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베츠 스타일의 시발(始發)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

- 존 카사베츠의 <그림자들>

 

 

 

미국에서는 스튜디오 시스템이 쇠락하고, 세계적으로는 뉴웨이브의 물결이 휩쓸고 있던 1950년대 후반 발표된 존 카사베츠의 데뷔작 <그림자들>은 미국 독립영화사의 이정표였다. 감독 데뷔 전 배우로 이름을 날린 카사베츠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청취자들에게 십시일반 돈을 끌어 모아 4만 달러라는 저예산으로 만든 이 영화는 천편일률적인 스튜디오 영화의 대안이 무엇인가를 예증하는 기념비였다. 시나리오가 없고, 오로지 출연자들의 즉흥적인 연기를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16밀리 흑백 카메라를 들고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했고, 짧게 끊어지는 에피소드, 클로즈업의 빈번한 사용 등으로 영화의 호흡과 전개는 어떤 기성 영화들에서 보던 것과도 완연히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그림자들>의 모토인 즉흥성 안에 새로운 기운들이 태동하고 있었던 당시 영화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특질들이 두드러지게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림자들”이라는 제목이 가진 의미는 영화의 크레디트 시퀀스에서 상징적으로 보이는데, 작중 인물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삶 안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물들이다. 크레디트 시퀀스에서 핫 재즈에 심취한 클럽의 무리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주인공 벤(벤 카루더스)은 그 무리 속에 섞여들지 못하고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열기에 취한 군중들을 응시하고 있다. 자신의 공간에 꼭 들어맞지 않고 그 공간을 부유하는 인물들에 대한 거친 스케치는 영화의 일관된 기조이며, 이를 형상화하는 스타일의 잉여는 영화의 고전주의를 탈피하는 하나의 방식을 보여준다. 재즈 가수인 휴와 벤, 렐리아 세 남매를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완전히 흑인의 외양을 지니고 있는 휴와 달리 벤과 렐리아는 백인과 흡사한 외모를 가진 탓에 인종적인 이슈를 만들어낸다. 세 남매의 조합으로 인해 야기되는 갈등은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는데, 둘째인 벤 캐릭터는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과 <네 멋대로 해라>의 장 폴 벨몽도를 즉각적으로 연상시킨다. 히스테리컬하고 우울하며 매사에 반항적인 벤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집에서 여자들에게 수작을 거는 목적 없는 삶을 지속하면서도 이러한 자신의 삶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렐리아 또한 백인인 토니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아의 분열을 경험한다. 아버지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맏이 휴는 냉혹하고 저열한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서 자신의 예술적 자긍심이 끊임없이 짓밟히는 수모를 겪고 이로 인해 매니저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루퍼트와 갈등을 겪는다.

 

 

<그림자들>은 거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활력으로 인디의 정수를 꿰뚫고 있다. 세 남매를 주인공으로 벌어지는 세 개의 큰 이야기들은 영화 속에서 특별한 연결 고리 없이 뒤섞이며 전개된다. ‘즉흥성’이라는 연출의 기조가 캐릭터 구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히스테리, 우울함, 목표를 상실한 표랑의 상태를 시각화하는 카메라는 인물에게 밀착하여 그들의 감정을 추상화하고 있다. 정돈되지 않은 생기와 활력, 거친 에너지가 넘실대는 카사베츠 스타일의 시발(始發)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이다. (장병원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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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지 않게

-존 카사베츠의 <투 레이트 블루스>

 

 

 

 

 

‘걸작’으로 알려진 대표작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영화를 별 기대 없이 보다 자기도 모르게 빠져든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실 <투 레이트 블루스>는 존 카사베츠의 영화 중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하지만, 오프닝 시퀀스에서 아이들과 주인공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즐겁게 재즈를 연주하는 장면의 시작부터 영화에 빠져들게 하는 작품이다.

 

 

<투 레이트 블루스>는 카사베츠의 두 번째 영화이자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만든 첫 번째 ‘주류’ 영화이다. 아무도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림자들>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자 미국의 배급사들은 부랴부랴 이 영화를 뒤늦게 개봉했으며 파라마운트 픽쳐스는 카사베츠의 다음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재즈를 소재로 한 두 남녀에 대한 영화가 제작에 들어갔고 존 카사베츠는 신인으로는 이례적으로 각본과 제작, 연출을 동시에 맡아 <투 레이트 블루스>를 완성했다.

