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역사적 맥락으로 살펴본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

지난 13일 비스콘티 독일3부작의 첫 번째 영화인 <저주받은 자들> 상영 후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는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이라는 문제를 흔히 많이 거론되는 데카당스적 미학보다는 영화사적 문맥이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았다. 흥미진진했던 그 시간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오늘은 비스콘티 영화의 매혹성이라는 문제를 미학적 성격보다는 역사적 맥락을 통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비스콘티의 데카당스적 미학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강렬함 때문인지 영화사적 문맥이나 역사적 문맥들이 덜 얘기되는 것 같다. <저주받은 자들>의 내러티브는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크게 보자면 마틴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더 넓게는 마틴이 에센벡 가문 전체를 궤멸시키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개인적 살해와 대학살의 범죄가 면책되었던 시기가 나치즘의 태동기로,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마틴의 가계 살해와 나치의 대량 학살은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1933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종결되고, 비스콘티의 표현을 빌자면 살인국가가 시작되는 시기이며, 중산층이 몰락하고 귀족과 자본가들이 나치에 협력하기 시작하고, 영화에서 보자면 도착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크게 4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막에서는 에센벡 가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당시 독일의 실제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막에 해당하는 요아힘의 생일파티에서는 1933년에 있었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언급되며, 3막에서는 나치 친위대원들이 돌격대원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인 '장검의 밤'이 묘사되고 있다. 4막에서는 다시 돌아온 헤르베르트의 이야기에서 다카우 수용소가 환기되는데, 이는 히틀러 집권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수용소로, 처음에는 반나치 정치인들을 수감하는 곳이었다가 나중에는 유대인들을 수감하는 수용소로 변했다. 결국 이 영화는 2년 정도의 시기에 걸쳐 나치즘의 발현과 가계 내의 권력적 이동의 여러 양상들을 같은 맥락으로 다루고 있다.

4막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보게 되는 곳이 1막과 4막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저택에서의 저녁식사라는 가족의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가족의례는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동시에 1막은 장례식으로, 4막은 결혼식으로 끝나고 있다. 하지만 소피와 프레드리히의 결혼식 역시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는 점에서 둘 모두 죽음의 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스콘티는 귀족들의 양식화되고 의례적인, 제의적인 행사들을 영화에 담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레오파드>가 그러한데, 그런 장면들이 비스콘티 영화를 보는 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저주받은 자들>에서의 의식은 여전히 우아하고 세련되고 화려하지만, 그 안의 부패나 죽음, 타락이라는 면이 훨씬 더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스콘티의 다른 작품들에서 그런 의례들이 이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일종의 향취를 의미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의례 자체가 내부에서 부패하고 썩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귀족사회의 몰락과 죽음으로 연결되는데, 어떤 점에서 이런 몰락이 재촉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첫 번째로 보자면 외부적인 침입이 있다. 1막에서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소개되는데, 그 가운데 프레드리히와 아센바흐는 차를 타고 저택의 외부로부터 들어오는데, 그들이 차안에서 나누는 대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둘의 결탁을 표현하는 것으로, 후에 벌어지는 '장검의 밤' 시퀀스에서도 둘은 함께 등장한다. 즉, 이들은 에센벡 가와 구 돌격대(SA)를 궤멸시키는 사건에 동시에 연루되어있다. 결국 둘의 연대가 외부적 침입의 궁극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 침입보다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내부적인 부패와 궤멸의 지점이다. 침입이 진행되기 이전부터 이미 내부에서는 타락과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가계나 귀족 계급의 몰락은 구시대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사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의 시간성이 내부적 부식과 부패로 이어지기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간의 필연적인 부패는 그 집단이 밀실처럼 폐쇄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부패나 쇠락은 비스콘티 영화의 내적 공간성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공간의 밀폐가 시간의 부패를 초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스콘티 영화의 대부분은 밀실적인 폐쇄적 공간이 주를 이룬다. 후기 작품들로 가면 갈수록 내부 공간과 바깥을 연결하는 통로가 없어진다. 밀실의 공간, 완전히 닫힌 세계에서 시간은 부패하고 쇠락한다. 이런 점이 관객들에게 강한 매혹을 주고 있다. 인물들은 결국 쇠락의 길로 빠져들겠지만, 폐쇄된 공간 안에서 과거의 추억과 이미지와 기억들이 인물의 몸에 거주하고, 이를 통해 그 인물의 고고함과 귀족성이 아름답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받은 자들>에서 그것은 굉장히 비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마틴이라는 인물의 행태를 주목하게 된다.

