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히로인

- 존 카사베츠의 <글로리아>

 

 

 

 

<글로리아>는 미국 독립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존 카사베츠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있는 영화다.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과 더불어 그가 만든 2편의 느와르 영화 중 하나이며, 무엇보다 메이저 제작사에서 탄생한 작품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당시 영화 <챔프>(1979)의 성공을 본 MGM이 존 카사베츠에게 남자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시나리오를 부탁하면서 <글로리아>가 시작됐다. 하지만 원래 연기하려 했던 아역배우가 월트 디즈니사로 가면서 무산되었고, 후에 콜롬비아 영화사에서 이 시나리오를 다시 구입하여 존 카사베츠에게 영화를 의뢰한다. 독립 제작 방식을 고수 했던 그였지만 자신의 영화 제작비용을 위해 제안에 응한다.

 

 

때문에 <글로리아>는 그의 전작들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대중적인 이야기와 뚜렷한 해피엔딩 역시 낯설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연결하는 순간들은 존 카사베츠 만의 감성으로 가득하다. 그 중심에는 영화의 히로인인 글로리아 역의 지나 롤랜즈가 있다. <글로리아>에서 뿐 아니라 존 카사베츠와 지나 롤랜즈는 떼어 설명할 수 없는 관계일 것이다. 지나 롤랜즈가 분한 인물은 기존 영화 속 여자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었다. 그녀는 남자 중심의 영화에서 남자의 시선으로 그려진 여자가 아니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남자에 귀속되지 않으며 특히 <글로리아>에서는 남자들보다 우위에 있다. 자신을 쫓는 남자 마피아들에게 총을 겨누고 “여자한테 지니까 싫지?”라고 조롱하는 장면에서는 그러한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적들을 향해 총을 쏠 때는 주저함이 없고, 그 후 택시를 타는 모습에서도 거침없다.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미행하는 마피아들에게 먼저 다가가 총을 빼앗아버리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결국 마피아 보스에게 직접 찾아가는 것은 그녀로썬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글로리아의 이러한 캐릭터는 후에 수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동명의 영화로 시드니 루멧이 리메이크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비교하는 <레옹>은 <글로리아>에 대한 오마주이다. 또 <중경삼림>에서의 임청하 역과 우리나라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역이 글로리아에서 나왔다고 한다.

 

 

<글로리아>는 마피아가 몰살시킨 글로리아 친구의 가족 중, 살아남은 8살의 남자아이 필을 그녀가 떠맡게 되며 마피아에게 쫓긴다는 이야기로 서사 자체는 단순하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글로리아는 계란 후라이 하나 제대로 못할 정도로 가정과는 멀어 보인다. 실제로 다정한 엄마보단 강인한 전투사에 가까운 글로리아와 그녀에게 의지하면서도 끊임없이 엄마와 아빠를 찾아대는 필. 이 둘은 지하철, 버스, 공항, 길거리, 식당, 그리고 여러 밤을 보내는 각각의 여관들까지. 수많은 곳을 거쳐 어디론가 향해가고 있지만 정작 그 공간성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즉 아무리 이동해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더 강하게 말하면 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어디서든 자신들을 쫓는 마피아와 부닥친다. 그러니까 그들이 빠져나갈 곳은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이는 글로리아가 결국 마피아 보스를 찾아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왜 긴 시간동안 글로리아와 필의 여정을 비춰주느냐고 묻게 된다. 그건 <글로리아>가 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로리아>는 마치 한 편의 로드무비 같기도 하다. 전혀 다른 분위기이지만 <기쿠지로의 여름>이 계속 겹쳐 보인 이유이다. 처음에는 아이에 대한 애정이나 사람으로서의 따뜻함이 보이지 않던 어른이 한 아이를 만나고, 아이를 지켜주기 위한 여정을 동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도착해야할 곳에 이르자 정작 그 시간동안 뭔가를(이를테면, 유대감, 추억) 얻은 것은 어른이었다. 이는 <기쿠지로의 여름>의 줄거리이다. <글로리아>도 그렇지 않나. 그 둘의 관계는 모성애라는 표현으로 한정하지 않고도 더 많은 감정을 함축하고 있다. 필의 표현처럼 글로리아는 ‘엄마이고 아빠이고 친구이며 여자친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유일한 가족’이며 그건 글로리아에게 있어 필도 그런 것 같다. 따라서 <글로리아>는 인간관계라고는 아무도 남지 않은 사람 둘이 외로움을 그들의 존재로 채워가는 과정에서 빛이 난다.