 

 

이 영화는 가난한 재즈밴드의 ‘고스트’와 아마추어 가수인 제스의 사랑이야기로서 이 짧은 한 줄만으로도 한 편의 할리우드 영화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유쾌한 밴드 멤버들, 재능은 있지만 경험이 부족한 가수,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피아니스트, 그리고 마침내 결실을 맺는 둘의 사랑. 물론 여기에 중간중간 등장하는 근사한 스코어까지. 그리고 이런 전형적인 필수 요소들이 <투 레이트 블루스>에는 빠짐없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시에 고전적 헐리우드의 스타일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어딘지 툭툭 끊어지는 카사베츠 특유의 편집에 카메라는 세트 바깥으로 나가려 하고, 근사한 파티장에서 만난 젊은 남녀는 굳이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 보통 동네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데이트를 한다. 그리고 음악영화에서는 찾기 힘든 정지된 제스처와 고요한 적막이 수시로 등장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차분하고 쓸쓸하게 가라앉힌다.

 

 

그러니 이 영화는 어딘가 어중간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근사한 헐리우드 러브 스토리를 기대한 관객은 낯설다고 생각할 것이고, 카사베츠 특유의 스타일로 만들어진 음악 영화를 기대한 관객은 플롯이 너무 전형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내려두고 영화 속 재즈선율과 뉴욕의 사실적인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의 불균질한 매력이 당신을 끌어당길 것이다. 또한 세이무어 카셀, 발 에이버리 등 카사베츠의 배우들이 풋풋한 모습으로 출연하는 것도 관람 포인트이며 주인공의 밴드가 대형 음반사와 겪는 갈등은 영화를 찍을 당시 카사베츠의 상황과 심정을 암시하며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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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베츠의 또 다른 그림자

- 존 카사베츠의 <기다리는 아이>

 

 

 

 

<기다리는 아이>는 카사베츠의 영화 중 가장 이례적인 영화다. <그림자들>로 첫 연출데뷔작을 내놓은 카사베츠가 할리우드에서 두 편의 영화를 연이어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투 레이트 블루스>와 <기다리는 아이>다. 『존 카사베테스의 영화들』의 저자 레이 카니는 이 두 작품과 <글로리아>(<글로리아> 역시 할리우드에서 작업했다)를 두고 “작품성이 떨어지”며 “카사베츠의 영화 중 가장 흥미 없는 작품”이라 혹평한다. 그나마 <투 레이트 블루스>는 존 카사베츠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뉴욕 재즈씬을 배경으로 직접 각본을 썼던 영화지만, <기다리는 아이>는 그저 ‘할리우드의 간섭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예술적 비전을 실현할 기회를 거의 봉쇄당한 영화였다.

 

 

<기다리는 아이>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버트 랭카스터와 주디 갤런드가 주연을 맡았으며, 40년대부터 미국 내에서 커다란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스튜디오 원’ 시리즈에서 57년 방영된 동명의 에피소드를 원작으로 한다. 즉, 카사베츠가 직접 각본을 쓰지 않은 유일한 영화라는 얘기다. 원래 감독으로 내정돼 있던 잭 클레이튼이 하차한 뒤, 아직 파라마운트와 계약에 묶여있던 카사베츠는 TV버전 및 영화의 각본을 쓴 애비 만의 추천으로 연출을 맡게 된다. 제작을 맡은 이는 바로 스탠리 크레이머. <시라노 드 벨주락> <하이눈>의 제작자로서뿐 아니라, <흑과 백> <초대받지 않은 손님> 등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소위 ‘메시지 영화’들로 이름이 높은 감독이기도 했다. 보다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영화문법을 옹호하던 크레이머가 배우들의 즉흥연기를 중시하며 새로운 영화적 비전을 지니고 있던 카사베츠와 내내 불화를 빚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더욱이 버트 랭카스터와 주디 갤런드, 각본가 애비 만은 모두 크레이머가 연출과 제작을 겸한 1961년작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이미 팀을 이룬 전력이 있다. 결국 카사베츠는 영화의 후반작업 중 해고를 당하는 굴욕을 당했고, 영화는 크레이머의 의지에 따라 재편집됐다. 실제로 카사베츠는 이 영화와 인연을 끊은 채 ‘스탠리 크레이머의 영화’라 불렀고 자신의 버전보다 “너무 많이 센티멘탈하다”고 비판했다. 이때의 상처로 카사베츠는 다시 독립영화 방식으로 돌아와 <얼굴들>을 완성했고, 이후 아내인 지나 롤랜즈와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일종의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영화를 찍는 이른바 ‘카사베츠 방식’의 제작을 고수하게 된다.