요아힘의 생일파티에서, 어린 아이들은 시를 낭송하고 귄터는 바흐의 사라방드를 연주하는 가운데 마틴은 마를린 디트리히를 흉내 내는 드랙쇼를 벌인다. 이 공연 장면은 몇 가지 층위로 읽어낼 수 있다. 첫 번째는 마틴이 에센벡가 안에서 굉장히 반항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성적 도착을 보여주는데, 이는 1930년대 독일 사회의 변화라는 맥락내에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공연은 애매한 구석들을 갖고 있다. 마틴이 가게 되는 경로와 귀결점을 보았을 때 비스콘티는 마틴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마틴의 모습이 주는 관능성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종종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처하는 자가당착적 문제가 있는데, 어떤 인물의 폭력이나 도착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이 지닌 폭력과 도착에의 관능성을 함께 담아낸다는 점이다. 압도적인 존재감과 관능성을 가진 헬무트 베르거 같은 인물이 아니라, 조금 더 거리두기가 가능한 배우를 설정했다면 손쉽게 비판적 층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대체로 그가 지닌 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자가당착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후에 만들어진 밥 포시의 <캬바레>를 들 수 있다.

마틴의 쇼에는 다른 뉘앙스도 있다. 고전적인 귀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첼로의 고귀한 선율에 비해 바로 이어지는 마틴의 쇼는 굉장히 쾌락적이고 쇼비즈니스적이다. 그것이 가문에서 거부당할 때, 그가 취하는 또 다른 방식이 나치즘과의 결탁이며 그것은 결국 가계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모호한 것은 그래서 비스콘티가 정치적 변절과 성적 변화를 이상한 방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공연에서 드러나는 마틴의 성적 변화는 나중에 발생하게 될 그의 정치적 변질의 징조와 의미로 표현된다. 처음에는 여장을 하고 마를린 디트리히를 흉내내는 드랙쇼를 벌이지만, 나중에는 나치즘의 제복을 입고 또 다른 의미의 쇼를 벌인다. 이 둘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정치사회적 부분과 성적 도착을 연결시키는 맥락에서 이 영화는 기묘한 역설을 보여준다. 병적이라 할 만한 정치적인 힘 아래서 인간성의 영역이 도리어 성적인 변질을 겪는 인물들에 의해서만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3막에서 벌어지는 '장검의 밤'에 등장하는 돌격대원들도 마찬가지다. 마틴과 이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에 비해 아센바흐라는 인물은 한 치의 변형성도 없는 냉철한 인물로 묘사되며 나치의 악과 미, 그리고 그것이 갖고 있는 굳건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서운 것은 마틴의 성적 도착이라기보다는 굳건하게 이 영화를 장악하고 있는 아센바흐의 존재감일 것이다. 이 인물은 사실상 프레드리히가 요아힘을 죽이게 만들고, 이어 마틴이 프레드리히를 죽이게 만든다. 두 아버지의 살해에 이어,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또 다른 아버지의 초상, 즉 히틀러가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루드비히>와 <순수한 사람들>로 이어지는 독일 3부작의 시작을 이루고 있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필연적으로 상실된 것, 그리고 상실 이후에 이해될 수 있는 과거의 시간, 그 과거의 시간을 되찾는 수단으로서의 예술이 보다 부각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애매한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동시에 1970년대에 등장하는 유럽의 역사 영화들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치 정권의 도래와 나치즘, 그것의 가장 극악한 표현으로서의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이후의 역사 영화들이 고민했던 근본적인 문제들에 화두를 던졌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나치 집권 사회 안에서의 인간, 다시 말해서 인간 내부의 문제 등이 간과되는 면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런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정신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는 병리학적 부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동시에 독일 파시즘이 갖고 있었던 매혹을 어떻게 내부의 시선에서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회피하지 않고 그것과 마주할 수 있는지의 고민이 이 영화에서부터 촉발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 이후에 만들어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 같은 영화는 매혹이나 섹스, 죽음, 폭력, 멜로드라마와 같은 소재로 파시즘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로부터의 적, 위장된 형태로서의 자아의 병리적인 현상에 근거해 파시즘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파시즘이 갖고 있는 내부적 매혹이라는 문제도 이 영화를 기점으로 본격화되는데,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이나 파스빈더의 <릴리 마를린>, <절망> 등의 영화들이 그 계보를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주받은 자들>은 새로운 방식의 역사영화, 새로운 방식의 파시즘에 대한 미학적 표상을 이루어낸 선구적인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정리: 박예하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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