 

 

마지막으로 존 카사베츠 특별전을 꼭 봐야하는 이유를 하나 말해야 한다면 그의 영화에선 때로 음악이 대사를 대신하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극장 안에서야 만 영화 속 또 다른 언어가 생생히 들릴 것이다. (김휴리 / 관객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린 사랑밖에 줄게 없어

- 존 카사베츠의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1976)은 <글로리아>(1980)와 함께 존 카사베츠의 영화에서는 드물게 장르영화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틀을 빌려온 영화다. 스트립 쇼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코스모 비텔리는 하룻밤 만에 지게 된 엄청난 도박빚을 탕감받기 위해 중국인 ‘마권업자’를 살해해야 한다. 살인에는 성공하지만, 그 자신도 총상을 입게 되고, 애초에 그에게 주어졌던 임무는 함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폭력의 연쇄, 죽음으로 향하는 인물의 궤적, 그러한 과정 안에서 보이는 인물의 자기 파괴와 자기 인식과 같은, 범죄영화, 갱스터 장르에서의 익숙한 설정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에서의 스타일은 장르적 관습보다는 어떤 흐름과 무드를 만들어내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카메라는 인물과의 거리 두기를 없앤 채 밀착해 있으며, 과장된 조명과 색감, 파편적이고 생략적인 장면들은 카메라가 사건의 객관적 묘사가 아닌 인물의 주관적 체험, 의식의 흐름을 드러내는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카사베츠 영화에서 줄곧 음악을 맡았던 보 하우드의 강렬하고 때로 멜랑콜리한 음악들, 스탠다드 넘버의 기이한 활용(“I can't give you anything but love", "Imagination")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비텔리는 클럽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상납을 해오던 것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말하지 않던가. “자넨 스타일이 없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카사베츠 영화에서의 스타일과 형식은 장르의 틀 안에서 놓이면서 오히려 더 뚜렷하게 부각된다. 카사베츠의 영화가 기존의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꾀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성을 유지했던 맥락에서 본다면, 기존의 장르적 구조 안에서 그만의 스타일을 강조한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은 카사베츠의 영화적 전략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은 종종 카사베츠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로 이야기되곤 한다. 클럽 ‘크레이지 호스 웨스트’의 코스모 비텔리는 영화에서 그 스스로가 소개하듯이, 클럽의 오너이자,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지도, 관리하는 그 모든 일을 맡는다. 비텔리는 바로 카사베츠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비텔리가 겪게 되는 일들은 한편으로는 카사베츠에게 있어서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것, 할리우드와 그 바깥 사이에서의 줄다리기, 그가 느끼는 자부심과 고독, 도박에 비유되는 모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클럽의 쇼를 진행하는 인물인 테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빅스타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여기 오는 건 독특한 개성이 있어서야. 조금 과장되고, 기형적이긴 하지만 나만의 방식이 있어.”

 

 

비텔리가 말하듯,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살인을 앞 둔 긴장되는 순간에 불현듯 공중전화 부스를 찾는다. 그곳에서 그는 클럽의 공연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지금 누가 무대에 올랐는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를 확인하더니, 급기야 수화기에 대고 직접 노래를 불러 보인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클럽의 운영과 쇼의 성공적인 지속에 있다. 관객은 비텔리가 입은 총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비텔리는 마치 오프닝에서처럼 한창 쇼가 진행 중인 클럽을 나와 밖에 서있다. 피에 젖은 옷깃을 만져보더니 길 위의 지나는 차들을 바라본다. 결국 그가 죽게 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카메라는 곧장 클럽의 공연을 비춘다. 무대에서는 늘 그렇듯 “우린 사랑 밖에 줄 게 없어”라고 노래하며, 이 노래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이어지는 것이다.