 

 

그러나 치명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실제 지체장애학교의 아이들을 대거 출연시켜 얻게 된 생동감, 카사베츠의 특유의 클로즈업과 유영하는 듯한 카메라 등 ‘카사베츠적 특징’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카사베츠의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시스템’을 만났을 때 생기는 긴장감은, 비록 우리가 아는 ‘카사베츠 스타일’과는 현격히 다르되 당대 할리우드의 여느 영화들과도 다르다. 만약 그가 할리우드에 무사히 안착했다면 이후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지 이 영화를 통해 가늠하고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정말 그랬다면 할리우드는 또 한 명의 ‘위대한 이단아 감독’을 갖게 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에겐 그가 ‘미국 인디영화의 대부’로서 남은 게 훨씬 축복이긴 하지만. (김숙현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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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1989년 3월 존 사베츠에 관한 특집기사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의 사망을 기린 추모 특집판이다. 가장 흥미로운 글은 카사베츠를 자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여긴 마틴 스콜세지의 간결한 에세이였다. 그는 카사베츠의 영화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던 시절에 나는 처음 <시민 케인>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식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내가 겪은 두 번째 충격은 존 카사베츠의 영화 <그림자들>이었다. 이어 나는 트뤼포, 고다르, 샤브롤, 안토니오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최고의 감독은 카사베츠였다. 그의 작품은 어떻게 에너지와 감정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모든 물질적 어려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오슨 웰즈의 모든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스무 번 정도를 보아야만 했었다. 하지만 카사베츠의 영화는 단지 한 번만 봤을 뿐이다. 내가 그 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정감이 있고, 심리적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내게 있어 카사베츠의 영화는 다양성과 현존, 삶 그 자체의 본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영화에서 삶을 포착하기를 바랐던 그러한 것이었다”.

 

 

레이 카니와 나눈 인터뷰를 읽어보면 존 카사베츠는 그의 영화경력 초기부터 인물의 마스크를 벗기고 배우의 연극적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일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삶에서 가장 큰 실험이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만큼이나 무대화되고 인공적인 것이라 여겼다. 생생한 경험은 드라마틱한 경험만큼이나 관습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누군가를 연기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스크를 벗으면서 마치 다큐멘터리적인 정밀함으로 얼굴을 노출시킨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그림자들>과 <얼굴들>에서 그는 마스크와 얼굴들을 드러내는데, 표면적으로는 즉흥적인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즉흥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즉흥성은 인물들의 제멋대로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아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그림자들>의 즉흥성은 대략 18시간의 촬영으로 얻어낸 즉흥성이었다. <얼굴들>의 경우는 150시간의 테이크가 필요했다. 많은 횟수의 촬영이 그가 ‘완벽성’을 기하려 시도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카사베츠는 반대로 ‘불완전성’을 추구한 작가였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완성’이란 표현은 내러티브의 완결성, 이야기를 매듭짓는 것, 각본의 이야기를 얼마나 충실하게 영화로 구현해내는가에 달려있다. 이야기의 완성은 일종의 제도화 과정이다. 이야기가 그린 현실을 영화의 기법으로 얼마나 완성도 있게 구현하는가가 관건이다. 카사베츠는 다른 경로를 추구했다. 그는 작품의 완성에서 실패할 권리를 획득하려는 작가이다.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존 카사베츠를 ‘오슨 웰즈 이래 가장 눈부신 미국의 이단적인 영화감독’이라 불렀던 것처럼 카사베츠의 영화는 워낙 독특해 무시당했고, 종종 어설프고 조잡한 영화로 비판 받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서 이미지의 연결은 대단히 불합리하고, 줄거리와 플롯은 느슨하고 인과관계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카사베츠의 영화에 담긴 즉흥성과 서투름은 삶의 은밀한 비밀에 근접하기에 어울린다.

