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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서울아트시네마 개관 10주년 기념 존 카사베츠 회고전

[리뷰] 존 카사베츠의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

우린 사랑밖에 줄게 없어

- 존 카사베츠의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1976)은 <글로리아>(1980)와 함께 존 카사베츠의 영화에서는 드물게 장르영화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틀을 빌려온 영화다. 스트립 쇼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코스모 비텔리는 하룻밤 만에 지게 된 엄청난 도박빚을 탕감받기 위해 중국인 ‘마권업자’를 살해해야 한다. 살인에는 성공하지만, 그 자신도 총상을 입게 되고, 애초에 그에게 주어졌던 임무는 함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폭력의 연쇄, 죽음으로 향하는 인물의 궤적, 그러한 과정 안에서 보이는 인물의 자기 파괴와 자기 인식과 같은, 범죄영화, 갱스터 장르에서의 익숙한 설정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에서의 스타일은 장르적 관습보다는 어떤 흐름과 무드를 만들어내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카메라는 인물과의 거리 두기를 없앤 채 밀착해 있으며, 과장된 조명과 색감, 파편적이고 생략적인 장면들은 카메라가 사건의 객관적 묘사가 아닌 인물의 주관적 체험, 의식의 흐름을 드러내는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카사베츠 영화에서 줄곧 음악을 맡았던 보 하우드의 강렬하고 때로 멜랑콜리한 음악들, 스탠다드 넘버의 기이한 활용(“I can't give you anything but love", "Imagination")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비텔리는 클럽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상납을 해오던 것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말하지 않던가. “자넨 스타일이 없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카사베츠 영화에서의 스타일과 형식은 장르의 틀 안에서 놓이면서 오히려 더 뚜렷하게 부각된다. 카사베츠의 영화가 기존의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꾀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성을 유지했던 맥락에서 본다면, 기존의 장르적 구조 안에서 그만의 스타일을 강조한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은 카사베츠의 영화적 전략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은 종종 카사베츠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로 이야기되곤 한다. 클럽 ‘크레이지 호스 웨스트’의 코스모 비텔리는 영화에서 그 스스로가 소개하듯이, 클럽의 오너이자,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지도, 관리하는 그 모든 일을 맡는다. 비텔리는 바로 카사베츠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비텔리가 겪게 되는 일들은 한편으로는 카사베츠에게 있어서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것, 할리우드와 그 바깥 사이에서의 줄다리기, 그가 느끼는 자부심과 고독, 도박에 비유되는 모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클럽의 쇼를 진행하는 인물인 테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빅스타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여기 오는 건 독특한 개성이 있어서야. 조금 과장되고, 기형적이긴 하지만 나만의 방식이 있어.”

 

 

비텔리가 말하듯,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살인을 앞 둔 긴장되는 순간에 불현듯 공중전화 부스를 찾는다. 그곳에서 그는 클럽의 공연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지금 누가 무대에 올랐는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를 확인하더니, 급기야 수화기에 대고 직접 노래를 불러 보인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클럽의 운영과 쇼의 성공적인 지속에 있다. 관객은 비텔리가 입은 총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비텔리는 마치 오프닝에서처럼 한창 쇼가 진행 중인 클럽을 나와 밖에 서있다. 피에 젖은 옷깃을 만져보더니 길 위의 지나는 차들을 바라본다. 결국 그가 죽게 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카메라는 곧장 클럽의 공연을 비춘다. 무대에서는 늘 그렇듯 “우린 사랑 밖에 줄 게 없어”라고 노래하며, 이 노래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이어지는 것이다.

 

 

카사베츠는 <기다리는 아이>(1961)를 찍고 난 뒤, 다시는 스튜디오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할리우드의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카사베츠의 작업엔 늘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했으며, 이들의 관계는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코스모 비텔리를 연기한 벤 가자라 역시 카사베츠의 ‘좋은 친구들’ 중 한명이었다. 가자라는 연극과 드라마에서 출발해 경력을 쌓아오다가, 오토 프레밍거의 <살인의 해부>(1959)로 스크린 데뷔를 했지만, 그가 다시금 주목 받기 시작하게 된 것은 <남편들>(1970),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 <오프닝 나이트>(1977) 등 70년대의 카사베츠 영화들에 연이어 출연하면서였다. 지난 롤랜즈, 피터 포크, 세이무어 카셀 등 카사베츠의 다른 배우들이 그랬듯, 가자라는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이미 주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탐구의 과정을 거친다. 애초에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며, 즉흥적으로 반복되는 리허설을 통해 캐릭터를 형성에 가는 카사베츠의 방식은 결과적으로 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인물들을 창조해낸다.

 

 

마찬가지로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에서 카사베츠와 가자라는 낭만적 고독과 갑작스레 분출되는 폭력, 자기 과시와 영웅적 제스처 사이를 오가며 코스모 비텔리라는 모호하지만 매력적인 인물을 그려냈다. 다른 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방황을 하게 되는 <남편들>의 세 친구들 중 카사베츠와 피터 포크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벤 가자라 마저 오랜 투명 끝에 올 해 세상을 떠났다. 이미 세상을 떠난 배우를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일은 종종 미묘한 감정을 가져다주곤 한다.  이처럼 화석화된 시간을 바라보는 일은 흔적으로서의 영화 이미지에서 부재의 감각을 강하게 상기시키며, 그런 의미에서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의 마지막 시퀀스는 벤 가자라의 부재와 겹쳐져 멜랑콜리한 경험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장지혜 / 관객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