 

 

카사베츠는 <기다리는 아이>(1961)를 찍고 난 뒤, 다시는 스튜디오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할리우드의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카사베츠의 작업엔 늘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했으며, 이들의 관계는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코스모 비텔리를 연기한 벤 가자라 역시 카사베츠의 ‘좋은 친구들’ 중 한명이었다. 가자라는 연극과 드라마에서 출발해 경력을 쌓아오다가, 오토 프레밍거의 <살인의 해부>(1959)로 스크린 데뷔를 했지만, 그가 다시금 주목 받기 시작하게 된 것은 <남편들>(1970),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 <오프닝 나이트>(1977) 등 70년대의 카사베츠 영화들에 연이어 출연하면서였다. 지난 롤랜즈, 피터 포크, 세이무어 카셀 등 카사베츠의 다른 배우들이 그랬듯, 가자라는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이미 주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닌 일종의 탐구의 과정을 거친다. 애초에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며, 즉흥적으로 반복되는 리허설을 통해 캐릭터를 형성에 가는 카사베츠의 방식은 결과적으로 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인물들을 창조해낸다.

 

 

마찬가지로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에서 카사베츠와 가자라는 낭만적 고독과 갑작스레 분출되는 폭력, 자기 과시와 영웅적 제스처 사이를 오가며 코스모 비텔리라는 모호하지만 매력적인 인물을 그려냈다. 다른 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방황을 하게 되는 <남편들>의 세 친구들 중 카사베츠와 피터 포크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벤 가자라 마저 오랜 투명 끝에 올 해 세상을 떠났다. 이미 세상을 떠난 배우를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일은 종종 미묘한 감정을 가져다주곤 한다.  이처럼 화석화된 시간을 바라보는 일은 흔적으로서의 영화 이미지에서 부재의 감각을 강하게 상기시키며, 그런 의미에서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의 마지막 시퀀스는 벤 가자라의 부재와 겹쳐져 멜랑콜리한 경험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장지혜 / 관객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영화와 삶을 동시에 긍정하다

-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 

 

 

 

 

머틀 고든(지나 롤랜즈)은 브로드웨이의 인기 많은 여배우다. 평소대로 공연을 마치고 호텔로 귀가하던 밤, 머틀은 자신의 열성 팬이 눈앞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어버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도 연극 이야기만 해대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그녀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부터 머틀은 자신의 연기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녀가 연기해야 할 ‘버지니아’라는 인물은 한 번 이혼했다가 재혼한 경력이 있는, 연극의 제목 그대로 <두 번째 여인>이다. 하지만 머틀은 결혼을 한 적도 없고, 중년의 버지니아를 연기하기엔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료 배우 모리스(존 카사베츠), 연출자 매니(벤 가자라), 극작가 사라(조안 블론델) 모두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머틀의 고민은 타인의 삶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극 속 허구의 인물인 버지니아의 삶은 머틀 자신의 삶이 아니다. 하지만 연극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사라의 말대로라면 ‘버지니아(타인)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극중 타인의 삶을 존중한다면 대사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선 안 된다. 그 대사는 버지니아의 삶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라는 머틀에게 말한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감정을 실어서 대사를 정확하게 치는 거예요. 그러면… 버지니아가 나오게 되는 거죠.”

 

 

하지만 머틀에게 이런 식의 연기는 리얼리티와 인간다움이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리얼’한 무언가를 연극에서 보여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매니는 머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연극 무대에 정말로 ‘리얼’한 것이 들어오면, 그걸 지켜보는 관객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매니가 생각하기에 ‘리얼한’ 연극은 곧 실패나 다름없는 것이다.