 

 

1958년 존 카사베츠는 그의 첫 작품 <그림자들>을 시나리오나 콘티 없이 즉흥적으로 완성했다. 그 순간에 고다르를 위시한 유럽의 작가들, 일본의 오시마 나기사가 이와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카사베츠는 과정과 생성의 작가다. 그의 영화의 마지막이 시작만큼이나 늘 열려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영화를 끝낼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랑의 행로>에서 '사랑은 흐름이예요’라 말하는 것처럼 흐름의 가능성을 화면에 기입하기 위함이다. <그림자들>에서 카사베츠의 카메라는 티에리 주스의 표현처럼 마치 폭풍 안을 포착하는 것처럼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프리재즈처럼 즉흥적으로 감정과 리듬을 담아낸다. 살아있는 시간의 기입, 여기 그리고 지금을 보여주는 영화적 쇼트들, 불가능한 예측의 사건들,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대사의 즉흥성. 카사베츠의 영화에는 이러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영향아래의 여자>에서 주인공 지나 롤랜즈는 남편 피터 포크를 기다리다 알코올에 취해 감정의 흐름에 따라 다른 남자를 따라간다. 이 모든 과정은 그녀의 신체의 추락에 관한 퍼포먼스들처럼 보인다. 꽤나 길게 진행되는 스파게티 식사 장면들. 혹은, <사랑의 행로>에서 지나 롤랜즈가 동물들을 데리고 오빠의 집을 방문하는 순간. 공항에서 지나 롤랜즈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가방들을 들고 안내원에게 어설픈 불어로 심경을 털어놓는 순간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신체가 벌이는 퍼포먼스들로 카사베츠 영화에서 플롯을 넘어선 진정한 사건들이다.

 

 

 

 

카사베츠가 영화에서 시도한 것은 눈앞에서 생생하게 일어나는(그리고 쉽게 사라지는) 언어가 미치지 않는 사건들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는 언어나 개념의 매개로는 표현되기 힘들거나 숨겨지는 진실들이다. 너무 흔해서 거의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일들, 몸짓들, 습관들이다. 식사를 하거나 술주정을 부리거나 애정을 구걸하거나 하는 진부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다. 그의 영화에서 캐릭터는 시나리오에서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화된 효과로서 구축된다. 배우들의 몸은 그러므로 이중성 안에 놓여진다. 그들은 먼저 픽션의 기능 안에 놓여 있다. 다른 한편 배우들의 몸은 정의하기 어렵고 간파하기 힘든 감정의 과정들을 보여준다. 티에르 주스의 표현을 빌자면 이런 카사베츠의 목표는 흐름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많은 모습들을 취한다. 언어의 흐름들, 목소리들의 흐름들, 사랑의 흐름들, 그리고 알코올의 흐름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언제나 이러한 흐름들을 통해 감정의 순간들과 통찰의 섬광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카사베츠의 시학은 이렇듯 불규칙해 보이면서도 견고한 형식을 고안하는 것에 있다.

 

 

2002년 12월, 서울독립영화제의 일환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존 카사베츠의 영화 5편을 상영했었다. 그러니까 이번 '존 카사베츠 회고전'은 시네마테크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존 카사베츠의 영화가 서울에서 처음 필름으로 공개된 10년만의 일이기도 하다. 그 이후 간헐적으로 존 카사베츠의 영화를 몇 차례 상영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11편의 전작을 상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카사베츠가 세상을 떠난 몇년 후, 프랑스의 배우 제라르 드 파르디유는 카사베츠의 영화 5편의 판권을 구매해 프랑스에 개봉시킨 적이 있다. 그는 카사베츠의 열렬한 팬이었다. 제라르 드 파르디유 덕분에 카사베츠의 영화가 프랑스에서 재개봉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또 많은 젊은 영화인들에게 카사베츠가 선망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살아생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영광이었다. 이제 우리가 그의 영향력을 충분히 느낄 시간이다. (김성욱 /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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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선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인연

- 존 카사베츠의 <별난 인연>

 

 

 

 

1950년대 후반, 이미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던 카사베츠는 가벼운 16mm 카메라로 핸드헬드 사용의 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되는 <그림자들 Shadows,(1959)>부터 <사랑의 행로>까지 11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영화제의 수상이나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부터 그렇지 못한 작품까지 다양한 그의 연출 이력이지만 그가 독립영화의 상징적 존재가 된 이유는 할리우드 시스템의 관습에 대한 일관된 저항 때문이다. 전통적인 할리우드의 서사구조의 특징은 뚜렷한 갈등구조와 자연스러운 인과관계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편집 점의 일관된 적용에 있다. 이렇게 관습화된 구조에 대해 카사베츠는 강력한 거부감을 느끼며 이에 저항했고, 더 나아가 파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별난 인연>에서도 비 관습적이고 불친절한 장면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미니가 영화를 보는 장면을 보자. 일반적인 헐리우드 서사라면 그 장면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극 전개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 하던가 적어도 주요 인물들이 의미 있는 행위를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미니가 영화를 보는 장면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으며 심지어 영화 내용조차 앞뒤로 거칠게 잘려 있다. 물론 이런 장면의 의도된 당당함이 카세베츠의 목적임을 알면서도 관습에 익숙해진 관객으로서는 당혹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카세베츠는 뚝심 있게 ‘단절’이라는 자신의 기획을 밀고 나간다.

