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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작가를 만나다: 오멸] 세월호 참사 앞에서 <눈꺼풀>이 취하는 태도

[작가를 만나다: 오멸]


세월호 참사 앞에서 <눈꺼풀>이 취하는 태도



한 섬이 있다. 이 섬은 실제 존재하는 섬으로 보이지 않는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들은 “먼 길”을 떠나기 전 이 섬에 잠깐 들른다. 이곳에는 한 노인이 외롭게 살고 있다. 노인은 평소에는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을 보내지만 누군가 섬을 방문할 거란 전화를 받으면 일을 시작한다. 노인은 정성스럽게 절구에 쌀을 찧고 떡을 찐다. 그리고 섬에 온 사람에게 떡을 준다. 사람들이 떡을 갖고 섬을 떠나면 노인의 일은 끝난다. 그런데 어느 날, 세월호 침몰로 사망한 선생님과 학생들이 섬으로 온다. 학생들은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당한지도 모르는 눈치다. 노인은 떡을 만들려 하지만 쌀을 훔쳐먹는 쥐를 잡으려다 절굿공이를 부숴버린다. 당황한 노인은 다른 방법을 동원해 떡을 만들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절구가 부서지고 우물물이 더러워진다. 노인은 결국 떡을 만들지 못하고 아이들은 계속해서 떡을 기다린다. 노인은 참담한 심정에 사로잡힌다.

<눈꺼풀>을 보기 전에 이 영화가 ‘세월호 영화’라는 사실을 먼저 알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것을 적지 않게 망설였다. 내가 이 영화를 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도 세월호와 관련된 뉴스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 무엇보다 사건 자체의 끔찍함이 내 마음을 계속해서 힘들게 하고, 사건 이후 펼쳐진 한국 사회의 추한 모습 역시 세월호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기 힘들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눈꺼풀>을 보며 세월호에 대해 생각할 때 내 마음에 찾아올 어떤 감정들이 두려웠다.

또 다른 걱정도 있었다. 극영화인 <눈꺼풀>이 세월호를 소재로 어떤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필연적으로 따라올 한계가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가 겪은 고통을 재가공해서 픽션을 만들 때 그 사람이 겪은 고유한 고통의 경험은 변형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고통에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일 바에는 그냥 재현 불가의 영역으로 두는 편이 낫다. 하지만 실화를 영화화하는 많은 작품들이 이 지점에서 실패하고(소수의 영화들은 고통의 사실적 재현에 집중하는 대신 다른 문제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예정된 실패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가고는 한다), <눈꺼풀> 역시 그런 실패를 보여줄까 두려웠다. 게다가 세월호 문제는 시간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여전히 나와 너무 가까이 있다. 의자에 기대 앉아 스크린에 등장한 세월호 피해자들의 아픔을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미리 말하자면, <눈꺼풀>의 모든 장면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대신 동화와 같은 형식을 가져와 세월호 참사를 간접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몇몇 장면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감독의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처럼 보이기도 하고(학생들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해맑은 웃음과 순진한 행동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몇몇 설정은 실제 사태에 대한 너무 직접적인 상징으로 보여 극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노인을 방해하는 역할로 “쥐새끼”가 등장하는 장면이나 불상의 머리가 부서지는 장면 등이 특히 그랬다). 무엇보다 거의 투명하다 싶을 정도로 감독의 심정을 드러낸 장면들이 나를 종종 영화 밖으로 밀어냈다. 한 장면에서 노인은 학생에게 화를 내듯 소리친다. “너 누구냐? 어린 놈이 여긴 뭐하러 왔어!”(학생의 대답. “저 떡 먹으러 왔는데요.”) 이와 같은 장면은 <눈꺼풀>을 픽션이 아니라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관객에게 그대로 외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 생각과 마음은 여러 차례 어지러워졌다. 세월호 참사와 그 피해자들을 이런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 옳은지 계속해서 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단호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눈꺼풀>이 취하는 입장과 거기서 만들어지는 어떤 정서가 계속해서 세월호 참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에는 부인하기 힘든 뚜렷한 미덕이 있다. 바로 책임감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노인은 세월호 참사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세월호 앞에서 짐짓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세월호에 대해 생각할 때 자신이 입을 상처를 미리 두려워해 (나처럼) 문제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는다. 이는 고통 받은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고,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당한 일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 같은 것도 아니다. 노인은 그냥 처음부터 세월호 참사를 자신이 직접 수습해야 할 일로 여긴다. 그는 어떻게든 떡을 만들어 먼 길을 떠날 선생과 학생들에게 먹이려 하고, 그것이 어려워질 때 진심으로 화를 내고 슬퍼한다. 그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때로 거칠고 때로 너무 직접적이지만 노인의 입장을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노인은 지금 문제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눈꺼풀>에는 ‘세월호’라는 문제를 나의 일로 생각한 뒤, 비록 괴롭더라도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을 찾으려는 태도가 깔려있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눈꺼풀>이 굉장히 솔직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본 뒤 남는 건 줄거리나 특정 장면이 아니라 영화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노인의 근심 어린 눈빛과 한탄의 한숨, 느리고 무거운 몸짓과 분노의 욕설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영화의 정서는 거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건 반사에 가깝다. 어쩌면 ‘좋은 영화’는 이 조건 반사적 감정을 영화라는 체로 거른 뒤 고운 입자만을 정리해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눈꺼풀>은 좋은 영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오멸 감독의 <눈꺼풀>은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거르지 않은 채 그냥 최대한 솔직하게 드러내는 쪽을 택한다. 나아가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피해자나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 하지도 않는다(오히려 영화는 절망의 심정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 다만 세월호 사태 앞에서 한 명의 당사자로서 느끼는 복잡하고 무거운 심정으로 인해 어쩔 줄 몰라하고 망연자실할 뿐이다. 자신의 무력함조차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러한 태도는, 이상하게도, 나로 하여금 세월호의 비극에 대해 어느 때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지금도 이것이 <눈꺼풀>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보년 프로그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