 

 

<오프닝 나이트>가 내포하고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삶을 또 다른 타인(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것은 영화 속의 인물 머틀과 영화감독 존 카사베츠가 가진 공통의 문제의식이다. 결국 <오프닝 나이트>는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카사베츠의 9번째 영화는 영화가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자기반영적인 성찰이 드러나는 영화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온다, 왜 영화가 아니라 하필 연극인가? 심지어 <오프닝 나이트>에서 삶과 예술을 고민하는 프로타고니스트는 연출가가 아니라 배우다. 연극과 영화. 보통의 경우 양자의 관계는 연기 양식의 차이나 시공간의 연속성 등으로 논의되곤 한다. 그러나 <미치광이 같은 사랑>(1969)에서 연극을 끌어와 영화의 속성에 대해 질문했던 자크 리베트의 경우, 둘의 문제는 그보다 더 복잡하면서 근본적이다. 호주의 영화학자 조지 쿠바로스(George Kouvaros)에 의하면, 자크 리베트는 영화가 연극에 초점을 맞추면 자기 반영의 일부로서 일정 정도의 거리두기를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 그 자신만의 작용을 시험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리베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연극에 대한 주제를 택했다면 그것은 곧 영화의 진실성을 다루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사랑했던 많은 영화들이 연극에 대한 첫 영화였던 건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모든 것들―베리만, 르누아르, 쿠커, 가렐, 루슈, 콕토, 고다르, 미조구치 등― 역시 연극에 관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거짓인, 진실에 대한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에 이 질문 외의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리베트에게 영화(거짓)는 삶(진실)을 담아내는 것인데, 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건 연극이다. 이는 카사베츠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오프닝 나이트>에서 연극이 올라가는 무대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허구의 인물이 배우를 완전히 덮어버리는 연극은 보통의 연극이며,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연극이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머틀은 무대 위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과 허구의 삶 사이에서 어지러움을 느낄 때마다 카메라는 무대 위로 올라가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 업 내지는 클로즈 쇼트로 찍는다. 이는 현실의 삶이 픽션을 뒤흔들 때, 그 혼란스러움의 순간을 포착해내려는 움직임이다. 한편 영화 후반부에 길게 등장하는 유쾌한 즉흥극은 버지니아와 마티(연극), 머틀과 모리스(현실)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연극과 현실이 어지럽게 교차되는 지점이다. 이 때 카메라는 망원 렌즈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완전한 허구가 아닌 상태, 삶의 리얼리티와 연극이 공존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굳이 가까이 다가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상태로 가만히 관람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오프닝 나이트>의 주인공이 배우여야만 하는 이유는 명징하다. 카사베츠에게는 무대 위에서 현존하는 배우가 무대 뒤의 연출자보다 더 중요한 존재다. 배우는 자신의 몸으로 현실과 픽션을 중재한다.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완전한 결과물로서 완성된 영화보다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삶이 영화 속으로 침투하는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 때 카메라는 그 현상을 기록하는 최소한의 기계-장치적 역할만을 수행하게 된다.

 

 

<두 번째 여인> 연극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머틀과 매니의 부인은 서로를 포옹한다.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건 머틀과 갈등을 겪었던 매니나 모리스와의 화합이 아니다. 내러티브의 진행과는 상관없어 보였던 매니의 부인이 영화가 끝날 때 불쑥 등장하는 것은 다소 엉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프닝 나이트>의 이러한 엔딩이야말로 비로소 영화와 삶이 나란히 존재하는 순간이다. 가만히 연극을 지켜보던 관객이 픽션과 삶의 혼란스러운 공존에 긍정하고,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등장하여 영화 너머의 현실이 영화 속으로 균열을 내며 침투한다. 이전까지가 연극과 삶의 교차됨이었다면, <오프닝 나이트>의 엔딩은 그러한 크로스 상태가 영화로 넘어오는 순간인 것이다. 카사베츠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지 화면으로 길게 보여준다. 영화와 삶이 비로소 나란히 놓일 때, 관객은 영화와 삶을 동시에 긍정하게 된다. 두 시간이 넘는 기나긴 영화가 끝나갈 때쯤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엔딩은 마치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송은경: 관객 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영화

