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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작가를 만나다]“고급 영화가 아닌 진짜 영화를 만들고 싶다” - 김지운 감독과의 대화

[작가를 만나다]

“고급 영화가 아닌 진짜 영화를 만들고 싶다”

- 김지운 감독과의 대화


지난  10월 11일(일), 신작 <밀정> 준비로 바쁜 김지운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개봉 10주년을 맞은 <달콤한 인생> 특별 상영에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김지운 감독은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달콤한 인생>은 물론 자신의 다른 영화들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늦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관객들의 열정 때문에 신작을 찍을 큰 힘을 얻었다는 감사의 인사 또한 잊지 않았다.






<달콤한 인생>의 시작


나는 차기작을 만들 때 항상 전에 만든 영화와 다른 영화를 기획한다. 한 가지 테마를 계속해서 파고드는 감독도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여러 장르를 옮겨 다니는 것 같다. <달콤한 인생>의 전작이 <장화, 홍련>이다보니 여자의 이야기가 아닌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남자의 내면에 있는 섬세함, 그리고 그 내면에서 발생한 작은 균열이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필름누아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것도 홍콩 누아르가 아니라(나는 홍콩 누아르 세대가 아니다), 프렌치 누아르. 알랭 들롱이나 장 폴 벨몽도, 장 가뱅 같은 배우들이 뿜어내는 멜랑콜리를 나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병헌의 얼굴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영화를 기획한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와 작업을 하게 됐는데, 물론 지금은 더 멋있어졌지만, 이병헌 씨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이 영화를 찍은 걸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바람


내 영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 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람이 걷는 것과 바람이 부는 걸 계속 등장시키고 있더라.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짐작해 보자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일을 결정하는 것이 사소하고 찰나적인 느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을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건 정말 사소한 계기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영화의 경우에는 그걸 갑자기 부는 바람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이병헌이 갑자기 신민아의 집으로 들어갈 때 순간 바람이 부는 그런 것 말이다.

지금까지 찍은 영화들


나는 지금까지 찍은 영화가 다 아쉽다. 그래서 내 영화를 극장에서 못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칸에 갔을 때는 자리를 떠날 수 없어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심지어 기술 시사 때도 못 참고 밖으로 나가 버린다. 나의 부족한 점이 자꾸 눈에 들어와서 그렇다. 그런데 초기에 만든 단편인 <커밍 아웃>(2000)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다. 영화적 자의식 없이 아주 순수한 유희를 즐기듯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소위 ‘창작의 고통’ 같은 것도 없었다. 십만 원의 제작비로 만든 단편 <사랑의 힘>(2003)도 비슷한 이유로 제일 좋아한다.

가장 이질적인 영화는 <라스트 스탠드>이다. 단순히 미국에서 찍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영화는 장르도 이야기도 전부 다르지만 주인공이 전부 어딘가 쓸쓸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


새로운 영화를 생각할 때 이야기, 장르, 톤앤매너, 무드를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그게 처음에는 흐릿하다. 이걸 나에게 편한 옷처럼 받아들이기 위해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이다. <악마를 보았다>를 만들 때는 제일 먼저 모그Mowg에게 흥겹지 않고 슬픈 느낌의 보사노바 테마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음악을 들으며 영화의 전체 톤을 잡아나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영화의 색깔을 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번 <밀정>도 비슷하다. 송강호가 연기할 캐릭터에 대한 아트워크를 만드는데, 그걸 그린 분이 캐릭터의 눈매를 매섭게 그려놨더라. 그게 또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인물이 이렇게 차가운 시선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희미했던 것을 선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다른 작업자들의 영감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액션


액션씬을 찍을 때는 세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리듬, 감정, 창의성. <달콤한 인생>을 찍을 때는 창의적인 액션씬을 만들기 위해 아이스링크 같은 공간을 섭외하거나 새로운 촬영 장비를 쓰기도 했고, 핸드폰 배터리라든지 ‘불각목’ 같은 걸 써보기도 했다.

후반부의 총기 액션은 내가 갖고 있던 ‘전멸’의 판타지를 실현시킨 것이다. 원래는 엄두를 못 냈었는데 그 당시 러시아 마피아가 부산에서 총기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한국에서 총기 액션을 시도해도 리얼리티에 위배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해졌다. (장 피에르) 멜빌과 <킬 빌>의 중간에 위치한, 그런 액션을 시도하고 싶었다.

메이저와 마이너


나는 영화를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지 않고 진짜와 가짜로 나눈다. <패왕별희>(첸 카이거)와 <터미네이터 2>(제임스 카메론)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을 때 다들 ‘예술영화’인 <패왕별희>를 좋아하고 ‘상업영화’인 <터미네이터 2>를 싫어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터미네이터 2>가 <패왕별희>보다 진실하게 느껴졌다. <패왕별희>는 뭔가 과시적이고 예술가연하는 영화 같았다. 반면 <터미네이터 2>는 영화의 목표와 창작자의 태도가 정확하게 밀착해 있는 영화였다. 그래서 <터미네이터 2>가 더 좋다. 대기업 CEO와 작은 식당의 주방장의 직업 간 우열을 가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차기작


어느 순간 내가 ‘누아르’ 장르를 계속 변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밀정>은 그런 맥락에서 ‘콜드 누아르’로 만들어 보려 한다. 이전까지와는 달리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라 더 진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영화가 나올지 오히려 더 기대가 된다. 빛으로 나왔다 다시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사람, 또는 역에 잘못 내린 남자의 입김 같은 영화라고 컨셉을 잡았다. 이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지금부터 알아가려 한다.

참고로 내가 금연 이후 처음 만든 영화다. 금연이 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영화 잘 나오면 계속 금연하려 한다(웃음).


정리ㅣ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ㅣ 장혜진