는 억척 같은 어머니상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관객들의 마음 이곳 저곳을 찌르는 호소력은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과장된 연기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이탈리아 영화의 인장으로써 특색 있게 빛난다. 특히 마냐니는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 받고 극단에서 클럽을 전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영화 속 아이에게 자신을 이입시켜 더욱 극성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벨리시마>는 비스콘티의 초기작인 동시에 너무 빠른 대사로 인해 이탈리아 밖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다. 어린 딸을 가진 엄마가 딸을 특별하게 기르기 위해 영화감독의 공개 오디션에 참가시켜 캐스팅이 되도록 온갖 힘을 쓰려는 데서 영화는 시작한다. 문제는 아이가 전혀 연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갈등 속에서 상처받는 순수한 아이를 포인트로 삼고 기관차처럼 달려간다. 아이가 울어도,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 엄마에 눈에 보이는 것은 슬퍼하는 아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혹은 허상에 가까운 아이의 재능과 성공)이다. 아마 영화를 보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아이에게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연기에 전혀 재능이 없는 아이를 뛰어난 연기자로 포장시키려고 애를 쓰는 어머니의 과한 욕심에서 그 어떤 안타까움이나 연민을 느끼기도 전에 짜증을 느끼게 된다.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오디션 장으로 향하는 아이들은 너무나도 쉽게 어른들의 세상에 갇힌다. 그래서 인지 영화는 어두운 프레임에 갇혀있는 아이를 여러 번 보여준다. 사진기 앞의 아이, 자기 전 어둠 속에 갇혀 우는 아이. 사진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진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투영된 상처를 받는 어린이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은 사회의 순수한 단면과도 같다.


<벨리시마>는 이탈리아 영화의 여러 상업적 관습을 따르고 있다. 멜로드라마의 삽입과 화려함 그리고 연극적인 연출이 그것이다. 조감독과 막달레나의 러브스토리는 유치하고 큰 영향을 주진 않지만 극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연극적인 연출은 영화 전체에 스며들어있다. 시대의 스타 마냐니, 영화의 큰 부분을 그녀에게 지탱하고 있는 것부터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주 관객과의 소통을 하려는 듯 의식적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 무대와 실내에서의 잦은 촬영은 더욱 연극적인 모습으로 각인된다. 영화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이탈리아의 영화도시 ‘시네시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파시즘 정권에 만들어진 완비된 촬영소는 전후 이탈리아 영화의 부흥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비스콘티는 그 ‘시네시타’에 경의를 표하고자 했던 것일까?

영화의 험난한 여정은 마지막 스크린 테스트에서 종점을 찍는다. 현실을 자각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느끼게 된다. 마치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느꼈던 창피함과 아이를 향한 속죄로 귀결된다. 비스콘티는 이 영화를 만들 때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를 변주하는 느낌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어머니. 그렇게 험난했던 모성애의 변주곡이 끝날 때, 아이(비스콘티)는 우스꽝스러운 사회 속에서 빠져 나와 비로소 단잠을 잘 수 있게 된다. (정태형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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