- 존 카사베츠의 <사랑의 행로>

 

 

 

 

정신과 의사가 극중 사라(지나 롤랜드)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가져본 적 없는 것에 상실감을 느끼죠?” 그때 사라가 답한다. “사랑은 강물 같은 거예요. 사랑은 계속되는 것이고, 결코 멈추지 않아요.” 영화의 제목 <사랑의 행로Love streams>의 출발점이 되는 이 장면은 사라가 남편과의 이혼 협의 후 정신과 의사에게 찾아간 후다. 그녀에게는 남편 사이에 딸이 하나 있고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이력이 있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후에 딸을 데리고 먼 곳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늙고 병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딸은 그녀와의 생활을 거부하고 남편과 살기를 선택한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과 딸을 사랑하고 가족을 원하지만 결국 혼자 남겨진다.

 

극중 로버트(존 카사베츠)는 소설가다. 그는 부인도 자식도 없이 큰 집에서 아름다운 여자들과 함께 산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함께 음악을 듣는다. 가벼운 여흥과 여자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늘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그의 전부인과 그가 존재조차 알지 못한 어린 아들이 등장한다. 전부인은 그에게 아들 알비를 며칠만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함께 살던 여자들에게 수표를 써 주고 아주 다정하게 그녀들을 집에서 내보낸다. 그는 서먹한 아들과 단 둘이 집에 남겨진다.

 

1984년작 <사랑의 행로>는 존 카사베츠가 연출한 총 13편의 장편 영화 중 마지막 작품이다. 그의 연출작 리스트에 올라 있는 1985년의 <빅 트러블Big Trouble>은 원래의 감독이 중도에 그만두게 되어 카사베츠가 떠맡게 된 작품으로, 생전에 그는 <빅 트러블>을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사랑의 행로>그의 실질적인 유작인 셈이다. 영화는 두 명의 인물을 축으로 삼는다. 실제로는 부부이면서 극중에서는 남매로 등장하는 지나 롤랜드와 존 카사베츠가 그 두 사람이다. 영화의 전반에는 그들 각자의 삶을 조명한다. 가족의 사랑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사라와 가벼운 여흥 같은 관계만을 원하는 로버트의 삶은 언뜻 보기에는 상반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짐을 잔뜩 가지고 돌아온 사라가 로버트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그들의 삶은 접점을 이룬다. 그러나 그들 각자의 삶은 섞이지 않고 유리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저서 『사랑의 정신분석Au Commencement E'tait L'amour』에서 말한다. ‘나에게 더듬거리며 불평을 털어놓는 사람들은 현재나 과거에서의 사랑의 결핍, 현실적이거나 상상적인 사랑의 결핍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나를 이 무한의 상황 속에, 고통이나 황홀 속에 놓지 않고서는 이 불평을 들을 수가 없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태에서야 타자는 자기의 모험의 의미를 구성한다.' 그녀는 우울증, 무력감, 히스테릭 상태와 같은 병적 징후는 결핍에서 찾아온다고 보았다. 존 카사베츠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러한 히스테릭 상태를 잘 보여준다. 주로 여성 주인공에게서 두드러진 히스테릭 상태를 발견할 수 있으며 특히 1974년작 <영향 아래 있는 여자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7년작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녀들은 모두 어떤 종류의 사랑에 대해 결핍과 상실감을 느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사랑의 결핍과 병적 징후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점이다.