 

 

미니는 미술관에서 일하는 노처녀이고, 모스코비치는 주차장에서 일하는 노총각이다. 두 남녀는 접점을 발견하기 힘들다. 살아온 환경, 사고방식, 주변 인물들까지 평행선을 긋는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타인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미니, 역시 사랑을 갈구하지만 과잉된 표현 방식과 그것을 어떻게 상대에게 전달해야 할지 모르는 모스코비치.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같았지만 주고받을 통로가 달랐던 두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은 결국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지 카사베츠는 자신만의 거칠고 성긴 방식으로, 불친절하지만 사실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이런 설명이 관객들에게 즉각적이고 효과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세이모어 카젤이 연기한 모스코비치는 주차요원이 직업이지만 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우선이기 때문에 감정이 발생하면 상대방을 의식하거나 배려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이를 표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당연히 준비되지 않은 상대와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고 감정은 전달은 실패하기 일쑤일 뿐 아니라 그 결과는 고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마치 끝없이 샘솟는 우물처럼 모스코비치는 스스로에 대한 삶의 열정을 한시도 놓지 않는다. 이런 모스코비치의 모습은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열정이 넘쳤지만 결코 관객을 의식하거나 배려하려 하지 않았던 그 자체로 존 카사베츠 자신의 투사체다.

 

 

카세베츠의 아내인 지나 롤랜즈가 연기한 미니는 미술관에서 일하는 고상한 계층의 여자다. 밤에도 커다란 선글래스를 쓰려는 모습은 그녀가 늘 주변을 의식하고 관습적이고 폐쇄적임을 보여 준다. 모스코비치는 자신과 마주보면서도 선글래스를 쓰고 있는 미니의 모습에 분노하고 불평하며 설득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오려고 최선을 다 한다. 카사베츠에게 있어서 관객들이 그렇다. 관습적으로 영화를 보고 관습적으로 영화를 판단한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의 감상을 자신의 감정에 이입시킨다. 이런 관객들을 카세베츠는 익숙했던 관습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고 기대했던 인과관계는 철저하게 외면하며  자신만의 세계로 끌어당기려 한다. 그래서 미니가 모스코비치를 힘겨워 했던 것처럼 관객이 카사베츠의 영화를 자연스럽고 편하게 감상하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 된다. 이렇게 불편한 상태로 관객을 만드는 것이 본래 카사베츠의 기획이었지만 결국 그 이면에는 결혼이라는 해피 앤딩을 맞게 된 미니와 모스코비치처럼 관습의 세계에 있던 관객들을 자신의 세계로 데려 올 자신감과 희망이 깔려있는 것이다.  

 

 

미니와 모스코비치의 사랑이야기는 존 카사베츠 감독과 관객 혹은 관객을 포함한 영화 자체와의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배우이자 감독이었던 존 카사베츠는 모스코비치가 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그러나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누군가의 지시나 모델을 따르려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 집중했으며 그런 신념을 관철 시키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물론 그의 고집과 신념의 관철은 대가를 필요로 했다. 대체로 비 상업적이었던 그의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제작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제작비를 충당해야 했고 때에 따라서는 배급도 직접 해야만 했다. 다행이 뛰어난 연기자이기도 했던 그였기에 제작비 수급에 어느 가능했었고 가족과 동료 연기자들은 늘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여전히 그의 작품들은 쉽게 동화되고 이해되기를 거부한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이를 허락하지 않는, 부유하진 않지만 정신만은 시퍼렇게 날이 서있는 도도한 카사베츠의 고집은 곱씹을수록 설명하기 힘든 영향력 아래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면,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평행선의 두 남녀는 결국 하나가 된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표현 형식이 달랐을 뿐 사랑이라는 본질적 내용은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니가 모스코비치에게 그랬듯이 관객인 우리도 카사베츠의 투박하지만 직선적인 구애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 봄 직하지 않은가. 카사베츠 못지않게 우리도 영화를 사랑한다면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카사베츠의 영화를 매개로 만나는 카사베츠와 우리 역시 참 별난 인연임이 분명하다. (김준완 /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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