 

존 카사베츠는 영화에서 실제 현실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우연한 사건에는 흥미가 없었고,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려고 했다. 말들은 존재하지만 대화의 결론을 이끌어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돈되지 않고 단정치 못한 것들이 진짜 삶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히스테릭 상태와 병적 징후들을 보이지만 극단적인 결말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속에 녹아들어 있어서 그것들은 파도처럼 높게 일었다가 다시 잠잠해지며 그런 순간들은 매번 반복된다. 가령 <오프닝 나이트>의 주인공 머틀에게는 새로운 연극에서 새로운 배역을 맡아 소화해야 할 때마다 가볍게 혹은 심각하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68년작 <얼굴들Faces>에서 나타나는 가정의 관계 또한 불협화음의 격렬한 순간과 조용한 평온이 번갈아 반복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기대되는 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의 행로>에서는 사라를 통해 히스테리의 병적 징후가 고착된 상태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 그녀의 상태는 발전적으로 심화되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부터 그녀는 이미 깨어 있음에도 꿈을 꾸는 경험을 한다. 첫 번째 환상에서 그녀는 자동차로 남편과 딸을 치어 죽인다. 두 번째 꿈은 그녀가 로버트의 집에서 쓰러질 때 일어난다. 꿈속에서 그녀는 남편과 딸이 살고 있는 집의 수영장에서 그들과 함께 있다. 그녀는 그들을 웃기려고 시도하지만 그들은 절대 웃지 않는다. 그녀는 게임에 졌다고 말하며 수영장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꾸는데 그때 그녀는 남편과 딸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꿈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현실이 꿈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꿈을 반영하게 되는 경우는 사라처럼 전도된 생각과 막연한 믿음을 가질 때, 그래서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에 일어난다.

 

사라는 타인과의 어떤 깊은 관계도 원하지 않는 로버트를 본다. 그녀에게 그것은 삶의 방기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애완동물을 사주기로 마음먹고 농장을 방문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 가지 동물을 선택하지 못하고 농장의 거의 모든 동물들을 사서 로버트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조랑말 두 마리와 염소, 병아리, 앵무새, 짐이라는 이름의 개를 잔뜩 이끌고 택시에서 내리는 장면은 그녀가 거대한 짐을 가지고 유럽의 공항에서 헤매던 장면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그녀 삶의 어느 한 부분도 누락시킬 수 없다. 누락이란선별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린다는 것이고,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사라가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돌아가자. 이 장면에서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실제 상담을 받는 환자는 사라인데 그녀는 의사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녀는 편안함을 느끼도록 기울어진 의자가 아니라 허리를 꼿꼿이 세워야 하는 의자에서 책상에 팔을 걸치고 앉아 있다. 반면 정신과 의사는 환자용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누워 책상에 발을 올리고 담배를 피운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있어야 할 위치가 바뀐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녀가 사랑은 계속되는 것이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때에 정신과 의사는 단호히 대답한다. “그렇지 않아요. 사랑은 멈추는 겁니다.”

 

짐 자무쉬는 <존 카사베츠에게 보내는 편지Open Letter To John Cassavetes>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의 영화는 사랑에 관한 것이고, 믿음과 불신, 고독, 기쁨, 슬픔, 황홀, 어리석음에 관한 것입니다. 또한 쉼 없는 것, 취한 상태, 회복하는 힘, 욕망, 유머, 완고함, 그리고 오해와 두려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손소담 /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상처를 숨기고 웃음으로 무장한

어른들의 비구조화적 세계

- 존 카사베츠의 <얼굴들>

 

 

 

 

 고다르는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닌 반영된 현실이라는 말은 한 적이 있었다. 정석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영화 속의 현실은 언제나 잘 구조화 되어있다. 그러나 반대로 존 카사베츠는 현실의 반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물들 간 반응은 갑작스럽게 발생하며 짜여있지 않고 예측 불허하다. 어른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나타낸 이 작품은 인간들과의 관계와 그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들의 태도를 끈질기게 바라본다.

 

 

 영화의 서사는 칼로 자른 듯 깔끔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다. 외려 관객들에게 찢어진 조각보들을 하나하나 던지고 관객들로 하여금 바느질로 잇게끔 한다. 표면적으로 편안해보이기만 했던 부부의 관계는 집을 떠나겠다는 남편의 고백으로 깨져버린다. 남편은 남편대로 친구와 젊은 매춘부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이미 놀아났고, 아내는 남편이 집을 나간 후 클럽에서 어린 남자를 만나 그와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그들은 친구들을 만나고 이성과 달콤한 사랑을 나누려고 시도한다.

 

 

 집에서의 파티 장면에서는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상황들로 가득하다. 셋 이상의 사람들이 존재할 때 그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진심을 담은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잠잠해지고, 다시 누군가의 한 마디에 모두 연습했던 것처럼 웃음을 터트린다. 성인이라면 누구든지 의례적인 술자리에서 느꼈을 법한 공기가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그들만의 암묵적인 규칙은 웃음과 가벼운 농담이다. 혹은 그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각자가 위치했던 지위와 체면을 잊어버린 채 유아적인 방식으로 춤을 추거나 상대방의 이름을 가사에 넣어 노래를 부르며 논다. 이 때 즐겁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남녀를 뒤로 하고 소외된 이의 얼굴에는 또 혼자 남겨졌다는 상처가 남는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지 않고 상처받은 사람은 과장된 언행을 하거나 정해진 규칙을 깨고 돈으로 여자를 산거나 마찬가지라는 감춰졌던 진실을 폭로한다. 카사베츠는 이런 어른들 사이의 감정이 감춰지고 드러내는 갑작스러운 순간들을 숨김없이 발견하고 관객에게 드러낸다.

 

 

 그렇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받아 떠나고 남녀 단 둘이 남았을 때, 그들은 조금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낯선 이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숨기려고 했던 자신의 외로움이나 약한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며 위로받고 싶어 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한 '사랑은 항상 사람을 정복하게 만들 거야.'라는 재즈의 가사처럼 단 둘이 남겨진 그들은 세상에는 사랑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 관계도 돈으로 사거나 하룻밤의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것뿐이다. 주인공 해리와 매춘부나 다를 것 없는 젊은 여자는 해리가 찾아온 밤부터 아침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여자는 해리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요리를 치우며, 해리가 볼 수 없는 부엌에서 여전히 즐거운 듯 노래를 부른다. 결코 해리가 원하는 여자가 될 수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실을 깨달은 채, 눈물을 애써 닦으면서 말이다. 이처럼 행동과 반대되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는 관객들의 숨마저도 순간 먹먹하게 만든다. 해리의 아내인 마릴라와 젊은 남자 채트와의 관계도 그러하다. 젊은 남자 채트는 눈물과 기침으로 얼룩져 콜록대는 마릴라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언제까지고 함께 있을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남편의 등장에 바로 줄행랑을 친다. 어른들에게는 사랑이 최상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뼈아픈 사실도, 역시 감독은 날카롭게 파고들어 관객을 찌른다. 이런 장면들과 서사를 통해 그는 어른들의 진실하지 못한 모습의 현실을 포착한다.

 

 

 그런 성인들의 아슬아슬한 행동들을 영화는 매우 자유로운 방식으로 포착하고 있다. 대조가 강한 흑백의 16mm는 빠르게 변화하는 인물들의 얼굴들에 주목한다.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혼자 남겨진 순간, 화면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꽉 채운 그들의 눈과 코, 입은 매우 과장되어 아름답기보단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신경질적이면서도 고독한 그들의 내면을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관객은 그들이 겪는 일상 속에서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시종일관 인물들의 표정에 집착했던 영화는 마지막에야 비로소 그들이 떠나고 남은 공간만 지그시 비추는데, 그 순간 이 영화가 가지는 진실을 폭로하는 힘을 관객들은 느낄 수 있을 거다. (윤서연 :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